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33
Chapter.9 스타 폴(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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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 여우 같은 영감. 구렁이 삼천 마리를 삼킨 종교쟁이 같으니! 어어 하는 사이에 또 목줄을 걸어버리네!”
워낙 충격적인 야사를 들었던 터라 임명이고 나발이고 멍하니 받고 나온 교수는 대주교의 집무실에서 내려와 신전을 나가는 그 짧은 사이에 벌써 사제들 사이에서 [교단 공인 이종족 친선대사, 용사 교수] 같은 말이 떠도는 것을 듣고 분을 삭이고 있었다.
“그냥 ‘교수는 자유로운 용사에요! 그레고리오님이 제게 현역 부적합 판정을 주셨어요!’ 하고 날라버리면 될 것을 기어이 교단 소속으로 만들어버리다니! 아이고 박교수야! 너도 한참 멀었구나! 노친네 감정팔이에 당해서 이걸 묶여버리네!”
– Jokass : 도비는 자유로운 집요정이에…. 어라? 이 목줄은 대체?
– 뉴트리아지나 : 진짜 귀신같다. 혓바닥이랑 잔대가리 놀리는 거로는 내가 봤던 사람 중에서 넘버원인 박교수를 그냥 보쌈해서 묶어버리네.
– 노루Drug해요 : 뭔가 엄청나게 끔찍한 것을 본 기분이야. 세파에 닳을 대로 닳아 선동과 날조가 극에 달한 70세 박교수를 본 것 같다고….
– 스피드 웨건 : 3월드 광명교단 대주교 과거사 정도면 상당히 고급 정보인 듯. 사제 플레이 하려는 놈들은 이것만 참고해도 꽤 도움 됨.
– 홀리 : 어…. 대주교님 과거사가 플레이에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는데요?
– 무카바 : 감성팔이는 천하의 박교수도 홀리는 개쩌는 치트키라고. 대주교가 있는 근처에서 얼쩡거리다가, 새벽같이 일어나서 예배당 박박 닦고 절뚝거리면서 돌아다니면 대주교가 그냥 지나칠까, 아니면 말이라도 한번 걸어볼까? / ‘자네는 어찌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예배당을 청소하는가?’ / ‘아, 그게…. 부끄럽지만…. 아침에 일어나 졸린 눈으로 인사하는 형제들을 보는 것이 기꺼워서 그렇습니다, 헤헤….’ / ‘ 샤, 샨달로 사제! 이럴 수가! 광명이시여!’ / 딱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 홀리 : 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 무카바 : 박교수 하는 걸 봐. 이 게임은 그 정도 머리는 굴러가야 해먹을 수 있음.
– Jokass : ㄹㅇ. 천류제급 개또라이 신컨이 아니면 여의도 입성하는 국회의원 수준의 각오를 다지고 플레이 해야함.
– takealook : 그러고 보면 천류제 그 인간도 참 난놈이야. 정치질 한번 없이 노 파밍, 개인 수련만 죽어라 해서 최단시간 3월드 클리어라니. 걔도 리얼리스틱으로 돌리지 않았음? 도대체 뭐하는 인간이야? 지금 뭐 하는지 아는 사람?
– 스피드 웨건 : 돔에서 천류제의 노파밍 쓰레기 클리어 시드를 무슨 4월드 선 진입 입장권처럼 포장해서 랭커들한테 비싸게 팔아줬는데, 덕분에 그 돈으로 놀고먹는 걸로 암. 근황은 스폰 하는 돔만 알고 있다는데, 뭐 하는지는 모르고 가끔 지가 만든 칼 같은 거 거래소에 올리는 건 확인됨. 요즘 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수준급 도검장이라 걔 서명인 ‘千’ 자 들어간 칼은 기본 입찰가가 400만은 넘음.
– Jokass : 400? 시발 가끔 스캐빈저들이 유적 대박 터트려서 나오는 구시대 레이저 블레이드가 500만 선으로 거래되지 않음? 그마저도 돔이 렙터한테 안 주려고 무지성 상회입찰 해서 거품 미친 듯이 낀 가격인데, 사람 손으로 두드려 만든 칼이 400만? 칼 잘쓰는 놈은 칼도 잘 만드는 건가?
