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36
Chapter.9 스타 폴(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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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데드?”
“그래, 언데드. 블루라인에는 언데드가 아주 득실거리거든.”
“하지만 언데드가 그렇게 많다면…. 교단에서 가만히 내버려 두겠소? 광명이든, 풍요든, 5대 교단중 누군가가 나서서 정화했어도 진즉에 했을 것 같은데.”
보르카가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70년 전 언데드의 준동으로 벌어진 암흑 대전 이후 교단은 물론 각국의 왕가, 영지 귀족마저 언데드라면 치를 떨었으니까. 인류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그날의 기억은 피 튀기는 영지 전 후에도 양측이 전장 정리를 하게 만들었으며, 조금이라도 사기가 모이거나 반쯤 부서진 스켈레톤이라도 발견되는 순간 그곳으로 중무장한 성기사단이 무더기로 뛰어들게 만들었다. 이곳 3월드의 양지는 물론 음지의 대부분에도 언데드가 설 자리는 없었다.
딱 하나, 블루 라인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가진 산맥을 제외하고는.
“이건 좀 설명을 해주어야 할 것 같군. 보르카의 부족은 인간 세상과 동떨어진 곳에 살았으니 잘 모를 수도 있지 않나.”
보르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오트만이 내 말을 받아서 이었다.
“블루 라인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마나가 풍부한 지맥이 솟아올라 만들어진 영험한 산맥이지. 온갖 마나가 풍부한 식물과 광물 등 마법사, 연금술사들이 탐내는 재료가 넘쳐나는 곳이지만 그 마나의 영향을 받은 몬스터들 때문에 기사급 무력을 가지지 못한 이는 출입도 하지 못하게 하던 금지였다네. 그런데 70년 전, 암흑 대전 당시 대 흑마법사, 검은 구름의 카르칸 데마누스가 그 지맥, 세간에는 용맥(龍脈)이라 불리는 대지의 줄기를 건드리며 블루 라인의 일부가 오염되고 말았지. 그의 손에서 뿌리내린 강력한 흑마법은 용맥의 가장 깊숙한 곳에 파고들어 그 지류를 오염시켰으며, 지맥을 타고 흐르던 마나의 강물은 그 흑마력에 오염되어 지면을 사이한 흑마력이 모여드는 곳으로 만들었다네.”
“흑마력이 고이는 마력지대라…. 상당히 강한 언데드가 있겠소.”
“이를 말인가. 온갖 몬스터와 동물의 스켈레톤이 떼를 지어 다니고 유령형 몬스터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몰려다니며, 70년 전에도 보기 쉽지 않았던 데스 나이트나 듀라한, 셰도우 와이트등 고위 언데드가 군단을 끌고 사람을 습격하는 곳이 되어버렸네. 교단에서도 용맥 깊숙한 곳에 파고든 흑마력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정화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결과 블루 라인은 고위 언데드를 포함한 흑마력 지대와 그 흑마력 지대에서 영역을 옮긴 마나를 사용하는 강력한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비 흑마력지대로 나뉘었지. 어느 쪽이든 웬만한 기사단이라도 깊숙이 들어갔다가 살아나오지 못하는 험지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네.”
“대충 알겠지? 엘프의 숲보다 거리가 훨씬 먼 동부 사막국가의 교역품이 엘프제 물품보다 싼 이유야. 대부분 엘프제 물건들은 블루라인 너머에서 바람계열 마법사들이 천으로 만든 기구에 실어 산맥 위로 날려 보내서 넘겨받거든. 운송비가 엄청나.”
“과연. 단순히 탐욕스러워서 그렇게 교단의 보급고를 헤집었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
“그럼 그럼! 다~ 뜻이 있었다, 이 말이야!”
보르카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널브러진 짐을 주워담았다.
“그럼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지?”
“으음…. 아마 레이 라인(ray line)으로 불리는 길을 따라가지 않을까, 하네. 블루 라인에서도 용맥의 기운이 덜 솟아오르는 곳인데, 5대 교단에서 이곳 표면을 주기적으로 토벌, 정화해서 그나마 좀 다닐만하거든. 내 말이 맞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습니다.”
“음?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아시다시피 우린 세계수가 있는 엘프의 숲 중심부로 가야 하는데 아무도 그게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거든요. 교역품은 바람의 마법사들과 약속된 장소에 실피드가 실어다 나르고. 제대로 된 위치는 엘프들 밖에 모르는데, 로드릭 인근에는 하도 납치가 성행해서 엘프들의 씨가 말랐으니.”
