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62
Chapter. 10 납과 은화(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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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구역 돔으로 가는 길은 지금까지에 비해 상당히 수월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돔의 영역이니까. 47구역에서 돔 사람들이 그 주변을 관리하는 것처럼, 38에서도 수시로 주변을 순찰하며 그들의 안정권을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푸슛!
푸슛! 푸슛!
“….방금 그건 인간 같지 않았냐.”
“내가 봤어. ‘우리도 사람이다’ 같은 플레카드를 들고 있었어. 인간이야.”
여기서 그들이 지키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영역에 치중되어 있다는 것뿐.
돔의 상징과도 같은 거대한 푸른 실드와 그 경계 너머에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은 개인용 쉘터들.
그 쉘터 밀집지 바깥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감시탑이 세워져 있었으며, 지금 집음기를 통해 들리는 소리는 그 감시탑에서 소음기 달린 저격총으로 근처에 움직이는 생명체를 사살하는 소리였다.
확인 결과, 그들의 조준사격은 생존자와 변종을 가리지 않았다.
치직-
“이건…. 이상해. 지금 눈앞에 있는 건 대형 스캐빈저 집단이 아니라 돔이라고. 자유와 정의, 구세계 질서의 회복을 기치로 둔 집단이란 말이야!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최근 혼란을 틈타, 제3 세력이 돔을 점거했다거나….”
“에젤.”
“아니면 우리 47구역처럼 한 부서가 렙터와 손을 잡는 바람에 사실상 렙터의 괴뢰화가 진행 중이라거나….”
“에젤.”
“난….. 난 이걸 받아들일 수 없어. 우리도 필요에 의한 살인은 하지만, 그게 민간 생존자를 대상으로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여기서 돔을 관찰한 15분 동안 내가 본 민간인 사상자만 다섯 명이야, 다섯 명! 모두 자기 전 재산을 들고 피난 온 평범한 사람들이었단 말이야! 돔은, 그런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만들어졌잖아!”
치직-
“엔젤. 여긴 황무지야.”
“….벡스 말이 맞다. 돔의 가치가 아무리 정의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해도, 지금 같은 상황에 집단으로서 취해야 할 행동은….”
“그런 황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돔이란 말이다! 적어도 우리만은…. 우리만은 그래선 안 되는 거라고!!!”
통신기를 통해 들려오는 혼란에 빠진 에젤의 목소리. 어딘가 좀 순진하고 맹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긴 했다. 순수하게 돔의 정의성을 믿는 녀석으로서는 눈앞에 벌어지는 일이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겠지.
[….어떻게 생각해?]하이드의 물음에 망원경을 통해 눈에 담은 돔의 광경을 떠올렸다.
커다란 돔의 실드와, 그 주변에 빈틈 하나 없이 모여든 작은 쉘터들. 유난히 눈에 띄게 많은 쉘터 부착형 온실.
적게는 2개에서, 많은 것은 소형 쉘터 하나에 온실이 다섯 개까지 붙어있는 것도 있었다.
‘온실 모듈은 제법 전기를 많이 잡아먹지. 저렇게까지 온실을 늘려버리면 쉘터 자체적으로 사용할 전기는 거의 없다시피 할 거야. 저렇게 밀집되어 있으니 펌프로 퍼 올리는 물도 거의 다 온실로 흘러 들어갈 거고. 저 쉘터는 사람을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야. 쉘터에 포함되어 있는 온실 관리 모듈을 사용하기 위해 지어진 거지.’
[그럼, 저 많은 쉘터에 사람은 안 살고 농장만 돌리고 있는 거야? 너무 비효율적인데?]하이드의 말에, 교수는 불편한 한숨을 내쉬었다.
‘돈과 효율을 세상에서 제일 많이 따지는 돔이 그런 식의 운영을 할 리가.’
