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88
Chapter. 11. 마법사들의 마법사(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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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길 엘프는 인간보다 나무에 가까운 생물이라고 한다.
세계수라는 거대한 나무에서 뻗어 나온 가지.
개체의 행복보다 그들의 뿌리가 되는 세계수와 그것에 연결된 공동체의 의식을 우선시하는 관습.
몇 세기에 가까운 삶을 살기에 서두르지 않으며, 자극을 즐기지 않는 정물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존재.
그렇기에 엘프들에게 있어 변화란 드문 것이고, 한번 변화가 일어나면 그것이 그 엘프의 삶을 좌우한다고 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마치 어린 나무에 생긴 작은 생채기가 수십 년 뒤 거대한 수목의 옹이가 되듯 어떤 사건이 엘프의 삶에 새겨지는 순간 엘프는 그것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교수는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각각 헐렁하게 비어버린 오른팔과 왼 다리. 한쪽만 남은 눈 주위에는 어린 아이가 낙서한 도화지처럼 불규칙하게 얽힌 흉터가 가득했고, 그나마 남아있는 손에도 성한 손가락이 셋밖에 안 됐다.
[자아. 빛에 눈이 먼 아이야. 어디 한번 내 앞에서 인간과 엘프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고 말해보겠느냐?]그녀의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생각하면 저 상처가 누구로부터 기원했는지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인간….에게 당한 상처라고밖에 볼 수 없겠지.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당했어. 전에 노루놈이 했던 얘기를 생각해보면 엘프 노예는 너무 가혹하게 대하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고 하던데. 엘프가 저런 꼴을 당하고도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건…. 원한인가? 제 삶보다 더 우선시할 정도의 원한?’
마을의 분위기가 그리 적대적이지 않아서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여기 있었다.
‘….설득이 힘들 수도 있겠어.’
엘프는 변치 않는다. 만약 변화를 강제하고 싶다면 과거의 전환점을 깎아낼 정도의 충격을 주거나 공감을 이끌어내야 하는데…. 도대체 사람을 저 꼴로 만들어 놓은 기억을 무슨 수로 뛰어넘는단 말인가?
그렇다고 플랜B, 그러니까 일단 보쌈해가서 그놈만 설득해서 안내인으로 써먹는다는 계획도 영 시원찮아 보였다.
저 대모라는 엘프. 대충 봐도 액면가가 65살은 훌쩍 넘어 보이거든.
‘아까 내 주변에 얼쩡거리던 5~7세쯤 되어 보이던 꼬맹이들이 25살이라고 했지. 대략 액면가의 5배 정도 된다고 생각하면….. 미친. 300살이 넘은 요괴 아냐 저거. 블루라인 한가운데에 세워진 마을이 멀쩡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었군.’
아직 대단한 능력을 보여준 것도 아니고 겨우 늙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쫄 것은 아니지 않느냐- 고 물어본다면, 그건 이 동네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GG에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뭔가 한가락 하게 생긴 노인이 있으면 일단 조심하라고 한다.
그게 검사라면 이미 수십 년의 참오를 통해 세계에서 자신을 분리하는 데 성공한, ‘오러’라는 딜리트 키를 휘두르는 게임 외적 존재나 마찬가지며,
마법사라면 개똥같은 심상으로 저위계에 머무른다 하여도 수십 년 어치 마나는 쌓아 뒀을 테니 그 출력만 해도 두 단계 위의 마법사와 비슷한 수준일 것이며,
정령사의 경우 ‘서로가 서로를 통해 배운다’ 같은 느낌으로 정령사는 정령을, 정령은 정령사의 삶을 배우게 되는데, 이 관계가 오래 이어지다 보면 어떤 명령이나 지시 없이도 정령이 정령사의 생각을 읽고 반응할 정도가 된다. 거기에 그렇게 서로 한 몸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수준이 되면 정령 친화력이 급속도로 증가해서 상위 단계의 정령도 쉽게 소환할 수 있다고 하니….
300년 묵은 엘프면 먼 발치에서 정령왕이랑 통성명 정도는 할 만한 수준인 것이다.
그런 엘프 앞에서 엘프를 납치해서 튄다?
