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81
Chapter. 10 납과 은화(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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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르륵-
“….오르페우스인지 뭔지 하는 거, 정말 개 쩔어주는 개자식이었군. 대가리 터질 뻔했잖아.”
이안은 한쪽 귀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격수들 사이로 뛰어들어 신나게 갈겨댄 것까지는 좋았는데, 놈들이 계곡의 경사면에 붙어 탄이 떨어질 때까지 무대응으로 임하니 거창하게 등장한 것치고는 별 피해를 주지 못했던 것이다. 시선을 확 잡아끌어서 주둔지를 향한 저격을 멈춰 세우기는 했지만…. 덕분에 그 총구가 죄다 그를 향해 돌아왔던 것.
기세 좋게 박차고 나왔던 찌그러진 트럭 화물칸으로 들어가 방탄 패널 위로 쏟아지는 도탄에 구타당하기를 십여 분.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그놈처럼 희한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반쯤 죽었다 치고 돌진하려던 그 순간-
끼이이이이이이익-!!!!
바위계곡 너머에서 기이한 울림과 빛이 퍼져나오며 그의 사고를 마비시켰다.
눈을 떴을 때 그의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너른 평원을 가득 채운 불타고 박살난 시체였으며, 그 시체 산의 꼭대기에 있는 나무 기둥에 못 박힌 그의 아내였다.
익숙한 광경이다. 아내를 잃고 광인으로 살던 시절 하루에도 몇 번은 더 봤던 환상이니까. 그 시절에는 작은 주머니칼을 가지고 다니며 환상이 보일 때마다 허벅지를 난자했는데, 우진영감은 흉터가 생길 새도 없이 꿰맨 자국 위로 추가되는 자상을 보며 자꾸 이러면 허벅지에도 철판을 덮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었지.
애석하게도 시체 무덤 속의 그는 알몸이었고, 늘 가지고 다니던 총과 칼은 그의 곁에 없었다. 그의 기억으로 이렇게 되면 환상에서 나가는 방법은 하나뿐.
흉터투성이 남자가 뼈와 내장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밟아 매달린 그의 아내 곁으로 다가갔다.
손과 발가락에는 고문당한 흔적이 선명하고 구타당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어버린 얼굴. 그 참혹한 모습에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굳어버린 이안은, 그럼에도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차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몰리.”
“….이….아….”
기둥에 매달린 그녀가 고개를 들어 입을 연다. 혀의 끝마디가 없다. 물론 그는 저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가 죽기 전 보았던 그녀의 모습. 입가에 흥건했던 핏자국은 살아남은 이안에게 매일같이 끔찍한 상상을 선사하기 충분했다. 저 선하고 연약한 여자가 돔의 무뢰배들에게 자결할 만큼의 고통을. 나와 함께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내가, 나의 마음에 충실했다는 이유로 그 누구보다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다니.
“….보고싶었소.”
찰팍. 찰팍.
이안은 아내에게 다가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이런 참혹한 몰골이더라도. 그 끝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어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감정이 그를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당신이 없는 세상은…. 여전히 지루해. 검은색과 회색으로 가득할 뿐, 영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안 들어. 예전의 당신이 봤다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만큼 이상한 짓도 많이 했지. 혼자 샷건 하나 들고 무장한 적들 사이에 뛰어들기도 하고, 코앞에서 크레모아를 터트려보기도 하고. 정말 죽었다 싶을 때까지 독한 술을 마셔도 봤고, 내 이름을 까먹을 때까지 줄기차게 담배도 피워봤지. 그렇게 하면 무채색의 세상이 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더라고. 술, 담배에 찌든 충동장애 이안 데스몬트라니. 지금 당신에게 고백한다면 대번에 뺨을 맞을지도 모르겠군.”
몰리가 메탈죠로서 그의 삶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뭐라고 하긴. 노상 입고 다니던 종아리까지 오는 하얀 간호사 치마를 입고, 허리에 두 손을 올린 채 눈을 칵 치켜뜨고 [뭐 하는 짓이에요!] 라고 호통을 치겠지. 그게 잘생긴 미남자가 됐든, 턱을 통째로 갈아 넣은 수염투성이 거친 남자가 됐든.’
“크흐흐흐…. 그건 그것대로 볼 만하겠는걸….”
