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64
Chapter. 10 납과 은화(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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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각. 딱. 따각.
“거, 더 볼 거 있냐? 대충 다 나왔잖아?”
“그렇지. 그냥 좀 구린 구석이 있어서 그래. 먼저 자라. 어차피 내가 깨어있을 거니까 벡스도 그만 들어오라고 하고.”
“그 새끼 말 안 들어. 상황 듣고 나서 더 날을 세우더니 아예 이불 하나 들고 나갔다. 밖에서 잘 거래.”
이안이 슬쩍 턱짓하는 곳을 바라보니 옆 건물의 옥상에 낮에는 없던 요철 하나가 생겨 있었다. 상황이 생각보다 많이 심각한 것을 인지한 벡스가 감시역을 자처한 모양이다.
“쯧. 피곤한 녀석.”
“크흐흐흐, 성격이려니 해야지. 난 잔다. 내일 크게 한바탕하려면 잘 쉬어둬야 하니까. 너도 적당히 하고 자 임마. 휴식도 전투의 일환이야.”
나는 이안의 말에 대충 수긍하는 척 손을 흔들어 보이고 다시 기록에 집중했다.
늦은 밤.
일행이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잠이 든 시간까지 내가 확인하고 있는 것은 오늘 저녁에 확보한 취조 내용이었다.
행정부 대변인을 취조하던 중 부리나케 달려온 감찰부 대변인. 그리고 다 정리됐다고 생각했을 무렵 조용히 찾아온 집행부 사람까지.
숙소를 잡기만 기다렸다는 듯 차례로 찾아온 그들이 입에 담은 것은 모두 정의에 대한 것이었다.
[기록]==========
행정부 대변인 – 카렐 벨르몽트.
‘돔이 어떤 집단입니까. 자유 민주주의! 구시대의 정의를 회복하고자 만들어진 집단이 아닙니까! 47구역의 선례를 본받아 저희 38구역도 대통령제로 거듭나기로 했습니다. 분명 감찰부도, 집행부도 합의를 했단 말입니다.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우리 행정부였습니다! 38구역의 모든 시설에 대한 권한은 행정부 소속이 됐단 말입니다! 그 무뢰한들은 불법적으로 시설을 점거하고 강짜를 놓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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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부. 가만히 말을 들어보니 이 새끼들은 병신이었다.
보아하니 우리 47구역 영 총장님의 크고 아름다운 권력이 이 녀석들이 보기에 썩 괜찮아 보였던 모양이다. 우리야 아주 전쟁통이 되어서 하나는 배신했고, 하나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니까 스무스하게 감찰부가 권력의 최고봉으로 올라서게 됐지만, 이쪽은 셋 다 나름의 영역을 구축하고 권력을 비등하게 갈라먹은 상황. 올인을 했는데 내가 꽝이고 옆에 놈이 당선됐네? 그러자 뒤도 안 보고 판을 엎어버린 것이다.
그냥 허허 웃으며 정보나 뽑아먹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한마디 안 해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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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럼 정말로 투표 결과만 떡하니 보여주면 아이고, 저버렸네? 다 가져가슈- 하면서 승복할 줄 알았습니까?’
‘그게, 당연히 마찰이 있을 줄 알고 저희 측에서도 나름의 준비를 해뒀는데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나름의 준비 뭐. 목 놓아 성토하기?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고 사정하기?’
‘이이익, 잘 알면서 왜 그러십니까! 47구역과는 얘기가 다 되어있었잖아요! [상자]를 넘기면, 돔의 설립 취지에 대한 얘기와 함께 우리 행정부의 손을 들어주기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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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석, 제 입으로 말해놓고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
우리가 47에서 온 것도 맞고, 총장의 의뢰를 수행하고 있는 것도 맞지만 ‘그쪽’ 얘기까지 다 전달이 됐는지, 그냥 배달부인지는 아직 모르는 상황. 스스로도 긴가민가한 상황에서 심리적 압박감에 아군이었으면 좋겠다- 하는 심리까지 더해지자 저도 모르게 툭 내뱉어 버린 것이다.
