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82
Chapter. 11. 마법사들의 마법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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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사각….
달칵.
사각사각….
“….총장님?”
“음. 왜 그러지?”
“술이 좀 과하신 게 아닌가 하여…. 차라리 오늘 일은 여기까지 하시고 자택에서 편히 쉬는 게 어떤가 싶습니다만….”
영은 부관의 말에 왼손에 들고 있던 그의 잔을 내려다보았다.
달칵.
두터운 위스키 글라스. 분명 10분 전에 새로 주문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투명한 얼음만이 잔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주제넘지만 한 말씀 드리자면, 최근 주량이 너무 급격하게 오르신 게 아닌-”
“그건 주제넘은 게 맞네. 고주망태가 되어 날림으로 서명할 일은 없으니 자네도 그만 퇴근해 보게. 아내가 최근에 둘째를 가졌다면서? 그럼 이런 주정뱅이랑 같이 있을 게 아니라 집에 같이 있어 줘야지.”
“총장님께서 남아계신데 어찌 저 혼자 편하자고….”
“내가 명령을 해야겠나? 굳이 내가 조직의 위계질서와 신뢰할 수 있는 부하를 저울질하게 만들 텐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각하. 편히 쉬시길.”
찰칵.
‘….눈치가 빠른 친구라 다행이군. 귀찮게 달라붙을까 걱정했는데.’
사실 영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현 상황에 있어 마지막 남은 돔의 최고 지도자이자 인류 생존의 구심점이 되어버린 그의 위치를. 그가 우울감에 빠져 취기 속에 한발의 평화를 찾아 나선다면 어떤 혼란이 초래될지도.
아마 다른 부장들이 신신당부했겠지. 절대 총장님을 혼자 두지 말라느니, 그분이 인류의 미래라느니 같은 소리를 떠들어댔겠지. 부관은 그들의 말대로 끝까지 그의 옆에 남아있는 대신 혼자 있을 시간을 주는 것을 선택한 것이고.
달칵.
서재 뒤쪽에 숨겨진 문을 열고, 그 안쪽에 세워진 투박한 유리 진열장 안의 독주 한 병을 꺼내 들었다.
높은 자리에 올라오니 온갖 뇌물과 청탁이 확인하지 못할 만큼 올라오곤 했는데, 다른 건 다 내쳤지만, 고급 주류만큼은 청탁한 놈을 언더돔에 잡아 쳐넣은 다음 조용히 챙기곤 했다. 알렉산더 영이라는 사람에게 있어 인생의 낙. 언젠가 세상이 안정되고 평화가 찾아온다면, 그렇게 늙어간 그의 일대기라도 나온다면 아마 이 패닉룸을 개조해 만든 비밀 술장에 대한 얘기로 책 반권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혼자 흐뭇해하곤 했는데.
“….초라하군.”
어느새 절반 가까이 비워버렸다. 단 두 달. 두 달 사이에 60년 이상 숙성된 유물에 가까운 고급 주류를 스무 병 가까이. 그 혼자서 다. 그의 주량이 늘어난 것을 탓해선 안 된다. 같이 잔을 기울일 친우가 먼저 가버렸으니. 그가 마셔야 할 술의 양이 두 배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미하일…. 천치같은 녀석.”
평생 돌덩이 같은 표정으로 냉정한 척은 다 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저, 그 감정이 밖으로 새어 나오지도 않을 정도로 가슴 깊이 품어두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그냥 세상이 올바르게 만들고 싶을 뿐이었다. 타협 없이. 차별 없이.
끼이익- 퐁!
꼴꼴꼴꼴-
타악.
짙은 갈색의 액체를 잔에 가득 채운 뒤, 영은 다시 자리에 앉아 어지럽게 늘어선 서류로 눈을 돌렸다.
[12월 추가 유입 난민 생존지 후보 리스트] [스캐빈저 감소로 인한 탄약 재생산 감소 회의록] [스테이션 감축에 따른 감시지역 축소, 그에 따른 능동 대응력 감소와 대책] [*기밀* 적응자 활동 보고서]“….내 대에는 세상이 더 변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건만.”
두 달 전, 30번대 구역에서 있었던 대사고.
영은 그것이 스스로의 오만이 초래한 인재라고 자책했다.
