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59
Chapter. 10 납과 은화(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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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드 웨건이 여기 산다고?”
통신음과 함께, 창문 너머 이안의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내게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치직-
“여기는 아니고 이 근처…. 105미터 쯤 전방일 걸? 여긴 아니지. 음. 여긴 사람 사는 곳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
“점입가경이로군. 그럼, 저어기, 시퍼런데 말하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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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유리창 너머의 이안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변명할 여지가 없음이 느껴졌다.
잠깐 눈만 붙이고 일어나서 황량한 폐허와 어둠 속을 느릿느릿 해쳐 나오길 몇 시간.
고생 끝에 도착한 스피드 웨건과의 약속지점이 아무리 봐도 사람 사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틱!
-끄그그그극! 끄그극! 끄그극! 끄그그그그그그극!
탁!
“날 도대체 어디로 안내한 거야, 이 자식은….”
가이거 계수기를 켜볼 필요도 없었다. 농도가 짙다 못해 육안으로 형광색 빛무리가 확인될 정도로 진한 방사성 대기가 온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니까. 이 정도로 높은 농도의 방사능을 막으려면 실드 투과성을 아예 0으로 맞춰야 하는데, 그럼 방사능은 막아도 숨 쉴 공기조차 들어오지 못해서 얼마 못 가 죽게 될 것이다.
6레벨 방사능 지대.
변종도 이런 곳에서는 못산다.
치직-
내가 이대로 정말 45미터 앞까지 나아가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차량 간 통신의 노이즈가 들려왔다. 통신기에서는 말소리 대신 끄그극, 끄극- 하는 가이거 계수기의 소리가 먼저 마중 나왔다.
“어이, 박교수. 이 소리 들리냐? 가이거 친구가 미친 듯이 소리치고 있잖아. ‘당장 이 미친 지역에서 나가! 방사능 있다고! 온 사방에 방사능이 천지야!’라고 말이야.”
“그렇….지.”
“스피드 웨건. 방송 몇 번 안 본 나도 이름 정도는 기억이 날 정도로 네 방송의 골수팬이었지. 너, 걔랑 친하지?”
“….아마도?”
“그럼 내가 그냥 이 ‘구조신호’ 싹 무시하고 우리 임무에나 충실하자고 해도, 들은 척도 안 하고 어떻게든 확인하러 갔다 오겠네?”
“어…. 그게….”
쉽게 대답하기 힘들었다. 내가 여기 온 이유? 지금 이 방사능 지역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예술가 연합의 동향에 대해 알기 위해서다. 어디까지나 임무를 위해, 마침 근처에 있던 이 지역 정보상…. 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찾아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게 다일까?
——-
‘이 인간 병신임. 뭐하다 왔는지는 몰라도, 여기 대화방 지식은 80%는 걸러 듣는 게 맞음.’
‘모친상 치르는 법? ….그야, 니가 죽인 것만 아니면 마음을 담아 잘 묻어드리면 됨. 괜찮음. 나도 엄마 없음.’
‘내가 잘 알아듣게 설명했던 것 같은데.’
‘병신임? 굳이 그 지랄을 함?’
‘고생했음.’
‘비지니스 얘기는 따로 만나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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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이 끝나고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부터 이어져 온 녀석과의 대화가 머릿속에 강물처럼 흘러갔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하필 신호가 ‘구조신호’라서 그렇다고. 걱정되잖아? 그래도 이 녀석도 친구 같은 건데.]‘쪽팔리게…. 그리고 내 개인 사정 때문에 일행을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잖아. 내가 간다면 다 따라올 녀석들인데….’
털컥!
‘우리가 거의 수평적인 관계라고는 해도, 어쨌든 내가 리더를 맡고 있잖아. 일을 이따위로 감정적으로 처리하는 건 우리 모두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거야.’
탁탁탁탁-
[어, 음…. 껍데기? 저기….]‘아냐 괜찮아. 내 추측이 맞다면 녀석은 꽤 수준 높은 정보상이니까. 세상에서 제일 눈치 빠른 녀석이 제 한 몸 빼지 못했을 리가 없지. 저 구조신호는 적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 같은 게 틀림 없-’
[아니, 그게 아니라. 니 친구. 벌써 나갔는데?]‘….뭐?’
하이드에 말에 고개를 들어보니, 벌써 저만치 튀어 나가서는 녹색 폐허 속에서 두리번거리는 작달막한 그림자와, 그를 뒤쫓아 달려나가는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저 자식들이 그사이를 못 참고….!”