‘정통성…. 외교적 인정이라는 건가. 돔이 아무리 과거의 질서로 되돌아가는 것을 추구한다지만, 이건 너무 되돌아갔잖아.’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먼 옛날 왕조 시절처럼 새로 왕위에 등극했는데 지방 호족들이 대놓고 반기를 든 상황. 우리 조상님들은 보통 이럴 때 옆 나라 왕들에게 사람을 보내서 ‘내가 이러이러한 왕인데, 그쪽에서 내가 왕이 맞다고 글 하나만 써줘라~’ 하는 식의 요청을 하곤 했는데, 상황이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
38구역 돔과 47구역 돔이 같은 집단에 속해있긴 하지만 엄연히 각자의 영역을 구축한 개별된 도시. 우호적인 관계로 물자의 교류나 군사협력을 해왔던 38구역으로서는 47구역의 점잖은 요청이 도착하면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이런 청탁에는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예물이 함께 하는 게 기본.
‘[상자]. 만약 거기 들어있던 게 정말 변종화 장치였다면 예물로서 차고 넘치지.’
넘치다 못해 과하지. 정말 그런 기술이 있었다면 지난 5년간 38구역 돔이 그걸 쓰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아마 5년 동안 죽어라고 파 봤는데, 도저히 써먹지 못할 치명적 결함이 있거나 미완성인 상태였던 것이고. 그런 계륵같은 물건인데 실태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겉보기에 전략 핵에 준하는 기술이니 남 주고 생색내기 딱 적당한 물건으로 보였을 터, 선물로 제격이라 생각했겠지.
‘다나가 준 정보가 없었으면 여기서 한참 헤맬 뻔했군.’
그래서 [상자]를 넘겨주기로 했고, 운송팀이 둘이나 갔다가 와장창 실종이 됐으며, 총장님은 귀한 기술이전을 위해 우릴 이쪽으로 보내게 됐다- 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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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알고 왔으니 그렇게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자]. 그거 변종 관련된 기술 맞지요?’
‘후우우. 역시 총장님이 보낸 사람들이었군요. 아직 47구역에서 우릴 믿어주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럼, 돌아가서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행정부 쪽은 거래를 망칠 의사가 전혀 없었다고. 갑자기 통신이 끊기고, 47구역에서 보낸다는 사람들도 도착하지 않아서 부득이 우리 쪽에서 [상자]를 전달하기 위해 움직였다고.’
‘그럼. 상자의 행방은?’
‘….도난당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행정부 건물에서 수송 차량에 옮기자마자 괴한들이 요원들을 모두 죽이고 강탈해갔습니다.’
‘광신도에 의한 도난이 아니라 괴한들이 가져갔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제 옆에 있는 이 친구. 혹시 아는 사람입니까?’
‘….죄송합니다. 한번 적의 무력시위를 겪었더니 저희가 성급해졌습니다. 통신이 끊긴 지금 BDSM 캐러밴은 47구역과 유일한 연락 수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감찰, 집행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이쪽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을 거라 판단하고, 미리 와서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그만….’
‘알겠습니다. 잘 들었고, 돌아가는 대로 총장님께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이 친구는 데려가셔도 좋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저희 행정부가 38구역의 괴뢰집단을 정리하고 도시가 안정되는 즉시 크게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전해주십시오! 우리가 47구역과 관계를 망칠 생각이 전혀 없었음을!’
* 대화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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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행정부 대변인을 통해 알아낸 사실.
행정부는 47구역에 정치적 도움을 대가로 [상자]를 보냈으며, 여러 가지 사고에 의해 그 [상자]는 도난당하고 말았다….
‘확실히. 행정부는 일련의 사건에 대한 주도권이 없군.’
일의 시발점임에는 분명하나, 그 이후에는 다른 세력들의 공작에 질질 끌려다닐 뿐이다. 애초에 연구, 행정직이 대부분인 행정부로서는 무력행사가 시작된 뒤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겠지.