적어도 그의 시야 안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꿰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선한 광기’에 빠진 사람들, 신념에 스스로를 던지는 사람들에 대해 간과하고 있었다.
그 한순간의 오판으로,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가장 최악의 방향으로.
찰칵-
영이 혼자만의 쓰라림을 즐기려는 찰나,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며 급한 발걸음의 누군가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방금 퇴근한다고 하던 그 부관이다.
“….쉬시는 중에 죄송합니다. 총장님. 급한 일이라.”
“부디, 내 상념을 방해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길 바라네. 조금 전까지 자네가 참 눈치가 빠르고 훌륭한 부관이라 속으로 칭찬하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충분히 중요하다 생각됩니다. 행정부 데이터 의식 탐구부서에서 급보가 도착했는데, 아무래도…. ‘그 사람’의 의식을 찾아 깨우는 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쿠당탕!
값비싼 원목 장식 의자가 넘어지며 귀퉁이가 깨져나갔지만, 영의 눈에 그런 것은 들어오지 않았다. 매일같이 그 안경잽이들을 쑤셔대도 장담할 수 없다, 장담할 수 없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뇌었는데…. 이렇게나 빠르게 성공할 줄이야!
“지금 당장 가봐야겠네. 차량은 준비되어 있겠지?”
“지금…. 바로 말씀이십니까? 그건 추천해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만.”
“왜지? 혹시 환자의 안정에 문제가 되나?”
“….BDSM 관계자분들이 먼저 와 계십니다. 아시다시피 그분들은 그날 이후로 조금 많이…. 난폭한 경향을 띠셔서….”
부관의 걱정에 영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확실히 그 친구들이 제정신을 잃어버리긴 했지. 책임을 묻겠다며 수리 중이던 탱크를 탈취해 감찰부 관사를 들이받지를 않나, 어떻게 들어왔는지 내 서재에서 나를 기다렸다가 내 목에 칼을 들이밀지를 않나.
“마침 잘됐군. 그 친구들 출입 기록이 확인됐으면 부장급 인사들은 전부 출근했겠지? 랄프 그 친구도 나왔나?”
“….예. 그때의 습격 사건은 감찰부 전체의 자존심을 건드린 사건이었으니까요.”
“그럼 그 친구도 같이 가자고 하지. 그쪽도 박교수와 인연이 있다고 하니. 섣불리 죽이겠다고 덤벼들지는 못하겠지.”
“….에젤 레이든 요원이 아쉬워지는군요.”
“….그래. 그 녀석만큼 BDSM에 대응하는 데 적합한 녀석이 없었는데 말이야.”
영은 집무실을 나서기 전, 집무실 뒤편의 너른 창에 비치는 도시의 광경을 눈에 담았다.
캄캄한 도시 위로 눈발이 날리고 있었고, 그 어두운 도시 주변으로 작은 불빛이 곳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피난민들이 추위를 견디기 위해 피운 장작불의 빛이었다.
“….가지.”
감상은 여기까지. 이제는, 다시 냉혹한 위정자로 되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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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접속 확인. 환영합니다, ‘professor’님]“….뭐지 씨발. 버근가?”
게임을 너무 오래 해서 그런가. 머리가 쨍- 한 게 40시간 정도 자고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상하다. 분명 엘프마을 앞에서 일행이랑 하루 기다리기로 하고, 로그아웃해서 접속이 끊기면서 하얀 빛이 화아아악- 하고 다가왔는데….
왜 아직 접속기 시스템 안쪽이지?
아주 오래전에, 접속기 처음 쓸 때 봤던 장면이다. 커뮤니티도 없고, 메세지도 없고, 알림도 없고, [GG]라는 게임 아이콘만 덩그러니 있는 바로 접속하고 난 다음의 빈 공간.
뭐 로딩이 있나 싶어서 기다려보기도 하고, 이것저것 찾아도 보고, 로그아웃도 시도해봤는데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진짜 버근가? 운영진도 없는데 이렇게 버그가 나면…. 설마 영원히 여기서 못 나가는 것 아냐?”
순간 머릿속에 커뮤니티에 괴담처럼 떠돌던 ‘접속기 고장으로 안에서 말라죽은 사람’ 이야기가 떠올랐다. 망할, 이럴 줄 알았으면 돈 여유 생겼을 때 재깍 기술자 찾아서 접속기 정비라도 받을걸! 돔이 코앞에 있으면서 게으름을 피우다 이 꼴이 되다니! 꺼내줘! 꺼내줘요! Let me OUT! 썸바디! 누가 나 좀….!