– 스피드 웨건 : 도검류 퀄리티는 전문분야가 아니라 잘 모르지만 천류제가 만든 칼로 단분자 커터랑 다이까는 영상은 있음 [링크] . 단분자 커터가 두동강 나고 천류제 메이드는 날 조금 나갔더라.
– 노루Drug해요 : 시발 사기캐 새끼. 그 새끼는 분명 회빙환 출신일거임. 우린 전부 통속의 뇌고 그 새끼만 999999번째로 이 멸망한 세계를 플레이하고 있는게 틀림 없어!
‘부럽다. 나도 정치질 안 하고 그냥 실력으로 다 썰어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채팅창에 올라오는 랭커 천류제의 근황을 들으며 교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신전에 들어올 때의 의심 어린 시선이 나갈 때는 존경과 선망으로 바뀌는 것을 보면서 깨달았다. 내가 당했다는 걸.
“저딴 식으로 소문을 내버리면 내가 뭘 하든 ‘교단의 이름으로 용사 박교수가 마을을 구했다!’ 같은 식으로 퍼지니까. 교단 공적치는 팍팍 올라도 히로익 포인트는 절반도 안 들어올 게 뻔하지. 그냥 옛날 얘기 시작할 때 눈 딱 감고 뛰쳐나왔어야 하는데!”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처음 들어갔을 때는 보상 뭐 줄까 기대하느라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엉덩이 붙이고 있는 동안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과거사를 꺼내 들더니, 가슴이 먹먹해져서 우물쭈물하는 사이 냉큼 머리 위에 기름을 부어버렸다. 치트키야 저거. 나이 지긋한 노인의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과거사라니. 사이코패스도 한 번쯤은 돌아볼 만한 소재라고.
일행이 있는 여관으로 돌아가는 동안 한껏 투덜거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광대역 인간 통신기인 광명 교단의 사제들을 통해 공인된 소식이니. 개인 자격으로 움직일 때보다 여러모로 귀찮긴 하겠지만, 기왕 공식 특사 자리 얻은 거 잘 써보는 수밖에 없었다.
“뭐야? 싸움 났나?”
홈리스 귀족이 가득한 거리를 지나 여관으로 돌아오니 1층 주점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거의 다 박살이나 나달거리는 스윙도어를 조심스럽게 밀고 들어가자, 수염이 허옇게 센 노인과 염색인지 자연인지 붉은 머리칼과 수염을 가진 화상투성이 노인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싸우고 있었다.
“거 여자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아다 새끼 같은 불덩이 놈이 말은 청산유수로구나! 그 혓바닥 놀리는 것만 잘 깨달았어도 수계 마법사로 대성을 했겠어!”
“아아? 내가 나이는 먹었어도 귀는 밝은데, 괴물 새끼한테 탑을 통째로 날려먹은 반푼이가 하는 소리라 그런가 잘 들리지 않는데? 그러고 보니, 거기 마법사 중 한 명은 속옷만 입은 채로 그 붉은 뮤트에게 붙잡혀 탑에 대롱대롱 매달렸다지? 부끄러움도 모르고 엉엉 울며 살려달라고 외치며! 자네야말로 우리 화염계열 마법을 배웠으면 아주 대성했겠어! 그런 부끄럽다 못해 자연 발화해버릴 정도의 수치스러움을 꿋꿋하게 견뎌낸 것을 보면 말이야!”
촤아아악!
“네 이노오오옴! 감히 그 일을 입에 올리다니!”
화르르륵!
“하는 일도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건 창녀의 품에 안겨 해죽거리는 네놈들이 아닌가!”
“바다의 하해와 같이 그 넓은 품을 그따위로 모욕하다니!”
“먼저 모욕을 한 것은 네놈이었어!”
“남의 것을 탐하는 장작 놈 주제에!”
순식간에 두 노인의 주위로 모여드는 물의 장벽과 새빨간 불길에 여관 주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카운터 너머에서 손가락만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었고,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던 사람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조용히 담소를 나누며 그 둘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 맞다. 아참, 그러고 보니 여관에 있는 사람은 못해도 용사 일행이거나 끝발 있는 귀족이지?’