아마 근처 산맥이 통째로 일어나 우리 일행을 묻어버리는 장관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권이나 위기의식 같은 자잘한 논제로는 씨알도 안 먹힌다. 큰 거 한방. 적어도 대모를 놀라게 할 만한 큰 이슈가 필요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죄 없이 엘프라는 이유로 감금 고문을 당한 늙은 엘프를 설득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대모의 주름진 이마에 깊은 골이 추가되었다.
“고민이 많은 얼굴이로구나.”
“….사안의 무게가 그 쌓인 세월만큼 중히 무거워서. 쉽사리 입에 올릴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옛날부터 너희 종족은 그랬지. 아쉬워서 찾아왔다 한마디면 될 것을, 수백번은 더 꼬아 생각하여 길게 말하기를 좋아하고, 또 그 사이에서 말을 곡해하여 혼란에 빠지고. 가져온 생각이 있으면 그대로 풀어놓거라. 세치 혀로 현혹할 생각일랑 하지 말고.”
제기랄. 헛 수작부리면 그대로 아웃이라는 얘기다. 이렇게 되면 정말 사무적으로 메신저 역할밖에 할 수 없는데….
하지만 저쪽에서 저리 단호하게 요구하는데 무시하고 썰풀이를 시작할 수도 없는 노릇. 하는수 없이 품에서 보존마법까지 걸린 고급스러운 종이 한장을 꺼내 대모에게 내밀었다.
“….이건?”
“교단의 대주교, 빛의 대리인이라 불리는 이의 친필 서한입니다. 그는 오래된 과거를 바로잡고 모든 인류에게 다시 한 번 광명이 내리쬘 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교단이 과거를 바로잡고자 한다라…. 누구지?”
“….예?”
“네가 말한 빛의 대리인 말이다. 아셀리온? 디마티스? 아니면 코넬리우스인가?”
저건 또 누구야. 뒤에 둘은 모르겠고. 아셀리온은….. 아마 2월드에서 지팡이로 언데드 두들겨 패고 다니던 히어로 유닛 중 하나였는데?
“….세인트 노먼 이십니다.”
“노먼, 노먼이라….. 아하. 그래. 20년 전 이곳에 도착한 아이들 중 피눈물에 그 이름을 담는 아이들이 있었지. 우리 아이들이 노예상에게 쫓겨 경비대를 찾아가면, 경비대가 그들을 잡아 상인에게 넘기도록 만든 이가 그자였지 아마? 그런 이가…. 이제 와서 화해를 논한다? 감히?”
쿠드드득! 꽈드득!
드드드드드드드드!
그녀의 감정에 동조하기라도 하는 듯, 작은 나무집에 굵은 나무줄기가 자라나며 사방이 흔들리고 있었다.
“너희가 아무리 고개를 숙이고 참회를 입에 담는다 한들 이미 스러져간 가지들은 다시 새순을 피울 수 없다는 것을 왜 모른단 말이냐! 정녕 우리가 그 피로 얼룩진 과거를 잊고 다시 너희와 웃고 떠들 수 있다 생각하느냐? 그것이 ‘가장 생각이 많은 종족’이 낸 결론이라면, 우습다 못해 어이가 없구나! 엘프는 잊지 않는다! 이깟 종이 한 장, 작은 잉크 몇 방울이 힘을 가지는 것은 너희 인간들의 영토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우리에게 이런 것은 참혹한 과거를 면피하고자 하는 모욕으로밖에 보이지 않음이야!”
화르르륵!
대모의 하나 남은 손에 들려진 주교의 친필 서한은 그 봉인이 뜯기기도 전에 불에 탄 재가 되어버렸다.
‘제기랄! 어떡하지? 어떡하지! 협상은커녕 이대로 있다간 이 마을의 비료로 생을 마감하게 생겼어!’
사납게 자라나는 나무뿌리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각자 전투준비를 시작하는 일행. 그것을 보고 또 화살을 뽑아드는 엘프들.
일촉즉발의 순간, 교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끓어오르는 듯한 눈으로 자신의 과거를 말하고, 그 죄를 견딜 수 없어 하던 대주교 노먼의 얼굴이었다.