망원경의 배율을 최대한으로 높여, 추운 날씨에 환하게 온열등이 켜져 있는 쉘터 중 인기척이 있는 곳에 초점을 잡았다. 작은 물뿌리개를 드는 것도 힘에 부치는지 비틀거리는 꾀죄죄한 소년. 그의 바싹 마른 입술과 물을 받아 생기 넘치는 농작물이 눈에 띄게 대조되었다.
‘….뭐가 됐든, 우리 동네 돔이랑 같은 집단이라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겠군.’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을 느끼며, 밖으로 나온 교수는 트럭의 짐칸에서 커다란 깃발을 하나 꺼내 차량에 매달았다. 여정을 떠나기 전 미리 준비한, 돔의 마크와 캐러밴 표식이 들어간 깃발.
상단 차량임을 나타내는 크고 하얀 깃발이 펄럭이자, 돔을 향해 접근하는 그들에게는 거짓말처럼 사격이 날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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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아, 이런 시기에 저 험난한 황무지를 여섯 구역씩이나 건너오다니. 47구역 돔의 우정에는 정말 감탄을 금할 수 없군요! 환영합니다, BDSM 여러분!”
거짓말.
“정말 힘든 시기가 아닙니까. 38구역은 환경도 그렇고, 자유롭게 활동하기 힘든 곳이다 보니 식량이 한참 부족한 곳이지요. 갑자기 범람하는 변종 때문에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고 말았지 뭡니까. 물론 우리도 사람이니 그들을 받아들이고 싶지만…. 가지고 있는 식량도, 생산기반도 없는 난민들은 그 자체로 순식간에 돔의 식량을 바닥내고 혼란을 야기할 바이오 하자드나 다름없습니다. 위정자로서 차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거짓말.
“핵심 부품 건은 저희도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습격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갑자기 변종 놈들이 평소의 수십 배에 달하는 숫자가 몰려오더니, 그 뒤를 이어 해피 블라인드, 그 광신도 놈들이 따라오지 뭡니까? 필사적으로 놈들의 목표인 중앙 발전시설은 사수했지만, 동부 구역이 끔찍한 피해를 입고 말았지요. 그때 저희 감찰부 병기고에 들어있던 무기와 함께 47구역에 전달할 준비 중이던 박스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아, 특수한 잠금장치가 되어있으니 놈들도 부술 생각이 아니라면 열 수 없을 겁니다. 이래 봬도 그 상자는 전쟁 전 주요 군사기밀을 보관하던 블랙박스였던 것을 재활용한 것이니까요. 적합한 방법이 아니면 현시대의 기술로 열 방법은 없습니다.”
거짓말, 거짓말, 그리고 거짓말.
개인 쉘터 구역을 지나 돔의 내부에 들어왔을 때 이쪽 감찰 총장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바짝 긴장했다. 우리 동네 총장님, 알렉산더 영의 반만 되는 인물이라도 언제 어떻게 사람을 홀라당 낚아 먹을지 모르는 능구렁이일 테니까.
하지만 웬걸? 잔뜩 긴장한 내 눈앞에 나타난 남자는 속 빈 수수깡 같은 짜가리 새끼였다.
수작을 부리긴커녕 거짓말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초짜.
얼굴에 거짓말하는 티가 너무 나서 ‘혹시 일부러 이러나? 얘 상대하면서 방심하고 있으면 짠! 하고 진짜가 나타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당장에라도 물건부터 내리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먼 길을 건너온 터라. 좀 쉬고 얘기하고 싶은데….”
덥썩!
“당연한 말씀입니다! 외부인용 숙소 중 가장 좋은 곳을 준비해뒀으니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원하는 만큼 거래를 하시고 돌아가시면 되겠습니다!”
내가 지금은 좀 곤란하다는 의사를 슬쩍 내비치자, 38구역 감찰 총장은 두말하지 않고 물러났다. 그가 잡은 손에 딱딱한 뭔가가 남았다. 작은 접속기용 외장 칩과, 메모.
[1,000,000 sil] [모쪼록, 주 거래 상단은 ‘로치드 코인’ 이 좋을 겁니다. 서로를 위해.]“하, 같잖아서 정말.”