당황한 내가 따라 나가려고 준비하는데, 좌표지점에서 두리번거리던 벡스가 뭔가를 발견했는지 펄쩍 뛰어오르는 게 보였다.
이어지는 크게 손으로 원을 그리는 수신호. 목표를 달성했다는 뜻이다.
“목표를…. 달성했다고?”
치직-
“뭐 찾았나 본데? 둘이 신나서 돌아오네.”
에젤의 말대로 둘은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겁지겁 돌아오더니, 내가 타고 있는 차량의 문 앞에서 문을 열라는 사인을 마구 보냈다. 잠시 개인 실드와 차량용 실드가 병합되는 시간이 지나고, 먼저 안으로 들어온 이안이 대뜸 욕을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머저리 같은 새끼가! 제발 생각을 좀 하고 움직이자고 다짐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지이익- 쏙!
“뭐가 어때서! 그때도 결과가 좋으니 됐다고 했잖아! 이번에도 좋았는데, 문제야?”
“네놈이 순식간에 튀어 나가는 바람에 차량용 버블이 수복되지 못해서 열려버렸잖아! 내가 개인 실드 켜고 몸으로 틀어막지 않았으면 운전석까지 다이렉트로 피폭이었어! 굳이 나이 서른줄에 온갖 방사능 합병증으로 벽에 똥칠하는 모습을 보고 가야겠어?”
“어, 어쨌든 이걸 찾았잖아!”
들어오자마자 속사포처럼 이어지던 둘의 말다툼은 벡스가 품에 안고 있던 것을 내게 내미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이거 봐, 햅번! 어디서 많이 보던 거 아냐? 네가 찾던 게 이거 맞지?”
기긱, 기기긱! 위이이잉! 기익!!
“기긱- 경고. 당신은 타인의 사사사사유물에 허가 없이 접촉하였다. 세계법 2749-f543조에 의하면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위법 행위이며-”
기긱, 기기긱-!
드론. 여기저기 찌그러진 부분이 있지만 꽤나 세련된 디자인의 드론이다.
붙잡힌 새처럼 합금 조향장치를 이리저리 뒤트는 모습이 무척 낯이 익었다. GG의 운송용 드론이 아니라, 코듀로가 단말로 쓰는 것과 같은 하우스 드론이었다. 하우스 드론이 있다는 것은 근처에 하우스, 누군가의 은신처가 있다는 소리였고, 여긴 스피드 웨건과 만나기로 한 곳이었으니….
“설마…. 스피드 웨건의 드론?”
긱-
순간, 버둥거리는 것을 멈춘 드론이 몸체를 회전시키더니, 천천히 렌즈의 초점을 내 쪽으로 잡았다.
“….음성- 지직- 확인. Player ‘professor’. 맞맞맞습니까?”
기긱!
“그…. 내가 박교수가 맞긴 한데….”
기익!
“환영합, 환환환환영합니다. 저는 Player ‘스피드 웨건’을 모시는- 모시는 모시는딜딜딜딜딜디—– 환영합니다. 저는 ‘스피드 웨건을’을 모시는 최상급 학습형 AI ‘지니’라고 합니다. 진심심심을 담은 인사와 함께, Player ‘professor’ 님 일행을 주인님의 처소로 초대하겠습니다.”
기이익- 위이잉!
쿵! 쿵! 쿵! 쿵!
벡스가 손에서 놔주자, 둥글둥글한 드론은 기다렸다는 듯 조향장치를 퍼덕이며 차량 앞유리에 몸체를 부딪치기 시작했다. 마치 그렇게 하면 투명한 유리 밖으로 날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딘가 단단히 잘못된 드론의 모습에 자랑스럽게 드론을 내밀었던 벡스의 표정이 살짝 가라앉았다.
“….저거, 학습형 AI면 그거 맞지? 코듀로랑 같은 모델. 주인의 행동방식을 학습해서 그에 완벽하게 걸맞은 형태로 움직인다던 그거.”
“어. 그거야. 코듀로가 날 모방했다는 데는 절대 동의할 수 없지만, 아무튼 제품 설명상으로는 그렇지.”
찰칵찰칵, 트드득!
후우우-
“….우리가 찾아온 녀석은, 비록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네 오랜 랜선 친구이자 정보상으로 추측되는, 모르는 게 없는 아아-주 영민한 녀석이고.”
