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4
Chapter.2 위기는 기회는 위기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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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너희들의 과거는 잊어라! 여기서 너희가 뭐 귀족이다, 농노다 하는 것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 여기서 너희를 구분하는 것은 하나! 전장에 나가서 시체가 될 놈인지, 살아서 칼을 휘두를 놈인지 하는 것이다! 알겠나!”
“예,옙!”
인솔하는 병사를 따라 도시 외곽의 급조된 막사에 도착하니 새로 징집된 신병들을 상대로 정신교육을 하는 것이 보였다.
‘개판이군.’
당장 전장에 나가야 할 병력이 저런 호통 한 번에 덜덜 떨고 있다니. 저런 병사들이 전장에서 적들을 마주하고 칼을 휘두르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아니지, 그걸 아니까 겁을 주는 건가?’
병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것은 어렵지만, 공포를 불어넣는 것은 쉽다.
권한을 가진듯한 사람을 높은 단상에 올려서 큰소리를 좀 질러주고 칼을 몇 번만 휘둘러 줘도 되니까. 아마 가장 먼저 도망치는 녀석의 목을 본보기로 잘라주면 신병들은 칼을 휘두르지도, 뒤로 도망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명령에 따라 주춤주춤 앞으로 걸어 나가는 고기 방패가 될 것이다.
“어이, 너희들 전부 용병 출신이지? 그럼 정신 교육은 필요 없겠군. 내 앞에 보직에 따라 나눠 서라. 왼쪽에서부터 보병, 창병, 방패병, 궁수….는 있나? 있으면 가장 오른쪽에 서도록.”
막사의 동태를 살피는 동안 백인 대장으로 보이는 병사 한 명이 나와 함께 온 무리를 인계받았다.
“너희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대충 알고 있다. 용병이라곤 해도 이렇게 위험한 전장에 서고 싶진 않았겠지.”
“씨이발, 알기는 개뿔이. 늬들처럼 꼬박꼬박 도시 지키라고 월급 받아먹는 것도 아닌데 끌려온 놈들한테 이해는 얼어 죽을.”
백인대장의 말에 머리가 벗겨진 용병 한 명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병사. 이름이 어떻게 되지?”
“헹! 뭐, 이름 알면 나중에 찾아오시게? 니 마누라다 이새끼야! 만나서 우라지게 반갑-”
스겅-!
용병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몸에서 떨어져 나간 머리가 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툭.
풀썩-
백인대장은 쓰러진 용병의 사체를 치우라고 명령한 뒤, 손수건으로 검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하지만, 너희들이 억울하건, 화가 나건 이곳은 전장이고, 너희들은 병사다. 명령에 불복할 시 군법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이지.”
“…..”
“대답.”
“예!”
“그래. 너희들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명령에 따라 자리를 지키고, 그 자리에서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라. 평소에 하던 의뢰라고 생각해라. 위험 부담은 크지만, 영주님께서 그에 합당한 대가는 충분히 지불해주실 테니까.”
“옙!”
“눈치는 빨라서 좋군. 그럼 지금부터 보직별 부대를 선정해 주겠다. 선정에 앞서, 혹 개인 장구류가 없는 이가 있나?”
교수를 비롯한 대다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대부분 용병이다 보니 자기방어구와 무기 정도는 가지고 있었지만, 군에 납품되는 물건들은 상점에서 파는 물건보다 품질이 좋기 때문이다.
“강제 징집이라곤 해도 맨손으로 보낼 생각은 없다. 저기 좌측에 있는 막사에 보급용 장비 남은 것이 있으니, 알아서 필요한 것으로 골라가도록. 장비를 받는 즉시, 전선에 배치될 것이다. 필요한 준비가 있으면 미리 하도록 해라.”
백인대장의 말에 잠시 우물쭈물하던 용병들은 눈앞에 번뜩이는 창날을 보며 하나 둘 천막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나는 백인대장이 손가락으로 천막의 방향을 가리키자마자 누가 뒤에 쫓아오는 것처럼 뛰어가고 있었지. 어차피 전선에 나서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살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니까.
***
“거 뭐 급할 거 있다고 이렇게 뛰오셨슈?”
“장비는….. 이게 답니까?”
“보면 모르슈? 저기 있는 방어구랑, 그 앞에 있는 무기랑 쌓여있는 게 전부니까 알아서 손에 맞는 거로 찾아가슈.”
뛰어온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정규군의 장비가 쓸만하다곤 하지만, 이런 징집병용으로 제공되는 장비는 정규군이 A급을 다 털어가고 남은 것들이라 노후화되거나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정규군들이 쓰지 않게 된 장비들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폐품들 중에 그나마 쓸모있는 물건을 쓰고 싶다면, 남들보다 한 걸음이라도 빨리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낡은 방패 : 오랫동안 사용하여 갈라지고 부서진 방패. 관리를 소홀히 하여 습기를 머금고 말았다.] [바스러진 체인메일 : 투란 정규군 용으로 지급된 체인메일. 관리를 잘못하여 내구도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 + 식초 냄새가 남.]“이걸 정말 쓰라고 주는 겁니까?”
