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8
Chapter.2 위기는 기회는 위기다(8)
***
지이익- 탁.
지이익- 탁.
부러진 오른쪽 다리와는 달리 왼쪽 다리는 제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었던 덕분에, 부목을 대고 남은 창대를 지팡이 삼아 의지하니 어느 정도 몸을 옮길 수는 있었다.
[경고 – ‘뮤테이션 블러드’ 감염률 40%]“쿨럭! 크으으윽!”
전신의 상처를 통해 속으로 파고드는 기이한 고통에, 교수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감사할…. 지경이군.’
모든 뮤테이션 블러드의 원형이 되는 세포, 감염인자는 전염성과 재생능력이라는, 두 가지 강력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세포 단위로 여왕의 의지에 따르는 그것은 숙주의 몸에 침투하는 즉시 접촉 부위부터 침식해나가며 몸의 통제권을 빼앗는데,
이때 침식이 진행된 부위는 자신의 몸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지니고 있는 재생력을 발휘하여 손상된 부분을 수복하기 시작한다.
거꾸로 말하면, 뮤트에게 당한 상처 부위가 회복되기 시작했다면 이미 그 부분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났다고 봐도 좋다는 뜻이다.
‘다리…. 아니, 허리 정도까지 올라왔나.’
그것은 매우 기묘한 감각이었다. 간지러운듯한 감각에서 개미 떼가 상처를 갉아먹는 듯한 감각으로, 다시 작은 칼날이 상처 안을 마구 해집는 듯한 감각으로.
제 손으로 상처부위를 도려내어 버리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교수는 이 상황이 기꺼웠다.
‘어쨌든 상처가 회복되면서 움직이는 게 더 편해졌으니까.’
샬롯과 에데오르나의 전투지역에서 멀어지며 끊임없이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저 전투에 자신이 기여할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경종처럼 울리는 정신쇠약의 경고성 정보를 낱낱이 확인하며, 계속 몸을 움직이기 위해 노력했다. 멈추면 의식을 잃을 것 같았다.
‘내가 저 전투에 끼어들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전투를 유리하게 이끄는 법. 아군의 강점을 살리고, 적의 약점을 취한다. 분명히…. 분명히 있었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지만, 분명 어딘가 있었다.’
자꾸 아래로 내려가는 고개를 억지로 들었다. 저 멀리 산발적으로 뮤트와 싸우고 있는 병사들. 그리고, 내가 튕겨 나가 의식을 잃은 동안 에데오르나에게 덤벼들었는지,
샬롯과 에데오르나의 충돌지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쓰러져있는 날개 기사단과 중앙군 지휘부의 시체들.
교수는 홀린 듯이 갑옷으로 이루어진 무덤으로 다가갔다.
달칵, 달칵!
움직이고 있었다. 옆구리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린 기사는, 실핏줄이 터져 벌게진 눈으로 아직까지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던 검을 쥐기 위해 손가락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후경직에 가까운, 하지만 분명히 의지가 깃든 움직임.
교수는 기사의 눈을 보았다. 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흘리며 치켜뜬 두 눈은, 샬롯이 있는 방향에 고정되어있었다. 검을 쥘 힘조차 잃은 손을 끊임없이 달칵이며, 기사는 그렇게 한없이 적을 노려보고 있었다.
달칵, 달칵!
꿈틀, 꿈틀.
그런 작은 움직임들이 도처에 즐비했다. 팔이 잘린 자도, 뱃거죽이 찢어져 내장이 흘러내리는 자도, 입으로 피거품을 게워내는 자도. 하나같이 샬롯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누이고 있었다.
그들의 모든 움직임이 한 단어를 말하고 있었다. 남은 생명을 모두 바쳐 간절하게.
교수는 그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촤악-!
주변에 쓰러져있던 변종의 사체를 끌어와 부러진 칼날로 힘껏 목을 베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변종의 사체에서 선혈이 쏟아져나와, 쓰러진 기사의 상처 위로 쏟아져 내렸다.
치이이익-
상처 부위에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눈에 띄게 살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저 정도 상처를 회복시켰으니 감염률이 30% 정도는 즉시 올라갔을 것이다.
전에 당한 상처를 통해 들어온 감염인자도 있을 테니, 아마 지금 내 행동으로 인해 정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감염이 진행되었겠지.
전장에서 적의 손에 스러지는 것이 아니라, 감염인자가 뇌까지 파고들어 괴물이 되어 동료의 손에 죽는 것. 기사로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죽음이다.
