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87
Chapter. 11. 마법사들의 마법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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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아아악-!
나는 누구요. 이것은 무엇이며. 여긴 어딘가.
여기? 블루라인 산맥의 중심에 위치한 추방된 엘프들의 마을이다.
나? 인계에 가장 적법한 수호자로서 위명을 떨치는 대 로-하람 교단의 정식 용사님이지.
소곤소곤-
“….용사님, 더 사납게! 억제할 수 없는 흉성이 내재된 괴물처럼! 크아앙! 우와앙!”
“아니, 루실라. 나 지금 여기 대모님인가 하는 사람이랑 종족의 역사에 남을 협의를 하러 가는 길인데….”
“인상 한번 쓸 때마다 은화가 무더기로 쏟아지는데 그딴 게 무슨 상관이에요! 자, 광대나 음유시인이 됐다 생각하고, 크아앙!”
그렇다면,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마을 밖에서 물리적으로 머리를 비워가며 애쓴 덕분에 물의 정령의 가혹한 매력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는 있었지만, 그 대가 또한 가혹했다.
———
“약속에 어긋나지만…. 조건을 하나 추가하도록 하지.”
“조건이라면?”
“이 짐승을 포박하게 해다오.”
“으음. 생각하던 것보다는 관대한 처사로구먼. 그거야 어렵지 않지. 안 그래도 우리 짐에 좋은 밧줄이-”
“아니. 그것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수행은 숲의 가지들이 알아서 행할 것이다.
———
그렇게 해서, 지금 이 꼴이 된 것이다.
금색과 은색, 또는 숲을 닮은 청명한 푸른색의 가늘고 질긴 실에 미이라처럼 감긴 내 모습.
엘프들은 마을 앞에서의 내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지, 무려 그들의 ‘머리카락’으로 나를 포박해버렸다.
깨진 머리는 다 나았지만 흘러내린 피는 여전히 얼굴과 옷에 남아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괜히 마법으로 씻었다가 간신히 진정시킨 ‘마법사다움’이 되살아날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덕분에 어머니가 아이들 머리맡에서 ‘나쁜짓하면 무서운 괴물이 이놈! 하면서 잡아간다!’ 할 때 그 괴물에 어울리는 외향이 되었고, 큰 체구에 피투성이의 강렬한 외모, 그리고 마을 앞에서의 그 기괴한 장면에 압도된 엘프들이 그들에게 있어 가장 질기고 탄력적인 밧줄, 엘프의 머리카락으로 포박한다는 웃기지도 않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인간이다.”
“우와아. 인간 처음 봤어!”
“정말 끔찍하게 생겼네? 나림께서 잡아오신 걸까?”
“어쩌면 마을을 위협하는 악수(惡獸)의 일종일 지도 몰라.”
그런 꼴로 마을에 들어온 결과는…. 보다시피.
아주 구경거리가 되셨다. 루실라야 값비싼 엘프 머리카락이 다발로 쏟아지고 있으니 신이 났지만, 나는 여기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엘프와 인간 사이에 친교를 다져야하는 입장이란 말이지. 마을을 위협하는 악수(惡獸)라니. 그거 저 결계 밖에 원시 고대 언데드랑 비슷한 취급 아냐.
“….얘들아? 아저씨는 그런 못된 사람이 아니라-”
파바바박!
“마음을 다스려라 인간! 이제 갓 25세가 넘은 어린 엘프일 뿐이다! 모욕에 대한 사과는 우리가 대신하마!”
“보, 봄의 연약한 새순을, 새벽에 맺히는 이슬을, 봄바람에 실려오는 청초한 꽃향기를 상상해 보거라! 나는 평안하다, 나는 평안하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꼭 죽이겠다면 우리를 먼저 상대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인간 신의 사절이라도 어린 엘프를 잔혹하게 도살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아니. 그냥 쳐다만 봤다고. 쳐다만! 심지어 스물 다섯이면 나보다 형이고 누님이시다 이놈들아!