돈을 바리바리 싸들고 온 귀족들이 거리에 나앉아 있는데, 여관에 있는 이들은 못해도 그들 이상 되는 지위는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란 소리였다. 마법의 여파 정도는 웃으면서 쳐낼 수 있는 이들이 득실거리는 여관. 확실히 지금의 킹스랜드는 이질적이다 못해 기괴할 정도다.
“오트만! 거기서 뭐 해요!”
내가 부르는 소리에, 금방이라도 주점을 물바다로 만들어버릴 것 같던 마법사 노인이 환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오오오! 교수! 마침 잘됐군! 안 그래도 이 경우 없는 불쟁이 놈들과 시비가 붙어 어찌해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시비? 놈들?”
대충 슥 둘러보니 견적이 나왔다. 정신쇠약이 물어오는 정보가 주르륵 태그되어 있는 사람들. 대부분 물음표 투성이지만, 오트만의 눈앞에 있는 화염계열 마법사처럼 그 특징이 너무 눈에 띄는 사람들은 별다른 정보 없이도 그냥 태그가 달리기도 했다.
“어디보자…. 하나, 둘, 서이, 너이…. 다섯? 오트만 영감님 좀 치십니까? 딱 봐도 3위계는 넘어보이는 놈들 인대 5 : 1로 싸움을 다 거시고?”
“먼저 물을 흐린 것은 저놈들이었네! 알드리치랑 노툼은 수련한다고 공동묘지로 떠나고 보르카 그 친구랑 같이 있는데, 광명 교단에서 온 사람들이 수인족 노예가 어쩌고 하면서 그 친구를 데려가자마자 우르르 몰려와서는 창녀의 기둥서방이 비좁은 여관에서 싸구려 냄새를 풍긴다느니, 물비린내 난다느니 하는데 자네라면 참을 수 있겠나?”
“물 비린내는 알겠는데, 창녀는 무슨 소립니까?”
드르륵!
“그야, 특별한 고난도 없이 이놈 저놈 다 받아주는, 지조 없는 창녀나 다름없는 물의 특성을 얘기하는 것이지!”
“….뭐 씨발?”
내가 오트만의 곁으로 다가가자 기다렸다는 듯 화상투성이 마법사 노인의 뒤에 있던 붉은 로브를 입은 무리가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러니까…. 물은 아무나 다 대주는 창녀나 다름없고, 그런 물을 다루는 우리는 창녀의 기둥서방이다?”
“그렇지! 뇌까지 흐물흐물한 물쟁이 녀석이 제법 말귀를 알아듣는구나! 전쟁에 하등 도움도 되지 않는 네놈들 때문에 대 화염 마법사, ‘구르는 불꽃의 말쿠르’ 님이 길에서 주무셔야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느냔 말이다!”
이제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고위 귀족급은 안돼서 평민의 집이나 노숙,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데 우리 수계 마법사 오트만님이 여관이 있는 걸 보고 배알이 꼴리셨다?
“허허허허. 뭐 이런…..”
“당장 너희 물쟁이들이 머무는 비린내 나는 방을 우리에게 넘긴다면 이 무례는 없던 것으로-”
콰득!
“없던….어….”
“허허허허. 그러셨구나. 그런 좆논리로 맑고 깨끗하고 청량한 물을 창녀니 뭐니, 까내리면서 우리 파티의 숙소를 슈킹하려고 하셨구나아?”
푸스스슥!
늙은 화염마법사 옆에서 신나게 떠들던 화염 마법사는 교수의 손에 붙잡힌 바의 귀퉁이가 목재 조각으로, 목재 조각이 톱밥으로 변하는 놀라운 마법을 보고는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바, 바바리안? 마법사가 아니었나?”
“당연히 마법사지! 여기 있는 교수는 위대한 수계 마법, 리드플로우 학파의 2위계 마법사다! 교수! 어서 자네의 그 ‘잔혹하고’ ‘파괴적인’ 2위계 마법을 저들에게 보여주게! 어서!”
