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98
Chapter. 11. 마법사들의 마법사(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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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질렌 가(家).
대대로 제국 동부에 위치한 시그필룬드 시(市)를 다스려온 제국의 유서 깊은 가문으로 블루라인 산맥과 인접해 있어 포화된 산맥에서 밀려 나오는 몬스터의 공습에 주기적으로 시달리고 있으며, 그 때문에 몬스터의 마석과 마력이 짙은 부산물, 그리고 경비대의 높은 사망률로 유명하다.
이렇듯 세금을 영주가 꼬불치지 못하고 영지에 재투자해야 한다는 특성 때문에 중앙 정권 진출은 꿈도 못 꾸던 지방의 귀족이었으나, 70년 전 대규모 언데드 사태로 인해 그 이름을 드높이게 된다.
매일같이 블루라인 산맥의 마수와 싸우며 단련된 정병들의 힘은 언데드들에게도 똑같이 통용됐던 것.
사방에서 몰아치는 언데드에 거의 모든 국경 전선이 무너져내릴 무렵, 비질렌 가문의 시그필룬드 시는 꿋꿋하게 그 자리에서 버텨내는 데 성공하였으며 제국은 전선이 유지된 동부를 기반으로 언데드를 몰아내게 된다.
허나 사방이 무너지는 상황에 홀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그만큼의 희생 없이는 불가능한 일. 이후 전쟁영웅 ‘대족장 마그나우카’에 의한 영혼 부름 행사에서 비질렌 가문과 시그필룬드 시의 병사들 이름을 부르는 데만 4시간이 넘게 걸릴 정도로 시의 거의 모든 인원이 수성을 위해 목숨을 던졌으며, 이들의 희생과 위업을 높이 산 아그단 3세는 많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질렌 가문에 변경백의 지위를 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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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합니다. 현 비질렌 가문의 가주를 맡고 계시는 알레시오 비질렌 변경백님은 근방의 백성과 귀족을 더불어 그 누구 하나 흠잡는 이가 없을 정도로 훌륭한, 모시는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주군이시며….”
“그렇군요.”
“또한 험난한 변경의 군사들이 헛되이 목숨을 잃지 않게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비록 제가 기사 아카데미 ‘차석’이라는 보잘것없는 성적으로 이수했다고는 하나, 이런 백작님의 노고를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기 위해 저 또한 훈련의 교관으로 참석하여….”
“와! 별처럼 많은 제국의 기사들이 모여드는 기사 아카데미에서 차석이라니! 겸손이 지나치시네요!”
“큼, 크흠! 딱히 대단할 것도 없습니다. 또, 비록 제가 가문의 승계권에서는 거리가 있다고는 하나, 형님을 도와 항상 위기에 노출되어있는 영지를 수호하는 중책을 맡고 있어 다른 귀족 가문에 비해 승계권과 상관없이 그 지위의 중요성이….”
“아, 아하하….”
‘대단할 것도 없기는. 아주 입이 귀에 걸렸구만 그냥.’
끝없이 이어지는 기사의 말에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쓰며 반응해주는 루실라.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건지, 루실라의 반응이 좋아서 그런지 기사는 좀처럼 루실라의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저건…. 나름의 어필이라고 봐도 되겠지?’
울창한 숲의 나무가 듬성해지더니, 어느 순간 시야가 확 트이며 개활지와 그 너머의 커다란 성벽이 나타난 것이 몇 분 전.
기사 데미카스는 숲의 경계선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목책을 지나자 투구를 벗더니, 살짝 땀에 젖은 금발 곱슬머리를 쓸어넘기며 그대로 말의 속도를 줄여 내가 끌고 있는 수레와 속도를 맞추며 대뜸 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데미카스의 행동이 딱히 어색한 것은 아니었다. 사전에 약속은 없었지만 어쨌든 루실라는 비질렌 영지를 방문한 타국의 귀족. 가문의 기사로서 에스코트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적절한 예법을 배운 기사라면 영지를 방문한 손님이 여로에 무료하지 않게 가벼운 주제의 담소를 나누거나 영지를 소개하는 등의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사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사교계의 여러 자리에서 자신의 무용담을 맛깔나게 풀어놓는 능력이었으며, 아카데미 수료 필수과목에도 화술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으니 딱히 이 녀석이 수다스럽다고 할 정도는 아닌 것이다.