누구보다 신실하고, 그것이 신의 뜻에 반하는 죄였음 알면서도 종족 차별주의의 선두에 선 사람. 스스로가 만든 죄의식이라는 형틀에 묶여서도 꿋꿋이 앞으로 나아가길 주저하지 않던 신자.
[언젠가 내가 빛으로 돌아가 로 하람의 곁에 선다면, ‘제가 당신의 뜻에 맞는 도구로 살았습니까.’ 라고 물어볼 자신이 없음이야.]무엇이 그의 발걸음을 옮기게 만들었나. 고통 속에서도 한 점의 흔들림조차 없이. 자신이 평생 믿어온 교리에 반하는 행동을 주저없이 행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콰르르르르르!
“말하라! 너희들은 그 수많은 핏값을, 무엇으로 갚을 것이냐!”
그렇게 행한다 해서 주교의 손에 떨어지는 대가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가 겪어야 했던 과거를 다른 이들이 겪지 않게 하는 것. 오직 그것만이 주교가 바라던 대가였던 것이다.
“우리가 제시할 것은…. 미래다! 지금껏 당신들이 흘렸던 수많은 피와 눈물보다 훨씬 많은 피가 흐를 미래, 이대로 가면 변치 않을 그 세상이 바뀌게 될 것이라는 약속!”
드드드드드드!
이가 부딪힐 정도로 어마어마한 흔들림 속에서도 미동조차 없는 대모.
그녀의 외눈이 교수의 말에 이채를 띠었다.
“미래라. 미래라! 그 말은 이 자리에서 아무것도 내정되지 않은 미래를 그 대가로 내걸겠단 말이냐? 수백 년 동안 사냥당하고, 수십 년 동안 너희 빛의 맹아들로부터 고통받아온 우리에 대한 보상이,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미래’라는 공수표라고? 그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우득, 뚜두둑!
‘으으으윽!’
그녀의 노호성에 온몸이 압도되었다. 사자 앞의 토끼처럼, 그 차이를 눈으로 대중해볼 수도 없을 정도의 강자 앞에선 생명체의 본능.
‘여기서…. 여기서 쫄면 진짜 뒈진다!’
외교적 수사고 뭐고 죄다 머릿속에서 날아가버렸다. 지금 떠오르는 것은 여기서 압도되어 입을 열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과, 씁쓸하게 자신의 과거를 토로하던 대주교의 눈빛뿐.
“그러니까 그 공수표에 서명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와서 얘기하는 것 아닙니까! 당신이 말한 그 가치 없는 종이와 잉크 몇 방울! 당신 말대로 그 서한은 여기서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거꾸로 말하면 인간 세계에서는 그 편지 한장에 전쟁이 일어나고, 수십 만명의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게 할 수도 있는 힘을 가졌단 말입니다! 말 몇 마디로 인간이 엘프를 차별하게 됐으니, 말 몇마디로 그걸 되돌릴 수도 있는 거잖아! 그 간단한 사실을 직접 당해보고도 왜 모르는 거야!”
“….허황된 말이다. 이 순간을 벗어나고자 하는 면피에 불과해! 증거 있느냐? 그 말이 단순히 네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 아닌, 실재하는 현실이라는 증거가 있다면-”
콰드드득!
“증거? 그래, 증거 좋지! 눈앞에 떡하니 널려있는데! 지금 당장 여기 숨어 사는 당신들이 그 증거다! 나는 스스로의 감정과 신념에 반하는 일을, 오직 남들을 위해 여기까지 행한 남자를 내 눈으로 봤다! 지금의 당신들과 세상이 그 행동의 결과물이고!”
대주교. 그는 그저 빛을 신앙하는 일개 신자에 불과했던 사람이다. 그의 삶을 찾아온 수없이 많은 비극 속에서도 그는 신의 음성을 듣지도, 정답을 일러주는 성경의 구절도 찾지 못했다.
그렇기에 스스로 죄를 짊어지기로 한 것이리라.
자신의 죄로부터 평생 고통받을 것을 알면서도 일말의 망설임이 없이 행동에 나섰으며, 유력 귀족과 상인들을 등에 업고 교단을 무소불위의 지위에 올려놓았으며, 그 결과 귀족들의 전쟁 도구로 여겨지던 수많은 신자들을 그저 신앙하는 것만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었다.
