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47
Chapter. 10 납과 은화(4)
****
원래 오늘은 그 금필이라는 사람에게 ‘내가 이제 집 밖으로 나왔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으며, 앞으로 잘해보자’ 정도의 이야기만 하고 떠나려고 했다.
식사라도 하고 가라는 박금필씨의 손길은 매정하게 뿌리치고, 필요할 것 같아서 만들어 봤다는 사냥용 칼은 품에 잘 챙겨 넣으며 밖으로 나왔는데….
와르르르-
“어이쿠! 밀지 마!”
“나왔다.”
“정말로 안에 있었잖아?
문 바로 앞에 주차해놓은 차 대신, 문가에 바싹 달라붙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 사람이다.”
“진짜였어. 정말로 왼팔이 괴물 같잖아!”
“박교수님이…. 강사장 집에서 나와?”
“어이, 금필이! 설마 우리 몰래 박교수님이랑 따로 핫라인 같은 걸 만들어놨나!”
언제 모여들었는지 금필의 집 앞에 열 대여섯 명쯤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걸치고 있는 누더기 사이사이의 주름에 모래먼지가 가득 쌓인 것으로 보아 아침부터 지금까지 밖에 나와 일을 하고 있던 것으로 보였다.
쉘터에서 내려와 이곳, 삼거리 집에 머무른 시간은 해봐야 20분 남짓한 정도. 그 짧은 사이에 이 주변 곳곳에 퍼져 일하던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다. 변종의 어그로를 끌 위험 때문에 크게 외치거나 시끄러운 신호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은 금기시되어있고, 돔이나 렙터같은 대형 집단이나 쓰는 무전기도 당연히 없으니 입소문만으로 이렇게 모여들었다는 건데. 혹시….
“….금필씨?”
“아, 아닙니다! 정말 제가 부른 게 아닙니다! 아이고, 이 사람들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이 일도 안 하고 여긴 왜 와있는가! 제이드 자네는 커뮤니티에서 외주 받아서 바쁘다면서!”
“강. 자네랑은 오래 알고 지냈고, 이 각박한 세상에서 제법 가족처럼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 연락이 되고 있었나? 이곳에 자리 잡았을 때? 아니면 우리가 풀려나고 접속기에서 헐레벌떡 뛰어나와 이곳으로 가자고 했을 때?”
“살짝 귀띔이라도 해줬어야지! 우리가 한 달 내내 작은 아가씨만 내려오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마음 졸이고 있었는지 알았으면서!”
반응을 보아하니 금필이 불러들인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 차가 내려올 때 나를 본 사람이 소문을 냈거나, 옆 사람이 우르르 뛰어가니 무슨 일인가 하고 따라온 것 같다.
“그러니까 그게 아니래도!”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방금 똑똑히 들었네! 식사하고 가시라고, 일 얘기는 다음에 제대로 하자고 하는 걸 말이야! 누군 일하기 싫어서 땅 파먹고 사는 줄 아나? 그러지 말고, 기회가 있으면 좀-”
“나눠드리죠.”
인상을 찌푸리며 슬금슬금 앞으로 밀고나 오던 대머리 남자는 내가 한발 앞으로 나서자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참, 황무지 사람들 약은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놀란 척, 흥분한 척하며 내 눈치를 살살 보더니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를 나 대신 익숙하고 만만한 금필씨에게 역정을 내며 하고 싶은 말을 다 전달한 것이다.
‘일을 달라…. 나쁠 거 없지.’
금필에게 역정을 내던 대머리남자가 자꾸 내 눈치를 힐끔힐끔 보는 게 재밌어서 한번 어디까지 가나 구경해보고 싶었지만, 모른척하면 정말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라 적절한 타이밍에 그의 말을 끊으며 앞으로 나섰다.
연설. 내가 살면서 사람들 앞에서 뭔가 공표할 일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긴장하고 있네? 게임에서는 전쟁터에서도 왁왁 소리 지르면서 잘도 하더니만?]‘느낌이 다르잖아. 게임이랑, 현실이랑.] [우리한테 그 둘이 차이는 있고? 그냥 게임처럼 해버려.]
‘게임처럼. 용사 박교수처럼 말이지.’
후으읍!
나는 기대 어린 사람들의 눈빛을 보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좋아, 게임처럼 생각해보자고. 뭘 해야 하지? 목표를 정하고, 과정을 계획하고, 변수를 통제해야지.
