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80
Chapter. 10 납과 은화(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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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황무지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늘 함께하던 것이다.
사실 누구나 그렇지.
투박한 납탄에 꿰뚫린 상처 정도는 다들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사방에 눈치를 봐가며 날카로운 고철 더미를 뒤지다 베인 상처. 항생제 하나 없이 곪아가는 손끝을 보며 잘라야 하나, 이대로 둬야 하나 며칠을 고민했었지.
온갖 건물 잔해를 뛰어다니다 보면 온몸에 쓸린 상처와 타박상이 가득하고, 겨울에는 차갑게 얼어붙은 금속에 잘못 손을 댔다가 그대로 달라붙어 피부를 찢어내야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렇게 다치고 지친 몸을 끌고 집에 도착하면 나를 맞이하는 침묵. 누구도 나를 돌봐줄 수 없다는 현실.
고통이 심해지면 뇌가 뭐 온갖 잡다한 물질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염증에, 약 기운에, 또 고통에 멍한 머리로 낡은 소파에 앉아있다 보면 온갖 이상한 환상을 보곤 했었지.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렇게 어지러운 것도. 자꾸 이상한 것이 눈에 보이는 것도. 손발에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는 것도 그냥 많이 아파서 그런 것뿐이다.
….누군가는 이걸 죽어가는 느낌이라고 하겠지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맞아….?”
[낡은 나무 울타리야. 그냥 넘어가. 잘 가고 있어.]지이익- 쿠드드득, 지이익-
“하이드…. 이건? 거대한 피막 같은 게…. 변종인가…. 싸워야….”
[오래된 천막. 괜찮아. 거의 다 왔어.]우드득!
“그럼 이건….”
[아니, 그건 아니지. 여긴 해피 블라인드 거주지잖아. 47구역의 익숙한 상점 삼거리가 왜 보이겠어.]“아아. 아아아….”
콰드드득. 쿠드득.
쿠웅. 쿠우웅.
차라리 아주 말도 안 되는 환각이었다면 좋았으련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원근감이 수시로 바뀌고 눈앞에 자라난 풀밭이 도시로, 폐허로, 피가 흥건한 원시적인 거주지로 바뀌곤 했다. 흙과 돌로 지어진 집.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시장에는 뼈와 나무를 깎아 만든 물건이 어지럽혀져 있고. 어딜 가나 곳곳에 보이는 커다란 눈 모양 무늬. 그래. 내가 보고 있는 건 모조리 환상이구나. 세상에 이런 곳이 있을 리가 없지.
“그르르륵, 하이….드…. 나는…. 어디로….”
[네가 원하는 곳으로. 괜찮아.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린 서로에게 서로를 숨길 수 있으니까. 내가 잘 읽고 있어. 난…. 네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어.]답답하다. 가래 끓는 소리가 나. 목을 당했나? 내 목이 이렇게 두꺼웠나?
몸이 무겁다. 시야도 이상해. 내가 걷고 있는지, 달리고 있는지, 기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상한 소리와 빛의 중심으로 점점 다가가고 있다는 것.
오면서 여러 번 정신을 잃었고, 의식을 되찾기 전까지 하이드랑 한참을 얘기했던 것 같은데. 이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오래된 기억 하나만이 몸을 움직일 뿐.
“그르르륵….살…고…싶어….”
살겠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훔치고, 빼앗고, 죽이고, 설령 그것이 입에 담을 수 없는 끔찍한 일이라 해도 살겠다고 다짐했다.
어느덧 눈앞에 다가온 제단에 비치는 선명한 빛. 저것은 죽음이다. 누군가 말해주지 않아도,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 그 탄생의 외침으로 수많은 이를 비명에 보냈으며, 나를 이렇게 만든 것. 머지않아 나조차 그들과 같은 길을 가게 만들 것.
이상하기도 하지. 저건 나의 목표와는 한참 거리가 먼 물건인데. 어찌 이다지도 힘겹게, 평생을 바라 오던 것처럼 애타게 저것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까.
[….계속 가. 이제 몇 걸음이면…. 될 거야.]‘그래. 가야지. 아무도 하지 못한다면….’
쿠우웅.
콰르르륵.
검고 단단한 갈퀴가 돌을 깎아 만든 재단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기묘한 음률과 함께 빛을 뿌리는 원시적인 재단과, 그것을 기어오르는 크고 검은 괴물.
이 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 중 환각에 시달리던 이도, 의식이 올바른 이들도 그들이 본 것을 현실이라 인지하지 못했다.
그것은 모래와 기름. 화약과 피. 납과 은으로 대화하는 냉혹한 황무지의 현실에 걸맞지 않은, 너무나도 초현실적인 광경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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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쉬에는 참으로 평온한 상태였다.
