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77
Chapter. 10 납과 은화(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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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아악!
몸을 던지면, 섬뜩하리만치 샛노란 불빛 두 개가 순식간에 옆으로 따라붙는다.
변화한 놈의 모습은 그 말대로 범에 가까웠다. 정확히는 ‘호랑이였던 것’에 가깝겠지.
피부와 안면 근육이 썩어 문드러져 백골 사이로 털가죽의 흔적만 남은 두개골은 확실히 대형 고양잇과의 그것에 가까웠다. 텅 빈 동공에 노란 안광만 번뜩이는 기이한 모습. 낡고 찢어진 군복 사이로 보이는 몸의 털가죽도 다 삭은 시체처럼 푸석푸석하고 흐리멍덩했지만, 희한하게 그 안의 알맹이는 맹수 특유의 탄력적인 근육이 가득 차 있었다.
마치 겉이 다 썩어 문드러진 맹수와 같은 형태.
까득! 까가가각!
손과 손이 맞붙은 자리에서 불똥이 튀고, 옆구리를 향해 날아드는 칼날을 쳐내고 한숨을 돌리는 순간 어느새 눈앞에 총구가 자리해 있다.
‘빌어먹게…. 빨라!’
타아앙!
삐이이이-
골을 울리는 이명과 함께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 귀 끝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감사했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달아오른 머리에, 그것만큼 적의 공격을 피했다는 확실한 감각은 없으니까!
막아냈다는 것. 그것은 적의 가드가 열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근접 전투에는 흐름이 있다. 공격자도 방어자와 같은 충격을 감내해야 하며, 움직이는 자는 서 있는 자에 비해 균형을 회복하기 쉽지 않아 공격의 실패는 공수 교대로 이어지게 된다. 근접전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상식.
왼팔은 방어의 충격으로 굳어있지만 오른팔은 자유로웠다. 앞으로 쏠린 균형 덕분에 완전히 전방으로 노출된 적의 머리를 향해, 균형을 잃은 것 치고는 기이할 만큼 빠르게 다가오는 적의 머리를 향해….
“…?! 망할!”
촤아악!
따아아악!!
본능적으로 발끝에 제동을 걸고 뒤로 물러섬과 동시에 놈의 톱날같은 이빨이 다가가던 내 오른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빨 부딪히는 소리에 귀가 얼얼할 정도의 치악력.
“으아악! 이 새끼 물어! 상식이 안 통하잖아!”
“흐하하하! 그럼 범이 사람을 물지, 안 물겠느냐?”
“범은 무슨! 좀비 호랑이 같은 새끼가!”
어떻게든 시간을 벌기 위해 말을 걸었지만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놈에게 승기를 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각에서 날아드는 흉포한 발톱과 목을 노리는 저 엄니. 움직임 자체는 야수에 가까웠는데, 어느새 그 움직임을 피해 몸을 움직이다 보면 놈의 총구가 내 머리 앞에 있었다.
철저하게 계산된 야성을 휘두르는 완성에 가까운 전투 스타일.
도대체 무슨 기억을 기반으로 태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노호(老虎)라 칭하는 이 변종은 전투에 특화된 놈이 틀림없었다.
‘제기랄. 또 들어온다!’
놈이 도약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피해야 하지만 이미 급하게 뒤로 물러서며 몸의 균형이 한참 틀어진 상태.
‘피할 수가…. 없어!’
핑!
순간적으로 왼손이 허리춤에 있던 수류탄의 핀을 날리고, 중심을 잃고 쓰러져가는 내 등 쪽으로 굴렸다. 놈이 덮치는 순간 완벽하게 둘 다 폭발에 휘말리는 위치.
놈의 샛노란 동공이 핀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수류탄을 눈으로 좇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짐승의 귀에 타들어 가는 심지의 소리가 들렸다. 진심으로 터트릴 생각으로 자신의 몸쪽에 굴려 넣은 수류탄.
“동귀어진이라. 한심한 짓거리를!!”
부루는 한차례 으르렁거리며 몸을 틀었다. 완벽하게 앞으로 몸을 날린 상태에서 허리 힘으로 몸을 회전시키더니, 그대로 땅을 박차고 거리를 벌리는 유연한 움직임.
탁탁, 떼구르르….
하지만 기대했던 폭발음은 들리지 않았고, 놈이 뒤로 물러난 틈에 가까스로 거리를 벌린 나는 겨우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불발…. 같은 행운에 기댄 것은 아니군.”
