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89
Chapter. 11. 마법사들의 마법사(8)
****
‘젠장. 아쉬워 죽겠네!’
히죽히죽 웃는 대모님의 얼굴을 보니 준비가 부족했다는 생각이 마구 들었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적대적일 가능성이 높은 상대를 설득하러 오다니.
‘대화방 사람들이랑 같이 플레이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어.’
대화, 설득에 있어 언변이 총이라면 정보는 총알이다.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성향, 추구하는 것, 인간관계 등 이런저런 정보를 종합하여 ‘여기를 찌르면 이런 반응을 하겠구나!’ 하고 유추한 뒤, 그 반응을 내게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적은 정보로 그런 유추를 해내는 게 내 특기이기도 하고.
그런데 지금은 내가 임기응변으로 입을 털 수 있게 해주던 집단지성 ‘47구역 대화방’ 사람들의 지원이 없다.
‘대모님 얘기만 들어도 알 수 있지. 저 엘프, 거의 1월드 끝자락부터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살아있는 전설이잖아. 보나 마나 히어로 유닛이고, 심지어 자기 입으로 [프린세스 가문의 대영웅을 구했다] 고 했거든? 그거 2월드 클리어한 레빗 프린세스 얘기일걸? 지금 내가 플레이하는 3월드가 레빗이 클리어한 2월드 시드에서 시작했으니까.’
대화방 사람들이 라이브로 보고 있었어봐라. 보나 마나 난리가 나서는 ‘저거 엘-파르나 임! 인간 좋아하는 엘프! 결혼도 인간이랑 했어!’, ‘300년 묵은 능구렁이다!’, ‘2월드 때 레빗이랑 같이 필드 돌던 언데드 믹서기임! 깝치면 죽는다!’ 하며 온갖 정보를 마구 뱉어냈겠지. 그랬으면 처음부터 저 상처가 인간 때문에 생긴 게 아니라는 것도, 인간에 대한 증오는커녕 오히려 애정이 남아있다는 것도 알고 들어갔을 것이고, 한결 여유있게 대응하며 우리 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대화를 풀어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변한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평소 하던 대로 임기응변 휘둘러치기를 하려 했으니. 빈 총 들고 전장에 나갔으면 두드려 맞는 것 말고 할 게 어디 있겠어.
‘으으으으, 내가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앞뒤 생각도 안 하고 스스로의 능력에 취해 그냥 들이받다니! 이렇게 얼간이 같을 수가 있나!’
“후후후. 불만이 많은 얼굴이로구나?”
“….여기 있는 다른 엘프들은 하프라고 쳐도, 그쪽은 순혈 엘프 아닙니까? 엘프는 거짓말 안 한다던데?”
내 불만 가득한 말에 대모는 나무 손에 턱을 괴며 말했다.
“음? 나는 거짓말을 단 한마디도 한 적이 없다만?”
“사람 좋아한다면서요! 아까는 막 ‘정녕 우리가 그 피로 얼룩진 과거를 잊고 다시 너희와 웃고 떠들 수 있다 생각하느냐!’ 그러면서 목에 핏대를 막 세우더니!”
“맞는 말이 아니냐? 이곳 카네란의 가지들이 운 좋게 인간 반려를 찾아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음은 분명하나, 그럼에도 끔찍한 일을 겪은 이들은 분명히 존재한단다. 그저 두 마음 사이에서 저울질한 끝에 그럼에도 행복한 기억을 더 소중히 여긴 이들은 이곳에 남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이 더 무거웠던 이들은 엘프의 숲으로 돌아갔을 뿐. 지금도 엘프의 숲에 가면 화살에 맞아 죽어가는 인간의 시체 앞에서 축배를 들 가지들이 많단다. 우리는 작은 카네란일 뿐, 엘프 전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지 않느냐?”
“그, 그럼 그 팔다리! 막 불편한 몸이 어쩌고 비루한 삶이 어쩌고 하더니 당장 나랑 스파링 떠도 될 만큼 쌩쌩하잖습니까!”
“오, 이런. 설마 내가 나의 출중한 능력으로 잃어버린 사지를 대체했다 하여 본신의 몸이 아닌 의수가 달린 삶이 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건 나와 비슷한 장애를 앓고 있는 이들에게 너무 가혹한 의견이 아니더냐?”
“그럼 갑자기 집을 막 우그러뜨리고 멀쩡하게 땅에 붙어있던 집을 나무 꼭대기로 끌어 올린 건-”
“여기서 보는 경치가 참 좋지 않느냐? 원래 이렇게 분위기가 좋은 곳이 맹약 빨이 더 잘 먹는 법이다.”
