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58
Chapter. 10 납과 은화(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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삑-. 삑-.
[신호확인. 신호 (40.384.72630) / (40.384.57106) / (40.384.22498) 밀집 지점까지 75미터.]치직-
[노면 양호. 좌측에 커다란 플라스틱 판넬이 있으니 오른쪽으로 붙어와라.]치직-
“확인. 신호지점 육안으로 확인 시까지 교신 종료.”
치직-
[확인.]치직-
[확인.]이안의 숨죽인 목소리를 끝으로 스산한 바람소리와 엔진소리만이 귓가를 채웠다.
아, 하나 더. 누군가 귀 뒤에서 북을 치는 것처럼 시끄럽게 울리는 내 맥박소리.
커다란 무장 트럭의 바퀴가 나뭇가지나 유리 파편 같은 것을 밟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으며 장전된 권총으로 손을 옮기길 몇 번이나 반복했다.
40구역의 초입에서 확인된 수많은 구조신호.
신호 중 가까운 것은 20미터가 채 안 되는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얼마 안 가 신호지점을 확인한 우리는 최대한 소음을 내지 않고 천천히, 기어가듯 그 공동묘지 같은 신호 사이로 차를 몰았다.
치직-
[신호지점 확인. 구세대 승합차. 버기. 쉘터. 목표 아님.]치직-
[레이더 과열. 한계 운용시간까지 약 5분. 더 쓰면 고장이 날 수도 있다 이거.]치직-
지금까지 조용하던 에젤의 목소리가 통신기에서 흘러나왔다. 40구역 초입의 그 참상. 주인을 잃고 구조신호만 반짝이는 끝없는 차량의 행렬을 보고 난 뒤부터 그 말 많던 녀석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나도, 이안도, 벡스도. 참상이라면 눈에 박힐 듯 많이 본 사람들이지만 그 기괴한 광경 앞에서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차라리 시체라도 있었으면 한결 나았을 텐데.’
일행 중 누구 하나 시산혈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지만, 시체는커녕 핏자국조차 남지 않은 학살의 현장은 겪어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각양각색의 차량, 캠핑 트레일러, 혹은 잡동사니가 가득 든 쇼핑카트나 커다란 백팩까지.
신호의 발원지는 모두 누군가 급하게 챙겨서 나온 짐 더미였으나 정작 그 물건의 주인은 피 한 방울 남기지 못한 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학살이라고 추측한 이유는 하나.
시체도. 피도 없었지만, 신호지점에 남아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찢어지고 박살 난 흔적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교수는 망원경을 들어 쉘터의 상태를 확인한 뒤, 통신기를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치직-
[바퀴 자국은 들어간 자국만 있고, 나온 흔적은 없음. 담벼락은 80% 이상 파손됐으며, 반파된 터렛은 총구가 녹은 흔적도 있군. 여기 있던 사람들은 피난 도중 이 쉘터에 모여 정체불명의 적과 교전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쉘터 자체의 상태는 비교적 좋은 것 같아. 추가 의견 있으면 교신.]치직-
[천장 부근에 지금까지 흔적과 동일한 발톱 자국, 족적이 있어. 천장 채광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아.] [나온 자국은 안 보인다. 그 말은, 저 안에 우리 불알을 콩자반 사이즈로 쪼그라들게 만든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난 들어가는데 한 표.] [나도 한 표. 어차피 레이더 운용을 위해서도, 우리 컨디션을 위해서도 좀 쉬어야 할 필요가 있어. 기왕이면 개활지보다는 반파된 쉘터가 낫겠지.] [주변에 다른 생명체의 흔적 같은 것은 안 느껴져. 나도 동의.]치직-
“전원 동의로군. 시동 끄고 버블 올려. 우선 먼저 들어가서 쉘터 확보하고, 그 다음에 차량을 안으로 옮긴다.”
[철컥.]대답 대신 묵직한 쇳소리가 울리는 것을 보니, 다른 차에 있던 녀석들도 반쯤 방아쇠에 손을 걸고 있었던 모양.
