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84
Chapter. 11. 마법사들의 마법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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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이 많이 수척해지고 폐인 같은 몰골이 되어가는 중이었다면, 벡스는 오히려 정반대였다.
작은 동작 하나하나도 날이 예리하게 서 있었고, 작고 우묵한 눈에는 살기가 번뜩이고 있는 모습.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저러는 게 아니다. 매일같이 죽고 죽이는 전투를 하고 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저런 상태가 되는 것이다. 눈의 깜빡임을 최소화하고, 인사를 하거나 몸을 긁는 손의 동선조차 항상 칼 손잡이를 거쳐 움직이고. 언제 어디서라도 살인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
‘염병, 옛날 생각나네. 특작대 시절에 잔존 적군 수색 중에 칼 하나 들고 덤벼들던 놈이 딱 저런 눈이었는데.’
아주 날이 시퍼렇게 서서는 그걸 감추지도 못하는 상태. 얘는 또 뭘 얼마나 하고 다녔길래 이 모양이 됐는지…. 참 답답할 따름이다.
“….왜 이렇게 여유가 없어졌냐. 내가 한두 번 죽을 뻔했던 것도 아니고. 자주 있었던 일이잖아? 늘 그렇듯, 이번에도 살아 돌아왔고.”
“아아, 으으…. 어흐흐흐….”
다행인 것은 그래도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았다는 것. 이런 상태가 더 지속되면 울지도 못하고 말도 못한다. 아직 최악의 상태는 아닌 모양.
한참을 울던 벡스는 내게 말을 건네는 대신 다른 방법으로 그간의 안부를 전했다.
꼼지락 꼼지락,
[대상 / 사망 / 공포 / 혼란 / 환각 / 부정적인 아군]“너…. 상태가 진짜 안 좋긴 하구나? 아예 말을 못하겠어?”
“그…. 아…. 햅번, 산이 굴러서 쇳덩어리가, 틀린 아니…. 이이이익!”
툭툭,
[어려운 임무 / 불가항력]작전 때마다 자주 쓰던 군용 수신호. 저 녀석이 말을 저렇게 한다고 해서 바보가 된 게 아니다. 그저, 안 그래도 불안정하던 녀석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 그 장치에 노출되고, 또 내가 이런 꼴이 된 것을 보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어디 한구석이 단단히 고장나버린 것뿐이지.
실어증과 비슷한 상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머릿속에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입이 말을 듣지 않는 상황. 우리한테 ‘잠깐 심장이 2배 정도 빠르게 뛰게 해볼래요?’ 라고 해도 할 줄 모르는 것처럼, 저 녀석도 갑자기 머리와 혓바닥 사이에 이상한 필터가 생겨버린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것뿐이다.
녀석도 사람들이 하도 못 알아들으니 답답한 마음에 수화를 시작한 것이겠지. 적어도 군 출신이면 기본적인 군용 수신호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고, 특수부대 출신이면 나나 이안처럼 디테일한 대화도 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은 그렇다 쳐도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마음의 상처가 거의 다 나아서 말을 더듬지도, 이상한 단어를 사용하지도 않던 녀석이 수화가 아니면 대화가 안 될 단계까지 와버린 것을 보니 화가 날 정도로 가슴이 쓰라렸다.
“참…. 거지같은 세상이야. 그렇지?”
툭툭, 툭.
[동의 / 행동 반경 / 전체 / 심각한 전장 / 휴식 없음]“그래, 그래. 어딜 가나 망할 것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세상이지. 알아듣기 편하니까 너무 그렇게 풀 죽어있지 마라. 의미로 대화하는 게 꼭 하이드랑 대화하는 느낌이라 되게 익숙하거든.”
활짝!
어이구, 웃기는. 누군 속이 타들어가는데.
그 이후로 도대체 뭘 하다 왔길래 그렇게 피투성이가 됐냐고 물었을 때는 씩 웃기만 하고, 감찰부에서는 또 왜 깽판쳤냐고 물었더니 이번에도 말없이 엄지만 척 치켜들었다.