띠링-!
“우왁!”
혼자 텅 빈 공간에서 허공에 악을 쓰고 있는데, 별안간 나타난 알림음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둠게이? 이안? 아니, 내가 접속해 있는데 웬 새로운 플레이어가?’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새도 없이, 눈앞에 빛무리가 일더니 금세 사람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확실히 그놈이다. 건장한 체구에 금속 턱. 며칠 못 본 동안 수염에 발모제라도 발랐는지 폐인처럼 수염이 덥수룩한 모습이었고, 눈은 또 사흘은 잠도 못 잔 사람처럼 퀭한 모습이었다.
어찌 됐건, 이 이상한 상황에 반가운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이긴 했다.
“….어이! 오랜만이다! 밖에 별일 없었냐! 나도 막 나가려던 참인데, 지금 접속기가 지랄이 나서….”
….뚜둑.
‘….어라?’
어째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내가 대단히 잘못한 것 같은 느낌? 무엇보다 전보다 한층 수척한 몸으로 주먹이 으스러져라 쥐고 이빨을 악 다문 이안의 모습이…. 상당히 무서웠다.
내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뒷걸음질 쳤지만, 이안은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라고…. 그래, 퍽이나…. 오랜만이군.”
퀭한 눈. 비틀거리는 발걸음. 이상한 행동에 어딘가 살이 빠진 것 같은 모습.
“너 이 새끼….”
순간, 교수는 이안이 어떤 상태인지 아주 명확하게 유추할 수 있었다.
“….술 처먹었지! 술 처먹고 접속기 건드렸구나! 이거 멀티 안되는 게임이라고, 아무리 접속 단자를 병렬로 쑤셔 넣어도 안 되는 거라 내가 그렇게 말했는-”
“아가리, 다물어.”
뻐어어억!
쿠당탕탕!
부지불식간에 날아든 이안의 주먹.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내 턱을 향해 날아든 솥뚜껑만 한 주먹을 가까스로 피한 순간, 묵직한 군홧발이 내 가슴을 걷어찼다.
장난이나 친근한 의미로 내지른 주먹과 발이 아니었다. 스친 턱이 쓸려서 피가 날 정도로 강맹한 펀치였고, 걷어차인 가슴은 갈비뼈가 나간 것처럼 욱신거렸다.
저 새끼, 진심으로 날 조지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쿨럭, 커으으으…. 이게 술이 아니라 약을 처먹었나….”
“술도, 약도 필요 이상으로 처먹긴 했지. 내가 너를 잘못 봤다 박교수. 개념이 박힌 놈인 줄 알았는데, 아주 썩어 빠진 생각만 대가리에 가득 들어찬 놈이었어. 거기서, 그걸 향해서, 맨몸으로 뛰어들어? 뻔히 죽을게 보이는 상황에!”
“퉤! 갑자기 접속기 고장 내고 쳐들어와서는 개소리나 내뱉고…. 함 떠 씨발? 서열정리 한번 제대로 해줘?”
“넌…..넌 맞아야 할 필요가 있어. 연장자로서, 네놈의 그 빌어먹게 멍청한 사고를 고쳐주마. 박교수.”
칙, 칙, 후우우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 이안.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데, 갑자기 나타난 친구 놈한테 쌍욕 먹고 배빵 맞으니 슬슬 나도 열이 올랐다.
“그래, 망할 폭파광 자식아. 드루와! 내가 평소에 형이니까, 친구니까 하면서 속으로 삭인 게 얼마나 많은 줄 아냐? 이번 기회에 허심탄회하게 갚아보자고!”
순간, 아아-주 기이한 감각이 뇌리에 스쳤다.
뭔가 대단히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 이 이상하고 모순된 상황에 너무 자연스럽게 적응해버린 게 아닌가,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의문을 해결하는 게 순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부자연스러울 만큼 금방 잊어버렸다. 마치 누군가 작은 불씨 위에 모래를 부어 꺼버린 것처럼.
부우웅!
“리더가 괜히 리더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마!”
기운찬 기합 소리와 함께, 빅드림 스몰마진 캐러밴 리더님의 주먹이 거구의 사내를 향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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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허억, 쿨럭! 허억, 야, 야!”
