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74
Chapter. 10 납과 은화(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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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까지 이어진 마라톤 회의. 전장에서, 또 황무지에서 잔뼈가 굵은 지휘관들이 몇 시간에 걸친 회의 끝에 내놓은 결과물은 그리 신통치 않았다.
‘적진과 비교하면 아군 주둔지가 수비적인 면에서 우위에 있으니, 견제성 공격으로 상대의 전투력을 확인하고 판단한다.’
‘상기한 [오르페우스]가 가동될 경우, 차량의 기동력을 바탕으로 전면 후퇴한 뒤 재집결하여 상황을 지켜본다.’
주도적으로 병력을 끌고 와 공격하러 온 사람들치고는 수비적인 면이 강한, 어떻게 보면 ‘일단 붙어보고 판단하겠다.’ 식의 도피성 결론. 하지만 나는 이런 면이 그들의 유능함을 더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황무지에서 47구역 돔 군인들만큼 3형 변종을 오래 상대하며 그 특이함과 파괴력을 체감한 이들도 없으니까.
무능해서 모르겠다고 한 게 아니라, 진짜 상대해보기 전에는 적을 상대할 방법을 모르니 대응 판단 같은 수비적인 입장을 고수한 것이다.
스륵- 스륵- 스륵-
[주둔지 외부에 남겨진 2.5형] [작전? 통제 제한? 거주민을 의식한 행위?] [계곡 안의 분지. 천혜의 요새. 저격 지점 ? 어디든 가능] [오르페우스. 파괴한다? 파괴하지 않는다? 누구의 손에 들어가면 어떤 후폭풍이?]끔찍하게 복잡한 머리 상태를 증명하듯 지금도 끊임없이 떠오르는 의문점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서 결론을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이드.’
[왜? 나 바쁜 거 안 보여?]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이렇게 아무 말이라도 듣고 싶을 때 항상 대기 중인 녀석이 있다는 것.
‘안에 들어앉아서 손가락만 까닥거리는 놈이 바쁘기는.’
[허이고! 단 몇 분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나 있어 줬으면 몰라. 옥수수밭을 통째로 전자레인지 안에 넣은 것처럼 머릿속에서 아주 난리를 쳐대는 통에 말라 죽겠어 이 인간아. 그래, 내 의견이 듣고 싶다고?]‘의견이라기보단. 싸구려 위안이지. 그냥 아무것도 아니다, 전방 1km를 면으로 갈아버리는 괴물 기관총이 거치된 무장차량이 저렇게나 많은데 뭐가 걱정이냐, 다 조빱이니 끝나고 보상 타낼 생각이나 해라. 뭐 이런 거.’
[내가 그런 말해주면 잘도 위안이 되겠네. 친구들은 뒀다가 뭐하게. 가서 우쭈쭈 해달라 그래.]‘회의 끝나고 찾아갔는데 에젤 유서 쓰는 거 봐주고 있더라고. 여기선 비장미가 부족하네, 고시도 패스한 놈이 필력이 아주 개판이네 하면서 자기들끼리 잘 놀고 있길래 분위기 망치기 싫어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어떻게 보면 내가 이 난리통에 끌어들였는데 약한 소리를 하기도 좀 그렇고. 리더 이름 달고 있으면 흔들리지 않는 모습 정도는 보여줘야지.’
[참…. 너도 사서 고생이다 정말.]아무도 없는 고요한 공간. 녀석과 만나고 가장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녀석이 기거하는 이곳이었다. 방해도 없고, 정말 나랑 하이드만 남아 두런두런 얘기할 수 있는 곳. 처음에는 그렇게나 두렵게 느껴졌던 끝없는 어둠도 이젠 막 샤워하고 나와 불 끄고 침대에 누웠을 때의 그런 어둠처럼 포근했다.
나랑 얘기하면서도 소파에 누워 기다란 장대를 휘적거리던 하이드.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녀석은 그대로 자기 옆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뭐. 그렇게나 원하신다면 내 의견을 들려주지. 앉아봐.]‘한 살밖에 안 된 자식이 건방지긴….’
풀썩!
어찌 된 일인지 하이드는 만들어낸 소파임에도 몸을 기대자 먼지가 날리는 소파. 자세히 보니 우리 쉘터에 있는 내 낡은 소파와 똑같이 생긴 물건이었다.