기사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 나와 눈을 마주쳤다. 사과하고 싶었다. 내 이기심이 당신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당신의 삶을 부정했다고.
“쿨럭! 쿨럭! 그르륵!”
하지만 피를 게워내며 교수가 가리킨 방향은, 여전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한복판이었다.
“그르륽, 가…. 싸워…. 쿨럭!”
기사는 조용히 교수를 보고 있었다. 쓸리고 부러진 다리, 후들거리는 지팡이,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남은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곧은 손가락.
기사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콰아악!
부서질 듯 검을 쥐었다.
***
카가가가각!
“크윽!”
섬전처럼 쏟아지는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낸 샬롯이 받은 숨을 내뱉었다.
‘상황이 좋지 않다.’
그녀는 순식간에 목덜미와 허리, 무릎을 겨냥하는 흰색 창끝을 견제하며 희끗하게 사라지는 적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공격은 가볍다. 방어하는 데는 문제가 없어. 하지만…. 내 검 또한 놈의 몸에 닿을 수가 없군.’
놈의 공격은 무게가 실리지는 않았지만 너무나도 빨랐다.
팔을 털어내는 듯한 동작으로 찔러 들어오는 공격 하나하나가 갑옷의 틈새를 노리는 치명적인 공격. 간격을 벌리기 위해서 강하게 쳐내려고 해도 그때마다 검과 맞닿은 창이 부드럽게 물러나며 허공을 베는 듯한 불쾌한 감각만 남았다.
‘이런 가벼운 공격 따위, 사흘 밤낮으로도 받아줄 수 있지만…..’
첫 격돌 후, 놈의 상상 이상으로 빠른 속도에 잠시 움츠러든 것이 화근이었다. 샬롯의 검에 튕겨져나간 에데오르나는 그대로 뒤쪽으로 몸을 돌려, 그녀의 뒤에서 다른 뮤트를 정리하며 합류하던 기사들을 습격한 것이다. 대경한 그녀가 다시 놈의 주의를 끌었을 때는 이미 기사들이 전부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뒤였다.
콰직-!
“윽!”
날카로운 통증이 그녀의 상념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왼쪽 어깨에 놈이 쓰던 하얀 창이 박혀있었다.
“흐트러졌구나. 강적을 앞에두고 다른 곳에 마음을 덜어내서야 쓰겠느냐?”
“닥…쳐라!”
샬롯은 놈의 빈손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창을 보며 이를 갈았다. 자신의 어깨에 박힌 것과 완전히 동일한 형태의 무기.
‘색이 비슷하긴 했지만, 설마 신체의 일부였을 줄이야.’
투둑, 드드드득!
“….이런!”
푸확!
순간 어께에 박힌 창끝을 중심으로 날카로운 통증이 퍼지기 시작했다. 재빨리 창을 뽑아내자, 나무뿌리처럼 자라난 창끝에 붙잡힌 살점 한 뭉텅이가 같이 뜯겨 나왔다.
“저런, 조심해야지. 아까운 고기가 버려지지 않느냐. 혹여 아직도 네 뒤에 있는 것들이 신경 쓰인다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신선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죽이지는 않았으니. 어머니께 썩은 고기를 진상할 생각은 없다.”
“….더러운 괴물이 인간의 흉내를 내는 꼴이 역겨워서 봐줄 수가 없구나.”
“볼 필요 없단다. 그 커다란 눈을 뽑아버리면, 더 이상 앞을 볼일이 없을 테니.”
스가각-
놈의 모습이 다시 시야에서 사라졌다. 샬롯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왼손 아귀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여기까지인가.’
적은 철저한 아웃 파이터다. 몸이 멀쩡할 때도 칼이 닿지 않는 범위에서 체력만 소진 시키던 녀석이었는데, 이제는 출혈까지 있는 상황. 놈은 내가 말라 죽을 때까지 간격을 내어주지 않고 주변을 빙빙 돌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을 번다. 놈을 상대하며 최대한 전투지역에서 멀어지면, 다른 기사들이 생환할 시간을 벌 수 있겠지.’
각오를 마친 샬롯은 검세를 바꿨다. 다소 피해를 입더라도 놈을 전장에서 멀리 떨어트릴 생각이었다.
스아악-
“손이 부족해 보이는구나. 옆구리가 비지 않느냐.”
샬롯이 희끗한 그림자를 향해 돌진하자마자, 그녀의 왼쪽에서 나타난 에데오르나가 활짝 열린 복부를 향해 창을 찔러넣었다. 샬롯은 방어를 하는 대신, 휘두르던 칼에 더욱 힘을 실었다.
