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70
Chapter. 10 납과 은화(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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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컥. 떨그렁!
“아오, 뜨거워. 손 다 뎄네. 에젤, 어디 다친데 없냐? 급조한거라 완전히 다 막지는 못한 것 같았는데….”
“읍, 읍읍?”
“당연히 숨 쉬어도 되니까 열었지. 긴장 풀지마. 혹시나 증기 폭풍의 범위 바깥쪽에 있어서 전투력을 유지한 인원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푸하아!”
처음에는 이게 뭐하는 짓인가, 했던 에젤은 플라즈마 수류탄 특유의 소리와 함께 수십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은 순간 그대로 납작 엎드려 입을 틀어막았다.
….꿀꺽.
입을 열자 아직까지도 뜨거운 공기가 훅 하고 속으로 들어왔다. 지금도 여전히 천장에 스프링클러가 물을 뿌려대고 있는데 공기가 식지 않았다니. 한 순간에 대기가 어느 정도로 데워졌는지 어렴풋이 예측해본 에젤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이거, 그거 맞지? 교본에 나오는 그거?”
“음. 네가 본거랑 내가 봤던 게 같은 교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맞을거다. 플라즈마 무기 사용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
감찰 고시를 준비하던 시절에도 봤고, 합격해서 감찰부에 들어간 다음에도 교육받았던 내용이다.
‘우천 시, 혹은 주변에 물이 있는 환경에서 플라즈마 계열 고온장비를 사용할 때는 절대로! 기존 위험 범위의 10배 이상 안전거리를 잡고 운용해라.’
그런 교육 내용과 함께 보여준 실제 사고 사례.
엑소슈트의 과열된 레이저 캐논을 식히겠다고 물을 뿌렸다가 증기에 화상을 입은 요원.
플라즈마 커터를 휘두르다 정수기를 베는 바람에 뿜어져나온 증기로 눈이 멀어버린 요원.
플라즈마 수류탄을 물 웅덩이에 던졌다가 뿜어져나온 증기에 피부가 흐물흐물하게 녹아버린 요원.
그런게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걸 활용해서 적을 상대한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다.
“설마…. 이걸 위해서 화재 경보를….?”
“아니? 그땐 터렛 저대로 두면 작살나겠다, 하는 생각밖에 없었지. 저거 괴물이야 괴물. 7.62mm탄을 분당 8000발 가까이 갈긴다고. 저게 스윽- 한번 훑고 지나가면 구멍이 뚫리는 게 아니라 사람이 잘려요. 그런게 눈을 시퍼렇게 뜨고있는 곳에서 뭔 작전을 하냐.”
“그럼, 지금 이건-”
“임기응변이지. 좆됐다. 뭘 가지고있지? 어떤 상황이지? 어떤 환경이지? 이거 세 개만 잘 생각하면 의외로 금방 떠올라.”
마치 어디 놀러나온 사람처럼 평온한 어조로 잡담을 하며, 날카로운 눈으로 벽에 귀를 대는 교수. 에젤은 그의 행동이 쓰러진 적들 중 살아남은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방심한 척 하는 것임을 알아챘다.
물 밟는 소리로 위치를 특정할 수 없게 발을 끌며, 열풍을 막는데 썼던 철판을 들어올리는 교수.
따각, 따각따각.
[나, 확보, 너, 사격]순식간에 핀 신호로 역할을 나눈 교수는 에젤이 총을 들어올리는 것을 확인하자 재빨리 뚫린 격벽으로 몸을 내밀었다.
따당! 따다다당!
“15미터 시체 아래! 연사로 긁어!”
철판에 탄환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몸을 굴려 교수의 뒤쪽으로 이동한 에젤은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리는 적들을 향해 전자기 소총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투타타타타타타타!
파바바박, 퍼벅, 파바박!
콩이 튀는 것 같이 소음이 적은 전자기 소총의 격발음 사이로, 바들바들 떨며 신음을 흘리거나 가족의 이름을 부르던 사람들이 하나 둘 침묵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한눈에 총을 겨누고 있던 적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에젤은 방아쇠를 잡은 손가락을 놓을 수 없었다.
피부가 녹아내리고, 폐가 익어 받은 숨을 내뱉는 사람들. 그저 저들을 죽여줘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야야, 그만, 그만!”
투타타타타- 철컥! 철컥 철컥!