목표는 단순한 정보의 전달이 아닌 ‘이런 사람이면 어느 정도 믿고 따라도 되겠다.’ 정도의 호감 획득 및 혹시나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게 경각심을 주는 것.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카리스마.’
해야 할 일이 명확해지며 두근거리던 가슴이 천천히 잦아들자, 교수는 사람들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변종처럼 변해버린 왼손은 평상시에는 불편했지만 이럴 때는 참 편리했다. 시각적으로 한눈에 봐도 이질적인 그 모습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처음 본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으니까.
‘우선, 눈높이.’
누군가와 대화할 때 눈을 마주하고 하는 것과 올려다보고 하는 것은 거리감에 있어 대단히 큰 차이를 만든다. 높은 위치에 서면 키가 작은 사람도, 인파에 뒤쪽으로 밀려난 사람도 모두 연설자를 바라볼 수도 있고. 대통령 연설부터 시장 약장수까지, 많은 사람 앞에서 연설을 하면 작은 단상이라도 만들어서 하는 게 괜히 그러는 게 아니란 말이다.
우르르 갈라지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주차해놓은 버기에 다가간 교수는.
“읏차.”
프레임을 잡고 가볍게 몸을 튕겨 올려 그 지붕 위에 걸터앉았다.
이 사람들을 관리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이걸 키워서 렙터나 돔처럼 거대세력으로 만들겠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겠다, 같은 마음은 없었다.
돔처럼 과거의 문명화된 세계를 재건하겠다는 정의도, 렙터처럼 강한 힘으로 모든 걸 지배하겠다는 패권주의도 싫다. 마냥 선하게 살겠다고 하기엔 내 손으로 황무지에 남긴 참상이 너무나도 많았고, 아예 독하게 살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게 많으니까.
“황무지의 삶이라는 게 참 얄궂기도 해서, 어쩌다 보니 이렇게 모여서 만나게 됐군요.”
확성기도, 집단의 이념이나 상징도 없이 그저 반쯤 폐허가 된 거리에서 차 지붕에 걸터앉아 하는 연설.
딱 이 정도가 좋았다. 나 같은 회색분자에게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가 BDSM의 리더, 박교수입니다.”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왼손을 장난스레 흔들어 보였다.
Big Dream Small Margin, BDSM이 사람들 앞에 공식적으로 활동을 선언하는 순간이었다.
****
“….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핫핫핫핫핫핫!”
“웃깁니까? 식은땀 때문에 저체온증에 탈수가 올 지경인데? 갈아입을 옷도 없이 아주 땀에 푹 절어가지고….”
“아니, 자네 같은 사람이 그렇게 소시민 같은 소리를 하다니.”
“몇 달 전만 해도 기름 한 통에 목숨 걸던 사람이 소시민이 아니면 뭡니까 그럼.”
마을에서 앞으로 내가 관리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헛짓거리도 하지 말라고 간단하게 사람들과 얘기를 나눈 다음. 예정대로 돔에 도착한 교수 일행은 돔에 출입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입구에서 검문을 받아야 했다.
‘예?’
‘저…. 사인 좀 해주시면….’
보통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 검문이 신원과 방문 목적을 묻는 게 아니라는 것과 입구에서 끝나지 않고 총장이 있는 감찰부 건물까지 쭉 이어졌다는 점이다.
교수는 저 좋다고 달려드는 사람에게 자신이 생각보다 훨씬 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움을 요청하려 했더니 마찬가지로 사인 요청에 시달리던 벡스는 신시아를 데리고 벌써 사라져버린 지 오래. 둘이 근 한 달 가까이 훈련하면서 손발을 맞춰서 그런지 잠깐 한눈 팔린 사이에 나를 미끼로 던지고 튀어버렸다.
그렇게 손 한번 잡아보자는 사람, 간절하게 변종 바이러스의 매커니즘을 해석해달라는 사람, 심지어 웃옷을 벗어 던지고 달려드는 묘령의 여성들까지 헤치고 감찰부 건물에 도착했을 때 교수는 이미 녹초가 되어있었고, 반갑게 맞아주는 감찰총장의 집무실에 앉아 한숨 돌리며 오면서 있었던 일을 좀 얘기했던 것이다.
“핫핫핫핫! 크흠, 흐흠! 아, 미안하네. 나름 인생에 남을 한순간이었을 텐데. 비웃은 건 아니니 화내지 말게.”
“맘껏 웃으시죠. 47구역 돔의 지배자님이 웃겠다는데, 오히려 같이 웃지 못하는 제 쪽이 불경한 거 아니겠습니까?”
