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07
Chapter. 11. 마법사들의 마법사(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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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아악! 쿨럭, 쿨럭, 커헉!”
축축하고 끈적한 것에 잔뜩 뒤덮인 느낌. 들이쉬는 숨에 피 냄새가 가득하고,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피냄새? 몸이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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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았다. 살았나? 살았네!! 이야아, 살았어! 살아있다는 건 좋구나야!
존재가 어쩌고 자아가 뭣이 어쩌고 어째? 심장 한번 쫘악 조여주고 나니까 바로 완치됐다. 역시 사람은 배가 부르면 쓸데없는 생각이 머리에 들이차는 법이지. 돈 좀 벌었다고 부르주아지가 다됐구나, 박교수.
당연하지만, 정신을 잃고 의식공간에서 튕겨 나온 곳은 게임 안, 망령기사와 그 난장판을 만들고 우리 파티원들과 실랑이를 했던 그 공간이었다.
스으으읍- 하아아아~
‘아아, 이런 기분. 옛날에 실험실에서 로만이 날 우물에 처넣었을 때 이후로 오랜만이야. 공기가 너무 맛있다.’
그렇게 박교수라는 자아와 육체의 위기를 동시에 이겨낸 교수가 생환의 기쁨을 만끽하는 사이, 차츰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뭐지 이게.’
어…. 일단 좀 아프다. 온몸이 쑤시는 거야 그 깽판을 치고 다녔으니 속이 곤죽이 된 탓이겠지만.
손과 발에 아주 커다란 대못이 박혀있는 건 아무리 좋게 봐줘도 치료의 일환이라 봐주기는 어렵겠는데?
‘게다가 이 은은한 신성력…. 교단에서 이단 심문할 때 쓰는 그 나무판 아냐?’
말뚝 박힌 부분의 위쪽에 당기는 느낌이 있는 걸 보니 중력이 발 쪽으로 작용한다는 소리고, 그건 어디 눕혀놓고 박은 것도 아니라 아주 정석적으로 나무판에 박아서 매달아 놨다는 소리다.
우선 알아낸 상황 하나. 나는 지금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 체험을 하는 중이다.
손발이 박혀있는 말뚝도 온갖 성스러운 문양이 상감 되어 있는 게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물건 같았고,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무슨 도개교를 내리는 데나 쓸법한 쇠사슬이 내 몸을 구속하고 있었다.
차라리 내가 그 괴수 상태였으면 이해를 하지. 일단 지금은 사람으로 되돌아온 상태거든? 익숙하다고 해서 안 아픈 게 아니라고. 더럽게 아파. 이런 걸 당하면 예수라도 세상에 정나미가 떨어질게. 틀림없단 말이다.
좋아. 일단 내 취급이 어느 수준인지는 알겠군. 그럼 나 말고 내 일행은 어떻게 된 거지?
분명 기억의 마지막 장면은 햇빛 가득한 장대비 속에서 알드리치의 장저(掌低)가 내 얼굴을 찍어누르는 장면이었는데. 거기 분명 오트만이랑 알드리치, 보르카랑 노툼에 이드라실까지 다 같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왜 지금은 안보이지?
“이봐-”
채앵!
촤좌좌좍!
“괴물이 깨어났다!”
“영주님! 영주님을 모셔와라!”
“저 명계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목소리라니! 늦기 전에 당장 목을 치는 게….!”
음. 근처 병사들한테 어디 갔느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완전히 쉬고 갈라진 목소리 때문에 오히려 역효과가 나고 말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나는 완전히 사로잡힌 괴물 취급이었다. 당장 창을 들이대지만 엉덩이를 슬슬 뒤로 빼고 있는 병사들도 그렇고. 눈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기사들도 그렇고.
소방 헬기로 빨간 페인트를 뿌려놓은 것 같은 주변 경관을 보면 이런 반응이 충분히 이해가 가긴 하지만…. 이걸 어떻게 설득해야 하지?