달칵.
재미있다는 듯 노호는 떨어진 수류탄을 집어들었다.
수류탄의 안전 손잡이 윗부분, 뇌관과 격철 사이의 쇠가 찌그러져 터질 수 없게 되어버린 수류탄. 단순한 불량품이 아니라 아주 강한 힘에 눌린 것 같은 그 모습에 부루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맺혔다.
“속임수…. 그래. 자네가 가장 애용하는 발톱이었지. 날카롭고, 교묘해. 참으로 보기 좋구나. 훌륭해. 아주 훌륭해!”
“….거 사람을 넝마로 만들어놓고 칭찬은.”
“이 상황에도 그런 소리를 할 정도로 여유가 넘치니 당연히 칭찬할 수밖에.”
“여유 있는 거 아냐 임마. 원래 그런 사람인 거지.”
교수는 너스레를 떨며 오른손으로 꾹 누르고 있던 옆구리에서 손을 떼 보았다.
피시싯-
‘제기랄. 터졌네. 어떻게든 지혈할 시간을…. 뭔가 말을 더 시켜야 하는데….’
첫 일격. 놀랄 만큼 예리한 놈의 움직임에 대처하지 못하고 깊게 베인 옆구리.
갑피가 자라나 막힌 부분이 아니었다면 내장까지 잘려나갈 뻔했다. 급속 응고제를 터트려 겨우 막아놓기는 했는데, 아무리 돔에서 제공하는 좋은 약이라도 상처가 붙을 시간 정도는 필요한 법. 놈이 다시 몰아치기 시작하면 더 벌어질 것이다.
항거할 수 없는 적.
지금 당장 치료가 필요한 치명상을 입은 나.
문득, 지금까지 왜 이런 생각을 못했는지 한탄이 나올 정도로 현명한 생각이 떠올랐다.
‘튀자!’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 상황이 너무 이상했다. 저거 3형 변종이잖아. 걸어 다니는 황무지의 재앙. 자연재해랑 비슷한 취급을 받는 그거.
47구역에서도 올드 픽처 잡을 때 박격포 수십 발에 트럭 한 대분의 탄약과 폭발물, 거기에 놈의 맞춤 대응책까지 준비한 결과 놈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때 3형 변종이 얼마나 무식한 괴물인지 뼈저리게 느꼈는데, 무슨 워보이도 아니고 [그분이 날 부르고 있어!] 하면서 죽을 자리로 알아서 걸어 들어가다니. 머리에 뭔 문제가 있는 놈이 아니고서야….!
‘바이러스! 씨발 머리에 문제 있는 놈 맞았잖아! 어쩐지 몸에 활기가 돌면서 사람이 좀 맹해지더라니! 이거 호르몬 뽕 맞았을 때랑 완전히 똑같은 상태 아냐!’
전장에서 자주 보던 모습이다. 명령으로 사지에 들어가기 전, 후유증 때문에 특별한 작전이 아니면 사용이 금지된 도핑을 하고 광전사처럼 돌진하던 병사들. 오히려 죽을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용감하게 싸우던 그 모습과 놈을 찾아 홀로 주둔지를 뛰어다니던 내 모습이 매우 흡사했다.
‘….바이러스가 숙주인 내게 전투를 종용하고 있군. 하이드는 뭘 하고 있지? 야! 하이드! 머리 관리 좀 해봐! 이거 고장났어!’
[—으아- —-니 이게 무—-]‘….하이드?’
[–내 집에—- 개같—- 갸아악—!]음. 생각해보니까 하이드는 그 머리 안에 사는 주민이었지. 대충 봐도 난리가 난 것 같았다. 조용해졌을 때 진작 알아 봤어야 하는데.
덕분에 이 미친 살인 변종과 단신으로 맞붙게 됐으니 숙주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바이러스의 목표는 훌륭하게 달성되기 직전이었다. 음, 피가 좀 많이 빠져서 머리가 식었나보군. 아니면 하이드가 필사적으로 방어하고 있어서 그렇거나.
아무튼 뽕맞은 멍청이에서 빈혈 박교수로 돌아왔으니 이제 머리를 좀 굴려봐야겠다.
자의든 타의든 무식하게 들이박는 건 해봤다. 결과는 지금 보다시피, 대참사가 나버렸고.
