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1
Chapter.3 그 한 줌의 은화를 위하여(3)
***
냉정. 침착.
황무지에 사는 사람이라면 100번 강조해도 모자랄 미덕이다. 이 삭막한 땅 위에서는 후회할 시간조차 주지 않기 때문에 의심은 미덕이요, 수상한 정보는 거르는 게 현명하다.
‘급할 필요는 없지. 안전지역을 벗어났을 때는, 예외적인 임무를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 어디까지나 내 목적은 이 45구역을 지나 거래 상대를 만나는 것. 그 이상 위험부담을 지는 것은 손해야.’
“키히히, 어때. 맛이 당기지 않나? 꿈에서 골백번도 더 넘게 그리던 그 화려하던 시대가 그대로 남아있을 거라고?”
하지만, 미끼가 커도 너무 크다. 3차 세계대전 직후. 아직 스캐빈저가 그리 많지도 않던 시절에 겉만 슥 훑은, 사실상 새것과 같은 상태로 봉인된 부자들의 패닉룸.
‘냉정하게, 보수적인 시선으로…..’
“….규모는? 발견된 지 정확히 몇 시간이 지났지?”
“아직 정확한 정보는 없어. 발견된 지는 여섯 시간 정도 지났고…. 이제 겨우 뚜껑을 훑기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대박이 났다는군.”
“대박이라면….”
“2050년형 궤도 임무용 보호복 30벌. 보존 장치랑 같이.”
“케헥!”
너무 놀라서 사레가 들렸다.
‘내, 냉정! 치, 침착! 이, 이 정도로 흔들릴 7년 차 짬밥이 아, 아니야!’
“그, 으흠! 흠!…. 그 정도로 엄청난 물건이 있으면 벌써 인근 스케빈저들이 다 털었겠군?”
“음? 아, 그렇진 않아. 안에 변종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있었거든. 아마 3차 세계대전이 시작할 때 전부 입주해서, 안정될 때까지 안에서 기다리다가 뭔가 문제가 생겨서 못 나왔겠지.”
꿀꺽.
참자. 흔들리지 말자. 참아. 별거 아니야. 아니, 별거긴 한데, 위험부담이 클 거야. 좋은 건 이미 다 털리고 오래된 가구나 좀 남았-
“내가 저런 구조에 대해서 좀 아는데, 부자들이 저런 장기간 은신용 패닉룸을 지을 때는 절대 혼자 들어가지 않아. 사태가 끝나고 어수선한 바깥 환경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경호원들을 함께 데려가지. 1층의 보호복은 아마 그 치들을 위해서 준비된 물건일 테니, 지하에 매장된 쉘터는 적어도 30동, 많으면 7,80동 정도일걸?”
못 참아! 70, 깔끔하게 보존된 구시대 쉘터가 70개!!!!
뚜욱-
아아, 미안하다, 내 이성아. 오늘도 너를 붙잡는데 실패해버렸어.
“입구 상황은? 돔이나 렙터 소사이어티 같은 대형 집단의 동향은? 변종의 규모와 종류는 얼마나….”
“워워, 진정하라고 전우님.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잖아?”
키 작은 남자는 오른손에 말아둔 더러운 붕대를 풀고 그 밑에있는 장갑까지 벗은 다음, 땀에 절은 손을 대충 옷깃에 슥슥 닦아 내밀었다.
“벡스(Vex), 주변에서 그냥 벡스라고 부르는 사람이지. 상황이 이렇게 돼서 현지에서 동료를 좀 구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쪽이 눈에 띄더라고. 아까 그 삼거리 포인트, 나도 자주 쓰는 곳이거든!”
“….내가 누구인줄 알고 같이 가자고 하는거지? 막말로 내가 돔에서 보낸 첨병이라면 어쩔거지?”
“키히히힛!”
벡스는 쉰 목소리로 기괴하게 웃었다.
“연기가 서툴러, 연기가. 뭐, 쓸데없는 오해는 빨리 치우는 게 좋으니까. 너, 혼자 다니는 놈이지?”
“…..”
