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76
Chapter. 10 납과 은화(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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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의 승패를 구분하는 가장 쉬운 기준을 찾자면, 나는 단연코 질서를 1순위로 놓을 것이다.
전투의 양상이 치열해지고, 한쪽의 우위가 드러나기 시작하면 패색이 드리운 군대에는 혼란이 찾아오기 마련.
대충 슥 훑어봤을 때 한쪽이 질서정연하고, 다른 쪽이 그렇지 못하다면 질서가 있는 쪽이 이기고 있는 것이라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의 전장은 승리와 패배가 공존하는 기이한 현장이었다.
콰아아아앙!
“플라즈마 차지 7초!”
“제압반, 방전합니다!”
파지지직!
“끄아아어어어!”
“끄르르륵, 가아아악!”
전자기 그물과 플라즈마 사출기. 그리고 무력화된 적들을 향한 조준사격.
한쪽에서는 훈련된 병사들이 기계처럼 맞물리며 변종을 문자 그대로 갈아버리고 있었고,
콰르르륵, 콰드득! 우득!
“접근하지마! 어보미네이션 형이다!”
“제기랄, 버블 말고 일반 실드 쓰는 놈 누구야! 놈이 빨아들인 사체를 외피로 사용하고 있으니 방어력 높은 실드는 사용하지 말라고 몇 번을 얘기했는데!”
“으아아악! 꺼내줘, 꺼내줘어어어어! 매니, 매니 병장님! 아아아악!”
“서머스 이자식, 발밑 조심하라고…. 내가 얘기했잖아, 이 멍청아아아!!!!”
타앙!
또 다른 쪽에서는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투입된 예술가 연합의 3형 변종들이 날뛰며 혼란을 자아내고 있었다.
몇 달 전 45구역 지하에서 봤던 어보미네이션과 유사하지만, 실시간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켜 산채로 외피에 박아버리는 변종.
제압용 구속복에 방독면을 쓰고 있는, 근처에 다가가기만 해도 폐소공포증을 호소하며 방독면을 벗어던지게 하는 변종.
그리고,
타아앙—
“윽크억!”
“저격수다! 대가리 숙여! 숙이라고!”
“저희가 아닙니다! 사출기 메인 전선이 당했습니다! 놈들이…. 장비를 노리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어김없이 날아드는 저격까지.
교수는 스스로의 오판을 인정했다. 돔의 주둔지급 방어력이면 적의 공세를 막아내는 정도는 무난할 줄 알았는데, 적 측의 돌파력이 예상을 한참 웃돌았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해. 이대로라면 두들겨 맞기만 하다가 끝날 거야.’
당장 주둔지의 방어벽을 넘는 변종 셋을 쏘아 넘기면서도 그의 눈은 끝없이 전장을 살피고 있었다.
‘명령권자의 부재. 지휘관들이 습격당했다?’
‘파고든 3형은 셋. 어보미네이션, 구속복, 그리고 지휘관 막사를 습격한 것으로 보이는 놈.’
‘아군의 혼란을 수습하는 게 승리 조건이다. 어떻게든 3형이 없는 전선처럼 메뉴얼대로 돌아가게 하기만 하면 군대로서의 진가가 드러나며 전투력이 몇 배는 상승할 테니까.’
‘적의 엘리트를 잡아야 해. 누가 됐든 최대한 빨리!’
무엇을 가장 우선시해야 할지는 명확했다.
‘가벼운 타격에도 벗겨지는 버블 실드를 강제하는 어보미네이션. 강제로 방독면을 벗겨 화학 방호력을 떨어트리는 구속복. 이건 저 연기에 노출시키겠다는 뜻이지. 지휘관 막사를 습격한 것은 명령체계를 마비시키겠다는 뜻이고. 저격수로 아군의 움직임을 경색시켰어. 모든 전략이 아군에게 최대한의 혼란을 주는 데 집중되어있다. 저쪽도 아는 거야. 진짜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돔의 군대가 얼마나 강력한지!’
전위에서 날뛰는 놈들이 아군을 연기에 노출시키고, 광증에 휩싸인 병사가 진형을 무너뜨리고, 그렇게 혼란이 가중된 사이 저격수가 주요 병과, 혹은 장비를 무력화시킨다.