찰팍.
마침내 그녀의 발치에 도달했다. 온갖 도구를 이용해 난자당한 흔적이 분명한, 한 손에 들어올 듯한 작은 두 발.
“그래도 요즘은…. 그래. 명암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어. 썩 지루하지 않은 녀석을 찾았거든. 남자답고. 기개도 있고. 무엇보다 나만큼이나 미쳐있기도 하고.”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그의 몸은 착실하게 기억 속 장면에 따라 아내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나무 기둥에 못 박힌 저 작은 발. 시체처럼 파리하게 식은 저 발을 그저 감싸주고 싶을 뿐이다.
“당신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어. 여전히 처음 만난 그날처럼 당신을 사랑해, 몰리.”
그의 손이 아내의 발에 닿는 순간.
퍼어엉-
그의 아내는 폭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며 저 시체더미들 사이로. 일부는 그의 위로 흩뿌려졌다.
강철같은 사내의 가슴이 아내의 핏빛 포옹에 바스라지고, 그 위로 지옥이 도래한다. 스스로 눈알을 파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참을 수 없지만, 아직 악몽은 끝나지 않았고, 그는 조금 더 가야 한다.
아내가 매달려있던 나무 기둥. 그 아래 작은 잔불이 타고 있다. 새까맣게 탄화되어버린 어린아이의 형태.
“레오니….”
나의 지옥이여. 내가 만들어낸 나의 형틀이여.
사랑하는 나의 아이야. 그 누구보다 많은 사랑을 너에게 전해주고 싶었건만. 너와 함께한 나날이 너무나도 짧았구나.
그 작은 숯더미를 가슴에 그러안는 것으로 그의 악몽은 완성된다. 쓰러져있던 시체들이 몸을 일으키고, 악다구니를 쓰며 그에게 달려든다.
겨우 두 명의 죽음조차 평생 감당하지 못하는 주제에 산을 이룰 만큼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도대체 그 죗값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오르는 고통 속에서 그는 타고 남은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손 안에서 바스러져 재가 된 딸아이. 그 속에 남은, 작고 하얀 두 발짜리 권총.
그의 마지막 도피처. 자살을 떠올릴 때마다 ‘한 번 더’ 생각하게 하여준 아내의 유품.
이안은 파도처럼 그를 향해 몰려오는 망자들 속에서 조용히 관자놀이에 총구를 올렸다.
이대로 기억에 매몰된다면. 어쩌면 이 참혹한 환상 속에서나마 영원히 그녀와 함께할 수도 있겠지만. 그 사실이 참혹할 만큼 유혹적이었지만.
“….레오니를 잘 부탁해. 내 사랑.”
타아앙!
한 발의 총성과 함께 사내의 몸이 스러졌다. 그는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을 생각이 없었다.
종교는 없었지만 아내와 딸을 위해 준비된 천국도, 그와 같은 이를 위해 준비된 지옥도 있으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이승과 천국과의 거리가, 천국과 지옥의 거리보다는 가까울 것이 아닌가.
그는 다시는 가족과 멀어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죽지 않을 생각이었다.
****
그렇게 수백 번이 넘게 겪어온 악몽을 해치고 현실로 돌아온 이안.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머리에 피가 몰렸는지 이대로 가다간 뻥! 터져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이안은 지체없이 손가락으로 그의 귀를 찔러 고막을 후벼 파버렸다.
퍼억!
“끄으으윽!”
대충 구멍을 뚫어버리면 압력이 빠지지 않을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의 발로였지만,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들끓던 뇌가 차차 정상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몸 상태는…. 아주 걸레짝이 되어버렸군. 특별한 외상도 없는데 무슨 전기 고문당한 것마냥 몸이 다 굳어버렸어.’
쏘지도, 터지지도 않는데 이렇게 넓은 범위의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엿 같은 방법으로 사살하는 병기라니. 어찌 이다지도 좆같은 무기가 다 있단 말인가. 눈앞에 있었으면 고철이 될 때까지 난타한 뒤 C4 무더기와 함께 폭사시키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거울을 꺼내 밖을 살폈지만 날카로운 총성도, 긴장한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긴. 사람을 그렇게 쥐어짜는 병기에 노출됐는데 상대적으로 트럭 화물칸이라는 실내에 있는 그보다 밖에 엎드려있던 저격수들이 더 많은 영향을 받았겠지. 그나 저격수들이나 똑같이 고레벨 개인 실드를 최고 출력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이안도 자칫 죽어나갈 뻔했으니, 어지간히 뚝심이 있는 놈이 아니고서는 죄다 죽어나갔을 것이다. 죽을 만큼 끔찍한 기분이지만 덕분에 적이 죄다 죽어나가서 목숨을 구했으니, 어쩌면 나름 수지맞았다고….