우리 집은 저 황무지 건너 47구역에 있건만. 익숙한 먼지 냄새나는 소파에 기대있노라니 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이드의 의견은 매우 심플했다.
[자라.]‘뭐?’
[좀 자라고. 24시간 전전긍긍, 잘 때도 반쯤 선잠이 들어서는 꿈속에서도 시뮬레이션 돌리고 있고. 사람의 뇌도 엄연한 장기 기관이야. 정신력과는 별개로 피로가 누적된단 말이다. 네놈 머리통에 ‘위로해줘, 잉잉잉-’ 거리는 세상 징그러운 제 3 인격이 들어앉은 것도 다 잠이 부족해서 그런 거니까 끔찍한 소리 하지 말고 자.]‘이 녀석.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농담을 할 거면 좀 재미있는 거로 하던가.’
[농담 아냐 임마. 너 새벽 감성이라고 알아? 오전 4시 정도 되면 갑자기 지나간 10대의 감성이 마구 솟아나며 ‘….자니?’ 같은 문자를 보내게 되는 거. 그게 다~ 자야 할 시간에 잠을 안 자니까 바이오리듬 개박살 나고 호르몬 불균형이 일어나서 그런 거 아냐. 내가 보니까 너도 지금 딱 그런 상태다 이 녀석아. 그러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자. 오르페우스도 올드픽처처럼 정신 쪽에 작용하는 그런 거 같은데, 이런 위태로운 정신 상태로 상대한다는 게 말이냐고. 멍청한 껍데기.]‘호르몬이니 뭐니 하는 건 또 어디서 본 거야. 내 기억에는 없는데.’
[‘갱년기-잎이 마르거든 압화로 남겠다’ 14살 때 네 아버지가 읽으면서 훌쩍거리던 책에서 봤어. 네가 그걸 보고 엄청 재미있는 책인 줄 알고 몰래 가져다 읽었었지. 한 30페이지가량 읽다가 던져버렸지만.]피식.
넉살스러운 녀석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처음 만났을 때랑 비교해서 많이 달라졌군. 어둠 속에 이빨만 둥둥 떠 있던 덩어리가 어느새 나랑 비슷한 키에, 비슷한 체형에. 이젠 표정도 생겼군. 말투도 달라졌고. 사고방식도 애 하나 키우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나랑 비슷해졌고.
문득 편안하다는 생각과 함께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이드의 궁시렁거리는 소리와 규칙적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공간. 익숙한 소파. 앞으로 벌어질 일들과는 하등 상관없는 재미있는 잡담들.
‘….그럼 5분만 잘까.’
소파에 드러누우며 걸리적거리는 하이드를 발로 꾹꾹 누르자, 녀석이 뭐라뭐라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피식. 또 한 번의 실없는 웃음. 그러고 보니 우리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지. 외동아들이라 외로울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에 담긴 미안함이 떠오르자 자꾸 실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 뭐든지 알아서 잘하는 아들이잖습니까. 저 필요한 건 다 제 손으로 구할 줄 아는.’
[으엑. 형제 같은 소리하고 있네. 책임을 회피하실 생각입니까 아버지?]‘지랄 옆차기를 하고 있네. 언제 한번 아들처럼 굴어본 적 있으면 또 몰라.’
[너 임마 머릿속에 24시간 한 살짜리 신생아가 울어 재꼈으면 진즉에 네 손으로 대가리에 빵꾸내고 디-엔드였어 임마. 혼자서도 잘 크는 아들래미한테 감사한 줄 알아야지.]눈이 감긴다. 어째서인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아서, 파도처럼 몰려오는 수마(睡魔)에 편안히 몸을 맡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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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뒤, 본격적으로 코를 골기 시작하는 교수를 보며 하이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우, 쓰벌. 못 버티고 터지는 줄 알았네.]완전히 곯아떨어진 교수.
하이드는 그런 교수를 바라보며, 애용하는 장대를 들어 어두운 공간 한쪽을 잡아당겼다.
툭, 투두둑. 쩌적- 화아악!
와르르르르르!
