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0
Chapter.3 그 한 줌의 은화를 위하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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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 사각-
“카이랄테크 샤워부스 세트, 소형 쉘터용…. 얼마라고?”
“이, 217,800 실링….”
“Z형 공기청정기 2대….
“두개 해서 16만 실링이요.
“십….육….만….”
황무지에서 오래 살고 싶으면, 지나간 일에 너무 연연해서는 안 된다. 왜, 그런 말도 있잖아. ‘오오, 살아남은 이여, 뒤를 돌아보기엔 앞으로 남은 날들이 너무나도 아름답지 않은가’ 같은 거.
이성을 잃고 코듀로를 반쯤 박살 내버리고 쓰러져 잠든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든 생각은 ‘이미 늦었다’ 였다.
일단 저질러 버린 일을 끌어안고 한숨만 푹푹 쉬어대느니, 그 시간에 방법을 찾는 게 훨씬 경제적이잖아?
그래서 아침부터 이 번쩍번쩍하게 빛나는 거실에 앉아 반파된 코듀로의 드론과 함께 돔에서 보내준 구매목록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을 해야 대처할 방향을 정하든 할 테니까.
“능동 반응형 자동 포탑-설치형.”
“어…. 음…. 싸게 받았어요, 요즘 쉘터 설치가 줄어들었다고 해서… ”
“코듀로.”
“932,000 실링….”
빠직!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아아!”
“아니지. 죽을죄가 아니라 ‘죽일 죄’겠지. 네 덕분에 내가 죽게 생겼으니까.”
후우.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참을 인(忍)’자를 세기며 연필을 놀렸다. 이너 피스, 이너 피이스~ 어째 게임 밖에 나와서도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건지, 참.
내 탓이라면 내 탓이다. 쉘터 AI의 의사결정 자유도를 가장 높은 수준인 ‘3원칙이 위배되지 않으면 전부 가능’ 으로 설정해 뒀으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황무지에 혼자 사는 상황에서,
당장 죽기 직전인데 ‘코듀로! 포탑 과부하 시켜서 포탑에 붙은 놈 다 날려버려!’ 했는데 ‘삐빅- 거주지 파손 행위에 대한 권한이 없습니다.’ 하면 안되잖아?
돌발 상황을 대비해, 나를 대신해서 자율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동료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 사달이 나긴 했지만.’
으으, 멍청한 박교수, 안일한 박교수! 어찌하여 이 미친 망아지 같은 AI의 목줄을 풀어놓았느냐!
쾅! 쾅! 쾅!
“주, 주인님! 진정하세요! 그러다 머리 깨져요!”
“아, 괜찮아. 안일했던 과거의 나를 체벌하는 중이니까. 냅 둬. 다음이나 불러.”
그렇게 잠시 번뇌와 인고의 시간을 거친 뒤, 마침내 완성된 목록을 앞에 두고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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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랄테크 샤워부스 세트, 소형 쉘터용 – 217,800
카이랄테크 Z형 공기청정기 x 2 – 160,000
출처 불명, 중고 능동 반응형 자동 포탑 – 932,000
설탕 3kg – 180,000
소금 1kg – 70,000
옥수수 종자 1포 – 5,000
라이프 엔드 머더, 만능 방검복 – 90,000
노스텔직 데이즈 고급 식기 세트 – 22,500
정품 해피 블라인드 산 무동력 알파 파(波) 수면 유도기 – 50,000
(직거래) Player ‘DOOMgay’ 엔티크 더블 배럴 샷건 – 420,000
라이프 엔드 머더, 소형 보조 실드 생성기 – 200,000
드론 수리용 부품(외피, 내장 툴, 부유 장치) set – 50,000
총계 : 2,397,300 S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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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하하, 하하하하….”
팔랑 팔랑-
투욱.
240. 무려 240만이란다. 아아, 정신 나갈 것 같애. 정신 나갈 것 같애!
짝, 짝, 짝.
너무 엄청난 숫자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이야. 영수증이 아주 실하네. 알이 꽉 찼어. 묵직-한 것이, 들고 있기 힘들어서 떨어트렸다야.”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설마 방송이 이렇게 한순간에 몰락하게 될 줄은….”
“상환일이 언제까지라고?”
“넉넉하게 열흘….정도라고….”
“씨발 날강도 새끼들.”
열흘. 10일 동안 240만.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코듀로를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차라리 아예 못돼 처먹어서 이런 거였으면 욕이라도 시원하게 했을 텐데.