타앙!
파삭!
“…. 다 죽은 건 아니군. 한 놈. 그럼 보나 마나 그 녀석이겠지.”
이안은 깨진 거울 파편이 잔뜩 박힌 손을 보고 투덜거리며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냈다.
스미스 앤 웨슨, 44 매그넘 리볼버. 출발 직전에 박교수와 벡스가 시어머니마냥 빽빽거리며 잔소리를 해대는 바람에 어거지로 챙긴 권총.
‘그나마 매그넘 탄을 쓴다는 것이 나로서는 최선의 타협점이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더 게이같이 코딱지만 하고 정확한 놈으로 골라올 것을 그랬군.’
등에 멘 샷건의 무게가 천근처럼 느껴질 정도로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지금, 그나마 조준하고 쏠 수 있는 것은 무게가 덜 나가는 이런 권총뿐이었다. 물론 더 가벼운 것도 품 안에 있긴 했지만…. 그건 지금 쓰기에 그건 너무 귀하지. 그건 날 위한 거라고.
잠시 심호흡을 한 이안은 반쯤 너덜거리는 문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목표는 화물칸 문 앞 바위 엄폐물이었는데,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형편없이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다행인 것은, 상대도 멀쩡한 상태가 아닌지라 사격이 형편없이 빗나갔다는 것.
“공기가…. 더럽게 역겹군.”
속이 터질 것처럼 답답한 게, 원인은 찾을 필요도 없었다. 한순간 그를 오래된 악몽 속으로 쑤셔 넣은 기이한 소음. 그것의 발원지가 분명한 이상한 돌 제단에서 요사스러운 빛이 번쩍이고 있었으니까.
피잉! 파삭!
아까는 영 바보 같은 곳으로 날아가던 탄환이 어느새 그가 엄폐한 바위 쪽으로 정확히 날아들기 시작했다.
“미하일 플레트네프…. 여전히 총질 하나는 기가 막히는군. 저격만 하는 줄 알았는데, 권총은 언제 잡았나!”
“원래 권총을 가장 오랫동안 사용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경찰로 일했으니.”
“하, 남 대가리 터트리는 게 장기인 네놈이 경찰이라! 네놈에게 죽은 놈들이 알면 뒤집어지겠군!”
“딱히. 죽을만해서 죽었으니 내 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 않나.”
미하일 플레트네프. 그는 흔히 말하는 ‘승진에서 멀어진’ 경찰이었다.
‘미하일. 왜 그를 죽였지?’
‘두 건의 강도 살인과 다섯 건의 폭행, 일곱 건의 특수 절도로 수배 중인 범죄자였으며 총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그놈을 적대하지 않고 거래를 하라고 말하지 않았냔 말이야! 놈을 풀어주는 대가로 그놈이 속한 갱의 거래 루트와 근거지를 알아내는 게 우리 계획이었는데, 다짜고짜 수갑부터 들이대니 그놈도 속았다 싶어서 발광한 것 아니야!’
‘풀어준다면….그의 죗값은 누가 어떻게 치르게 되는 것입니까.’
‘이런 망할 또라이 자식이…. 그렇게 혼자 정의로운 척 다~ 하면서 저런 끄트머리나 잡아넣으면. 대가리는 누가 잡아넣을 건데? 계산이 안 되나? 마약 거래상 하나만 잡아넣어도 저 조무래기 하나 잡아넣은 것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데, 이게 잘못된 거야! 어!’
‘예.’
미하일 플레트네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세상은 그의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고, 사람과 사람이 얽힌 일. 특히 범죄와 희생자의 원망이 뒤얽힌 경찰 일은 특히나 더 그랬다.