[후퇴 이후 재편성] [렙터는 무엇을 위해] [3형 변종과 기억의 관계] [W는 충동적이었다] [현 보급품으로 전투 지속 가능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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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았던 둑이 터지는 것처럼 하이드가 막아두었던 교수의 생각들이 와르르 쏟아져나왔다. 머릿속에 잘 생각이라곤 1도 없어 보이는 바람에 어거지로 생각을 틀어막았는데, 다행히 잘 먹혀서 녀석이 그제서야 자기 피로를 마주할 수 있었다.
[뭐, 내가 좀 반골이라 껍데기랑 잘 지내고 있긴 하지만. 원래대로라면 생각을 차단하고 정신을 압박하는 게 부 인격인 나의 본업이었을 테니까.]완전히 잠든 교수. 어느새 자신에게 넘어온 몸의 주도권.
하이드는 저도 모르게 의식의 표면으로 튀어나가려고 하는 스스로를 억제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했다.
[아직은 아니지.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고. 이렇게 나가는 건….으윽! 재미가…. 없지. 아직…. 조금 더 지켜보고 싶단 말이야.]그래서 하이드는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가려 하는 의식을 왼팔에 집중했다.
[많이는 못 바꾸겠지만. 따지고 보면 내 이상에 따른 형태잖아? 나는 안에 있던 몸도 꽤나 마음에 들었다고. 힘세고, 유연하고. 적어도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는 돼야지.]나름 자신은 있었다. 속에서 연구도 제법 했고. 애초에 의식 속 이상적인 형태를 따르는 거라면 의식만 존재하는 내 생각에 따르지 않을 리가 없잖아?
천천히. 조심스럽게. 좀 변태같이 기억에 집착하는 것만 빼면 이것도 뮤트 인자랑 움직임이 비슷하니까, 이렇게 톡, 하는 느낌으로 건드리면….
우직! 꾸드득, 꽈직꽈직!
[히이이익!]하이드는 저도 모르게 잠든 교수를 돌아보았다. 지금 자기 팔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잠이 든 모습.
[괘, 괜찮아. 수정하면 돼, 수정하면! 다, 다시! 여, 연구 많이 했잖아. 그때 봤던 인격이 빚어지던 장면처럼, 그 빛을 떠올리면서…. 사알-짝?]콰드드득! 우적! 쩌저적! 펄떡! 펄떡!
[으아아아! 미, 미안해! 아빠 미안해에에에!!!]하이드는 개인 막사의 의자에 널브러진 교수와 커다란 덩굴식물처럼 온 바닥에 흐물거리는 그의 왼팔을 보며, 필사적으로 의식을 집중했다.
[이, 이대로 두면 전쟁이다. 어떻게든 수리를…. 최소한 원상 복구라도….!]처음에는 큰 전투를 앞두고 있으니 작은 도움이라도 좀 주려는 마음이었건만. 이대로 두면 일상생활을 위해 왼팔을 절단해야 할 상황이었기에 하이드는 전력을 다해 팔에 매달렸다.
교수가 잠든 두 시간 동안, 그의 개인 막사에는 그야말로 코스믹 호러에서 볼법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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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 끄으으으으으— 잘 잤다. 어으으으~ 개운해.”
부드러운 아침 햇살을 받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머리도 맑고, 기분도 상쾌하고. 컨디션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아졌다. 이건 인정해야겠군. 하이드가 옳았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명료한 답이 아니라 잠이었어.
‘전쟁터에서 휴식도 전투의 일종이라고 그렇게 목이 터져라 외쳤는데, 정작 그걸 내가 잊어버리고 있었다니. 하이드에게 감사해야겠군. 여어, 고맙다, 하이드. 아주 적절한 어드바이스였어.’
[허억, 허억! 어, 음. 그, 그래. 좋았다니 다행이네.]‘응?’
녀석에게 인사하며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는데, 뭔가…. 이상했다. 몸도 없는 녀석이 헐떡거리며 비지땀을 흘리고 있지를 않나, 막사 내부가 엉망이 되어있지를 않나.
어느 정도 급하게 정리한 티가 나긴 나는데, 온통 흙먼지가 묻어있는 모포에 잔뜩 기스가 난 목재 의자, 테이블에 여기저기 푹 패인 땅바닥까지.
‘….나왔었냐?’
[어, 으, 으응! 잠깐, 아주 잠깐 몸만 풀고 왔어! 막사 밖으로는 나가지도 않았고!]하이드의 대답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게 어딜 봐서 잠깐 나온 거야. 여기서 프로레슬링을 벌였다고 해도 믿겠는데.
