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97
Chapter. 11. 마법사들의 마법사(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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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실라. 루실라 아에드란.
얘가 귀족이라….
분명 영입 동료창에는 귀족이라거나 하는 언급은 없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통 귀족NPC는 어디 가문의 누구다, 하는 설명이 반드시 붙어서 나오는데, 그런 것을 본 기억은 없었기 때문이다.
‘망할 게임 같지도 않은 GG시스템 때문이겠지.’
사실 여러 번 겪어보기도 했지만, 이 게임에서 시스템 메세지나 상태창이 가지는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퀘스트만 해도 [A도시로 가십시오.] 해서 가면 [당신은 의뢰주의 악필로 인해 의뢰서를 잘못 읽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B도시로 가십시오] 하고 퀘스트가 바뀌는 일 같은 것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니까.
GG의 시스템 메세지는 친절하게 상대의 거짓말을 판별해주거나 하는 그런 기능도 없고, 모든 사실을 다 알려주지도 않는다. 플레이어가 알 수 있음에도 놓친 정보가 있다면 그건 그대로 내버려 두고 일반적인 정보만 줄줄 뱉어내는 것. 루실라가 첫 등장에 ‘상단원 루실라’라고 소개를 해서 내가 그것을 인지했다면, 시스템은 그렇게 표기할 뿐이다. 그래서 동료창에 떡하니 올라와 있던 루실라의 상태창에도 [귀족]같은 태그가 붙지 않았던 것이고.
‘평소 같았으면 지금쯤 알림음이랑 같이 [동료 루실라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었습니다!] 같은 소리라도 나왔을 텐데. 신뢰성이 부족하긴 해도 시스템은 시스템이었는데, 이제 그마저도 없으니 내가 알아서 정리해야겠군.’
어디 보자…. 처음 만났을 때 루실라가 뭐 하고 있었더라?
복장. 상단의 짐꾼. 그것도 지위가 낮은 듯 허름하고 낡은 상단원 의상.
하는 일. 역시 상단의 짐꾼. 제법 무거워 보이는 큼지막한 등짐을 메고 있었지.
첫 등장. 로만이 모형 비공정 날릴 때 그놈 사수라고 하며 다가왔음.
‘음? 잠깐만. 사수? 허드렛일꾼이?’
“아이고야. 이미 여기서 힌트가 한번 나왔었구나. 애초에 자기 입으로 상단 행수 출신이라고 했잖아. 나이는 어려도 행수씩이나 하던 애가 왜 짐꾼을 하고 있겠냐고.”
신참을 달고 다니면서 일 가르치는 사람이면 고참, 적어도 중견 상단원으로 잔뼈가 굵은 수준은 돼야 하는데 짐꾼 같은 단순 노동이나 하고 있을 리가 없잖아. 여기서부터 이미 루실라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단서가 나와 있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빡쎄게, 세나디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모든 말을 다 의심하며 눈을 부라린 끝에 저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아챘다면? 그럼 동료로 영입됐을 때 상태창도 달랐겠지.
[루실라 아에드란 : 말단 상단원(위장)]아마 이런 식으로 표기되지 않았을까?
‘으으음…. 진짜 말단 짐꾼들이 대하던 것을 보면 귀족, 그것도 자기들 보스나 다름없는 골드가이저 가문의 직계를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은 없었지. 행수면 몰라도 말단 급, 그중에서도 신참 정도면 상행 경험이 별로 없을 테니 같이 다니던 윗사람 말고 다른 행수들은 모를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녀석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은 그 뚱뚱한 가짜 상단주정도겠고.’
큰 정보 하나가 드러나자 그 뒤에 숨어있던 사실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끌려 올라오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캐면 큰 덩어리가 쑤욱- 하고 뽑혀 올라올 느낌인데….
어디 보자.
골드 가이저 상단의 주인, 아에드란 가문의 직계 따님이자 행수인 루실라 아에드란은 정체를 숨기고 일반 짐꾼인 척 상단원으로 위장하고 상행에 나섰다.
그 상행은 아에드란 가문의 기사도 아닌, 계약된 용병들의 보호를 받으며 블루 라인을 넘는다는 리스크 옵션 200%짜리 무지막지하게 위험한 상행이다.