“그렇….지?”
“그럼 정보상이 돈이 모자라서 드론 하나 수리 못할 리가 없으니, 저 모지리 AI의 상태를 설명할 만한 상황이 딱 하나밖에 없는데.”
몇 모금 만에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운 이안은 필터를 질겅질겅 씹어 뱉으며 말했다.
“스피드 웨건, 걔 치매 걸린 거 아냐? 진짜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자연사에 가까워서 구조신호 때린 거고?”
“그럴 리가 있-”
“안내하겠습니다. 안내하겠, 안내, 안내하겠습.”
쿵! 쿵! 쿵!
“….을 수도 있겠네.”
나는 반박하려던 말을 그대로 속으로 집어삼키고는 튼튼한 무장 트럭 앞유리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드론을 붙잡았다. 그 모습에 일행은 말없이 실드에 전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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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우우웅- 철컹.
“다소 보안 절차차차차가 복잡하더라도,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결국 우리 일행은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했다. 이안의 의견에 따르면 ‘치매 노인은 없다 치더라도 38구역이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는 지금 상황에, 이런 험지에서 기능을 하는 쉘터가 있다면 비상시 안전 가옥으로 쓸만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니라는 드론은 밖에 놓아주자 조금 비틀거리며 폐허 사이로 날아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끝으로 느껴질 만큼 사나운 진동이 느껴졌다.
흙먼지 가득한 땅 위로 튀어나온 것은 저 드론만큼이나 제대로 기능을 할까 의심스러운 반파된 엘리베이터였다.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죽게 된다면, 난 너를 정말정말정말 많이 원망할 거야, 박교수.”
삐걱거리며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덜컥! 하고 어딘가에 걸리며 흔들린 순간, 손이 하얘지도록 손잡이를 잡고 있던 에젤이 내게 한 말이었다.
그렇게 내려와서, 돔 같은 대형 시설에서 자주 봤던 제독실(기능은 멈춰있었다)과 용접기로 난잡하게 구멍을 낸 방화셔터를 지나고 나서야 마침내 익숙한 푸른색 실드가 기능하고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건….”
“도서관인가?”
바닥부터 천장까지. 빈틈없이 들어찬 책들이 마치 벽돌을 쌓아 만든 건물처럼 실드 내부를 꽉 채우고 있었다. 빼곡한 책들 사이로 작은 체구의 사람이 가까스로 드나들 만한 길이 나 있었다.
“정숙- 해- 주십시오. 도서관에서는, 에티티티티티켓을- 지킵시다.”
“대문을 틀어막아 놓고는 에티켓 같은 소리하긴. 먼저 들어가 봐. 난 여기 좀 치워야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교수가 그 말대로 비좁은 책더미 틈을 지나 안으로 들어오자, 입구만큼이나 좁은 길이 끝을 알 수 없는 책들 사이로 구불구불하게 나 있었다. 뒤에서 뭔가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벡스와 에젤이 짜증을 내는 소리가 들렸다.
“미리 정리를 못해서 미안해. 지니한테 아무리 말해도 내 체형에 맞춘 정도로만 정리하고 돌아와서 말이야.”
조용한 도서관의 한켠에서, 쿡쿡거리며 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꺼져가는 촛불처럼, 위태로운 느낌이 가득한 목소리.
“네가…. 스피드 웨건?”
“그래. 네가 교수인 것처럼 말이야. 만나서 반가워, ‘professor’.”
온통 책뿐인 이곳에 깔끔하게 비워져있는 공간.
가지각색의 물통에 둘러싸인 하얀 침대 위에서 그를 향해 웃어준 사람은, 한눈에 봐도 병색이 완연한 가냘픈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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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르르-
“푸하아! 아으, 먼지 봐! 마스크 쓰고 있길 잘했지.”
“메탈 죠 이 자식, 쓸데없이 몸만 커서는! 사이즈 맞는 나랑 벡스부터 지나갔으면 될 것 아냐! 괜히 먼저 가겠다고 설치다가 우리까지 생매장당할 뻔했잖아!”
에젤은 벡스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나며 먼지가 자욱한 책 무더기를 둘러보았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책이라니. 흩날리는 먼지의 두께만 봐도 이게 얼마나 오래된 책들인지 잘 알 수 있었다. 순간 이곳 집 주인이 손상된 책의 값을 치르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걱정하는 에젤이었다.
퍼어억!
