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199
Chapter. 11. 마법사들의 마법사(18)
****
루실라가 손님인지 맞선인지 구분이 안 될 저녁 식사 자리에 가 있는 동안, 우리 일행은 마음껏 먹고 쉬며 여행의 피로를 풀고 있었다.
간간이 오트만님이 ‘진짜 이렇게 우리끼리 놀아도 되나?’ 같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진짜 지금은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는 걸 어떡해?
‘계약상 루실 그 꼬맹이도 최선을 다해 우릴 도우려고 할 테니까. 비록 원치 않던 관심이지만, 녀석도 상인인 이상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지금은 녀석에게 관심이 집중되게 내버려 둘 때야.’
성에 들어오기 전, 수레에서 우리 일행과 루실라의 상행 사람들이 어떤 관계로 남을 것이냐 에 대해서 얘기를 좀 했다. 나도 녀석의 능력, 그리고 반복된 제국 상행으로 다져진 인맥과 지식이 탐나고, 녀석은 나의 종교계 인사라는 끼어들기 힘든 위치와 여차하면 죄다 들이받아서 밀어버릴 수 있는 무력이 탐나는 상황.
이렇게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 보니 나름 원만하게 합의에 이를 수 있었다.
사실 계약이라고는 해도, 크게 거창한 것은 없었다.
——–
이번 여정에서, 루실라 아에드란과 그녀의 상단은 용사 교수 일행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정말 최선을 다해 돕는다. 여기서 최선의 기준이란 엘프 이드라실의 눈으로 보았을 때 일말의 여유도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에 대한 대가로 용사 교수는 그가 가진 권한으로 광명 교단이 루실라 아에드란을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있음을 표명한다. 최소 대주교의 입에서 ‘루실라 아에드란’의 이름이 공식 석상에서 한번은 언급되어야 하며, 그 사실이 사교계와 아에드란 가문에 공식적으로 알려져야 한다.
——–
간단하지만, 있을 건 다 들어있는 계약.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루실라가 그렇게 큰 계약을 성사시키고도 이렇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자신의 지지기반, 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은화가 자라는 나무를 키울 능력은 있지만, 정작 본인이 소작농이라 그 땅 주인이 모든 것을 다 가져가버리는 상황.
대충 들어보니 그녀의 어머니는 아에드란 가문의 하녀였다가 가주의 눈에 들어 후처가 된 경우라고 한다.
다른 형제들이 외가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아 후계 다툼에 뛰어들 때 그녀는 맨손으로 달려들어야 했다는 말씀.
그런 불리한 상황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제국으로 건너갈 상단을 꾸리고, 교역품을 모아 어마어마한 이득을 만들어 낼 능력이 있는 루실라이니 다른 형제들 만큼의 뒷배만 있으면 가주 승계 싸움에서 우세를 가져오는 게 마냥 헛된 꿈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 루실라는 나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르는 ‘신행을 나선 루실라’의 소문을 짊어지는 것 정도는 감수할 정도로.
그럼 내 쪽은 어떻느냐?
‘….솔직히 내가 교단을 움직일 만큼의 권한은 없지만…. 교단이 루실라를 후원하게 만들 방법 정도는 알고 있지.’
사실 이 방법에 교단에서의 위치 같은 것은 그다지 필요없다. 그냥 루실라를 후원하는 게 교단에게도 이득이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내가 다른 건 모르겠는데 대주교님이랑 커넥션 하나는 끝내주거든.
‘어려울 것도 없지. 이번 일 끝나고, 텔드랏에 들러서 로만 그 녀석이랑 같이 근처 광명 교단의 신전을 방문해 [프로토타입 비공정] 한번 날려주면 될 테니까.’
자칫 광명 교단은 그 광신에 가까운 믿음 때문에 사리에 밝지 않은 이미지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건 이 시대의 종교집단에 대해 몰라서 하는 소리다.