심지어 그런 위험한 상행에 나서는 게 베테랑도 아니고 자기네 상단 주인 가문의 아가씨 얼굴도 모를 정도로 신참이 가득한 초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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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이거 그림이 나오는데?
생각을 정리한 내 눈에 인형처럼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루실라가 들어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수레의 짐 더미 속에 파묻혀 어떻게든 성유 한 방울, 약초 한 줌이라도 더 아끼려고 꿈지럭거리던 그때의 먼지투성이 꼬맹이와는 전혀 딴판인 모습.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쏟아지는, 갈수록 늘어나는 제국 병사들의 시선.
‘….내밀한 얘기를 하기엔 좀 듣는 귀가 많군.’
나는 루실라를 불러 세우려던 몸을 그대로 오트만을 향해 돌렸다. 상황이 애매하다고 그냥 관두는 것은 보통사람이나 하는 생각이고. 나는 이래 봬도 마법사란 말이지.
“….오트만. 그 메세지 마법인가 그거, 어떻게 하는 거였죠?”
“메세지라…. 2위계 ‘도르만 발다니스의 [메세지 드롭스]’ 말인가? 그리 어렵지 않네. 소리라는 게 공기를 울려서 상대의 귀에 들어가는 건데, 이건 매질만 다르지 물로 해도 되는 거거든. 일단 제일 기본적인 방식의 수인은 지시를 가리키는 검지의 첫 마디로 ‘대상’을, 약지와 엄지를 붙여 ‘규칙준수’와 순환을 표기하고….”
오트만은 바쁜 여정 중에도 쉬는 시간마다 ‘오리진 스펠도 좋지만, 다른 마법사들의 트레이싱 스펠을 배우고 사용하는 것으로도 많은 깨달음을 얻는다.’ -는 말과 함께 이런저런 유용한 주문을 가르쳐줬는데, 이 [메세지 드롭스]도 그런 자잘한 마법 중 하나였다. 이해하기 힘들었던 다른 마법들과 달리 이건 원리 자체가 골 전도 이어폰과 상당히 유사해서 그나마 손에 붙던 마법이었는데, 그래도 고작 십몇 초 정도 유지하는 게 전부일 정도로 나는 다른 사람의 주문을 사용하는 것에 미숙한 편이었다.
‘지금은 그때랑 상황이 조금 다르다는 말이지.’
스스로 떠올린 심상을 사용하는 [오리진 스펠]과 달리 [트레이싱 스펠]은 남의 심상을 따라서 주문을 짜 올리는 것. 당연히 생판 모르는 남의 마음을 떠올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그렇기에 상대가 자신의 심리 상태를 최대한 감각적으로 표현한 ‘주문’같은 것을 외우며 어떻게든 주문을 만든이의 심상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것이다.
전에는 이게 참 안됐다. 아무리 입으로 주문을 줄줄 외우고, 정해진 약어에 따라 수인을 맺어도 얼굴도 모르는 마법사가 뭔 마음으로 이런 낯 뜨거운 헛소리를 입에 담았는지가 잘 안 떠올랐는데.
“….[메세지 드롭스].”
스르르륵- 퐁!
지금은…. 그게 너무 잘됐다. 아마 강제로 NPC화 된 영향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마법적인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것 같았다.
주문과 함께 눈앞에 떠오르는 작은 물방울은 소리없이 허공을 가로질러 루실라의 귓속으로 파고 들었다.
찰팍!
“히익!”
갑자기 귀에 찬물이 들어가자 화들짝 놀라더니,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오트만과 나를 번갈아 노려보는 루실라. 하긴, 갑자기 허공에 생겨난 물이라면 용의자가 여기 있는 물법사 둘 말고는 없지.
[아, 아. 들리냐? 네 앞에 작은 물방울이 하나 있을 거야. 들리면 그거 삼켜. 조용히 얘기 좀 하게.]귓속을 파고드는 내 목소리에 인상을 팍 찌푸린 루실라는, 주변을 의식한 듯 두리번거리더니 다소곳하게 입을 가리고 그 앞의 물방울을 삼켰다.
