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49
****
[DAY-1]수송기가 나를 떨어트려 준 것은 14특작대 주둔지 ‘인근’이었다.
‘거, 미안하게 됐수다. 상부에 보고도 안 하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데다, 위에서도 관심을 끈 녀석들이다 보니 정확한 위치가 파악이 안 돼서. 그래도 보급 떨어지면 땅에 닿기도 전에 가져가는 놈들이니 보급 위치에 내리면 금방 와서 데려갈 거요.’
얼굴이 퉁퉁 부어서는, 더플백도 없이 방독면 하나 달랑 들고 14특작대로 간다고 말했더니 보급병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내게 작은 배낭을 챙겨서 넘겨주었다.
그렇게 앞에는 보급가방을, 뒤에는 낙하산 가방을 메고 어찌어찌 정글 속으로 떨어졌다.
낙하산이 나무에 걸려 낑낑거리기를 30분. 탄띠에 차고 있던 대검으로 겨우 끊어내고 근처에 떨어트린 총을 찾는데 또 한 시간.
습한 열대우림에서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움직이다 보니 채 두 시간이 안 돼서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여기서 기다리면…. 되는 건가?”
털썩.
지이익-
보급지점 이라기 보단 그냥 나무를 좀 밀어놓은 공터 같은 곳에 앉아 보급병이 챙겨준 가방을 열어보니, 이것저것 실용적인 보급품이 알뜰하게 담겨 있었다. 모포와 비누. 판초우의에 작은 침낭. 그리고….
부스럭-
“오, 초콜릿이네?”
익숙한 비닐 포장에 반가움을 느끼기도 전에 뒤에서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리고.
콰악!
“케엑, 윽!”
우악스러운 팔뚝이 순식간에 내 목을 휘감으며, 나는 저항 한번 하지 못한 채 기절하고 말았다.
****
매캐한 연기. 인공적인 바람 새는 소리만 가득한, 황토빛 연기가 가득한 공간.
‘아들아. 포기하지 말거라.’
그리고, 아버지의 유언.
또 그 꿈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매일같이 찾아오는 악몽.
꿈속의 아버지는, 화학가스에 흐물흐물 녹아내리면서도 목소리만은 또렷했다.
‘포기하지 말거라. 죽어선 안 돼.’
그 녹아내리는 손이 흐느적거리며 다가와, 나를 품에 안았다. 이미 돌아가신 걸 알지만 그분을 마주 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죽지 않을 거지?’
‘네.’
‘멍청한 짓을 하지도 않을 거고?’
‘네.’
‘그래야지. 그래야, 내가 널 위해 죽은 게 헛수고가 되지 않을 테니까.’
아아, 아버지.
손아귀 사이로 핏물이 되어 녹아내리는 아버지를 보며, 내 의식은 다시 아득해져 갔다.
.
.
.
.
.
벌떡!
“오, 신병. 근성 좋은데? 벌써 일어나고.”
기억에 있는 목소리.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에 들었던 목소리와 같은 목소리였다. 군복 바지에 나시 티 한 장만 걸친, 격투기 선수 같은 몸을 한 흑인 남자.
그는 자신을 존이라고 소개하며, 이곳이 14특작대라고 설명했다.
“그럼 여기가…. 군부대라는 말입니까?”
“그 묘한 침묵이 뭔지 묻고 싶지만, 대답을 알 것 같으니 참기로 하지. 일단 군 소속은 맞아. 14 특작대. 3소대장 존 에이브럼스다.”
교수는 그가 앞으로 다가오자 훅! 하고 끼쳐 들어오는 퀘퀘한 냄새에 콧잔등을 찡그리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기실, 그 냄새는 이 남자뿐만이 아니라 막사 전체에 진하게 배어있었다.
언제 빨았는지 곰팡이가 슬다 못해 사람이 누운 자리만 빼고 시커멓게 변해버린 접이식 침상. 총기는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고 군복도 무슨 고등학생 교복처럼 각양각색으로 개조되어있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막사라기보단 패잔병이 급하게 버리고 간 흔적 같은 장소.
무엇보다….
“워후! 신형 방탄이다!”
“깨끗한 모포야!”
“속옷! 속옷도 있어!”
“FUXXXXXX!!!! 양말이다! 하얗고 신선한 양말이야아아아!!!!”
웬 거지 떼의 손에 그의 보급가방이 마구 약탈당하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 속에서 의구심을 가득 담아 존을 바라보자, 그는 곱슬한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어….음…. 그러니까, 재보급이다 재보급. 원래 저런 새 물건들은 제대로 길을 들이지 않으면 중요한 순간에 사고를 치거든. 그래서 저런 사나운 물건들은 고참이 잘 맡아주고, 미숙한 신병에게는 백전노장의 훌륭한 보급품을 새로 주는 거야. 오케이 키드? 이해했지? 부대 문화 같은 거야, 문화!”