철저하게 혼란의 악순환에 집중된 전략. 이 자리에서 적을 상대하는 것은 상대의 뜻에 놀아날 뿐이니, 우리 쪽에서도 적의 약한 부분으로 치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갈 수 없다. 적의 원거리 팀이 무너지면 아군의 혼란을 수습하고, 상황에 맞는 명령을 내릴 지휘 유닛이 필요하니까.
벡스도 불가. 지금도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뚫린 방어선을 틀어막는 녀석이 빠지면 어느 한 쪽이 단단히 무너지게 될 것이다. 뭔 수를 썼는지 녀석은 나보다 한발 빠르게 구멍이 난 전장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덕분에 박살 날뻔한 방어선 여럿이 아슬아슬하게 버텨나가고 있었다.
“이안. 에젤. 할 수 있겠어?”
“크흐흐흐. 언제는 할 수 있어서 했나. 해야 하니까 했지.”
스킨 마스크 안쪽에 담배를 물고 있는지, 흥! 하고 녀석이 콧김을 내뿜는 소리와 함께 마스크에서 수십 갈래의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온갖 마개조를 통해 전차용 장갑에 돌파력을 최대한으로 높인 BDSM 무장트럭과 그 안에 실린 에젤의 엑소슈트.
군 단위 화력이 묶여있는 지금, 이 둘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에이스 카드다.
“….플라즈마 차지, 완료됐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번에 발사하면 은폐장을 다시 가동하기도 전에 저격이 날아들어 무력화될 겁니다. 앞으로 고화력 장비가 세 대 이상 당하면 더는 전선을….”
“트럭이 나갈 길을 열어야 하니 최대 출력으로.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사.”
“….소위입니다. 카운트 후에 발사하겠습니다. 후면 열풍에 주의하시길.”
그는 하사 계급장이 붙은 군복을 여미며 장비 운용병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소식이 없는 지휘관급 간부들을 대신해 어떻게든 전선을 수습하고 있는 부사관, 위관들 중 하나.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은폐장이 플라즈마 사출기의 기류에 휘말려 꺼지는 순간 저격수의 가장 중요한 타겟이 된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저렇게 낮은 계급의 군복을 껴입고 있는 것이다. 살고 싶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 자신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필사적으로 몸을 숨기고 명령을 이어나가는 것이겠지.
그런 상황에서 나는 은폐장을 잃는 것을 감수하고 장비의 사용을 명령했고, 그는 받아들였다.
이미 자신의 목숨을 저울에 올려놓고, 그가 노출돼 저격당하는 것보다 한 번의 플라즈마 사출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것에 대해 별말이 오가지는 않았다. 그저 잠시 눈을 맞추고, 각자의 할 일로 돌아갈 뿐.
그릉, 그르릉! 털털털털털털-
“카운트 10. 9. 8. 7-”
“빨리 끝내고 돌아와라. 이쪽은 이미 피해가 복구하기 힘든 수준을 넘어섰어. 적의 뒷라인을 처리한다고 해도 변종을 밀어내기가 쉽지 않을 거야.”
“죽다 만 병신들에 적이랑 얼굴도 마주할 줄 모르는 찐따들 쯤이야 순식간이지. 금방 돌아오마.”
“….며칠 전부터 그 찐따들한테 죽어라 두들겨 맞기만 했다만.”
“크흐흐흐! 그러니까 더 좋은 것 아니겠어? 그동안 맞았으니, 이번엔 패줘야지. 쫄아서 튀지 마라. 에젤.”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전투의 긴장을 풀어내는 둘.
“6. 5. 4-”
“….크응. 야, 뭐 하나만 물어보자, 박교수.”
“왜. 가기 싫어? 물러 달라고 해도 늦었는데.”
“그거 말고. 그, 음….알고…. 보내주는 거냐?”
답지않게 뭔가 말하려다 얼버무리는 녀석.
내게 말하는 와중에도 이안의 눈은 저 멀리, 적이 있는 언덕을 향해 있었다. 평소의 미친놈 같은 눈빛이 아니라 뭔가 생각이 많아 보이는 눈. 적과 나 사이에 죽음이 아닌 다른 것을 얹어놓은 눈빛.
전쟁터에서는 그걸 ‘죽을 상’이라고 부른다.
“헛소리하지 말고 전쟁은 전쟁으로만 대해. 감상에 빠진 놈치고 멀쩡하게 살아 돌아오는 놈 못 봤으니까.”
“….그래, 감상은 갔다 와서 즐기는 것으로 하지.”
“나, 나도 한마디만! 나 죽으면 내 전 재산은 47구역 대화방에 뿌리는 것으로 해놨으니까….”