이렇게 목록을 적어놓고 보니, 사놓은 물건들이 죄다 낯이 익었다.
‘아아, 샤워! 샤워하고 싶다! 뜨신물에 샤워하고 싶어! 코듀로! 정력을 쓸데가 없는데 찬물 샤워가 웬 말이냐!’
‘야, 코듀로. 인간적으로 우리가 황무지에 산다지만, 집에서 정도는 편하게 숨 쉴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내가 저 개조 청소기-공기청정기 돌아가는 소리에 고막이 나가겠어 아주 그냥!’
‘쿨럭! 아, 드럽게 아파. 진짜 뒤질 뻔했네. 사람 하나만 더 있었으면 쉽게 막았을 텐데. 이번에 몰려온 변종은 다 잡은 거 맞지?’
‘단거 먹고 싶다.’
‘아, 이거? 별거 아냐. 파이프 샷건 총신이 또 터져서.’
‘코, 코듀로, 우리 이렇게 죽는 거 아니겠지, 그치? 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는데, 얼어 죽는 건 너무하잖아. 그건 정말…. 너무한거잖아.’
‘코듀로.’
‘코듀로!!’
‘코오오오듀로오오오!!!’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아서는. 망할 기계 같으니라고.”
뭐 어쩔 수 있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코듀로는 세상에 마지막 남은 내 가족인걸. 그동안 수십 번도 더 넘게 자살하려고 했던 것을 막아줬으니, 이번 목숨값 정도는 퉁쳐주는 걸로 할까.
***
08 : 00 AM
“보호복”
“확인.”
“가스 마스크.”
“챙겼고.”
“고글.”
“확인.”
“지도.”
“잘 때도 챙겨놓고 잔다, 그건.”
“무장.”
“수제 파이프 샷건 하나, 샷건 탄 스물 네발, 수제 마체테 한 자루, 휘발유 15mL.”
“음? 그게 끝이에요? 화염병이라도 하나 챙겨가시지?”
“무거워서 굼떠져. 어디 전쟁하러 가냐. 이쪽 길은 전투력보다는 기도 비닉이 더 중요하다고.”
“그렇긴 하지만…. 뭐, 알아서 잘하시겠죠. 그럼 다 챙기신 거죠?”
“아, 맞다. 폐전선 10m 정도 들고 간다.”
“전선은 왜요?”
“로프 대용으로 쓰게. 질기고, 마찰력도 높고, 탄력적이고. 이만한 게 또 없거든. 창고 목록에서 빼놔.”
밖으로 나가기 전. 코듀로가 만들어준 맛없는 칼로리 바로 배를 든든하게 채운 다음 장비 상태를 교차 점검했다.
“그래도 직거래가 하나 끼어있어서 다행이지. 잘만 하면 환불할 수 있으니까.”
“Player ‘DOOMgay’….라는 이름이었죠? 마켓플레이스에서 거래소에 올린 것 중에 직거래가 있길래 좀 뜬금없다, 했는데, 진짜 대면 거래를 해야 되는 거에요?”
“위탁 판매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얼굴 보고 거래하고 싶은데, 이런 세상에서 물건 파는데 ‘얼굴 좀 봐야겠수다’ 하면 거의 99%는 사기꾼이나 강도니까. 공신력 있는 판매자인 마켓 플레이스를 거쳐서 직거래를 올리는 거야.”
마켓 플레이스는 돔의 상권을 좌지우지하는 거대한 상인연합의 이름이다.
좋은 물건을 좋지 못한 가격에 파는 것으로 유명한데, 적어도 사기를 친 적은 없어서 나름대로 평판은 괜찮은 편이다.
“아무튼, 오늘은 좀 바쁘시겠네요?”
“그렇지. 만나기로 한 곳이 43구역 근처니까. 가는 동안 쓸만한 게 있는지 찾아도 보고, 샷건 판매자도 만나서 설득해야 되고, 43구 까지 간 김에 우진 영감님네 들러서 약도 좀 받아오고. 어쩌면 며칠 못 들어올 수도 있어.”
“으음…. 보존식은 잘 챙기셨죠?”
코듀로의 물음에 나는 말 없이 조끼 안쪽에 잘 넣어둔 벽돌 같은 칼로리 바와 물통을 보여주었다.
“모쪼록, 이번에도 안전하게 돌아오십쇼.”
