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53
Chapter. 10 납과 은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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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뭔가 붕 떠있는 느낌이었는데, 방금 결심이 서고 나니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배때지에 기름이 껴서 몸이 굼떠졌던 거야. 병신같이.”
“음? 글쎄…. 컨디션이 딱히 나빠진 것 같지는 않아 보이던데. 여기 있으면서 가끔 너 방송도 봤는데, 막 날아다니는 거 보면 오히려 더 예리해진 것 같기도 하고.”
“그거 말고. 정신적으로 좀 날이 무뎌졌다는 뜻이야.”
하루를 쉬면 다음 날 하루를 굶어야 하는 삶에서 밥이 남아서 간식까지 챙겨 먹는 삶으로. 정체 모를 칼로리 바에서 고기와 채소, 양념까지 곁들여진 식단으로.
기본적인 생활 여건이 충족되면서 지금까지 팽팽하게 유지되어오던 긴장의 끈이 느슨하게 풀어진 것이다.
전보다 위험 요소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늘어났다고 볼 수도 있지. 돔 전체에서 내 이름으로 상품을 팔고 지난번 전투에 대한 이야기가 끝없이 돌고 있는 상황. 머리가 있는 사람이면 내가 돔에게 뭐 한 몫 단단히 챙겼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돔과 우호 관계에는 있지만 정식으로 소속되지는 않아 외진 곳에 따로 떨어져 살고.
구성원은 넷, 심지어 그중 하나는 전투력은커녕 인질로 쓸 수도 있고, 여러 조각 내서 공포감을 조성하거나 상대가 이성을 잃게 만드는 데 탁월한 10살짜리 소녀에.
그런 소집단답지 않게 가진 건 웬만한 돔의 부호 못지않은 무리.
쉽고 알찬 먹잇감. 그게 우리 BDSM의 현주소였다.
“네 말을 듣고 보니 너무 안일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스캐빈저 뿐만이 아니지. 돔 내부에 있는 피자, 옷이나 만드는 비교적 ‘안전한’ 사이코 갱 말고 황무지를 떠도는, 진짜배기 사이코 갱은 자기 이름을 날리는데 관심이 있는 경우도 많으니까. 영웅이라는 태그는 그런 놈들이 환장할 만한 먹이가 아니겠어? 일확천금을 노리는 스캐빈저에, 진성 살인광 싸이코에. 찾아올 놈이 한둘이 아니라는 거야.”
이안의 말처럼 우리는 지금 돈을 잔뜩 벌어야 할 처지였다. 미친 듯이 벌어서 벽도 세우고, 터렛도 깔고, 그 안에 자리 잡은 사람들도 아주 가루가 되도록 부려 먹어서 무임승차 같은 것은 꿈도 못 꾸게 해야 하니. 기본 인프라만 잡는데도 수억 실링은 족히 들어갈 것이다.
생각하다 보니 이렇게 가만히 처박혀서 우유나 마시고 있는 시간이 아까워 죽겠네. 다리가 근질근질하다고 해야 하나, 초침이 짤깍일 때마다 안달이 난다고 해야 하나.
따닥, 뜨드득-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손끝으로 왼손 마디를 튕기고 있노라니, 그걸 보고있던 이안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크흐흐흐. 바로 그거야, 박교수. 보자마자 눈빛이 좀 돼지 같아져서 걱정했는데, 회복이 빠르군. 이런 세상에서 달리는 법을 잊어버린 자는 금방 죽기 마련이거든?”
“….내가?”
“그래. 오래된 석탄처럼 말이야, 한번 불이 붙었으면 끝까지 불타거나,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차가운 돌덩이로 살았어야 한다고. 어중간하게 불타다 꺼져버리면 쓸모없이 바스러지고 습기가 차서 불이 붙지도, 단단하게 살지도 못하거든. 처음 봤을 때의 너는 끝내주는 고폭탄, C4나 셈텍스 같은 놈이었지. 잘 터지진 않지만, 치밀한 계산과 장약, 도화선이 어우러지면 산과 건물을 날리는 어마어마한 그런 인간. 겨우 2억 가지고 안주해버렸으면 내가 네놈을 산채로 불태워서라도 다시 일으켜 세웠을 거다. 뭐…. 내가 그러기도 전에 벌써 실행에 옮기려 한 녀석이 있긴 하지만.”