“당연히 그래야지요. 평생의 정인이나 다름없는 물이 창녀 취급을 받았는데. 당연히!”
안 그래도 팔다리를 자주 날려먹는 바람에 아예 웃옷 소매와 바지 무릎 아래를 찢어낸 옷을 입고 있는 교수가 위협적으로 근육을 꿈틀거리며 다가오자, 우물쭈물하던 붉은 머리칼의 젊은 마법사는 묘안이 떠올랐다는 듯 서둘러 입을 열었다.
“마, 마법! 그래! 마법사라면 마법전으로 승부를 가리자! 설마 마법사가 우아하지 못하게 육체적인 힘 따위를 휘두르진 않겠지!”
“맞다! 스승님, 제가 저 무례한 물쟁이를 혼내줄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오직 마법만을 사용해서’ 진정한 마법이 무엇인지 시비를 가려주도록 하겠습니다!”
“하이고, 북 치고 장구 치고 아주 지들끼리 다 하는구만 다 해.”
[달리는 망아지]여관의 주인이 그가 큰마음 먹고 장만한 고오급 엘프목 바의 귀퉁이가 교수의 손아귀에 ‘찢어’지는 것을 보며 소리 없이 절규하는 동안, 교수는 이 뇌가 다 익어 두부가 되어버린 마법사들을 어떻게 조져야 가슴 가득 응어리진 스트레스가 속 시원하게 풀릴지 고민하고 있었다.‘원래 수계 마법사와 화염계 마법사는 사이가 안 좋았지.’
그건 물과 불의 관계가 그래서 그런 거다, 같은 게 아니라 조금 더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이 두 마법사 집단의 불화는 물과 불에 대한 수련 방법의 차이에서 시작되었다.
수계 마법은 교수가 입문한 것처럼 ‘익사체 훈련’을 통해 산소가 차단되어 약간의 환각 상태에 가까운 상태에서 물에 대한 친근감을 쌓아 1위계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태아는 양수 속에서 9개월을 살았으니 죽는 순간이 되면 자연스레 그것이 떠오른다, 뭐 대충 이런 이론을 바탕으로 널리 알려진 수련법인데, 당연히 못 깨달으면 그대로 익사체가 되기 때문에 상당히 악명이 높고, 그만큼 1위계에 입문에 성공하는 마법사가 다른 계열 학파에 비해 극단적으로 적은 편이다. 대신 1위계에 입성하며 물에 대한 애착이 생겼다면 그다음 2, 3위계 까지는 손쉽게 가는 장점이 있다. 물이 좋아서 어찌할 줄 모르는 상태가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음 깨달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쉬워진 것이다.
반면 화염계열 마법사는 수계 마법사처럼 불구덩이에 던져 넣거나 할 수 없다. 익사체 훈련은 기절하면 끌어올려서 인공호흡이라도 하지만, 불구덩이에 넣어 버리면 홀라당 타버려서 살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으니까.
그래서 화염계열 마법사들은 새로운 입문자가 있다면, 특별한 마법이 상감된 철판 위에 그들을 올리고 민간인이 버틸 수 있는 한계에 가까운, 미지근한 불꽃을 만들어 그들을 ‘익힌다’. 그 온도에 익숙해지면 조금 더 뜨겁게. 익숙해지면 더더욱 뜨겁게. 그렇게 해서 불꽃의 열기에 조금씩 다가가며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살면서 겨울의 추위를 막아내는 장작불과 어둠을 밝히는 횃불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화염 계열 1위계 깨달음을 얻은 마법사는 다른 계열에 비해 훨씬 많은 숫자를 자랑한다. 하지만 수계 마법사와는 반대로 그들은 점점 더 높은 온도, 불꽃을 넘어서 청염, 백염, 순수한 불의 마나로 치환된 불꽃 속에서도 타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끝없이 스스로를 구워야 하기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1위계 마법사에 비해 고위 마법사의 숫자가 적은 편이다. 열심히 수련하다가도 평소보다 살짝 욕심을 내는 순간 뇌가 익어버리면, 그대로 끝인 것이다.