전대미문의 살인 장치를 완성했고, 그것의 가동을 위해 오랜 기간 그녀와 함께해온 동료가 참혹하게 죽어나갔으며, 그 결과로 수백의 사람들이 한순간에 터져나갔지만.
모두 그녀가 겪어봤던 일이고, 일의 성패와 관계없이 그녀의 죽음은 예정된 일이었으므로.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녀의 바람과 달리 ‘상자’를 향해 다가오는 불청객을 확인했을 때 당황하지 않고 기꺼운 마음으로 그것을 맞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믿을 수가 없구나. 정말로…. 여기까지 오다니.”
참으로 끔찍한 몰골이라 생각했다. GG의 연구 책임자로. 돔의 연구원으로. 해피 블라인드의 ‘눈’으로 살아오며 태초의 변종부터 예술가 연합의 ‘적응자’까지, 그 누구보다 많은 변종을 봐왔던 그녀로서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저런 모습으로 변한 것인가 의심케 하는 그런 몰골이었다.
“박교수…. 아니면 하이드? 그것도 아니면….‘professor’인가?”
“…..”
그녀의 말에, 멍하니 상자를 바라보던 그것의 얼굴이 천천히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크기를 제외하면, 인간의 형태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는 있었다. 유연함과 단단함의 경계에 서있는 근육질의 몸체.
문득 3형 변종 중에서도 단순하다 칭할 수 있는 그의 형태가 왜 이렇게 불쾌하게 다가오는지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저 검은 빛. 광택 하나 없는, 마냥 검다고 하기엔 다른 색이 섞여 있는 저 색상.
‘무슨 피냄새가…. 이 피바다 속에서도 코를 찌를 만큼 지독한 피냄새가 나는구나.’
그녀는 저것을 알고 있었다. 오래전 38구역의 실험실에서 봤던 것과 같은 굳은 피딱지의 색깔. 죽은 피가 마른 자리에 다시 피가 흐르고, 그 위로 또 다른 피가 한참을 반복해 쌓여야지만 나오는 깊고 검은 검붉은 빛깔.
“…..”
눈을 제외한 그 어떤 이목구비도 없는 그것은 고개를 돌려 다시 상자를 향했다.
제법 오랫동안 변종을 연구해온 그녀로서는 그의 형태가 사뭇 눈에 밟혔다.
‘변종의 외형은 그 내면의 기억을 따르는 것. 입이 없는 변종은 드물지. 죽은 자는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토로하고 싶어 하는 게 보통이니까. 남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기억인가? 피는 상징하는 게 너무 많아서 추측하기 힘들지만…. 피와 수치심이라면 대충 알만하지. 죽여선 안 될 이를 죽인 거야. 흔한 이유에서 흔치 않은 개체가 탄생했어.’
리 쉬에는 그녀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말은 하지 못하지만, 저 검은 괴물이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것 정도는 느껴졌으니까. 평생을 홀로 감내해온 그녀의 속내를, 적어도 죽음의 순간에는 털어놓을 존재가 있다는 것이 그녀는 사뭇 기꺼웠다.
삐빅! 삐빅!
그녀의 머리 위에 관처럼 씌워진 정신 감응장치가 경고음을 발했다. 그럴 수밖에. 얼마 없던 발전시설을 관리하던 ‘목자’들은 지금 모두 양들을 이끌고 대피했고, 상자를 제어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전력을 소모했으니 전기가 끊길 때도 됐겠지.
뚝…. 뚝….
“울고…. 있구나.”
그것은 완전히 전개된 ‘상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학자로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이 순간을 위해 ‘상자’의 파장에 맞춰 준비한 세 겹의 6레벨 실드와 정신 안정장치, 그리고 미리 신경 마취제로 온몸을 마비시켜놓은 그녀와 달리 저 검은 변종은 상자의 파장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으니까.
지금만 해도 작은 움직임에 격렬하게 꿈틀거리는 힘줄이나 근육 등이 그 고통의 수준을 짐작하게 하건만, 진작에 뇌가 백지가 되어버릴 에너지 속에서 그는 간절히 바라듯 상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엾기도 하지. 너는,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대하는 것이냐?”
트라우마라는 것은 결국 어떤 상실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며, 강한 자기애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트라우마에서 기인하는 생물인 3형 변종은 자기애가 매우 강한 편이며 대부분 그 스스로가 원하던 삶을 이루기 위해 움직인다.
그러니 이 눈앞의 남자는 이 항거할 수 없는 고통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스스로가 가장 선호하던 삶의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문득, 그녀는 여기서 이 생물이 스러지는 것이 몹시 아쉽다고 느꼈다.