문제는 이 데미카스라는 놈이 입에 담은 주제에 있었다.
‘묘하게 지 자랑 일색에다, 가문이 제국에서 가지는 위치와 현 상황, 또 그 안에서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지위까지 아주 골고루 풀어내고 있군.’
현대판으로 보면 ‘우리 아버지가 부장검사 출신이고, 요즘 집안에서 이런 사업을 하고 있으며 나도 변호사 개업에 집도 있고 차도 있고 모아놓은 돈도 있다.’ 수준으로 아주 대놓고 자기 어필을 하고 있는 것.
바로 옆에 나와 오트만을 비롯해 온갖 특색있는 일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남정네들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루실라랑 얘기하는 것만 봐도 그림이 나왔다.
이 데미카스라는 기사, 루실라에게 관심이 아-주 많다.
“와아아. 그렇구나아….”
“하하하하. 비록 저희 영지가 전란에 시달리는 곳이라지만 그렇다고 마냥 삭막한 곳은 아닙니다. 혹여 지나치게 바쁘지 않으시다면 영지를 좀 안내해 드리고 싶군요. 레이디 루실라에게 보여 드리고 싶은 곳이 많습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어필하는 기사에게 시종일관 웃는 낯으로 맞장구쳐주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루실라.
하지만 그녀의 속내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좀 달랐다.
메세지 마법을 통해 들리는 짜증 가득한 목소리. 이 녀석, 겉으로는 하하호호 하는 주제에 속으로는 아주 귀가 아플 정도로 기사를 씹고 있었다.
[대충 말하는 것 보니까 서로 아는 눈치던데. 전에도 이런 적 있어?] [이렇게까지는 아니지만…. 살짝? 전에도 상행 때문에 비질렌 가문의 영지를 방문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한번 안면을 트긴 했지만 이런 식의 교류는 눈곱만큼도 없었어요. 저돌적인 것도 정도가 있지, 차라리 대놓고 마음을 전했으면 모르겠는데 눈도 맞기 전에 가문이랑 조건부터 얘기하는 건 또 뭐람? 으으으, 징그러워! 수인족도 아니고 갑자기 메이팅 시즌이라도 찾아온 거야 뭐야!]피식!
[너, 그거 종족 차별 발언이다.]번식기라니. 흥분한 루실라의 단어 선택에 꾹 참고 있던 웃음이 새어 나오던 것도 잠시, 갑자기 저 변경백 가문의 차남이 태도를 바꾼 이유가 떠올랐다.
[번식기라…. 어쩌면 진짜 그럴 수도 있겠는데?] [꺄아아악! 망측하게 무슨 소리에요! 다 큰 숙녀 앞에서! 그럼 나이트 데미카스가 그, 그런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는….!] [네가 먼저 말해놓고 망측은 무슨. 그런 의미가 아니라, 네가 찾아온 시기가 저쪽에서 오해하기 딱 좋은 때였다는 뜻이야.] [제가…. 찾아온 시기요?] [너 집에서 혼담이 나온 다음 뛰쳐나온 거잖아. 그것도 네 앞에서만 얘기한 게 아니라, 상대가 있을 정도로 사교계에 공식적으로 알려진 다음에.] [….잠깐만. 혼담? 사교계? 서, 설마아아!!!!]쩌적!
아이고, 표정 관리 안 되는 것 봐라. 아주 백지장마냥 하얗게 질렸구만.
[그래 이 녀석아. 너, 신행(新行) 나온 귀족 여식으로 착각 당한 거야.] [으아아! ^%;$#&**;아아아!!! 마, 말도 안 돼! 내가 왜, 왜 그런 오해를….!] [고맙다 루실. 덕분에 여행 한번 편하게 하겠어.] [우, 웃기지마아아아!!!!]허허허허. 세상일이라는 게 참 모른다더니.