“그래. 너도 집에서 해야 할 일, 잊지 않았겠지?”
“옙! 물론입니다!”
거의 240만에 가까운, 갚는 게 불가능할 정도의 빚이 생긴 상황.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AI가 이렇게 의욕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한 줄기 희망을 접했기 때문이다.
어제저녁에 잠깐, 혹시나,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GG에 다시 접속해봤다. 죽은 거야 기정사실이지만 그래도 세운 공로가 있는데, 장례 치를 때 보상으로 받을 돈을 무덤에 같이 넣어줄까 해서. 그렇게라도 받으면 플레이어가 획득한 것으로 처리돼서 거래소에서 쓸 수 있다.
사망 처리 되어도 엔딩 크레딧이랑 같이 시스템창은 뜨니까 이체할 수 있는 만큼 이체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접속하는데-
띠링-!
[접속 불가. 캐릭터 ‘교수’가 컨트롤 불가 상태입니다 / 145 : 24 : 33 /]“….어?”
띠링-!
[접속 불가. 캐릭터 ‘교수’가 컨트롤 불가 상태입니다 / 145 : 24 : 31 /]몇 번을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접속 불가. 캐릭터가 ‘사망’한 상태가 아니라 ‘컨트롤 불가’한 상태라니.
이런 경우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분명 캐릭터가 감옥에 가거나, 적에게 제압당하거나….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안 죽었다. 아직 안 죽었어! 그 크고 연약한 캐릭터가 목숨을 부지했다는 말이다!
옆에 있는 타이머는 컨트롤 불가 상태가 끝날 때까지의 시간이겠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내 캐릭터가 죽지 않았다면 돈을 끌어모을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140 시간, 약 5일 동안, 방송 쪽 돈벌이가 다시 정상화된다면 그럴 필요 없겠지만, 앞으로의 일은 모르는 거니까 그동안 나는 최대한 돈을 버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동안 코듀로 너는 대화방 사람들한테 캐릭터가 엎어져서 못 들어오는 거 말하고, 계속 내 캐릭터 상태 보고 있어. 갑자기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까.”
“넵!”
살아만 있으면 된다. 살아만 있으면. 어차피 시작할 때부터 송장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부디 살아만 있어다 오, 망캐 교수야.
“나 간다. 집 잘 봐라.”
“옙! 다녀오십쇼!”
그렇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교수는 쉘터를 나섰다.
***
사박. 사박. 사박.
모래가 두텁게 깔린 길을, 한 남자가 조심스럽게 더듬어 가고 있었다. 40번대 구역은 이 지역에 떨어진 핵탄두들의 범위에서 가장 멀리떨어진 구역.
덕분에 다른 지역에 비해 인구 밀도….라고 표현할 만큼은 아니지만, 아무튼 사람이 좀 사는 편이었고, 구 문명의 건물도 제법 남아있는 곳이었다. 특히 내가 사는 47번 구역과 목적지인 43번 구역 사이에 있는 45번 구역의 경우, 전쟁 직후 깔끔한 원형을 유지한 빌딩이 있었을 정도로 전쟁의 포화가 비껴간 곳이었다.
‘10층 건물이 있는 삼거리. 왼쪽 벽에 붙어서 3보까지 안전함.’
그리고 그렇게 잘 보존된 도시는, 이후 이어진 혼란 속에서 남아있는 자원들을 하나라도 더 획득하기 위한 약탈의 성지가 되었으며, 그곳에 모여든 스캐빈저들은 그동안의 수많은 전투로 원한과 이해관계가 얽혀 자원이 거의 남지 않은 이 도시에 눌러앉게 되었고. 그 결과가 지금의 45구역, 루팅 아레나(Looting arena)이다.
스삭.
교수는 못 알아볼 정도로 낙서가 가득한 지도를 꺼내, 앞에 있는 참고점을 표시한 지점에 작은 목탄으로 X표를 칠했다.
‘삼거리 좌측 건물 5층. 갑자기 창문에 바리케이드가 생겼군. 이 지역에 남아있는 자원이 있을 리가 없으니 저건 은, 엄폐를 위한 구조물이라고 봐도 되겠지. 그럼…. 여기서부터 저 안쪽 길까지는 전부 사선에 들어간다고 생각해야 될 거야.’