‘아무리 형태가 사람 같아도 W도, 이놈도 전부 3형 변종. 누군가의 기억에서 탄생한 트라우마의 현신 같은 놈이야. 올드 픽처처럼 놈도 약점이 있고, 분명 어딘가 그게 드러나 있을 거야.’
올드 픽처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기억을 상대에게 투사함으로써, 아예 대놓고 그의 약점을 요구하고 다녔다.
W는 묻지도 않은 그의 과거를 우리에게 아주 자세히 설명했다. 그냥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듯이.
트라우마는 결국 정신에 남은 커다란 상처. 3형 변종은 그 부정적인 순간에 묶여있는 생물이고, 어떤 식으로든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저놈도 3형 변종인 이상 분명 그 기억에 기반을 두는 약점이 있을 터.
‘발톱이란 단어를 계속 강조했지. 단순히 전투력을 나타내는 단어는 아니야. 내가 수류탄 장난질로 놈을 속였을 때 오히려 놈은 그것도 발톱이라며 오히려 좋아했어. 더 많은 발톱을 드러내라, 보여줘라…. 뭔가 내게서 보고 싶은 것이 있나? 내가 더 놈을 곤란에 빠뜨리길, 더 힘든 상대이길 원하는 건가?’
뭔가 알 듯 말 듯하게 감이 왔다. 만신창이가 된 나에 비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적. W의 계획 따위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한 놈의 행동과, 전부터 나를 지켜봐 왔다는 놈의 말.
“….수준에 맞춰 상대하고 있는 건가? 어이, 호랑이. 너 날 죽일 생각이 없구나?”
그 말에, 지금까지 내가 무슨 수를 써도 멈출 수 없었던 놈의 발걸음이 멈췄다.
대충 봐도 호승심이 넘쳐 보이는 모습. 만신창이로 만들어 궁지로 몰아넣고는, 발톱을 보여봐라, 그를 몰아붙여보라 종용하는 모습.
그는 내가 지금보다 더 강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죽지 않을 수준의 공격을 가하며 그렇게 하면 내가 성장하기라도 할 것처럼.
“날 가지고 놀고 있어. 아니, 정확히는 원하는 대로 조형하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겠군. 시체 호랑이. 설마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초인적인 힘이 나온다거나, 하는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믿고 있나? 한계까지 몰아붙이면 만화처럼 사람이 각성해서 평소의 몇 배에 가까운 힘을 발휘하고. 그런 걸 믿는 거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밖에 없었다. 놈은 나의 게임 플레이를 감명 깊게 봤고, 뭔가 나에게 기대하며 나를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힌트를 너무 많이 줬나?”
“그래. 제발 알아달라고 아주 소리를 지르더군. 욕구불만이면 저어-기 렙터 소사이어티라고 숫자도 많고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놈들이 있는데, 당장 그쪽으로 찾아가면 될 것을 뭐하러 나같은 놈을 키워 먹으려는 거야?”
“음, 아니군. 완전히 헛다리를 짚었다. 박교수.”
‘뒤는 틀렸고, 앞은 맞았다는 소리군. 호승심 같은 욕구불만은 아닌데, 나를 어떤 목적에서 강화하려 했다는 것은 진심이란 소리잖아?’
가만 보면 3형 변종이란 놈들은 죄다 하나씩 음습한 구석이 있었다.
우울증 끝판왕 올드 픽처나, 시종일관 두루뭉술한 W나, 이젠 사람 머리통을 무슨 강철마냥 두드려대면서 그게 깨지지 않고 단단해지기를 원하는 이족보행 시체 호랑이나.
“박교수, 네게는 군인 특유의 움직임이 묻어있더군. 어디 출신이지?”
어찌 됐건, 놈의 말문이 트였다. 그건 지금도 피가 줄줄 새는 내 옆구리가 달라붙을 시간을 벌었다는 뜻이며, 잘 맞춰주면 충분한 시간을 제공할 것이라는 뜻이니까. 대답을 마다할 필요는 없군.
“….14.”
“더할 나위 없이 제대로 겪었군. 이번에는 사람을 제대로 고른 것 같아.”
“‘이번에는’ 이라…. 그럼. 나 이전에도 이런 식으로 가지고 논 사람이 있었나?”
“가지고 놀았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군. 그건 시험이고, 가르침이었으며, 진보를 위한 과정이었을 뿐이야.”
“….몸을 찢고 머리통을 부수는 게?”
“과실이 박피의 고통을 호소한다 하여 그 껍질을 벗기지 않을 수는 없지 않느냐.”