이런 전혀 다른 수련법 덕분에, 수계 마법사는 그들의 깨달음을 ‘연인이 된 물과 교감하는 과정’ 으로 비유하고, 화염계열 마법사는 ‘끝없는 구애를 통해 저 천상의 열기를 간직한, 도도한 연인에게 조금씩 다가가는 구애자’ 로 스스로를 비유한다.
수계 마법사는 죽을 걱정 없이 1위계에 손쉽게 안착한 화염 마법사를 업신여기고, 화염 마법사는 한번 마법사가 되면 수련 중에 크게 죽을 위험이 없는 수계 마법사를 질투하다 보니 저런 비유를 비틀어 ‘아무에게나 내밀한 품을 내어주는 창녀를 연인으로 둔 수계 마법사’와 ‘여자한테 제대로 고백도 못하는 얼간이 화염 마법사’ 로 서로를 비하하게 된 것이다.
오늘 접속하기 전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온수 샤워에서 ‘잃어버린 어머니의 품을 되찾은 것 같은’ 감정을 느꼈던 나로서는, 절대 좌시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뚜둑! 우드득!
‘고위 귀족과 귀족이나 다름없는 용사들이 잔뜩 있는 주점. 여기서 실력을 선보이면 히로익 포인트가 좀 올라가려나? 왕처럼 지위가 높은 이는 분명 더 높은 계수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잘하면 꽤 짭짤하게 벌겠는걸?’
마음 속의 저울추가 ‘그냥 두들겨 팬다’ 에서 ‘결투를 통해 두들겨 팬다’ 쪽으로 점점 기울어가는 것이 느껴지자, 일단 상대방이 뒤로 물러나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자리가 탐나셨다? 그런데 어쩌나? 자리를 주고 싶어도 ‘급수가 안 맞아서 숙소를 배정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넘겨주기에는,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이 좀 부담스러운걸? 우리가 인정을 베풀어 내놨다가 그게 선례가 되어 다른 떨거지들이 여기 용사님들에게 달라붙으면 어떡해?”
“크흐으으! 우리 화염 마법사가 날것만 처먹는 비린내 나는 네놈들 보다 못하다는 소리냐!”
“내가 그런 게 아니라, 로드릭 왕국에서 그런 식으로 공인해버렸다니까? 우린 여관에 숙소를 주고, 너네들은 길바닥에서나 자라고 내버려 두고. 왕국에서 증명해 줬다고.”
“모욕이 도가 넘었구나! 참을 수 없다! 네놈도 저 노마법사의 제자 같으니, 제자는 제자가 상대하는 게 당연한 수순인 법! 나 ‘창염의 말쿠르’님의 수제자, 세브람이 네놈에게 마법사 결투를 신청하겠다!”
세브람인지 세브란스인지 하는 마법사가 주머니에서 꺼낸 장갑을 던지자,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던 주점 손님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오오오오!”
“결투다!”
“크하하하! 주점 안으로 화염 마법사들이 들어올 때부터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지! 난 덩치 쪽에 1천 실링 건다! 기세가 좋군!”
“글쎄.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마법사 결투라면 육체적인 수련에 중점을 둔 덩치 쪽이 당연히 불리하겠지. 청염의 마법사에게 천 오백 실링.”
“싸움이다!”
“수계 마법사와 화염계 마법사가 붙었다!”
죄다 용사 아니면 고위 귀족과 그 호위기사로 이루어진 손님들이라 그런지, 묵직한 목재 탁자가 휙휙 치워지며 주점 한가운데 텅 빈 원형 공간이 생겨났다.
자연스럽게 내깃돈을 수금하는 하플링과 실성한 듯 ‘내 가게에서 마법사가 결투를…. 마법전이….’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는 여관 주인을 뒤로하고, 두 마법사가 원의 중앙에서 마주했다.
“흐흐흐흐…. 마법사 결투가 뭔지는 알겠지! 오직 마법만! 마법의 효과로만 상대에게 위해를 입힐 수 있는 결투다! 마법사라면 정정당당하게 마법만 사용해서….”
“대충 느낌이 그렇더라고. 뭐, 원하는 대로.”
“좋다! 지면 얌전히 숙소를 내놓고 물러나는 거다!”