그는 단순한 남자였다. 죄를 지으면, 그 죗값을 치른다. 모든 전후 관계와 뒤얽힌 사정을 생각하면 아무도 잡아넣을 수 없었다. 그저 눈에 들어온 죄인을, 순서대로 하나씩 잡아넣을 뿐.
서장의 눈 밖에 나서 감옥에 들어가 범죄자의 목을 조를 때도.
전쟁 중 아군을 팔아먹고 전향하려던 사령관의 머리에 총을 겨눌 때도.
민간인의 학살을 모의하는 지도층의 회의실에 불을 지를 때도 그는 한결같았다.
죄 지은 자에게 합당한 대가를.
그의 친우 알렉산더 영이 돔이라는 집단을 만들 때도, 그는 스스로 그들을 감시하는 경찰이 되고자 하여 집행부의 이름을 올렸다.
알렉산더 영. 세상에 그런 지도자만 가득했다면, 나의 단순한 정의가 더 쉬워졌겠지. 그는 세상의 복잡함에서 눈을 돌려버린 자신과 달리 그 모든 것을 마주하고, 그 앞에서 정의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미하일은 지금도 그에게 느끼는 우정과 같은 양의 존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더 영이라는 존재는, 뼈다귀를 보면 쫓아가는 개처럼 죄인을 보면 총구를 들어 올리는 그와 달리 월등히 위대하고 세상에 필요한 존재였으므로. 그와 친우의 목숨에 경중을 달아 올린다면 고민할 것 없이 그의 목숨을 자신의 위에 올릴 것이었으므로.
터어엉-!
콰직!
권총이라고 보기 힘든 총성과 함께 깎여나가는 바위를 보며 미하일은 이안이 근접전을 원하는 것을 눈치챘다.
“애쉬필드. 네놈을 처음 본 순간. 어떠한 일이 있어도 네놈은 세상에 남겨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지.”
부하를 잃어서? 수많은 민간인이 그의 손짓 한 번에 산채로 타들어 가서?
아니.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 냉랭한 눈빛. 그 모든 짓을 자행하면서 일말의 죄책감도, 광인의 희열도 느끼지 않는 그 사무적인 태도에 미하일은 깨달았다. 순수한 악이 있다면 저런 존재일 것이라고. 적어도 저자에 대한 단죄 만큼은, 그의 단순한 정의와 세계의 복잡한 정의가 일치할 것이라고.
그렇게 돔과 렙터의 전장을 넘나들며 그의 학살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를 몇 번. 갑자기 악마가 종적을 감추었고, 미하일은 미친 사람처럼 분노하여 날뛰었다.
그는 발악하는 범죄자도, 복수를 다짐하는 범죄자도 모두 그가 아는 법의 테두리 내에서 단죄하였지만, 딱 한 가지 예외의 경우에는 일말의 자비 없이 모두 사살하곤 했다.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범죄자.
죗값을 치르기도 전에 스스로의 알량한 기준으로 자신을 용서하고 편안해지겠다는 그것이 도피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정말 그들이 마음의 짐을 덜기 전에 그는 서둘러 그들을 죽여버렸다.
찰칵, 피잉-!
‘11시 앞에서 두 번째. 아니, 아홉 시 바로 앞 바위인가. 움직임도, 흔적도 잘 보이지 않는군.’
수류탄을 뽑아 들고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잡으려 애썼지만, 머리가 단단히 고장 났는지 끊임없이 흔들리는 시야는 초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휘익-
콰아아앙!
폭음과 비산하는 파편 사이로, 재빠르게 접근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런. 아홉 시였나.’
철커-
콰득!
애석하게도 그가 총구를 돌리는 속도보다 묵직한 군화가 그의 손목을 밟는 것이 더 빨랐다.
그의 기억 속 날렵하고 냉혹한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반쯤 금속으로 채워 넣은 얼굴에 근육질의 몸을 가진 남자.
“애쉬필드. 너는…. 지나치게 많이 변했군.”
“퉤엣!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한테 5년 정도면 차고 넘치지. 그러는 네놈은 전혀 변하지 않았군. 벽창호. 돔이랑 같이 일하면 네놈과 어깨를 나란히 할 날도 있을 것 같았는데 말이야.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서로를 위해 준비해줄 수 있는 것은 납탄밖에 없는 모양이지.”