놈의 말을 대충 받아주며 주머니에서 응급치료용 패치 한 장을 더 꺼내 옆구리에 붙였다. 놈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만들고 싶은데? 얘기 좀 하자고. 뭐, 죽일 생각이 없다면 바라는 모습으로 가르침을 받아줄 수도 있으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넌 거의 완성에 가까운 상태이니까. 올곧은 자.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가진 모든 발톱을 내던져 상대에게 달려들 수 있는 자. 나는 그런 자를 만나고 싶어서 이 삭막한 세상을 배회하고 있었다. 올곧으면서도 나보다 강한 자.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만나야만 하는, 그런 존재가 필요했다.”
“….만나면. 마음이 맞으니 친구라도 되어달라고 할 생각인가?”
노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정 반대지. 마침내 다시 그를 만나게 된다면, 다시 한번 나를 시험할 것이다. 정녕 과거의 원본과 내가 다른 존재인지. 그토록 깊은 후회 속에 내가 태어났다면, 그 추악한 본질을 정녕으로 극복한 것인지.
부루는 그의 영혼을 구성한 원본의 기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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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하고 겁이 많은 그 속내를 숨긴 채, 누구보다 비범해지고 싶었던 자.
그는 42 특수 작전대의 사령관이었다. 수많은 작전을 성공시키고 살아남은 끝에 부와 명예를 거머쥔 위대한 사령관.
허나 그 당사자는 그런 허명이 자신의 귓가에 울릴 때마다 부끄러움에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
모두가 앞으로 달려나갈 때, 그는 뒤로 돌아서는 사람이었으니까.
아군의 희생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가장 안전한 자리를 선점했고, 그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이 있음에도 가장 쉬운 상대를 선택해 생존을 도모했다.
그 결과가 벌써 몇 번을 갈아치운 부대원들. 전장의 추억을 얘기할 동료 하나 남지 않은 고독한 사령관.
다리가 부러진 동료를 업어서 함께 도주하는 대신, 기관총이 탑재된 참호에 두고 왔다. 그의 마지막 불꽃이 기관총 소리와 함께 살라지며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적진에 보급도 없이 고립됐을 때. 모두가 굶고 있을 때 그는 처음부터 숨겨놓았던 식량과 물로 체력을 유지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몇 번이나 그들과 함께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죽음의 공포가 찾아오면 그는 언제나 같은 선택을 하곤 했다.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 죄책감. 공훈 따위를 바란 게 아니었는데. 그저 살고 싶어 발버둥 친 것일 뿐인데. 어째서 사람들은 죽어간 동료 대신 살아남은 비겁자를 치하하고, 내게 보상을 내리는가.
“….그르르르.”
이렇게 스스로의 비참함에 몸서리칠 때면, 그는 언제나 주둔지 한편에 있는 창고를 찾아가곤 했다.
집채만 한, 하지만 오랫동안 갇혀있느라 뼈가 앙상하게 남은 뱅갈 호랑이.
먹이를 찾으러 내려왔다가 트랩에 걸린 녀석이었다. 가죽을 벗겨 상관에게 선물로 보내면 더 많은 지원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여 전문가를 찾을 때까지만 보관하려고 했는데.
“크으으으. 크와아악!”
철컹! 철컹철컹!
며칠을 물도, 밥도 먹지 않았건만 쇠창살 밖의 나를 물어뜯기 위해 몸을 날리는 놈의 눈빛에 그만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 목숨을 도외시한 올곧음. 증오의 눈빛이 어째서 그렇게 위안이 됐을까. 나는 이 짐승을 통해서만 내가 받아야 할 온당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도축업자는 쫓아냈고, 쇠창살 속의 호랑이는 창고에 머무르게 됐다. 그 증오의 눈빛이 기꺼우면서도 그것이 빛을 잃고 꺼져가는 순간을 지켜보고 싶었다. 결국 죽음의 순간에, 저 아름다운 짐승 또한 삶을 향해 추악하게 발버둥 치리라. 그리하여, 나의 행동이 인간의 본질에 가까운 것임을, 내가 그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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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부루. 그 대호는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그 증오를 꺼트리지 않았어.”
그의 원본이 된 이의 마지막 기억. 스스로의 이름조차 기억 속에 남기지 못할 정도로 자기혐오에 빠진 생존주의자.
