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65
Chapter. 10 납과 은화(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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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앙!
타아앙-!
멀찍이서 들리는 두 발의 경고사격. 벡스였다. 솔직히 근접 전투에 비해 사격 실력은 영 미덥지 못한 녀석이 제대로 쏴줄까 걱정했는데, 녀석도 그런 부분은 인지했는지 아예 허공에다 대고 발포한 모양이다.
영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간 탄환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철컥!
치이잉-
곧바로 잠에서 깨어나며 소파에 누운 자세 그대로 샷건을 들어 올린 이안.
순식간에 침대에서 튀어나와 날카로운 나이프를 침입자의 목에 들이대는 에젤.
“대단히 인상적인 환영 인사로군요. 혹시 제가 깨운 겁니까?”
“아아, 그렇고말고. 꿈에 마누라가 나왔거든. 막 호박파이를 입에 넣으려는 찰나에 깼다. 우라지게 고맙군.”
“별말씀을.”
흰 양복에 새하얀 장갑. 마찬가지로 하얀 가면과 모자. 과거에 자신을 W 라고 밝혔던 남자는 경동맥 바로 앞에 치명적인 칼날이 드리웠음에도 대단히 즐거워 보이는 목소리였다.
“안 그래도 당신들과는 꼭 한번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마침 일하던 곳 근처에 오기도 했고, 또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차례로 이곳에 방문에 얘기를 나누고 가길래 한번 들러봤습니다.”
교수는 슬쩍 방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굳게 닫힌 문도, 문의 잠금장치도. 혹시나 모를 침입자를 대비해 쇳쪼가리를 뿌려 대충 설치한 알람 트랩도. 어느 것 하나 건드린 흔적이 없었다.
그나마 상상이 가능한 영역.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것도 아니었다.
‘빌어먹을….’
아군인가, 적군인가. 무엇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짧은 대치 속에서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파악하고자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알 수 없음’이라는 허무한 결론뿐이었다.
황무지의 기현상. 그 정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예술가 연합을 상대로 그의 논리는 너무나도 빈약했다.
“근처라서 왔다라…. 정말인가? 애초에 그쪽한테 공간의 제약 같은 게 있긴 한 건가?”
목 뒤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교수는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갔다. 대화를 하러 왔다니, 우선 뭐라도 알아낼 수 있는지 찾아봐야지.
의구심이 가득한 내 물음에 그의 입에서 작은 기침 소리가 나왔다. 작게 몸을 떠는 그의 모습을 보고서야 그게 웃음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이런, 이런. 재미있는 얘기를 하시는군요. 여긴 게드로이츠의 세상이 아니라 엄연히 현실입니다. 나는 마법사가 아니지요.”
“그럼 이곳에는?”
“걸어 들어왔습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약속만 잡으면 순식간에 도착하는 그 능력은?”
“시간 약속을 중히 여길 따름입니다.”
“쓸모없는 그림이나 조각 따위를 모으는 이유는?”
“취-미.”
“이곳에 온 이유는?”
“아까도 말했다시피, 어디까지나-”
“대화를 하러 왔다는 개소리를 씨부리기만 해봐. 대가리에 숨구멍을 하나 더 뚫어줄 테니. 제대로 대답할 생각도 없으면서 대화? 농담이나 지껄이는 그 뇌가 절반쯤 날아가도 어디 헛소리를 하는지 볼까?”
총구가 그의 가면에 닿고, 체온으로 미지근해진 방아쇠가 손끝을 간질였다.
쏜다. 한마디만 더 헛소리가 튀어나오면 쏴버리겠다. 알아낼 것이 있으니 죽이진 않는다. 이 각도에서라면 왼쪽 치아와 볼이 날아가 얼굴이 걸레 짝이 되는 수준에서 그치겠지.
잠깐의 침묵. 그리고,
짝. 짝. 짝. 짝.