“해, 햅번….”
툭툭!
[최우선 목표 / 성공적으로 완수 / 부상 / 퇴역군인 / 휴식]“쉬, 수, 수으, 쉬어어….”
“….오냐. 안 그래도 올해 뭔 마가 끼었는지 숨 돌릴 틈도 없이 고생만 했는데, 이번 기회에 푹 쉴 테니까 너도…. 너무 무리하진 마라.”
“키히힛.”
끝내 뭘 하다 이렇게 늦게까지 피투성이가 되어서 왔는지 말하지 않은 벡스. 녀석은 그리 오래 머물지도 않고, 헤죽헤죽 웃다가 나가버렸다.
“….나참. 저렇게 ‘나 뭐 있음’ 같은 분위기를 팍팍 풍겨놓고 쉬라고 하면 그게 쉬어지겠냐고. 이놈이고 저놈이고 곧 죽어도 둘러댈 줄은 몰라서는.”
저 녀석이 뭘 하고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적어도 24시간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지역을 떠돌아다니는 것은 확실하니까. 심지어 이런 난리통 속이면 사람 죽일 일도 제법 될 텐데, 내가 이렇게 되고 나서 살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면…. 그거 미치기 딱 좋은 환경이거든. 심지어 저 녀석은 칼 쓰잖아. 사람의 목숨이 스러지는 게 아주 손끝에 팍팍 와닿는.
“….생각해보니까 진짜 그냥 뒀다간 큰일 나겠는데?”
당장 지금만 해도 한바탕 일을 치르고 온 모양인데, 앞으로 저기서 더 나빠질 수도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다음에 들어오는 사람이 누구든, 그 사람한테 정보에 빠삭한 사람을 좀 불러 달라고 해야겠군. 47구역 전반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자세히 들어야겠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시스템을 이용해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글을 쓰거나 할 수는 없어도 읽을 수는 있으니까.
그렇게 나는 잠이 오지 않는 긴 밤을 수많은 사람들의 한탄을 읽으며 보냈다.
평소같이 뻘글이나 올라와서 기분전환이라도 됐으면 좋으련만.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대부분의 글은, 실종신고라는 이름의 부고(訃告)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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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뭐, 뭐? 스피드 웨건을 불러 달라고? 제수씨…. 다나 말이냐?”
당분간 만나러 오지 못할 것 같아 아침 일찍 교수를 찾아온 이안은 귀를 의심했다.
“음? 얘가 잠에서 덜 깼나. 제수씨는 뭐고 다나는 누구냐? 스피드 웨건 알잖아, 47번 대화방에 걔! 말 많은 놈! 너도 벡스 뭐하고 다니는지 모른다면서! 알아봐야 할 것 아냐! 내가 장담하는데 스피드 웨건 그 친구만큼 믿을만하고 실력 있는 정보상도 잘 없거든. 어차피 저번 게임 플레이 중에 현실에서 한번 만나기로 했으니까 딱히 부담스러워하지도 않을걸? 온 동네가 난리가 나서 죄다 47구역 돔에 몰려들고 있다니 이 근처에 있을 게 뻔하고. 설마 정보상이 남들보다 늦게 움직여서 고립되어 있지는 않겠지.”
“….그래서 눈 뜨자마자 찾는 게 스피드 웨건이라고? 이게 사랑의 힘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말하는 것을 보니 아직 2달 전 박교수의 기억이 돌아와서 ‘다나 엘리샤 히아신스’를 찾는 게 아닌, 그냥 알고 지내던 정보상 ‘스피드 웨건’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난 또 24세 동정남의 어마 무시한 집착으로 차게 식은 뇌 사이에서 그것 하나만은 기억에 남긴 줄 알았더니.”
“술 먹었냐? 아까부터 뭔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잠깐만. 내가 혹시 스피드 웨건을 만난 적이 있어? 말하는 것 보니까 딱 그런 느낌인데?”
