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90
Chapter. 11. 마법사들의 마법사(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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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드 웨건. 다나 엘리샤 히아신스.
최근 그녀에겐 고민이 생겼다.
“삐빅. 대상 안-안면인식. [부정 감정 43% / 긍정36 % / 식, 식별 불가 21%]입니다. 무, 물. 물 드립니다. 주인님 수분 섭취는. 인체에 꼭 필요한, 물. 물 드립니다.”
“….하아아. 고마워 지니.”
다나는 그녀의 마지막 남은 개인 자산, 고장난 하우징 AI ‘지니’가 간신히 건네준 물컵을 받아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지고 있던 기반도, 같이 일하던 사람들도 모두 잃고 간신히 돔의 구출대를 통해 간신히 47구역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던. 그녀. 원래대로라면 다른 피난민들처럼 돔 외곽에서 서로 악다구니를 써가며 살을 에는 추위와 씨름하고 있어야 했지만, 이곳 사람들이 그녀를 특별취급해준 덕분에 이렇게 따듯한 행정부 의료 동에서, 작지만 무려 개인실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창문 밖으로 내려다 보이는 북적이는 도시와, 그 주변을 둘러싼 모닥불의 향연.
“….탑에 갇힌 공주님 같네.”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문제는 그녀가 왕자님 역할이라는 것이다. 저 0과 1로 이루어진 탑에 갇혀있는 공주님은 그녀를 여기까지 오게 해준 교수이고, 그녀는 손 하나 닿을 수 없는 현실에서 그가 밖으로 나오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을 구경해야만 하는 처지이니.
아니,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으리라. 적어도 그가 홀로 분투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게 할 생각이니까.
“어쩜….. 하나부터 열까지 이렇게 독특한 사람을 만나버렸을까.”
그녀는 약 1시간 전에 업데이트된 교수의 플레이 녹화 영상을 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유쾌하고, 제정신이 아니고, 진정성 넘치는 삶. 수형자나 다름없는 그의 상황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의 노고에 대한 보상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즐거운 마음으로 47구역 사람들과 얘기하며 시청하던 중,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교수가 바깥사람들을 위해 남긴 메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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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함.
* 지금 제국이랑 그 주변에서 활동하는 모든 히어로 유닛 리스트. 외형 및 특징, 공략 포함(사진은 반드시 포함). 2시대에서 살아남은 히어로 유닛은 에이징 프로그램으로 늙었을 때 얼굴로 부탁함.
* 커뮤니티에 돌고 있는 3월드 모든 지도. 국가, 지역 상관없이 전부. 수도부터 동네 깡촌 뒷골목까지.
* 중세 및 근현대, 현대 전쟁사에서 치열했던 전투 요약본. 기록 남은 거 전부.
* 마법사로 방송하던 사람이 남긴 영상 중 마탑에서 읽었던 책 있음. [마학의 이해]였나? 그거 스캔해둔 파일 있으면 그것도.
* 각국, 각 종족의 문화적 특징 및 역사. 있는 거 전부. 가능하면 주요 집단 위치랑 특징까지.
* [GG 맛집 기행]인가? 밥 먹고 레시피 분석만 하고 다니는 요리사 플레이어 있었음. 그 사람 영상 요리별로 나눠서.
* 3월드 주요 아이템 위치(천류제가 들박 클리어해서 별로 없는 거 알고 있다. 그냥 밝혀진 것만)
* 채산성 높은 광산
* 교역 중심지
* 자연재해 발생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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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보니 무슨 데이터 마이닝을 해달라는 수준으로 요구하긴 했다.
나도 이거 다 줄 수 없는 거 앎. 그런데 진짜 꼭 필요해서 이러는 거야.
늬들이 없으니까 내 지식에 빈 공간이 뼈저리게 느껴지더라고.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좀 부탁하자.
솔직히 그 30번 구역에서 일어난 사건, 나 아니었으면 이 인근 사람 전부 죽었다 쳐야 할 정도였다며.
