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5
Chapter.2 위기는 기회는 위기다(5)
***
쿠우웅! 카가가각! 쿠궁!
“크으으으!!! 으으으으으!!!!”
충격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묵직하다는 생각과 함께, 확신이 들었다.
‘먹혔다!!’
충격은 있지만, 달라붙거나 당기는 감각이 없다는 것은 놈들이 내가 급조한 벙커를 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지금 공격해오는 뮤트 무리는 인간형 개체부터 짐승의 몸을 빌린 놈들까지 수많은 종류가 섞여 있지. 그 만큼 돌진 속도에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지금 밀고 들어오는 놈들은 아마 발이 빠른 4족 보행형 개체들 일거야. 이놈들이 다 휩쓸고 가면 다음 무리가 도착할 때까지 잠깐 여유가 생긴다. 그때, 뒤로 빠진다!’
“쿨럭!”
순간 목구멍으로 비릿한 핏덩이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대부분의 충격이 방패를 통해 땅으로 흘러들어 갔는데도 이 지경이군.
콰직!
“크아악!”
방패의 내구도가 다 닳았는지, 방패를 타고 넘어가던 야수의 발톱이 전면에 비스듬히 세워둔 카이트 실드의 약한 부분을 뚫고 내 눈두덩이를 베고 지나갔다. 날카로운 통증보다도 발톱에 차인 충격에 정신이 혼미하였다.
– 스피드 웨건 : ….이정도면 할 만큼 했다. 끄자.
– 홀리 : 이러다가 정말 죽겠어요….. 제발!
– 하이웨이나초맨 : 무슨 소리여. 아직 살아있는데. 계약은 계약이지.
– 홀리 :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이건 그냥 게임이 아니라구요! 리얼리스틱 모드에서 저렇게 죽어버리면, 자칫 잘못하면 현실에서도….!
– 화약과 피 : 계약과 신뢰도라는 것은 때론 일신의 안전보다 더 무게를 가지곤-
쓰읍. 거 되게 시끄럽네.
“시스템. 대화창 off”
핏-!
대화창을 꺼버린 다음 시스템 UI 같은 것들도 모두 꺼버렸다. 부서진 방패를 옆으로 치우자 전장의 소음 속에서 묘한 고요를 느낄 수 있었다.
‘1파는….. 전부 지나간 것 같군.’
베인 상처에서 흐른 피가 눈으로 흘러들어가 시야가 붉게 보였다. 전장에 홀로 남겨진 듯한 느낌도 잠시, 저 멀리 먼지를 날리며 다가오는 무리가 보였다.
‘느린 놈들이다. 2족 보행형, 대부분 함락된 도시의 병사들이겠지.짐승의 몸을 빼앗은 놈들보다 훨씬 복잡한 사고를 할 수 있을거다. 아니, 지성의 유무를 떠나서 내 몸이 더는 버틸 수가 없어.’
지금 당장 뒤로 빠져야 하는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땅에 뿌리를 박은 것 마냥 굳건했다.
‘왜 이러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데미지가 쌓였나?
…..아니야. 그만큼 충격을 받았다면 방패와 접촉한 부위에 분명히 눈에 띄는 상처가 남았을거야. 내 몸은 그정도로 약하니까. 그럼 갑자기 왜…..“
핑- 핑-
그순간, 교수는 시야 한쪽 구석에서 빨간색으로 점멸하는 불빛을 볼 수 있었다. 꺼버린 시스템 UI가 보내는 신호다.
띠링-!
[특성 – 명예로운 영혼 :‘은빛 함성의 동료들이 분명 내 뒤에서 기다린다고 했어. 이 규모…. 단독행동을 하는 용병 몇 명이 막을 수 있는 규모가 아니야. 심지어 그들은 나 때문에 전열보다 좀더 앞에 자리를 잡았을거야. 나로 인해 그들이 위험에 처했다. 내가 여기서 물러날 순 없어! 내가 이 자리를 지키며 돌파력을 약화시킨다면 용병들이 놈들을 처리할 수 있을거야!’