찰칵!
이안이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 소리에 움찔하는 녀석이 있었다.
“안 그래? 벡스.”
“….내가 뭘.”
“아닌 척하긴. 확실히 우리 셋 중에 깊게 생각하거나 그런 부분에서 가장 떨어지는 건 네 녀석이지. 하지만 본능적인 판단, 거기서 이어지는 행동이 가장 빠른 것은 너야. 교수라면 죽고 못 사는 네 녀석이 이렇게 젖은 화약 꼴이 난 교수를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잖아? 황무지의 생태에 가장 가까운 스캐빈저로 살아온 네가 말이야. 뭔가 했지? 그렇지?”
“….”
“벡스?”
“….잘 해결됐으니 된 거잖아. 그냥 넘어가.”
농담인가 했는데 뭔가 얼버무리는 듯한 벡스의 태도가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마을을 떠나고 나서 지금까지 계속 조용했지, 이 녀석.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벡스가 뭔가 음습한 수를 꾸몄다거나, 내가 충격을 줄 만한 일을 꾸미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얘가? 나를?
내가 의문 가득한 시선을 던지자 이안은 무릎을 두드리며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이거 진짜 몰랐나 본데? 교수, 가만 보면 너는 정보 몇 개만 툭툭 던져주면 귀신같이 답을 찾아내면서 그 대상이 주변 사람들이 되면 이상하게 무뎌지더라? 한번 벡스나 나를 적이라고 가정하고 생각해봐. 아니지, 적은 너를 위해 움직이지 않을 테니, 음…. 끔찍하게 냉철하고 잔인한, 하트먼 상사 같은 훈련관이라고 생각해봐. 나약해진 박교수의 날을 예리하게 세우기 위해 지금 상황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힌트를 주자면, 벡스는 언제나 행동하는 녀석이야.”
적어도 눈앞에 있는 일이라면 항상 우리보다 한발 빠르게 말이지.
이안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문장이 눈앞에 떠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많았다. 내가 마음 놓고 한 달씩이나 게임에 처박혀 있었던 것도 전부 이 녀석들이 우리 집에 상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접속기에서 나오자마자 주변에 커다란 문제가 산적해 있었고, 벡스는 그런 문제는 나 몰라라, 하고 신시아에게 전투 훈련 같은 것을 시키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스케빈저, 그것도 영토분쟁으로 24시간 피가 마를 날이 없는 45구역에서 온 벡스가 집 주변에 사람들이 자리 잡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고?
“야, 너 설마….? 그 마을?”
“킁! 죠 저 멍청한 자식은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내가지고….”
타악!
부끄러운 건지 얼굴이 벌게져선 이안의 손에서 브랜디 병을 낚아챈 벡스는 단숨에 병째 독주를 들이키더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 사람들. 처음 입주한 사람부터 당장 내쫓고 싶은 걸 꾹 참고, 그냥 지켜봤어.”
“거봐. 얘 뭔가 했을 거라니까? 그거지? 사람들이 있는 편이, 주변에서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내가 고개를 획 돌리자, 벡스는 번개 같은 반응속도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이안의 말에 동의해. 렙터와 전쟁이 끝난 다음부터 넌 뭔가 이루었다는 듯, 편안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구. 그게 돈 때문인지 사람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황무지가 편안해진 사람은 얼마 안 가서 다 죽었어. 그래서 내버려 둔 거야.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사람은 모이면 싸우게 되어있으니까. 그러면 사고가 나고, 우리 집 주변에 총성과 욕설, 피가 튀기도 하겠지만…. 최소한 네게 긴장감을 줄 수는 있을 거라 생각했어. 넌 자연스럽게 날카로워지고, 저들을 내치든 받아들이든 다시 적극적인 햅번으로 돌아오겠지. 설마 신시아가 그 가운데 끼어들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짜리몽땅, 그러니까 내가 옛날부터 너는 그런 수작 같은 거 부리면 안 된다고 누차 말하지 않았냐. 넌 변수를 컨트롤할 대가리가 안 된다니까.”