끄극, 끅- 끄그극, 끄극 끄극-
가이거 계수기를 올려보니 방사능 레벨은 여전히 5단계로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측정 레벨이 의미가 없는 핵폭발 중심부나 체르노빌,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7단계보다는 많이 낮은 수치이지만, 그래도 노출된 사람을 죽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수치이다.
버블 실드는 적은 전력 소모와 완벽한 차단능력 대신, 방어력과 수복 속도를 잃은 결함품. 이는 곧 교전 중 살짝 스치기라도 하면 그 시점에서 방사능 노출 시작이라는 의미였다.
‘이래서 되도록 원거리 전으로 끌고 가거나, 아예 교전이 없었으면 했는데….’
애석하게도 그의 오른손에 들린 것은 대구경 권총 하나였으니. 왼손을 놀리는 것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사격은 또 별개의 문제라 결국 한 손으로 쓰는 권총을 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다행히 이 변종 왼팔은 방사능 노출 테스트에서도 흡수율 0%라는 기적의 수치를 달성했으니, 만약 교전이 일어나 적이 근접하게 된다면 제일 먼저 앞으로 나가 적을 맞이해야 할 것은 자신이었다. 적어도 왼팔은 버블 실드가 벗겨질 걱정 없이 적의 총탄을 막아낼 수 있었으니까.
슈르르륵- 찰싹!
[으, 이 마스크는 몇 날 며칠을 써도 적응이 안 되는 것 같아.]‘이것 때문에 살아있는 거라고 꾸준히 합리화하다 보니까 나는 좀 적응 된 것 같은데.’
회색에 겉부분에서 여섯 개의 관이 뒤쪽으로 쭉 뻗어있는 스킨 마스크는 단단하게 굳어진 외형과 달리 안쪽은 상당히 부드러운, 좀 징그러운 느낌이었다. 입가에 가져다 대고 관처럼 돌출된 호흡부를 이빨로 살짝 깨물면 접촉면이 얼굴에 찰싹 달라붙는데, 안에서 뭔가 꾸물럭거리는 게 상-당히 징그러운 느낌이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생체 필터라는 느낌이 여실하게 느껴지는 마스크. 그래도 방사능부터 먼지까지 모조리 걸러내는 제대로 된 물건이니 징그러움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스킨 마스크가 완전히 입가에 달라붙은 것을 확인한 다음 통신기를 들었다.
치직-
[다섯 세고 돌입한다. 에젤은 혹시 모르니까 슈트에 탑승하고 대기해. 삼각 대형. 내가 전열, 나머지 둘은 엄폐 챙기면서 후열.]치직-
[….확인.]스으으읍- 푸우우.
한 숨을 크게 내쉬며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한 다음, 왼손으로 차 문고리를 잡았다.
[5. 4. 3. 2. 1-]벌컥!
벌컥 벌컥!
카운트가 끝나는 소리와 동시에 앞에 있던 허머에서 이안과 벡스가 문을 박차고 나오는 게 보였다.
타다다닥!
순식간에 대열을 갖춘 셋은, 짧은 수신호로 서로의 돌입 방향을 확인시키며 폐허가 된 쉘터 안으로 파고들었다.
실전의 긴장감이 척추를 짜르르, 울리며 손끝으로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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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일행은 쉘터 안에서 수학여행 때 이불 안에 모여 카드 게임하는 학생들처럼 방수포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작은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그간 모아온 정보를 종합하고 있었다. 일행들 사이로 따듯한 스튜 퍼먹는 소리가 후르륵, 하고 들려왔다. 우리 집에서 한참 떨어진 40구역이건만, 쉘터의 자동조리기가 만들어낸 스튜 맛은 고향의 그 맛과도 같아 언뜻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래, 자동조리기. 생각했던 것과 달리 쉘터 내부에는 그 어떠한 적도 없었으며, 거칠게 파괴된 외부에 비해 내부는 거의 대부분의 시설이 멀쩡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컨트롤 패널을 뜯어 조작해본 결과…..
“제기랄. 이런 말 하는 게 영 이상하긴 한데, 너무 평화로워서 헛것을 보는 것 같군.”