/ 당신의 영혼에 새겨진 명예로움이, 당신의 후퇴를 거부하고 동료를 위해 자리를 지키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젠 기가 차서 웃음도 안나오네.”
이 특성 뽑을 때 부터 언제 한 번 크게 발목 잡을 줄 알았지만, 이렇게 극적으로 터트릴 줄은 몰랐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분명 오장육부가 뒤집어지게 화가나는데, 이상하게 머리는 맑았다. 내가 뭘 했지? 아, 피가 났구나. 생각보다 깊이 베였나봐. 피가 좀 많이 났네?
.
.
.
피가 주욱 빠지며 혈압이 떨어져서 그런지 머리끝까지 차오른 흥분과 긴장이 피와 함께 스르륵 흩어지는 느낌이다. 긴장이 풀리자 어께에 들어간 힘도 빠졌다.
멍한 상태로 한 가지만 생각했다. 내가 뭘 하면 살 수 있을까.
내가.
뭘.
하면.
살 수 있을까.
.
.
.
.
내 능력으로는 한계다. 첫 충돌에 방패의 내구도는 너덜너덜한 상태에, 방패를 지탱하던 팔에 힘이 안 들어가는 것을 보니 오른쪽 어깨는 탈구, 충격으로 내장도 좀 상한 것 같고.
다리는 특성의 효과로 발이 묶였을 뿐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명예로운 영혼]의 효과로 이곳에서 움직일 수 없다고 했지. 특성의 효과라도 결국은 내가 발동시키는 것. 내가 지금 떠올린 방법 중에 동료를 위할 수 있는 방법이 이 자리를 지키는 것 뿐이라 그쪽으로 선택이 고정된 거야. 만약 동료를 위하면서 내 몸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그쪽으로는 움직일 수 있겠지.’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고개를 들자 붉은 시야 속으로 전장이 확확 다가왔다.
‘후방, 좌익 한쪽 구석. 익숙한 얼굴이 몇몇 보이는군. 정말로 용병단이 뭔가를 하고 있어.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데, 나를 부르는건가?
그 옆에는 전투 중인 백인대장 예하 부대. 의미 없다. 놈들은 나를 들여보내기 위해 방진을 열지 않을 거야. 우측은? 이미 무너졌군. 그리 약해보이진 않았는데, 7급 개체라도 온 건가? 우측에서는 멀어져야겠어.
중앙, 다른 곳에 비해 소란스럽다. 전투가 격화되고 있어. 승리하는 쪽? 아니면 그 반대?’
시선을 집중하자 조금 더 여러 가지 장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붉은 늑대를 향해 창을 내지르는 병사의 으스러질듯 다문 이빨. 피가 철철 흐르는 팔뚝을 부여잡고 겁에 질린 어린 병사. 그리고 그 병사의 팔뚝을 향해 가차 없이 검을 휘두르는 백마를 탄 기….사….?
‘잠깐. 뭐였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것을 본 것 같은데.
순간 정신이 확 돌아오며 시간이 늘어지는 듯한 감각이 멀어졌다. 백마? 백마에 중앙에 홈이 크게 파인 검을 든 기사?
혼란스러운 전장에서도 확 눈에 띄는 검은 갈기에 눈처럼 새하얀 몸을 가진 말과, 저런 독특한 검을 쓰는 기사.
보자마자 떠오르는 캐릭터가 있기는 한데….. 그 여자가 킹스랜드를 떠날 리가 없는데?
카앙!
그 순간, 무리 속에서 갑자기 뛰어오른 야수의 발톱이 기사의 바이저를 긁으며 투구를 날려버리고, 풍성한 금발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투구 안쪽에 숨어있던 여기사의 얼굴은 피와 살점이 튀기는 전장에서도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할 만큼 아름다웠다.