“흐흠, 흣, 크흠! 아아, 얼마 만에 이렇게 웃어보는지 모르겠군. 자네는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방송도 하면서 인파가 그렇게 싫은가?”
“제가 우리 마을에 16명 앞에서도 속으로 달달 떨면서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퍼레이드? 그때 그거 장난 아니었습니까?”
“감찰총장쯤 되면 농담으로라도 허언을 입에 담을 수 없는 법이지. 그나저나 마을이라…. 자기 세력을 참 정감 넘치는 이름으로 부르는군. 나도 나름 눈썰미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네는 볼 때마다 참 새롭단 말이야.”
“그쪽도 저번에 봤을 때보다 좀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원래 이런 말투가 아니었는데.”
감찰총장, 알렉산더 영은 교수가 저번에 봤을 때와는 좀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야전 지휘관 같이 덥수룩하던 그의 수염은 영화에 나오는 90년대 장교처럼 날카로운 콧수염으로 변했고 깔끔하면서도 실용성이 돋보이던 그의 옷은 손대면 베일 것 같은 단정한 양복이 되었으며 누구나 가릴 것 없이 존대하던 그의 말투는 자신감 넘치는 반 하대로 변해있었다.
바뀌지 않은 것은 단 하나. 이렇게 웃고 떠들면서도 푸르스름하게 번뜩이는 늑대 같은 눈동자뿐이었다. 늑대와 너구리의 혼종 같았던 총장은 이제 그 발톱을 완전히 감추는 방법을 배운 모양이다.
“위정자란 어느 정도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닌가. 돔의 시민들이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니 입에 붙은 존댓말부터 버렸지. 자네도 슬슬 이런 부분에 대해서 알아둬야 할 걸세.”
“우리 애들 포함해도 스무 명 안팎인데 위정자는 무슨.”
내가 일 없다는 듯이 손을 휘젓자 피식, 하고 헛웃음을 지은 총장이 등 뒤의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저 밖에 보이는가?”
“보이다 뿐입니까. 저기 있는 사람의 절반 가까이랑 몸을 부대끼면서 왔는데.”
“그게 자네의 현 주소라네. 돔의 영웅. 구원자 박교수. 만약 내가 자네를 돔의 영웅으로 추앙하고, 자네와 깊은 관계에 있다는 것을 밝히지 않았으면 저들 중 1할 정도는 지금 자네 집 주변에 눌러앉았을 걸세. 이름부터가 ‘돔의 영웅’이니, 사는 곳만 돔 외부일 뿐 사실상 우리 소속으로 여기기 때문에 저렇게 얌전히 궁둥이 붙이고 있는 것뿐이지.”
총장의 말에 등골이 싸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한번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마크가 그려진 깃발을 흔드는 사람들. 대충 봐도 내 손을 가지고 캐릭터화 한 것 같은 그림이었다. 약간 누런빛이 도는 천쪼가리에 목탄으로 그린 그림이 들어간 깃발이 수백 개. 내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총장은 날카로운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쪽에서 좀 부추기긴 했지.”
“왜요?”
“이 혼란한 시기에 영웅만큼 잘 들어 먹히고, 팔리는 이미지도 없으니까. 저들을 보게. 누가 봐도 황무지의 근심 어린 사람들이 아니라 옛날로 돌아간 표정이 아닌가? 심지어 자네는 과장할 것도 없이 실제로 영웅 그 자체이니 거리낄 것도 없지. 지금 돔에서는 BDSM 관련된 여러가지 창작물이 아주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네. 커뮤니티에서 [브릿칭 던]이라는 이번 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의 비공개 암호가 300실링이라는 높은 가격에 판매되고 있고, 그림에 좀 재주가 있는 자들은 저렇게 깃발이나 목판화를 만들어 팔기도 하지. 이런 것도 있고 말이야.”
드르륵-
총장이 서랍에서 꺼낸 것은 나무 조각상이었다. 원형 받침대에 [사납게 포효하는 교수] 라는 이름까지 새겨진, 세상 낯 부끄러운 그런 물건.
“잠깐 줘보시죠.”
“미안하지만 나도 내 돈 주고 산 거라. 감찰부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돈이 잘되더군. 사람들은 유희에 목말라 있잖나.”
“이런 망할! 민주주의 법치국가를 목표로 하면서 저작권은 예욉니까?”
“엄밀히 말하면 이 캐릭터는 자네와 동명이인에 좀 닮은 캐릭터일 뿐이라네. 아, BDSM이 돔에 정식으로 소속된다면 저작권 소송을 거쳐 수익의 일부를 나눠줄 수는 있겠네만. 관심 있나?”