이안은 교수의 질문에 두 달 전 출발했을 때부터 온갖 구조신호로 뒤덮인 41구역, 그 사이에서 미리 받아둔 스피드 웨건의 좌표로 찾아가 그녀를 만난 이야기를 교수에게 해주었다.
“스피드 웨건이 여자였다고?”
“그래.”
“나랑 분위기도 좋아 보였고?”
“음. 답답해 뒤질 것 같았지만 보고 있으면 뭔가…. 뭔가였지. 잠깐 있어 봐. 혹시 기억이 돌아오는 징조일 수도 있으니까 나가서 의사 좀 불러와야겠다. 어쩌면 네가 여기 있을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들지도….”
덥썩!
“….이쁘냐?”
“우라질, 지금 그게 중요하냐? 네 상태가 지금….”
“그럼 이것보다 중요한 게 더 있냐! 이뻐? 이쁘냐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새빨개져선 대답하기 전에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그의 옷을 붙잡고 늘어지는 교수. 그걸 보자 이안은 심각했던 기분도 잊고 너털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런 녀석이었지.
“크흐흐흐. 오래 묵은 동정남은 마법사가 된다더니. 정말 귀신같이 만나야 할 사람을 찾아내는군. 오냐, 불러줄 테니까 직접 보고 판단해라. 안 그래도 밖에 면회리스트에 이름 올려놨던데, 그거 순서 바꾸는 정도는 연구원들한테 말하면 충분히 해 줄 테니까.”
이안은 절박한 표정의 교수를 보며 씨익 웃었다.
“금방 얘기해서 보내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라. 나 간다. 다음에 볼 때까지 건강하게 있고.”
“테이블, 하다못해 의자라도…. 제기랄! 하이드네 의식공간처럼은 안되는 건가? 플레이 대기실에 아바타 기능 같은 것도 없어? 집에서 대충 입고 지내던 옷 그대로인 상태로는 좀….”
“…..간다고!”
“응, 어. 가라. 담에 보자.”
“우라질, 여자 하나에 친구고 나발이고 눈이 돌아가서는….”
이안은 고개를 내저으며 교수의 어깨를 툭 쳐준 다음, 로그아웃 버튼을 눌렀다. 그래, 굳이 얘기해줄 필요는 없겠지. 저 녀석이 다음에 만날 것을 확신하는 것처럼 그도 재회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띠링-!
[Player ‘DOOMgay’ 님이 로그아웃 하셨습니다.]푸쉬이익- 드르륵!
접속기가 열리고 밖에 나오자, 얼마 가지 않아 근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영 총장을 만날 수 있었다.
“얘기는 잘 하고 왔나?”
“잘 하고 말고도 없지. 안 그래도 심란한 놈한테 굳이 신경 쓰이게 할 필요가 있나.”
“외곽 격전지는 생각보다 상황이 힘들어서. 자네도 알지 않나. 이곳에 연결된 접속기를 제외하곤 박교수와 만날 수 있는 곳은 없다네. 그쪽은 그야말로 전쟁터나 다름없으니 어쩌면 아주 오래도록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럴 것이다. 45구역, 46구역 경계선에서는 녹아내린 총신을 식힐 시간이 없어 여분의 기관총을 몇 개씩 준비해놓고 쏴 갈기고, 산더미처럼 쌓인 변종의 시체에 불이 붙어 새 방어선을 구축할 정도라고 하니까. 그런 격전지에서 자주 돌아올 수는 없겠지. 어쩌면, 영영.
허나 이안은 그런 생각 따위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박교수의 저 천하태평한 태도. 그것은 자신이 밖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완전히 믿고 있기에 나올 수 있는 태도였으니까. 지금 제일 절망에 빠져있을 사람이 저렇게 각오를 다지고 있는데 이 메탈죠가 우는소리를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이안은 대답 대신 영 총장이 내민 오른손을 덥썩 잡았다.
“미안하지만, 누가 전장에서 복귀할지를 정하는 것은 나다.”