그 모든 일들의 대가는 스스로의 신념이었다. 만민에게 평등하게 빛을 비추라는, 경전의 구절을 고치며 자신의 인생을, 믿음을 부정한 대가.
그것은 개인의 만족을 위해서 행한 일이 아니다. 오직 타인을, 그 팔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의 모든 것을 걸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잊을 수 없겠지! 그래! 나도 그거 당해봐서 안다! 잘린 횟수만 치면 그쪽보다 수백 배는 더 이쪽에 전문가라고! 복수를 이룬 지금도 내 팔을 잘라서 유리병에 담던 그 개새끼들의 얼굴이 눈에 선한데 그걸 어떻게 잊어! 잊지 마! 잊으라고 한 적도 없고, 잊으라고 해도 불가능한 거 알아!”
온몸을 바위로 내리누르는 것 같은 압박감 때문에 말이 입 주변에서 헛돌았다. 내가 제대로 목소리를 내고 있어야 할 텐데. 조금이라도 더, 확실하게 전달해야 할 텐데.
반쯤은 걷고, 반쯤은 기며 대모를 향해 접근했다. 이드라실의 화살촉이 내 머리를 향했지만 혼란에 빠진 그녀는 끝내 활시위를 놓지 못했다.
터억!
발끝을 나무 바닥에 걸쳐가며 앞으로 나온 끝에, 나는 간신히 대모의 하나 남은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외눈을 말이다.
“잊지도 말라. 그렇다고 복수를 생각하지도 말라. 그렇다면…. 이대로 살란 말이냐?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너희 단명종의 수배는 넘는 세월을 살아온 나에게. 앞으로도 이렇게 지켜만 보고 있으라고?”
“당신이 세계수의 가지들을 진정으로 아낀다면. 당신의 희생이, 앞으로의 세상을 살아갈 수 많은 엘프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줄 수도 있으니까. 적어도 이 순간이 그 바뀐 세상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으니까.”
“….건방진 인간이로고.”
드드드드드드, 드드드…. 쿠르르륵.
작은 나무집을 뒤흔들던 진동이 멈추고, 심장을 쥐어짜는 듯하던 압박감도 거짓말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참 나를 노려보던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주름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예나 지금이나. 너희 인간들은 말을 지독하게도 꼬아서 하는구나. 그냥 내 감정을 묻어두고, 앞으로 엘프들의 미래를 위해 눈 딱 감고 협조하라. 이렇게 말하면 될 것을.”
“푸하아-! 그냥 대놓고 입에 담기에는 사안이 너무 무거웠잖습니까. 길게 풀어서 말하면 듣는 사람 귀에도 잘 들어가고, 말하는 사람도 부담이 덜하니까요.”
“그래. 조금 애매하긴 하다만…. 여기서 더 하는 것도 시험 치고는 좀 과한 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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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시험…. 이라굽쇼?”
“그래. 비록 작은 마을이지만 나도 내 아래에 사람을 두고 이끄는 사람이다. 지도자로서 개인의 감정과 실리를 분별할 줄도 모르는 줄 알았더냐?”
“아니, 방금 막 집이 통째로 살아 움직이고, 눈에서 안광이랑 살기가 막 숨이 턱턱 막히게-”
“그럼 그 잘나신 로하람 교단의 용사인데 그 정도는 해야 시험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겠느냐? 그 정도에 압도당해 말도 못 하는 쭉정이를 보냈다면 교단의 의지도 겨우 그 정도라 봐도 되는 것이겠지.”
스르르륵-
대모의 텅 빈 팔과 다리에 자연스럽게 나무로 된 수족이 자라나 붙더니,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에 마주섰다.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려주랴?”
“….재미없을 것 같습니다만.”
“엘프는 쉽게 동족을 추방하지 않는다. 아무리 인간들에게 욕을 보이고, 그 아이를 배었다 하여도 어머니의 숲은 항상 자신의 가지를 그 품에 그러안지. 상처 입은 가지에도 새순이 돋는 것처럼.”