저 푼수 같은 놈이 또 지랄이네.
“….기왕이면 에젤도 살려서 돌아오고.”
“크흐흐흐. 글쎄? 감상적인 놈이 죽는 비율로 치면 저놈은 벌써 시체라서.”
“하, 하나만 더! 떼껄룩이랑 노루한테, 세상에서 제일 좆같은 병신들이지만 그래도 사랑스러운 병신들이었다고-”
“3. 2. 1. 플라즈마, 사출.”
지직- 지지직, 위이이이잉-!
푸화아아아아악!!!
끼기이이익-! 그아아앙!
“우와악! 망할! 출발한다고 말이라도 좀!”
“자꾸 나불대면 혀 깨문다! 체-리! 짐칸에 뭐라도 붙잡고 있으라고!”
“아, 아직! 노면이 다 녹았잖아! 자, 잔열 식고 출발하는 게-”
“이거 금속 타이어야! 날 추운데 따땃하니 좋지 뭐!”
입자 가속을 통해 끊임없이 가열된 플라즈마가 전장을 휩쓸고, 한순간에 공터가 된 전장으로 자동 터렛과 톱날로 무장한 트럭이 노면을 긁으며 달려나갔다.
마음 같아선 녀석들이 이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것까지 관찰하고 싶었지만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나도, 여기 남아서 할 일이 있어서 남았으니까.
“지휘 막사 쪽으로 간 병사들은. 복귀했습니까? 방송과 함께 차량 운용병의 대부분이 그리로 향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직, 한 명도 복귀하지 않았습니다.”
교수는 그 말에 뒤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총성 하나 들리지 않는, 조용하기 짝이 없는 주둔지의 중심부. 전투가 있다면 소음이 있을 것이요. 전투가 없다면 그들이 무사히 복귀했을 테니.
“…..알겠습니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그쪽도.”
트럭이 만들어낸 틈을 벌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병사들. 그들을 향하는 소위를 향해 짧은 경례를 마친 나는 전선의 반대 방향, 주둔지 안쪽을 향해 달렸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섬찟한 느낌. 변종화된 팔과 상체 부근이 짜르르, 하게 울리고 있었다. 마치 나를 부르듯.
감이나 추론 따위가 아니라 명확한 감각이었다.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인간의 감각기관 밖에 있는 또 다른 감각.
기분이 아닌, 물리적으로 무언가 변했다.
‘팔. 가슴과 등. 다음은…. 머리인가. 바이러스 자식. 내심 아래로 내려가 주길 바랬다만.’
일행과 발맞춰 뛰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지금 주둔지를 가로지르는 속도도 평소의 내 전력 질주 속도를 한참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변화. 필요해 마지않았던, 그러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너무나도 빠른 변화 속도.
‘쓰읍. 어째 점점 탈 인간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네가 속으로 그걸 받아들였으니까. 네게 몸의 주도권이 넘어오는 것부터, 변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것까지. 이것들은 표면적으로는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지만, 결국 근본적인 변화는 네 내면의 변화에 따라 진행되고 있어. 목숨을 구함 받은 데 대한 마음의 빚이 내게 대가를 지급하듯 몸의 주도권을 넘겼던 것처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우리에게 가장 우선시 되는 목표는 ‘생존’이었잖아? 삶의 근원. 살아남는 것. 어떡하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하이드의 걱정 섞인 불평. 익숙한 감각으로 다리에 힘을 준 나는, 달리던 속도 그대로 막사 두 개를 뛰어넘었다. 세상에, 안쪽보다 더 낫군. 이 다리는 힘 준다고 박살 나고 그러진 않으니까. 겉으로는 변한 것이 없지만 속은 제법 많이 바뀐 모양이다. 이거, 생각보다 남은 시간이 더 짧을 수도 있겠어. 1년까지는 기대 못하겠는데?
‘사람은 원래 변한다잖아. 올해는 일이 좀 많았는데, 나도 좀 변했나 보지 뭐.’
귓가에 희뿌연 바람 스치는 소리와 전장의 소음이 가득했다. 불과 연기. 토막 나고 찌그러진 전투 차량들. 이거 어마 무시하게 한판 하셨군.
촤아악!
막사 앞에 내려서자 예의 그 울림이 한층 더 강해졌다. 반쯤 무너진 막사 안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놈은 네가 여기 있는 걸 알아.]‘그 소란을 피우며 왔으니까.’