“….든든하군. 애쉬필드.”
이안은 맞잡은 총장의 손에서 뭔가 단단한 것이 그의 손으로 넘어온 것을 느꼈다. 감찰부 인장이 그려져 있는 금색 뱃지.
“전성기에 황무지 전역을 공포에 몰아넣은 그 실력을 보여줬으면 좋겠군.”
이안은 그 뱃지를 물끄러미 보다가 자신의 가슴 위에. 얼마 전에 옷가게에서 맞춘 BDSM 네 글자가 들어간 큼지막한 패치 옆에 달았다. 검은 손아귀가 BDSM 알파벳 네 글자를 움켜쥐고 있는 멋들어진 디자인. 얼마 전 벡스가 손수 바느질해 자신의 야전상의 등판에 큼지막하게 달아놓은 것의 디자인을 토대로 준비한 것이다.
“크흐흐흐…. 우리가 늘 그랬듯이, 상상하던 것 이상을 보게 될 거요, 총장.”
이안이 망설임 없는 발걸음으로 문을 열어젖히자, 그 앞에 기다리고 있던 30여 명에 가깝게 늘어난 BDSM 캐러밴의 인원들이 보였다.
원래 하늘을 찌르던 교수의 명성에, 그가 이번에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가 대대적으로 알려지면서 구름처럼 몰려온 입단 지원자 중 고르고 고른 정예 멤버들.
“어이, 부단장! 명색이 BDSM인데 이런 패치 말고 가죽 잠바라도 맞춰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데!”
“그래 맞아! 검은색에 광택이 아주 번들거리는 놈으로 말이지!”
“다 필요 없고 빨리 출발이나 합시다! 벡스님이 나가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는 게, 옆에서 보고 있다가 나까지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전투에 이골이 난 놈들이다. 당장 어디로 가는지 영상으로 확인했고, 심지어 저들 중 몇몇은 그 아비규환 속에서 벡스가 구해온 놈들이라 거기가 얼마나 끔찍한 곳인 줄 알면서도 저렇게 농담이나 하고 앉아있다니.
이안은 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린 뒤, 한쪽 구석에 앉아있는 벡스와 에젤을 향해 걸어갔다.
“….어때? 어제보다 불안정해 보이거나 힘들어 보이지는 않고?”
이안은 에젤의 물음에 ‘이쁘냐고!’를 연발하던 교수를 떠올렸다.
“하! 박교수 그 자식, 걱정은커녕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더라. 지금 머릿속에 제수씨 생각밖에 안 들어 있을걸.”
“나 참. 답다 다워. 걱정한 내가 병신 같군.”
툭툭,
“나, 그, 어….”
[출발 지연 / 불리한 전장 / 보급로 탈환 / 신속한 작전]“알았다고, 좀! 거 되게 보채네. 어차피 지금 나가면 한참 못 돌아오니까 할 일은 하고 가야지.”
이안은 마지막으로 교수가 있는 행정부 건물을 돌아본 다음, 발걸음을 돌려 도시 밖으로 향했다.
“가자고, 친구들. 병신이 된 친구도 저렇게 열심히 사는데, 사지 멀쩡한 우리가 놀고 있을 수야 없잖아?”
그날, 세 사람을 포함한 BDSM 캐러밴 30인은 끝없이 몰려드는 변종과 전투가 한창인 46구역을 향해 떠났다.
전차 한 대, 무장 트럭 두 대, 전투 차량 세 대로 이루어진 소수 정예 팀, BDSM.
“이번에는 뭐 잡으러 간답니까?”
“이틀 전에 방어선 한번 뚫렸던 74진지에서 무식하게 밀고 들어왔던 놈. 판골린(Pangolin, 천산갑) 인지 팡골인지 하고 불리는 놈이다.”
그들의 임무는 가장 불리한 전장을 지원하고, 전장 곳곳에서 쐐기 역할을 하는 2.5형, 3형 변종을 전담해 사냥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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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친구들이 전의를 다지며 전장으로 향하는 차량 안에 몸을 싣고 있을 무렵.