미하일의 눈에 들어온 이안의 상태도 그와 거의 다를 바 없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 귀에 지근거리에서 터진 수류탄 파편이 스쳐 쩔뚝이는 다리.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투에는 여유가, 입가에는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다.
과거를 묻어버리기라도 한 듯 새사람이 되어버린 악마.
미하일은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커뮤니티에 BDSM의 소식이 처음 퍼졌을 때는 그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이안 이라는 이름이 귀에 박혀 저도 모르게 소식을 모으고 있었을 뿐.
그들이 돔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각자 선호하는 전투방식, 외모 등이 차례로 커뮤니티에 올라왔을 때도 미하일은 그답지 않게 불길한 기시감을 무시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럴 리가 없다. 알렉산더 영이, 이 시대 최악의 살인마를 그의 도시의 수호자로 칭송할 리가 없으니까.
그렇게 가까스로 애쉬필드에 대한 기억을 망상이라 치부하기를 몇 달, 그들이 38구역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깊은 밤중에 찾아가 그를 마주했을 때.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지만 그 냉혹함이 담겨있던 깊고 푸른 눈을 마주했을 때, 미하일은 결국 스스로의 신념을 저버릴 수 없었다.
영을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미하일 그 자신보다 더 나은 정의를 찾아낸 자이니. 그저, 어딘가 엇나간 경찰이 이번에도 큰일을 그르치는 것뿐이었다.
“죄를 더 지어도 좋다. 하다못해 과거를 피해 숨어들었어도 이해하겠지. 허나 너는…. 적어도 너만큼은 선해져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철컥.
리볼버가 당겨지고, 은빛 총신 안에 납탄이 그를 마주하는 것을 보며 미하일이 말했다.
“네가 아무리 많은 사람을 살리고. 아무리 많은 이들에게 행복을 전한들 네 죄는 값을 치르기 전에 사라지지 않는다. 죄 지은 자가 스스로를 용서하고 선해진다면. 죽은 이와 그 친인들의 원망과 고통은 누가 받아내야 한단 말이냐. 누가 네놈에게, 세상에, 그 어떤 것이 피해자의 고통을 거부할 권리를 주었단 말이냐!”
쿨럭, 커헉!
이안은 휘청거리는 몸으로 총을 겨누며 피를 토하는 미하일을 내려다 보았다. 무슨 환상을 봤는지 투박하게 으깨져 부러진 다리와 화약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총탄이 스쳐 지나간 관자놀이.
다리는 누가 그랬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미하일의 옆에 피 묻은 주먹만 한 돌이 있었으니까. 관자놀이는…. 자결하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총구를 튼 것 같았고.
‘저격수로는 비교할 놈이 없는 놈이 왜 거리를 못 벌리나 했더니. 그냥 놔둬도 죽었겠군.’
언덕 아래로 놈의 피가 작은 내를 이루어 흐르고 있었다. 그 몸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흔들림 없이 분노를 토해내는 남자.
“네놈은…. 후우우. 그래. 이런 놈이었지.”
어떤 놈이냐고 묻는다면…. 답답할 만큼 좋은 놈. 그러니까 내가 밉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착한놈이 되어버리면 나를 원망해야될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좋냐고 항변하며 저렇게 분노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원수가 오지마을 교회의 목사가 되어 참회하며 살고있는 것을 본 유가족의 심정이라고 할까. 답도 없을 만큼 지나치게 올곧은 분노. 신념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냥 저렇게 느끼는 놈인 것이다. 미하일 플레트네프라는 놈은.
물론 지금은 적이니 당장에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남은 친구들이 시체가 됐는지 시체가 되어가는 중인지 찾으러 가야 했지만, 이안도 속에 담긴 말을 토해내기 전까지는 방아쇠가 무거워 도저히 당길 수가 없었다.
“….마지막 가는 길에 오해를 풀어주자면, 네놈의 정신 나간 기준에서나 선악을 따질 수준이지 나는 여전히 나쁜놈이 맞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사람을 죽였고, 그러고 나서 반성은커녕 공돈 벌었다고 희희낙락하는 사이코패스였지.”
“….”
“며칠 전만 해도 나름 열심히 살아가는 38구역 감찰부 놈들을 잔뜩 죽였고, 공적이고 개인적인 일로 참 많이도 죽이고 다녔다는 말이야. 그러니 내가 천국에 갈 걱정일랑 하지 마시고-”
“….당기지 못하고 있군.”