엘프들은 아이들이 무슨 아동연쇄살인마의 눈앞에 노출된 것마냥 호들갑을 떨더니, 땋아올린 머리를 석둑 잘라서 나를 단단히 옭아매기 시작했다.
“광증을 가라앉히는 거다, 스스로에게 지지마!”
“종교는 없으나 너의 신을 위해 기도해주마, 인간!”
주변에서는 엘프들이 무슨 핵 연료봉 다루듯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루실라는 쌓여가는 엘프 머리카락을 보며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메모를 하고 있고. 뒤따라오는 일행들은 모르는 사람이라는 듯 엘프 마을이나 구경하면서 멀찍이 떨어져서 오고 있고.
“….시작이 반이라던데.”
이번 일도 시작부터 망쳤으니, 앞으로의 고생길이 훤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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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시 기다리도록. 대모님께 말씀드리고 올 테니.”
“잠시만, 정말 잠시만 갔다 올 테니 마음을 다잡고 있어라! 이곳에서도 난동을 부린다면 우리는 너를 죽일 수밖에….”
“아, 안 한다고! 안 해! 내가 난동을 언제 부렸다고 그래!”
끝까지 의심 가득한 눈초리의 이드라실이 떠나고, 그제야 모른 척하고 멀직이 따라오던 일행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으음. 엘프들의 마을이라. 참으로 좋은 구경을 했어. 그렇지?”
“그렇소. 세간에 알려진 엘프들의 소문과는 여러 가지로 다른 부분이 많군. 생각보다 외지인에게 적대적인 것 같지도 않고. 그 귀한 엘프의 머리카락을 그냥 질기고 튼튼한 줄로 이용하는 것은 상당한 충격이었소. 나뭇잎으로 지붕을 엮거나, 작은 반딧불 등을 매달아 두는 데도 사용되고 있더군. 엘프 머리칼 하면 최고급 활 시위로 유명하지 않소? 나는 알드리치 당신도 마법사라 희귀 재료인 엘프 머리칼에 관심이 많을 줄 알았소만?”
“나도 그게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갓 잘라낸 머리카락은 질긴 것 말고는 큰 가치는 없다고 하더라고? 알고 보니 엘프의 활은 오랜 세월 동안 계승되며 여러 엘프의 손을 거쳐야 그 진가를 드러내는 것이었어. 활시위에 걸려 끊임없이 정령과 마나에 노출되며 비로소 완성된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인간들 사이에 엘프 머리칼로 활시위를 만들면 좋다는 얘기는?”
“낭설이었던 셈이지. 정확히는 그렇게 만든 활을 엘프가 200년 이상 사용해야 좋은 활이 나오는 건데, 엘프에게서 탈취한 활이 엘프가 키워낸 나무와 머리칼로 만든 거니까 그냥 재료 문제라고 생각해 버린 거야. 아주 귀중한 지식을 얻었어. 음. 힘들여 방문한 보람이 있군.”
“식문화에 대한 얘기도 재미있었어요! 엘프들은 보다 자연적인 맛을 선호할 뿐, 고기를 못 먹거나 하는 게 아니라고. 그래서 사냥을 나가면 필요한 만큼만 잡아들인 뒤 예법에 따라 그들의 영혼을 대지의 품으로 돌려보내고 도축을 한다네요? 혹시나 해서 꺼내 본 향신료 계열 열매들을 잘 알고 있는 것을 보아 이것도 수요가 있는 것 같아요!
“귀쟁이 마음 넓다. 두 발로 걷는 생물 중에 노툼을 처음 보고 소리 지르지 않는 생물은 흔치 않다. 좋은 귀쟁이. 예쁜 귀쟁이.”
제기랄. 부럽다. 나는 사나운 엘프의 장벽에 가로막혀 대화는커녕 마을 구경도 못하고 여기까지 들어왔는데. 저쪽은 구석구석 돌아보면서 엘프들과 얘기도 하고 왔다는 소리가 아닌가?