[윽, 차가워.] [오. 잘 들린다. 쉽네 이거.] [아으으, 느낌이 좀 이상한데요.] [귀족이라며. 메세지 마법 안 써봤어?] [아티팩트로 만들어져 있는 것만 써봤지, 직접 이렇게 마법의 대상이 된 것은 처음이에요.]메세지 마법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머리가 잘린 사람이 목구멍으로 말을 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비유가 이상한데 진짜 그런 느낌인 걸 어쩌라고. 입도 혀도 움직이지 않고 그냥 말이 전해진단 말이다.
잠시 새로운 대화법에 어색해하던 루실라는 금방 적응했는지 겉으로는 부드럽고 얌전한 귀족 영애의 얼굴을 한 채 내게 마구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으으으, 하여튼 마법사들이란! 조금만 기다렸으면 비질렌 가문의 폭신한 안락의자에 앉아서 향긋한 차와 함께 차분하게 얘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지루하고 복잡한 귀족들 간의 인사치레와 환영 파티, 사교모임 등 수많은 의례적인 행사가 끝난 다음에 말이지. 지금 당장 물어볼 수 있는데 뭐하러 그걸 기다려.]이 상태로 저 훤칠한 기사님의 에스코트를 받아서 루실라가 가버리면, 뻔하지 뭐.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하셨네 어쩌네 하면서 웃는 낯으로 서로의 속내를 떠보고, 상대의 방문 의도와 가치, 대응 수준을 두고 치열하고 귀족적인 담화가 이어지고, 타국에서 온 돈 많은 가문의 결혼적령기 귀족 여식이라는 게 밝혀지는 순간 조촐한 환영 파티에 온갖 이름 없는 귀족 남성이 들러붙어 저 꼬맹이가 마르고 닳도록 댄스 신청을 해댈 것이고.
재수 없으면 쓸데없는 방문 행사에 2박 3일도 넘게 걸린단 말이다. 난 궁금한 건 못 참는다고. 그걸 어떻게 기다려?
[어디 보자. 일단 가문의 성을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직계라면 나름 아에드란 가문, 골드 가이저 상단 내에서도 상당히 끗발이 있다는 뜻인데. 굳이 이런 위험한 상행에 직접, 그것도 평범한 인부인 척하면서까지 정체를 숨기면서 합류했단 말이지?] [….일단 사과부터 할게요. 딱히 속일 생각은 없었지만, 거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가문에서 견제가 그렇게 심하냐? 목숨 걸고 블루 라인까지, 남는 물건이라도 싸 들고 넘어와야 할 만큼?] [어, 어떻게?]갑자기 푹 찌르고 들어가는 내 말에 아가씨인 척하는 것도 잊어버렸는지 경악한 얼굴로 돌아보는 루실라.
[뻔하잖아. 옆 나라 로드릭이 24시간 전쟁 중이고 그 인근 국가들도 전쟁 준비가 한창일 텐데 산맥 너머까지 왔다 갔다 할 필요가 어딨냐. 로드릭 – 자유무역연합 – 텔드랏을 오가며 삼각 무역만 해도 돈이 무더기로 쏟아질 텐데. 은화를 눈더미처럼 굴릴 수 있는 전쟁상인 대신 이런 위험하고 복잡한 상행을 나온 것만 봐도 대충 감이 잡히지.]이건 진짜 별거 없고, 대기업 자식들이 계열사 상속받는 느낌으로만 생각해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당장 눈앞에 엄청 커다란 이권이 떨어지는 일이 있는데 굳이 소말리아 인근 해역을 넘나드는 수출입 업무 같은 것을 한다? 당연히 다음 대 후계에 더 가까운 힘 있는 형제가 제일 좋은 일을 차지하고, 맛있는 부분을 여기저기 다 뜯어먹은 다음 남은 귀퉁이나 깨작거리고 있는 판국인 것이다.
‘심지어 텔드랏은 비옥한 곡창지대로 유명한 국가. 전시상황임을 생각하면 국토의 대부분이 불타버린 로드릭에 보급을 전담할 가능성도 높지. 아마 로드릭은 국왕의 홀과 왕관까지 싹다 팔아넘길 만큼 절박한 상태인데 식량 무역이 아니라 제국과 사치품 교역이라니.’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시기에 굳이 리스크를 무릅쓰고 여기까지 나다닐 이유가 없지. 적어도 바보는 아닌 것으로 보이니까 남은 건 하나. 세력 두둑한 형제님들에게 오지게 두들겨 맞고 마지막 남은 자금과 연줄을 박박 긁어모아서 크게 한탕 하려는 거 아냐. 맞지?]내 말에, 인형처럼 앉아있던 루실라가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마치 ‘뭐 하는 인간이야 이거?’ 같은 느낌으로.