….꿀꺽.
교수도 그들과 같은, 어쩌면 그들보다 더 비장한 수준의 전의를 다지고 있었다.
띠링-!
[Player ‘스피드 웨건’ 님이 입장하셨습니다!]왔다. 내 오랜 지인이자, 조언자이자, 랜선 친구이며, 기억에도 없는 사이 연인 사이가 됐다고 하는 여자가!
‘이, 이안 녀석이 분위기 좋았다고 했으니까…. 연인이 맞겠지?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지? 이런 모습이 된 나를 보면 분명 울겠지? 여자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누구지? 여긴 어디지? 처음 만나면 무슨 말부터….’
화아아악!
시작하기도 전부터 패닉에 빠진 교수 앞에 작은 빛무리가 일어나고, 그 안에서 부드럽게 나타나는…..
휠체어를 타고, 부드럽게 미소 짓는 가냘픈 여성.
“….오랜만…. 이지? 교수.”
쿠웅.
“아….”
머릿속에 떠오르던 수백 가지 생각과 상념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휠체어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는 물기 어린 눈. 그 안에 담긴 깊고 처연한 감정이 마주한 눈을 통해 그의 안으로 흘러들어왔으니까.
처음 만난 상대. 서로 나눈 기억이 없음에도 되돌려받음이 분명한 감정에 교수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몰랐다.
스피드 웨건. 내 친구. 정보상. 그리고 내 기억에는 없는…. 연인.
“참으로 오랜만에…. 어…. 처음 뵙겠습니다? 다나 엘리샤 히아신스…. 스피드 웨건 양?”
어색함 속에 쥐어 짜낸 기이한 인삿말. 당장 비웃어도 할 말이 없는 이상한 인사였는데 그녀는 왜 저런 눈으로 웃어 보이고 있는 것일까.
“네가 수완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사람 마음에 감정만 남겨두고, 그렇게 영영 떠나갈지도 모른다고 하며 애를 태우더니, 원망도 할 수 없게 혼자 모두 잊어버린 주제에 처음 한다는 말이 그때의 그 인사야? 너무…. 노련한 것 아니야?”
“어…. 음…. 미안합니-”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야.”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그녀가 내게 두 팔을 벌렸다.
“이리와.”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팔.”
허리를 숙여,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어깨를 어색하게 감싸 안았다. 그녀의 팔이 부드럽게 나를 잡아당기며, 두 사람의 어깨가 맞닿았다.
“이제…. 다녀왔다고 말해 줘.”
귓가에 속삭이는 부드러운 목소리. 나는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두 달 전 내가 느끼던 감정인지, 아니면 지금 첫 만남이 이다지도 깊은 감정을 내보이는 그녀에게 내가 느끼는 감정인지 잘 구분할 수 없었다.
“다녀왔어….. 다나.”
허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오랜 감정이 되살아났든 지금 두 번째로 첫눈에 반한 것이든 그녀와의 대화에서 내가 충족감을 느낀다는 것.
“….어서 와. 보고 싶었어.”
그녀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깨달았다. 옛 기억과 관계없이,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순간이라고.
유령이나 다름없는 나의 상황. 아닌 척, 강한 척했지만 나도 모르게 속에 쌓여가던 불안감이 그녀의 따듯한 체온에 눈 녹듯 녹아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맞닿은 살결에 느껴지는 부드럽고 따듯한 온기.
약하지만, 강하게 나를 붙잡고 있는 두 팔과 넘치는 감정에 젖어드는 어깨.
풍요로운 밀밭을 닮은 그녀의 긴 머리에서 느껴지는, 마치 오랜 그리움과 같은 향기.
“늦어서…. 미안해.”
때로는 말보다 행동으로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법.
나는 그녀의 품 안에서 마침내 내가 돌아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비록 이런 꼴이지만, 돌아온 것이다. 집으로.
두 달 전 박교수씨의 심미안에 깊은 감사를.
내 연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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