종교집단도 결국 ‘집단’이고, 집단은 그 크기가 클수록, 영향력이 넓을수록 온갖 부분에서 돈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작게는 교구를 세우고, 성직자를 교육하며 아직 신앙이 전파되지 않은 지역에 구휼미를 베푸는 것까지. 크게는 고위 귀족과 로비를 하고 이단 정황을 수집하며 성기사를 훈련시켜 마을을 불태우고, 그것을 돈으로 무마하기까지.
과거의 광명 교단이 괜히 전쟁용 도구처럼 사용된 것이 아니다. 헌금만 받아서는 도저히 먹고 살기는커녕 신전의 유지보수조차 어렵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귀족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대주교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 전쟁 도구로 취급받던 광명 교단을 지금의 입지전적인 위치에 올려놓았으며, 단순한 종교집단이었던 광명 교단에 정보를 담당하고, 더러운 일을 전담할 집단을 만들어 놓은, 어찌 보면 집요할 정도로 수완이 좋은 사람이다.
그 누구보다 신실한 사람이 제 손으로 교리를 수정하고, 그로 인해 학살을 자행할 정도로 교단의 성세를 펼치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성직자.
그 광기에 가까운 유능함 만은 충분히 증명되었기에 교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비공정이 대주교의 눈에 띄는 순간, 루실라는 광명 교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광명 교단이 1년에 양민 구휼용으로 사들이는 밀과 보리가 곡창지대로 유명한 텔드랏 전역에서 생산되는 미곡의 양이랑 비슷한 수준이니까. 그 10%만 계약한다 쳐도 전쟁 상인으로 군량 보급 거래를 따낸 것 못지않게 큰 성과가 될 수 있겠지.’
나름 합리적인 계약을 했고, 서로에게 그 계약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상태.
그래서일까, 주점 밖에 다가서는 4두 마차의 말발굽 소리와 거기서 내리는 작은 발걸음이 유난히 전투적으로 들렸다.
익숙한 소녀의 목소리와, 오늘 오전부터 익숙해지기 시작한 기사의 목소리.
일행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두 남녀의 목소리에 쏠렸다.
“레이디 루실라.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렇게 허름한 곳은 아름다운 레이디에게 맞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성으로 돌아가 머무르심이….”
“나이트 데미카스. 죄송하지만 저는 귀족인 동시에 상인이에요. 상인에게 가장 중요한 재산은 사람이랍니다? 저를 따라 저 위험한 블루라인을 넘어온 일행이 이런 ‘허름한’ 곳에 머무르는데 제가 어찌 화려한 식사를 즐기고, 향유가 들어간 목욕물을 즐기며 부드러운 깃털 이불을 즐길 수 있을까요.”
“그렇….군요. 참으로 현명하신 처사입니다. 배움이 부족한 무인의 실수라 여겨주시길.”
“괜찮아요, 나이트 데미카스. 본디 전란에 시달리는 영지의 남성은 강인한 무력과 카리스마로 영지 밖의 위협을 제거하고 영민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큰 의무잖아요? 강인한 기사님들의 이런 사소한 부족함은, 보통…. ‘현명한 아내를 맞이하는 것’으로 해결하는 것이 전통적인 방법이기도…. 하고 말이죠?”
“그…. 크흠! 레이디, 그 말씀은-”
“어머나, 밤이 늦었네요. 이런 늦은 시간에 다 큰 남녀가 거리에서 얘기를 나누는 것은 자칫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는 일이니, 저는 이만 들어가 쉬도록 하겠어요. 오늘 정말 즐거웠답니다. 안녕히!”
“레, 레이디 루실라! 잠시, 잠시만 시간을! 구설에 올리는 자가 있다면 그자의 목을 성문에 매달아서라도 막을 테니, 잠시만….!”
벌컥!
끼이이익- 철컥!
애가 탄 기사의 애처로운 목소리와 함께 숙련된 도둑도 감탄할만한 속도로 문을 열고 빗장을 걸어 잠근 루실라.