“….살고 싶지 않느냐?”
“….”
부스스슥-
말은 없었으나 분명히 반응은 있었다.
“가는 길이니 한 가지 일러주자면, 네가 여기서 저것을 부수는 순간 너는 죽는단다. 그것만은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지. 이 넓은 황야를 가득 메울 에너지가 한순간에 폭발하는 것이니. 가장 고통스럽게 죽게 되겠지.”
“….”
“그리고, 네가 목숨을 바쳐 ‘상자’를 제거한다 해도 인류는 멸망하게 되어 있단다. 희생이라면 무의미한 희생이 되겠지.”
“….”
대답이 없는 청자였지만 리 쉬에는 그녀의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꼭 털어놓고 싶었던 그녀의 이야기. 본디 노인이란 이야기가 많은 법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나는 이 ‘상자’의 원본이 된 오르페우스 프로젝트를 만든 사람이란다. 처음에는 이렇게 큰 프로젝트는 아니었어. 그저 연구실 동료 세르반테스가 오랫동안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가 치매에 걸렸다고 슬퍼하길래, 어떻게 완화할 방법이 없을까, 하고 시작한 프로젝트였지.”
참으로 즐거운 때였다. 잠을 자려다가도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어느새 별이 다 지고 해가 뜰 때까지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고. 그렇게 밤을 새운 동료들과 새벽같이 문을 연 부리또 노점에서 4달러짜리 싸구려 부리또를 사 먹으며 펩시 콜라를 준다고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고. 그렇게 고생해서 만들어진 연구의 성과물, 자식 같은 오르페우스 프로젝트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을 보며 언젠가 그들의 노력이 세상의 빛이 되리라 희망에 가득 차곤 했다.
그 얼마나 허황된 희망이었는가.
“평생의 신념…. 내가 배우고 깨달은 것으로 세상을 더 나아가게 만들 수 있다는 것. 나의 인생은 그것에 대한 부정으로 가득했지.”
연구의 규모가 커지고 정부의 개입이 부담스러워질 때까지만 해도 연구의 주체인 그들이 통제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군에서 나온 사람들이 총구를 들이대며 말 그대로 ‘인간 정신 파괴장치’를 만들라 독촉할 때도 죽는 한이 있어도 그런 연구에 손을 대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렇게 연구소에 불의 비가 내리고. 동료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돔의 연구원으로 다시 세상을 위해 지식을 사용하겠다 다짐하던 중.
폭격 속에 동료들과 함께 영영 사라진 줄만 알았던 오르페우스 프로젝트가 어딘가 뒤틀리고 꺾인,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그녀가 얼마나 격노했던가.
그 물건에서 죽어 없어진 줄 알았던 동료의 무수히 많은 흔적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당황했던가.
그리고, 돔의 고위직으로서 오래된 군사 기록을 뒤진 끝에 그녀와 그 동료가 프로젝트의 완성을 위해 ‘살려두는’ 쪽이었다는 것을. 끝까지 병기를 만들지 않겠다고 저항하는 연구진의 의지를 꺾기 위해 둘을 제외한 모든 연구원을 한 줌의 재로 만든 것이 그 연구를 지원하던 정부의 계획이었음을, 그 모든 기록을 확인한 38구역 행정부에서 이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오르페우스의 연구자 앞에 슬그머니 그 미완성의 괴물을 내놓았음을 알았을 때, 그 역겨운 현실에 얼마나 구역질을 했던가.
“나는…. 겨우 깨달았지. 현생 인류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는 것을. 아무리 좋은 기술이 개발된다 해도, 그들은 그것을 가장 사악한 방법으로 사용하는 데 특화된 종이었던 거야. 호모사피엔스는 그런 종으로 진화하고 만 것이지. 핵분열 에너지는 인류 전체를 에너지 위기에서 구해줄 위대한 발견이었지만 그것을 대표하는 이름은 폭탄이 되고 말았어. 그제서야 지금 세계가 이렇게 된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지더구나. 사람들은 늘 저 신을 향해 기도했지. ‘제발 우리를 봐달라.’, ‘우리를 구원해달라.’ 이게 그분의 대답이었던 거야. 구제불능의 인류를 위한 마지막 기회. 깨진 그릇을 버리고, 새 그릇으로 되살아날 수 있는가.”
리 쉬에는 그 길로 돔에서 도망쳐 나와 해피 블라인드를 설립했다. 그녀는 그저 거짓 없이 말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을 잊고, 새 아이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게 하자.