[….용사님은 정말, 상인을 하셨으면 대성하셨겠네요.]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던 루실라는 그 말로 내 추측이 들어맞았음을 시인했다.
[정확해요. 제 이름은 루실라 아에드란, 아에드란 가문의 7남 4녀 중 10번째 자식이며, 주류 및 귀금속 거래를 담당하는 상행의 행수를 맡고 있어요.] [주류 및 귀금속이라…. 적당한데? 텔드랏에서 제일 유명한 밀과 사탕수수 쪽에 파이가 없는 건 아쉽지만, 귀금속은 언제나 안정적인 시장이고, 주류도 곡물에서 파생되는 상품이라 텔드랏 산 맥주나 증류주는 상당히 고급품으로 취급되니까. 처음 봤을 때처럼 거지꼴로 위험한 상행에 나다닐 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제가 가진 바 능력이 너무 출중한 탓이죠 뭐.]여전히 밖의 제국 사람들을 향해서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하지만 속으로는 세상 다 산 늙은이 같은 한숨을 내쉬며 루실라는 말했다.
[원래도 먹음직스러운 주류 시장을 제가 정말 끝내주게 키워냈거든요.] [잘난 척은…. 뭘 했길래?] [제국의 ‘붉은 바위턱 드워프’들과 맥주 제공 협약을 맺었어요.] [아, 죄송. 충분히 잘나셨네. 음. 그 정도면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녀도 되지.]빈말이 아니다. 드워프는 물이랑 밥 없이는 살아도 맥주 없이는 못 사는 종족이니까. 드워프 부족에게 맥주를 전속으로 대는 계약을 성사시켰다는 것은 맥주를 재고 걱정 없이 능력 되는 데로 생산해내도 된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심지어 ‘붉은 바위턱’ 이면 철 광맥이 있는 곳에 자리 잡은 상당히 큰 규모의 부족.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골드가이저 상단에서도 제법 뜻깊은 거래였을 것이다.
[그럼. 잘했는데 왜 나가리가 된 거야?] [그게…. 제가 가진 바 세력에 비해서 너무 큰 이권을 움직이게 됐거든요. 움직이는 돈이 커지다 보니 큰 오라버니나 언니들이 제 권리를 탐내기 시작하고, 저도 나름대로 버티긴 했지만 갑자기 전쟁이 터지면서….] [가문의 이름으로 홀라당 넘어갔군. 국가 간 전쟁상인 권한을 얻어낸 놈의 손에. 맞지?] [….네. 붉은 바위턱 부족은 질 좋은 강철을 뽑아내기로 유명한 드워프니까요. 아에드란 가문은 모든 일이 돈의 논리로 움직이는 곳이니 보급 전매권을 가진 둘째 오라버니의 발언에 힘이 실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어린 나이에 손끝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노력해서 키운 제 상단은 오라버니 손에 넘어가고, 같이 일하던 사람들도 협박, 혹은 회유에 넘어가 다 흩어져버리고. 그렇게 손발 다 잘리고 ‘할 만큼 했어. 내가 졌네.’ 하고 포기하고 있는 상황에서….!]훽!
“아버지가 몇 년 만에 저녁 식사 자리에 부르시더니, 시집갈 준비나 하라는 거에요! 그것도 멀리 떨어진 타국, 자유무역 연합의 나이 먹은 60대 늙은이한테!”
[야! 입! 너 지금 말!] [….아차!]감정이 북받쳤는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버린 루실라. 갑작스러운 소란에 앞서 나가던 기사가 이쪽을 돌아보고, 순식간에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부드럽게 손을 흔들어 보인 루실라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완전히 다음 대 가주 승계권에서 멀어졌다 생각하신 아버지가 저를 정략결혼으로 팔아넘기려고 했던 거에요. 이권을 다 빼앗겼으니 마지막으로 그 몸뚱이라도 팔아서 이익을 챙기겠다는 뜻으로.] [이런. 생각보다 굉장히…. 귀족 아가씨 같은 이유였잖아? 결국 결혼하기 싫어서 가문에서 도망쳤다는 소리네?]탱!