‘그렇게 몰래 나오지 말고 나 잘 때 정도는 너도 바람 좀 쐬고 그래. 네가 나한테 해준 게 있는데 내가 그 정도도 못 해주겠냐. 잠깐 몸을 움직이는 정도 가지고 변종인자가 그렇게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그러진 않을 거 아냐.’
따지고 보면 죽을 목숨을 저 녀석이 구해준 건데, 그동안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나 싶기도 하고.
푹 쉬었으니 다시 머리를 굴리러 가볼까, 하다가 이 난장판부터 좀 정리해야겠다 싶어서 제일 더러운 모포 쪽으로 손을 뻗었다.
까딱, 까딱,
“….응?”
이상하다. 왼팔 길이에는 한참 전에 익숙해졌는데. 왜 모포가 안 잡히지? 너무 편하게 자는 바람에 감각도 옛날처럼 돌아갔나?
이건 곤란했다. 이제 왼팔도 중요한 전투수단의 하나인데 여기서 밸런스가 무너지다니. 황급히 왼손을 휘둘러봤는데, 감각이 이상했다.
서늘하고, 익숙한 감각.
“어…. 이거?”
분명 두터운 동계 군복을 입고 잠들었건만, 휘두르는 팔에 서늘한 겨울 공기가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깻죽지부터 다 터져나가 시원하게 밖으로 드러난…. 살색에 검은색 세로줄이 드문드문 섞인 평균 사이즈의 왼팔. 평범과 거리가 좀 있긴 했지만, 분명 내 팔이다. 내 원래 팔! 총도 못 잡는 괴물 팔이 아니라 울 엄마가 만들어준 내 팔!
“어어, 어어어어! 야, 야! 하이드! 이거, 이거!!!”
[미, 미안해! 그래도 전투에는 분명히 도움이 될 테니까…. 그걸로 봐줘! 난 잔다!]“미안….해?”
보나 마나 내가 자고 있는 동안 뭔가를 한 모양. 비록 완전히 인간의 팔로 돌아오진 않았지만 이 정도가 어딘가. 잔뜩 칭찬해주려고 했는데….
“도망을…. 갔어?”
이 익숙한 감각. 익숙한 불안감.
자세히 살펴보니 살 색이 많은 팔에 비해, 어깨로 올라갈수록 검은 부분이 더 많아지고 있었다.
지이익- 펄럭!
“어…. 좀 많이 늘었네?”
급하게 벗어 던진 군복. 그리고 그 안에서 드러난 것은 검은 광택과 살 색이 뒤섞인 내 몸이었다.
앞으로는 왼쪽 가슴을 전부 뒤덮고 명치 부근까지, 뒤로는 날개뼈 근처까지 영역을 확장한 검은 갑피로 둘러싸인 부분.
나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가슴을 두들겨보자 딱딱, 하는 소리가 났다. 겉 부분만 변한 게 아니라 가슴근육 전체가 이 이상한 물질로 변한 것이다.
손가락을 움직여보기도 하고, 어깨를 돌리고 주먹을 휘둘러보기도 하고. 움직이는 데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3형 변종의 몸으로 변한 부분이 늘어서 그런지 더 기민해진 느낌이었다. 대충 휘두른 주먹에서 채찍처럼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나는 큰 전투를 앞두고 있기도 했고, 조금이라도 전투력을 보강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팔을 원래 폼과 그 갈퀴 달린 폼을 오갈 수 있게 바꾸려고 했는데, 갑자기 몸쪽에 갑피가 우수수 일어나더니….]“아이고, 됐다 임마. 변명은 무슨. 하지 마 하지 마.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일이니까.”
그저,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잊고 있었을 뿐이지. 이미 의사한테 다 들었던 얘기다.
[식사량의 변화도 그렇지요. 상식적으로 수십 인분의 식사를 해도 배가 부른 감각조차 없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왼팔 말고도, 몸의 이곳 저곳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뜻이겠지요.]47구역에서 행정부 연구원이 해준 말.
그의 말처럼 소화 문제도 그랬지만, 이곳에 와서 적극적으로 왼팔을 휘둘러보며 느꼈다. 이게 팔만 변해서는 도저히 이런 위력이 나올 수 없구나. 가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내 몸이 변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지금 가슴과 등에 드러난 부분은 그 변화한 부분이 하이드의 의지와 반응에 겉으로 드러난 것뿐이다.