‘그러고 보니 저쪽은 원하는 게 있어서 걸어온 싸움이었지?’
그냥 마법사를 후드려팰 생각만 가득해서 까먹고 있었다. 내기 결투면 이쪽도 뭘 걸어야 하잖아?
“으하하하!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군. 왜, 이제 길바닥에 나앉으면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는 건가?”
“있어 봐. 뭘 걸어야 네 녀석의 가슴속에 평생의 트라우마를 안겨줄지 고민 중이니까.”
잠시 생각을 하던 교수는 어느새 숫자가 가득한 양피지와 두둑한 은화 주머니를 들고 테이블 위에 올라선 하플링을 보며, 꽤 괜찮은 방법을 떠올렸다.
“자아, 안녕하십니까! 아시는 분도 있고 모르시는 분도 있지만, 인사드리겠습니다! 페오닐 공국 출신, 하플링 ‘회색 발바닥’ 피오닐입니다! 오늘의 스페셜 이벤트는 제가! 심판을 보도록 하지요!”
“워후우우우!”
“싸구려 여관 주제에 제법 괜찮은 볼거리를 준비했잖아!”
“불마법사! 너한테 5천 실링 걸었다! 아주 바싹 구워버려!”
“양측!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붉은 깃발! 화염계 3위계 마법사! 공격마법으로는 견줄 곳이 없다는 ‘론 플레임’ 학파에서 온 마법사, 세브람! 결투 보상은 수계 마법사 일행이 가지고 있는, 이곳 달리는 망아지 여관의 숙소입니다! 그리고-”
타닥!
테이블 위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치던 하플링은 재빨리 내 어깨 위로 뛰어올라 속삭였다.
“이봐, 수계 마법사! 이름과 학파, 소개하고 싶은 거랑 내기 보상을 얘기해!”
“….넌 누구냐?”
“내기 수수료 10%에서 절반을 떼어줄게! 간 볼 시간 없어! 관객들이 기다린다구!”
오. 척하면 탁 이군. 스트레스도 풀고 돈도 주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2위계 리드플로우 학파 교수다. 특별히 얘기하고 싶은 건 없고 보상은….”
소근소근.
“….뭐? 정말 그걸로 괜찮아? 교단 사람이었어?”
“그래. 그거면 충분하니까 가서 빨리 알리기나 해.”
“생각보다 신앙심이 투철한 녀석이었군. 나야 상관없지 뭐.”
별 특이한 녀석을 다 보겠다는 투로 말한 하플링은 가볍게 공중제비를 넘어 원래 있던 테이블 위로 돌아갔다.
타닥!
“푸른 깃발~ 리드 플로우 학파 2위계~ 완벽한 육체와 완벽한 정신의 조화를 추구한다! 교수! 결투 보상은 어…. 지금 세브람 마법사를 포함한 화염계 마법사 일행이…. 에…. 광명 교단의 성기사단장, 팔라딘 그레고리우스 님을 찾아가 ‘교단의 용사 교수의 소개로 찾아왔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달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광명 교단의…. 성기사단장?”
“교단의 인물이었나? 성력은 느껴지지 않는데….”
“화염계 마법사에게 매우 좋은 조건이 아닌가? 어차피 뮤트와 벌어질 전투에 참전하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성기사단장 씩이나 되는 인물과 연줄이 생기다니….”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는 것도 좋지만 큰 뒷배가 없다면 교단의 작전에 참여하는 게 당연히 이득이겠지. 교수라는 용사가 쓸만한 마법사를 교단 측에 스카웃 하려고 하나보군.”
“광명 교단은 광역 공격 마법은 부족하니까. 충분히 일리가 있어.”
웅성웅성!
수근수근!
내 조건이 공표되자 관객들은 물론, 눈앞에 있는 마법사와 그의 무리까지 당황하는 게 눈에 보였다.
“이, 인정을 베푼다고 내가 봐줄 것이라 생각하지 마라! 이길 것 같지 않으니 얕은 수작을 부리는구나!”
“흐흐흐.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싶으면 생각하시고.”