“확인사살, 확인사살을 한 것 뿐이야! 교본대로, 배운대로! 적을 상대하는 거니까! 혹시나 방금 전처럼, 일어나서 우릴 쏠 수도 있는거잖아!”
“너….”
결국 소총의 탄을 모두 비워낸 뒤, 지친 듯 벽에 등을 기댄 에젤.
뭔가 말하고 싶지만 잘 표현이 안되는 듯, 입을 뻐끔거리던 그는 결국 말 대신 눈물로 스스로의 감정을 대변했다.
“….교수.”
“그래.”
“이 사람들은…. 우리의 적 이었을까?”
빈 총을 떨어트린 에젤은 긁힌 상처가 잔뜩 남아있는 두 팔을 내려보았다.
보조 통제실에서, 그가 목을 졸랐을 때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감찰부 요원이 남긴 흔적. 그의 손끝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그 약동하던 생명력이 서서히 꺼져가는 것을 느낄 때, 에젤은 그만 그의 이름표를 보고 말았다.
[감찰부 – 래리 포쉬]그도, 자신도 똑같은 감찰부의 요원이었다. 그에게도 나름의 정의가 있었으리라. 어쩌면 악착같이 벌어들이는 것이야 말로 실질적으로 38구역 돔을 구원하는 것이라, 그러니 누군가는 해야하는 일을 하겠다는 생각이었을 수도 있었다.
“우리가 정말….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유로. 겨우 통신 한번 쓰겠다고 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게 옳은 일 일까?”
“….”
에젤은 거의 무너지기 직전처럼 보였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은 38구역에 온 뒤로 평소보다 이상해 보일 때가 많았지. 시종일관 달고 다니던 그 삐뚜름한 웃음도 자취를 감추고, 말이 없어졌다가 이상하게 말이 많아졌다가 하기도 하고. 녀석도 사람을 죽여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저, 그 살인의 감각이 자신을 괴롭힐때마다 ‘정의를 위한 것이다’ 라는 명분으로 스스로를 달랬는데, 이곳에 와서 각자 다른 이념을 가지고 움직이는 38구역 3부를 보며 그 정의의 근간이 흔들려 버린 것이다.
기초가 약한 녀석은 아니니 여기서 못하겠다고 퍼지진 않겠지. 그저 혼란스러운 마음에 ‘괜찮다’ 한마디가 듣고 싶어서 저러는 것일 뿐.
“….옳은 일 일리가 있나. 사람을 삶아서 쏴 죽였는데.”
하지만 교수는 그가 원하는 대답 대신, 그가 돔이라는 집단의 어깨위에 올려두었던 짐을 모조리 짊어지게 하기로 했다.
“사람 죽이는데 정의가 어딨냐. 정의롭게 죽이면 뭐, 저 위에 계신분이 그건 카운트로 안 쳐주신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있어. 사람을 죽였으면 그건 살인자야. 옳고 그르고를 따질게 아니라, 그냥 죽인 거라고.”
내 말을 듣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되어버린 에젤.
그야말로 배부른 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과거의 도시에 살고, 과거의 가치를 지향하며 자신의 행동에 당위성을 따져볼 정도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
황무지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런 고민따위 진작에 털어버린지 오래다. 왜냐? 이미 누군가를 죽이고 그 부산물을 한아름 품에 들었을 때 환호하는 자신을 봐버렸거든. 그거 못 견딘 사람들은 진작에 다 죽었고.
“그, 그럼 저 사람들은 왜…. 죽은 거야?”
“날 쐈잖아. 저놈들이.”
나도 선하게 살기위해 나름 노력을 하는 사람이지만 이건 확실했다. 선과 악을 떠나서 나를 죽이려드는 놈은 죽일 놈이지.
“아이고. 이래서 돔 출신 애들이랑 같이 일하면 피곤하다고 하는 거구나.”
괜히 데려왔어~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며 녀석의 옆에 기대어 섰다. 어쩌겠어, 파티원의 멘탈을 관리하는 것도 리더가 할 일중 하나이니.
녀석의 옆에 서서 팔을 툭툭 건드린 다음, 손가락으로 시체가 널브러져있는 통로를 가리켰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통로에 고인 물과 섞여 주변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때. 지옥같지?”
“….”