“대답할 필요는 없어. 한 걸음마다 자신의 위치와 노출 점을 확인하는 움직임. 백업 없이 혼자 전후좌우를 다 경계하면서 다니는 녀석들에게 생기는 습관이지. 아까 그 지도, 보통 놈들은 그렇게까지 안하거든. 혼자 다녀본 지 제법 오래된 녀석이라는 증거지.”
“….예리하군.”
“키히힛! 어려울 것 없지. 내가 그렇게 사니까!”
“하지만 혼자 다닌다는게 적이 아니라는 보장이 되진 않을텐데.”
“천만에! 지금 같은 시대에 혼자 산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하지.
위험한 시대잖아? 약한 자는 강자의 밑에 무리를 이루고, 더 약한 자는 죽고. 집단에 소속되지 않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한가락 한다는 의미지.
그리고 집단에 속해있지 않다는 것은, 규율에 얽매이기 싫거나 혹은 기타 개인 사정이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 어느 쪽이든 자기 줏대가 있는 녀석이라는 의미거든. 그런 녀석들은 적어도 말은 통한단 말이야! 키히힛!”
“….그래서, 나를 고르셨다?”
“그래. 뭐, 위험을 따지자면 끝도 없지만, 지금 세상에 리스크 없는 선택이 어디 있나? 다 감수해야지. 군 출신이니 작전 짜는 것도 쉬울 테고, 실력도 있고. 그쪽이 마음에 들었다 이거야. 어때, 함께 보물을 사냥하러 가겠나?”
“…..”
잠깐 갈등했지만, 고민은 짧았다. 이미 240만 이라는 위험이 턱 밑까지 다가온 지금, 다소의 위험을 감수해서 큰 돈을 벌 수 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다.
교수도 손목 부분의 버클을 풀고 장갑을 벗어 손을 내밀었다. 본명을 밝힐 수는 없다.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니까. 닉네임도 안 된다. 나와 professor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누군가 내 이동 경로를 역추적해서 쉘터의 위치가 드러날 수도 있으니까. 방송인은 이런 스캐빈저들의 사냥감 1순위다. 이름. 이름이라…. 외부에서 쓰는 이름은 역시 좀 쎄보이는 게 좋겠지?
교수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행맨(Hanged man)이다. 만나서 반갑군.”
“키힛, 전우님, 작명 솜씨가 영 꽝이야. 역시 단명하겠어.”
터억.
그렇게 임시 동맹이 체결되었다. 오랜만에 잡아본 사람의 손은, 음…. 생각보다 불쾌했다. 으 찝찝해.
***
그렇게 동행하기로 한 뒤, 벡스는 자신이 아는 좋은 장소가 있다며 앞장서서 움직였다. 작고 왜소한 체구와는 다르게 그의 움직임은 뒤따라가기 벅찰 만큼 날렵했다.
“그나저나, 어….. 햄맨? 전우님은 억세게 한번 운 좋군.”
“저기,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말은 원래 그렇게 하는 거야, 아니면 새로 생긴 스캐빈저 언어 같은 거야?”
아까부터 거슬렸는데, 이 벡스라는 아저씨는 말이 좀 이상했다. 어순도 이상하고, 단어도 막 튀고, 알아듣긴 알아듣겠는데 귀에 심하게 거슬렸다.
“쯧. 너도 황무지에 혼자 살면 알 거 아냐. 누구랑 말할 기회가 쥐뿔도 없는 거.”
“음…..”
‘주인님!’
‘주인니이이임!’
‘흐흐흐 ,인간!’
‘주인니임!’
아닌데. 노이로제 걸릴 만큼 시끄러운 놈 하나 있는데.
“매일 손에 피 묻히고 살면서 말도 안하고 살다보니 머릿속으로 하는 망상만 늘어버렸거든. 어느 순간 말이 머리를 못 따라가더라고. 머릿속에서는 다 내뱉었는데, 입은 아직 말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말을 절고, 단어도 내가 생각하는 데로 막 나가게 돼버렸지.”
흠. 재미난 정신병이로군. 정신에 문제가 있다,라…. 동료 포인트 -1 점.