다각. 다각. 다각. 다각.
막 부팅이 끝난 교수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하는 사이, 교수를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이 썰물처럼 갈라지며 변경백이 탄 말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우우웅!
말은 매달려 못 박힌 내 앞에 섰고, 그대로 은은하게 오러가 서린 변경백의 검이 내 미간에 닿았다.
“네가 나에게 한 번의 항소할 기회를 주었으니. 나도 너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지. 설명해보아라.”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만, 그럼에도 예의 그 날카로운 눈매에 흔들림 하나 없는 가주.
이런 사람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여전히 내 목에는 성물이 별 탈 없이 걸려있고, 그건 곧 로 하람의 용사로 자격이 증명되었음을 의미하지만.
지금 가주의 눈을 보면 ‘그딴 건 상관없고 빨리 나를 납득시켜 봐라’ 하는 뜻만 가득 담겨있었다.
‘어디 보자. 뭐부터 설명해야 하지? 아침부터 교단의 용사랍시고 쳐들어와서 이단 선포한 거? 그쪽 눈앞에서 드넓은 응접실 천장에 닿을 정도의 괴물로 변신한 거? 내가 찾아오고 나서 기가 막힌 타이밍에 뮤트의 습격이 일어난 거?’
생각해보니 저질러놓은 일이 한두 개가 아니잖아?
“말이 없군. 네가 교단의 규칙에 따라 우릴 대했으니, 나도 비질렌 가문의 규율에 따라 너를 대하도록 하지. 시그필란드 시(市)에서는 죄인이 입을 다물면 죄를 인정했다고 여겨 그 자리에서 형을 집행-”
‘이런 망할! 최소한 생각할 시간을 좀-!’
“무엇에 대한 죄목으로. 나를 심판하고자 하는가.”
츠츠츠츠!
정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오러가 담긴 검날이 몸에 감긴 쇠사슬을 잘라내며 들어오는 것을 보자, 생각보다 먼저 입이 움직였다.
‘이미지, 이미지를 굳혀야 한다. 가주가 오자마자 한 얘기가 내가 그 고압적인 종교인 모습으로 항소 기회를 줬을 때의 이야기야. 저들의 눈에 나는 고압적인 교단의 용사였다가, 괴물로 돌변하여 괴물을 마구 잡아먹은 기괴한 존재다. 여기서 종교인 컨셉마저 연기였다는 게 들통나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것도 믿지 않을 거야. 연기를 하는 거다, 박교수! 내 얼굴에 얇은 유리가면을 쓰는 거야!’
오랜만에 하이드랑 같이 뇌를 탈탈 털고 와서 그런가. 찰나의 순간에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가 팍팍 떠올랐다.
거칠게 쉬고 갈라진 목소리는, 마치 상처 입은 짐승마냥 더욱 낮게.
피가 흘러 들어가 빨간 물이 든 눈은 고요하게 반개하여 깊은 의미를 담은 눈빛으로.
피가 주변을 적시다 못해 작은 개울을 이루어 흐르고, 주변을 포위한 병사들의 창날이 제법 높이 매달려 못 박힌 나를 향해있는 상황.
일단 분위기 잡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긴 했다.
환경이 갖춰졌으면 당연히 이용을 해야지.
철그럭!
나는 미간에 닿아있는 가주의 검은 안중에도 없는 듯, 매달린 몸을 앞으로 숙여 결박한 쇠사슬을 팽팽하게 당겼다. 오러가 서린 검끝이 이마에 살짝 닿으며 핏방울이 흘렀다.
“죄라. 내가 죄인이라. 그렇다면 어디 그 죄목 한번 들어보고 싶군. 내가 교단의 용사가 되어 행한 일은 로 하람을 섬기고 이단을 찢어발긴 것밖에 없거늘. 가주께선 무슨 이유로 나를 이다지도 핍박하는 것이오.”