보나 마나 저 수수깡이랑 끈이 닿아있는 상단이겠지. 내부 치안과 규정을 관리하는 감찰부의 총장이라는 사람이 이 꼴이라니.
둘 중의 하나였다.
38구역 돔이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썩어 빠진 곳이거나.
우리 동네처럼 감찰, 행정, 집행 중 하나가 모든 권력을 손에 넣은 뒤 허수아비를 세워놓은 것이거나.
메모를 이안에게 넘겨주니 슬쩍 보고는 두말하지 않고 성냥을 그어 담뱃불로 써버렸다.
“그냥 청탁이면 모르겠는데, 저 병신같은 게 꼴에 총장이라고 협박까지 하는군. ‘서로를 위해’? 구역 6개 단위 장거리 캐러밴한테 겨우 100만이라니. 저 새끼는 그릇이 아니야. 누구 대가리 할 만한 놈이 아니라고.”
“내가 보기에도 좀 이상해, 햅번. 총장이면 높은 사람인데, 방금 그 사람은 손에 펜 자국 같은 게 하나도 없었어. 47구역 총장님은 24시간 서명하느라 중지랑 검지가 눌리다 못해 살짝 돌아가고 굳은살까지 있었거든? 그런데 저 사람은…. 그런 윗사람 같은 흔적이 하나도 없어.”
나도 그렇고, 벡스와 이안까지.
“좋아, 세 표 확보로군. 에젤, 지금 상황에 대해 뭔가 하고 싶은 말 있냐?”
“….지켜봐야겠어.”
“그럼 너까지 네 표. 누가 봐도 저 수수깡은 허수아비인 것으로 판단, 방금 전 만남은 없던 것으로 취급하는 것으로 하지. 일단 숙소부터 찾자. 캐러밴용으로 주차공간 넓고, 탁 트인 곳으로.”
“기왕이면 여기서 제일 높은 곳으로 찾자. 아까 보니까 여기 저격수들 실력이 괜찮던데. 각 나오는 곳에서는 편히 쉬지도 못하겠어.”
“당연히 그것도 고려해야지. 지리도 파악할 겸 한 바퀴 빙 둘러보면서 찾아보자고.”
감찰부 건물에서 우릴 안내하겠다고 나온 사람을 없는 사람 취급해버린 일행은 그대로 차를 몰고 38구역 돔의 거리로 파고들었다.
그 누구도 여기서 준비해준 숙소에 머물자고 하는 이가 없었다. 심지어 에젤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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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빌어먹을 일이지만, 일단 상황이 상황인 만큼 38구역 돔을 잠정적인 ‘적’으로 가정했다.
‘뭐, 변종이랑 광신도가 몰려와서, 그깟 살점 덩어리들이 몰려와서 못 막고 침입을 허락했다고? 다른 집단도 아닌 돔이?’
개소리도 그런 개소리가. 지금 저 장벽 위로 불쑥 치솟은 거대한 공갈포만 봐도 그게 헛소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공갈포라…. 오랜만에 보는군. 전쟁 때도, 렙터 시절에도 저것 때문에 한참 골치를 썩였는데.”
“여긴 렙터의 대규모 침공이 잘 없었던 구역이니까. 주적은 머글러 아니면 2형 변종, 해피블라인드였으니 방어시설도 장비보다는 생명체를 상대하는 쪽으로 세워놨겠지.”
공갈포. 정식 명칭은 확장 살상형 충격 진동 진압 장비.
진압 장비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원래는 전경들이 쓰는 대인 진압용 장비였다. 압축 공기를 발사하는 전자기 화기의 일종인데, 맞은 사람에게 구토감과 두통, 현기증을 일으키는 장비지만 살상력 자체는 거의 없다시피 한 작은 무기다.