“나라고 거기서 신시아가 갑자기 내려갈 줄은-”
뜨드드득!
“….야, 나 생각 좀 하자.”
손끝으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서 말을 끊은 다음, 잠시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모여드는 사람들.
녀석들 말에 따르면 느슨해져서 긴장감을 잃어버린, 어디서 객사하기 딱 좋은 상태의 나.
그리고, 충분히 예상 가능한, 한정된 재화 아래 통제할 사람도 없이 모여든 사람들 사이에 일어날, 분쟁.
“하,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벡스는 뭔가 한 게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주변에 소문에 혹한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렇게 사람들이 모이면 뭔가 문제가 발생할 것을 알면서, 심지어 스스로는 외부인이 자신의 영역을 침입하는 것을 꺼려 하면서도 그냥 그들이 모여들게 내버려 둔 것이다. 모여서 사고를 쳐주길 바라며. 그 소음과 혼란 속에 내가 예전의 날카로운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라며.
대단히 원시적이고, 폭력적인 ‘일으켜 세우기’. 솔직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벡스의 앞에서 나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벡스. 그걸 내가 못 알아챌 거라고 생각한 거야?”
“….”
“그래. 솔직히 지금까진 눈치 못 챘지. 아침부터 정신없었고, 할 일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떠올리기만 하면 금방 알아챌 정도로 나는 너를 잘 알잖아. 결국, 언젠가 들통 날 일이었다는 거. 너도 알 거 아냐? 너도 내가 너를 아는 만큼이나 나를 알 테니까.”
“….그래도 미움받는 쪽이, 긴장 풀린 네가 어디서 어이없이 죽어서 돌아오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냥 느슨해졌다 정도가 아니라고. 정말 그렇게 된 사람들은, 다 죽었어.”
아. 이. 고. 머리야.
그러니까, 결국 녀석은 자기 딴에는 희생이랍시고 이런 선택을 한 것이다. 적당한 수준의 폭력 사태를 유도해 내 긴장감을 다시 유발하고, 그 과정에서 들통날 게 뻔한 방관을 선택하고 내게 의심과 미움받을 것을 감수하면서. 그러다 나름대로 만든 계획에 신시아가 끼어들며 어어- 하는 사이에 내가 튀어나온 것이고.
어쩐지 아침부터 안 보인다 했더니, 쥐달팽이 같은 걸 잡으러 나간 게 아니라, 일은 벌였는데 대판 꼬인 상황에서 갑자기 내가 튀어나오자 어쩔 줄 몰라 일단 튄 것이었다. 하긴, 누가 쥐달팽이 같은 쓰레기를 잡으러 새벽부터 나가겠어. 변명도 좀 말이 되는 걸 해야지.
“결론은, 박교수 네놈의 업보라는 소리다. 그러게 누가 목돈 좀 쥐었다고 헬렐레~ 해져서는 여러 사람 걱정시키래?”
꿀렁.
지끈거리는 미간을 쓰다듬는 내게, 이안은 벡스가 반쯤 마셔버린 브랜디 병을 건네주었다. 내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자, 이안은 어거지로 내 손에 그 병을 쥐어줬다.
“마셔 임마. 나는 그 누구보다 사람을 많이 죽이고, 또 죽는 것을 보아온 사람으로서. 벡스는 황무지의 가장 원색적인 면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안주해버린 네 상태를 걱정했던 거다. 그저 벡스는 늘 그렇듯 말보다 행동이 빨랐던 것뿐이지. 좀 거칠긴 했지만 깔끔하게 해결됐잖아? 시원하게 마시고, 다음으로 넘어가자고.”
“다음으로?”
“그래. 네 말대로 이제 하고 싶은 일도, 할 일도 많으니까.”
“……”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던 교수는 건네받은 브랜디 병으로 눈을 돌렸다. [Manana]라는 뜻 모를 이름 아래 2074년이라는 병입 년도가 있고, 그 아래의 짙은 갈색 액체에는 푹 숙인 고개로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는 벡스와 이 상황이 재밌어 죽겠다는 듯 히죽거리는 이안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한 명 더 있었다. 이 상황이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모를 이상한 표정에 이상한 팔을 단 남자.