갚아야지 그럼. 어차피 지금 파밍 못 나가고 돔 지하에 처박혀서 죄다 인력 발전기 굴리는 거 다 알아. 아님 공동 농장에 투입되어 있거나. 돔 영역 안에서 보호받는 생존자는 죄다 전시 보급체제에 동원되어 있을 게 뻔하니까. 그럼 멍하니 페달이나 밟을 시간에 노는 손으로 커뮤니티 좀 뒤져 줘라.
내가 나가면 크게 한턱 쏜다. 정모해, 정모. 나 이제 돈 많아.
전쟁만 아니었으면 40대 미혼 백수 인터넷 망령으로 남았을 게 분명한 내 친구들아.
너희들의 그 하해와 같이 깊고 넓은 잉여로움을 믿고 맡긴다.
# 위대하신 인류의 대 영웅이자 늬들 생명의 은인 비스무리한 존재인 – 박교수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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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흣!”
아, 정말. 꼭 봐달라는 듯 꾹꾹 눌러 쓰면서 저도 웃겨서 피식거리는 꼴이 어찌나 그 사람 다운지. 몇 번이나 돌려봤지만, 돌려볼 때마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게 어딜 봐서 절박한 부탁을 하는 사람의 태도란 말인가?
더 재미있는 것은, 같이 방송을 보던 47구역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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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루Drug해요 : 하이고, 참. 이거 사람을 이렇게 띄워 주니 대놓고 어깃장을 놓기도 그렇고….
– 뉴트리아지나 : 그렇지요, 저희가 잉여로운 것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입지요!
– 홀리 : 저…. 그거 욕 아니에요? 좋은건가?
– 노루Drug해요 : 홀리, 너는 모르겠지만 저건 그저 살아남고 돈 버는데 인생의 전부를 바치는 이 메마른 시대에 ‘풍류’를 아는 이들이라고 우릴 극찬한 것이란다. 아아, 오늘도 비생산적으로 하루를 보냈어. 이것이야 말로 우리를 동물과 구분해주는 ‘진짜’ 인간성이 아니겠어?
– Jokass : 그렇지. 수많은 커뮤니티 대화방 중에서 우리만큼 순수하게 생산성 없이 노가리만 까는 대화방도 드물지. 그 증거로 기술이 있거나 뭐라도 할 줄 아는 놈은 급조된 생산 라인으로 다 끌려갔는데, 우리 애들은 대부분 발전 라인에서 일하고 있잖아?
– 홀리 : 히히. 저는 병원에 있어서.
– 고래가난다요 : 파밍 하나는…. 귀신같이 한다…. 45구역 구석구석 내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다고…. 쉬펄…. 한 순간에 무능력자가 되다니….
– 흥안만두 : 아, 난 아님. 공군이라도 군 경력으로 쳐서 외곽 나와 있다.
– 노루Drug해요 : 우우우! 쓸데없이 유능한 자식! 47번 대화방에 있을 자격도 없다!!
– Jokass : 무능한 우리가 발에 물집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페달 밟을 때 앉아서 방아쇠나 당기는 유능한 자식! 돈도 잘 주고 밥도 잘 주겠지! 우우우! 꺼져라!
– 흥안만두 : 말도 마라. 전방에서는 아예 총신 생산설비를 차려놓고 기관총 포대를 굴린다는 소문이 진짜였어. 총성이 5분 이상 멈춰있는 시간이 없다. 예전 같으면 500만 실링은 할 거치형 중기관총이 하루에도 수십 개씩 녹아서 고철이 된다고. 여기 온 지 3일 됐는데 벌써 귀가 잘 안 들려. 그래서 기관총 사수들은 전부 손등 아래 피부에 핀 신호기를 삽입하더라고. 귀가 먹어서 명령을 못 들으니까 촉감으로 명령하는 거지. 나도 어제 시술받았음.