“싫으면 맨손으로 나가시던가. 인상으로 보나 득달같이 달려온 걸로 보나 용병 밥 좀 먹은 것 같은데, 저 뒤에 있는 놈들까지 오면 이것도 없어서 못 쓰는 거 알지?”
보급을 담당하는 병사의 말에 뒤를 돌아보니 말리는 병사들 너머로 가족들에게 손을 뻗으며 ‘꼭 살아 돌아올게!’ 같은 말을 남기는 남자들이 보였다. 정신교육을 받던 신병들도 이쪽으로 보낸 모양. 저들까지 오면 남는게 없을 것이니 지금 눈에 들어오는 것 중에 장비를 골라야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따위 물건을 장비라고 주는 거야? 뭐, 식초? 설마 녹 뗀다고 식초에 담근 건가? 금속으로 된 물건을?’
속으로는 불평하면서도 내 눈은 재빠르게 장비들을 살피고 있었다. 편리하게 손만 대면 어떤 장비인지 알려주는 상태창 따위는 이 게임에 없기 때문에 오직 내 눈과 경험에 의존해서 판별해야 했다.
그렇게 다른 징집병들이 눈물의 상봉을 끝내고 터덜터덜 보급창에 도착했을 때는 내가 어느 정도 쓸만한 장비를 제법 챙긴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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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가 수련용 방패 : 귀족 가문의 검술 수련을 위해 사용된 방패. 강한 충격을 받아 중심의 쇠로 된 축이 뒤틀렸다. 방어 효율 -20%] [십인대장의 망가진 방패 : 투란 정규군 십인대장에게 지급된 방패. 솜씨가 매우 부족한 대장장이에 의해 수리되었다. 단단하지만 손에 쥘 수 있는 부분이 없다.] [두 동강 난 카이트 쉴드 : 깔끔하게 잘려 나간 카이트 쉴드의 아랫 부분.] [기름 먹인 브리건딘 : 투란 정규군용 브리건딘 아머. 충분히 기름을 먹여 방어력이 향상되었다. / +상한 돼지기름의 악취가 난다.] [가죽 샌들 : 평범한 가죽 샌들]==========
“어이 너! 뭘 그렇게 자꾸 뒤적거리는 거야!”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장비 다 챙겼으면 빨리 저 앞으로 튀어 나가! 백인대장님이 지휘해주실 거다!”
‘지휘는 무슨, 그냥 전장에 던져놓고 자기 할 일 하러 가겠지.’
보급을 담당하는 병사가 징집병들에게 관심이 없는 게 행운이었다. 덕분에 네 칸밖에 없는 인벤토리에 그나마 쓸모있는 방패를 싹 쓸어올 수 있었으니까. 보아하니 병사들의 물건뿐만 아니라 귀족가의 폐품도 처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쁘지 않아. 일단 귀족한테 납품한 물건이라면 일반 병사들이 쓰는 방패랑은 기본 내구도 자체가 다를테니까.’
“정렬해라! 진형을 무너트리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 옆에있는 전우를 믿어라! 정렬!!!!”
“나와 눈이 마주치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전장에 등을 보이지 마라!”
떠밀리듯 앞으로 나선 전장에서는 곳곳에 위치한 백인대장들과 독전관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비릿한 쇠 냄새.
긴장한 사람들이 내는 시큼한 땀 냄새.
‘상병! 그 앞에서 비켜라!’
‘중위님!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저 다리를 끊으면 건너편에 있는 민간인들이 다 죽는다구요!’
‘끊지 않으면 우리가 다 죽는다! 여기서 병력을 더 잃으면 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잃는다는 것을 모르나!’
‘시발! 저 개떼같이 많은 사람들이 전부 산채로 잡아먹힌다고!’
‘제프리, 듀크. 박 상병을 막사로 끌고 가.’
‘놔 시발! 통신 끊긴 지가 언젠데 명령 타령이야! 저 새끼는 그냥 뮤트롤 보고 좆이 쪼그라들어서 저러는거라고!’
‘….박상병의 항명은 추후 군법으로 처리하지. 폭파해라.’
‘지, 진짜 합니까?’
‘못하면 내가 하겠다.’
‘멈춰 개새끼야! 멈추라고-!’
무너지는 다리와, 아우성 치는 사람들이 살아움직이는 파도에 삼켜지며 곧 붉은색으로 가득 칠해져가는 건너편의 모습.
교수는 눈이 좋은 편이었고, 그 순간 그 사실이 너무나도 저주스러웠다.
“염병. 쓸데없이 좆같은 기억이나 상기시키기는.”
교수는 머리를 흔들어 밀물처럼 흘러들어오는 과거의 기억을 털어냈다.
“투라아아안!!! 방어군!!!! 앞으로오오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백인대장의 명령과 병사들의 복창이 이어졌고, 방패를 든 병사들의 날카로운 창끝이 앞을 향하며 나와 징집군의 등을 향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찔러버리겠다는 뜻이다. 섬뜩한 금속의 감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투력을 기대하기 힘든 민간인, F급 용병은 철저하게 고기방패로 써먹어 주겠다는 뜻이군. 개자식들.’