끄덕
“이건 누구의 손을 빌린것도, 누가 떠민 것도 아냐. 내가 저들을 불태웠고, 네가 마무리했어. 이건 받아들여야 해. 우린 지금, 구시대였다면 아홉시 뉴스는 물론 해외 토픽으로 대서특필 될 만한 엽기 살인마 및 총기 난사범이 된 거야. 단! 네가 잊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 있지.”
“잊은…. 거라면?”
“내가 처음 이곳에 들어와서, 저들 앞에서 한 행동은 ‘미친 놈 처럼 통로를 질주한 것’ 뿐이라는 거지. 그런 나에 대해서 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지?”
교수의 물음에 겨우 십 몇 분 전에 있었던 일이 아주 오래된 기억처럼 떠올랐다. 환풍구를 부수고 내려와 무작정 뛰라고 하던 교수. 얼떨결에 그 뒤를 따라 달려간 나. 그리고….
‘침입자다! 죽여!’
‘사정 봐주지 마라! 둘 중 하나만 살아있으면 돼!’
이곳 감찰부 사람들은, 단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맨손 격투를 배운 만큼 충분히 제압하거나 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그런 그들이 나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47구역 감찰부 건물에 괴한이 두명 뛰어든다면, 그리고 그들이 총장실로 달려가기 시작한다면?
에젤 그 자신도 일단 총부터 뽑아 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때. 생각처럼 어렵지 않지?”
“….그렇네. 그냥…. 쐈으니까 죽인거구나.”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사회적 약속에 의한 거니까. 옛날에는 무단 침입자가 있으면 붙잡아 경찰에 넘기는게 그 시대의 방식이었지. 요즘은, 감히 나의 생활권을 침입해 내 목숨을 위협한 그놈의 목을 잘라 대문 위에 장식하는게 그 약속인 것이고. 커뮤니티에서 누가 그러더라. [적어도 우리 세대 중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모두 도착했다. 남은 사람은 지옥행 대기표를 받아 줄을 서있는 것 뿐.] 살아남기 위해 사람 한명 안 죽여본 놈이 없으니, 우리 세대에서 천국행 티켓은 이미 마감이라는 소리지.”
“굉장히…. 의미있는 표현이네. 누가 그랬는데?”
“너도 잘 아는 사람. ‘takealook’.”
푸웁!
순간, 시종일관 멍한 표정이던 에젤의 입에서 놀란 숨이 터져나왔다.
“‘takealook’? 떼껄룩? 내가 아는 그놈?”
“그래, 그 인간. 노상 생각 없이 사는 한량 같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들 너랑 비슷한 고민을 한번쯤은 해봤다는 소리지.”
“….젠장. 그놈한테 뒤쳐졌다니. ….뭔가 엄청 애 취급 당한 느낌인데.”
한번 말문이 트이고 나니 점점 원래 상태로 돌아오는 에젤. 아마 이 지옥 같은 광경 속에서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뭔가 깨달은 것이 있는 모양이지.
교수는 에젤의 표정이 점점 나아지는 것을 보며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과거의 정의를 가슴에 품고, 살인의 죄책감에 시달리는 그의 고민을 ‘그냥 세상이 그래서 그런 것이다.’ 라는 싸구려 합리화로 일축해버렸으니까. 어쩌면 이 시대에 몇 없는, 진짜 순수하고 선한 마음을 가진 청년을 타락시켜 버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어쩌겠어. 그 수준이면 이 시대에는 진짜 천사나 다름없는데, 천사는 금방 천국으로 가버린다고.’
스스로 해결하든, 남의 손으로 해결하든. 끝내 순수를 지키려던 사람은 모두 떠나버렸고, 나는 몇 명 없는 친구를 그렇게 허망하게 보낼 생각이 없으니.
“그렇다고 너무 막 죽여대지도 마. 너처럼 죄책감에 못이겨 하던 놈 중에 그 중압감을 이겨내려고 살인마가 된 녀석도 있었으니까. 그…. 어떻게 설명은 못하겠는데. 이성적으로 정말 하면 안되겠다, 싶은 순간에는 고민 정도는 하라고.”
“알았으니까 그만 해라. 누가 보면 우리 엄만 줄 알겠네.”
“흐흐흐. 엄마는 아니지만 형은 맞잖아? 내가 스물 넷이니까. 형 해봐. 교수 형~”
“아익, 씨발! 개소리 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 밑에 애들한테 뭔 일이 있을 줄 알고 여유나 부리고 있는 거야!”