신행(新行). 문자 그대로 신부(新婦)의 여행(旅行)
루실라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다른 귀족들의 눈에 ‘짝을 찾아 여행을 떠난 결혼 적령기의 여성’ 정도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이 비질렌 가문의 차남이라는 기사가 ‘나 정도면 괜찮지 않소?’ 같은 의미로 끈덕지게 어프로치를 해왔던 것이고.
“음. 다 왔군. 레이디 루실라, 손을.”
쿠우우웅!
어느덧 일행은 개활지를 지나 성벽 앞에 도착해 있었다. 족히 10m는 될법한 해자 위로 육중한 도개교가 내려오고, 말에서 내린 기사는 루실라를 향해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사자의 가문, 비질렌이 다스리는 시그필룬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니, 저, 저는….”
“변경백의 차남이 레이디를 수레에 태우는 무뢰한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길 원하지 않으신다면, 부디 말에 올라 주시길.”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만 가득하던 가면이 쩍! 하고 갈라져서는 안절부절한 표정으로 데미카스의 팔에 손을 얹는 루실라.
[도, 도와줘요! 이런 거, 생각해본 적도 없어!] [낄낄낄. 네가 선택한 신행이란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렴?]음, 미안하지만 도와주기엔 너무 재미있어 보이는걸?
나는 루실라가 메세지 마법으로 닳고 닳은 선원이나 할법한 욕설을 늘어놓는 것을 들으며 혼자 낄낄거렸다.
딱히 나쁜 상황은 아니니, 일단 지켜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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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꺽, 꿀꺽, 꿀꺽!
“크하아아!”
“크으으으!”
타악!
“어때. 먹을 만하지 않은가?”
“이건…. 작은 주점에서 나온 술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군. 아주 독해. 그리고, 그 만큼 피로를 날려버리는 화끈함이 있소.”
“흐흐흐. 제법 술을 아는 늑대인간이로군. 교수 자네는 어떤가?”
“크하아아! 와.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흐흐흐흐. 로드릭, 자유무역 연합, 텔드랏 삼국은 맥주나 과일주 같은 도수가 낮은 술로 유명하다면 제국은 증류주 같은 도수가 높은 술이 유명하지.”
교수는 사뭇 자랑스러운 듯 제국의 술에 대한 설명을 줄줄 이어나가는 알드리치에게서 고개를 돌려 왁자지껄한 주점 내부를 둘러보았다.
작고, 일견 허름해 보이지만 오랫동안 사람의 손을 탄 듯 반들반들해 보이는 테이블과 나무 기둥.
주점 특유의 유쾌한 소음.
여로에 지친 몸을 누일 작은 의자와, 따듯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스프와 빵, 그리고 머리가 얼얼할 정도로 차갑고 독한 증류주까지.
기사의 안내를 받아 시그필룬드 시(市)에 입장한 일행은,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루실라의 바람과 달리 들어오자마자 루실라와 헤어져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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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데미카스께서 보증하신 레이디의 일행이라도 검문은 받아야 한다. 구성원이 참…. 용사, 엘프, 트롤, 늑대인간에 마법ㅅ…. 마법사?”
“예. 마법사도 있는데.”
덜덜덜, 덜덜덜덜!
“마, 마법사는 당장 손을 들어 누가 마법사인지 정체를 드러내라!”
처처척!
“세, 세….명? 마법사가 셋이나 성안에?”
“비상이다! 비사아아앙! 관문 경비대 전원 집하아아압!!!”
땡땡땡땡땡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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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봐도 귀족 같은 루실라가 보증을 해줘서 간단한 신분 검사만 하고 넘어가는가 싶었더니, 갑자기 경비대 사람들이 경기를 일으키더니 악을 쓰며 모여드는 것이 아닌가?