대변인은 그렇게 감사의 인사를 남기며 풀어준 저격수와 함께 방문을 나섰다. 복도에 그의 구두 소리가 천천히 멀어지던 중, 갑작스럽게 복도에 소란이 일었다.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 여러 명의 인원이 대치하고, 언성을 높이는 소리.
잠시 후, 멀어져가던 구두 소리가 다시 우리 쪽으로 가까워졌다.
미세하게 템포가 다른 발소리.
끼이익-
“저 쥐새끼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죄다 거짓부렁이니 믿지 마시오!”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방에 들어온 남자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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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부 대변인 : 박환석
‘이 숙소는 쓸데없이 방음이 잘 되어있단 말이지. 조용히 듣고 내일 아침에나 방문하려 했는데, 저 쥐새끼 같은 놈들이 말하는 꼴이 하도 기가 차서 말이지. 나 감찰부 부장 박환석이오.’
‘아, 예. BDSM 캐러밴의 리더를 맡고 있는 박교수입니다.’
‘아,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그런데…. 박 교수? 혹시 어디 박씨인지….?’
‘그게 중요합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나! 나라가 없어지고 말도 양놈 말을 쓰는 시대에 동향 사람이 어디 보통 인연이냔 말이지!’
‘어….밀양 박씨였나, 뭐 그런 것 같았습니다만.’
‘자네!!!! 앞으로는 환석 아재라고 부르게! 우린 가족이야, 가족! 아 환석 아재- 해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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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사람 엿먹이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 같았달까. 아무렇지도 않게 도청했다는 소리하며, 뭐. 아재? 씨발 아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어쩜 욕 한마디, 비꼼 하나 없이 저렇게 재수 없고 좆같을 수가 있는지. 일단 이쪽은 정보도 부족하고 세력도 좀 있는 편이라 디폴트, 그러니까 예의 바른 형태로 응대하긴 했는데…. 진짜 여기가 이놈들 본거지만 아니었으면 턱주가리부터 날리고 시작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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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이 환란의 시기에 위정자가 무엇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인간성? 삶의 질? 개소리. 다 위선자의 개소리야! 정의는 시대에 따라서 모습을 달리했네. 중세에는 말을 타고 적의 목을 치는 자가 있으면 치하하는 게 정의였지만, 현대에는 그자를 감옥에 보내는 것이 정의가 되었지. 세상이 변하면, 정의도 변해야 하는 거야. 우리는 가뭄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인간성 같은 사소한 것보다 조금 더 현실에 눈을 돌려야 할 때라고 말이지.’
‘돈. 상황에 대한 선택권은 돈에서 나온다네. 자네도 장사꾼이니 알 것 아닌가? 주머니에 든 게 그득하면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법이지. 당장에 시민들의 목숨을 보호하는 도시급 실드도, 그들이 먹을 식량을 만드는 온실도 전부 돈이 아닌가? 그런데 행정부, 집행부 그놈들은 인간의 존엄성이 어쩌고, 하면서 천민 농장을 폐쇄하자고 하질 않나, 조금 더 시민들의 손에 돌아가는 것이 많아야 한다고 하질 않나…. 배은망덕하기가 짝이 없지! 일반 시민은 벌레나 마찬가지인 것을! 벌레에게 밥을 많이 주면 배가 터져 죽기나 하지, 영 쓸모가 없는 걸 모른단 말이야!’
‘당장 그 행정부 놈들의 작태만 봐도 아주 머저리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뭐, 투표 결과를 공표해? 그럼 돈을 퍼준다는 공약을 남발한 행정부를 얼씨구나 하고 밀어붙이겠네? 이래서 일반 시민들은 멍청하고 아무것도 모르게 만들어야 해. 괜히 아는 척이나 하면서 기회다, 하고 일터에서 뛰쳐나와 쉴 생각만 하거든! 다행히 그 꼴을 보기 전에 통신을 죄다 끊어버렸지. 우리가 아니었으면 데모니, 시위니 한다면서 돔의 생산력이 반 토막 나고 말았을걸? 이게 제대로 된 위정자의 일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아, 마지막으로 하나 더. 총장님의 약속을 어기고 노점을 열었더군? 뭐, 불안한 시기에 빠르게 재고를 처리하겠다는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하니 야채 장사 정도야 넘어가도록 하지. 하지만 [과도기 장비], 그것만은 반드시 로치드 코인 상단과 거래해야 할 거야. 이건 권유가 아니라 충고라네. 어기게 되면, 다소 강압적인 방법으로. 이문이 없는 거래를 하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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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터 그 로치드 코인인가 바퀴벌렌가 하는 상단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인상을 자주 받았는데, 지금 보니 단순히 영향력이 강한 게 아니라 아예 감찰부가 통째로 그 상단에 넘어간 모양.