[혼자 상대할 만한 녀석이 아니야. 근방의 전투 흔적이 안 보여? 모두 같은 놈의 손에 당했어.]‘그러게. 뭐하러 이쪽으로 떨어진 거지? 다른 놈들이랑 같이 전선 밀었으면 벌써 다 털렸겠구만.’
[놈이 움직이지 않는 것의 의미를 모르겠어? 우리가 찾아오길 기다리는 거라고.]‘알아 임마. 협박이지. 움직이지 않으면 간신히 버티고 있는 전선의 뒤를 치겠다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주둔지의 지휘관이 머무는 곳은 가장 안전하고, 막강한 방어력을 자랑한다.
웬만한 전차 실드 못지않은 출력을 자랑하는 지휘 막사용 실드.
현 47구역 지원군의 주력 전투 장비인 전투 차량 집결지의 중심에 자리 잡은 위치.
24시간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감시하는 베테랑 병사들까지.
그런 주둔지 중심의 지휘관 막사가 단 한 개체의 손에 침묵 당했다는 것.
놈이 어느 정도 수준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
‘계속해서 경계하던 녀석이 안 보여서 불안했는데, 여기 계셨군.’
통짜 합금 프레임을 사용하는 전투 차량을 매끈하게 잘라내고도 여력이 남아 지면에 깊은 상흔을 새긴 발톱 자국.
41구역부터 방사능 지대 안으로 들어오며 확인한 수십 개의 구조 신호와, 그곳에 항상 남겨져 있던 깊고 날카로운 흔적.
피가 남지 않은 것은 전투가 없었기 때문이다. 남아있던 흔적은 오르페우스에 의해 변종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남긴 고통의 흔적과, 일격에 쉘터의 실드와 방어 장비를 무력화시킨 놈의 발톱 자국뿐.
“안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이거지….”
마치 대결을 신청하듯, 끊임없이 신경을 긁으며 자기 위치를 마구 노출하는 미지의 적.
주변을 둘러보니 토막 난 전투 차량 중 전면부가 멀쩡한 놈이 있었다.
완벽하게 준비된 기관총에, 쏴보기도 전에 살해당했는지 빈틈 하나 없이 깔끔하게 꽉 차있는 탄약함.
“멋들어진 1대1 대결을 기대하고 계신다면, 절대 그렇게 해주기 싫은걸?”
항상 그렇듯, 적을 엿먹이는 방향이야말로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니.
철-커억!
기관총의 총구를 지휘관 막사를 향하게 돌린 교수는, 그대로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투콰콰콰콰콱!
소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파괴적인 격발음. 실탄이 아니라 레이저가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엄청난 발사속도.
여기저기 찢어지고 그을린 막사가 그 폭력의 파도 앞에 갈기갈기 찢겨나가기 시작하고, 그 안에 남아있던 것들이 흔적도 없이 분쇄되기 시작했다.
“….초대에 늦은 것도 모자라 인사도 없이 먼저 시식에 나서다니. 젊어서 그런가. 아니면 예의가 부족한 건가.”
딱 한 명. 처음부터 인기척이 느껴지던 곳을 제외하고.
노인. 보다 정확히는 노병이었다. 찢어지고 토막 난 시체 언덕 위에 걸터앉은 노병.
오래된 군복. 깨지고 구멍 뚫린 방탄모. 반쯤 풀린 군화와 그을린 자국이 역력한 구시대 화기.
햇볕에 그을린 얼굴은 깊게 팬 주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팽팽하게 당겨진 느낌이 있었다.
뚝. 뚝.
노인의 손에는 사선으로 잘려나간 시체가 들려있었다. 내게도 익숙한 이곳 총지휘관의 시체. 투사체에 반응한 지휘관용 최고급 실드가 전개되어 있었고, 노인은 그것으로 어렵지 않게 기관총 세례를 막아낸 것으로 보였다.
“노망이 났다고 쳐도 악취미가 고약한데, 늙은이.”
“그러게 불렀을 때 진작 왔어야지. 자네를 기다리는 동안 너무 심심해서 그만 장난감을 전부 망가뜨리고 말았지 뭔가. 으음, 방랑자 그 친구 말대로 움직이기 싫어서 일부러 대충 하려고 했는데.”
출력이 다한 지휘관의 실드가 꺼지자, 쓰레기 버리듯 그를 뒤쪽으로 던져버리는 노인.
“나를 기다렸다라…. 이유는?”