“아니, 그-”
“분위기. 심리적, 물리적 압박. 감추는 것이 없어도 때론 드러내는 것으로 상대를 속일 수도 있는 법이지. 생각이 많은 이들을 상대할 때는 그들에게 생각을 심어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란다.”
….사실 시험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죄다 연기고, 연출이었다는 게 감이 오긴 했다. 그저 내가 이렇게 어이없이 속았다는 것에 열 받아서 소리라도 좀 지르려고 이러고 있는 거고. 어디서 뒷담 까다 무시무시한 원시 고대 엘프님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어떡해. 지금 화낼 수 있을 때 화내둬야지.
“혹여, 그저 네 기분을 풀기 위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가지고 언성을 높이고 있다면 여기까지 하자꾸나.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이 네 목소리에 걱정하고 있으니.”
“세상에. 인간 세상에서 무슨 관심법이라도 배워온 겁니까?”
“관심법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원래 맞은 이는 때린 이보다 더 잘 기억하는 법이 아니더냐? 내가 태어난지 64년이 되던 해에 숲을 나와 200년 가까이 인간 세상을 주유하며 당할 대로 당했으니 그런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하지.”
쿠르르르르르….
벽이 다 사라지고 바닥만 남은 집이 나무 줄기 사이를 흐르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너무 고깝게 여기지 말아줬으면 좋겠구나. 우리도 네가 진정 광명의 용사로 화친을 위해 찾아왔는지, 아니면 성물을 약탈하여 우리를 속이고 단숨에 엘프 노예를 무더기로 잡아들이려는 악적인지 확인해야 했으니. 솔직히 너희 외형을 보면 그 악독한 광명 교단의 무리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으냐?”
“….뭐, 흑마법사에 트롤, 늑대인간이면 확실히 용사 일행치고는 좀 유니크하긴 합지요.”
“그들 말고. 너를 말하는 것이다. 너.”
대모의 나무로 된 손가락은 내 발치를 콕 찝어 가리키고 있었다.
시선을 내리자, 그곳에는 거무튀튀한 갑피로 뒤덮인 발과 종아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상하다. 블러드 아머인가? 위기감에 나도 모르게 시전했나? 아닌데? 마법 안 썼는데?
“뭐, 뭐여 이거!”
“음? 알고 한 것이 아니었느냐? 내가 너희를 압박하기 위해 힘을 썼을 때, 밀려나지 않기 위해 저것으로 바닥을 붙잡지 않았느냐.”
확실히, 발 앞 나무 바닥에 날카로운 손톱을 박아넣고 끌려간 듯한 자국이 남아있긴 했다.
“나는 저런 몸을 가진 이에게도 막중한 임무를 맡기는 것을 보고 정말 광명의 아이들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만. 혹여 너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냐? 그렇다면 내 당장-”
“아, 아니요! 이게 뭔지도 알고, 어떻게 된 일인지도 아는데, 좀…. 당황스러워서.”
분명 기억에 있는 형태다. 오래전 하이드가 토브룬의 마탑에서 몸의 주도권을 완전히 가져갔을 때의 붉은 변종으로서 내 몸을 변화시켰던 것과 비슷한 감각. 그리고 크기는 다르지만 밖에 내 몸이라고 누워있는 그것과 똑 닮은 형태.
“이보게 교수. 혹시 자네…. 아직도 우리에게 숨겨둔 능력이 남았나? 내 지난번 자네의 그 ‘마구 자라나는 몸’을 본 이후로 그보다 더한 충격을 받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네만…. 혹여 남은 게 있으면 미리 말이나 해줬으면 하는군. 늙은 심장에 더 무리가 가지 않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알드리치.”
“모른다니 더 걱정되는군.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힘만큼 두려운 것도 없으니 말이야.”
스르르륵- 쿵!
나는 내려오자마자 사방에서 우릴 겨냥하는 화살을 향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생각했다.
도대체 두 달 전의 내가 뭔 짓을 하고 다녔길래 이렇게 뮤트화된 몸의 감각이 익숙한 것인지.
‘하이드 녀석이랑 변신 특훈이라도 한 건가.’
어찌 됐건, 잠시 시간을 두고 알아봐야 할 거리가 생겼음은 분명했다.
****
“다리.”
….투둑.
“종아리.”
투둑. 우득.