전기는 물론, 실드, 은폐장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외부의 적만 없었으면 불도 켜고 편안하게 쉬었을 것이다.
“헛것이 의심되면 자기 뺨을 때릴 것이지, 왜 내 뺨을 때리는데!”
“미안. ‘이상 없음’ 신호까지 보냈는데 문을 박차고 들어온 네 녀석이 너무 한심해서 그만.”
에젤은 시뻘겋게 부은 뺨을 문지르며 그의 뺨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 이안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니가 내 입장이 되어봐라! 가뜩이나 지금까지 뭐에 홀린 것 같은 광경만 보고 왔는데, 무장하고 전투 계획까지 짜서 들어간 일행이 총성 한 발 없이 ‘이상 없음’ 한마디만 보냈다고! 너 같으면 그게 정말 ‘이상 없음’으로 보이겠냐, 아니면 그 정체 모를 것들에게 당한 것으로 보이겠냐! 솔직히 지금도 봐! 분명 안으로 들어간 흔적에, 전투흔은 확실히 남아 있는데 밖으로 나간 흔적은 하나도 없잖아!”
“저기…. 엔젤? 그만 얘기, 그거…. 하면 안 될까? 무서워서 그래. 좀.”
까칠해진 이안, 소리지르는 에젤. 요즘 좀 멀쩡하다 싶었더니 또 말을 먹기 시작하는 벡스.
몇 날 며칠 동안 가상의 적을 대상으로 잔뜩 긴장하면서 와서 그런가, 대부분의 일행이 예민하게 날이 서 있는 상태였다.
물론, 나도 포함이다. 근처에 바람소리를 빼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누군가의 흔적만 잔뜩 남아 있고 내가 내는 소리가 미친듯이 신경을 긁는 상황. 숨 쉬는 것조차 불편했고, 이 빌어먹게 사람 미치게 하는 침묵 속에서 크랙션을 빠앙-! 하고 울려버리고 싶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신 차려. 지금 다들 상태 안 좋은데, 너까지 이성을 잃으면 진짜 사고 난다.]‘알아. 어떻게든 해결해야지.’
내가 일행보다 상태가 좋은 이유는 딱 하나. 소음 걱정할 필요 없이 마음껏 대화할 수 있는 하이드의 존재 때문이었다. 최근 계속 할 일이 있다거나, 졸립다면서 의식의 표면에 나오는 게 뜸해진 하이드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한시도 쉬지 않고 내 머릿속에서 시답잖은 농담을 늘어놓았고, 덕분에 내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은 정도였다.
‘뭐, 다들 베테랑이니까 이 정도에 패닉에 빠지거나 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 이 자식아. 귀신이 있었으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었을 것 같냐. 내가 죽인 사람의 1/10 정도만 귀신이 됐어도 반지의 제왕 유령군대 뺨치게 몰려왔을걸.”
“그럼, 지금의 이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괴물의 흔적도 있고, 탄흔이나 폭발 흔적도 심심찮게 있어. 급하게 도주하는 차량의 스키드 마크는 셀 수 없이 많았고. 그런데 시체는커녕 핏자국도 없잖아! 막 유령형 변종, 이런 게 돌아다니는 건 아닐까?”
저런 헛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평소와 같은 상태라고도 할 수는 없겠다. 우선, 뭐라도 정리를 해야 한다. 최소한 명확하게 보이는 것을 제시하면 지금의 혼란은 가라앉겠지.
“변종은 바이러스에 의한 변이체야. 최소한 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종류의 것이라고. 유령 같은 거랑은 다르게.”
좌아악.
교수는 품에서 먼지 묻은 지도를 랜턴의 불빛에 비추며 목탄을 꺼내 들었다.
“일단 우리가 직접 확인한 것부터 정리해보지. 구조신호부터. 몇 개 확인했지, 에젤?”
“잠깐만. 메모 해뒀는데…. 아, 여기 있다. 버기 65대, 쉘터 12 동, 일반 차량 55, 쇼핑카트, 달구지, 백팩 등 기타 지점 56개로 총 188개 지점. 지금까지 레이더 가동 시간이 47시간이니까 시간당 4개꼴로 확인했군. 황무지 개인 생존자 평균 집단 숫자가 3명 정도니까, 일단 사상자는 564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어.”