“흐음. 이 형님의 오랜 경험으로 판단했을 때, 거의 다 우리 쪽으로 끌고와 죽여버린 덕분에 아래쪽에 남은 두 친구들은 낮잠을 자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어느정도 납득했는지, 몸을 일으키더니 군복에 붙어있던 명찰을 뜯어 던져버리고는 핏물을 첨벙이며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에젤. 그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의 선한 마음에 황무지 생존자의 끔찍한 자기합리화가 잘 정착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그…. 미안한데, 그쪽에는 넘칠 정도로 있을테니까 딱 한명만 빌립시다. 댁이 그냥 손놓고 있을 생각이라면 우리끼리라도 세상을 재건해야 하는데, 우리도 저런 녀석이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속으로 조촐한 기도를 마친 교수는 에젤과 마찬가지로 시체 사이를 성큼성큼 건너뛰어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짜식. 오늘 보니까 귀엽네. 형~ 해보라니까?”
“씨발 쏴버린다! 죄책감 하나 없이 죽여버린다!”
낄낄거리며 놀려대는 교수와, 그 말에 발작하며 거부감을 표현하는 에젤.
“….형.”
“응? 뭐라고? 허허, 참. 에젤 레이든 씨보다 365일이나 더 살아서 그런가. 가는 귀가 먹어서 잘 안들리는데?”
“@#*(#(*@^!!!”
고마워 형, 이라….
적진 한가운데에서 느끼기엔 좀 뭐한 감상이지만, 교수는 뿌듯함과 함께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어려울 게 뭐 있나. 이렇게 해서 ‘잘했다.’ 하는 느낌이 드는 일을 하고, 해서 ‘이럼 안되는데.’ 하는 일은 안하면 되는 거지. 내 양심은 아직 제법 날이 서 있는 모양이니까.
어쩌다 보니 신병 상담 비슷한걸 하게 됐지만, 덩달아 기분이 가벼워진 교수였다.
[….이게,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거였구나.]그리고 그 광경을 안에서 조용히 관찰하던 하이드는, 이 순간의 기억을 잘 포장해 캄캄한 그의 공간 한 켠에 조심스럽게 걸어두며 히죽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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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도 달성했고, 에젤의 박살난 멘탈도 ‘황무지 라이프’ 라는 이름의 덕테이프로 쫙쫙 감아 수습해 줬으니 다시 움직일 시간이다.
“어어이. 늦었네? 어떻게, 갔던 일은 잘 해결 되셨나? 많이 시끄럽던데.”
아래층에 내려와보니 그와 에젤이 위에 해놓은 것과 비슷한 수준의 시체를 쌓아놓은 이안과 벡스가 나무 식탁 아래에서 쏟아지는 방화수를 피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목이 베이고 터져나간 사채들을 물끄러미 보는 에젤.
“왜. 아직도 좀 걸리냐?”
“….약간? 내가 의미없는 고민을 했나, 싶기도 하고.”
“음? 어이 교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아, 별건 아니고. 우리 에젤이 위에서 사람을 좀 쏴죽였는데, 너무 슬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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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은 생전 처음 듣는다는 듯한 벡스와,
어떻게 표현하지 못할 기괴망측한 표정이 된 이안.
식탁 밑에 찌그러져있던 둘은 이상한 얼굴을 하곤 에젤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푸웁!”
“푸하하하하하하하! 어헉, 아학! 쿨럭!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이고 세상에! 야, 에젤. 진짜냐? 이 시대 최고의 살육병기를 타는게 주 업무인 감찰부 에젤 레이든씨, 그게 정말이냐고!”
솥뚜껑 만한 손바닥으로 에젤의 어깨를 신명나게 두드려가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아주 타워가 떠나가라 웃어대는 통에 부끄러워진 에젤이 뭐라뭐라했지만, 이안은 들은 척도 안하고 큭큭거리며 교수와 에젤을 번갈아보았다.
“아아, 세상에. 그렇지. 팀 내에서 누군가는 체리 보이 포지션을 담당해야지. 이제 교수는 훌륭한 짝이 생겼으니, 앞으로는 네놈을 체리- 라고 불러주마. 호모젤 보다는 체리젤 쪽이 더 났잖아? 승진 축하한다! 체리- 푸흡- 젤!”
도저히 못참겠는지 윗입술을 씰룩거리다 다시한번 웃음을 터트리는 이안과, 그의 팔을 두드려가며 웃어대는 벡스.