“그럼 위험한 거 아닌가? 약은 챙겨먹고 있나?”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이 들땅에 미치지 않은 놈이 어디 있다고?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모가 났으니 살아남은 거지. 나 정도면 양반이라고?”
타닥, 탁!
벡스는 낄낄거리며 막다른 골목에서 벽을 박차 넘었다. 아무리봐도 그냥 몸놀림이 좋은 정도가 아니다.
“어디서 복무했지?”
“응? 키히힛! 아까 내가 물어볼 때는 찬바람만 날리더니!”
“그때는 적이었고. 지금은 동료니까.”
“히히! 음, 글쎄. 나도 자존심이 있는 놈이라 말해주긴 싫지만, 우리 억세게 운 좋은 전우님이 물어보니 대답해줄까?”
“운이 좋아? 내가?”
“그럼! 세상 모든 스케빈저가 꿈꾸는 천금 같은 기회를 그냥 지나가는 길에 만났으니, 이게 운이 좋은 게 아니면 뭐야!”
글쎄. 네가 충동구매에 미쳐버린 AI 때문에 빚에 치여 죽기 싫어서 뭐라도 하기 위해 나온 길이였다면, 생각이 좀 다르지 않을까 싶은데.
-부웅!
전기가 끊긴 전선의 탄력을 이용해 한번에 3층 높이의 창문으로 올라간 벡스가 손목을 덮은 천을 걷어 보이며 말했다.
“나는 연합군 제3 공수부대에 있었지. 공3이라고도 불렸는데, 혹시 알고 있나? 햅번?”
“‘행맨’이라고 말해준 지 3분도 안 됐다.”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니까. 그냥 입에서 그렇게 나오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터억-
울퉁불퉁하게 파인 건물 외벽을 기어 올라 벡스가 있는곳에 도달한 교수는, 그가 보여준 문신이 눈에 익다는 것을 느꼈다.
“제 3이면….. 타렐 그라운드 탈환 작전?”
“오! 아는구만! 내 거지 같은 인생 전체를 싸그리 모아서 응축해도 그날 하루만큼 거지 같을 순 없었던 날이지! 이거 같은 전장에서 싸웠을 수도 있겠는데? 햅번 자네는 어디였나, 응?”
“음….14였지.”
교수는 잠시 망설였지만, 그냥 알려줘 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잠시나마 등을 맡겨야 할 사이니 어느 정도 친분은 쌓아두는 게 좋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털썩.
그런데, 폐건물 안으로 들어와 뭔가 주섬주섬 챙기던 벡스가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졌다.
“드디어 귀가, 내 귀마저 가버린 맛인가? 14? 14 특작대 출신이라고?”
끄덕끄덕
교수의 긍정에 ‘이럴 리가, 믿을 수 없어’ 같은 소리를 지껄이던 벡스는, 돌연 벌떡 일어나 교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차악!
‘빠르다!’
반응했다. 아니, 반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벡스가 교수의 손목을 붙잡아 살피고 있었다.
“그거! 그그그 그거 있잖아! 막 몸에 새기면 안 지워지는 거!”
“문신?”
“그래! 문신! 보여줘! 설마 없다고는 안 하겠지?”
‘….정말 이 자식이랑 같이 가도 되는 건가? 아까보다 정신이 훨씬 불안정한 것 같은데?’
실력은 지금까지 보여준 것만 해도 확실한데, 이건 뭐 조울증도 아니고….
툭, 툭
교수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아직도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벡스를 보며, 보호복의 버클을 풀어 어깻죽지 뒤쪽, 날개뼈 위의 문신을 보여주었다.
작고 심플한 문신. 얇은 동그라미 안에 세워진 작은 화살표. 의미는,
이 안에 있는 것 빼고 다 죽인다.
14 특수 섬멸 작전 부대, 통칭 14 특작대의 부대 마크였다.
“어… 아으으…. 14….. 진짜 14다, 으흐흐, 흐으으으…. 14야, 진짜 14라구…..”