기침 소리같은 웃음과 떨림. 감탄을 담은 박수. 허리를 숙여가며 크게 박수를 치는 바람에 에젤의 단검에 목이 스쳐 피가 흘렀지만, 그의 감탄은 멈추지 않았다. 가면에 가려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모든 행동이 그가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브라보. 브라-보. 역시 당신을 보러 오길 잘했군요. 이렇게 까지나 살아있다니. 참으로 가치 있습니다. 콜렉터의 판단은 이번에도 옳았군요. 언제나처럼. 처음 봤을 때의 당신을 생각하던 나로서는 당신에게 그렇게 큰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 않았거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지껄이는군. 혹시 대화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나? 여기서 차근차근 알려줄 테니, 다시 처음부터 하나씩 얘기해볼까?”
“쿠훅, 쿨훅! 아아, 바로 이런 모습을 말하는 것이지요. 개화가 시작됐음에도 이렇게 생동적인 자아를 유지하고 있다니.”
콜렉터. 즐거움. 자아. 개화.
뜻 모를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춤추고 있었다.
“….당신에겐 빚이 있기도 하고, 언젠가…. 함께하게 될 것 같으니 몇 가지 일러 드리는 것은 괜찮겠지요. 어떻게, 지금처럼 친구분들과 불편한 자세로 서서 들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따듯한 차 한잔하며 그토록 원하는 ‘대화’를 시작하시겠습니까.”
….꿀꺽.
망설이는 사이, W와 가장 가까이 있던 에젤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피가 밴 하얀 양복을 정돈하고 넥타이를 고쳐매는 그의 모습에서 묘한 위압감을 느꼈겠지. 나처럼.
순식간에 일행과 눈빛을 나눴다. 방아쇠를 쓰다듬으며 총구를 심장과 무릎관절을 번갈아 조준하는 이안. 슬쩍 칼을 뒤로 물리는 에젤.
‘1 대 1이로군.’
이안은 공격을, 에젤은 대화를 선택한 상황. 밖에서 벡스가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표결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니 내 선택에 달렸다는 뜻이었다.
고민은 길었고 대답은 짧았다.
“….에젤.”
움찔!
“차 남은 거 있으면 가져와.”
대화를 선택하겠다는 신호.
철컥!
이안의 불만스러운 신음과 함께 총구가 올라가고, 살았다는 표정의 에젤이 번개같은 속도로 주방을 향해 달려갔다.
“혹시 다즐링 있습니까?”
“가짜 버섯차 밖에 없다.”
황무지 사람들이 자주 마시는 곰팡이 우려낸 물을 얘기하자 그의 몸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하하하. 당신의 입담에는 가치를 매겨도 될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는군요.”
“가치? 얼마나?”
“돈이라는 피상적인 가치에 관한 얘기가 아닙니다. 음, 그렇지.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되겠네요.”
달칵.
타이밍 좋게 에젤이 차 두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내가 기대하던 것과는 달리 둘 다 멀쩡한 손님용 홍차.
그 온기가 마음에 드는지 장갑을 낀 그의 손이 찻잔 주변을 맴돌다 책상 위로 돌아왔다
“저희들이 온갖 예술품. 음악. 구세대의 진귀한 물건을 수집하는 이유. 그건 단순히 취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제 아무리 귀한 합금을, 금덩이를 산처럼 쌓아둔다 해도 그것에 별 가치를 느끼지 않습니다. 저희가 수집하는 가치는, 조금 다른 것이지요.”
마치 이 얘기를 꺼내는 것이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다분히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여는 W.
정체불명의 남자. W는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벼운 말투로 황무지의 가장 비밀스러운 집단 중 하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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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응자. 아, 우리들 사이에서 3형 변종을 이르는 말입니다. 어느 쪽이 편하신지. 3형 변종? 적응자?”
“아무거나 상관없으니까 계속하기나 해.”
“그럼 적응자인 것으로. 아무튼, 적응자가 발생하는 경우는 대단히 희귀합니다. 항간에는 ‘죽음을 초월할 만큼 강한 의지가 그들의 두 번째 생을 이끌어냈다.’ 뭐, 이런 종류의 만화 같은 이야기가 떠돌던데, 그랬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적응자를 볼 수 있었을 겁니다. 나는 죽음 앞에서 생의 의지를 불태우는 황무지 사람들을 셀 수 없이 많이 봐 왔으니까요. 그들 중 일부는 희미한 가능성을 보이기도 했지만,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평범한 2형 변종으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지요. 가슴 아픈 일입니다.”