“때려쳐! 뭔 돈이 그렇게 필요해서 애들 장난감이나 팔아가면서 돈에 매달립니까?”
“도시를 하나 건설하는데. 당연히 돈이 많이 필요하지 않겠나.”
스윽-
자세가 바뀌었다. 의자에 느긋하게 기댄 자세에서, 깍지를 끼고 책상 쪽으로 몸을 굽힌 자세로.
가볍게 농담이나 하며 웃고 즐기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진중한 분위기로 가라앉았다.
[실없는 소리만 하다가 갑자기 본론을 찌르고 들어온다. 저 사람은 아무리 봐도 GG의 귀족 같은 면이 있어.]‘처음부터 여기까지가 전부 빌드업이었다는 소리지.’
전쟁을 겪고, 이겼다고는 해도 돔 또한 만만치 않게 손해를 본 상황에서 기존 정치체계를 뒤엎으며 돔의 지도자가 된 상황.
몸이 세 개라도 모자랄 판에 히히덕거리며 농담 따먹기나 할 시간이 있을 리가 없다.
사람들을 헤치고 나오며 녹초가 된 내게 회복할 시간도 줄 겸, 의도적으로 분위기를 좀 풀어준 것이다. 한번 풀었다 조이면 더 타이트하게 느껴지니까.
앞으로 나올 얘기가 그렇게 분위기를 준비해서 꺼낼 만큼 중요한 얘기라는 뜻이기도 했다.
“도시라면…. 45구역의 그?”
“맞네. 믿을 수 없을 만큼 시설이 잘 보존된 구시대 지하벙커. 렙터가 대부분 불을 질러버리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관리실은 물리적 충격 말고는 대부분 무사하더군. 이번에 렙터의 세력을 크게 꺾었으니, 우리 쪽에서도 한발 앞으로 나서기로 한 것이네. 볼을 맞대고 있으면 아무래도 우리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렙터 쪽이 아니겠나.”
“볼을 맞대고 있는다. 그럼 렙터가 43구역에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게 확실해진 겁니까?”
“43구역과 42구역 사이에 멈춰 섰더군. 놈들의 특성상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는 표현은 불가능하지만, 전차 수백 대와 차량으로 이루어진 네스트를 마구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놈들이 이번 겨울은 거기서 난다고 보는 게 좋겠지. 최근 돔에 들어온 입주민 중 42, 43구역 사람들이 특히나 많은 것을 보니 아마 확실하네. 은폐장이 있다고 해도 렙터놈들이 이잡듯 뒤지고 다니면 결국 들통날 수밖에 없으니까.
43구역. 속에서 뜨끔, 하고 송곳처럼 밀고 들어오는 기억이 있었다.
‘씨발. 우진 영감님.’
43구역 정중앙에 자리 잡은 우진 비뇨기과. 의약품이 잔뜩 쌓여있는 병원을 놈들이 그냥 지나쳤을 리가 없는데. 놈들이 43구역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이미….
‘….별일 없겠지. 나름 전설이라 불리던 사람이잖아? 제 몸 하나 빼는 정도야 메스 하나만 들고도 손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아무 일 없을 거다.’
오래전, 43구역에 처음 들어갔을 때. 병원 외곽의 터렛을 몰래 뜯어가려다 우진에게 들켜 죽도록 맞았던 적이 있었다. 무사할 것이다. 적어도 구조신호 하나 보내지 못하고 당할 사람은 아니니까. 무소식이 곧 희소식이라 생각하며 교수는 애써 걱정을 털어버렸다. 지금은, 눈앞에 집중할 때니까.
“새로운 돔의 건설이라…. 필요한 건 다 있습니까?”
“최근 악착같이 실링을 긁어모으는 이유가 그거라네. 현실적으로 우리 돔 내부에서 자급자족하는데는 한계가 있고, 아직 우리 기술로 재설계가 불가능한 것들도 많으니까. 그래도 특수 합금이라거나, 기타 자잘한 기계 부품들은 시장에 나오는 족족 사들이고 있으니 조만간 목표치를 체울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나 문제가 생겼네.”
그의 말투에서, 이 문제에 대한 것을 얘기하고자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문제라면?”
“도시급 대형 실드. 단순히 벙커에 틀어박히는 게 아니라 그곳을 중심으로 도시를 만들고 싶다면 필수적인 물건이지. 38구역 돔에서 여분의 핵심 부품을 지원해주기로 했는데, 일주일 전부터 연락이 끊겨 버린 거야. 공격이 있었다던가, 습격의 조짐이 있었다는 무전 한마디 없이 갑자기 뚝, 하고.”