일단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는 했지만, 전장에 나선 다음의 계획까지는 세울 겨를이 없었다. 최초의 충돌, 그 한 번을 어떻게 버틴다면, 그다음은? 그 충격을 받아낸 몸으로 뒤로 달릴 수 있을까? 아니, 정말 조합의 용병들이 내 뒤에서 방진을 짜고 나를 기다려 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대로 끝낼 수밖에 없-
“으으으!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 끝내면 죽도 밥도 안된다! 방법은 있어! 무조건 있다고! 정신 차려라 교수!”
두 손으로 짝 소리가 나게 뺨을 때렸다.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했다.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면, 선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
“방패벼어어엉!!!! 간겨어어억!!! 벌려어어어어!!!!!”
백인대장의 말에 누더기 갑옷과 낡은 방패를 든 징집병들이 주춤주춤 산개하기 시작했다. 뮤트는 눈에 보이는 적에게 집중하는 성향이 있으니 최대한 넓은 범위의 어그로를 끌게 하겠다는 의미. 방진? 개소리. 이렇게 되면 나를 포함한 최전방의 방패병들은 요행으로라도 살 가능성이 없다.
“전구우우운!!!! 방패들어어어엇!!!!!!”
“방패들어어어어!!!!!”
쿵!
쿠우웅!!
지휘관의 명령이 뒤에서 앞으로 전달되며 우리의 후열에 위치한 정규군 방패병들이 방진을 짜고 방패를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좋아, 지금이다!’
뮤트 놈들과의 거리는 이제 몇 분 안에 충돌할 만큼 가까워져 있었고, 백인대장의 시선은 곧 죽어나갈 징집병들에게서 투란 정규군 쪽으로 옮겨졌다.
그 말은 혹시나 돌발행동을 하는 징집군을 제압하기 위해 내 등을 향해있던 사수의 화살이 적들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교수는 등 뒤의 정규군이 방패를 들어 지휘관의 시야에 사각이 생기자마자, 보급창에서 챙겨온 반쪽짜리 카이트 실드의 날카로운 아랫 모서리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스킬 : 트렙 설치를 사용합니다.]퍽! 퍽! 퍽! 퍽!
-takealook : 갑자기 땅은 왜? 참호라도 파게?
-화약과 피 :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군. 적군과의 접촉이 지척이다. 교수가 플레이하는 거구의 캐릭터가 들어갈 만한 참호를 파기엔 시간이 부족해.
“나도 알아! 정신 사나우니까 전부 닥치고 있어!”
퍽! 퍽! 팍! 팍!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땅을 내리치길 수십 번, 연약한 손바닥은 다 까져서 피가 철철 흘렀지만, 덕분에 한 뼘 정도 깊이의, 내 몸의 반도 들어갈 수 없는 작은 구덩이를 파낼 수 있었다.
드드드드드드드!!!!!
“키이이익!”
“크에에엑!”
“캬악! 캬악!”
“워어어어어어어억!!!!”
“전구우우운! 앞에에에! 창!”
철컥!
“으아아악! 제발! 조금만 더!!”
뮤트 무리는 이제 그들의 울음소리가 들릴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얕은 참호의 앞부분에 카이트 실드의 끝부분을 비스듬하게 박아넣은 다음, 인벤토리에서 꺼낸 다른 방패들을 경사면을 받쳐주는 방향으로 세웠다. 그다음, 비스듬하게 세워진 카이트 쉴드와 살짝 파낸 흙더미 사이로 최대한 몸을 구겨 넣고 몸을 웅크렸다.
‘이 몸으로 저 정도 질량과 충돌하면 팔 뿐만 아니라 갈비뼈까지 바스러진다. 다행히 지금 시기의 뮤테이션 블러드는 전투에 특화된 개체 수준으로 진화하진 못했어. 강화됐다곤 해도 본질은 유전자 수집용 8~9급 개체.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최초의 충격 한 번만 받아내면, 놈들은 방패에 가려진 나를 넘어서 눈앞에 잘 보이는 적, 정규군을 향해 돌격할 거야!
보급창에서 검 종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어차피 끌려온 전장, 전공을 세울 이유도 없을뿐더러 칼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고, 방패또한 마찬가지인 상황.
막아도 몸이 충격을 버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방어구가 아닌 구조물로서 기능을 할 수 있는 방패들을 골랐다. 이런 식으로 방패가 받는 압력이 땅으로 파고들게 만들어 두면 내가 할 일은 몇 가지 남지 않는다.
한, 비스듬히 박아둔 카이트실드가 내 위쪽으로 밀려서 뽑히지 않게 붙잡고 있는 것.
둘, 저 괴물들이 방패를 밟고 지나가는 동안 방패의 내구도가 다 닳아 부서지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와봐 이 새끼들이! 내가 황무지에서 혼자 5년이 넘게 살아남은 사람이야!!! 좆같은 위기 따위는 골백번도 더 넘게 극복해봤다고!!!!!”
지축을 뒤흔드는 진동이 몸을 타고 흐르고,
쾅!
“크으으으으으!!!!!”
마침내, 거대한 충격이 교수의 몸을 뒤흔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