“음?”
“방아쇠. 무겁나? 그 무게가 느껴지는가? 이제서야? 그 많은 학살 끝에? 이게 개과천선이 아니면 뭐란 말이지?”
“….씨발.”
“….후. 후흐흐흐…. 흐하하하하하하하!”
순간, 미하일은 이안의 얼굴에 서리는 갈등과 고뇌를 읽고 참을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이런…. 네놈은 그저 자기만족을 위해 스스로를 용서한 것이 아니었군. 가식이 아니라…. 정말로 선한 사람이 된 것이었어. 역겨울 만큼 놀랄 정도로 변해버렸구나, 애쉬필드.”
때로는 그의 단순한 정의가 세상의 이치와 맞는 날도 있었으니. 이안 데스몬트에게 책정된 죗값은 단순히 죄인으로 원망 속에 죽어나간다거나 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선한 이가 되어, 과거의 죄에 쫓기며 앞으로 죽여 나갈 수많은 사람들 속에 그 무게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느끼게 되는 것. 미하일은 그가 앞으로 살아갈 나날만큼의 고통과 죄책감에 허우적거릴 것을 생각하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의 죽음 또한 그의 고통이 되어 기억 속에서 그를 단죄하게 될 테니.
“쏴라.”
“….씨발. 내 평생에 이런 적이 없는데, 딱 한 번만 말한다. 한 번만 더 생각해봐. 너 같은 거 죽이면 꿈자리가 사나워.”
“후후후…. 쿨럭! ….네가 쏘지 않으면, 내가 쏘겠다.”
찰칵!
뚝…. 뚝….
힘이 빠져 총구를 들어 올리지도 못하는 손이 피웅덩이 속에서 베레타를 들어 올렸다.
“제기랄! 너 같은 놈은 죽이기 싫다니까! 나중에 내가 지옥에 가면 [미하일 플레트네프]같은 보기 드문 선인을 왜 죽였느냐, 고 사신이 쪼아대면 내가 뭐라고 할까! 어! 안 그래도 갚아야 할 죄가 천지에 깔렸는데!”
“….137건의 살인, 569건의 살인 교사, 2895건의 불법 구금, 391건의 폭행, 그리고…. 1건의 과실치사에 대한 대가로, 게으른 너희들을 대신해 형을 집행했다 하면 되겠지….”
그는 한계였다. 그의 모순.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신념을 저버리는, 살인자 미하엘 플레트네프를 방치하는 것에. 마침내 복잡한 세상으로부터 그의 해방이 다가온 것이다.
“….총 내려.”
“너는 살아가면서…. 앞으로도 끊임없이 과거에 쫓기게 되겠지….”
“총 내려.”
“내가 삶의 형벌에 일부가 됨에 감사를 느낀다….”
“총 내려! 개자식아! 어차피 죽을 거 그냥 곱게 혼자 뒤지란 말이다!”
부들부들…. 찰칵.
“부디, 네 남은 삶이 단 하루도 행복하지 않기를 기원하마. 애쉬필드.”
“이런…. 또라이 같은 자식이이이이이!!!!”
타아아앙-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과거에 얽매인 사내가 죽었고, 수많은 과거를 짊어진 사내가 살았다.
“….하느님…. 개 씨발 빌어 처먹을 하느님…. 양심이 있으면 담배 한 개비만 내려주쇼…. 제발….”
이안은 그의 시체 옆에 걸터앉아, 격전 속에 또 사라져버린 담뱃갑을 더듬으며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저 멀리 언덕 너머로 온갖 기이한 장비로 무장한 차량 무리가 전장에 접근하는 것이 보였다.
38구역 행정부의 마크. 방사능과 이상한 병기에 대한 방비를 마쳤는지, 뭔가 잔뜩 이고 나타난 것이다.
해가 진 것처럼 그 망할 것의 빛이 사라진 바로 이 순간에.
“서부극의 기마대보다도, 할리우드 영화의 엔딩용 경찰보다도 더 거지 같은 타이밍에 와주셨군….”
이안은 주머니 속 신호 막대를 꺾어 불을 붙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이젠 정말 지쳤다. 할 일은 모두 끝냈으니 에젤 녀석의 말대로 집에 가서 간식이나 까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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