“으으음. 기묘하군. 발가락.”
….툭.
“택도 없군. 감각은 있나?”
“에…. 단단한 껍데기에 쌓인 느낌인데, 또 촉감은 선명합디다?”
“그것참 기묘하군, 기묘해…. 그럼, 왼파-”
쑤아아아악!
우드드드득! 콰드득! 콰득! 우두두두두둑!
“-알.”
알드리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치 생각의 속도로 반응하듯 팔이 엄청난 속도로 열리며 그 안에서 근육 다발과 신경, 뼈 같은 게 우수수 튀어나오더니 크고 단단한 검은 팔을 만들어 내었다.
“확인할 필요도 없군. 다른 부분과는 비교도 안 되게 발달하여 있어. 더 커지게도 할 수 있나? 자네가 말했던, 옛날에 저도 모르게 변형시켰던 그 날처럼?”
“음, 잘 모르겠네요. 될 것도 같기는 한데…. 사실 지금도 손끝에 좀 맹한 느낌이 있거든요? 더 커지면 아예 제어가 안 될 것 같은데.”
“맹한 느낌이라. 구체적으로는?”
“어디 보자…. 오랫동안 포박당해 있으면 손끝에 피가 안 통해서 시퍼렇고 차가워지잖습니까. 딱 그런 느낌이네요.”
사각사각-
“손끝에…. 피가 통하지 않는…. 감각. 왼팔의 변화가 다른 부위에 비해 유달리 도드라짐…. 참으로 기묘하구나. 기묘하고, 또 흥미로워.”
대모와 협약을 마친 뒤, 엘프들의 안내를 따라 숙소에 들어온 나는 한숨 돌리기도 전에 알드리치에게 질문 세례를 받아야 했다.
‘자네의 몸은 뮤트의 감염인자 때문에 그렇게 변한 것이라고 했지. 혹여 그것을 억제할 수 없게 된 것은 아닌가?’
‘맨발이라. 어느새 원래 몸으로 돌아왔군. 혹시 지금 다시 한번 전처럼 몸을 바꿔볼 수 있겠나? 그 굽은 발끝과 단단하고 검은 갑피에 둘러싸인 다리로? 아니, 다른 부분도 가능한가?’
‘혹시 짐 안에 여벌 옷이 많은 이유는 이런 변화가 있을 때마다 찢어지는 옷을 계산한 것인가?’
아아, 다행이다. 그나마 마법사 둘 중 하나는 정령 증후군으로 맛탱이가 가서 봉인되어 있어서.
지금까진 잠잠했지만 알드리치 또한 흑마법사인 만큼 인간의 육체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히 영혼술사인 그는 영과 육의 연결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연구하고, 또 잘 알고 있는 이였다.
현실에서의 영향은 몰라도 시스템적인 부분에서 내 변화를 설명해주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인재는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토브룬에서 있었던 일을 살-짝, 어디서, 어쩌다 그랬는지는 모조리 잘라내고 몸이 변했던 부분만 말해주고,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이작 그놈과의 전투를 본 사람은 없으니 이 정도로 붉은 뮤트와 나를 연관 지을 수는 없겠지?’
명심하자. 지금 교단과 사람들 사이에 알려진 나는 ‘아이작의 실험체였던 교수’니까. 악명이 4천을 넘는 ‘붉은 뮤트’ 랑은 다른 사람인 것으로 알려졌으니 항상 신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무 판에 적은 내 증언과 관찰 기록, 그가 알고 있는 뮤트 감염인자에 대한 지식을 비교하던 알드리치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정보와 자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 ‘감염 인자’라는 것은 뮤트의 피를 통해 감염되며, 숙주의 몸을 잡아먹고 증식해 육체를 지배한 뒤 영혼을 변화시켜 버리는 존재로 보이는군.”
“육체를 차지해서…. 영혼을 바꾼다?”
“그래. 영과 육은 다른 것 같지만, 결국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하나의 대상이니 말이야. 영이 흔들린 자는 육체가 쇠하고, 육체가 쇠한 자는 심신이 미약해지지. 그런 의미에서 자네의 상태는, 으음…. 기묘하군. 어째 그게 반대로 진행된 것 같단 말이지. 어째 감염 인자가 영의 형태, 그러니까 자네의 심상에 따라 육체를 바꾼단 말인가.”
“…..”
그 말에, 알드리치에게는 말할 수 없는 사실이 떠올랐다.
‘감염 인자와 변종 세포. 자세히 보니 둘은 완전히 역위에 있었군.’