아얏. 저 녀석, 왜 애꿎은 냄비는 던지고 난리야.
[이이이익! 이건 자존심의 문제라구요! 아무리 둘째 오라버니한테 털렸어도 내가 루실라 아에드란인데! 그 먼 드워프 마을까지 찾아가 내가 맥주통인지 사람인지도 모를 정도로 술을 들이부어 가며 걸어 다니는 수염 달린 돌덩이 같은 인간들이랑 친구 먹고! 그렇게 성사시킨 계약을 폭포수처럼 침을 질질 흘리며 빼앗아 가려는 제국 귀족한테서 악착같이 지켜서 당당히 골드 가이저의 이름에 올린 게 난데! 겨우 열다섯 살에 그런 위업을 달성한 위대한 상인을 겨우 늙은이 첩실로 팔아먹는다고요! 그건 ‘손해’ 잖아! 아무리 가주 승계권이 중요해도 그렇지, 경쟁자라고 해도 그런 식으로 소모해버리다니! 그건 골드 가이저의 방식이 아니야!]씨익, 씨익!
메세지 마법으로 격한 푸념을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루실라. 녀석은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더니, 이내 차분한 어조로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제 마지막 남은 패물과 개인 자산을 모두 끌어모아서 최후의 상행을 나선 거예요. 결혼 얘기를 꺼낸 이후로 부쩍 심해진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서, 이렇게 짐꾼인 척하면서까지 몰래.] [그렇게 된 일이었구먼. 그럼 그 뚱뚱한 상단주, 뭐였더라? 겔드 였나? 겔드 프라우스? 그 사람은….] [프라우스 아저씨는 제가 처음 장사를 배울 때부터 저를 가르쳐주시고, 또 많이 도와주신 분이셔요. 다른 사람들이 다 제 곁을 떠날 때도 아저씨는 떠나지 않으셨고, 이렇게 위험한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셨죠. 죄송해요. 블루라인을 완전히 넘어서 이번 상행에 나선 사람 중 아무도 텔드랏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될 때까지는 제 정체가 밝혀져서는 안 되는 상황이라, 부득이하게 용사님 일행을 속이고 말았어요.] [흠…. 그렇단 말이지.]납득이 가는 이유다. 아마 그 둘째 오라버니라는 녀석은 거의 가문의 후계자 자리에 근접했겠지. 그놈 입장에서는 딱 봐도 보통이 아닌 것 같은 이 코딱지만한 여동생이 거슬렸고, 상인 특유의 편집증적인 성격으로 변수를 제거하려 했던 것이고. 아마 가문의 사람들한테 ‘도망가는 아가씨에 대해서 보고하면 20만 실링’ 같은 식의 포상도 걸어놨을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그 겔드 프라우스라는 행수가 꾸리는 장거리 교역으로 위장해서, 아직 가문 내 세력싸움에 크게 발을 들이지 않은 신참들과 돈으로 살 수 있는 용병으로만 꾸린 상행을 강행한 것이고.
[그럼 로만도 네가 뽑았다는 뜻이네?] [프라우스 아저씨한테 부탁해서요. 정말 길가에 금덩이가 굴러가는 것처럼 보여서 급박한 와중에도 도저히 두고 갈 수가 없더라구요. 제가 사수로 들어가서 하나부터 가르치면서 제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었죠.] [엘프 마을에서 그렇게 기를 쓰고 물건을 확보한 것은….] [….솔직히 말하면, 제가 급하게 끌어모은 교역품으로는 이만큼의 리스크를 짊어진 것에 대비해 충분한 이득을 볼 수 없는 상황이라.]흠. 그렇게 된 사연이었군.
‘….히어로 유닛일까?’
숨어있던 사연이 드러났으니 뭔가 새로 드러났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상태창을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알 수 없는 노릇. 하지만 지금 내 상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인물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게 의문이 풀려서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던 찰나에, 갑자기 번개처럼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히어로 유닛이랑 골드 가이저 하니까 떠오르는 그놈.