물론 그딴 자잘한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이안은 잔뜩 쌓인 책무더기를 힘껏 박차며 몸을 일으켰다.
“지미럴, 여긴 난쟁이 책벌레의 성이라도 되는 거냐.”
“궁시렁거리지 말고 빠져나오기나 해. 안쪽은 그래도 움직일 정도는 되는 것 같으니까.”
“방어시설 치곤 참신한 시도였어. 야, 에젤. 나 눈 좀 불어줘라. 눈에 먼지 들어갔어.”
후우욱-
탁!
“으악! 씨발 이 호모새끼가 내 눈에 침을!”
“아, 미안. 입에 무는 마스크를 오래 쓰고 있다 보니 침이 좀 고여서.”
“죽인다! 책으로 때려죽이면 무죄인 거 알고 있겠지!”
대노한 이안은 눈을 비비며 다른 손으로 주위를 더듬었다. 제일 무겁고 실한 놈으로 골라 에젤의 정신이 번쩍 들도록 해주려고 했는데….
“그…. 미안한데 그 이상 책을 손상시키는 건 참아주겠어? 당신이 들고 있는 그거, 내가 정말 좋아하는 책이거든.”
우뚝!
속삭이듯 귓가에 스치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 사람은 전투 프로다운 반응 속도로 주변을 살폈으며, 얼이 빠진 교수와 파리한 안색의 여인을 발견했고,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확인한 벡스와 에젤이 교수를 향해 달려드는 동안 수많은 여성을 거쳐오며 단련된 이안의 눈이 침상위의 여성을 살폈다.
‘뼈마디가 비쳐 보일정도로 투명한 피부. 노출된 견봉 위쪽 근육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것으로 봤을 때 가꾼 피부가 아니라 외부 출입 자체가 거의 없어서 저렇게 된 것 같군. 희미하지만 긴장하는 기색이…. 이건 부끄러움인가? 낯가림? 최대한 옷을 뒤쪽으로 당겨 헐렁한 환자복의 노출을 줄인 것으로 보아 스스로의 차림새에 부담을 느끼는 군. 부끄러운게 맞아. 미처 갈아입지 못했거나, 스스로 옷을 갈아입지 못할 정도로 약해진 상태인 것 같다.’
“으읍, 읍! 놔 임마! 갑자기 뭐하는-”
“어허, 피고는 닥치시오!”
“잠시 조사할게 있으니 조용히 따라오도록 해!”
끌려가는 교수와 두 친구의 활극을 보며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쿡쿡거리며 웃고 있는 여성.
그러나 이런저런 악조건 속에서도 여성의 아름다움은 그 빛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 같은 그녀의 상태가, 식은땀에 젖어 살짝 달라붙은 그녀의 긴 머리칼이, 새하얗다 못해 투명한 그녀의 피부가 보호 본능을 자극하며 그녀의 외모에 한층 색다른 매력을 더하고 있었다.
“오호라.”
어느새 입꼬리를 주욱 밀어올린 이안은, 벌써 교수를 제압해 입구 쪽 무너진 책더미 뒤로 끌고 가는 데 성공한 벡스와 에젤쪽에 가세하여 교수를 잠시 그녀의 시야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동참하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당황하는 ‘척’ 하는 교수의 모습이 퍽이나 재미있었다.
“뭐, 뭔 짓거리야 이 자식들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모양 빠지게!”
“이것 때문이었나?”
“뭐가!”
“굳이- 목표 지점인 38구역 돔을 코앞에 두고 이쪽으로 돌아온 이유, 위험지역임을 확인하고 내가 후퇴할 것을 건의했음에도, 별다른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갈등하던 이유. 그게 다 저 여자 때문이었군? 응? 데이트 약속에 늦어서 애가 탔던 거야.”
크흐흐, 하는 웃음과 함께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제압된 교수의 이마에 딱밤을 날리는 이안. 열 받은 교수가 왼손으로 덜미를 잡아채기 직전에 날렵하게 빠져나간 벡스도 그와 비슷한 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키히힛, 햅번. 우리가 그 정도도 이해해주지 못했을까 봐? 그냥 얘기하지 그랬어. 제수씨 문제인데 우리가 말리겠냐구. 적극 동참하면 모를까.”
