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43
Chapter.9 스타 폴(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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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영수와 언데드가 들끓는 블루 라인 산맥의 깊은 골짜기.
나무 위에 걸터앉은 엘프 여성과 키 작은 인간 여성이 어색한 분위기 속에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쪽의 요구사항은 우리 인간 무리가 정체를 밝히고, 무장해제를 하고 여기서 내일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린다. 이게 전부란 말이죠?”
“일단은. 이곳 카네란…. 음, 너희 말로 추방된 엘프의 마을에서, 나림으로서 내가 가진 권한은 마을의 수호에 관한 것뿐이다. 너희들의 목적을 이루고 싶다면 내 요구사항을 수행한 뒤, 마을에 들어가 대모님과 따로 얘기해야 할 거야.”
이드라실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생각하던 것과 전혀 다른 인간에,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는 대담.
저 멀리서 동료들의 손에 제압당한 채로 인간 여자의 말을 전해 듣는 남자나, 밧줄에 묶여 나무에 매달린 상태로 이상한 노래를 부르는 늙은 인간이나 전부 이상할 뿐이었다.
“…! ….! …? ….!”
“그래요, 에리얼. 인간은 정말…. 기분 나쁘고 이상한 종족이네요. 어른들이 말씀하신 ‘끔찍한 일’ 이란 이런 종류일 일인 걸까요.”
아작!
이드라실은 온몸에 돋은 소름을 쓰다듬는 그녀의 정령을 달래며 눈을 감았다.
부디 저 인간들이 빨리 이곳을 떠났으면 했다. 아무래도 그들이 떠날 때까지는, 나무뿌리를 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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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교수와 이드라실의 사이를 뛰어다니는 루실라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게 아닌데. 내가 생각한 용사 일행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루실라 아에드란. 감히 말하건대, 그녀는 천재였다. 적어도 그녀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일곱 살 때 처음 상행을 따라 나서며 거래의 개념에 눈을 뜨게 된 뒤로 단 한 번도 잘못된 거래를 한 적이 없었으니까. 물론 손해를 보기도 하고, 배신당해 교역품을 탈탈 털린 적도 있었지만 텔드랏에 있는 골드 가이저 상단 건물에 도착할 때쯤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두둑한 수레에 은화를 가득 싣고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 용사의 입에서 ‘추방된 엘프의 마을’ 이라는 소리가 나오자마자 이 일행에 합류하기로 마음먹었다. 바람계열 마법사가 아니면 거래조차 할 수 없는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종족, 엘프.
용사가 무슨 수로, 그나마 알려진 엘프의 숲도 아니고 외따로 떨어진 그들의 마을을 찾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교단의 용사이니 뭔가 수가 있겠거니, 하고 따라온 것이다.
아주 진-한 돈 냄새가 났으니까. 마치 흠씬 두들겨 맞고 상단 창고에 처박혀있던 로만을 만났을 때처럼.
그런데 이 꼴은 뭐란 말인가.
“아, 루실! 저쪽에서 뭐래?”
“으으으….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예요! 가서 직접 말하면 되잖아요!”
“히히, 미안. 아직 그건 좀.”
그 잘나가는 광명 교단의 용사라는 놈은 뮤트가 아니면 힘도 못 쓰는 반쪽짜리에다, 머리가 화살에 관통당해도 죽지 않는 괴물이더니, 심지어 모든 상단을 통틀어 거래 기피 대상 1호인 ‘마법사’이기도 하다니! 세상의 상식을 거부하는 정신 이상자 집단이 마법사가 아닌가!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 상품에 투자를 하다니! 마법사는 상인이라면 반드시 기피해야 할 [예측불가] 딱지가 붙은 상품이잖아!’
그 잘못된 투자의 결과물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오오오오! 그녀가! 그녀가 나를 부르는구나!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도 없는 나의 허상과 같은 연인이여! 이보게들, 나를 보내주시게! 제발!”
“물 튀기지 마시오 오트만! 엘프가 한 번만 더 달려들면 쏴버리겠다고 하는 것 들었잖소!”
“제발 체통 좀 지키시게 이 친구야!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왜 그러는가!”
“알드리치. 영혼술사인 자네는 보이지 않는가? 이 늙은이의 푸른 영혼이 세차게 떨리는 것을?”
“그래서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를 않네! 주책도 정도가 있어야지, 이건…. 우으읍! 좀 진정하라니까!”
“날 놓아주시게-!!!”
학식 있고 점잖은 마법사 노인은 늦바람에 눈이 돌아가서 ‘전형적인 마법사’가 되었고,
“호오오. 무장해제에 하루 대기라. 그렇단 말이지?”