잠시 말을 멈추며, 다시 한번 찻잔 쪽으로 손을 가져다 대는 W. 이번에도 그는 찻잔을 들어 올리는 대신, 부드럽게 그 표면을 쓸어 보일 뿐이었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참으로 열정적으로 연구했습니다. 3형 변종이란 무엇인가. 왜 어떤 이는 거대한 괴물이 되고, 어떤 이는 사람과 흡사한 형태로 남는가. 우리는 괴물인가, 인간인가?”
마지막 물음에서 그의 목소리는 한층 강해졌다.
“지금 대화하고 있는 당신의 의견을 묻고 싶군요. 나는 적응자, 당신들이 말하는 3형 변종입니다. 대전쟁 도중에 죽었으며, 다시 태어나 6년을 살았고, 희미하지만 과거 나의 ‘원형’에 대한 기억도 가지고 있으며, 나름의 사상과 의지, 목적을 가지고 당신의 앞에 앉아있습니다. 나는 인간입니까? 아니면 바이러스의 변덕에서 태어난 괴물입니까?”
“….”
“좋은 대답입니다. 그 침묵을 잘 기억해두시길.”
대답이 없었던 나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조용히 침묵에 동참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야기가 샜군요. 다시 가치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오지요. 우리는 예술가 연합을 만들고 보호하는 데 성공한 갓 태어난 동지들을 통해 적응자가 발생할 당시 징검다리를 건너듯 기억을 건너간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서 60세 생일 잔치로. 다섯 살 때 처음 먹은 레몬의 신맛에서 45세 교통사고로. 다시 12살의 첫사랑에서, 학사모를 쓴 20살의 기억으로. 그 어떤 규칙이나 형태도 없이 그저 무작위로 화르륵 떠오르는 기억을 건너가는 것이지요. 바로, 자신의 삶에 있어 가장 부서지고 결락된 순간으로 말입니다. 매드 메이니가 대학교 신입 환영 파티에서 자신을 강간한 이들에 대한 기억으로 돌아간 것처럼, 변종 바이러스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결락을 향해 전력질주를 하는 겁니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다른 한 손의 손가락을 뻗어 나를 가리키는 W. 서로 비밀을 공유하듯 조용히 손짓으로 나를 가리키는 행동에 어째서인지 어머니와 아버지가 떠올랐으며, 굉장히 불쾌해졌다.
“넌…. 뭐였지? 그 모습을 보면 마피아라도 되는 건가?”
“제가 말입니까? 마피아요? 하, 하하하! 아아, 가치 있어라. 매우 잘못 짚으셨군요. 제 원형은 실패자이며, 아웃사이더에 히피였습니다. 역마살…. 이라고 하나요? 쉽게 한 자리에 머물지 못했지요. 어렵사리 직업을 구해도 돌연 떠나고. 결혼해서 정착 하나 했더니 또 떠나버리고. 부유한 사업가 집안인 그의 본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자살한 어머니를 차갑게 외면해버린 그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함께했지요. 그렇게 날개를 뜯어버린 파리처럼 평생 집 주변을 떠돌던 그는 폭격으로 사망했습니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도착한 기억은 열여덟 살. 다섯 살 때부터 ‘늘 멋들어진 흰 양복을 입고 있는 아버지처럼, 멋진 사업가가 되겠다!’ 라는 꿈을 가지고 있던 소년이 아버지의 멋들어진 흰색 양복을 훔쳐 입은 그날 밤이었습니다. 남편의 잦은 외도에 무너져가던 아내는 술과 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어둠과 약물로 흐릿해진 눈에는 그 새하얀 양복을 입은 남자가 꼭 남편처럼 보였지요. 그의 애정을 갈구하던 아내는 흰 양복의 사내에게 매달렸고, 당황한 아들이 그녀를 밀쳐내자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그녀는….”