창문이란 창문은 죄다 뜯어가서 휑하게 뚫린 고층 건물. 반파된 빌딩에서 도로 위로 떨어진 파편. 어디에 자리 잡아도 은폐한 상태로 지나가는 여행객을 습격하기 좋은 구조. 지도위에 수많은 메모들은 각각의 위치가 어디에서 조준되며, 어디가 사각이고 어디가 사선인지를 꼼꼼하게 표시해놓은 일종의 발걸음 단위로 기록해놓은 생존 지침서였다. 몇년 전 이곳 스캐빈저 한명을 죽이고 이 지도를 습득한 뒤로, 45구역을 지날때마다 꾸준히 보충한 덕분에 제법 신뢰도가 높았다.
‘….쓰읍. 아무리 봐도 저쯤에 한 명 대기하고 있을 것 같은데….’
딱히 적이 있다는 지표는 없었으니, 그냥 감이었다. 묘한 불쾌감. 전에는 없었던, 엄폐하기 딱 좋게 생긴 잔해.
교수는 갈림길 끝에 깨진 거울을 보며 혀를 찾다. 이 길로 온 이유가 비교적 안전한 위치에서 저 곡면 거울을 통해 양쪽을 살피고 들어갈 수 있어서였는데, 주변에 떨어진 날카로운 돌 파편이나 탄흔을 보면 최근, 이 부근에서 전투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약간 남아있던 거울조각이 완전히 떨어져버린 모양이다.
‘화살이 있는걸 보니 한 쪽은 하운드 스캐브고, 다른 쪽은….여기서 하운드 스캡이랑 적대적인 놈들이 누구였더라? 베니 아나키스트? 원더러?’
정체라도 알았으면 관할 구역을 수정하는 데 도움이 됐으련만. 하운드 스캡이야 어디든 다 있으니 특별히 도움이 되는 정보는 아니고.
숨소리마저 죽이고 주변 소음에 귀를 기울이던 교수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주머니에서 샷건 탄환을 꺼내어 장전했다. 아무래도, 이 골목을 리스크 없이 빠져나갈 방법은 없어 보였다.
-철컥.
그렇게 바람 스치는 소리만 가득한 도심 속에 묵직한 12게이지 탄환이 자리를잡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교수가 다리에 힘을 주던 그 순간,
탁, 탁!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적이 숨어있을 거라 예상한 그 잔해 뒤에서 먼지투성이 손이 튀어나오더니, 교수가 있는 방향으로 돌을 세 개 던졌다.
군에 있을 때 쓰던 신호다. 음성신호가 제한되는 곳에서 소속 불명의 세력과 조우했을 때 쓰는 신호. 은폐한 방향으로 정확히 날아오는 돌 세 개. 그 뜻은, 네가 거기있는 것을 안다, 교전 의사 없음.
‘….교전을 피하는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하다. 여기서 전투를 하게 되면 주변의 온갖 스캐빈저들이 다 몰려올 테니까. 하지만 함정이라면….
순간 허전한 허리춤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코듀로의 말대로 화염병을 들고왔다면. 이런 시가전에서 곡사가 가능한 투척무기가 얼마나 중요한데. 심지어 상대는 군인 출신이다. 적으로 만났을 때 일반 스캐빈저보다 배는 위험한 상대.
잠시 고민을 마친 교수는 결론을 내렸다. 근처 바닥을 더듬어 작은 돌조각 세 개를 주운 다음, 마찬가지로 상대가 있는 잔해 쪽으로 연달아 돌을 던졌다.
탁, 탁, 데구르르-
일단 서로 공격 의사가 없다는 것은 전달했다. 교수는 천천히 총구를 밖으로 내밀었고,
자박-
반대편에서는 교수와 비슷한 복장을 한 구부정한 남자가, 양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자박, 자박,
좀전의 교수와 같이 주변을 잔뜩 경계하는 자세로 벽에 붙어서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교수가 엄폐한 파편의 반대편에 기대에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 이봐. 외지인. 총 내려. 여기서 쏘면 너나 나나 다 죽어. 뭐 하는 놈이냐.”
“….그냥 지나가는 사람. 너는?”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그냥 스케빈저다. 어느 부대에 복무했지?”
“우리가 이렇게 수다를 떨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가?”
“키힛, 정 없는 놈이로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교수도 천천히 총구를 내리고 있었다. 상대방은 먼저 몸을 드러낼 정도로 많이 양보했으니, 이쪽에서도 어느 정도 맞춰줘야 했다.
“….돈 때문에 잠시 옆 구역으로 넘어가는 중이다.”