“나는 네가 죄를 지었다 한 적이 없다. 설명이 필요하다 했을 뿐. 변경의 수호자로서 평생을 몬스터와 싸워왔으며, 오전에는 내 아들의 가죽을 뒤집어쓴 괴물의 목을 베었고, 지금은 집채만 한 괴수에서 사람으로 돌아온 자를 마주하고 있으니. 내 그쪽의 정체를 묻기 위해 이 정도 준비하는 것이 그렇게 과하다 여길 수는 없지 않은가? 우선. 네가 사람인지, 아니면 저 짐승과 같은 존재인지부터 묻고 싶군.”
“나는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빛을 좇는 부나방이요, 광명에 눈이 멀어 다른 것을 볼 수 없는 맹아일지니. 질문이 잘못되었소, 가주.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오.”
나무 판에 매달린 거대한 사내로부터 갈라지되,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대답에 가주의 이마에 노기가 서렸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라. 내가 듣고 싶은 것은 그런 선문답이 아니라 명확한 사실이니. 네놈들과 저 대규모 공습이 정말 연관이 없다고 할 셈인가? 너희들이 오자마자, 채 이틀이 다 지나기도 전에 놈들이 도시를 습격하였는데도?”
“횃불을 밝히면 쥐떼가 흩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거늘. 이단 심문관이 이단을 밝혀내어 그들이 발악하는 게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오?”
스릉-!
내 대답에, 영주의 오러가 조금 더 이마를 파고들었다. 또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다는 의미겠지. 여기서 더 거슬리면 그대로 머리통을 쑤셔버리겠다는 의미다.
“….청산유수로군. 좋다. 믿을 수 없지만, 영민들의 보고로는 비록 네 손에 영지의 한 구획이 통째로 폐허가 되었긴 해도 죽은 사람은 없다고 하니 어느 정도 믿어줄 수는 있겠지. 좋다. 앞의 두 질문은 넘어가주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대답하라. 그 몸은…. 정말 교단이 만들어낸 것인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은근해지는 목소리. 나름 숨긴다고 숨긴 것 같은데, 나랑 말장난 하려면 돔의 총장이나 광명의 대주교, 300년 묵은 히어로 전대고수 엘프 정도는 돼야지. 마지막 질문에만 진짜 감정이 담기는 게 눈에 희미하게 드러났다.
‘….짜식이. 무투파도 꼴에 귀족이라고 제법 수작을 부릴 줄 아는군.’
영지민들을 통해 내 행동을 보고 받았다. 저 말에서 이미 영주가 나에 대해 필요한 정보를 어느 정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쳐있을 때도 사람 만큼은 안 죽였으니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지금 이렇게까지 난리 부르스를 떨 필요는 당연히 없을 터. 그러니 이 거창하고 취미 고약한 재판장도, 번쩍이는 창날도, 이마를 파고드는 오러도 죄다 마지막 질문을 위한 압박감을 조장하기 위한 장치라는 뜻이다.
‘변경백이면 작은 소도시의 왕이라고 봐도 되니까. 이 정도 정치 감각은 있어야겠지.’
물론, 그 상대가 나라서 씨알도 안 먹혔지만.
“….그저, 가장 깊은 어둠이 서린 곳에도 한 줄기 빛이 들었다고만 말하겠소.”
나는 가장 명확한 사실을 원하는 상대에게, 가장 불확실한 것으로 답하였다. 불확실하지만, 건드릴 수 없는 종교라는 영역으로. 대충 의미만 짐작할 수 있게 적당히 분위기 있는 대답을 말이다.
‘사실 이 질문이 나올까 봐 일부러 종교인 프레임을 마구 덮어쓰고 있었거든. 이거 물어보면 대답할 게 마땅치 않았으니까.’