[…..]“자책하지 마라. 네가 그때 왼팔을 바꿔서 레이저 블레이드를 막아내지 않았으면 이런 고민 할 기회도 없었어. 언젠간 마주해야 했을 사실이 조금 일찍 다가온 것뿐이지.”
W는 한번 시작된 개화가 멈출 리는 없다고 했다. 놈은 알아봤던 것이다. 내 상태를. 그리고 그 변화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는 하이드를.
[그럼…. 우리도 그놈처럼 변하는 걸까?]“적응자라…. 글쎄?”
죽음의 순간 트라우마를 향해 연어처럼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변이 바이러스. 허나 나는 아직 죽지도 않았고, 의식도 또렷했다.
“GG의 시스템이 말한 것처럼, 나는 [극복된 정신쇠약]의 보유자잖아?”
여전히 어머니, 라는 단어를 입안에 굴려보면 비릿한 혈향이 떠오르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벌어진 상처를 헤집는 감각이 아니라 새살이 돋아난 흉터를 쓸어내릴 때 느껴지는 선득한 감각일 뿐. 변종 바이러스가 찾아 헤매는 기억 속 깊은 계곡은 제법 단단히 아물어 붙은 지 오래다.
어쩌면 지금의 내 예외적인 상태도 그것 때문이 아닐까? 죽지 않은 몸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한 바이러스가, 뿌리박을 결락을 찾지 못해 끝없이 헤매는 와중에…. 하이드라는 갓 태어난 순수한 의식에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이라면? 만약 그렇다면 이 변화의 끝에는….
“….어찌 됐건, 그 ‘적응자’라는 유별나게 좆같은 기억에서 태어난 괴물보다는 좀 괜찮은 모습이겠지.”
“그래주면 고맙고. 뭐, 당장에 에일리언마냥 배를 까뒤집고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너무 서두르진 마. 서두르다 지금처럼 사람 놀래키지 말자고.”
차분한 손놀림으로 흙투성이 모포를 털어서 정리하고, 벗어 던진 군복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오전 일곱 시. 취사반 막사에서 더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애들 데리고 밥 먹으러 가자. 당장 오늘 살아남을지도 모르는데 뒷일을 생각하긴 이르잖아?”
[…..]충격이 컸는지 어르고 달래도 말이 없는 하이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읽히지는 않았지만 대충 엄청나게 고민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느껴졌다.
‘….진짜 괜찮은데.’
준비했던 일이 다가오는 것일 뿐. 지금은 그 문제보다 바뀐 왼팔에 더 관심이 많았다. 뭔진 몰라도 확 쎄진 느낌이 들긴 하잖아. 당장 목숨 걸고 특수 변종 떼거지랑 붙어야 하는데 이건 호재지. 제대로 확인해볼 겸 손가락을 쭉 펴는 느낌으로 힘을 주자-
콰드드드득! 우득!
검은 선 부분이 갈라지며 금세 예의 커다란 상태로 되돌아왔다. 전보다 더 크고 묵직해진 것 같은데, 연결된 부위가 대부분 변해서 그런가 다루는 감각은 오히려 더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탱, 탱그렁—
콰장창!
떨그렁! 철퍽!
“아.”
맞다. 여기 주둔지였지.
아무 생각 없이 변화한 팔을 휘둘러보는 순간, 옆에서 단체로 식판을 떨어트린 병사 다섯이 표현하기 힘든 얼굴로 내 얼굴과 팔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나마 정신이 있는 녀석은 앞주머니에 손을 가져다 대는 게 당장이라도 비상 신호를 울리려는 모양이고. 내가 봐도 좀 많이 징그럽긴 했지.
“어…. 음…. 장비 상태 점검 중이었네. 식사는 다시 가서 받도록.”
“예, 옙!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 어…. 고생하십쇼!”
도망치듯 우르르 몰려나가는 병사들을 보며, 다시 왼팔을 원래대로 집어넣었다.
콰작, 콰자작! 슈르륵!
“….되게 편리하네. 밥 먹고 총 받아와야겠다.”
불안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나중의 일은 나중에.
일단은, 당장 살아남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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