그리고 그 무기의 위력과 규모를 엄청나게 키운 것이 바로 저것, 대전쟁 시절 ‘보병 청소기’ 또는 ‘중공의 악몽’ 등으로 이름을 날리던 공갈포 되시겠다. 운용법도 굉장히 간단했다. 든든한 떡장갑차에 저 공갈포를 올려놓고, 적 보병 밀집 지역에 개돌해서 뻥- 뻥- 쏘아대면 사람이 칠공에서 피를 쏟으며 죽어나간다.
서로 물자를 모두 쏟아부으며 거렁뱅이 치킨 워가 한참이었던 대전쟁 2년 차. 그 당시 중세도 아니고 21세기에 ‘풀 플레이트 솔져’라며 찢어진 방탄 섬유를 기워 만든 보호구를 두르고 돌격하는 가성비 병종이 있었는데, 압도적인 인구수와 퀄리티를 신경 쓰지 않는 재활용으로 무수히 많은 돌격 보병을 활용하며 상당한 재미를 보던 중공-인도 연합군은 이 공갈포 장갑차의 등장으로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가곤 했다.
대인전 뿐만 아니라 전차전에서도 내부 전차승무원들을 전투 불가 상태로 만들며 혁혁한 공을 세우던 무기.
38구역 돔의 장벽 위에는 그때 봤던 공갈포보다 더 크고 우람한 녀석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압축공기가 떨어지지만 않으면 그냥 변종은 백만 대군이 몰려와도 막겠다.”
“변종이 아니라 스캐빈저가 그만큼 몰려와도 막을걸? 나 저거 한번 상대해 봤는데, 전차용 실드 최대출력으로 해놨는데도 충격이 남아서 안으로 들어오더라고. 코피가 쫙 나면서 눈에 초점이 흐려지는데, 직격이 아니라 저거 근처에만 있어도 조준사격은 엄두도 못 낸다. 광역 살상, 진압 장비에 훈련된 저격수까지. 적을 일방적으로 때려 패기 위한 병과 구성이야. 적어도 방어 시설 하나는 47구역 돔과도 견줄만하다는 뜻이지.”
“다 떠나서, 저런 광역 충격파는 버블 실드에 극상성이야. 다치지 않아도 근처에 한 방 날리는 것만으로도 그대로 방사능 피폭 스타트다. 38구역에 들어오자마자 스캐빈저의 흔적이 순식간에 사라진 게 이해가 가는군. 너무 강하다- 수준이 아냐. 싸우면 죽는다- 급이 되어버리니 그 미친놈들도 엄두를 못 내게 된 거지. 정말…. 말도 안 되는 방어력이군. 이곳의 생리에 가장 어울리는 방어망을 구축해뒀어.”
공갈포의 짧은 사거리를 제외하면 이 근처에서 누구도 상대할 엄두조차 낼 수 없을 정도의 막강한 방어력.
그걸 보고 있으니 도시의 모습이 한층 더 의심스러워 보였다.
털털털털털-
창문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도시의 모습 속에, 조금씩 파괴와 방화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말이야. 그 수수깡 말대로 엄청난 숫자의 변종이 몰려왔는데, 그 사이에 다나가 보여준 영상 속 ‘인조 3형변종’이 끼어있었다면 저 방어망을 뚫을 수 있었을까?”
“….가능성 정도는 고려해야지. 3형은 말 그대로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놈들이니까. 하지만 내 개인적인 의견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애초에 영상 속에서 변종으로 변한 사람들은 변화가 끝나자마자 광신도 놈들에게 공격성을 표출하기 시작했잖아? 바꿀 수는 있어도 조종까지는 애매하다는 뜻이지.”
“그 정도는, 한 명 버리는 셈치고 공격성을 유도하며 몰이하는 방법도 있어.”
“몰려온 걸 말하는 게 아니라 피해가 집중된 곳을 말하는 거다. 변종은 기본적으로 자길 공격한 대상을 공격하잖아? 어떻게 공갈포에 버티는 놈이 있었다고 해도, 정말 도시 내부까지 뚫릴 지경이었으면 동문 부근 공갈포가 다 작살났어야지. 지금 보니까 기껏해야 두 세대 정도. 그것도 좀 그을리고 터진 수준으로, 고칠 수 있을 정도로 고장 났어.”