“그러니까 말이다. 오늘을 달력에 적어놔야겠어. 영원히 활동하지 않을 것 같던 박교수씨의 언더-브레인이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한 날이잖아? 음~ 전문가로서 평가하자면, 시작치고는 제법 로맨틱하고 나쁘지 않군. 오랫동안 글을 통해 마음을 나눠오던 두 사람. 좀처럼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했지만, 그녀의 구.조.신.호 를 본 순간 남자는 평생 그를 억누르던 체-리의 벽을 깨고 그녀의 곁으로, 사지를 넘어 달려간다! 캬~ 제법인데, 박교수! 정보상을 꼬시다니! 그것도 저렇게 미모의 여성을!”
“그런 거 아니라니까! 어디까지나 스피드 웨건과의 만남은 비즈니스적인 일로 만나게 된-”
“비즈니스적인 관계로 여자를 꼬셨다고? Bis du deppert! 사디스틱한게 마음에 드는 걸? 칭찬해주지! 한순간에 기초 레벨을 건너뛰었잖아!”
“아오, 썅! 제발 좀!”
교수는 억울했다.
네 사람 중에 제일 당황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그 자신이었으니까.
5년 동안 온갖 병신 짓거리와 헛소리를 나누던 부랄친구가 알고 보니 병약 미소녀였다?
맨날 [병신임?] [미쳤음?] 하던 친구가 ‘어서와~’ 하고 살랑살랑한 목소리로 반기는데 누가 그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겠냐고.
부끄러운 게 아니라, 진짜 당황한 거란 말이다.
하지만 교수가 아무리 역정을 내고 상황을 설명해도, 이안과 벡스는 귀를 콱 틀어막고는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냐, 저 위험천만한 40구역에서 잘도 이쪽으로 진로를 잡았구나 따위의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래서 교수는 이미 심문 모드가 된 둘 대신 뒤에서 가만히 팔짱을 끼고 관망하던 에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야, 에젤! 뭐라고 말 좀 해봐! 그런 거 아닌 거, 넌 알잖아! 너도 나만큼이나 스피드 웨건이랑 오래 알고 지냈고! 따지고 보면 할 말, 안 할 말 구분 안 하고 막 뱉은 건 네 쪽이 더 심하지 않냐!”
나의 필사적인 폭로에, 쥐잡듯이 나를 털어대던 이안과 벡스가 에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책더미 위에 다리를 꼬고 조용히 앉아있던 에젤이 몸을 일으켰다.
“확실히…. 교수랑 스피드 웨건 만큼이나 나도 둘을 오래 알고 지냈지. 커뮤니티에서 Jokass랑, takealook 이랑, 노루 같은 녀석들과 함께 어려운 시기에 다들 허물없이 지냈단 말이야.”
“그래! 내 말 맞지? 스피드 웨건이랑은 어디까지나 친구-”
“그런데, 유독 교수는 스피드 웨건과 우리를 차별했어.”
“….응?”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던 이야기가, 갑자기 불법 유턴을 시전했다.
“언제부턴가 맨날 우릴 부르던 놈, 새끼, 쓰레기가 스피드 웨건의 뒤에는 붙지 않더군. 존칭과 스피드 웨건 ‘님’으로 대체되었지. 매일 폭언에 시달리던 우리와 달리 스피드 웨건은 특별 취급을 했어.”
“오호라.”
“나도 둘의 관계가 오래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교수가 외부 활동을 시작한 것을 기점으로 대우가 달라진 것을 보아…. 녀석의 멋진 모습에 불이 붙어버린 게 아닐까? 솔직히 지금의 교수는 슈퍼 스타잖아. 쟤가 돔의 길거리를 걸어 다니면 속옷 벗어 던지고 달려들 여성 팬이 한트럭은 될 거라고. 남자는 능력이다, 이 말이지.”
“헛소리 하지 마, 에젤! 그건 독버섯 같이 쓸데없는 늬들과 달리 스피드 웨건은 언제나 양질의 정보를 제공해주고 날 도와줘서-”
“감찰부다운 날카롭고 합리적인 증언, 감사하네, 에젤. 피고가 자백을 했군. ‘힘든 시기에 항상 그녀는 나를 지지해주었다.’ 진즉 이렇게 말하면 됐을 것을.”
재밌어 죽겠다는 듯한 이안의 옆으로 에젤이 다가와 내 어깨를 친근하게 두드렸다.
“교수, 그거 알아?”
“뭐.”
“돔에서는 콘돔, 혹은 피임 기구의 생산을 중대한 범죄로 취급하고 있어. 멸망의 시대. 새 생명의 탄생은 축복받아 마땅한 것이며, 출산율의 증가는 인류 문명의 회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니까.”