나는 재빨리 지도를 꺼내 목탄으로 킹스랜드에서 레이 라인 중심부까지 선을 죽 긋고 나서, 빨갛고 까만 X표가 가득한 블루 라인 산맥의 중심부로 그 선을 획 꺾었다.
“저희는 이곳, 블루 라인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추방된 엘프들의 마을’으로 갈 겁니다. 거기서 안내인을 구해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로 엘프의 숲을 찾아갈 거고요. 그게 제일 빠른 길입니다. 말도 안 되게 넓은 엘프의 숲은 온갖 정령들이 만들어놓은 환상 때문에 들어가서 걷다 보면 도로 입구로 나오기 십상 인대다 정확한 길을 찾았다고 해도 엘프들이 쳐놓은 정령 결계를 뚫으려면 보통 마법사, 정령사 수준으로는 몇 날 며칠이 걸릴지 모르거든요. 그동안 엘프들이 가만히 있으리라는 법도 없고. 가장 정석적인 방법, ‘엘프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렇….구만. 그럼 저 레이 라인에서 지금 자네가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안전 구역을 벗어나 블루 라인 산맥의 능선을 따라 횡단한다는 건가?”
“그렇죠.”
“지금 목탄으로 그어놓은 선에 걸린 X 표만 9개가 넘는데?”
“산세를 따라 굽이굽이 넘어가야 하니 조금 더 겹칠 겁니다.”
“그 영역에 ‘망령 삼 기사’ 나 ‘여덟 번 죽은 와일드 캣’, ‘반룡(半龍) 카르타니카’ 같은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놈들의 영역도 포함되어 있는데?”
“영역 변동이 없다면 ‘부패의 후예 거트루그’도 포함될 걸요? 용만 피하고 나머지는 돌파할 겁니다. 알드리치, 설마 쫄았어요? 이쪽엔 광명의 용사와 영혼술사가 둘인데? 언데드 상대로는 이만한 전력도 드물다구요?”
“자네는…. 광명의 용사라고 보긴 좀 그렇잖나?”
“그래서 이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온 거 아닙니까.”
나도 알지. 내가 광명의 용사라기엔 신성력 쪼가리도 쓰지 못하는 물리 물속성 용사라는거.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털어왔잖아?
파각!
교수는 온 얼굴에 ‘가면 개죽음이야-’ 라고 써 붙여 놓은 듯한 알드리치의 발 앞에 손에 들고 있던 ‘한 줌의 빛’의 상단 봉인장치를 부숴 던져주었다.
짜각, 짜각, 짜각.
“음? 이게 무슨-”
쩌걱. 번-쩍!
“우와아아아악!”
미리 장치된 갈고리가 봉인 장치를 파고들며 불안정해진 ‘한 줌의 빛’은, 그 내부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는 듯 수십개의 잔금을 내며 갈라지더니 이내 엄청난 빛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 누운! 으아악 내 눈!”
“그르르륵! 눈이! 대장! 이게 무슨 짓이오! 앞이! 앞이 보이지가!”
“뭐긴. 아무것도 모르고 쓰다가 전투상황에 눈뽕 당하는 것보다는, 미리 겪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이야. 자고로 몸으로 직접 겪어봐야 전투 상황에 [섬-!] 까지만 들어도 눈을 질끈 감을 수 있거든.”
농담 아니다. 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교육이라는 말씀.
한 줌의 빛. 일명 신성 섬광탄은 광명 교단에서 제일 인기 있는 고유 아이템 중 하나다. 간편하고 익숙한, 수류탄을 닮은 사용법. 과거 유명한 모 게임에 등장한 ‘할X루야 폭탄’ 을 닮은 향수가 느껴지는 디자인. 즉발성 실명 및 언데드를 대상으로 강한 신성 데미지를 주는 훌륭한 효과까지!
풍요의 교단이 맛있고 배부르고 영양 넘치는 ‘추수절 포션’으로, 용기의 교단이 전투 직전 머리위에 들이붓는 대야만한 버프 종합성수 ‘용기의 세례’로, 지혜는 착용하면 사악한 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탐사(探邪)의 서클릿으로, 자비는 땅에 박아 넣으면 그 인근에 꾸준히 슬로우 힐을 제공하는 ‘기도하는 자의 성역’ 같은 고유 아이템으로 유명하다면 광명 교단은 빛을 섬기는 교단답게 신성 섬광탄, 혹은 로-하람의 눈뽕으로 불리는 이 한 줌의 빛이 교단을 대표하는 아이템인 것이다.