사실 그대로 ‘뮤트에 침식당해서 언제 훼까닥 할지 모르는 몸입니다~’ 하면 재봉틀마냥 파바박 말뚝을 박아서 어디 지하 창고 같은 데 쳐넣어 버릴 것이고. 로드릭에서 그러던 것처럼 ‘마법사의 실험에서 탄생한 불쌍한 실험체입니다~’ 하면 ‘동부 3국의 마학(魔學)이 그 정도로 발전했단 말인가. 이런 마법 병기를 만들어낼 정도라니.’ 하면서 냉큼 잡아다가 제국 마탑이나 아카데미에 실험체로 넘겨버리겠지.
변경백이 원하는 대답도 두 번째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제국에서도 손에 꼽는 마스터급 검사도 고전해야 했던 망령기사인데, 그 옆에서 날뛰던 놈은 생전 처음 보는 힘으로 그놈을 아주 묵사발 냈거든. 말도 통하고. 인간에 대한 공격성도 없는 강력한 몬스터의 힘이라니. 평생을 산맥에서 내려오는 몬스터와 마주하고 살았던 변경백에게 있어서 내 힘은 참으로 탐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 힘의 근원을, 정체를 내 입으로 실토하게 하겠다고 이런 괴상한 귀족재판을 연 것이겠지. 정작 그 대답은 무적의 무지성, 무논리 회피기나 다름없는 [로 하람이 그러셨다. 아무튼 로 하람의 은총임. 신이 그랬다면 그런 거임] 같은 것이었지만.
츠츠츠측-
결국 ‘종교인이라 그랬다’ 말고는 다른 대답을 하지 않은 내 앞에서 인상을 잔뜩 찌푸린 변경백이 고민하는 사이.
또로록-
내 이마에서 흘러나온 핏방울이 검날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고, 땀에 젖은 머리칼을 한 뚱뚱한 남자 하나가 영주의 귀에다 대고 뭔가를 속삭이더니,
스윽, 철컥!
금방이라도 내 머리통을 두 쪽 내버릴 듯한 영주의 검이 검집으로 빨려 들어갔다.
“광명의 그림자라. 그래. 소문은 들어봤지. 신을 섬기는 자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짓거리를 하는 놈들이 있다고. 생각보다…. 로 하람의 그림자는 꼬리가 긴 모양이로군.”
“….빛이 밝으면 그 반향도 광대하기에.”
“……”
철그럭!
영주는 고뇌와 피곤이 가득한 표정으로 잠시 눈을 쓸더니, 내게서 등을 돌리며 옆에 있던 다른 기사 중 하나에게 말했다. 교단에서 만든 괴물이라는 확신이 들자, 자기가 건드릴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났다고 판단한 것이겠지.
“저자를 풀어주도록 하라. 따로 감시 중인 일행의 구속과 마법사의 마나 제어구도.”
“….감히 충언하건대, 재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증언에 따르면 저자는 피아 구분을 못 할 정도로 피에 취한 상태였다고-”
“내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 나이트 로델. 과정이야 어떻든 결국 용사는 그 어떤 피해도 아군에 입히지 않았으며, 우리와 어깨를 맞대고 적의 습격에 대항했다. 언제부터 비질렌이 전우를 외면하였지.”
가주의 서릿발 같은 음성에 기사는 더는 되묻지 않았다.
‘이 정도면…. 얼추 합격선은 넘은 것 같지?’
가주 입에서 적이 아니라는 확언은 나왔고. 내가 로박이 광신도라는 것도 충분히 어필했으니까….
“흐읍!”
꾸드드득- 티잉!
마지막으로, 내가 구속되어 변명을 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대화를 하기 위해 ‘잡혀있어준’ 것임을 보여줘야 했다.
어깨에 힘을 주자 어린아이 손목만 한 굵은 쇠사슬이 힘을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 끊어져 떨어지고, 나무판에 박힌 손발은 그 상태 그대로 쑥쑥 빼내버렸다.
“으으으으….”