하는 얘기라곤 전부 돈, 돈, 돈, 오직 돈 얘기에다 그 수단도 상당히 악랄했다.
외부인, 떠돌이를 납치해 만든 천민 농장. 인간을 가축이나 물건으로밖에 보지 않는 황금 만능주의의 극단.
그리고, 우민화에 대한 긍정과 언론통제.
‘라디오 타워. 대전쟁 시절에 구시대 방송국을 개조해 만든, 상대의 방해 전파를 뚫고 명령을 전달할 정도로 강력한 신호를 송출하는 전자전 기지라고 들었다. 감찰부에서는 투표 결과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잘 알지도 못하는 라디오 타워를 이용해 강력한 전파 방해를 시도했군. 그 결과가 상상 이상으로 막강해서 거의 30번대 전역에 통신망이 차단되어 버렸고. 이걸 고칠 줄 아는 기술인력은 행정부에 다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민간 기술자들을 모조리 끌고 가서 고치고 있는 거야.’
권력에 대한 강한 야망이 돋보였다. 통신을 끊은 것도 시민들이 결과를 알고 행정부를 지도자로 추대할까 그랬다고 하니.
정리해보면,
1. 감찰부는 행정부가 지도권을 갖는 게 싫었다.
2. 감찰부는 언론통제를 위해 라디오 타워를 가동, 광역 방해전파를 가동시켰다.
3.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감찰총장은 ‘전달 준비 중이던 [핵심부품]을 도난당했다’라고 했다.
결론.
‘이 녀석들은 행정부와 47구역의 거래를 알고 있었다.’
내용물이 뭔지는 몰랐지만, 그 상자가 47구역으로 가는 중요한 정치적 거래의 대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서 상자를 탈취하고 거래를 막았다. 통신을 끊어 시민들이 날뛰는 것도 막으며, 두 세력 간의 연락도 끊어버렸다.
연락이 끊긴 사이, 운송팀은 모두 이곳에 도달하지 못한 채 실종돼 버렸고.
무력이 부족한 행정부를 외부 활동으로 완전히 고립시켜 버린 것이다.
‘그리고, 탈취한 상자는 총장의 말처럼 열 수 없는 물건이라, 내용물이 뭔지도 모르고 병기고에 던져뒀다가 탈취당했다.’
따각. 따각. 따각.
손 마디를 튕기며 고민하던 교수는, 정리된 종이 위에 글자를 써내려갔다.
4. 감찰 총장을 만나던 순간. 그리고 박환석이라는 대변인을 만나던 순간에도. 탄내가 났다.
그 향기. 희미하지만, 전장을 겪은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피와 살, 오물이 타는 전장의 냄새. 어딜 가나 그 휴먼 바이오 디젤 향기를 떨쳐내지 못하는, 렙터의 냄새.
사각사각.
[감찰부 렙터]?대부분의 무력을 집행부가 가지고 있는 38구역 돔. 사실 행정부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무력을 지녔어야 하는 감찰부가, 그들의 수준 이상의 외부 활동 결과를 보여주었다. 만약 감찰부의 일을 처리하는 무력부대가 그들이 비밀리에 키운 세력이 아닌 외부의 협력자라면. 만약 그게 렙터라면?
[행정부 47구역 돔] [감찰부 렙터] [집행부 ???]“….눈 덮인 산맥 꼭대기에서 굴러오는 눈덩이를 보고 있는 것 같군. 그것도 정확히 그거에 맞을 자리에 묶여서 말이야. 내가 모르는 황무지 대형세력 정규 모임이라도 있는 건가? 38, 47구역 돔에 렙터. 그럼 해피 블라인드도 한자리 끼어야겠네? 응?”