“콜록, 카학, 퉤! 뭐 임마.”
“허억, 선빵 맞은 게, 체력적으로, 타격이 너무 커서 그런 거야. 알아? 너 씨바, 국제 룰이었으면…. 반칙패야.”
“후욱, 후욱, 여전히 입만, 살아서는….”
“벡스, 불러와. 2,3위전 할 거야…..”
“아서라. 걘 나도 못 이겨.”
“허억, 허억, 제기랄….”
졌다. 망할.
그것도 아주 개 쳐발려서 먼지 나게 두들겨 맞았다. 하긴, 거의 두 체급 가까이 차이 나는데 맨손으로 신나게 달려든 내가 병신이지. 총 들었으면 이겼을 텐데.
“….좀 진정은 됐냐?”
“….그래.”
“내 참. 또라이인 줄은 알았지만서도….”
사실 중간에 한번 엎을 만한 기회는 있었다. 어차피 밀리는 거 드러누웠다가 서브미션으로 한방에 역전을 노리자, 하고 신나게 두들겨 맞고 있는데….
———
뚝…. 뚝….
‘끅, 끄흑, 빌어먹을, 감히, 그따위로 혼자 가버리려고….’
‘? ????????’
———
갑자기 마운트 포지션으로 사람 패던 놈이 펑펑 울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비극적으로 죽은 아내 얘기를 할 때도 눈물 한 방울 내비치고 말았던 놈이 진짜 서럽게 펑펑 울길래 나는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랫도리라도 걷어찬 줄 알았다.
저렇게 치트키를 써버리는데 내가 뭘 하겠냐고. 그렇게 떨어져 나는 묻지마 폭행의 고통과 동급인 줄 알았던 친구 놈에게 발렸다는 자존심의 상처를, 녀석은 혼자 급발진해버린 감정을 추스른 다음에서야 좀 진정하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녀석은 하고 싶은 걸 다 해서 그런지, 제법 차분하고 진정된 상태로 내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미리 준비해왔는지 10여분 가까이 이어진 녀석의 말은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여기서 생각하고 앉아있는 내가 이미 4개월 전에 GG에 백업된 기억 덩어리라고? 나 사람 아니야? 데이터야?”
“그거랑은 다르다니까! 잘 들어, 넌 4개월 전에 벌써 게임에서 로그아웃을 했고, 총장의 의뢰를 처리하기 위해 30번대 구역에 가서 온갖 전투에 휘말린 끝에 거의 죽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가 됐어. 아니, 죽었다고 하는 게 맞겠지! 3형 변종으로 90퍼센트 가까이 변화가 진행되었고, 의학적으로도 사망 판정을 내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태였으니까!”
“왜…. 죽었는데?”
틱, 틱틱, 지이잉-
내 질문에 이안은 이미지 파일을 하나 띄워서 보여주었다.
“이것 때문에. 오르페우스, 혹은 상자라고 부르는 구시대의 전쟁 병기를 개조한 물건. 넓은 범위 안에 살아있는 사람을 강제로 변종으로 만드는 물건이야. 원래 이걸 회수하기 위해 그쪽으로 넘어간 것이었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을 보고 네놈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혼자 개돌해서 이걸 파괴하고 죽어버렸지.”
이안은 그때를 떠올리니 다시 울컥해지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애써야 했다.
“다들 각자 맡은 적이 있어서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야 너를 발견했어. 38구역 행정부 사람들이 회수해온 네 상태는…. 후우우. 잠시만.”
결국 고개를 돌리는 이안. 교수는 이 대화 자체가 이상했다. 반복적으로 내가 죽었네, 회수되었네 하는 기억에도 없는 얘기가 나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완전히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근처에서 우리가 악을 쓰는 소리를 들었는지 예의 그 왼손이 바닥을 긁기 시작하더군. ‘Help’ 그 꼴이 되어서도 살려달라고 하더라. 그 길로 우리는 차에 너를 싣고 곧장 47구역으로 복귀했다. 38구역 행정부 놈들이 그쪽 의료시설은 이 정도 중환자를 감당할 수 없다기에 그런 거였어. 지금 생각하면 그놈들 하는 짓이 그렇게 수상했는데, 젠장. 나도 맛이 가 있던 터라 다른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그놈들은 왜?”