나도 보고 싶었단 말이다! 엘프! 판타지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종족! 언뜻 눈에 스친 나무가 통째로 부풀어 오른 것 같던 집도, 커다란 나뭇가지 사이에 불규칙한 듯, 소박하게 자리 잡아 작은 반딧불 등을 켜 놓은 엘프식 노점상도, 무엇보다 소리만 들어도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게 분명한 엘프 마을 수로도 보고 싶었다고! 이렇게 괴물 취급받으면서 끌려 오는 게 아니라!
“젠장. 누구는 위험물 취급받으며 압송당했는데 그쪽은 재미 좋으셨나 봅니다?”
“음? 아아, 그렇지. 어쩔 수 없지 않나? 워낙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으니까. 자네가 미운털이 박히면 우리라도 협상에 임해야 하니 거리를 둘 수밖에.”
“그웍. 쓸모없지 않았다. 매우 희생적으로 우리를 마을에 들여보냈다. 큰 작은 인간, 미쳤다. 미쳐서 일 잘한다.”
“그래요! 비록 마법적 가치는 없는 게 판명됐지만, 그래도 바깥 사람들은 그걸 모르잖아요? 여전히 귀물인 엘프 머리칼을 한아름이나 구해주셨으니 용사님은 죄가 없지요. 암요!”
“에라이.”
“….명심하게. 만약 대모라고 불리는 엘프가 자네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면, 자네는 괴물처럼 소리를 지르며 엘프들에게 끌려나가면 되는 것이야. 그럼 내가 자네에 대한 사과와 함께 대모와 협상을 진행할 테니. 뭐, ‘이 험한 곳까지 뚫고 들어오기 위해 저런 괴물의 힘이라도 빌렸어야 했다.’ 정도면 적당한 동정표를 살 수도 있으니 오히려 좋겠군. 으으음…. 혹시 따로 생각해놓은 협상 전략이 있나? 자네라면 몇 가지 생각해 뒀을 것 같은데, 대모의 앞에 나서기 전에 미리 공유해줬으면 좋겠군.”
알드리치의 물음에 교수는 고민에 빠졌다.
협상이라. 당연히 출발할 때부터 생각해둔 방법이 있긴 했다.
우선 가장 기본적이고 정석적인 방법.
호감을 사고,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어 거래에 임하는 것이다.
‘뭘 원할지는 마을 상황을 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일단 나한테는 치트키에 가까운 아이템이 있잖아?’
지금도 품 안에 고이 잠들어 있는 귀하디 귀한 종이 쪼가리.
대주교의 직인이 대문짝만하게 찍혀있는 친필 사과문 말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엘프들은 그냥 엘프가 아니라 ‘추방된’ 엘프다. 안전한 엘프의 숲에서 쫓겨나 인간 세상에서 온갖 고초를 겪고 이곳에 자리 잡은 이들과, 그들이 낳아 가르친 후손들.
당연히 인간에 대한 원한이 있을 테니 그런 부분에서의 니즈를 맞춰주려고 했지. 엘프 숲의 엘프들이 대주교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인간과 과거를 청산하게 되면 노예사냥꾼들을 모조리 잡아 쳐넣겠다, 이런 험한 산맥이 아니라 크고 안전한 숲에 엘프들을 위한 땅을 내어주겠다, 등등.
파티원들 또한 반쪽짜리 뮤트인 나를 포함해 늑대인간, 흑마법사, 트롤 등 엘프처럼 박해받던 존재들이니 인간의 편이 아니라 순수하게 종족간 화합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줄 수도 있고. 여러모로 이쪽 방향이 편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방향에 있어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이미지]가 아주 개박살 나버렸다는 게 문제다.
내가 원하던 이미지는 ‘인간과 괴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지만 세계의 위기에 모든 종족이 하나가 되어야 함을 외치는 선한 용사님’ 이었는데.