엥? 뭐야. 여기 인간에게 잡혀가서 온갖 고난을 겪은 끝에 고향에서도 더럽혀졌다고 받아주지 않은 엘프들 모임 아니었어?
“그럼, 왜….”
“우리의 의식이, 어머니 나무와 섞여들기에는 너무도 많은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란다.”
촤르르륵-
그녀가 손을 휘두르자 집의 나무줄기들이 스르륵 흩어지며, 천장과 벽이 나무의 줄기로 빨려들어갔다.
그 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수목의 꼭대기에서만 볼 수 있는 광활한 대자연의 아침. 떠오르는 햇살을 받아 고개를 드는 숲의 생명력.
좀전의 진동은 나무 아래 자리 잡은 집을 위로 끌어올리며 만들어진 진동 같았다.
“엘프는 서로의 감정과 의식을 공유하지. 우리는, 인간의 적으로, 동료로, 또 연인으로 그들과 너무 많이 얽히는 바람에 그 의식에 섞여들지 못하는 불순물이 되고 만 것이야. 그들이 아무리 우리에게 돌아오라 손짓한들, 우리가 합류하면 다른 가지들에게 인간 특유의 혼란과 불안을 선사할 것을 알고 있으니 숲을 떠나 다른 곳에 자리 잡을 수밖에.”
….뭔가 묘하게 뒷골이 얼얼했다. 이 느낌. 이 더럽게 익숙한 느낌. 영 총장의 수작에 걸려든 것을 깨달았을 때의 그 빡침과 감탄이 섞인 느낌은 설마….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그 상처들은 어디서 난 겁니까?”
“후후후. 이거 말인가? 내가 세상을 300년 가까이 주유했는데 흉터가 어디 한 군데에서 기인했겠느냐. 이 눈은…. 제국을 바로잡겠다 외치던 8왕자와 함께할 때 화살에 맞아서 이렇게 됐지. 팔은 70년 전에 데들리 나이트였나? 숯처럼 검은 언데드 기사 일곱과 맞서다 하나를 내어 주었고. 잘려나간 이 다리는 내 자랑거리지! 그 죽은 자들의 준동을 끝낸 자, 프린세스 가문의 대 영웅의 목숨 대신 이 다리 하나로 셈을 치렀거든! 참 귀여운 녀석이었는데. 인간의 삶은 그 불꽃의 밝기만큼이나 너무 빨리 타들어 간단 말이지.”
“….뭐, 그럼 그 상처들 사이에 감금이나, 고문 같은 건 없었습니까?”
“내가? 애초에 나는 내 발로 숲을 나온 엘프라네. 숲의 가지들이 걱정하지 않을 만큼의 실력이 있으니까 겨우 허락을 받을 수 있었지. 나는 내가 인간들에게 불합리한 고초를 겪었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단다, 생각이 많은 아이야?”
‘….당했다! 추방된 엘프 마을이니까, 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저게 다 인간 때문에 생긴 거라고 생각해버렸어!’
대모는 뜨악한 표정을 지은 내게 다가와, 살아있는 팔처럼 움직이는 나무 의수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실로 수십년 만에 찾아온 손님인데 대뜸 사납게 대해서 미안하군. 사과하겠네.”
“아니, 인간에 대한 원한도 없는 분이…. 저한테 왜 그러신 겁니까? 아니, 얘기만 들어보면 오히려 인간을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어이없어하는 내 말에, 대모는 굵은 흉터와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만면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야, 수십 년을 기다려온 기회인데 작은 약속으로 끝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예?”
대모는 나의 되물음에 각각 피부와 나무로 이루어진 두 팔을 드넓은 대수림을 향해 펼쳐 보였다.
“자네 입으로 분명히 말했지. ‘엘프들이 지금과 같이 의미없는 피를 흘리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라고. 품 안의 신자를 지키기 위해 개인의 감정과 신념을 토해낸 그 사제를 입에 담았으니 그 정도의 노력과 헌신을 제공하겠다는 뜻이 되겠지. 그렇지 않나? 혹여 그냥 해본 말이라고는 할 생각하지 마시게. 비록 작은 가지이긴 하나,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선 곳은 진짜 세계수의 가지를 꺾어 심어낸 곳에서 자라난 세계수의 일부이니 말이야. 그대의 말을 세계의 모든 뿌리박은 존재들이 듣고 있었네. 때로는, 말 그 자체가 힘을 가지기 마련이지.”