“….후우우우. 놈들이 라디오타워, 이 시대 최고의 광역 중계기에 반파된 ‘상자’를 연결시켰어. 네 손에 으깨진 상자의 핵이 변종답게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 남은 거야. 비록 출력은 그 완성된 모습의 반의 반조차 따라가지 못하지만…. 라디오 타워의 압도적인 중계 성능이 그것을 커버했지.”
찰칵, 찰칵,
타고 남은 필터를 버리고, 새 담배를 입에 무는 이안. 녀석은 손을 몇 번 휘젓더니 내게 음성 파일 하나를 열어주었다.
치직- 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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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생존자 여러분, 만나서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저는 38구역 돔 행정 총장 ‘카렐 벨르몽트’ 라고 합니다.
힘든 시기를 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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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잠깐만. 분명히 아까 네가 얘기할 때 카렐이란 사람은….”
“그래. 무능한 행정부 대변인 정도로 알고 있었지. 지 입으로 그렇게 말했고, 또 그렇게 보였으니까.”
으드득!
이안의 입에서 이빨이 갈리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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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다시 한번 도약할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폭력적인 경향이 적은, 소규모 집단 및 개인 생존자는 대부분 실드의 보호를 받는 안전한 쉘터에 살고 있습니다. 저 황야의 스캐빈저나 사이코 무리, 혹은 그 많은 전차를 다 커버할 전력이 부족한 살인마 렙터들이나 실드가 없는 삶을 영위할 뿐이지요.
지금 제 눈앞에 있는 기계는, 아주 강력한 파장을 통해 사람을 죽이고, 변종으로 변화시키는 이 시대 최고의 기술로 만들어진 전쟁 병기 입니다.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운송 과정에서 작은 사고가 있었던 바람에 출력이 많이 줄어들어 개인 거주지용 실드 정도만 있으면 이 ‘상자’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지금 이것의 버튼을 누를 생각입니다. 어쩌면 멸망이 시작된 이후 가장 많은 숫자의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군요.
여러분, 부디 이것을 학살이라, 끔찍한 일이라 여기지 말아 주십시오. 황무지의 스캐빈저와 떠돌이들, 그들은 사람을 죽여 그 고기를 취하고 기름을 짜내는 괴물일 뿐입니다. 그들을 변종으로 만드는 것은 약삭빠른 괴물을 멍청한 괴물로 만드는 작업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지요.
물론 누군가는 나를 비난하겠지만, 나는 이것이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만약 오늘 나의 선택이 죄가 된다면, 나는 원자폭탄을 만든 오펜하이머처럼 겸허히 그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부디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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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
음성 파일이 꺼지고, 이안과 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처음부터 저놈은 이걸 노리고 있었어. 모두가 비실비실해질 때를. 하긴, 저놈들도 연구에 미친 집단인데 지들 손에 있던 병기의 파훼책 하나 없었겠냐고. 우리한테 주지 않고 일부러 숨기고 있었다가, 상자가 발동돼 전부 병신이 됐을 때 짠! 하고 등장해서 그걸 낚아채 간 거야.”
온갖 의문이 머릿속에 감돌았지만, 상황은 이해가 됐다. 전쟁 병기를 두고 치열한 다툼이 있었다는 것. 모두가 손해를 봤고, 전혀 엉뚱한 놈이 그것을 낚아채서는 최악의 방식으로 사용했다는 것.
“광역 중계기라면…. 그 범위가 얼마나….?”
“….27부터 41까지. 놈들이 자랑하던 감청 범위만큼. 실드가 있는 거주지에 사는 생존자를 제외하고는, 그 범위 안의 모든 인간이 변종이 됐어.”
“그 많은 사람들이 전부 다 변종이 됐다고? 그럼 밖은 지금….!”
“그만! ….골치 아픈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지. 그 이후로 이어진 파문, 38구역을 습격한 렙터와 그들을 다시 습격한 아군, 온갖 이야기까지 하면 시간이 부족할 것 같으니까. 지금 중요한 것은 네 상태이지, 바깥일 따위가 아냐.”