“눈이! 눈이 타는 것 같으이! 물! 어서 물을!!!”
“그워억! 눈 아푸다! 부이툼과 친구들 고향간다! 성불한다! 냇가에 끌려가는 어린 트롤같다! 그우워억!”
음, 효과 죽이는구만. 기본적인 상태이상 내성이 높은 트롤에게도 저 정도 효율이라니. 역시 믿고 쓰는 광명 교단제 섬광탄이다.
“아무튼 효과는 다들 아시겠죠? 체력과 마나는 진짜배기 언데드나 영수(靈獸)급 몬스터를 위해 남겨두고, 나머지 잡 언데드는 이걸로 처리하면서 뚫고 나가는 겁니다. 질문 있는 사람?”
“으으으으…. 제정신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만….”
“‘한 줌의 빛’ 이라는 물건에 대한 소문은 들었네만, 이정도 일 줄은….”
다들 투덜대기는 했지만, 지도만 보고 있을 때보다는 한결 희망찬 얼굴이었다. 직접 경험해본 만큼 저게 얼마나 위력적인 아이템인지 알아본 것이다.
“다- 생각하고 준비한 겁니다. 인류의 명운이 걸린 전쟁이 코앞인데 한시라도 낭비할 시간이 있나요. 최단거리로 최대한 빠르게 가야지. 출발합시다. 마경(魔境)이라 불리는 블루라인 산맥의 유일한 통로, 레이 라인이 위치한 에스타니크 마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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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타니크 마을은 수도 킹스랜드에서 정서 쪽으로 쭉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나오는 마을이다. 가는 도중에 특별히 험지도 없고, 큰 마을도 없이 작은 숲과 언덕만 몇 개 넘어가면 되는 지루하고, 평화로운 길.
에스타니크까지 가는 일주일 간의 여정은, 그런 편안한 길이였어야 했다.
까악, 까아악!
타닥, 타닥-
“제기랄, 끝이 없군. 코가 또 마비되었소. 교대 부탁하오, 대장.”
“그래. 고생했다 보르카.”
척후 역할을 하던 보르카가 코를 싸매고 인간 폼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며, 나는 수레에서 내려 일행보다 열 걸음 정도 더 앞으로 나섰다.
감각을 집중하고 시야를 넓게 잡는 것과 동시에 물밀듯 밀려오는 온갖 정보의 향연들.
띠링-!
[부러진 목책 : 기병 전술 대응용. 강한 충격에 의해 부서짐.] [세 갈래로 날카롭고 깊게 파인 땅 : 끝이 좁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할퀴고 지나간 듯한 흙더미. 형태로 보아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은 발톱 자국과 흡사함.] [타들어가는 인골 무더기 x N : 대부분의 뼈가 부서지고 유실되어 정확한 숫자는 추정 불가. 희미하게 마력의 잔향이 남아있음. 마법을 이용하여 완벽하게 소각한 것으로 보임] [땅에 박힌 바위 : 곳곳에 비슷한 바위가 박혀있음. 현존하는 투석기로는 사용이 불가능한 크기이나, 박힌 형태와 주변 흙의 상태로 보아 상당히 먼 거리에서 발사된 것으로 보임.] [피가 잔뜩 스며든 땅 + 기묘하고 거대한 구덩이 : 확인된 정보(말 발자국 + 풀 플레이트 메일 부츠 자국 + 방패를 이용한 방진의 흔적 + 유난히 집중된 혈흔)를 토대로 이곳이 인간측 진형의 중심부였음을 확인. 다른 흙과 달리 구덩이 안쪽은 말라붙다 못해 탄화되어 있으며, 거대한 무언가를 강력한 힘으로 휘둘러 일격에 진형을 박살낸 것으로 보임. 안쪽의 경사지게 파인 부분과 흔적은 누군가 그 일격을 막아내려 시도했던 흔적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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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전선은 정말…. 상상 이상이었던 모양이군.”
마법적인 방법으로 태웠는지 아직 까지도 잔불을 튀기며 타들어가는 인골 무더기.
붉은 색 피와 온갖 뮤트의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 조각난 목책과 그 앞에서 핏물이 썩어들어가 구더기가 들끓는 해자.