– Jokass : ….온 세상이 지랄이구만. 아무튼 유능하고 바쁜놈은 꺼지시고, 무능한 우리끼리라도 도와주자고. 나도 일반 공략이나 히어로 유닛 명부 정도는 접속기에 다운받아 뒀으니까.
– 노루Drug해요 : 지금까지 밝혀진 모든 히어로 유닛 호감도 언락 방법, 호감도 작에 가장 최적화된 파밍 루트 및 아이템 목록 보유. 아, 모든 히어로 유닛은 아니네. 못생긴 놈은 취급 안함.
– Jokass :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늘어놓으면 끝도 없을 텐데. 누구 하나가 총대 메고 정보를 취합해서 골라내지 않으면 활자 무더기 덤핑밖에 안 될걸? 누구 전문적인, 정보에 아주 해박한….
– 노루Drug해요 : 그래. 평소에도 이런 일을 해오고 있던….
– 하이웨이나초맨 : 교수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그런 사람- 어디 없나? 아, 나는 알 것 같은데~ 너무너무 알 것 같은데~~~
– 스피드 웨건 : ….안 그래도 제가 하려고 했어요.
– 하이웨이나초맨 : 예~~~
– 노루Drug해요 : 와! 전문인력!
– Jokass : 와! 제수씨!
– 흥안만두 : 와! 이제 음슴체 안 써서 어색한 다나 양!
– 스피드 웨건 : 말투는 전쟁 전 인터넷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그때는 게임이던 인터넷이건 여자인 것을 티 내면 달려드는 이상한 사람이 많았으니까. 전쟁 후에는 정보상으로서 제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드러내지 않았던 거고. 이제 다 들통났으니 어색하게 그럴 필요도 없잖아요?
– Jokass : 와! 심지어 존댓말! 보고 좀 배워라 노루! 글자만 봐도 참해 보이지 않냐?
– 노루Drug해요 : 조까ㅗㅗ
– 노루Drug해요 : 니놈 모가지 앞에 도끼날을 걸어두고 있으면 참(斬)해질 의향은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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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한 푼 안 되는 그냥 ‘부탁’에 저렇게 열정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아니 멸종하다시피 한 정이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열정은 열정이고, 능력은 능력.
교수는 전부 주면 알아서 한다고 했지만, 작은 도시 하나만 해도 얽힌 캐릭터며 역사, 문화, 좀도둑 집단부터 영주 세력, 그 계승권자 사이에 또 나뉘는 세력까지 요약한 것만 해도 두꺼운 책으로 두 권은 나올 수준인데 그걸 어떻게 다 준단 말인가.
교수의 영상이 올라오면 그 배경과 상황을 보고 앞으로 진행할 방향을 예측해 거기에 필요한 정보를 간추려 줘야 한다. 이것만 해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그래도 그 정도면 어떻게 할 만하긴 했을 텐데….’
문제는, GG와 현실의 시간 비율이 5 : 1이라는 것. 그쪽에서의 다섯 시간이 현실에서의 한 시간이며, 그 말은 게임에서의 하루를 기준으로 자동 업로드되는 교수의 영상이 4.8시간, 4시간 48분마다 추가로 업로드 된다는 것이다.
제한시간 288분. 그 안에 저 방대한 정보의 바다에서 필요한 정보를 예측하고, 고르고, 정리해서 넘겨줘야 한다.
아무리 다나가 이 방면에 전문가라고 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시간이다.
사람이라도 많았으면 그녀가 나서서 분업이라도 시켰겠지만 47구역 대화방 사람들만으로는 부족했다. 다들 가만히 앉아서 이것만 하는 것도 아니고. 각자 돔에서 분배한 일을 하면서 해야 하니까.
그런 문제로 고민하던 찰나에 ‘그녀’가 찾아온 것이다. 다소 당황스러운 해결책을 들고서.
똑똑똑!
“언니~!”