‘살을 주고, 뼈도 내어주마. 단, 적어도 네놈의 팔 하나는 받아 가겠다!’
샬롯은 방어를 하는 대신, 다리에 축적시켜둔 힘을 폭발시켜 앞으로 내달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의지에 반응한 노을빛 검기가 검면을 타고 흘렀다.
새하얀 창과 노을빛 검이 교차했다.
‘전하께서 끝까지 그 옆을 지키지 못한 기사를 용서하시길.’
스걱-
카앙!
하나는 막히고, 하나는 도달했다.
투욱.
“이런…. 천한 것들이 쓸데없는 잔머리를!!!”
어깻죽지 부근에서 잘린 새하얀 팔이 땅으로 떨어졌다.
샬롯은 자신의 뒤에서 하얀 창을 막아낸 검의 주인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자네가…. 어떻게.”
“늦어서 죄송합니다.”
샬롯은 검례를 올리는 기사의 옆구리를 보았다. 갑옷이 깨어져 나간 사이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진흙을 반죽에 붙여둔 것처럼 흉하게 일그러진 검푸른 살점을.
“나이트 나릭. 복귀하였습니다.”
철컥, 철컥.
그 뒤로, 그와 비슷한 모습을 한 기사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나이트 디카르포. 복귀합니다.”
“나이트 타그날. 복귀합니다.”
“나이트 맥칼슨. 복귀합니다.”
“나이트 로딤. 복귀합니다.”
.
.
.
.
철컥, 철컥, 철컥,
언제 왔는지 주변에서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 기사들이 그녀의 옆에 서 검례를 올리고 있었다.
기사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더럽혀지고, 비틀거리며, 걷는 것조차 힘에 겨운 듯한 모습.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손에서 검을 놓지 않았으며, 누구도 적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개죽음이다, 나릭. 그 몸으론 검을 들기도 힘들 것이다.”
“이미 목 아래쪽으론 감각이 없습니다.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제 몸으로 한번은 붙들 수 있겠지요.”
“놈은 나보다 강하다.”
“아까 보셨습니까? 팔을 베었을 때 아가트 경과 제 목을 벨 시간이 충분했음에도 놈은 거리를 벌렸습니다. 전투력과는 별개로, 전투 경험은 적은 놈입니다.”
“….돌아갔다면, 정신을 차렸을 때 도시를 향해 움직였다면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태양이 아직 전장에 있는데, 저희가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전장의 태양이시여.”
핏자국이 흥건한 나릭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어이가 없군. 몸은 이미 괴물이 되었고, 저 꼴이 되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으면서도 농담이 나온단 말인가.’
“….대책없는 놈들.”
“그렇게 가르친 아가트경을 탓하시지요.”
샬롯은 자신의 옆에 선 기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도 미소와 함께 물기가 어리고 있었다.
툭, 투둑.
“살아남게 되면, 너희들의 이름을…. 국왕 폐하의 어전에 고하여….. 서훈하겠다.”
“저희들의 여명을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이트 샤를롯.”
“흐흐흐, 아카데미에서 들었던 왕국 제일의 기사가 울보라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샬롯은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여명이라. 적의 것이 되어가는 몸을 던져 마지막 생명까지 불사르겠다는 의미이리라. 이런 명예로운 기사들을 환송하는데 눈물 한 방울 정도를 사치라고 할 이는 없을 테니.
기사들의 대형 앞에 선 샬롯의 몸에서 노을을 닮은 빛이 퍼져 나와 기사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적은 아직까지 멀찍이 떨어져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몸을 반쯤 돌린 채 금방이라도 도망갈듯한 모습이, 나릭의 말대로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
‘….이들의 각오를 헛되이 할 수는 없지.’
샬롯은 목소리를 키웠다.
“하얀 괴물아. 우리가 두렵느냐!”
“이이익! 닥쳐라! 천한 고기 주제에!”
“두려우면 도망쳐라. 며칠 밤낮을 너만 기다리던 네 어미는 오늘도 굶겠구나! 어디 그 모습으로 돌아가, 배고픈 어미에게 팔 하나만 더 달라고 부탁해 보아라!”
“감히…. 감히 어머님을 모욕하다니!”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던 적은, 도발 몇 마디에 찢어진 눈을 치뜨며 앞으로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역시 어리다. 처음의 그 여유로운 모습은 간데없고, 약간의 충격, 작은 도발에도 쉽게 흐트러진다.’