“!!!!”
스르르륵-
느껴졌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마나가 내 몸 구석구석에 파고들더니 흔적도 없이 잘게 쪼개져 사라지는 것이.
“….주박?”
“맹약이라고 하지. 너무 걱정하지는 말거라. 그리 큰 강제성도, 부정적인 효과도 없으니. 말 그대로 스스로에게 한 맹세에 가까운 것이야. 허나 자네가 자네 스스로도 길을 알 수 없을 정도의 혼란 속에 헤매이게 된다면…. 오늘의 맹세가 자네의 손을 살짝 잡아 끌어 줄 수도 있겠지. 아, 이것은 도로 가져가시게. 내 손에 있는 것보다 더 요긴하게 쓸 때가 있겠지. 자네 말대로, 비록 종이와 잉크 몇 방울에 불과하나 세상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니 말이야.”
화르륵!
대모의 손끝에서 불길이 일자 허공이 일렁이더니, 꼼짝없이 재가 된 줄만 알았던 대주교의 서한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많이 혼란스러워 보이니, 내 제대로 말해주지. 나, 세계수의 오래된 줄기인 엘-파르나가 세계수의 끝에 서서 맹세하니. 이곳 카네란의 가지들은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찾아온 인간의 손을 거부하지 않으리라. 언젠가 모든 대지에 차별없이 뿌리내릴 그 날을 기약하며, 광명의 용사가 세계수에 의지를 고하는 그날까지 우린 협력하겠노라.”
그녀의 말이 끝난 순간 거대한 나무의 가지 끝에 일던 바람이 그녀의 곁을 휘감는 것이 보였다. 조금 전에 내 몸에 파고들었던 것과 비슷한 감각. 저것 또한 맹약이다. 이곳의 추방당한 엘프들은, 협상을 할 것도 없이 처음부터 나와 같은 이가 그들에게 손을 내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이해가 되지도 않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인간들에게 호의적인 겁니까? 어쨌든 그들로 말미암은 변화가 당신들을 고향에서 벗어나 이런 험지에서 살게 만들었는데.”
“말하지 않았나. 엘프는 기억하는 존재라고.”
대모, 엘 파르나의 얼굴에 그리움이 담겼다.
“상처입고 원한을 품은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갔지. 그들은 그 상실의 세월만큼 어머니 나무와 공동체를 가슴 깊이 애정하게 되었으니까. 엘프가 엘프를 내쫓는 경우는 하나뿐이야. 그들의 가슴 깊은 곳에 어머니 나무보다도, 소중한 다른 가지들보다도 더 우선시하는 존재가 생겼을 때뿐.”
“….설마?”
“그래. 이곳, 카네란에서 태어난 모든 엘프들은 하프 엘프라네. 우리는 이미 가슴 깊은 곳에 인간과 같은 정열을 품고, 그 반려를 기억에 새긴 이들이란 말이지. 이제 왜 마을의 가지들이 자네들에게 그렇게 거부감 없이 대했는지 알겠나?”
장난스럽게 웃는 대모의 얼굴에, 교수는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다 이해하려 하지 말게. 슬픔도, 기쁨도. 원한도, 그리움도. 너무 복잡하게 얽혀있으니 말이야. 엘프치고는 지나칠 만큼 복잡해졌지. 인간을 사랑하게 되어 거기서 벗어날 수 없게 된 엘프들이라고만 생각해주게. 사냥꾼의 손을 피해 이런 오지에 숨어 살면서도 인간에 대한 애정을 잊지 못할 만큼 ‘고정되어버린’ 엘프들 말이야.”
지금 생각하니 저 대모라는 엘프, 엘프 같은 면이 단 하나도 없었다. 말투부터, 사고방식, 행동까지.
이미 그들은 엘프보다 인간에 더 가까워진 상태였던 것이다. 다른 어떤 종족보다도 복잡한, 인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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