“저런. 여자가 사랑에 빠지면 한층 더 예뻐진다고 하더니.”
“여어~ 예비신부~”
까드득!
“한마디만. 더 해봐요. 내 주머니에서 당신 몫의 은화 두 개가 빠져나오게 될 테니까.”
“노자로 겨우 은화 두 닢이라니. 골드 가이저의 이름이 울겠다야.”
“그 망할 히죽거리는 눈만 가릴 수 있으면 은화든, 동화든, 조약돌이든 뭐든 상관없을 텐데요!”
좀 전의 간드러지고 애틋한, 남심을 간질이던 목소리는 어디로 내던졌는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루실라.
수레에서 갈아입었던 깔끔한 드레스는 어디 갔는지 풍성하고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작고 불편한 구두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더니 일행이 있는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우, 귀여워 죽겠네.
“고생했다 루실. 귀족들이랑 수다 떠는 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는데.”
“암요, 고생 좀 했죠. 그냥 인사치레도 아니고 그 이야기로만 듣던 ‘텔드랏 구혼녀’를 설득하기 위한 가문 총동원 장기자랑 시간이었으니까! 수프 한 숟갈 뜨기도 전부터 가문의 연혁과 황제 폐하의 은총을 줄줄이 늘어놓더니, 식사가 나올 때쯤에는 아예 응접실에서 비무 대회라도 열 기세였는데…. 누구누구 때문에 적당히 거절하지도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애만 태우면서 줄타기한다고 위장이 쪼그라드는 줄 알았다구요!”
덕분에 밥은커녕 물도 제대로 못 마셨다고 하며 자기 앞으로 미트 스튜를 따로 주문하는 루실라.
‘으음. 이 요망한 꼬맹이.’
저렇게 힘들고 고생했다고 툴툴거리고는 있지만, 대충 여관 앞에서의 대화만 들어도 누가 목줄을 틀어쥐고 흔들었는지가 눈에 훤히 보였다.
‘텔드랏의 구혼녀’는 여성이 상대를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고 세상에 공표한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
남자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Ready to marry’인 여성의 옆에서 그녀의 허락을 받기 위해 자신을 어필하는 상황인 만큼, 허락을 받은 ‘다음’을 상상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 미묘하고 야릇한 기류가 흐르는 상황에 ‘목욕물’이니, 깃털 침대니 하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단어를 투척하더니, 현명하다는 칭찬에 현명한 여성을 맞이하라는 말로 순진한 기사의 방심을 마구 흔들어 놓고 안달이 난 상대를 쌩- 하니 내버려 두고 도망친 루실라.
아마 저 데미카스라는 기사는 문 닫힌 여관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싱숭생숭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쓰며 달빛만 처량한 거리 위에 홀로 쓸쓸히 말을 몰았겠지.
‘음~ 요망해라. 생각해보니 이녀석, 고위 귀족가문의 딸이었지? 스킬로 귀족 화법이 붙어있을 정도였으니 이제 막 아카데미 졸업하고 가문의 일에 뛰어든 기사 하나 정도는 손쉽게 구워 삶을 법 하군.’
사실 아카데미에서 화술을 가르치는 이유중 하나가 나가서 이렇게 눈탱이 맞지 말라고 그러는 이유도 있었으니까.
후르르륵! 삭 삭 삭!
“크하아아아! 이제야 살겠네!”
교수는 우아함과는 백만 광년쯤 떨어진 모습으로 수프 그릇을 들고 바닥까지 삭삭 긁어먹는 루실라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 나이에 겉과 속을 저렇게 자유자재로 뒤집다니. 크면 남자 깨나 울릴 녀석이었다.
****
“이겼냐?”
“이겼죠.”
성에서의 상황은 이 단어 한마디로 정리되었다.