“신호의 발원지는?”
“이거. 38구역 돔에서 판매하는 휴대용 접속기. GG는 당연히 안되고, 시간 배율도 일반 접속기와는 다르게 현실과 동일. 당연히 채팅 따라가기도 힘들어서 녹화된 영상을 보거나 거래소를 이용하는데 쓰는 물건이야. 생존 중심지인 40번대 구역은 접속기가 제법 남아돌지만, 여기저기 떠돌아다녀야 하는 녀석들은 저게 훨씬 편하거든.”
“아, 저거. 나도 거래 나갈 때 몇 번 써본 적 있었지. 비싼 게 내구성은 또 개판이라 얼마 안 쓰긴 했지만. 송신 시간도 커뮤니티에 올라가기까지 2시간 정도 걸려서 실시간 통신용으로 쓰기도 애매한 쓰레기 아냐?”
에젤이 꺼낸 물건은 거래소에서 몇 번 본적이 있었던 물건이었다. 기술 한계로 GG를 구동하는 장치를 만드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공개된 커뮤니티에 접속하는 정도는 가능하다 보니 만들어진 마이너 버전 접속기. 사실 소형화도 의도한 게 아니라 일반 접속기의 신체 맞춤 기능부터 온도 유지, 생명보존 기능이 게임을 못해서 죄다 필요없다 보니 다 떼어낸 결과 저렇게 작아진 것이다.
“그럼 피해자는 대부분 떠돌이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소리겠지?”
“그렇지. 애초에 일반 접속기는 돔에서 플레이어 장려 정책으로 싸게 제공하는 데 비해, 게임 못하는 휴대용 접속기는 엄청 비싸게 파니까. 정착해서 사는 사람은 굳이 비싼 휴대용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는 거지.”
에젤의 말에 교수는 [피해자는 대부분 떠돌이] 라고 간략하게 메모한 다음, 신호를 확인한 지점을 차례로 점을 찍었다.
“좋아, 그럼 다음. 적에 대해서 확인된 정보는?”
“피해자가 개인이었는데, 탄흔이 가상의 적 위치 반대편으로 몇 개 튄 흔적이 있더군. 구경도 같은 것으로 보아 적의 몸에서 도탄 된 것으로 추정된다. 폭발 흔적 중에서도 그을음이 허공에서 뚝, 끊기는 경우가 많더군. 실드는 그런 식으로 탄을 도탄시키지 않으니 적은 장갑을 두른 생물이거나, 이족 보행 전차 같은 놈이야.”
“어…. 내 생각은 좀 다른데. 햅번, 차량을 찢어발긴 흔적은 발톱을 가진 생물이거나 날이 있는 대형 냉병기를 사용한 흔적이었어. 사람이 아니라면 고양잇과 동물을 닮은 종 이라고 생각해. 족적에 발톱 끝이 파고든 자국이 남은 게 있고, 남아있지 않은 게 있어. 발톱을 숨기는 게 가능하다는 뜻이지.”
“뭐가 됐든 적은 피해자를 가지고 논 것은 확실해. 확인된 피해자는 신호를 보낼 장치가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빠짐없이 구조신호를 보냈으니까. 이건 기습이 아니라 피해자가 위기를 직감하고, 신호를 보낼 때까지 시간이 주어졌다는 얘기란 말이야! 한두 명 빼먹었으면 몰라도 모든 피해자가 구조 신호를 보낼 시간이 있었다, 이건 적에게 기습을 가할 의지 자체가 없었다는 뜻이지. 놈은 느긋하게 피해자에게 다가가, 그들의 발악을 웃어넘기며 뼈 한조각, 피 한방울 남기지 않고 모조리 가져간 거야! 으으으으, 그게 유령이 아니면 뭐냐고!”
“지랄났다 지랄났어. 그럼 적은 단단한 갑옷을 두른 고양잇과 유령이라는 소리냐? 그건 귀신 치고도 너무 혁신적인 것 아냐?”