지금 엘프들이 나를 바라보는 이미지는 ‘빛의 신이 그 힘으로 억눌러 발아래 무릎 꿇린 광증에 시달리는 괴물’ 정도였다.
안 그래도 부정적인 과거사가 오갈 회담에 끼어들기는 좀 많이 그런 상태.
설상가상으로 우리 중 가장 지혜롭고 차분한 모습을 보여주던 대타 후보 ‘오트만 보들레르’가 치명적인 약점, 물의 정령에 당하는 바람에 협상에 나설 사람이 흑마법사 알드리치 밖에 없는 것이다.
“일단…. 원하는 게 뭔지 들어보고 시작하죠. 지금 당장 어떻게 하자고 말하기는 좀 어렵네요.”
“정말 그런 식으로 되겠나? 그러다 이쪽에서 우리에게 원하는 게 없으면?”
“그땐 뭐. 아는 게 많아 보이는 놈으로 하나 납치해 가던가 해야죠 뭐.”
협상이 결렬되면 뭐. 별 수 있나. 뮤트 대공세를 막기 위해 지원군의 존재는 필수적이고, 여기서 저쪽에서 싫다고 한다고 해서 맨손으로 돌아가면 그대로 끝장이 날 판이니.
“….평화 협상?”
“에이. 추방자 아닙니까, 추방자. 우리가 잡아가서 뭐 나쁜 일 시키는 것도 아니고, 길 안내만 좀 부탁하는 건데요 뭐. 이건 오히려 좋은 일이라구요? 엘프의 숲에서 뭔 죄를 저질러서 쫓겨난 친구에게 엘프로서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니까, 노동교화 비슷한 거라고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 그건….. 인간적으로 좀….”
“달리 뾰족한 수도 없잖아요?”
“그렇다고 납치라니. 그건 뾰족하다 못해 상대의 살점을 후벼 파는 수준이잖나!”
그렇게 영양가 없는 설전을 이어나가던 중, 나무 위의 작은 집에서 그 이드라실이라는 엘프가 우리 쪽을 향해 걸어 나왔다.
“….따라와라. 대모님께서 손님을 맞이하고자 하시니.”
“누구. 일행 전부 다?”
“그래. 용사 일행 전부라고 말씀하셨다. 너를…. 포함해서.”
이드라실은 내게 여전히 거부감을 느끼는지 살짝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이렇게 위험해 보이는 생물이 ‘대모님’의 곁에 다가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이드라실의 뒤를 따라 나무가 얽힌 계단을 오르고, 덩쿨로 만든 차양으로 가려진 나무옹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가니 따듯한 조명으로 밝혀진 소박한 방이 드러났다.
“인간의 사절이라…. 참으로 드문 손님들이 오셨구나.”
“어….음….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속에도 없는 빈말은 하지 말거라. 네 꼴을 보고도 그게 정녕 환영이라 여긴다면 인간의 야만스러운 환영 풍습에 대해 재고하게 될 테니. 앉거라, 빛의 추종자들이 보낸 용사야.”
이드라실에게 손짓으로 나를 풀어주라 명령하는 대모.
기왕 이렇게 된 거 처음부터 강하게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던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저자세로 전환했다.
오래된 나무옹이 속 집에, 마치 그 나무와 한 몸이라도 된 것처럼 튀어나온 줄기에 몸을 누인 카네란의 대모.
그녀의 잘려나간 팔과 다리, 오랫동안 풀지 않은 듯한 눈가리개가 그 어떤 말보다도 강한 주장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엘프의 숲에서 추방되고, 인간 세상에 나와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어떤 생각을 품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말이다.
“자아. 빛에 눈이 먼 아이야. 어디 한번 내 앞에서 인간과 엘프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고 말해보겠느냐?”
그녀의 하나 남은 눈이 그 세월만큼이나 깊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작.
반딧불 등이 찌르륵거리는 소리 사이로, 긴장한 엘프가 나무껍질 씹는 소리만 고요히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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