뮤트의 감염인자는 몸을 먼저 감염시키고, 모든 몸을 차지하여 대상의 정신을 뒤틀어 뮤트의 인격으로 활용한다.
반면 저 바깥의 변종 세포는 몸이 죽은 숙주의 기억을 파고들어, 그 정신을 바탕으로 육체를 변화시켜 사용한다.
유사하면서도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두 가지 요인.
지금 내게 일어난 변화도 그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보였다. 항상 몸을 안에서부터 쥐어짜는 듯하던 침식의 고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도, 하이드나 가능하던 육체의 질량, 부피, 형질 단위의 변화가 일부나마 가능해진 것도 밖에서 내게 일어난 변화와 그 감각을 내가 기억하고 있어서 이렇게 게임 내부의 변화로 이어진 것이다.
‘하이드 녀석이 항상 몸의 컨트롤 문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까. 녀석의 말에 따르면 나는 밖에서 그 컨트롤이라는 것에 익숙해진 상태로 접속한 상태가 되겠지.’
그 증거가 왼팔. 살짝 갑피가 도드라지거나 골격만 약간 변하는 다른 부분과 달리, 왼팔은 완벽하게 내 실제 몸과 비슷한 형태로 변하는 것은 물론 크기도 제법 늘릴 수 있었다.
47구역에서 렙터와 교전 이후 변종화된 팔에 제법 익숙해진 것이 게임 내부에서 육체를 컨트롤하는 감각으로 재현된 것이다.
쑤우욱-
우득, 우드득. 츄화악!
“출혈이 없는 것은 신기하군. 저렇게 몸이 갈라지고, 재구성되는데 말이야.”
“아, 그건 제가 따로 제 피를 잡아둬서 그런 겁니다. 처음에 종아리 갈라지면서 줄줄 새길래.”
“그래? 그러고 보니 자네는 수계 마법사 중에서도 또 특이한 걸 다루고 있었지. 여러 요인이 다면적으로 작용했군. 아주 대단해. 이건 예술에 가까운 현상이로군. 이토록 정교하게 맞물리다니!”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해체 쇼였다. 왼팔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분해되며 그 사이에서 검은 괴물의 팔이 자라났다가, 또 원래 팔로 되돌아오고.
다른 부분도 그렇게 전위적이진 않지만, 천천히 작은 틈이 벌어지며 그 안에서 비늘 같은 갑피가 자라나고.
토브룬 마탑에서 하이드가 그랬던 것처럼 막 팔이 끝없이 재생해 거대한 창이 되어 방을 가로지르고 거기에 눈알과 이빨이 달리고 하는 그 수준은 아니지만, 그 절반 정도는 뮤트 육체를 컨트롤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단, 영혼술사인 내 눈으로 보기에는 자네의 영혼 자체에 큰 결함이 생긴 것 같지는 않네. 여전히 처음 봤을 때처럼 단단하고 빛나는 형태야.”
“생긴 것 ‘같지는’ 이라면…. 변화가 있긴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전에는 자네의 영혼만 덩그러니 보였다면, 지금은 그 영혼 주위에 뭔가…. 안개같은 것이 잔뜩 끼었군. 나도 처음 보는 형태야. 뭔가 자네의 영혼을 감싸고 있네. 또 그 안에 숨어있던 하이드…. 라고 했던가? 그 작은 영혼의 기척도 매우 희미해졌군. 으으음…. 역시 기묘해. 그 어떤 영혼술에 관한 책에도 적혀있지 않은 현상이로군.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어보게. 내 이 형태를 기록해둬야 할 것 같으니.”
“어쨌건 큰 문제는 아니라는 소리니…. 다행이네요.”
“그렇다고 안심하라는 소리는 아니라네. 묘한 떨림이 있는 걸 보니 영혼이 불안정한 것은 확실하니까. 항상 침착하고, 마음을 정갈하게 다스리게.”
그렇게 말하며 알드리치가 쓴웃음을 짓는 걸 보니 내가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 소리인 모양이다. 당장 저 아래에서는 뮤트와 전면전이 한창이고, 나도 후딱 동맹 체결하고 우르르 끌고 거기에 참가해야 할 판에 심신 안정은 무슨.
“그러고 보니 다들 어디 갔습니까?”