샬롯의 머릿속에 놈을 상대할 전략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타그날, 로딤. 전투가 시작되면, 놈의 후방을 잡아라. 포위하는 것이 아니다. 공격에 가담하지 않아도 좋으니, 놈이 뒤로 물러날 공간을 점거해라.”
“알겠습니다.”
“디카르포, 맥칼슨. 미안하지만 내 팔이 이 모양이라. 좌측 방어와 견제를 부탁한다.”
“맡겨주십쇼.”
“그리고 나릭, 너는 나와 같이, 놈의 목을 친다.”
“예.”
사악-
저만치 떨어져 있던 괴물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샬롯은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투화악!
발끝에서 폭발적으로 솟구쳐오른 노을빛 기운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며 검 끝으로 흘러 들어갔다.
“로드릭 기사단! 발검!”
처억!
“지금부터 왕국의 안녕과 평화를 위하여 적을 도살한다!”
“예!”
“오늘이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니! 선왕의 이름앞에! 저 하늘에 한점 부끄럼없이 가거라! 우리의 태양은 고향의 품에서 떠올라!!!”
“전장에서 질 것이다!!!”
“전장에서 질 것이다!!!”
“전장에서 질 것이다!!!!!!”
“죽어라! 어머님께 그 목숨으로 사죄해라, 천한 고깃덩어리들아!”
철컥철컥 철컥철컥!
스아아아악-
.
.
.
.
콰아아아아아앙!!!!
그렇게, 한 몸이 되어 앞으로 돌진하는 기사단과 하얀 괴물이 충돌하였다.
***
털썩!
‘시작인가….’
교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쓰러져, 샬롯과 기사들이 있을 거라 짐작되는 부분을 바라보고있었다.
“아까랑 상황이 좀 많이 다를 거다, 괴물 새끼야.”
샤를롯 데 아가트라는 영웅의 진정한 힘은 개인의 전투력이 아니다. 전황을 읽고, 가장 적절한 곳에 아군을 배치함으로써 개인의 전투력을 200% 발휘하게 하는 말도 안 되는 전술 지휘능력과 버프 능력.
로드릭 제1의 기사는 아군과 함께 전투할 때 가장 강하다.
‘흑마법사의 시대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에데오르나는 아직 태어난 지 1년도 안됐을 거다. 자신의 페이스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어떻게 대처할지 모를거야. 여왕에게 전투력은 물려받을 수 있어도, 전투 경험은 받을 수 없으니.
이 전투는, 우리가 이겼다.
쿠웅!
저 멀리서 흰색과 주황색 섬광이 얽히는 것을 보며, 교수는 그대로 쓰러졌다.
삐이-! 삐이-!
[경고 : ‘뮤테이션 블러드’ 감염률 92%]등 쪽에 상처가 있어서 다행이였다. 척추를 당한 다음부터는 아무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하하, 나도 참. 과몰입도 정도껏 해야지. 기껏해야 게임인데 뭘 이렇게 죽자고 매달렸는지….”
허탈한 듯 말은 했지만, 사실 답을 알고 있었다.
전장을 돌아다니며 죽어가는 기사들에게 독약이나 다름없는 뮤트의 피를 쏟아부을 때, 그들 중 누구도 단 한 톨 만큼의 거부감을 내비치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교수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의 눈동자 안에는 그게 있었다. 뭐라고 설명은 못 하겠지만, 세상이 멸망한 뒤 사람들 속에서 천천히 마모되어 사라져버린, 보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것.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냥 지나칠 수 없게 하는 무언가가.
“….모르겠고. 아무튼, 재밌었다. 게임이 재밌었으면 된 거지.”
‘한계다.’
힘겹게 버티던 교수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삐이-!
[경고 : 비정상적인 로그아웃 감지. 안전지대에서 로그아웃 하지 않을 시, 플레이어의 캐릭터는 게임의 상황에 따라 자율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정말로 로그아웃하시겠습니까?]“알아서 해라. 어차피 죽을 텐데.”
감염인자가 뇌를 건드리기 시작해 환청이 들리는 단계였다. 내 캐릭터는 이제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포기하지 말거라]천천히 의식을 잃어가는 교수의 귓가에 환상처럼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 돌아가신 분이 바쁘기도 하시지. 봤잖아요. 포기 안 하는 거. 걱정 말고…. 들어가서…. 쉬세요…..”
교수는 정신을 잃으며, 아버지의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