“다나~!”
“….들어와.”
왈칵!
그녀가 이곳 행정부 병동에 들어온 뒤로 수시로 찾아오던 그녀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그녀의 병실로 들이닥쳤다.
“와아아! 언니! 이게 다 뭐에요?”
“정리해놓은 거니까 건드리지 말아 줄래? 대화방에서 얘기했던 그거 있잖아. 교수가 필요하다고 했던 정보들. 일단 당장 쓸 수 있는, 필요한 정보들부터 정리해서 뽑아놓은 거야.”
“그걸…. 벌써 이만큼이나?”
“다들 필사적인데 나만 놀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활기찬 소녀.
홀리. 본명은 홀리 그레이스. 그녀는 마켓 플레이스의 사장인 기디온 그레이스의 금지옥엽이다.
세간에는 몸이 약해서 행정부 병동에 머무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난 이유이고, 실제로는 납치 및 암살시도가 너무 많아서 돔에서 제일 보안이 철저한 곳 중 하나인 행정부 건물에 거액의 기부금과 함께 맡겨졌다고 했다.
“홀리~? 우리 같은 나이롱 환자와 달리 다나는 진짜 몸이 약하니까, 너무 괴롭히면 금방 떠나갈지도 몰라. 안 그래도 체력이 약한 다나가 이렇게 열심히 일한 결과물을 심심하다고 망쳐버리면…. 다나가 더 무리하게 되지 않을-까?”
“!!!”
후다다닥!
“과, 과일 깎아줄까 언니? 커피? 아빠가 커피는 일하는 사람들이 마시는 거라고….”
하아아. 이 아이도 참.
“마음만 받을게.”
마음 같아선 그냥 나가줬으면 좋겠지만, 그랬다간 저 퉁방울만 한 눈에 눈물이 왈칵 차오를 테니까. 다나는 사람을 그렇게 대할 정도로 모질지는 못했다.
그래도 홀리는 괜찮은 편이었다. 조금 소란스러운 비글 한마리가 있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문제는 그 옆에 따라 들어온 부담스러울 정도로 예쁜 간호사 차림의 여자였다.
“어디보자…. 엘프 문화, 엘프 종족 공통 스킬, 현시점에서 제국의 이해 관계와 분쟁 위험지역…. 와! 짧은 시간에 많이도 찾았네?”
“놀고 있기엔 받은 게 많으니까.”
“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 많이 찾지는 못했네. 결과적으로 당장 유용할지도 모르는 정보의 절반도 정리하지 못했으니까.”
간호사라기보다는 간호사 차림의 모델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외모였다. 어떻게 자신을 가꿔야 더 빛이 날지, 다른 이들의 시선을 잡아 끌지 잘 아는 여자의 모습. 작은 얼굴에 표정도 풍부하고, 거기에 옷 위로 드러나는 굴곡도 대단한 것이 누가 봐도 반할 것 같은 생동감이 넘치는 그런 여자였다.
“음…. 중요도 순으로 분류했다면 블루 라인 산맥 몬스터 분포도는 빼는 게 좋지 않을까? 저쪽에서 엘프가 안내인으로 붙는다면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보다 훨씬 정확하게 영역의 경계로 안내해 줄 테니까. 아, 7왕자 관련 정보는 빼도 될 거야. 7왕자랑, 14왕자랑, 3왕녀였나? 3월드 초기 귀족전쟁 때 세력전에 과하게 발을 들였다가 독살당하거든. 지금 살아있는 건 1왕자가 내세운 가-짜.”
“그건…. 확실히. 그렇네요.”
화려하면서 자연스러운 외모. 오랫동안 GG를 정보로 대해온 그녀보다 GG에 대해 훨씬 깊이 있는 지식. 황무지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저 얼굴.
황무지에서 영향력만 따지면 거의 영 총장과 맞먹는, 정보상으로 잔뼈가 굵은 다나도 쉽사리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여자.