“오트만은…. 으음…. 좀 정신이 든 것 같지만, 아직 그 구속구를 벗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스스로 말하며 방에 드러누웠고. 그 빨간머리 상인 꼬마는 특산품을 사러 갔고. 보르카와 노툼은 숲이 좋은지 산책 좀 하고 온다더군. 이곳 엘프들도 오래 기다린 끝에 찾아온 기회이니, 누굴 보낼까에 대해서 할 얘기가 많겠지.”
“….그 대모인가 하는 늙은 엘프가 와줬으면 좋겠는데.”
“아마 불가능할 걸세. 이곳 결계를 유지하고 있는 주체가 그녀인 것 같았으니 말이야. 역사책에도 등장할 정도로 대단한 정령사인 그녀가 함께해준다면 우리 일행의 앞날은 탄탄대로이겠지만, 이곳 카네란에 남은 엘프들은 얼마 못 가 마수와 언데드들에게 죽게 될걸세.”
음? 잠깐만.
“혹시 대모가 누군지 아십니까?”
“당연하지 않은가? 나도 단순히 대모라고만 들었을 때야 몰랐지만, 처음 그녀를 보자마자 알았지. 엘-파르나. 위대한 전사이자 정령사인 엘프. 120년 전에 이름을 감추고 세상에 나와 활동했으며, 본격적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것은 80년 전, 제국의 왕위를 건 스물 두명의 왕자, 왕녀간 내전이 시작됐을 때였지. 그때도, 그 여파로 제국이 휘청거리는 틈을 타 언데드가 산을 이루어 성벽을 덮치고 다니던 시절에도 그 위명이 쟁쟁하신 분이셨네. 한때 그녀의 이름 앞에 ‘섭리의 심판’ 이나 ‘골 분쇄기’, ‘흑마법사의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 같은 위명이 붙었던 시절도 있었네.”
“아니, 그걸 알고 있었으면 진작 말을 해줬어야….”
“나도 대모님이라고만 듣고 가서 보고 알았는데 말해줄 시간이 어디 있었나? 마주하자마자 자네랑 몇 마디 나누더니 아주 분기탱천해서 사방을 기운으로 옥죄고 있었는데.”
타악!
교수는 스스로의 한심함에 이마를 쳤다. 대화방 끊긴 게 문제가 아니었구나. 옆에 동료들도 다 알 정도로 유명한 히어로 유닛이었는데. 조금만 더 차분하게, 천천히 일을 진행했으면 나 혼자서 충분히 정보를 모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뭐, 별수 있나. 나도 밖에서 그 지랄이 나고 막 들어온 거라 제정신이 아니었고. 갑자기 겜하다 접속기 끄고 나가려고 했더니 [사실 당신은 의식 불명의 뇌에 백업 데이터를 연결한 겁니다. 의학적으로 사망자나 다름없지요. 허허.] 하는데 아, 그렇구나 하고 차분하게 대응하는 것도 우습잖아? 친근한 엘프 할머니한테 한대 얻어맞고 정신 차렸다 치자.’
교수는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낸 뒤, 품에서 종이를 꺼내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적기 시작했다.
“자네까지 기록할 필요는 없네만? 내가 자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분당 몇 번 눈을 깜빡이고 호흡하는지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제발 좀. 스토커도 그렇게까지는 안 해, 이 마법사야.
“이건 다른 겁니다. 나한테 필요한 거라서.”
내 눈에 보이기만 하면 녹화본이라도 방송에는 나가니까.
적어놓은 것을 신중하게, 시간을 들여 두세 번씩 눈으로 읽어준 뒤, 메모를 품 안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촤르르륵! 우득, 까드득, 아득!
“나가는가?”
“예. 어차피 엘프들이 자기들도 토의해야 할 것이 있으니 내일까지는 기다려달라고 했고. 오면서 마을 구경도 제대로 못 했는데 떠나기 전에 좀 봐두려고요. 여기서 엘프의 문화나 관습을 좀 알아두면 나중에 엘프의 숲에 가서도 써먹을 수도 있고.”
여기저기 거무튀튀한 게 올라온 몸을 원래대로 되돌린 뒤, 벗어두었던 겉옷을 몸에 걸쳤다.
“…..나가서 옷도 하나 사야겠군.”
교수는 넝마나 다름없게 된 옷을 보며 나무구멍 밖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내가 대차게 속아 넘어갔건, 몸이 뒤죽박죽이건, 밖에서는 통속의 뇌에 가까운 상태이건 간에.
어쨌든 처음 보는 엘프 마을은 아름다웠고, 싱그러운 풀 내음과 조용한 활기가 그의 눈을 즐겁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