“그래, 뻔한 이유이긴 했지. 하지만 옆 구역이면…. 47구? 맞나?”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쉰 목소리로 낄낄거렸다.
“참 기가 막히는 타이밍에도 왔군.”
“뭐 문제라도 있나?”
“암, 있지. 아주 기똥찬 놈으로 말이야.”
파박!
철컥!
어느새 교수의 옆에 다가온 남자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고, 그와 동시에 교수의 총이 그의 머리를 겨눴다.
“거 되게 예민한 친구군. 이 동네에서 계속 그렇게 있다가는 신경줄이 터져버릴 거야.”
“무슨 짓이지?”
“뭐긴. 최신 정보가 느린 전우님에게 호의를 배풀 참이지.”
순식간에 교수의 주머니에서 지도를 채어간 남자는, 귀 뒤쪽에서 몽당연필을 하나 꺼내 들었다.
“어이구, 참 성실하게도 만들어놨군. 이건 제법인데…..”
즐겁다는 눈으로 지도를 관찰하던 남자는, 연필을 들어 45구역 전체를 마구 칠하기 시작했다.
“이봐, 무슨 짓이야!”
“아, 좀 기다려봐. 다 뜻이 있으니까.”
순식간에 교수가 만들어 놓은 메모가 까만 흑연에 덮이고, 남자는 손가락에 침을 발라 그 까만 바탕 위에 한 점을 동그랗게 지웠다.
“자, 여기 있네. 45구 최신정보.”
철컥!
“….만나서 반가웠다. 전우여. 잘 가라”
“키히히! 장난치는 맛이 있는 친구로군!”
탁.
남자의 꼬질꼬질한 손가락이, 침으로 지워진 45구의 새하얀 구역을 짚었다.
“어제 이곳에서 제법 큰 전투가 있었지. 렙터 놈들이 한 건 하러 왔다가 어느 스캐빈저 집단을 잘못 건드린 덕분에, 그놈들과 동맹 세력까지 벌떼처럼 튀어나와서 한바탕 전투가 벌어졌거든. 밤새도록 총소리도 들리고, 폭탄 터지는 소리도 들리니까 오랜만에 잠도 잘 오고 좋더라고 키히힛!”
어쩐지. 45구역의 분위기가 평소와 좀 미묘하게 다르다 싶더라니.
“요점만.”
“이 친구 성격이 참…. 장수는 못 하겠어. 이 전투가 벌어진 지역은 45구역 유일의 무인지대였지.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빌딩이 있던 블럭이었는데, 이 건물이 무너지면서 근처에 안그래도 위태위태하던 건물 몇개가 연달아 무너지면서 블럭을 통째로 묻어버렸거든. 뭐, 뚫고 들어갈 엄두도 안나고, 어차피 한번 다 털었던 곳이라 생각해서아무도 신경쓰지 않게 돼버린 곳이지.
그런데 이번 전투에서 폭탄이 터지면서 건물 파편이 좀 날아가서 길이 열렸거든. 거기에 뭐가 있었는줄 아나?”
….꿀꺽.
교수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한 떼 루팅 아레나라고 불릴 만큼 파먹을 게 많았던 도시. 그런 도시에서 종전 초기에 폐쇄된 지역.
“설마…. 뭐가 좀 남아있다던가?”
“킬킬킬! 아니! 깔끔하게 아무것도 없었다더군. 지상에는.”
“지상에는?”
“어때, 이래도 관심이 없나?”
아니, 관심이 생겼다. 머릿속에 촤르륵 쏟아지는 실링의 환영이 보일 만큼.
입을 헤, 벌리고 있는 교수를 보며, 남자는 머리에 두른 스카프를 내리며 악동처럼 웃었다.
“그래. 그 파편 아래에 아무도 몰랐던 지하 건물이 있었던 거야! 들리는 소문으로는, 전략적으로 쓸모없는 지역인 45구역이 안전지대인 것을 알고 부자들이 만들어놓은 대규모 쉘터 단지의 흔적으로 보인다더군.
지금 45구역의 스캐빈저들은 물론 근처에 귀가 열려있는 놈들은 죄다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다고!”
키 작은 사내는 꿈꾸는 듯한 얼굴로, 소리를 낮추는 것도 잊은 채 말했다.
“한 블록이 통째로 폐허가 되며 곱게 잠들어있던 거대한 보물상자가, 5년이 지난 지금 열린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