“레빗. 오늘도 그 얘기를 하러 온 거예요?”
“그럼! 업계 1위인 내가 보장한다니까! 지금 네 고민거리, 부족한 맨 파워를 단번에 채워줄 수 있을 거라 장담한다구!”
래빗 프린세스. 본명 불명. 현재로서는 1,2 월드의 가장 안정적인 클리어 시드를 가지고 있으며 명실상부하게 황무지에서 가장 이름과 얼굴이 잘 알려진 세계의 아이돌.
그녀의 병실 침대에 앉아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는 이 여자는 연간 방송 수입이 돔의 방위 예산 전체에 맞먹는다는 거물인 것이다.
도대체가 그런 사람이 왜 이런 곳에, 저런 차림으로, 저보다 열 살은 어린 소녀와 몰려다니며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걸까.
“래빗. 당신 정도면 행정부에 준하는 보안 수준을 가진 쉘터를 만들 수도 있지 않나요?”
“사설 경비대를 쓰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그중에서도 다른 마음을 먹는 녀석이 있더라구. 그런 거 신경 쓰기도 싫고. 또 보안이랑은 별개로 여기만큼 전력공급 확실하고 GG랑 서버 연결에 오차가 없는 곳이 없거든. 프로는 콤마 1초 차이로도 플레이에 큰 지장이 생기니까. 서류상으로도 돔의 지원을 받는 랭커인데, 플레이 환경 정도는 지원받을 수 있잖아.”
“그…. 옷은?”
“연구원이랑 의사들만 나다니는 행정부 건물에서 평상복 입고 다니면 눈에 확 띌 거 아냐? 그럼 구설에 오르게 되고, 래빗이 행정부 건물에 머문다는 소문이 돌고, 죽어도 좋다는 팬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와 레이저 터렛 앞에 불쌍한 팬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으으으! 안 될 일이지.”
“그건 너무 생각이 과한 게 아닐지….”
“경험담이야. 전에 내 돈으로 지었던 쉘터 12동짜리 거주지에서 툭하면 일어나던 흔한. 황무지 사람들은 마음을 기댈 곳이 잘 없잖아. 대부분 심신미약 상태이기도 하고.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우상으로, 아이돌로 자리를 잡게 되니 브레이크가 없어지더라고. 쉘터 몇 동을 날려 먹은 끝에 그냥 여기 들어와 살기로 했어. 음…. 솔직히 여기 간호사복이 예쁘게 잘 나오기도 했고. 스타일 괜찮지 않아? 이거, 살짝만 손보면 허리 라인을 예쁘게 조일 수 있어.”
그렇게 말하며 뽐내듯 잘록한 허리 라인을 가는 손끝으로 눌러보인 그녀는, 갑작스럽게 허리를 숙여 다나와 얼굴을 마주하였다.
“그래서 다나, 생각해봤어? 응? 응?”
래빗의 말에 다나의 얼굴에 고민이 어렸다. 어제, 병실에 새 손님을 만나러 왔다며 들이닥친 그녀가 다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새된 비명을 지르며 한 제안.
현 시점에서 완수가 불가능한 교수에 대한 지원을, 단박에 해결해 줄지도 모르는, 하지만 그녀로서는 너무 낯선 해결책.
“방송이라니. 그것도 제 신상을 모두 밝히고 진행하는 그런 방송이라니. 저는 그런 것에는 재능이 없어요. 말주변이 그렇게 뛰어나지도 않고, GG 플레이에 그렇게 전문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 업계 1위, 부동의 방송 랭킹 1위 래빗 프린세스가 다나를 만나자마자 꺼낸 말은 ‘혹시 방송 한번 해볼 생각 없어요?!!!’ 였던 것이다.
“쓰으으읍! 비전문가면 전문가의 말을 따르도록! 물론 내가 명석하고 기민하고 고양이처럼 날렵하면서도 치명적인 플레이를 자랑하기는 하지-만! 그것뿐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성공하지는 못했을 거야. 내가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가장 많은 공헌을 한 것은 오직 하나! 바로….”