“일단 엎질러진 물이니, 지금 제가 처한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어요. 소문으로만 듣던 ‘제국 귀족이 텔드랏 여성에게 품은 환상’은…. 생각보다 더 정신 나간 수준이더라구요. 단순히 트로피가 아니라, 정말 음유시인의 이야기처럼 제가 그 집 며느리로 들어가기만 하면 갑자기 영지가 쑥쑥 크고 모든 일이 잘 풀리기라도 할 것처럼 집요하게 달려들더라니까요? 뭐, 저쪽에서 원하는 게 뻔히 보이는 상황이라 우리 쪽에 유리한 조건을 마구 남발할 수 있어서 편하긴 했는데…. 솔직히 좀 무서울 정도였어요.”
가만히 듣고 있던 알드리치는 루실라의 말에 입을 열었다.
“무서울 정도라고 함은?”
“음…. 집착, 에 가까운 수준이라고 해야 하나? 좀 많이 노골적이더라구요. 아버님에게는 따로 인사를 드릴 예정이라고 하질 않나, 갑자기 가문의 창고를 열어 잔뜩 쌓인 번쩍번쩍한 갑옷과 창, 화살을 보여주며 [우리가 이렇게 준비가 잘 되어있네] 같은 소리를 하질 않나, 사교 파티에서나 나올 원무곡이 식사 자리에 연주되더니 은근한 눈빛을 흘리질 않나, 백작 부인은 식후 차를 마시자고 하며 작은 응접실에 초대를 하더니 ‘젊은 사람들끼리 있는 자리에 내가 눈치가 없었네-’ 같은 소리를 하면서 조명을 낮추고 데미카스와 저만 그 자리에 두고 떠나질 않나!”
타앙!
“좀…. 무례하다 싶을 정도였어요. 상인 가문의 규율 같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오래된 전통을 꺼내 들며 성을 빠져나와야 했을 만큼.”
“그래. 그럴 만도 하지. 단순히 귀족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면 몰라도, 텔드랏의 여인은 그 사례가 매번 입증이 된 경우가 아닌가. 당장 제국의 고위 귀족 중에서도 그렇게 신행을 나선 여인을 맞이하여 인생 역전한 가문이 한둘이 아니니 욕심을 낼만 하지.”
“그렇긴 하죠. 글렌 공작가가 역모의 누명을 뒤집어썼을 때, 홀로 도서관 하나 분량의 제국 판례를 모조리 뒤져 공작가에 대한 판결이 억지임을 증명한 나디아 글렌 공작부인이나, 쫄딱 망해서 빈 성과 말라붙은 영지만 가지고 있던 귀족이라고 할 수도 없는 슈왈츠 남작가를 찾아가, 영지민들과 같이 흙투성이가 되어 목책을 세우고 있던 아서 슈왈츠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아내가 되기를 자청하여 아무도 모르고 있던 슈왈츠 남작의 재능을 꽃피워낸, 지금은 소드 유저를 공장처럼 뽑아내는 검가(劍家) 슈왈츠 후작가의 니셀리아 슈왈츠 후작부인도 계시고.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례가 많기는 하니까요”
“그 정도라니…. 그럼 그냥 소문이 아니라, 진짜 뭐 있나본데?”
확실히 저 정도면 가문 차원에서 나서서 마구 등을 떠밀 만했다. 이미 앞선 성공사례가 수두룩한데, 그것도 그냥 성공이 아니고 터지면 잭팟급 성공 사례인데 당연히 탐이 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냥 우연이 아닐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 이 세계는 절대 다수의 NPC들이 상상하는 모습으로 만들어지는 세계니까.’
처음에는 단순히 대영웅의 명성에 힘입은 설화의 한 가락일 수도 있었겠지만. 세월이 흐르며 여러 우연이 겹치고, 위에 루실라가 예시로 든 ‘대형 성공사례’가 차곡차곡 쌓이며 어느새 [텔드랏에서 온 여인을 맞이하는 것 = 성공] 이라는 공식이 사람들 사이에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면?