타앙-
하얀 장갑으로 목 아래쪽을 겨눈 W는 입으로 총소리를 흉내 내며, 그 비극적인 결말의 설명을 대신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다시 태어난 겁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는 방랑자. 스스로를 증오하면서도 가슴 한켠에는 어렸을 적 꿈꾸던, 아버지와 같은 하얀옷을 입은 사업가를 꿈꾸던 남자.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남자. 그런 키워드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게 바로 납니다.”
담담하게 남의 이야기처럼 얘기하는 W. 어쩌면 정말 남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가 태어났을 때 저 기억은 희미하게 머릿속에 남은, 자신과 다른 남자의 이야기였으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람의 기억이 머릿속에 있고, 자신의 삶이 그 기억에 의해 결정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종종 커뮤니티에서 ‘저런 변종이면 나도 되고 싶다.’ 같은 글을 보고 비슷한 생각을 한 적도 있었는데, 이제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습니까.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누군가, 죽음을 무릅쓰고 달성해야될 목표 같은 것 하나 없지만 나는 적응자로 거듭나는 데 성공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대상의 기억 속 강한 결락, 그리고 거기까지 기억이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게 하는 기억의 ‘참고점’ 들인 것이지요. 트라우마가 있는 이는 많지만, 대부분 거기까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다 의식을 놓아버리더군요. 뭐, 잊고 싶은 기억이니까요. 정말 잊을 수 없거나, 잊어선 안 되거나, 극복한 이들만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얘기겠지요.”
“….네 과거도, 예술가 연합의 목표도 대충 알겠군. 3형 변종…. 그러니까 적응자를 늘리고 싶은 것인가?”
“정확히는 늘리고, 보호하고 싶은 겁니다.”
“그럼, 그 활동과 너희가 수집하는 예술품이 무슨 상관이 있지?”
사각사각-
W는, 대답 대신 내 앞에 있던 메모지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가더니 빠른 속도로 뭔가를 스캐치하고, 글을 써 내려갔다.
다빈치의 모나리자.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최후의 만찬.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그 다음에는 휘파람이었다. 엘리제를 위하여. 타이타닉 타이틀 곡. 그 외 마이클 잭슨이나, 제목은 정확히 모르지만 한 번쯤 귓가에 흘려들었을 명곡들.
“자,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교수는 방금 떠오른 기억들을 돌이켜보았다. 초등학교 미술 시간, 눈썹이 없는 여자의 그림을 봤을 때. 중학생 때 배탈이 나서 화장실에 앉아, 생각하는 사람도 사실 변기에 앉은 게 아닐까 생각했던 것. 타이타닉을 보며 울었던 기억. 문워크를 따라 해보겠다고 설치던 기억.
“….기억이란 참 재미있지요. 얼핏 보면 단면처럼 보이지만, 사실 매우 입체적입니다. 하나의 기억에 다른 기억이 얽혀있고, 그 기억에 또 다른 기억이 얽혀있습니다. 우리는 전지한 신이 아니니 죽어가는 사람의 일생에 어떤 기억이 얽혀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누구나 보고, 듣고, 감상과 행복한 기분을 느꼈을 예술품들은 공통적으로 기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충분히 참고점이 될만한 기억의 일부분이지요. 예술이란 본디 그런 것이 아닙니까?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추상적인 매체로 표현한 것. 죽어가는 누군가의 추억을 자극하기에 이만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 가치라는 것은,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을 가리키는군.”
“이해가 빠르시군요. 당신은 습관처럼 쉼 없이 농담하곤 합니다. 상당히 재미있고, 특유의 말투는 충분히 기억에 남을만합니다. 당신이 유명한 사람이 되어 그 말투가 널리 퍼진다면 ‘professor’라는 인물의 목소리를 녹음한 것만으로도 많은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당신의 말투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습니다.”
말을 마친 W는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품에서 회중시계를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철컥!
스릉!
“이런. 이야기가 너무 즐거워서 하마터면 원래 목표에 깜빡 늦을 뻔했군요.”