갈수록 전쟁터 같은 모습이 되어가는 거리를 보며, 이안이 남긴 감상.
일단 그의 의견은 변종이 이렇게 만든 것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변종은 아니다. 그럼 해피 블라인드의 소행인가? 종교라는 건 때론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니까. 내부에 협력자를 만들어 공갈포를 다운시키고, 그 틈에 어떻게 여기까지 몰아온 변종과 함께 침투했다면….’
덜컥. 타다닥!
“….? 어이, 에젤! 어디가! 상황이 확실해질 때까지는 같이 움직이자고-”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천천히 파괴된 동부 시가지를 지나던 중, 뭔가 발견한 에젤이 차에서 뛰어내려 달려나갔다.
“햅번, 쟤 여기 오고 나서부터 좀 이상한 것 같아.”
“….이해해줘야지. 나름 가치관이 통째로 흔들리는 중이니까.”
주변을 살피고 정차한 우리가 에젤이 달려간 쪽으로 걸어갔을 때쯤, 온통 검댕투성이가 된 에젤이 씩씩거리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광신도도 아니야.”
“뭐가?”
“여길 이렇게 만든 거! 이안의 말대로 변종도 아니고, 광신도도 아니라고!”
에젤은 울화가 치미는 목소리로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금속 막대를 내던졌다. 본 적 있는 도구. 감찰부에서 시료를 채취하거나 증거를 확보할 때 사용하는 핀셋, 자, 작은 나이프 등 이것저것이 들어간 다용도 도구였다.
“근거는?”
처억!
에젤의 손가락이 다른 곳에 비해 조금 덜 파괴된 건물을 가리켰다.
“방화지점, 건물 연료전지와 연계해서 폭발물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는 방법, 불이 번지는 방향을 계산하는 방법까지! 너무…. 익숙해. 감찰부나 집행부 요원들에게 가르치는 방식과 똑같다고!”
에젤은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뭔가 불이 붙은 것 같은 눈으로 얼굴에 묻은 검댕을 닦아내며 말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곳의 요원들이 민간인을 학살하고, 도시를 파괴했어. 전부 조작이야! 그 총장이라는 놈의 말도, 변종 얘기도 전부 다-”
“쉿. 목소리가 너무 크다, 에젤.”
나는 흥분해서 떠들어대는 녀석의 입을 막고, 억지로 차 안에 쑤셔 넣었다.
모두가 차에 탄 것을 확인한 다음, 차량 간 통신을 열었다. 이상한 통신 장애 현상이 발생 중인 30번대 구역에서도 근거리 통신은 가능하게 한 군용 통신기. 이거라면 도청당할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쓰으으읍- 하아아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 지옥 같은 변종 소굴을 뚫고 오며, 돔까지만 오면 최소한 임무 완수에 편히 쉴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짜증스러운 마음에, 통신기를 쥔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현 시간부로 이곳 38구역 돔을 적진으로 가정한다. 이곳의 상층부 전체, 혹은 일부가 해피 블라인드와 협력하고 있는 정황이 드러났으며. 우리 임무의 목표 또한…. 도시에 대한 자해에 가까운 연극을 통해 38구역에서 해피 블라인드의 손아귀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 더. 우리가 찾는 부품 상자…. 어쩌면 그게 광신도들이 들고 있던 상자와 동일한 물건일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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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익-
“적진이라.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세상 좆같은 상황이군. 마지막 말은 47구역에서도 우릴 속였다는 뜻인가?”
치익-
“믿음이 없었다는 뜻이지. 스캐빈저 사이에는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야. 물건의 봉인지를 뜯으면 거래 결렬, 운송 대상은 식료품이라면서 정작 뜯어보면 영역 분쟁용 탄약이 잔뜩 들어있고. 47구역 총장이 우릴 믿지 못한 거야. 변종화 장치라는 큰 힘을 손에 쥐게 되면, 우리가 총을 거꾸로 잡을 거라 생각한 거지.”