‘가만있어봐. 그때 로만이 나를 알아봐 준 상단주님에게 충성이 어쩌고, 은혜가 어쩌고 하는 소리를 한 것을 보면 이미 루실라 밑으로 들어간 것은 확정된 것 같은데. 그럼 대충 골드 가이저가 자리 잡으면 로만이 떡상하는 게 아니라, 얘가 커야 된다는 소리네? 심지어 비공정이면 판을 통째로 엎어버릴 수준의 조커 카드 아냐?’
이권은 가문의 힘으로 뺏으면 된다지만. 사람은? 말 안 듣는 사람은?
로만은 마법사, 그것도 자기 힘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할 정도로 고집있는 마법사다. 그런 놈들은 한번 자기 입으로 했던 말을 죽어도 번복하지 않는단 말이다.
문자 그대로, ‘죽어도’.
“음….”
잠깐 고민을 하며 턱을 쓰다듬고 있자니, 고해성사라도 마친 양 풀 죽은 표정으로 내 쪽을 흘끗거리는 루실라가 보였다. 그래, 자기 할 말은 다 했으니 이제 처분을 기다리겠다, 이런 뜻이지?
[….녀석, 쫄기는.] [그 말은….?] [신분 속인 것 가지고 크게 탓 안 할 테니까, 담요에 오줌 지린 강아지마냥 그런 표정하고 있지 말라고.]풀 죽어있던 루실라의 얼굴이 만개하는 꽃봉오리처럼 화아악 피어났다.
[그럼, 도와주시는 거예요?] [음? 뭔 헛소리야. 도와주긴 누가 도와줘.]“엑?”
피어났다….가, 순식간에 다시 가라앉았다.
요것 봐라. 어디서 감성팔이로 날로 먹으려 들어?
[계약의 주체가 달라졌는데 계약서를 다시 쓰셔야지. 전에는 그냥 ‘산맥 넘어와서 골드 가이저 사람들이랑 서로 도움될 테니 같이 다니자-’ 정도의 구두 계약이었는데, 상행의 주인이 눈앞에 계시면 얘기가 다르잖아? 우리, 서로에게 뭘 주고받을 수 있는지 차근차근 얘기해보지 않을래?] [비, 빛을 모시는 로 하람의 용사라면서! 만민을 평등하게 비추는 자비의 뜻은 어디다 팔아먹고!] [지금 팔아먹는 중이잖아? 너한테. 용사님다운 자비로운 도움을 바라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셔야지.]어차피 폭풍의 언덕까지 가려면 제국은 가로질러야 하고, 생판 얼굴도 못 본 귀족님들의 영지를 참 많이도 지나야 할 테니.
딱 봐도 제국의 여러 가문, 상인들과 커넥션이 있어 보이는 루실라 정도면 충분히 쓸만한 동료였다.
다각 다각 다각
“레이디 루실라, 어디 편찮으신 부분이라도?”
[아니,]“아니, 음, 그게, 어….”
“….원행에 많이 지친 모양입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레이 라인을 벗어나 저희 가문의 영지에 들어서니 그때까지만 참아주시길.”
결국 인상을 잔뜩 찌푸린 루실라의 표정을 본 기사가 다가오는 바람에 우리의 담화는 그 정도에서 마무리되었다.
[으으으, 쫌생이!] [애송이.]으음.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서 화가 난 것 같지만, 절대 싫다고는 말 안 하는군. 미안하지만 우리 로망 가챠맨을 무지성으로 마구 키워서 4월드 슈퍼캐리를 하기 위해서는 네 지원이 꼭 필요하단다, 꼬맹아. 그놈 성격상 돈이 제공되기 시작하면 골드 가이저 기둥뿌리를 뽑아먹을 정도로 써댈 텐데, 지금부터라도 그때 아쉬워할 일 없이 계약으로 꽉 잡아둬야지.
[크흠. 교수 자네는…. 몇 번을 봐도 정말 나쁜 놈 같구만….] [어? 오트만님? 들었습니까?] [물방울을 그렇게 떨어대는데 듣기 싫어도 안 들릴 리가 있겠나.]교수는 고개를 흔들어대는 오트만을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저 멀리, 한눈에 봐도 경계가 삼엄한 성문과 튼튼한 성벽, 그 위에 휘날리는 머리 셋 달린 사자의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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