지도상에 작은 숲이 있다고 표시된 곳은 거대한 입을 가진 괴물이 베어먹은 것처럼 싹둑 잘려나가 있었고, 마법의 폭격에 땅 거죽이 뒤집어진 곳, 아랫 부분에 피가 잔뜩 튄 바위가 비석처럼 박혀있는 곳, 오러가 깃든 검격과 발톱 자국에 땅이 바둑판처럼 조각나 있는 곳이 온 사방에 널려있었다.
지난 일주일 간, 서부로 가면 갈수록 더욱 심해진 광경이었다.
까아악! 까아아악!
“내가 미신을 믿는 사람이 아닌데, 저 까마귀는 참말로 재수가 없군그래. 이보게 알드리치, 혹시 저 까마귀가 뮤트의 수하일 가능성이 있나?”
“흐으음…. 일단 영혼 자체는 깨끗하군. 저렇게 악을 쓰는 것은 배가 고파서야.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소문난 잔치에 찾아왔는데, 냄새는 끝내주게 피우는데 먹을 게 하나도 없으니.”
알드리치는 [소울 아이(Soul eye)] 주문의 영향으로 푸른 귀화(鬼火)가 피어오르는 눈을 하고 하늘을 배회하는 까마귀를 관찰했다.
“인간 쪽은 손에 닿는 시신은 전부 회수해서 불태워버리고, 뮤트도 마찬가지로 죄다 회수해서 먹어 치워버리니까. 시체가 남아있을 리가 없지.”
“그워억. 귀신 늙은이 스승. 저기 또 몰려온다.”
“뭐? 벌써? 으으음…. 정말이군. 어이 교수! 웨이브다! 다들 준비해!”
알드리치의 외침에 노툼은 끌던 수레를 내려놓고 작고 하얀 공깃돌 같은 것을 꺼냈으며 알드리치는 영혼 항아리를 열고, 오트만은 수레 위에서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타다닥!
“저 올라왔습니다! 멀리 까지 보고 오느라 좀 늦었네!”
“그웍. 큰 작은인간. 뭐 좀 보고 왔나?”
“불빛! 이번엔 잘못 본 거 아냐! 확실하게 사람이 피운 불빛이었다! 마을 근처까지 온 게 확실해! 이번 한 번만 더 막으면 에스타니크 도착이라고!”
“어쩐지 원혼의 행진이 점점 잦아지더라니. 망자들이 산자의 생기에 이끌러 마을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던 게로군. 우리가 이렇게 오면서 정리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겠어.”
“글쎄. 장담할 수는 없지. 이렇게 원혼이 나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마을 쪽에도 영향이 없으리라 생각할 수는 없지 않나? [워터 실드]”
끼리릭- 퐁!
오트만이 성수의 뚜껑을 따는 소리와 함께 주문을 외우자, 바닥에서 솟아난 물 사이로 흰색 선을 그은 것처럼 성수의 물이 섞여들더니 은은한 빛을 내는 물의 장막이 완성되었다.
“거 좀 기다리시라니까! 숨 좀 돌리고 합시다!”
“워터 실드 정도는 달리면서도 시전할 줄 알아야 하네.”
“으이익! [오, 오트만 보들레르의 워터실드!]”
촤아악!
그 위로 교수가 쥐어 짜낸듯한 목소리가 덧씌워지자, 물의 방패라기보단 허접한 소용돌이 뭉치 같은 게 오트만의 장막 위에 종기처럼 피어올랐다. 그 모습을 보던 오트만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자네…. 카피 스펠은 오리진 스펠의 반도 못 따라가는군. 아니, 내가 듣고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오리진 스펠인 블러드 아머같은 주문은 쑥쑥 뽑아내면서, 수계 마법사의 가장 기초 주문 중의 하나인 워터실드 하나 제대로 못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교육자로서 자괴감이 들 지경이로군!”
“집중이 안 되는 걸 어쩌란 말입니까! 저번에 노툼이 한눈팔다가 놓친 악령 무리가 이 성수 워터실드에 갈려 나가는 걸 봤는데! 머리를 쥐어 짜내도 방어의 이미지는 커녕 이 안에서 낮잠이라도 잘 수 있겠다는 생각밖에 안 떠오른다구요!”
“그러니까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마법은 그렇게 잘 떠올리면서 왜 직접적인 형태까지 있는 방패의 이미지는 못 떠올리냐는 거다! 일주일 동안 워터 실드 하나만 제대로 배워보자 내 그리도 부탁했거늘!”