처어억!
“나! 내가 예쁘다는 것이지! 그냥 예쁘장한 게 아니라 귀엽고 사랑스러우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지적이며 섹시한 완벽-한 여성상이니까! 신이 특별히 손수 빚어 낸듯한 아름다움! 어떤 취향이라도 맞춰줄 수 있는 완벽한 연기력! 거기에 ‘게임 잘하는 여자’ 라는 남자라면 항거 불가능한 타이틀까지! 요조숙녀부터 걸크러쉬까지 모두 섭렵 가능한 완벽한 여성이자 배우였기에 이 드넓은 황무지의 정점에 설 수 있었던 거야!”
한쪽 다리를 침대 위에 올리고, 한 손을 가슴 위에 얹은 채 선언하듯 말하던 래빗은 그대로 손을 뻗어 다나의 두 손을 잡았다.
“그런 내가 보기에, 다나 엘리샤 히아신스 씨는 그야말로 완-벽한 원석이란 말이지! 황무지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다는 유우-명 정보상! 그 정체가 이렇게 가녀리고, 차갑고 이지적인 이미지의 미녀라니! 남녀를 막론하고 자기 일에 전문적으로 임하는 모습만큼 섹시한 건 없지! 처음부터 막 연기를 하거나, 뭔가 방송이라고 대단한 것을 할 필요는 없어. 그저 다나의 있는 그대-로 행동하며 네 할 일을 하기만 하면 돼. 시청자들이 구름같이 몰려들 거라니까? 너는 그저 그 사람들한테 ‘황무지를 구한 영웅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에 대해 호소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거기에 눈물 한 방울 정도 추가해주면 더할 나위 없겠지? 음~ 로맨틱! 상상만 해도 두근거리는걸?”
이견은 받을 생각도 없다는 듯 어느새 리모컨으로 작은 드론 몇 대를 불러와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래빗.
당장 답을 주지 않으면 그대로 진행해버릴 것 같아서 다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 가정에는 중대한 오류 몇 가지가 있어요. 가정 자체가 당시 블루오션이었던 황무지 엔터테인먼트 시장에 대입한 것이기도 하고, 표본으로 쓰기에는 예시가 당신 하나 뿐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나는, 당신만큼 그렇게 예쁘지 않기도 하고….”
이 핑계 저 핑계 다 제쳐두고, 다나가 지금까지 답변을 미뤄왔던 이유.
은실을 뽑아놓은 것처럼 물결치는 부드러운 실버 블론드에 커다란 눈망울,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사슴처럼 유려한 목선, 그리고 거기서 이어지는 깊은 쇄골. 군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잘록한 허리와 그것을 부정하듯 뚜렷하게 존재감을 뽐내는 바스트와 힙.
유능한 것으로 따져도 방구석에서 전자기기에 둘러싸여 커뮤니티나 끄적거리는 게 끝인 그녀와 달리 프로 방송인으로서는 이 시대 최고의 게이머이며, 플레이어가 모든 것을 직접 해야 하는 GG인 만큼 현실에서도 단검 두 개로 변종 1개 소대는 순식간에 썰어버릴 정도로 대단한 여전사였다.
그녀도 여자인 만큼, 이 시대 미의 기준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여자가 이렇게 눈앞에 있으니 주눅이 드는 것이다. 저 생기 넘치는 아름다움을 눈에 담을 때마다 창백하고 성마른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그건 저 여자니까 가능한 거야.’ 하는 마음이 스르륵 올라오곤 했다.
[교수? 아, 지난번에 한번 봤어. 어떤 사람이 길래 그런 플레이를 하나 관심이 생겼거든. 눈이 벌개진 연구원들에게 쫓겨서 길을 잃었길래 병동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줬지~ 손도 잡아봤고~ 화장도 다르게 하고 마스크도 쓰고 있어서 그쪽은 못 알아본 것 같지만.]다나는 래빗이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한 말을 떠올릴 때마다 속에서 쓴 물이 올라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관심이 생겼다.