나머지는 알아서 찾아보라는 듯 손을 휘저은 이안은, 숨을 한번 내쉬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하지. 지금의 너는 식물인간에 가까운 상태다. 이미 죽어 사라졌을 의식을 하이드가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는 상태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47구역의 연구진은 네 상태를 두고 회의한 결과 한가지 결론을 내렸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GG 내부에 동의 없이 채취된, 플레이어의 모든 행동과 사고, 기억을 기록한….”
“데이터 소울.”
“어…. 뭐 그런 게 있다고 하더군. 의식 불명의 너를 게임에 접속시키면 그 저장된 메모리와 내 의식이 융화되어서 어느 정도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거야.”
“그게 나고?”
“그렇지. 굳이 말하자면 식물인간의 뇌에 미리 불법으로 백업되어 있던 기억을 연결해놓은 상태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네가 박교수라는 것은 변함이 없어. 그저…. 약간 불안정한 상태인 것이지.”
묘하게 미묘한 느낌이다. 뭔가, 뭔가 어색한데. 애초에 메탈죠라는 사람이 이렇게 조리있게 말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으음…. 뭔가…. 뭔가….
“그럼, 그 불안정한 상태를 해소하려면?”
“그것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 중인데, 클리어를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 대부분이야. 알다시피…. 아, 넌 모르겠군. 이번 사태의 원흉이었던 리 쉬에 박사는 GG의 수석 연구원, 그중에서도 인간의 기억과 관련된 부분을 담당하던 사람이었는데 그 작자의 연구물을 통해 GG에 관한 연구가 엄청나게 진척됐거든. 이 데이터 소울이라는 게 NPC를 구성하는데, 월드가 클리어되면 시스템이 그걸 모두 수거하여 캐릭터 데이터를 날리고, 다음 월드의 NPC로 사용하기 위해 데이터 정리에 들어간다는 거야. 그리고 월드 클리어 캐릭터는 특전으로….”
“다음 월드로의 캐릭터 히스토리 계승. 수집한 데이터 소울의 가정 최신 버전을 다음 월드로 넘기기 위해 현재 접속 중인 플레이어의 상태를 업로드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완벽하게 네 의식과 동화된 데이터 소울을 네 차게 식은 뇌에 안착시킬 수 있게 되는 거지…. 라는 게 하얀 가운 입은 양반들이 침을 튀겨가며 설명한 내용이다.”
일리 있다. 전공자가 아니니 모르지만, 뇌사가 아닌 식물인간이라면 즐겨 듣던 음악이나 익숙한 냄새 따위의 자극에 반응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까. 아예 그 사람의 모든 기억을 통째로 뇌에 덮어씌워 자극을 주면 의식이 깨어날 가능성도 충분히 있는 것이다.
나보다 100배는 많이 배우신 분들이 그렇다니까, 그렇겠지 뭐.
“그럼, 내가 있는데 그 안에 이안 네가 접속했던 것도….?”
“지금의 너는, 정확히는 플레이어가 아니니까. GG에 저장된 데이터 소울과 연결된 반쪽짜리 플레이어지.”
“반쪽짜리 NPC라는 말도 되겠고.”
“그럴 수도 있고. 난 더는 머리 아파서 모르겠다. 염병할. 빌어먹게 손이 많이 가는 리더 같으니라고.”
이안은 자기 할 말은 끝났다는 듯, 주저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작별인사를 했다.
“안 그래도 불안정한 의식에 다른 플레이어가 오래 끼어있으면 안 된다고 해서, 이만 간다. 커뮤니티 연결해 놓을 텐데, 플레이어가 아니라 대화방 이용 같은 건 안 될 거다. 바깥소식이나 좀 찾아봐. 게임 열심히 해서 빨리 나오고. 종종 찾아올 테니까.”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서둘러 나가는 이안.
나는, 그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병신. 거짓말 더럽게 못 하네.”
허둥대는 모습이 딱 문방구에서 사탕 훔쳐 먹은 초딩 같잖아 멍청아.
행동거지나 말투, 사소한 것 하나까지 확인한 결과 저건 이안은 맞다. 저런 인간이 둘이나 있을 리가 없으니. 내가 통속의 뇌라는 사실도 맞는 것 같고. 바깥일 얘기할 때도 큰 반응은 없었고.
“….설마 회복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겠지? 영원히 통속의 뇌라거나.”
클리어 얘기를 할 때 심하게 불안정해지는 놈의 시선 처리를 떠올리며, 교수는 불안한 마음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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