“적의 공습이 있었고, 그는 그렇게 열심히 살아남았음에도 어처구니없게 폭탄의 파편에 맞아 죽을 판이었지. 그는 피가 흐르는 배를 틀어쥐고 창고를 향해 달렸어. 이유는 모르네. 그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싶었는지, 아니면 그냥 습관처럼 위안을 얻던 곳으로 달려간 것인지.”
그곳에서 그는 최후를 맞이한다. 그가 바라 마지않던 힐난과 증오를 아낌없이 퍼부어주던 호랑이의 날카로운 발톱을 맞이하여.
“부루는…. 그 늙은 대호는 오로지 하나만 생각했어. 나를 이곳에 가둔 저자를 죽이리라. 단 한 번만, 한 번만 놈의 목덜미에 발톱을 박아넣을 수 있더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그리고 그 인간이 피를 흘리며 그의 우리에 기댄 순간 부루는 때가 왔음을 알았어. 이미 눈앞이 흐릿해질 정도로 아무것도 먹지 못한 대호의 앞발은 생기를 잃은 채 비참하게 말라 있었지. 평소라면 틈에 발가락조차 집어넣지 못할 정도로 좁은 창살 틈으로 앞발 전체를 밀어 넣을 만큼.”
피 흘리며 벌벌 떨고 있는 사내. 사내의 목에 번뜩이는 발톱이 걸리고, 사정없이 당겨졌다.
“목이 절반 가까이 잘린 사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반쯤 시체나 다름없던 대호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모습이었지. 비참할 만큼 뼈가 앙상한 모습. 허나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며 만족스럽다는 듯 쓰러지는 그 모습! 순간 그는 참을 수 없는 비참함과 깨달음을 얻었어. 아, 나는 저 짐승이 꺾이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구나.”
그것은 증명의 순간이었다. 모두가 선망하고 잘했다, 잘 살아남았다 치하하는 자신의 삶이 틀렸다는 것에 대한 증명. 사지를 향해 달려간 그의 동료들처럼, 죽음 앞에 공포가 아닌 다른 것을 발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에 대한 증명!
죽음의 순간, 그의 손끝이 선망해 마지않던 올곧은 범의 사체에 닿았다. 그리고 숙주의 몸을 차지하기 시작한 바이러스는 숙주의 기억 속에 그 무엇보다 선명하게 남아있는 대상의 사체를 몸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교수는 빠르게 이어지는 그의 회상 속에서 아연함을 느꼈다.
“자, 잠깐만. 그럼 네놈의 목표라는 게 설마….”
“그래. 나는, 다시 한번 죽음의 공포를 겪고 싶다. 항거할 수 없는 죽음. 그 절대적인 공포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과거의 사내처럼 도주할 것인가. 대호처럼 맞서 싸울 것인가. 사내는 마지막 순간에 진정으로 그 추악한 본성을 극복한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위안을 얻은 것뿐인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참 괴악한 짓도 많이 했지. 수백 명의 무장한 인간 무리 속에 몸을 던지기도 하고, 같은 3형 변종이라 불리던 개체 중 말도 안 되게 강해 보이는 놈에게 달려들기도 하고. 너희가 렙터라 불리는 이들을 습격하기도 했지. 전부 내가 바라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만 깨달을 뿐이었어. 인간 무리는 너무 약했지. 3형 친구는 분명 날 죽일 정도로 강력했지만, 그 눈에 의지가 없었어. 그저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커다란 무생물일 뿐. 렙터들은…. 어쩌면 대체재가 될 수도 있겠다 생각했지만,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았어.”
저벅. 저벅.
불꽃이 일렁이는 대호의 두개골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원하는 것은 대적자(大敵者). 그날, 오직 한순간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그 호랑이처럼 진정으로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초연할 수 있는 존재. 나를 몰아붙여 내게 죽음의 공포를 선사할 그런 존재를 말하지. 지금도 어딘가에는 내가 죽을 자리는 있겠지. 나도 무적은 아니고 끝없이 몰려드는 적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허나 떼거리로 붙어 맞이하는 죽음은 만족스럽지가 못해. 놈처럼, 내게 모든 것을 투사해줄 단 하나의 강자를 원하네. 죽음에 초연한 자는 있었지만 놈들은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냥 죽어버렸어. 3형의 경계에 도달한 자도 있었지만, 과거에 틀어박힌 반 시체일 뿐이었지. 누구도 내가 만족할만한 대적자의 재목은 되어주지 못했어.