치익-
“헛소리! 이쪽 사람들이 타락했다고 해서 우리까지 같은 취급하지 마! 총장님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데 내 목을 걸 수도 있다!”
치익-
“그럼, 당연히 목을 걸어야지. 이미 재수 없게 얽혀든 우리는 벌써 모가지가 달랑달랑 해졌거든.”
치익-
‘… 이래서 확실해질 때까지는 혼자 알고 있으려 했는데.’
이곳 38구역에 더해 총장에 대한 의심까지 더해지자 순식간에 일행 사이에 혼란이 일기 시작했다. 되도록 끝까지 숨기고 싶었지만, 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 정보를 숨기고 있는 것도 안 될 일이었다.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 적어도 등을 맡긴 이에게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점점 언성이 높아지는 통신을 들으며, 통신기에 입을 가져다 댔다.
“전부 입 다물어. 우리가 수평적인 관계라고는 해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운전대를 여럿이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캐러밴의 리더로서 명령이다. 입 닥쳐. 판단은 내가 하고, 싫은 놈은 빠져.”
치익-
“….”
대답이 없다. 좋아. 일단 동의는 했군.
명령권을 인정받았으니, 우선 일행 사이에 뿌리를 내리기 직전인 의심의 씨앗부터 뽑아내야 한다.
치익-
“내가 이런 상황이 될 줄 알고도 얘기를 꺼낸 것은 적어도 여기 있는 우리 일행에 대해서는 100%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 총장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변종화 장치를 우리에게 운송해달라고 했는지는 몰라. 하지만 에젤은 그걸 모르고 휘말렸을 가능성이 높다. 녀석은 렙터와 전투가 끝나고 내내 돔 바깥을 돌며 감시 임무에 투입됐으니까. 그러니, 적어도 서로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 행위나 발언은 지금부터 금지하겠어. 아군이 총을 들 때마다 깜짝 놀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감정 남았으면 지금 여기서 풀어. 나중에 사고 치지 말고.”
치직-
….통신기를 쥔 손에 땀이 흘렀다.
치직-
“….확인. 내 성격이 좀 그래서 미안하게 됐다, 에젤. 아군이 적이 되는 일에 대해서 안 좋은 기억이 많아서.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치직-
“나는…. 그냥 좀 혼란스러웠을 뿐이야. 아직도 그렇고. 나도 너희들에 대한 감정은 없어.”
이안의 툴툴거리는 목소리와 에젤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차례로 통신기에서 흘러나왔다.
‘좋아. 일단 일행 간 균열은 잘 봉합했군.’
아군인 줄 알았던 이들이 적이 된 상황. 심지어 일행 중 한 명은 그쪽 소속. 이런 경우에는 선을 확실히 정하고 혼란을 완전히 차단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진짜 아군이 누구인지 모르게 된다. 에젤? 에젤 레이든은 만난 지 몇 달밖에 안 됐지만 간장게이바는 햇수로만 5년이 넘었다.
내 개인적인 의견으론, 녀석은 착한 멍청이일 뿐이다. 능력도, 의욕도 넘치는 착한 머저리. 그래서 더 이용당하기 쉬운 녀석.
치직-
“지금부터 우리 넷을 제외한 아무도 믿지 않는다. 만나는 모든 이에게 의심을 품고, 정보를 수집하고 행동에 주의를 기울여. 우선 민간인부터 확인하지. 38구역 감찰부 놈들이 제공하는 정보도 믿을 수 없으니. 이 인근에 살던 생존자가 있으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겠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치직-
“확인.”
“확인.”
치직-
“….확인.”
에젤의 망설임이 묻은 체크 사인까지 받고 나서야, 우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첩보전이라…. 세상 골치 아픈 일이 되어버렸군.’
저도 모르게 ‘다나가 여기 있었다면…’ 하는 생각을 하다 고개를 흔들어 버리는 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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