충격으로 몸이 젖혀지는 탄력을 이용하여 물 흐르듯 야수의 목을 날려버린 기사는, 자신의 검을 높이 들어올리며 외쳤다.
“두려워 말라!!! 로드릭의 전사들이여!! 왕의 기사가 너희와 함께할 지니! 그대는 누구인가!!!!”
맑으면서도 가슴 깊숙한 곳을 울리는, 마치 전쟁의 여신과 같은 목소리가 쓰러진 병사들의 귓가에 울렸다. 공포와 피로, 고통에 절어있던 병사들의 눈에 의지와 생기가 돌며 무언가에 홀린 듯 기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로드릭의 방패들이여! 대답하라! 그대는 누구인가!!!”
“로, 로드릭의…. 방패.”
“로드릭의 방패!”
“가족을, 국가를, 인류를 위해 선봉에 서는 자!”
쿵! 쿵!!
병사들은 검으로, 창으로 방패를 두드리며 화답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쿵! 쿵!!
“내 뒤에 남은 가족을!”
“스러져갈 삶을!”
“앞으로 태어날 생명을 위하여!”
“그렇다! 우리는 숭고한 로드릭의 전사로서 약한 이들의 앞에 검을 바칠 것을 서약했으니! 무기를 들라! 앞으로 향하라! 언제나 그렇듯! 우리의 태양은 고향의 품에서 떠올라!”
‘전장에서…..질 것이다.’
“전장에서 질 것이다아아!!!!”
“전장에서 질 것이다아아!!!!”
“전장에서 질 것이다아아!!!!”
“전장에서 질 것이다아아아악!!!!”
기사의 입에서 나온것은, 모든 로드릭의 병사와 기사들이 전투에 앞서 하는 의식과도 같은 맹세. 로드릭 전가(戰歌)였다.
“전군! 앞으로오오!!”
“우아아악!!!”
“와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
기세가 바뀌었다. 아니, 단순히 기세만 바뀐 게 아니었다. 마음이 무너져 울부짖던 병사가 창을 들고, 고통에 신음하던 병사가 적의 목덜미를 노린다.
예하부대의 전투력을 최고 250% 뻥튀기 하는 [전투 찬가].
로드릭 왕국의 적을 대상으로 반경 400m 안에 있는 모든 아군의 체력과 스테미너, 방어력을 3lv 상향 시키는 [왕의 기사가 함께한다].
그리고 기사 계열 스킬중 최고봉이라 불리는, [강인한 의지]의 최종 강화판 광역 버프 [불요불굴(不橈不屈)]등 대규모 버프와 지휘, 전쟁에 특화된 특급 히어로 유닛.
[전장의 태양]샤를롯 데 아가트. 그녀와 기사단이 전선의 바깥쪽에서 교수가 있는 좌측 전선을 향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좌측 전선의 전투가 순식간에 끝날것을 의미했다.
***
우익이 생각보다 빨리 무너진 덕분에 중앙군이 압박을 많이 받고 있었다.
‘뮤트와의 전쟁은 이제 시작이야. 이미 앞의 두 도시가 무너졌으니 이제 투란이 최전방이다. 다행히 투란은 교역이 활발한 도시라 보급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이 뒤로는 도시간 거리도 멀고 방어 준비도 성벽도 이곳보다 훨씬 낮은 도시들뿐이야.
전투를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투란의 전투력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측 전장은 이미 진형이 무너져 난전에 돌입한 상황. 감염이라는 특수 상태이상을 상대하는 측에서 난전은 무조건 희생을 강요받는 상황이다. 최대한 전투를 빨리 끝낼 필요가 있었다.
‘이쪽에서 전황을 유리하게 만들어야 해!’
좌측 전선은 이 게임 끝판왕 히어로 유닛중 하나인 샬롯의 등장으로 전체적인 전투력이 성장한데다 샬롯을 포함한 기사단이라는 최강의 창 까지 보유한 상황.