“으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햅번. 말이 씨가 된다고. 그 벽창호 같은 광신도 놈들이 누구랑 손을 잡아.”
두 대변인을 보내고 오늘 하루는 정리해야겠다, 하며 잠자리를 준비하던 시간.
나도 그냥 해본 말이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렙터에 이놈들은 또 뭔 개짓거리를 꾸미나, 하는 생각에 그냥 열이 뻗쳐서 해본 말이었는데….
“집행부를 총괄하고 있는, 미하일 플레트네프다.”
대변인들과 대화를 기록하고, 대충 정리도 마친 다음 잠이 들기 직전에 이 아저씨가 찾아왔을 때도 설마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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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집행부 총장 – 미하일 플레트네프
‘내가 했다.’
‘….예?’
‘하루 종일 열심히 찾아보고 있던 게 그거 아닌가. 누가 이 혼란을 야기했는가. 나란 말이다. 광신도와 손을 잡고, 도시에 테러를 일삼은 범죄자. 모두 내가 꾸민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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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그 또라이 새끼들이랑 손을 잡은 미친놈이 있었다. 심지어 이쪽은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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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정의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정의. 우리의 가장 고귀한 가치. 정의 말이다. 돔은 언제나 가장 약한 이를 위해 싸워온 집단이다. 하지만 지금의 돔은 그런 영광스러운 과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 저 밖에 딱지처럼 눌어붙은 농장들은 봤겠지?’
‘저게 그 대표적인 예시다. 정착지를 찾아 떠돌던 힘없는 민간인을 살살 구슬려 안으로 끌어들이고, 그대로 재산을 몰수하여 외부의 쉘터 농장에 가둔 다음 최소한의 물과 식량만 배급하며 죽을 때까지 부려먹는 개미지옥. 그렇게 벌어들인 농작물이 돔의 사람들에게 골고루 분배되느냐? 천만에. 대부분 그 감찰부 상인 놈들이 팔아서 제 주머니에 챙겨 넣고, 그걸 묵인하는 행정부도 한몫 단단히 챙겨서 온갖 사치스러운 연구를 자행하곤 하지.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가 대중에게 돌아오는 것은 엄청나게 비싼 말라비틀어진 당근 한 뿌리 정도. 그런 이들이 정권을 잡게 둘 수는 없었다. 우리는…. 오욕을 뒤집어쓰기로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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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끼다. 이 새끼가 틀림없어!’
그의 사명감에 불타는 눈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잡았다!’ 하는 느낌이 왔다. 아, 이놈들이구나. 이 인간들이 뭔가 크게 사고를 쳤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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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을 포함한 일행들이 주기적으로 우리 감시 요원의 시선에서 벗어나더군. 그 실력에 감탄하는 한편, 확신이 생겼다. 이 BDSM이라는 집단이 단순히 허명을 얻은 장사치들이 아니라 진짜 47구역의 정예 중의 정예라는 것을. 감시를 벗어나 나름대로 조사를 진행했겠지. 그래, 우리가 벌인 일이다. 동부는 감찰부의 황금 만능주의에 물든 타락한 상인들의 중심 거주지였고, 행정부는 중요한 물건을 빼돌려 뇌물로 그들의 입지를 다지려 하고 있었지. 우리가 그들을 막았다. 조력자의 도움으로 그 간악한 이기주의자들이 사람들의 고혈을 쥐어짜기 위해 정상에 앉는 것을 늦출 수 있었지. 다소 희생이 동반되기는 했지만 모두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그 말은…. 집행부가 38구역 돔의 민간인을, 그것도 도시의 한 부분이 통째로 밀리도록 방관했다는 뜻입니까?’
‘….너희들은 우리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평화로운 47구역에서 너희가 삶을 즐길 동안, 우리는 어떻게 해야 더 이 세계를 평화롭게 만들 것인가를 끝없이 궁리하고, 계획했기에.’