광명 교단의 용사라는 놈은 굵은 밧줄에 단단히 묶인 것으로도 모자라 머리만 내놓고 땅에 파묻혀 그녀를 통해 엘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실패야…. 이래서는 본전도…. 내가 이런 실패를….”
“실패? 무슨 실패?”
“그런 게 있어요!”
루실라는 빽 소리를 지르고 수레 위에 걸터앉았다.
“오오오오! 나를! 나를 놓아주시게! 마침내 바다가! 나의 바다가 내 눈앞에에에-!”
석양을 배경으로 나무에 매달려 꿈틀거리는 마법사를 보고 있자니,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아아아, 어떻게든 원금 회수만. 내 몸만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으면.’
친절하고 믿음직스러운 상단 사람들이 사무치게 그리운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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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에 빠진 이드라실과 루실라와는 달리, 정작 두 여자를 혼란스럽게 만든 교수는 제법 침착한 상태였다.
“충분히 대화가 가능한 상황에 직면해서 고작 한다는 소리가 시간 끌기라…. 우리 말고도 다른 위협이 있어서 병력을 할애할 수 없나? 아니, 아침 해가 뜰 때까지라는 시간 제한을 둔 것을 보니 병력이 잠시 마을을 비운 모양이군. 마을 상태가 생각보다 그리 좋지는 않은 모양이로군.”
의외였다. 루실라가 전달해준 엘프의 요구사항은.
일단 한번 적대했던 상황이고, 심지어 누가 봐도 교단의 것으로 보이는 물건을 이렇게 주렁주렁 매달고 왔으니 적어도 포위당한 상태로 감시하거나 온갖 정령술로 봉인 당할 각오까지 했는데 그냥 대기라니.
“난폭하게 대하지 않으면 좋은 거 아니에요?”
루실라의 물음에 교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쪽은 겨우 다섯인데 이렇게 소극적으로 나올 리가 없잖아. 원래 힘이 있는 존재일수록 대담해지고, 그렇지 않을수록 소심해지거든. 블루 라인 산맥의 중심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약할 리가 없으니 그들이 소극적인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겠지. 다섯 명 밖에 안되는 외부인과의 교전이 마을에 손해로 다가올 정도로 마을이 위태롭거나, 바쁘거나. 둘 다 이거나. 뭐가 됐든 저 마을에서 쓸만한 인원 하나를 빌려야 하는 입장에서 마을에 여유가 없다는 것은 나쁜 소식이지.”
“그걸…. 지금 저 엘프의 요구사항만 듣고 알아낸 거예요?”
“추측이지. 가능성이 높은. 애초에 너무 티를 많이 내잖아. 결국 혼자 나와서 ‘하루만 기다려달라’ 하는 소린데. 저 엘프 나이도 그리 많지 않을걸? 인간을 보자마자 증오가 어쩌고- 하는 말이 없는 것을 보면. 이 마을에서 태어난 세대가 아닐까?”
내가 입으로 기어 들어오려고 하는 벌레를 뱉어내려 애쓰며 답하자, 나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쭈그려 앉아있던 루실라의 얼굴이 표현하기 힘든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예측….불가….”
“뭐?”
“마법사에 괴물에, 이번엔 책사라니…. 이런 상품, 나는 어떻게 다뤄야 할 지….”
“???”
왠지 모르게 아까부터 뜨악한 표정이 되어있는 루실라가 뭔가 못 알아들을 소리를 중얼거렸지만, 지금 상황이 좀 혼잡해서 그러려니, 하고 대충 정리한 내 의견을 전해주었다.
“아무튼, 일단 우리 쪽이 공격 의사가 없다는 것을 전하는 게 중요하겠지. 가서 전해.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되, 우리 쪽에서 한발 물러서 줬으니 그걸 기억해 달라고. 레이 라인에서 산맥을 관통해 여기까지 달려온 우리는 매우 피곤하고 지쳤으며, 그 피로를 달래기 위해 여기까지 산맥을 지나온 힘으로 결계를 찢고 텅 빈 마을의 편안한 잠자리를 강탈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어디까지나 평화로운 거래를 위해 우리 쪽에서 참아주는 거라고.”
이 정도면 됐겠지. 일단 엘프들에게 무해한 존재로 보이는 게 첫 번째지만, 하라는 대로 다 하는 그런 어수룩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없으니까. 지금은 적당히 무해하면서 힘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어필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음, 역시 지금은 제정신이야.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컨디션이 좋은 것 같은데? 정령이랑 거리가 멀어져서 그런가?
“물의 정령이라…. 생각도 못 한 복병을 만났군.”
엘프들과 만났을 때 일어날 여러 가지 상황을 예상해 뒀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미인계라니! 그것도 사람도 아니고, 이종족도 아니고, 생명체보다 자연물에 더 가까운 정령을 이용한 미인계에 걸리다니! 이봐 껍데기, 뭔가, 인간으로서 이것저것 실격인 것 같지 않아?]‘몰라 임마.’