교수는 그 광경을 마셔 없애버릴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들어 단숨에 남은 술을 비워버렸다.
쓰고, 독했다.
“푸하아. 더럽게 맛없네.”
“크흐흐흐, 달모어 62 같은 국보급 명주를 마시던 입에는 뭔들 맛이 있겠냐. 그래서, 이제 정리 끝났지? 큰일 하기 전에는 원래 거치적거리는 잡스러운 일들을 다 정리해야 하는 법이니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히죽거리는 이안의 목소리 사이로 홧홧한 알코올의 향과 함께 취기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문득, 아직도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벡스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서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려면 술을 존나게 처먹으라고 하던데.’
살짝 비틀거리며 둘 사이로 걸어간 나는, 그대로 양팔을 둘의 어깨에 걸쳐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엇!”
“우왁! 왜, 왜 그래 햅번!”
왼팔에 끌려서 당황하는 이안과, 눈에 띄게 부자연스러운 벡스.
“그냥. 고맙다고.”
“….응?”
“크하하하! 이거, 내가 잘못 들었나? 새침데기 Cherry. Park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데?”
“그냥…. 좀. 사람 여러모로 일깨워주고, 특히 벡스 너. 곤란하게 해가면서, 욕먹을 각오까지 하면서 나름대로 걱정해서 손 써준 거 아냐. 빌어먹게 고맙다, 썅놈 새꺄.”
적어도 이 녀석들에게는 술기운을 빌려서라도 고맙다는 소리 정도는 하고 싶었다. 굳이 이유가 필요 있나. 그냥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지.
“….햅번, 좀 징그럽다.”
“크흐흐흐! 내 말이. 그리고 그 팔로 어깨동무 같은 거 하지 마라. 무섭다.”
“염병…. 사람 무안하게!”
겉으론 소리를 질렀지만, 떨떠름한 얼굴의 둘을 보고 있노라니 입가에 웃음이 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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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리로 곧장 오셨다는 겁니까? 그렇게 술을 많이 드시구요?”
“아이 뭐. 싫으시면 다음에, 한 몇 달쯤 뒤에 술이 깬 멀쩡한 상태로 다시 찾아오고.”
“아아아, 아닙니다! 허허이, 참. 제가 나이를 먹으니 실없는 소리를…. 안으로 드시지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박교수의 최근 행태에 대한 반성회’를 성황리에 마친 뒤, 우리 셋은 서둘러 30번 구역으로 출발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안은 돔 사람들과 상담하여 거기까지 가는데 필요한 물자와 교역 물품의 선별을. 벡스는 그 위험한 곳에 데려갈 수는 없으니 우리가 갔다 올 동안 신시아를 맡아주고 교육시켜줄 시설을. 나는….
“이보게들! 드디어 박교수님이 우리 ‘생명공학부’에 와주셨다네!”
“오오오오! 드디어! 한 달 동안 영상으로만 연구하던 ‘그 소재’가-읍!”
와락!
“이 친구 끌고 들어가! 소재라니!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그리 말했거늘! 어찌 사람 몸을 가지고 소재니, 연구 재료니 하는 소리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까, 교수님?”
“아니, 나는 딱히….”
나는, 행정부 연구 시설을. 꽤 긴 여정이 될 것 같으니 그전에 갑자기 늘어난 식사량부터 해서 내 몸의 상태에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방문한 행정부 연구시설.
입구에서부터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한 번만 기회를! 우리 부서에도 제발 기회를!!’ 같은 소리를 외치는 타 부서 연구원들을 헤치고 생명공학부 사람들의 요란한 환영 인사를 받은 다음, 90분에 걸친 기초 측정 및 테스트 끝에 나는 원하던 대답을 어느 정도 들을 수 있었다.
“으으음…. 갑자기 식사량이 늘어난 원인은, 당연하지만 새로 돋아난 이 3형 변종의 팔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우우웅-
내가 특별히 측정용으로 제작된 악력계를 잡아당기며 측정을 진행하는 동안, 연구원 중 한 명이 내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일단 현상 자체가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상당히 있지만…. 결국 저 팔은 교수님의 몸에 일부이니. 본체에서 에너지를 끌어 쓰는 부분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 말은….?”