데미카스도 상당히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어서는 ‘레이디 루실라. 미안하지만 저들을 성에 들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루실라는 손님으로서 예를 지키기 위해 성으로, 우리는 루실라가 단말마처럼 남긴 [벌꿀족제비! 벌꿀족제비 주점에서 기다려요—] 하는 말에 따라 주점으로 흩어져 이렇게 술이나 마시게 된 것이다.
타앙!
오트만은 그런 대우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아니면 혼자 간 루실라가 걱정되어서인지 자신의 앞에 있는 물잔을 사납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알드리치. 아무리 우리가 마법사라고는 해도 이건 대우가 좀 박한 것이 아닌가? 교수 이 친구가 성물까지 꺼내 보이며 우리가 로 하람의 임무를 수행하는 용사 일행임을 밝혔거늘 어찌 이다지도 무례하게 구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지금도 우리가 무슨 예비 범죄자라도 되는 양 주점 밖에서 감시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건 오트만 자네가 제국 사정을 몰라서 하는 소리일세. 알다시피 제국에는 그 빌어먹을 바람쟁이 소굴이 있는 바람에 방랑 마법사가 많거든. 다른 마법사들은 대부분 탑에 처박혀 있으니 악명이 그 동네에 국한되어 있기라도 한데, 그놈들은 온 사방을 싸돌아다니며 악명을 마구 퍼트리고 있으니 말이야. 마법사에게 당한 게 많은 제국 사람들은 특히나 마법사를 더 무서워 하지. 지금 이 정도도 루실라와 데미카스라는 귀족의 입김 덕분에 많이 봐준 거야.”
오트만과 달리 알드리치는 이런 대우가 익숙한 듯,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빵을 뜯어 먹고 있었다.
“그나저나 의외네요. 알드리치가 제국 출신이라니.”
“흑마법사라고 고향이 없으라는 법은 없지. 오히려 흑마법사는 고향에 머물러 있는 편이 드물다네.”
“왜요?”
“….흑마법사가 왜 흑마법사가 됐을지 한번 생각해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며 제법 독한 증류주를 단숨에 목구멍으로 넘기는 알드리치.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고된 여정의 피로를 풀어낸 일행이 제법 부른 배를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의자에 기대앉을 때쯤, 나는 왜 저렇게 데미카스라는 젊은 귀족이 루실라에게 치근덕거렸는지 일행에게 설명했다.
“신행(新行)이라? 신행이라면 내가 아는 그것을 말하는 게 맞는가? 텔드랏의 여인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신랑감을 찾기 위해 떠나는 그 구혼 여행?”
“네, 그겁니다. 오트만 영감님은 그런 거 잘 모를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아시네요?”
“으음. 얕보지 말게. 나도 한때는 젊은이였고, 혈기가 끓던 시절에는 타국의 그 기이한 풍습에 대해 묘한 기대를 품은 적도 있으니 말이야. ‘텔드랏에서 찾아온 신부’는 지금도 바드들이 가장 애용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오트만의 말에 알드리치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로드릭 출신의 물마법사도, 제국 출신의 흑마법사도 알 정도로 소문이 자자한 텔드랏의 기이한 문화.
신행. ‘신부의 여행’ 또는 ‘신부가 되기 위한 여행’이라 불리는 이것은 곡창지대와 상업으로 유명한 텔드랏의 오랜 관습이자 전설적인 풍습이었다.
바로 결혼 적령기의 미혼 귀족여성이 ‘짝을 구하되, 내게 맞는 남자는 내가 직접 찾겠다.’ 고 결심하여 말 그대로 남편감을 찾기 위해 세상을 떠도는, 귀족으로서는 정신이 나갔다고밖에 볼 수 없는 풍습이 바로 그것.
당연한 얘기지만 귀족의 결혼은 단순히 두 사람이 눈이 맞아서 백년해로를 다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가문과 가문이 혈연으로 이어지며 얻게 되는 수많은 이득을 계산해야 하고, 때로는 가문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상대와 평생을 함께해야 하는 냉혹하고 비정한 행사가 바로 귀족의 결혼이거늘.