[아니 그렇잖아! 나도 제법 놀랐는데, 일단 너나 네 의식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고.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이 네 쪽에서 의식을 꽉 잡고 있었어. 그러니까 저 물덩이가 플레이어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단계까지는 아니라는 소리지. 그렇다고 블러드 아머 쓸 때처럼 물리적으로 고양되는 것도 아니고. 그 감각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달성감? 성취감?]일단 다행인 점. 처음 하이드를 만났을 때처럼 의식 단위에서 뭐가 막 생겨나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강제적인 느낌도 아니고. 막 쾌락에 미쳐 날뛰는 것도 아니고. 뭔가…. 마음이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고 해야 하나? 중독성도 없고 후유증도 없는 마약에 취한 느낌?
[그게 더 무서운 거 아닐까? 그 전래동화 있잖아. 바람과 해가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내기하는 거. 넌 옷을 벗다 못해 가죽까지 죄다 벗어줄 수준이었다고.]‘그래도 오트만 보다는 훨씬 낫잖아. 내가 5 위계였으면 저렇게 됐을 것 아냐?’
[윽. 나 이제 마법 안 부러워. 안 배울래.]하이드가 의식 속에서 커다란 검은 팔로 손사래를 마구 치는 것을 보면 내가 어지간히 추해 보이긴 했나보다.
가까스로 일행들과 하이드의 도움으로 정령에게서 떨어진 다음, 정령과 마법사의 관계에 대해 찾아보았다.
– 스피드 웨건 : 요금 청구할거임.
– professor : 땡큐.
읽어보니 생각보다 간단한 관계였다.
마법사는 자신과 같은 속성의 정령에게 매우 끌린다.
세상의 모든 사람보다 그 속성에 대해서는 자기가 더 잘 안다고 자부하는 마법사들. 현실 부정을 넘어 거의 자폐에 가깝게 해당 속성에 빠져드는 마법사들에게 정령은 일종의 이상향과 같은 존재다.
수계 마법사가 물의 연인을 자칭하고 화염계 마법사가 불꽃을 향한 구애자를 자칭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진짜 배우자 없이 그 속성을 연구하고 살아가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는 뜻이 담긴 비유이다.
정령은 해당 속성의 가장 순수한 에너지가 자연물의 형태를 벗어나 의지를 가지고 뭉쳐 생겨난 것이니, 마법사 입장에서는 당연히 평생을 찾아 헤매던 이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마법사는 자신과 같은 속성의 정령을 보면 정신을 못 차리고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반면 정령사는 마법사를 매우, 극도로, 심각하게 혐오한다. 정확히는 정령이 마법사를 싫어한다.
정령사는 정령과 교감하는 존재. 정령사가 느끼는 것을 정령도 느끼고, 정령이 느끼는 것을 정령사도 느낀다.
자, 여기 오늘의 피해자 ‘아리엘(물의 정령. 여성체. 60세)’ 을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물의 정령은 인간의 손길이 닿건, 쳐다보건 아무런 관심이 없다. 여성체라고는 해도 정령사와 교감에 의해 형성된 것일 뿐, 그 본질은 물이니까. 강물에서 누군가 손을 담근다 해서 강이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대상이 수계 마법사라면, 물을 이해하고 관찰하는데 평생을 바치는 또라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똑같이 강에 손을 담가도 그 대상이 마법사라면 그 손끝에 그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물의 본질이 닿으니까.
비유하자면 이런 상황이다. 길을 가다 음흉한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봤더니, 웬 미친놈이 대포카메라 수십 개와 전문 촬영 장비에 X-ray, 전신 촬영용 3D 스캐너까지 들고 와서는 침을 질질 흘리고 위아래로 정신없이 훑어보며 촬영 버튼을 마구 연타하고 있는 것이다.
알려 준 적 없는 비밀이나 정보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심지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중인 낯선 이를 만난 느낌이라고 할까.
정령은 정령사도 아닌 존재가 이런 변태적인 관찰을 하는 것도 그렇고,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는 그 ‘깨달음’이라는 수작으로 해당 원소에 지배력을 행사하는 마법사를 매우 불쾌하게 여기며 이 감정은 정령사에게도 전달된다.
즉, 정령사에게 있어서 마법사는…..
– 스피드 웨건 : 고도로 숙달된 전문 변태 스토커. 대충 이런 식이라는 거임.
– professor : 워메.
– 간장게이바 : 무섭다 무서워….
– 하이웨이나초맨 :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을 뛰어다니는 상남자 박교수를 물박이 스토커로 만들다니. 이게 월드 넘버원 정신병 양산기 GG의 위력인가….