“….새로운 3형 변종이 등장한 것일 수도 있지. 27구역의 [녹색 세계 뱀]이나 44구역 [워킹 케인]처럼 한 지역 자체를 자기 영역에 두는 그런 놈 말이야.”
3형 변종. 그 얘기가 나오는 순간 저마다 의견을 피력하던 일행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그렇게 한순간에 생길 수 있는 거였나?”
“지금까지는 아니었지. 하지만 이런 상식 밖의 존재는 그것들 말고는 없잖아?”
“….”
하나 더 있긴 했지만, 교수는 자칫 일행의 혼란을 가중시킬 수도 있는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여러 구조신호를 찾아다니며 그가 확인했던 것.
그건 곳곳에 날카롭게 파인 흔적, 그 사이에 낀 모래의 양이었다.
끝없이 모래바람이 부는 이곳 황무지에서는 새로 생긴 파괴의 흔적, 그 사이에 낀 미세한 모래의 양으로도 전투 시점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흔적의 위치에 따라, 바람이 드는 정도에 따라 대충 계산해본 결과는 놀라웠다.
‘확실한 측정 장비가 없어서 장담은 못하지만…. 전부 나흘쯤 전에 당했어. 그것도 나흘 전 24시간 안에 일어난 게 아니라, 모두 동일한 시간에.’
우리 일행이 여기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이 47시간. 시속 10~15km의 느린 속도로 전진했으며, 188개의 신호 지점을 확인하며 잠깐 머물때를 제외하고는 잠시도 쉬지 않고 이동했다.
지점당 7분 이상 시간을 소요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니 우리가 신호를 따라 이동한 거리는 대충 330km 정도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330km면 서울과 부산 사이의 거리보다도 먼 거리이다.
그 먼길에 골고루 분포해있던 피해자들이 오차를 계산한다고 해도 한, 두 시간 사이에 습격당했다는 소리다. 심지어 모래 흔적의 양이 이동하면서 순차적으로 늘어난 게 아니라 늘었다, 줄었다 뒤죽박죽이기도 했고, 에젤의 말대로 피해자들이 구조신호를 보낼 시간이 있었으니 적이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며 40구역 떠돌이들을 습격한 것은 아니었다.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하거나, 그것에 가깝게 이동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
당시에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잊어버렸지만, 나는 그런 존재를 만난 적이 있었다.
[흰 양복을 입은 남자. 흰 양복에…. 어라? 흰 양복이랑 손전등이랑….]‘너도 기억 안 나지? 그놈. 분명 만나서 대화도 나누고 거래도 했는데, 양복이랑 목소리 말고는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professor’. 예술가 연합의 ‘W’라고 합니다.몇 달 전, 45구역에서 가져온 그림과 시계를 내게서 산 남자이며, 어디에서, 어떤 시간에 약속을 잡아도 거래자보다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기이한 소문의 주인.
“….밥 다 먹었으면 딱 세 시간 만 눈 붙이고 이동한다.”
“이제 38구역 돔의 영향권까지 하루거리 정도 남긴 했는데. 앞으로도 구조 신호 확인하면서 움직이나?”
“….아니. 딱 한군데만 더 들렀다가 바로 돔으로 이동할 거야.”
“한군데?”
“그래, 여기.”
교수는 에젤이 지도에 표시해준 구조 신호 좌표 중, 하나를 체크하며 말했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 제일 도움이 될 만한 지인이 있어서.”
아무도 모를 새로운 변종이면 몰라도, 예술가 연합처럼 황무지에서 오래 활동한 집단에 대한 정보 정도는 확실히 있을 만한 녀석이.
[40.227.90381]교수는 자신의 수첩에 적혀 있는 좌표와 동일한 위치에 찍혀있는 점을 보며, 착잡한 얼굴로 지도를 접었다.
“이런 식으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는데…. 보통 놈이 아닌 건 알고 있으니까, 허무하게 당하지 않았기를 빌지.”
교수가 펼쳐 든 수첩에는 [40.227.90381] 좌표와 함께 ‘스피드 웨건’ / ‘접선 지역? 비지니스? 일단 만나볼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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