“글쎄. 노인의 호기심이라고 할까? 내가 자네를 좀 봤거든. 우리 아가씨의 눈을 통해. 자네 방송도 좀 봤네. 아주…. 끓어오르더군. 보기 드물게 훌륭한 발톱을 가진 젊은이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자네의 영상을 돌려보았지.”
“이런 세상에! 시청자라니! 망할 스토커였잖아? 이런 식의 팬미팅은 안 받는데. 그쪽처럼 게임 속 캐릭터와 플레이어를 동일시하는 과몰입 쓰레기들은 특히나 더. 캐릭터는 캐릭터고, 나는 실존하는 인간 박교수야 이 미친놈아.”
“후하하하하!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을 아는가? 안되지, 안되고말고. 숨기려 한다고 해서 숨겨지는 것이 아니야. 나는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탄생한 괴물이 아닌가? 내 눈에는 보인다네. 늑대야, 우두머리 늑대야. 참을 수가 없구나. 네 모든 발톱을, 마지막 송곳니 하나까지 모두 뽑아 가지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구나!”
노병이 몸을 일으켰다. 한 손으로는 어깨에 비끄러맨 소총을 잡아 조준하고, 다른 손으로는 허벅지에서 뽑아낸 부러진 대검을 잡아 나이프 파이트 자세를 취하는 독특한 모습.
“애피타이저는 배가 터지도록 먹었으니. 슬슬 메인을 즐겨봐도 되겠지?”
“21세기에 일기토라니. 이 정도면 예스러운 것을 넘어 썩은 내가 나는 것 같은데.”
“명화는 세월이 지날수록 가치를 더해가는 법이라네. 그렇게 따지면 이 늙은이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준 자네도 고리타분한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안 받아줬으면 세상 깽판을 쳤을 거면서.”
순간 눈앞이 흐릿했다. 칼과 총을 빗겨 든 노인. 어째서인지 노인의 모습이 눈앞에 마주한 인간이 아니라 네발 달린 짐승의 모습으로 보였다. 깊은 산중에서 굶주린 대호를 만난 기분.
“아아. 그립구나. 오래된 기억이여. 흥분이여. 공포여. 네발로 산천을 뛰어다니던 기억도, 두 발로 인간의 병졸이 되어 살아가던 기억도 모두 나라는 존재를 이룩한 위대한 재료이니. 오래된 영혼 둘과 새로 태어난 영혼이 모두 제각기 다른 세상을 살았건만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법칙 하나만은 변함이 없구나.”
꽈드드득, 꾸득!
순식간에 팔을 가르고 자라나는 검은 갑피와 갈고리 같은 커다란 손가락.
스극. 서거억-
그 모습에 매우 흡족한 웃음과 함께 기이하게 부풀기 시작하는 노인의 몸.
혈향이 가득한 공기를 만끽하던 노인이, 더욱 자세를 낮추었다.
“노호(老虎) 부루. 그대의 발톱으로 삶을 견식 하고자 함이라.”
“말하는 호랑이라니. 동물원에 쳐넣으면….떼돈 벌겠군!”
콰직!
파박!
탐색이 끝난 교수가 먼저 달려듦과 동시에, 노인의 몸이 섬전처럼 앞으로 날아들었다.
팔 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변종과 다름없이 변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한바.
‘힘을 쓰는 감각은 알고 있어. 전력을…. 몸이 터지는 그 감각이 들 정도의, 전력을!’
쐐에에엑!
스가아악!
.
.
.
.
.
까-아아아아아앙!!!!!
위에서 내려치는 교수의 왼팔과 바람을 찢어발기는 노인의 공격과 맞붙었다.
투화악!
사람과 사람이 맞부딪히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금속음과 충격.
철컥- 타앙!
팔을 타고 흐르는 충격이 해소되기도 전에 가한 2차 사격을 노인은 전투화로 총구를 걷어차는 것으로 가볍게 막아내었다.
“이런…. 잠시 여운을 즐길 시간도 주지 않는 것인가? 아주 오래도록 맛보고 싶은 일격이었건만.”
“퉤! 댁이 죽어주면 묏자리에서 5분 정도는 내어주지.”
“후흐흐흐. 고얀….지고!”
교수가 입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내자, 노인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콰아악!
두 변종의 발톱이 다시 한 번 맞부딪혔다.
‘진다. 이 괴물, 버티는 것도 힘들겠어!’
교수의 눈에 명확하게 그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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