“거, 뒤에 축축한 마법사 친구들은 슬슬 조용히 좀 해주시지. 지금부터는 노툼이 좀 집중을 해야 하거든?”
알드리치의 말에 오트만이 이마를 짚고, 교수가 다시 수인을 맺는 동안 수레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노툼은 그의 손 안에서 잘그락거리는 작고 하얀 공깃돌이든 목재 주머니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건 이곳에 오는 일주일 동안 알드리치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간이 영혼항아리로, 영혼술사의 영혼항아리 보다는 토템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영혼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것을 본 알드리치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급한 대로 노툼이 다룰 수 있는 임시 영혼항아리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겉을 감싼 나무는 전쟁터 한복판에서 피를 마시고 새순을 틔워내는 나무옹이로 만들었고, 안에서 잘그락거리는 하얀 공깃돌은 각각 노툼의 손가락 뼈 다섯 마디와 알드리치의 손가락 뼈 한마디를 뽑아 갈아 만든 것이었다. 트롤인 노툼은 포션의 도움을 받아 완벽하게 뼈까지 만들어낸 지 오래였지만, 인간인 알드리치는 그럴 수 없었다.
“그웍. 이런 거 없어도 영혼은 내 말 잘 들어준다. 괜한 짓이다, 귀신 늙은이 스승. 손가락 잘라서 이상한 악기나 만들었다.”
“흘흘흘흘! 받고 나서 한 번도 손에서 뗀 적 없는 놈이 그런 소리를 하느냐? 고마우면 고맙다고 말해라 이놈아. 이건 원래 영혼술사의 전통이야. 스승은 영혼술의 실에 들어선 제자에게 그의 영혼조각이 담긴 신체의 일부를 담은 영혼항아리를 만들어주지. 내 작은 욕심이라 생각해다오.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를 영혼술사의 스승이 된다는 게,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영광은 아니지 않으냐?”
알드리치의 말에 노툼은 조용히 손에 쥔 이상한 모양의 토템을 내려다 보았다. 노툼의 눈길에
반응하듯, 토템 안의 뼈 공깃돌이 자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저 멀리, 원한에 사무친 영혼들이 구름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자아, 보여다오, 노툼. 그저 감각만으로 영혼과 대화를 하고 소울 아이를 깨친 네가, 진짜 영혼술의 세계에 발을 들였을 때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 지를!”
알드리치의 오른손 검지에 감긴 붕대를 보고 있던 노툼은, 목을 뚝 뚝 꺾으며 앞으로 나섰다.
영혼들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북처럼 둥, 둥 하고 울리는 게 느껴졌다.
알드리치에게 영혼술에 대해서도, 주문에 대해서도 배웠다. 하지만 저 거대한 영혼의 무리 앞에서 그녀의 본능이 속삭이고 있었다. 더 가까이. 더 깊이 그들을 마주하라고.
자그락, 자그르륵! 자그락! 자각! 자각자각자각자각!
원혼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울리고, 그 고동에 맞춰 토템도 격렬하게 울렸다. 숨을 크게 들이쉰 그녀는 사기와 원한에 물든 영혼 무리를 보며, 가슴 깊숙한 곳에서 진심이 담긴 소리를 끌어올렸다. 그녀의 조상과 영혼에 깃든, 태고의 소리를. 가장 오랜 기원을 가진 종족의 진심을!
후으으읍-
“그워어어어어어억!”
어억-
어억-
어억-
.
.
.
.
.
자그락.
미친듯이 떨리던 토템이 잠잠해지고, 뇌리에 파고들던 저주와 원망의 속삭임도, 원혼이 만들어내는 서늘한 공기도 흔적 하나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래. 없어졌다. 흡수하거나 담아낸 게 아니라, 깔끔하게 사라진 것이다. 얼마나 완벽하게 없어졌는지 우중충하던 날씨마저 조금 맑아진 기분이었다.
“어…. 노툼? 내가…. 진심을 담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감정에 가장 가까운 우리 종족의 언어로 말했다. 이 악기, 효과 좋은 것 같다.”
“아니, 그 안에 저 영혼들을 담으라고 준 것인데, 도대체 뭐라고 했길래 영혼들이 흔적도 없이….”
씨익-
“꺼지라고 했다.”
노툼의 뿌듯한 미소에 알드리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방금 노툼이 내뱉은 것은 오크나 트롤, 오우거 같은 그린 스킨들의 고유 문화, 배틀 크라이(Battle cry : 전투함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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