‘우린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저, 47구역에서 우리 문제에 끼어들지만 않으면 될 뿐. 조용히 이곳을 떠나라, 47구역의 요원들이여. 그렇게 된다면 조만간 썩어빠진 뿌리를 잘라내고 악을 정화한 38구역 돔으로서 다시 만나볼 수 있겠지. 계획의 끝에 도달하면…. 너희들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 대화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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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자기 할 말만 하고 쌩하니 가버린 집행총장.
그와의 대화는 따져볼 필요도 없었다.
집행부는 해피 블라인드와 손을 잡았다.
그들이 돔 안에서 활동하는 것을 도왔고, 그 대가로 감찰부 세력의 중심지인 동부를 불태우고, 겸사겸사 민간인도 불태우고, 아무튼 막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생각할 필요 없이 시원시원하게 말해준 것은 참 좋습니다만.
“문제는 이놈들이 해피 블라인드와 굳이 손을 잡을 필요가 있었느냐는 것인데…. 대부분 병력을 운용하는 집행부가 마음먹고 뒤엎으면 굳이 외부 세력과 손을 잡을 필요도 없는 거 아닌가?”
표면적인 이유는 다 밝혀낸 것 같은데. 진짜 의도는 하나도 못 찾은 것 같아서 영 찜찜했다.
‘동시에 진행되는 일련의 사건들. 명확하진 않지만, 전부 서로 한 발씩 걸치고 있어. 우연히 일어났다기에는 너무 공교롭다. 누가 있어. 배후에서, 판을 조율하며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사각사각-
[집행부 해피 블라인드] [행정부 47구역 돔] [감찰부 렙터]나란히 적힌 세 개의 메모를 보며, 교수는 갈등했다.
이런 탁상 추론으로는 한계가 있다. 대변인을 만났다고는 해도 다들 제 발로 찾아온 이상 노출해도 되는 정도의 정보만 말했을 게 분명하고. 진실에 접근하고 싶으면 직접 움직이며 정보를 모아야 하는데 상황을 보아하니 그렇게 움직이다간 저 거대 세력들의 사이에 짓눌려 터질 게 분명했다.
“혼자서 움직이는 건 불가능해. 셋 중에 하나를 골라 함께 움직여야 한다.”
그나마 제일 아군에 가까운, 47구역 돔과 손을 잡아서 안정적이지만 세력이 약한 행정부.
막강한 머니 파워를 자랑하며, 이득만 되면 누구라도 상관없이 손잡을 감찰부.
셋 중에 제일 정의에 가까운 사상을 가지고 있고 충분한 장비와 병력을 가지고 있지만 분명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집행부.
누구와 손을 잡아야 하나. 어디까지가 필요한 만큼의 지원이고, 어디까지가 감당할 수 있는 리스크인가.
탁. 탁. 탁. 탁.
세 집단의 메모를 오가는 교수의 손끝이 점점 더 빨라졌다. 딱딱한 왼손이 나무 테이블을 두드릴 때마다 사정없이 엉킨 정보가 차곡차곡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어.느.것.을. 고.를.까.요.
알.아.맞.춰.봅.시.다.
딩. 동. 댕.
집행부를 가리키며 멈춘 손가락.
“동.”
그리고, 그 손가락을 부드럽게 옆으로 옮기는, 허공에서 나타난 하얀 장갑.
사아아악-!
철컥!
소름이 올라오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위기에 익은 그의 몸이 침입자에게 총구를 겨눴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의도적으로 사고에서 배제했다고 해야겠지. 이 자식들은 변수 그 자체. 정보도 없고, 예측이 불가능한 부류니까.
“뭘 빼먹었나, 했더니. 그쪽을 잊고 있었군. 나름 제일 중요한 단서였는데. 어째, 부르지도 않았는데 찾아오셨네? 출장 서비스인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쪽을 기억하겠다고. ‘professor’.”
교수는 총구를 마주하고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하얀 양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행정, 집행, 감찰부의 메모 옆 빈 공간으로 옮겨진 손가락.
그 아래에는, 언제 올려놨는지 [예술가 연합]의 이름이 쓰여진 명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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