게다가 어쨌든 교수가 만든 ‘구조물’ 덕분에 그것을 피해가려던 뮤트가 갈라지며 돌파력을 잃어버렸고, 덕분에 좌측 전선은 한껏 앞으로 돌출된 형태를 띠게 되었다.
‘보통 상황이라면 자칫 전위가 포위당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지만 우리 쪽에는 샬롯과 기사단이라는 비대칭 전력이 있는 상황. 2차 웨이브 뒤쪽으로는 적이 보이지 않으니 우리가 가장 먼저 적과 조우한 다음 적을 분쇄한다면, 돌출된 좌측 전선을 그대로 끌어내려 중앙군과 전투중인 뮤트의 뒤쪽을 포위하는 형태로 만들 수 있다.’
문제는, 교수는 지금 일개 병사일 뿐 지휘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
‘지휘를 할 수 없다면, 그렇게 지휘하도록 만들면 되지.’
다행히 마을에서 친목질을 열심히 한 덕분에 그가 쓸 수 있는 패가 하나 더 있었다.
‘다리는…. 이제 움직인다!’
꿈적도 안 하던 다리가 움직인 다는 것. 그것은 교수가 이곳에서 자리를 비워도 큰 영향이 없는 상태라는 반증이었다.
교수는 1차 웨이브의 충격으로 땅에 더 깊숙이 박혀버린 방패들 중 제일 멀쩡한 것을 하나 골라 뽑은 다음, 재빨리 전선에서 슬금슬금 앞으로 나오고 있는 은빛 함성 무리에 합류했다.
“애늙은이! 덩치값은 하는구나! 설마 했는데 저 몬스터의 급류 속에서 살아남다니!”
원형진의 형태로 저들끼리 뭉쳐 슬금슬금 앞으로 기어나오던 용병들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교수의 어깨를 툭툭 치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커다란 방패와 짤막한 한손검을 들고있던 왈도프는 절뚝거리며 방진 안으로 쓰러지듯 들어온 교수를 보며 웃어보였다.
“고생했다. 이제 뒤로 빠져서 쉬어. 어이! 우리도 천천히 원진을 유지하며 뒤로 물러난다!”
“잠까아안!!!”
용병 무리를 통솔하고 있던 왈도프는, 내가 후퇴하자는 명령에 토를 달자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애늙은이. 우리가 널 구하러 왔다고 해서 착각하는 모양인데, 우리 애들중에 너만 특별히 귀한게 아니거든? 챙길놈 다 챙겼으니 이쯤에서 빠져야 한다고.”
‘역시. 조합원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 상당히 날카롭게 반응하는군.’
여기서 물러서면 안된다. 이 게임에는 적당히라는게 없으니, 이득을 볼 수 있을때 최대한 봐두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테니까.
“아아, 그거야 저도 알죠. 그런데 저 앞에 뭐 중요한 걸 놓고 오신 것 같은데?”
“뭐? 애늙은이, 너 머리 다쳤냐? 그게 뭔 헛소리야?”
“이거 충격으로 회까닥 돌아버린거 같은데? 왜, 가끔 전장 처음나가는 초짜들 그러잖수”
“어이, 손 비는 놈 있으면 두 명만 와서 애 좀 챙겨봐!”
왈도프와 조합원들의 걱정섞인 욕지거리를 들으며 교수는 악동처럼 웃었다. 용병만큼 제 몸 귀하게 여기는 녀석들도 없지만, 그런 녀석들도 한방에 설득할 수 있는게 있거든.
“아뇨, 분명히 놓고 온 게 맞습니다. 최전선에서 적을 막아냈다는 전공과, 끝내주는 상여금을 말이죠!”
자고로 용병과 대화를 하고싶으면, 돈 얘기부터 꺼내는게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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