신행 같이 귀족의 생리상 말도 안 되는 일이 텔드랏에서 가능한 이유는…..
전적으로 지금의 3월드를 만들어낸 레빗 프린세스가 2월드 플레이 중 한 행동 때문이었다.
강하고, 아름답고, 기라성 같은 영웅들과 형제처럼 지내는 인맥에 1월드 부터 이어져오는 ‘프린세스 가문’의 막대한 재력까지.
누구나 꿈꾸는 완벽한 여성에 가까운 그녀의 캐릭터에게는 매일 같이 수백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으며, 아침에 눈을 뜨면 창밖에 울리는 세레나데가 오페라 수준의 합중주를 이룰 지경이었다.
그렇게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귀족 남성들을 견디다 못해 레빗이 공식적으로 밝힌 입장이 있었으니….
[나는 나의 가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미안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만난 상대 중 나의 모든 것을 바칠만한 상대가 없다는 것도. 그래서 나는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언젠가 나의 완벽한 반쪽을 찾아, 이 기나긴 여행을 끝나고 그의 곁에 정착하기 위해서.]‘으음. 다시 생각해도 엄청나게 영리한 플레이였지.’
내 남자는 내가 고를 테니, 수준에 맞지 않는 자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는 이야기였는데-
그녀의 선언이 사교계를 통해 퍼지며 레빗을 말 그대로 전 세계 귀족 남성의 아이돌로 만들어주었다.
왜냐고? 한번 귀족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먼 타국에서 온 아름답고 신비한 여인.
제국의 황태자도, 인중신(人中神)이라 불리는 사막 절대자조차 매몰차게 거절한 여인이 선택한 남자라면, 그자야말로 이 시대 최고의 남성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귀족들의 뇌리에 새겨진 것이다. 물론 이런 환상에 더해 실제로도 그녀는 여신 같은 외모, 유서 깊은 가문과 엄청난 재력, 은하수처럼 깊고 넓은 인맥을 갖춘 최고의 신붓감이기도 했지만.
그날 이후로 그녀는 어떤 영지에 방문해도 항상 최고의 대접을 받게 되었으며, 그녀의 단호한 거절을 맞본 고위 귀족들이 ‘나도 까였는데 내 아랫놈이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다!’ 라며 자동으로 날파리들을 쳐내주는 바람에 전보다 훨씬 쾌적한 플레이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요점은 그 2월드의 전설적인 ‘텔드랏의 최강 구혼녀’ 일화가 3월드인 지금까지도 남아, 아니 남는 수준을 벗어나 수많은 바드들의 노랫말로 전해지며 타국의 귀족 남성들에게 ‘텔드랏에서 온 여인의 선택을 받는 자는 누구나 인정할 만한 최고의 남성이다.’ 라는 환상을 무지막지하게 부풀려 놨다는 것.
이게 그 귀족 여성의 가문에서 봐도 크게 나쁜 일이 아닌 게, 이런저런 요인을 합쳐 10점 만점에 8점짜리 딸이 있다고 치면 그녀를 해외로 보낼 경우 11점 정도의 가치가 되며, 그만큼 일반적인 중매로는 꿈도 꿀 수 없는 훌륭한 사윗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만약 군소 귀족 가문에서 청운의 꿈을 품고 온 사교계에 ‘우리 딸이 신행(新行)을 가네~’ 하고 소문을 냈는데, 그 딸이 아무리 로망 보정을 때려 부어도 감당이 안 될 만큼 격이 떨어지는 사람이라 그 누구의 구혼도 받지 못한 채 집에 돌아왔다고 생각해봐라.