“적어도 저 위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는 못하겠군. 그래, 교수. 호모-젤을 체리-젤로 진화시킨 것 말고. 다른 성과는 뭐 있나?”
“많이 있지. 꽤나.”
교수는 총장과의 짧은 대화를 떠올리며 말했다. 지원군. 그건 사태의 심각성에 따른 당연한 결과고.
항상 그렇듯, 영 총장과 대화를 할때는 대화보다 그 뒤에 숨은 의미가 진짜 내용이었다.
‘일이 완전히 꼬였다. 애초에 라디오 타워에서, 온갖 전투의 소음과 함께 연락했을 때부터 상자의 운송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은 눈치챘을거야. 그런데 그때는 가만히 있더니, 상자가 완성되어 해피 블라인드의 손에 넘어갔다고 했을 때 일이 꼬였다고 했다. 뭐가 그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갔을까? 상자가 완성된 것? 아니면 해피 블라인드의 손에 넘어간 것?’
수상한 점 하나 더. 연락이 닿자마자 그가 가장 먼저 한 질문.
[지금 어디인가?]짧은 대화중 두번이나 물었다. 애초에 광역 재밍이 꺼지지 않은 상태에서 38구역에서 47구역까지 신호가 닿는 곳은 라디오 타워 밖에 없는게 확실한데, 굳이 그걸 두번 이나 물어보다니.
‘….라디오 타워 말고 총장과 연락이 가능한 수단이 있다는 뜻인데. 또 누구한테 끈을 댄거지?’
굴러라, 굴러라 대가리야. 거의 다 찾은 것 같은데. 뭐지? 어디서 하나 빠졌을까?
총장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 굳이 따지자면, 오르페우스 프로젝트가 담긴 상자가 광신도에게 넘어가는 것은 아무 이득이 없으니 상자가 완성되는 쪽이 총장의 계획이었다고 가정하자고. 도대체 어떻게 그게 완성될지 47구역에 앉아서 꿰고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알았다고 가정하고! 그걸 기다렸다고 치자.
해피 블라인드는 일단 총장의 따까리 용의 선상에서 제외한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구 인류 문명의 멸망이니, 돔과는 정확히 대척점에 위치하니까.
그럼 최종적으로 상자를 손에 넣었던 집단. 행정부가 꺼낸 미완성 상자를, 감찰부가 탈취하고, 그 감찰부가 있던 동부를 와장창 박살낸….
‘집행부?’
이 친구들이 원래 현지에서 BDSM에 협력하기로 된 놈들이었다면? 그런데 내가 미리 정해진 협력자의 연락수단이 아니라 혼자 쌩쇼를 해서 라디오타워에서 연락을 한 것을 확인했다면?
[….빌어먹을. 완전히 꼬였군.]‘여기다. 여기서부터 총장의 큰 그림이 박살난 거야. 원래대로라면 어떤 과정을 통해 완성된 상자는 집행부의 손에 들어가고, 그 완성품을 우리가 받아서 47구역으로 돌아오는게 이 인간의 계획이었는데 그 뿌리부터 무너진 데다 예술가 연합이 끼어들면서 개판 5분전이 되어버린거라고!’
상황을 듣고, 두말 하지 않고 남은 병력을 모조리 보낸다고 한 총장.
기존 계획이 어그러졌으니, 무력으로라도 상자를 탈취하고자 함이다.
“….우선 빨리 38구역을 떠나자. 농장 쪽에 나가있던 감찰부 본대가 돌아오면 지금처럼 쉽게는 안될테니까.”
“어디로 가는데?”
“36. 47구역에서 온 병력과 합류해서 해피 블라인드를 쳐야지.”
“….잔 수작을 부리던 시간도 끝이라는 소리군. 마음에 들어.”
히죽 웃으며 담배를 꺼내던 이안은 완전히 젖어버린 담배를 내던지며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던 38구역 사태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뜻에 질질 끌려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총장의 계획은 완전히 무너졌다. 하지만 여전히 사건이 진행중이라면. 누가 그 무너진 차량의 운전대를 잡았단 말인가.
그리고 그토록 정의에 집착하던 집행부는 현 시점으로서는 가장 그 정의에 가까운 47구역 총장의 손을 놓고 갑작스럽게 홀로 움직였단 말인가.
‘….상자를 만나게 되면 알겠지.’
아무런 근거없는 추측이었지만, 교수는 왠지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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