문신을 확인한 벡스는 손을 덜덜 떨더니, 갑자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더니, 건물 안을 빠른 속도로 마구 걸어 다니며 뭔가를 들어 옮기기 시작했다. 대부분 잡동사니처럼 보였는데, 겉보기에는 의미 없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 이봐? 너 괜찮아?”
“이러는정신나간놀라운사물이날을오늘잘못힘들어다시….”
“저기….벡스?”
“내가닿아서구르면작은오늘수므러@*($^!@)#&!@%^”
‘그냥 버리고 갈까?’
툭하면 방언에 가까운 말을 뱉는 데다 감정의 기복, 아니 제정신의 기복이 널뛰는 군인 출신의 스케빈저.
아무리 봐도 믿을만한 동료는 아닌 것 같았다.
***
벡스의 기행이 이어지는 동안, 교수는 백팩에서 망원경을 꺼내 조심스럽게 밖을 살폈다.
“하나, 둘, 셋, 넷….. 벡스 녀석, 거짓말을 한 건 아닌가 보군.”
교수가 센 것은 사람이 아니라 깃발이었다.
“붉은색 가시나무 깃발…. 저건 튜라의 아이들이고. 원더러는 당연히 왔겠지. 거리가 워낙 가까우니까. 베니….는 안보이고. 렙터도 없고. 또…. 저게 어디 깃발이었더라. 롤링 코프스였나? 거기 전멸한 줄 알았는데. 나머지는 다 뭐야. 죄다 처음 보는 깃발투성이니-”
“흠흠! 잘 모르겠지? 45구역은 눈 한번 돌리면 새로운 스캐빈저가 탄생하는 구역이니까.”
“우와악!”
교수는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기겁했다.
언제왔는지, 벡스가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내 옆에서 창밖을보고 있었다.
“사과하지. 내가 일이 계획대로 안 풀리면 조금…. 혼란에 빠지는 경향이 있어서.”
“방금 그게 ‘조금’ 이라고 할 정도면…. 많이 혼란에 빠지면 화염병을 양손에 들고 춤이라도 추나?”
“아냐! 이건 그저…. 계획이 틀어진 것에 대한 선물상자라고 할까…. 내가 직접 정한 곳으로 내 계획이 옮겨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녹아내리지….”
‘아까보다 말이 더 지리 멸렬 해졌는데?’
참 묘한 화법이다. 알아듣기는 힘든데 의미는 다 통하니. 계획이 어그러져 생긴 짜증을 물건을 정리하는 것으로 진정시킨다는 뜻으로 들렸다.
“도대체 무슨 거창한 계획을 세웠길래 그 난리를 피운 거야?”
“음….. 그게…..”
베니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망설이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너를 미끼로 던지고 저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거든.”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그래, 처음 만난 사람치고 너무 협조적이다 싶었지. 그래도 같은 전장에서 싸운 군인이라 살짝 믿어봤는데. 나도 참 멀었다 멀었어. 아직까지 사람을 다 믿고.
어차피 모여드는 스캐빈저의 숫자를 보니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긴 그른 것 같았다.
교수는 쌍안경을 잘 접어 배낭에 넣은 다음, 짐을 정리해서 일어났다.
“어, 어디가, 햅번!”
“어디 가긴. 내 갈 길 가야지. 만나서 즐거웠다, 전우님. 여기까지 빨리 올 수 있게 도와줬으니 그걸로 날 속인 건 퉁쳐주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벡스는 눈에 띄게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나 생상이, 아니, 상, 생, 이익- 아무튼, 계획을 바꿨다고!”
“너도 깔끔하게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저 악다구니 속에서 어떻게 돈 될만한걸 들고 튀겠냐고. 무엇보다, 이미 너는 나를 한번 속였잖아? 그런 놈한테 총 들고 내 등 뒤에 서달라고 하는 건 좀 그렇지. 그냥 여기서 헤어지자고.”
속으로는 미련이 엄청나게 남았지만, 잊어버리려 애쓰며 등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는데, 귀신같이 접근한 벡스가 또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놔.”
“….못 놔.”
“벡스. 좋게 헤어지자. 우린 아직 서로에게 아무런 상해를 입힌 게 없잖아? 이대로 헤어지느게 서로한테 해피한 길이라고.”