망신도 그런 개 망신이 없고, 사교계에서 그 가문의 위상은 나락의 끝자락까지 추락할 것이며, 그 여식은 ‘주제도 모르고 남편을 선택하려 한 머저리’ 라는 딱지와 함께 영원히 홀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칫 실패하면 가문 말아먹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보니 웬만한 자신감으로는 신행을 나서는 여식이 없었으며, 몇 년에 한 번씩 등장하는 ‘텔드랏에서 온 여인’은 누가 봐도 충분히 그럴 자격이 되어 보이는, 가문에서도 ‘우리 딸 정도면 충분히 떡상 가능하다!’ 싶은 귀족 여성만이 그 자격을 얻고 여행을 떠나게 되어 그 명성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어찌 보면 찌라시로 시작된 일이 정말 사실이 되어버린 샘.
“하지만 대장. 루실은 신행을 나선 것이 아니라 자기 발로 집을 뛰쳐나온 것이잖소? 그것도 몰래.”
“그 집을 나온 시기가 문제였던 거지. 가문에서 공식적으로 혼사를 사교계에 공표한 다음에 뛰쳐나왔다고 했는데, 이건 ‘우리 가문의 여식이 출가 준비를 마쳤습니다~ 관심 있는 귀족은 하녀장을 보내주세요~’ 하고 알리는 것과 마찬가지거든. 귀족이 결혼하기까지 평균 세 번의 약혼이 파토가 난다고 하는데 계약서 한 장 없이 먼 타국의 늙은이와 약혼 소식만 알려진 정도야 뭐. 매파(媒婆) 역할을 하는 마담과 하녀장들에게는 신경 쓸 것도 아니지.”
말하자면 루실라는 귀족 혼인계라는 이적시장에 막 발을 들인, 그것도 ‘제국에서 제일 돈 많은 가문의 딸’ 이라는 타이틀까지 붙은 상태로 출마한 딱 그 시기에 집을 나선 것. 매파들 입장에서는 참으로 먹음직스러운 혼처가 아닐 수 없으니 어떻게든 연결해 보려고 눈에 불을 켜고, 우리 도련님들한테 ‘아에드란 가문의 셋째 따님이 혼처를 찾고 있다던데….’ 하며 초상화를 들이밀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그런 상황에! 생각 없이 순찰 돌던 저 데미카스라는 저 귀족 도련님 앞에 떡- 하니 혼처를 찾고 있다던 그 텔드랏의 여성이 나타난 겁니다. 가문에서는 혼인계에 이름이 올려놓았고, 텔드랏 출신의 결혼 적령기 여성에, 외모도 준수하고 가문도 빵빵한 귀족 여성. 누가 봐도 그 이야기로만 전해 듣던 전설적인 ‘텔드랏에서 온 여인’과 똑같은 모습이었던 것이지요.”
데미카스 입장에서는 전설의 여인이 눈앞에 걸어 들어왔으며, 현실적인 요건도 더할 나위 없으니 최선을 다해 달려들어 볼 만한 상황이었던 것.
“허어어어. 이것 참….”
“재밌지요?”
“으음. 부정은 못 하겠군. 그래도 도와줘야 하는 게 아닌가? 자칫하면 제국 귀족들과 의도치 않게 척을 질 수도 있는 상황인데. 교단의 이름을 팔아서라도 해명을 도와주는 것이….”
“뭐, 일단은 지켜보려구요. 그 앞뒤 꽉 막힌 드워프도 설득해서 계약을 따내는 녀석인데. 설마 이 정도도 혼자 못 해치우겠습니까?”
끄어억-
교수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지금쯤 가시방석 같은 만찬 자리를 즐기고 있을 루실라를 떠올렸다.
‘힘내라, 하이패스. 잘 하면 덕분에 제국에서의 일정이 몇 달은 앞당겨질 것 같으니까.’
텔드랏에서 온 여인에 대한 문화 중 한 가지. ‘까였다고 체통 없이 질척거리지 말 것.’
들어갈 때는 최고의 환대를 받고, 나올 때는 별 터치 없이 유유히 나올 수 있다. 이만큼 스무스하게 타국 귀족의 영지를 드나들 권한이 또 있을까?
‘역시, 계약을 갱신하길 잘했어.’
앞서 도시에 도착하기 전, 수레 위에서 루실라와 메세지 마법으로 쑥덕거린 계약 내용을 떠올리며 교수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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