“괴물, 괴물이야….”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좀 많이 겁에 질리긴 했지만. 어차피 온 동네방네 피 빨아먹는 괴물이라고 소문이 났을 테니 기왕이면 센 놈으로 소문나는 게 좋지 않겠어?
저벅. 저벅. 저벅.
그렇게 손발에 구멍이 뻥뻥 뚫린 상태로 내가 향한 곳은 저 위에서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두 손을 마주한 채 벌벌 떨고 있던 흰 법복의 주교였다.
“라투라.”
“오, 오오오오…. 라투라, 라투라 로 하람! 성자여, 가장 앞에서 어둠을 밝히는 이여….!”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고 있는 주교. 하지만 다른 주민들과 달리 그의 떨림은 공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내 손으로 결계와 함께 무너져내리던 신전에서 그를 구해냈고, 그 피에 물든 괴수의 목에 족쇄처럼 팽팽하게 걸려있던 성물이 그런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로 하람의 도구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그것을 본 주교는 그 난리통 속에서,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그의 눈에 있어 나는 ‘사악한 태생에도 불구하고 가슴 깊이 로 하람의 뜻을 받들었으며, 그것을 인정받아 그분의 도구로 선택받은 진정한 교인’ 쯤으로 보였던 게 아닐까? 지금쯤 광명 교단의 본단에서 끝없이 날아드는 신성 메시지 마법에 답하고 있어야 할 그가 신전이 아니라 이곳에 나와 있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어떻게든 영주를 설득해보고, 그게 안 되면 이단에 맞서 도시를 구하고 영주의 손에 처형당한 나를 그 눈으로 직접보고 시성(諡聖)하기 위해 여기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겠지.
“주교.”
“미, 미천한 광명의 도구 말레우스라고 합니다!”
“좋소. 말레우스 형제. 이단의 무리가 블루라인을 넘어 제국에 당도하였고, 그 피로 도시가 뒤덮였으니 당장 정화가 필요하오. 당장 교단과 연락을….”
“이미 수행사제들이 ‘광명의 눈’을 연결해둔 상태입니다. 인근 영지에서 사제와 성기사들이 출발했으며, 본단의 지침에 따라 대지계열 마법사를 고용해 제국 동부에 위치한 모든 영지의 지하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거의 울먹거리고 있는 주교는, 이 피투성이 현장이 너무나도 자랑스럽다는 듯 감격에 찬 눈으로 둘러보며 말했다.
“이 도시에 정화는 필요 없습니다, 성자시여. 당신의 피가 도시를 정화했으니.”
‘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내가 한껏 인상을 찌푸리자, 결국 격정을 참지 못한 주교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 앞에 무릎을 꿇고 합장하였다.
“이미 저 악신의 ‘피의 감염’에 대한 조치는 끝났습니다. 당신의 발이 닿지 못한 일부 구역의 영지민들을 제외하고, 당신께서 그 성혈(聖血)을 흩뿌린 모든 지역에서 그 어떤 감염증상도 확인되지 않음이 증명됐습니다! 그야말로 당신께서 성자라는 가장 명확한 증거! 악신의 그 어떤 사이한 술수도 로 하람의 손길이 닿은 자를 해할 수 없으니! 그야말로 교전에 나오는 사례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아닙니까! 오오오, 로하람이시여…. 가장 필요한 곳에, 언제나 가장 먼저 닿을지니! 아아아, 나를 벌하소서. 더 빨리 그 큰 뜻을 헤아리지 못해 성자를 모시지 못한 이 우둔한 사제를 벌하소서….!”
“주, 주교. 다시 말해보게. 내 피가…. 뭐라고?”
“라투라, 라투라…. 어흐흑!”
근엄한 표정을 유지할 생각도 못 한 채 다급하게 무릎 꿇은 주교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이미 종교적 희열에 빠져 기도를 올리는 주교의 정신은 저 머나먼 로하람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내 피가…. 뮤트의 감염인자를 억제한다고?’
교수는 새빨갛게 물든 도시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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