“자아아, 양 선수, 준비되셨습니까~!”
파박!
하플링이 손을 들어 올리자, 세브람은 멀뚱히 서 있는 교수와 달리 재빨리 뒷걸음질 쳐 원형 공터의 끝 부분으로 물러났다.
“명예로운~ 결투가~ 되시길! 시작!”
“[화염구]!”
화르륵!
손이 내려가자마자 세브람은 영창 없이도 사용 가능한 화염계 기초마법, 화염구를 교수에게 쏘아냈다.
‘전투에 앞서 거리를 벌리고, 큰 주문이 아니라 가장 빨리 시전 가능한 마법을 쓴다. 아예 싸울 줄 모르는 놈은 아니군.’
화염 마법의 특징은 확장. 첫 주문으로 만들어낸 불씨로 더 큰 불을 일으키고, 그 불을 촉매로 더 고위 주문을 사용하는, 마치 그들의 수련법과 같은 방식이다.
‘음…. 가운데 좀 이상한 마나가 섞여 있는데. 깨달음과 관련된 거겠지?’
마법사의 눈으로는 상당히 빠른, 그러니까 수준급 전사의 감각으로는 한없이 느린 화염구를 바라보며 교수는 오른손을 들었다.
“[블러드 아머]”
푸슉!
순식간에 올라온 피의 건틀릿이 그의 팔을 뒤덮었다.
‘분명…. 마법의 효과로만 전투해야 한다고 했지?’
지척까지 날아든 어른 머리통 만한 불덩어리를 보며, 교수는 건틀릿을 낀 손바닥을 펴 불꽃을 막아냈다.
콰앙!
“으하하하! 멍청하게 굳어버린 꼴이 우습구나! ‘확장’과 ‘폭발’의 깨달음이 가미된 화염구다! 감히 수계 마법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쿠어어억!”
철-썩!
쿠당탕탕!
단순한 화염구가 아니었는지 손에 닿은 화염구가 터져나가며 블러드 아머가 충격에 요동치고, 폭발과 동시에 마법사의 앞으로 단숨에 도약한 교수의 오른손이 힘껏 그의 뺨을 후려쳤다.
접촉 순간 작은 불꽃의 고리가 일어나 붉은 건틀릿을 막아섰지만, 충격을 다 해소하지 못했는지 몇 바퀴나 옆으로 구른 세브람은 몸을 일으키며 한 손으로 퉁퉁 부은 볼을 감싼 채 교수에게 삿대질을 하며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규, 규정 위반이다! 네놈은 마법이 아닌 폭력을 사용했어! 심판! 마법사 결투 룰에 의하면 이것은 분명한 반칙! 당장 저놈에게 반칙패를-!”
“아닌데? 내가 쳤으면 지금 니 머리가 저 성문 밖까지 날아갔어 임마.”
교수는 세브람의 말을 끊으며 그의 오른손에 붉은 건틀릿을 흔들었다.
“블러드 아머. 내 오리진 스펠이고, 효과는 피를 소모해서 받은 충격을 흡수하고, 뒤로 방출하는 것. 난 너 안 때렸다? 그저 네 마법이 폭발하는 순간, 블러드 아머가 충격을 방출하기 직전에 네 뺨 옆에 내 손을 둔 것뿐이라고?”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마법도 있는 법이지. 세상에 존재하는 마법사의 숫자만큼 마법이 존재한다는 말도 있잖아?”
뺨을 감싸고 다시 거리를 벌리는 화염마법사를 보며, 나는 건틀릿을 낀 손을 까딱 까딱 흔들었다.
“아침에 먹어봤는데 이 집 스튜 잘하더라. 부드럽고 뭉근한 게, 이빨이 모조리 빠져도 충분히 먹을 수 있겠더라고.”
“그,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
“오우, 상관이 있지 상관이 있고말고.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 생각이니까.”
필사적으로 손끝에 불을 피워 올리는 마법사를 보며, 교수는 바닥에 떨어진 작고 하얀 것을 주워들었다.
“우선 한 개고, 앞으로 서른한 개 남았다?”
교수가 주워든 것은, 방금 빠진 화염 마법사의 앞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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