– BDSM3기공채합격자대표 : 아니야…. 우리의 영웅, 돔의 구원자 박교수님이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일 리가! 강력한 카리스마로 우리를 이끌어주실 BDSM의 리더께서 물박이일 리가 없어! 아니야아아아아!!!
– Jokass : 이런. 역시 빨간약은 자네에겐 너무 과분했나? 건실한 청년이었는데, 안타깝게 됐군.
– 화약과 피 : 진실은 언제나 고통을 동반한다네, 소년.
“어휴. 진짜 망할 놈의 게임. 일단 내 의식에 영향은 없으니까 일종의 조건 반사 시스템 같은 거지? 마법사 패널티, 뭐 그런 종류의? 순수하게 인게임 영향력인?”
– 스피드 웨건 : 그거야 아무도 모름. 마법사 하는 놈도 없고, 마법사 하다가 정령사를 만날 확률도, 그 정령사가 같은 속성일 확률도 지극히 낮으니까. 너 혹시 밖에서도 물 좋아함?
– professor : 윽.
– 스피드 웨건 : ㄹㅇ? 뭐, 밖에는 정령같은 게 없으니 큰 영향은 없겠다만, 적어도 네가 게임 속 캐릭터와 과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건 확실함. 좀 쉬엄쉬엄 하셈. 맨날 죽만 투여받지 말고 밥도 좀 차려먹고.
– professor : 그래 알았다.
– 스피드 웨건 : 나가서 개인 메세지 확인하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나마 2 위계라 이 정도로 넘어간 거지, 오트만은 무슨 처형당하는 사형수처럼 머리에 마대를 씌워놓고 나무 위에 매달아 뒀는데도 이상한 세레나데 같은 것을 불러대고 있었으니까. 나보다 수계 마나에 대한 감응이 좋은 만큼 물 정령의 매혹(?)에 더 강하게 영향을 받는 것 같았다.
뭐, 한 번 겪어 보니까 다음부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것 같긴 하다 만.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긴 하군.
일단 이쪽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대화방에서 눈을 돌린 교수는 땅에 묻힌 그를 감시하는 노툼에게 물었다.
“내일 아침까지 오트만이 제정신을 차릴까?”
“그웍. 적이었으면 당장 우릴 팔아넘길 기세다.”
“그래도 난 지금 괜찮아졌는데? 오트만도 조금만 시간을 주면….”
노툼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가락으로 보르카와 오트만을 가리켰다.
“크아악! 오트만! 가만히 좀 있으시오! 제발!”
“놓아라! 이 무지몽매한 자여! 정령이여! 어서 나를 다음 단계로…!”
온몸을 물로 감싸 엘프가 있는 쪽으로 몸을 밀어내는 오트만과, 흠뻑 젖어서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진 줄을 잡아당기는 보르카.
“그웍.”
“그래. 말 안 해도 알겠다.”
아무래도 내일 엘프 쪽에서 준비를 마치고 왔을 때 오트만은 전력에서 빼야 할 것 같았다.
“어이, 보르카! 그거 교단제라 웬만해선 안 끊어져! 그냥 매달아 놓고 자!”
“느, 늙은 인간에게 그건 너무 무리가 아니겠소? 적어도 잘 때는 풀어줘야….”
“무리는커녕, 지금 하는 거 보니까 당장 세쌍둥이라도 만들 수 있겠다! 힘 빠지면 좀 진정하시겠지! 근처 나무에 묶어놓고 와서 자라 그냥.”
요구사항을 보니 내일은 아침부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바쁠 것 같았다. 다들 지치기도 했으니 충분히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겠지.
나도 포함해서.
띠링-!
[야영지 : 블루 라인 산맥(모닥불/은신처/동료). 로그아웃 하시겠습니까?]“예.”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눈부신 빛이 망막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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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익-
그그그극!
익숙한 접속기 열리는 소리. 회색 시멘트 벽. 퀘퀘하지만 그리운 쉘터 냄새. 나오자마자 묘하게 흥분되어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어으으윽! 뻐근해! 퇴근이다, 퇴그-”
끄드득- 텅!
“어?”
아무 생각 없이 기지개를 켰는데, 손끝에 뭐가 걸리며 쇠가 우그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탱 탱그렁-!
접속기 뚜껑. 기지개를 켜던 왼손에 걸린 접속기 뚜껑이 힘없이 떨어졌다.
뜨드득.
왼손을 들어 손끝으로 마디를 쓸어보니, 한동안 잊고 있던 단단한 갑피가 느껴졌다.
“….염병을 한다 진짜.”
오랜만에 밖에 나왔는데, 시작부터 영 불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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