“힘을 쓰는 만큼 많이 드셔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여기 변화된 팔과 상체의 연결지점을 CT 촬영한 사진입니다. 다른 부분에 비해 뭔가 많이 있는 게 보이시지요?”
확실히, 다른 부분보다 좀 다르게 점이나 얼룩 같은 게 있어 보이긴 했다.
“염증, 혈전, 뭐 이런 것들이 제법 안에 있더군요. 세간에 떠도는 소설처럼 ‘사용자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저주받은 팔’ 같은 것은 아니지만 공급 없이 소모만 해대면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팔을 휘두르는 것에는 그렇게 큰 근력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셨죠?”
“예. 악력은 말도 안 되게 강합니다만, 다른 행동에서 그 악력만큼의 위력은….”
“그야 당연한 것입니다. 주먹을 휘두르는 행위에는 팔 뿐만 아니라 어깨, 허리, 허벅지, 종아리까지 전신의 근육이 다 들어가니까요. 아마 팔로 조르는 행위도 악력만큼의 위력은 나오겠지만, 저 팔을 이용해 엄청난 위력으로 변종을 잡아 던진다거나 하는 행위는 불가능 할겁니다.”
까드드득-
교수는 제법 익숙해진 팔을 휘둘러 보았다. 부피 때문에 붕붕 소리가 나긴 했지만, 위력적인 느낌은 없었다.
“물론, 신체에 미치는 영향은 아직 한참 연구할 부분이 남아있습니다. 식사량이 늘었고 얼마 전까지는 평범하게 하루 세끼 먹던 사람이 한 번에 8,9인분의 고기를 먹어치우는 데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고 하니, 이는 필경 왼팔이 본체의 소화계통에 뭔가 영향을 줘서 소화와 흡수를 촉진했다는 의미고, 이는 이런 영향이 다른 신체로 확장될 수도 있음을 의미하며, 또 3형 변종의 경우 정신이나 기억, 이런 부분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는데 특히나 교수님의 경우 그 내면에 ‘또다른 자아’ 님이 계시는 상황이니….”
“부장님! ‘professor’ 플레이 기록 요약본 가져왔습니다!”
“오오오! 마침 잘됐군요. 잠시, 보면서 얘기하실까요? 교수님의 행동 원리와 그 부분 변종화 발생 원리에 관해 살짝 추측해본 것인데….”
콰앙!
“내가! 내가 설명하겠소! 데이터 의식 탐구부서의 장으로서, 이건 자네들보다 내가 2000배는 더 잘 설명할 자신이 있다니까!”
끝없이 설명이 이어지던 중, 아까부터 소란스럽던 연구실 입구에서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오며 연구실은 더 난장판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철저히 막으라고 그리 일러두지 않았나! 연구에 방해된다고!”
“하지만 부장님, 타 연구부서에서 죄다 몰려와서 연구원의 숫자가….”
“대학원생을 쓰면 되는 거 아닌가! 집에서 쉬고 있는 놈, 일하러 나간 놈까지 죄다 불러서 몸으로 막으라고 하게! 모조리 투입하란 말이야!”
‘….그만하고 집에 가고 싶다….’
이후 난장판이 된 연구실에 난입한 각부 연구 부장들과 함께, 합동 연구회 같은 것이 만들어지며 온갖 추가 연구가 이루어진 끝에,
“제발! 제발 근시일 내에 다시 방문해 주십시오~ 오늘 데이터를 바탕으로 더 정밀한 연구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아, 예! 고생들 하십쇼!”
해가 지평선을 넘어갈 때가 돼서야 교수는 그 광기에 찬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소름 돋았어.]‘참담할 만큼 동의한다.’
경도 테스트를 빙자해 어떻게든 갑피 한 조각이라도 채취해가려는 행태부터 고농도 알콜이나 오일 같은 것에 장시간 담아 향을 추출하겠다고 하질 않나, 미각적으로 일반 갑각류의 키틴질과 비슷한 부분이 있나 확인하겠다며 혀를 날름거리며 다가오질 않나(때렸다)….
뒤를 돌아보니 제법 거리가 멀어졌는데도 건물 앞에서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정령이 왜 그렇게 마법사를 싫어하는지, 이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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