“쓰으으읍- 하아아아~ 공산품의 냄새. 문명의 향기로구나. 새 팬티라. 드디어 매일 팬티에 난 구멍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 호모 고릴라로부터 해방이로군.”
“이봐 MJ, 미안하지만 그 팬티는 내게 줘야겠는데. 내 침상은 사무엘의 옆자리란 말이다.”
“엿이나 쳐먹어, 예티! 신병은 아시안이라고! 곰 같은 네놈이 입으면 이 팬티는 티팬티가 되어버릴 거다! 왜, 아예 곱게 차려입고 사무엘한테 오늘이 D-day라고 속삭여주지?”
“….저게?”
“씨발. 14특작대에 온 걸 환영한다, 키드.”
어떻게든 수습하려던 존은 서로 입고 있던 팬티를 벗어 누구 팬티가 더 더럽고 닳았나를 비교하는 소대원들을 보며, 신병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
아주 오래전 만화 중에,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는 야구만화가 있었다.
14특작대 사람들은 거기에 나오던 인물들과 많이 닮아있었다.
“어머, 예.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 나느은~ 이래 봬도 양식이 있는 사람이니까. 미성년자는 안 건드린단다?”
거대한 체구에 턱밑에만 작게 수염을 기른, 터질 듯 꽉 끼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그 군복 바지를 돌핀 팬츠마냥 짧게 잘라낸 남자.
사무엘 마르체티, 통칭 미스(미스터) 마티는 새로 들어와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가장 잘 챙겨준 사람이었다. 다들 의심스러운,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봤지만, 본인 말로는 순수한 ‘모정’에서 나온 보살핌이라고 했다.
못쓰게 된 옷을 뜯어 옷을 수선하는 게 취미인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내 곁에 앉아서 다른 부대원의 찢어진 군복을 수선하고 있었다.
“….손 대지마.”
“후훗, 까칠하긴. 정말 그런 뜻이 아니라니까. 내가 좀 특이하고 아주, 아주아주아주아주 많이 굶주리긴 했지마안, 지킬 건 지킨다구. 우린 동료잖아? 쿨쿨 자다가 쓰지도 못할 구멍이 온몸에 숭숭 뚫리기 싫으면 서로 존중하는 게 당연한 거지.”
“개소리. 그래서 내 물건을 죄다 가져가고, 거지도 입지 않을 것 같은 물건만 내게 넘겨준 건가?”
마티가 지금 내 옆에 앉아 있는 이유는 내 서툰 바느질을 보다 못해 한 수 가르쳐주기 위해서였다. 그날 내 작은 가방 안의 보급품은 물론 자는 사이에 군복까지 싹 털려버린 나는, 소대원들이 버리고 간 백전노장의 헌 보급품을 받아 어떻게든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다들 마구잡이로 네 물건을 빼앗아 간 것 같지만, 널 배려해준 거란다? 일단 네가 그렇게 소중히 가지고 다니는 방독면을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잖니, 키드? 우린 다 건드려도, 사연이 있는 물건은 손대지 않아요. 응?”
“배려 좋아하시네. 가진 것 다 뺏어가고 온갖 귀찮은 허드렛일 시키는 게 어느 나라 군대 배려야? 굳이 거짓말할 필요 없어, 마티. 다 들었다고. 신병은 필요 없으니 보급이나 빵빵하게 들고 왔으면 좋겠다고 하던데.”
14 특작대는 식사 시간이 되면 1소대 막사에 모여 다 같이 식사를 하는 관습이 있었다. 거기서 다른 병사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내가 오던 날 수송기 소리에 다들 막사에서 튀어나와 불을 처음 발견한 원시인마냥 하늘을 쳐다봤더랬다. 그리고 거기서 떨어진 게 커다란 상자가 아니라 사람인 것을 확인하고 한마음 한뜻으로 탄식을 내뱉었다고.
내가 아니꼽다는 듯 대답하자, 마티는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입을 가리고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더니(저항하려 했는데 무슨 공업용 크레인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집게손가락으로 곳곳에 늘어져 있는 특작대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야아~ 다들 신병이 오면 각오를 해야하거드은.”
“각오?”
“으응. 우리도 프레시한 친구들이 자꾸 죽어 나가면 가슴이 아프잖아? 가끔 우리 손으로 죽여야 할 때도 있고. 아무래도 불편하지.”
“그 정도로 많이 죽어 나가는 거야?”
“그렇지이. 지난 3개월 사이에 신병이 여덟 명 들어왔는데, 아직 살아있는 건 너밖에 없어. 그래서 다들 그렇게 아귀처럼 달려들어서 장비를 모조리 털어간 거야. 피도 눈물도 없는 우리 킹 중령님도, 소대원들이 총이고 군화고 죄다 약탈해갔다는데 애를 빈몸으로 전장에 밀어 넣겠어?”
“일부러…. 전투불능으로 만들었다고?”
‘그런 의미였나.’