새하얀 옷을 단정하게 다듬고, 넥타이를 고쳐매고, 찻잔을 한번 쓸어넘긴 뒤 내게 손을 내미는 W.
“오늘은 즐거웠습니다. 정말 가치 있는 시간이었군요.”
잠시 망설였지만, 어쨌든 그는 많은 정보를 주었으며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지도 않았으니.
왼손을 먼저 내민 그를 따라 변종화가 진행된 왼팔을 내밀어 악수를 나눴다.
“아, 이걸 말한다는 것을 잊었군요. 변종 바이러스가 한번 개화를 시작했으니, 계속 당신의 기억을 거슬러 자리 잡기 위해 움직일 것입니다. 만약 위험한 시기가 찾아왔다, 싶으면 제가 드린 명함의 아이디로 연락하시길. 허무하게 2형 변종으로 생을 마감하기엔 당신은 가치있는 사람입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소름 돋는 얘기를 툭 던지는 W.
“내가…. 변종화되는 중이라고? 난 달라. 내 왼팔은, 너희들과 다른 방식으로….”
“자세한 사항은, 안에 계신 그분에게 물어보시길.”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두드려 보인 그는, 호텔의 베란다로 향하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차가운 밤바람에 그의 하얀 양복이 펄럭였다.
“원래 계획에 방해될 수도 있는 여러분을 오늘 죽여 없애려 했지만…. 빚은 갚아야 하니. 앞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면 참아 드리도록 하지요. 도진을…. 그리 잘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의지를 존중해 그곳에 머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조금만 더 오래 그의 고통이 지속했다면…. 음, 떠나는 마당에 악담을 할 필요는 없겠지요. 밤 날씨가 춥습니다. 문 꼭 닫고, 이불 잘 뒤집어쓰고. 다소 소란스러울 수 있으니 귀마개도 하고, 버블실드까지 하면 더욱 좋고.”
“도진…. 김도진? 올드 픽쳐?”
까딱-
대답 대신 모자를 잡고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그는, 뒷걸음질쳐 난간 너머로 망설임 하나 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서둘러 베란다에 나가 보았지만, 예상했던 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W.
“….야, 에젤.”
“어, 이안. 말해.”
“혹시 종교 있으면 십자가든, 묵주든 아무거나 하나만 빌려줘라.”
“….내꺼 하나 있으니까 같이 자자. 무서워서 혼자 못 자겠다.”
그것이, 오늘 밤 있었던 예술가 연합의 방문에 대한 일행의 소견이었다.
나와 이안. 에젤, 그리고 근처에 잠입해있던 저격수를 찾아 협박해서 총구로 하얀 남자를 겨누게 하던 벡스는 귀신을 봤다며 헐레벌떡 뛰어왔고, 그날 우리는 침대 위에 모여 각자 신뢰하는 무기를 꼭 품은 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도시의 외곽에서 밤새 기괴한 음악 소리가 들렸다. 수천 개의 악단이 각기 다른 음악을 동시에 연주하듯 아름다운 음악을 잔뜩 뒤섞어 폐물처럼 만든 그 소리에는 어딘가 사람의 헐떡임 같은 기묘한 감각이 있어 신경을 곤두서게 하였다.
다음 날 아침, 38구역 돔. 특히 감찰부는 난리가 났다. 그들의 주 수입원인 농장지구. 돔의 도시급 실드 너머, 4인용 쉘터 한 동에 10명씩 가득 들어차 있던 그들의 천민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었다. 감시탑을 지키던 병사들도, 농노들도. 그들을 관리하던 감찰부의 요원까지. 모두가 사라진 그곳에는 각양각색의 긁힌 자국과 통일되지 않은 흔적만 가득할 뿐이었다.
사각사각-
[집행부 해피 블라인드 예술가 연합]메모지에 몇 글자를 더 적어 넣은 교수는, 그것을 와락 구겨서 던져버렸다.
“마법사도 이런 건 못해, 미친 자식아….”
참으로 맑고, 조용하고, 기분 더러운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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