그리고 일반 평민에 비해 더 큰 영향력, 즉 더 큰 리소스를 지니고 있는 귀족들 사이에 ‘루실라 아에드란은 신행을 떠난 여인이다.’ 라는 것이 일파만파 퍼져나갔다면?
“….루실. 혹시 비질렌 가문에서 너 나갈 때 뭐라고 했냐?”
“어디 보자…. 암석지대까지 건너가는 배를 빌려달라고 했더니, 내일 저녁에 다시 찾아와 준다면 생각해보겠다고 하던데요?”
“그래?”
성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가벼운 이야기가 오가는 점심이 아닌 저녁 자리에. 이번에도 다른 일행에 대한 이야기 없이 루실라 혼자만 불렀다라….
“….그럼 내일은 나랑 같이 가자. 마법사라도 광명 교단의 용사 정도면 변경백이라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니까.”
내 표정이 심각해지자, 덩달아 진지해진 루실라가 작은 목소리로 내게 물어왔다.
“설마….. 비질렌 가문에서 강압적으로 나올까 봐요?”
속으로 그런 분위기를 느꼈는지, 내가 말하기도 전에 내 의도를 알아챈 루실라.
“그래. 지금까지는 그냥 네 조건에 살짝 얹어진 양념 정도로 치부했는데, 들어보니까 눈 뒤집히는 놈들도 있을 것 같아서.”
교수는 여기까지 오면서 봤던 도시의 광경을 떠올렸다. 아직은 평화롭지만 묘하게 긴장감이 도는, 한낮에도 행인이 그리 많지 않던 한적한 거리.
블루라인 깊숙한 곳까지 순찰을 다니는 소드 유저에 영지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많아지던 동부 경계 병력.
‘아직 뮤트가 제국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에서 대비를 하고 있는 것은 확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외인에게 함부로 공개하지 않는 가문의 창고를, 그것도 전쟁이라도 준비하듯 새 병기가 가득한 창고를 선보이며 ‘준비가 되었음’을 어필하던 가주.
‘만약 이곳 귀족들이 루실라를 정말 성공을 물어다 주는 지니 정도로 여긴다면, 슈왈츠 후작가처럼 가능성을 보이면 허락을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전운은 곧 혼란을 얘기한다. 그리고 혼란한 시대에는 언제나 역천을 꿈꾸는 이가 존재했고.
변경백, 자신의 영지 안에서는 황제와 동일한 권한을 휘두를 수 있다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지방 귀족.
어쩌면, 그가 조용히 가슴속에 품고 있던 욕망이 바람을 타고 실려온 전쟁의 향기가, 누구나 ‘기회’라고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그 유별난 설화가 그 욕망을 부추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것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이다. 단순히 둘째 아들한테 좋은 며느리를 붙여주고 싶은 부모의 주책일 가능성도 있고, 원래 좀 개방적인 집안일 수도 있고.
하지만 만약 그 ‘최악의 가정’이 현실이 된다면….
드르륵!
“안 되겠어. 아무래도 한번 만나봐야겠어.”
루실라가 그 성을 다시 찾아갔을 때, 앞으로 두 번 다시는 그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될 수도 있었다.
뚜둑, 뚜두둑!
살벌하게 목 꺾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교수.
“루실. 혹시 근처에 광명 교단의 신전이 어디 있는지 알아?”
“예? 예…. 광장 안쪽에 있기는 한데. 왜요?”
“사제복 하나 얻어 입으려고.”
“사제…복?”
“그래. 저쪽에서 진지하게 나온다니까 나도 좀 진지하게 해주려고. 광명의 용사로서.”
교수는 얼굴도 모를 비질렌의 영주를 떠올리며 살벌하게 웃었다.
로 하람이 말씀하시길. 선한 빛을 품은 자는 결코 약자를 함부로 대하지 않으니.
타인을 간한 악적은 남녀와 신분의 고하에 막론하고 사형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