마티의 말을 듣고 보니 사납게만 느껴지던 부대 사람들이 그 사나운 외모와 말투 속에 따듯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1소대장 루윌이 구겨진 전투식량 껍데기(내 보급품이었다)를 들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뭔가를 물어보다 히죽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어이, 키드! 너도 할래!”
“….뭘.”
“뭐긴 뭐야, 게임이지! 이런 데서 할 일도 없이 멍하니 있으면 금방 미친다? 살고 싶으면 멘탈 관리도 철저히 하는 게 군인이란 말이지!”
‘살고 싶으면, 이라….’
루윌의 말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다시 떠올랐다. 독극물에 속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든 방독면을 넘겨주려 애쓰는 나를 제압하고 있던 아버지. 아직도 아버지가 왜 그렇게까지 나를 살리려 했는지 완벽히 이해할 수 없었다. 부정이라는 것은, 아직 어린 내가 이해하기에 너무 광활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살려주신 목숨이니. 적어도 함부로 내버려선 안 되겠다는 생각은 있었다.
“좋아. 나도 끼워줘.”
신병이 죄다 죽어 나가는 이곳에서 소대장을 할 만큼 살아남은 사람의 말이라면 충분히 들을 가치가 있겠지. 이 사람들과 친해지자. 친해져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우자. 어떻게든 살아나가서, 어머니를 만나는 거야.
어머니를 생각하니 벌써 기분이 나아지며 활력이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멘탈관리. 벌써 중요한 것을 하나 배운 것 같았다.
“좋아! 기세가 아주 마음에 드는군. 그럼 걸어. 게임 주제는 내기거든.”
“내기? 뭘 가지고?”
씨익-
“키드. 바로 너야. 네가 여기서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지.”
루윌이 내민 비닐 뒷면을 보자, 각 소대 아래로 사흘, 나흘, 일주일 같은 시간과 함께 슬슬 익숙해져 가는 특작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언제 죽을지 내기를 한다고?”
“흐흐흐흐. 전통이지. 지금 네가 있는 3소대는 14 특작대에서 가장 부유한 상태란 말이지? 보나마나 네 보급품을 홀라당 쳐먹었을 테니까. 우린 당연히 그 꼴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이렇게 내기를 하는 거야. 해당 소대원은 전부 신병의 ‘생존’에 올인. 나머지는 뭐…. 현실적으로 배팅하는 거지.”
“넌 어디에 걸었는데.”
“나? 2주. 생각보다 눈빛이 또렷한 게, 멀뚱히 서서 죽을 것 같진 않더라고.”
내가 비닐에 빼곡히 적힌 소대원들의 이름을 보다가 고개를 휙 돌리자 마티가 바느질도 멈춘 채 먼 산을 보면서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2주라….”
다시 한번 그 내기판을 살펴보았다. 몇 명은 불참했는지 듬성듬성한 타 소대에 비해, 한 명도 빠짐없이 빼곡하게 서명한 3소대 내기 목록.
——-
셰퍼드 : 생존 – 하쉬 초콜렛 바
M.J : 생존 – 보급 미디엄 런닝 새것 한 장
예티 : 생존 – 보급 팬티 새것 한 장
도리스
팔머
리암
.
.
.
.
체스터 킹 : 생존 – 12번 정도 우려낸 블루 마운틴 원두 30g
——-
그렇게 악착같이 아귀다툼을 벌여 하나씩 손에 쥐고 싱글벙글하던 내 보급품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내기 목록에 올라와 있었다.
그 목록 옆에 쓰여진 기간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같았다.
[생존]“보통 이번 작전이 끝나고 다음 작전으로 넘어갈 때까지 살아있으면 온전히 생존한 것으로 쳐주지. 이거 보통 빅 게임이 아니라고? 3소대 녀석들은 겨우 속옷 쪼가리나 걸었지만 나머지인 우리는 ‘고향에 남겨둔 애인과 꿈같은 하룻밤’ 이나 ‘평생 모아온 저축’ 같은 걸 걸었다고.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거 아무리봐도 3소대 쪽이 크게 수지맞는 장사야. 내기 안 하면 후회한다, 키드?”
뭐라고 해야 하나. 감동은 아니고. 좀 묘하게 근질근질한데 입 밖으로 내기 뭐한 그런 기분이다.
“….괜찮네, 그거.”
“음? 진짜 하게? 그냥 놀리려고 가져왔는데.”
“전통이라며. 코리안의 네츄럴 본 유교맨(Natural Born Yugyo-Man)이라 전통이나 관습 같은 걸 절대 무시할 수 없거든.”
교수는 히죽거리는 루윌에게 펜을 받아, 3소대 이름 맨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
박교수 : 생존 –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진 것 전부 다.
——
“하, 하하하하! 올인이라니! 키드, 너 제법이구나! 이번 게임은 아주 제대로겠어! 하하하하하하!”
잔뜩 그을린 루윌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맺혔다.
마주보고 있던 교수에게도 구깃구깃한 비닐 위에 새겨진 글씨처럼 삐뚜름한 미소가 맺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