“잠깐만…. 에젤?”
“랭커라는 안정된 수입원, 황무지 어딜 가도 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명성까지.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으니, 이제 가정을 가지고 싶어 질만 하지. 나는 응원한다, 짜식아.”
손가락으로 코밑을 쓱 닦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에젤.
“호오. 그런 관점으로 보니 교수의 연애활동이 당연한 수순으로 보이는군. 더는 부정하지 마라, 새신랑.”
두 사람은 노총각 친구의 청첩장이라도 받은 것처럼 훈훈한 분위기에서 교수에게 이런저런 덕담을 해주고 있었다.
그 사이 잠시 사라졌던 벡스가 뭔가 한아름 짊어지고 헉헉거리며 돌아왔다.
“죠! 위에 가서 네가 거래용으로 우리 것도 맞춰왔다고 했던 정장, 가져왔어!”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었지. 잘했어 짜리몽땅. 셔츠부터 줘봐.”
“야, 야!”
“쓰읍, 가만히 있어! 첫 데이트에 스테이션에서 받은 군복이라니. 차림새는 멋을 떠나서 상대에 대한 예의야 예의! 가정을 꾸리는 것이야 말로 이 이안-죠가 겪은 인생 최고의 순간이니! 내 최고의 친구를 위해 기필코 그 대업을 성사시켜주고 말리라!”
와락!
“벗어라, 박교수! 네 운명을 손에 넣어라!”
“놔, 놔 이 자식들아! 이것 놔아아아!!!!”
음흉한 표정의 세 친구가 멋들어진 정장을 한 피스씩 들고 달려들었다. 어째서인지, 이런 상황에서 비대칭 전력이라 칭할만한 왼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이드?’
[휘~ 휘휘~ 음, 여기 경치가 참 좋은걸~]‘하이드 너마저어어!!!’
믿고 있던 모두에게 배신당하고 저항할 수단마저 잃어버린 교수는, 결국 그들의 손에 단장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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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도서관의 주인인 스피드 웨건은 도서관 한켠에서 벌어지는 그 우정과 배신의 활극을 즐겁게 감상하고 있었다. 접속기의 스피커가 아닌 귀로 듣는 사람의 목소리가 대체 얼마 만이던가.
홀로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온 그녀에겐 저 책더미 너머의 비통한 절규마저 즐겁게 들렸다.
“데이터에 있던 것보다…. 훨씬 정이 넘치는 사람들 같지, 지니?”
“주,주의를 요함. 이안 데스몬트, 현재 황무지 생존자 중에서도 비교할 사람이 몇 안 될 정도의 대량학살자. 벡스, 정형화된 데이터는 없으나 굳이 냉병기로 상대의 숨통을 끊는 것을 즐기는 잔인한 인물. 에젤 레이든, 허술해 보이나 극도로 어려운 감찰고시를 통과한 인물이며 47구역 돔의 최고 통치자 감찰총장과 수시로 대면할 정도로 권력에 가까운 인물. 박교수, 말할 필요 없음. 변종이 섞여 들어간 유사 인류. 전투력이 전무한 주인님이 가까이하기엔 너무 위험한 인물이라 판단됩니다.”
“위험한 인물이라….넌 너무 부정적이야, 지니.”
기긱-
“매사에 긍정적인 주인님에게 올바른 판단을 제제제제시하기 위한 합리적인 활동일 뿐입니딜딜딜딜딜딜- 기긱, 기기긱-.”
그녀는 점점 음성회로가 망가져가는 지니를 부드럽게 품에 안고, 내부 회로가 느슨해진 부분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눌러주었다. 톱니바퀴가 그르륵 거리는 소리가 애완동물이 기분이 좋아서 내는 소리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퍼억-
“아욱!”
그때, 한참 난리를 피우던 책더미 뒤쪽이 조용해지더니, 어색한 걸음의 남자 한 명이 넘어질 듯 밖으로 나왔다. 낄낄거리는 소리와 책더미 사이로 툭 튀어나온 다리를 보니 누군가 걷어찬 모양.
그 어정쩡한 모습에 그녀는 신비주의를 고수하기로 한 지니와의 결정도 잊은 채 크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푸훗! 저게…. 정말 위험인물로 보여?”
“….Negative.”
어느새 검은 양복에 시대착오적인 중절모, 심지어 종이로 만든 꽃 같은 것을 한 손에 든 교수를 보며, 그녀는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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