“아, 안돼. 햅번, 이대로 가면 나 생긴 문제가 커.”
벡스가 틀어쥔 손목에 더 힘을 주었다.
쓰읍-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아까부터 계속….!’
교수는 그대로 붙잡힌 팔을 힘껏 잡아당겨 벡스를 품으로 끌어들이며, 동시에 반대 팔로 찍어누르듯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벡스의 목과 가슴을 제압했다.
“거 아까부터 손 좀 빠르다고 툭툭 건드는 거 봐줬는데, 너랑 나랑은 체급에서부터 차이가 있거든? 안 한다잖아. 나 안한다고! 왜 나한테 그렇게 집착하냐고!”
“끄윽, 으으윽!”
목젖을 누른 팔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벡스는, 숨통이 트이자 막혔던 울분을 토해내는 것처럼 소리쳤다.
“십사아아아!!!”
교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살짝 물러나고 말았다. 자신의 목을 누른 팔을 붙잡고 있던 벡스는 울부짖고 있었다.
“그래에에!! 나 고장 났다! 14에 빚이 있어! 평생 가도 못 갚을! 널 이대로 보내면 나 정리가 안돼. 뭐라도 하지 않으면 정리가 안 된다고! 영원히! 으아아아!!!!”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지만, 의미는 닿는 말.
“빚이 있어? 정리가 안돼?”
“5년! 5년 만에 겨우 기회를 잡았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너에게서 그들과 비슷한 냄새가 나서 나도 모르게 끌어들였어! 이대로 보내면 나 죽어! 햅번, 제발! 이제 안 속일게.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다시는, 다시는 그날처럼….!”
‘…..강박증이다.’
전장에 있을 때 자주 봤다. 나무로 꼭 목창 세 개를 깎아서 막사 입구에 박아두지 않으면 잠을 못 자는 녀석이나, 애지중지하던 구멍 난 양말이 없으면 패닉에 빠지던 녀석. 벡스가 겪고 있는 증상은 그것이 상당히 뒤틀리고 악화된 경우였다.
“으아아아!!! 14…. 14….!!! 제발! 제발!!”
‘집착 대상은….14 특작대인가. 하, 참. 된통 걸렸군.’
완전히 미쳤으면 그냥 좋은 일 한다 생각하고 머리에 구멍 하나 뚫어주고 가겠는데, 이렇게 미친 듯이 울면서도 녀석의 손끝은 자신의 허리춤에 매인 쿠크리에서 일정 거리 이상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 녀석, 벗어날 수 있으면서 내가 유리한 포지션을 잡게 그냥 뒀군.’
내가 죽이려고 마음먹는 순간 칼을 뽑아 제압을 풀 생각이겠지. 전투가 벌어지면 쉽게 제압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총소리가 나면 그 즉시 저 앞에 바글바글하게 모인 스캐빈저 때의 관심을 끌게 될 텐데, 그것도 부담스럽고.
교수는 결국 벡스를 제압하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으으으…. 햅번, 난 3공에서 가장 날랜 놈이었어. 쓸모 있을거야. 제발 도와줘. 이제 벗어나고 싶어. 부탁이야. 내가 그날의 빚을 정리할 수 있게 해줘….”
“….하나씩 말해라 하나씩. 염병, 세상에 미친놈 숫자가 늘어서 그런가, 이거 가는 곳마다 미친놈이 꼬이니…. 굿이라도 하든가 해야지 원.”
이런 녀석은 풀어줘도 문제다. 나보다 빠르고 잘 숨는 녀석. 아마 흔적도 잘 찾을 테니 우리 집까지 따라올 것은 안 봐도 훤했다.
‘….별수 없나.’
교수는 몸부림치는 동안 바닥에 떨어진 벡스의 터번을 주워들어, 손으로 대충 턴 다음 녀석에게 던져주었다.
“행맨.”
“….으?”
“햅번이 아니라 행맨이라고 부르면 용서해주지.”
잠시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교수를 보던 벡스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으으, 흐으으, 햅, 행, 햅브으으으으…..”
벡스는 교수가 던져준 터번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