둘이서 뒤쫓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좁고 복잡한 골목을 뛰어다녔으며,
손도 잡았다고 했다.
래빗이 이런 그녀의 반응을 즐기는 것을 알면서도 다나는 ‘혹시 그녀가 교수에게 관심을 보인다면….’ 하는 불안한 가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물론, 여기까지는 순전히 그녀의 생각일 뿐.
다나의 기어가는 듯한 대답을 들은 홀리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우와아, 재수없어.”
“내 말이. 누구는 정말 죽도록 가꾸고 노력해서 손에 넣은 걸 천연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정작 본인은 모른다는 게 특히나 더 그렇지 않니?”
거의 과육을 반은 깎아 먹은 복숭아를 들고 오던 홀리는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쟁반을 놓더니, 옆에 걸려있던 벽거울을 낑낑거리며 가져왔다.
“자아~ 다나 언니? 잠시 여기 좀 봐줄래요?”
“홀리, 위로라면 괜찮아. 나는 그저 래빗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지, 딱히 외모에 대해 자격지심을 가지거나 한 것은-”
“얼른!!!!”
전에 없이 박력 넘치는 홀리의 모습에 다나는 그녀의 말에 따라 거울을 향해 돌아섰다.
“우선, 거울에 비친 사람을 봐요. 어떻게 생겼죠?”
어떻게 생겼긴. 항상 보던 모습 그대로지. 꾸밀 줄도 모르고, 푸석푸석하고 생기 없는 20대 초반의 여성.
“우선…. 피부가 굉장히 창백하고….”
“네에~ 만지면 묻어날 것 같이 하얗고 투명한, 정말 햇빛이라곤 한 번도 본 적 없는 공주님 같은 피부가 있구요~”
“또…. 그리 크지 않은 눈에, 얼굴도 미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어서 우산으로 써도 될 것 같은 예쁜 속눈썹에, 오똑하고 귀여운 코랑 흰 피부랑 대비돼서 훔쳐가고 싶을 만큼 예쁜 색을 발하는 앵두같은 입술도 있구요~”
“아, 음…. 여성스럽지 못하게 너무 말라서 몸매도 그다지 볼품없고….”
“와이어도 없는 병원용 속옷만 입고서도 굴곡이 또렷한 몸매에, 평생 관리라고는 해본 적도 없으면서 하늘하늘~ 여리여리한 마른 스타일도 가지고 계시구요~”
홀리가 노래하듯 그녀의 단점을 하나하나 부정해 나갈 때마다 다나의 창백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갔다.
“아유우~ 귀여워라! 다나 엘리샤 히아신스양! 당신만 모를 뿐 세상 사람은 다 아는 어어어어엄-청나게 희귀한 천연 속성 아가씨! 딱 한번만 속는 셈치고 방송 한번 켜봐. 그냥 사무적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해 GG 공략 빅데이터 수집 중이라고 하고 일만 하면 된다니까? 가끔 인사나 좀 해주고?”
“그냥…. 일하는 모습만?”
“그럼! 지금 하고 있던 것처럼, 박교수한테 보낼 자료만 정리하고 있으면 돼! 말없이 일만 하다가 정리 끝나면 방송도 꺼버리고!”
어차피 해야 하는 일. 그저 하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줄 뿐. 그뿐이면 한시적이긴 해도 정보원이 수십명 가까이 늘어난다고?
“확실히, 정보원을 모두 잃어버려 양질의 정보를 구할 수 없는 지금 협력자가 조금이라도 늘어나면 큰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다나가 그녀의 지속적인 유혹에 살짝 흔들리는 틈을 타 래빗은 재빨리 일을 진행시켰다.