스윽-
총장은 그렇게 말하며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반듯한 종이를 내 쪽으로 밀었다.
“그래서 ‘캐러밴 BDSM’에게 정식으로 의뢰를 하고자 자네를 불렀네. 선수금 2천만, 성공시 추가로 4천. 곳곳에 산재해 있는 돔의 시설에 부장급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주지.”
“부장급 권한이라…. 혹시 엑소슈트에도 해당됩니까?”
“한 기 정도라면.”
“핵심 부품의 크기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렇게 크지 않다고 들었네. 부품을 담을 완충 케이스까지 해서 40kg정도 한다고 하더군.”
“상자 하나 정도 사이즈라….”
다른 것도 아니고 돔의 핵심 전력인 엑소슈트까지 허용하는 총장의 태도에 교수는 다시 한번 계약서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총 보수 6천만. 이것만 해도 상자 하나 정도 짐을 옮기는 대가로 과한 수준인데 돔이 세력권을 관리하기 위해 곳곳에 심어둔 ‘스테이션’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부장급이면 거기 관리 소장보다 한 단계 위니까, 막말로 우리가 ‘여기 기름 있는 거 다 뽑아와라’ 해도 그쪽에서는 따를 수밖에 없다는 소리.
‘개 수상해!’
보수가 과하면, 뭔가 옵션이 잔뜩 들러붙었다는 소리다. 예를 들면….
“그렇게 돈이 쪼들리는데 6천만이나 써가면서 외부 인원을 사용할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 전투력이라고 해봐야 엑소슈트를 포함한 1개 소대보다 못한 정도인데.”
생명수당이 붙었다거나?
“BDSM이 엑소슈트 1개 소대라…. 과소평가가 자학에 가까운 수준이군.”
잠시 침묵을 지키던 총장은 커튼에 가려져 있던 찬장에서 영롱한 빛깔의 위스키 한 병과 잔 두 개를 꺼내더니, 자신의 몫을 따라 단숨에 마셔버렸다.
“….처음에는 통신환경 문제인 줄 알고 예정대로 운송팀을 보냈다네. 잘 가다가 39 구역에서 정기 연락을 마지막으로 이번에도 아무 징조 없이 연락이 끊기더군.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을 확신한 우리는 감찰부 베테랑 요원과 엑소슈트 1대가 포함된 정예 위력팀 추가로 파견했고 마찬가지로 연락이 끊겼다네. 마치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처럼 말이야.”
쪼르르륵-
총장은 책상 한 켠에 쌓여있는 편지 무더기로 눈길을 던지며, 말없이 잔에 독주를 채웠다. 빌딩 숲을 뒤덮은 반구형 실드를 형상화한 돔의 마크가 새겨진 편지들. 아직 실종자로 처리되어 전달되지 못한 전상자 통지서일 것이다.
그리고 황무지에서 실종자는 대부분 사망자와 동일한 의미이다.
“자네 말대로 단순 전투력이라면 소리 없이 사라져버린 엑소슈트 분대와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작전 수행력에 대한 얘기라면 나는 자네들과 견줄만한 사람이 이 황무지에 없다고 생각하네. 공식적인 보수는 6천만이지만, 만약 실종된 아군, 특히 엑소슈트를 회수해온다면… 1억을 더 얹어주지.”
“그러니까 따듯한 모래바람이 부는 40번대 구역을 벗어나 방사능 폭풍이 몰아치는 30번대 구역으로 가서, 소리 소문없이 사람을 잡아가는 정체불명의 적을 뚫고 물건을 가져오라는 말씀이셨네. 계약서에 이렇게 써놓으면 될 것을 뭐 하러 이렇게 복잡하게 처리하십니까?”
“외부에 흘러나가선 안 될 일이잖나. 자네가 못 알아차릴 리도 없고.”
“흠….”
보수는 훌륭하지만, 미지의 위험부담이 따르는 일.
교수는 일단 계약서를 품에 집어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료들이랑 좀 상의하고 다시 얘기하도록 하죠.”
“….어쩔 수 없지. 최대한 빨리 부탁하네. 적어도 사라진 사람들이 ‘실종자’로 분류될 시간 안에 말이야.”
까딱.
교수는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 총장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일단 벡스를 찾고, 이안도 사업차 돔에 머물고 있다고 하니 그 둘을 불러모아서 얘기해봐야 할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