어느덧 짐승의 노린내가 확 다가올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놈의 두개골. 표정은 없었지만 느껴졌다. 놈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렇게 실패를 거듭하던 중 마침내 자네를 발견한 거야. 수많은 죽음의 고통, 공포 속에서 뒤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자. 이미 스스로의 힘으로 탈각(脫殼)을 시작하고, 그럼에도 그 올곧음이 꺾이지 않은 자! 마침내 나는 찾아내고야 만 것이야! 나의 대적자가 될 가장 완벽한 재료를!”
교수는 열변을 토하는 그를 내버려 두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충분히 지혈할 시간도 끌었고, 자아가 불안정한 3형 변종답게 놈도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해서 놈의 기원과 과거사에 대해서도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 기억 속 결함, 약점이라 할 만한 부분이 터무니없다는 것이었다.
‘목표는 자기 증명. 죽음의 공포를 겪고 싶은데 자기가 정한 기준에 맞는 단일 개체가 그 대상이 되어야 함. 스스로가 겁쟁이인지, 용감한지 증명하게 해야 한다고? 결국 1대 1로 붙어서 꺾어줘야 만족한다는 거잖아! 뭐 이런 마조히스트 같은 놈이 있어!’
더 큰 문제는, 그 대상으로 나를 점찍었다는 점이다. 말하는 투가 당장 청혼이라도 할 것 같은 절절함이 느껴지는 게, 아무리 봐도 쉽게 놔줄 것 같지가 않았다.
스가악-
놈이 뒷걸음질 치는 내게 천천히 다가오며 발톱을 꺼내 들었다.
“최대한 발버둥 치고, 고난 속에서 그 예기를 더해 가도록 하게. 자네는 이미 여러모로 내게 증명했으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어쩌면, 지금 당장 마지막 과정으로 넘어가도 될지도 모르겠군.”
“마지막 과정…. 이라면?”
“죽어야지. 죽어야 강하고 완벽한 나의 대적자로 다시 태어날 것이 아닌가? 지금도 일부만 아주 불안정하게 변한 상태에서 이 정도인데, 완전히 3형으로 거듭난다면…. 으음. 흥겹구나. 흥겨워! 참을 수가 없어!”
“!!!”
‘결국 죽인다는 소리잖아!’
슬금슬금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세상에, 강력한 늙은 남성이 나를 향해 ‘참을 수 없어’ 따위의 말을 하는 것을 듣게 되는 날이 오다니. 이곳에 오는 게 아니었어!
뒷걸음질 치며 미친 듯이 주변을 살폈다. 쓸 만한 거. 뭔가, 이놈을 떼어낼 만한….!
콰득!
‘에라이!’
놈의 뒷발이 땅을 파고드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대충 주변에 잡히는 차량 문짝을 뜯어 던진 다음 전력을 다해 놈의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도주인가? 아직도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려 하는가!”
“그냥 좀 놔줘, 이 미친놈아! 어차피 나 금방 변종 될 것 같은데,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되잖아!”
스가악-!
“기다림이 너무 길었음이야! 포기하고 얌전히 목을 내놓아라! 나만의 대적자로 다시 태어나게 해줄 테니!”
콰득!
“으아악! 개소리 집어쳐! 염병할 늙은 털뭉치 마조히스트 얀데레 시체 남성이라니! 어느 업계에서도 안 받아줄 미친 속성으로 구애하지 마라!”
되는 대로 손에 잡히는 온갖 파편을 뒤로 던지며 주둔지 밖을 향해 달렸다.
그나마 놈과의 대화에서 건진 게 있다면 내가 도주해도 놈이 47구역 지원군의 후방을 칠 염려는 없다는 점이었다. 애초에 이 시체 호랑이는 내 뒤를 쫓아 이곳에 온 것이었으니까.
‘뜀박질 속도는 비슷해! 이대로 주둔지 밖으로 놈을 끌어들여 시간을 끌면 이안 에젤 팀이 위쪽을 정리하고, 그럼 저격수가 없으니 주둔지 병력도 적을 밀어내서 여유가 생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어…. 아군이 날 살려주러 오겠지! 난 이놈 붙잡고 있는 것만 해도 충분히 1인분 한 거야! 암 그렇고 말-’
서걱-
“으으으으읍!!! 하느님!”
교수는 놈의 발톱에 뭉텅이로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을 보며 간절하게 빌었다. 제발 내가 살아있을 때 지원이 오게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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