“홀리! 카메라는 내가 준비할 테니까 기초화장만 좀 도와줘! 베이스는 연하게, 립은 야아악-간만 도발적이게! 느낌 알지?”
“네~언니!”
“자, 잠깐만! 내가, 내가 할 테니까….!”
갑작스럽게 몰아치는 두 사람을 피해 발버둥 쳤지만 흥분한 여고생과 일곱 살에 토끼를 맨손으로 해체한 초인 래빗의 완력을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
“자아~ 스탠바이- 큐!”
드론형 카메라 다섯대에 녹화를 알리는 빨간 불이 들어오자 싹 굳어버리는 다나를 보며 래빗은 히죽거렸다.
“어디보자…. 스피드 웨건, 음. 닉네임이 너무 건조하네. 방송 제목에 귀여운 이름을 넣어주고, 조금 자극적인 맛으로….”
래빗은 새빨개진 얼굴을 서류에 파묻은 채 어떻게든 일에 집중하려는 다나를 보고 히죽 웃었다.
띠링-!
New! [병약 미소녀 다나~♥의 GG 공식 공략집 제작 방송!]
걸크러쉬라면 진짜 해머로 두개골을 으깨는 여자가 가득한 이 시대에 흔치 않은 순수한 외모 + GG 고인물이라면 ‘누가 감히 [공식]을 입에 담는가!’ 하며 대노해서 달려들 제목.
“히히히. 으음~ 부부는 일심동체라. 래빗 프린세스님 가라사대, 두 연인이 나란히 생방송에 이름을 올린 것이 사뭇 기꺼웠다 하더라~”
시기가 좋았다.
모두가 힘든, 마치 멸망 초기와 같이 생존을 위한 노동에 하루를 바쳐야 하는 상황.
돔은 사람들이 피로와 공포 속에 무너지지 않고 생산성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오락거리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 시대의 유일한 첨단 오락거리인 방송은 당연히 1순위 운영 대상.
그 치들도 눈이 있으면 다나라는 신생 방송인이 가진 이 엄청난 잠재성을 깨닫게 되리라.
‘박교수가 나오면 어떻게 생각할까?’
오랜 인터넷 불알친구가 병약 미소녀였는데 연인이 된 그녀가 어느새 월드스타가 되었다?
싸구려 라이트노벨 같은 상황에 래빗은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래빗 프린세스. 그녀는 야망이 있는 여자였으니.
그녀는 인간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행위인 오락, 엔터테인먼트를 지배할 생각이었다.
‘언젠가, 내가 쭉쭉 클리어해나가서 GG의 서버룸 좌표를 확보하게 된다면. 단순히 좌표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모은 돈으로 만든 ’래빗 엔터테인먼트‘가 그곳에 도달할 만큼 충분한 무력을 확보해서, 게드로이츠의 게임을 운영하게 된다면….!’
행복해지고 싶은 것, 즐겁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당장 사람이 굶어 죽어나가는 마당에 오락거리가 무슨 소용이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막상 황무지 사망 원인을 살펴보면 매번 1,2위를 다투는 것이 자살이지 않은가?
사람은, 밥을 먹지 못하면 말라 죽는다.
사람은, 피가 부족해지면 죽는다.
사람은, 내일을 기대하게 할 행복이 없으면 죽는다.
그녀는 이 세 가지에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멸망한 세계의 가장 큰 행복을 퍼트리고, 지배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 시대 오락거리의 정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GG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분명 그 꿈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그녀가 이 피와 폭력의 시대에 이렇게 아름다운 외모를 타고난 것은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테니까. 적어도, 있었으면 하니까.
‘자아~ 다나양? 열심히 일해서 우리 시장을 키우는 데 이바지해 주세요~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쫓아 살도록?’
행정부의 작은 개인병실.
그곳에서 다소 엉뚱하고, 마냥 엉뚱하다기엔 또 비범한 음모가 무르익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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