이 모든 것이 운명이었으리라. 그녀가 깨달음을 얻은 것도, 자식 같은 연구물이 동료의 생과 사를 넘어 대량학살 병기의 모습으로 그녀의 앞으로 돌아온 것도. 그녀의 교리를 듣고 하나 둘 모여든 교인 중 한 자릿대 구역에서 넘어온, 방사능으로 온통 녹아내린 피부의 여자가 세상의 종말과도 같은 괴수에 대해 이야기한 것도.
아무리 궁리해도 ‘상자’를 완성할 수 없던 차에, 그녀로부터 전해 들은 깊은 구역의 괴수는 그녀가 필요로 하던 모든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120명의 교인과 함께 방사능이 손으로 만져질 듯한 한 자릿대 구역으로 들어갔으며, 돌아올 때는 여섯뿐이었지만 그것의 샘플을 채취하는 데 기어이 성공하고 말았다.
모두 운명이리라. 지독한 방사능에 오염되어 죽어가는 것은 그녀에게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어차피 그녀의 역할은 그녀의 생이 다하기 전에 끝날 테니까.
“참으로 장엄한 광경이었지! 산맥처럼 솟아오른 거체는 활화산처럼 재와 불꽃, 방사능을 뿜어내었고,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짊어진 듯한 그 지옥과도 같은 몸은 우리 같은 이들의 끝을 위해 준비된 가장 알맞은 심판대와도 같았단다. 변종은 기억의 결락, 가장 깊은 트라우마에서 태어나는 존재이지. 그렇다면,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끔찍한 기억이 있지 않느냐?”
심판의 경고와 같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미사일.
충격과 열, 그리고 인근의 모든 것이 사라졌음을 알리는 버섯 구름.
빗발치는 총알 속에 갈려나가는 사람들.
이 메마른 아비규환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게 만든 원흉.
“전쟁. 워(War)라고 이름 붙였지. 마치 그것이 끌어들인 참상을 인근의 모든 생물에게 공유하는 듯했단다! 너희들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 이게 네가 한 일이다! 라고 힐난하듯 말이야. 오만한 인류를 위해 준비된, 너무나도 걸맞은 심판이 아니더냐? 그 녹아내린 여자가 발견한 곳과, 우리가 발견한 위치가 달랐으니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겠지. 어차피 우리는 모두 죽게 되어있단다. 그러니 아이야, 여기서 죽기보다는 마지막이나마 내 삶을 위해 살아줬으면 하는구나. 이 끔찍한 사람들을 위해 죽기에는…. 너 같은 존재는 너무나도 아까워. 선한 이들이 모두 죽은 세상에서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니?”
“…..”
뚜둑, 으드득!
대답 대신 괴물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육과 신경이 무더기로 끊어지는 소리 속에서 천천히 한 걸음씩. 발이 움직이지 않으면 손으로. 손이 굳으면 무릎과 어깨로.
“….살…. 것이다….”
기어가며 날카로운 기계 파편에 베인 탓일까, 찢어진 얼굴 가죽 사이로 선혈이 가득한 이빨을 드러낸 괴물이 입을 열었다. 격렬하게 거부하는 몸을 강제로 움직이듯 삐걱거리는 움직임. 마침내 그 오그라든 손으로 핵을 잡는 데 성공했지만 핵을 감싼 유리질 보호벽조차 부수지 못하는 모습에, 무겁게 끌어올린 반대편 손이 얹어졌다.
검은 괴물의 손아귀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카득!
– [끼이이이이이이익-!!!!] –
보호벽이 깨지며 피가 새어 나오는 순간 비명과 함께 엄청난 파장을 발하는 상자.
굳은 몸을 타고 흐르는 격통과 뇌를 헤집는 환상 속에서도, 리 쉬에는 묻고 싶었다.
“살고…. 싶다면…. 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냐….?”
파직, 카각, 카가각, 까득!
핵을 쥔 손아귀에 점점 힘이 더해지고, 눈을 뜰 수 없는 광채 속에서 한껏 손을 그러모은 괴물은, 마지막임을 직감하듯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흘러내리는 눈물이 찢어진 검은 가죽 위를 타고 흘렀다.
“….이렇게…. 살…. 것이다….”
괴물은,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적어도 리 쉬에의 마지막 기억에는 그가 웃은 것 같다고 기억되었다.
“어쩌면…. 수집가의 말이…. 정말로 옳을 지도….”
퍽.
이 시대 최악의 전쟁 병기의 최후치고는 허무했다. 빛 한 줌. 전구 터지는 작은 소음 한 조각.
두 사람을 죽이기에는 지나치게 충분한 충격과 에너지.
사위를 밝히던 빛과 고막을 파고들던 소리가 한순간 사라졌다.
제단과 그 주변에는 어떠한 숨소리도, 작은 생명 반응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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