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2
Chapter.3 그 한 줌의 은화를 위하여(4)
***
훌쩍!
“미리 말해두는데, 크흥! 나는, 어디까지나 내 병을 고치고 싶을 뿐이다.”
“어, 그래.”
“내가 빚을 진 것은 14 특작대의 다른 사람이지, 네가 아니라고.”
“음,음. 그럼 그럼.”
“그러니까 이런 나의 특수한 상황을 이용해서, 나를 노예처럼 부리거나-”
“안 해.”
“네 집단에 강제로 끌어들이려 한다면….”
“안 해. 절대, 안 해! 그럴 일 없으니까 그딴 걱정은 할 생각도 하지 마! 머릿속에서 지워!”
집에 들어가면 한 명은 ‘주인니임~’ 하면서 또 뭔 사고를 쳤을지 모르고, 한 명은 ‘14! 14!!!!’ 하면서 소파 들고 뛰어다니고. 난 그거 감당 못 해. 밖에 나가 살 거야. 그럼.
내가 용서해준다고 말을 하자마자 벡스의 폭주는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그 뒤로, 뭐. 처음 만나 어색한 사람들 끼리의 호구조사 토크를 좀 가졌지. 어디 사냐, 그딴거 묻는 거 아니다, 뭐 하고 사냐, 그것도 묻는 거 아니다, 주로 어디서 파밍하냐, 너 이 새끼 일부러 그러는 거지, 몇 살이냐, 등등.
“어이 벡스. 뭐 정리를 하든 청소를 하든 알아서 하는 건 좋은데, 우리 이렇게 여기서 시간 죽이고 있어도 되는 거야? 지금, 이 순간에도 저렇게 꾸역꾸역 모여들고 있는데?”
“되지. 기다리면 알아서 기회가 나올 거니까.”
“오, 뭔가 알고 있나 보네? 역시 유능-”
“형.”
빠직!
“너 이 개호로잡놈 쉐끼가 한 번만 더 그 형 소리 지껄이면 아갈머리를 찢어서 쉘터 포탑 아래 걸어놓고 변종 올 때마다 덜걱거리면서 입을 잘못 놀린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준다고 했지!!!!”
뭐, 침착과 냉정? 그건 이 눈앞에 있는 대자연의 기적을 만나는 순간 증발해버렸다.
“그 얼굴로 어떻게 나보다 한 살 아래야!”
“황무지의 환경이 좀 그렇잖아?”
“도대체 뭘 어떻게 살아야 그렇게 되는데? 핵 떨어질 때 착탄지점에서 하늘 보고 서 있었냐?”
“좀 너무 하시네 말이 많이. 사람 얼굴 가지고….”
“액면가랑 시장가가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얼굴은 늙었다 쳐도 말투까지 늙었다고! 넌!”
“그럼 황무지에서 나이 어리다고 ~요, ~요, 하고 다니겠어? 그것도 생존 전략의 일종이라고.”
축 처진 어깨.
왜소한 체격.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주름투성이 늙수그레한 얼굴.
바싹 마른 입술.
가늘게 찢어진 눈.
스물세 살.
‘오, 빌어먹을 신이시여. 제발 적당히 좀.’
내 게임 캐릭터도 애늙은이 소리를 듣고 있지만, 이건 정말 아니지. 벤자민 버튼도 아니고.
처음 벡스의 나이를 들었을 때는, 또 그 이상한 말투가 문제가 된 줄 알았다.
‘스물셋.’
‘….그쪽도 참 고생이구만. 자, 다시 말해보자고. 몇, 살?’
‘스물셋.’
‘아니, 하, 이게 마음대로 안된다는 건가. 그럼 손가락은 어때? 왼쪽은 십의 자리, 오른쪽은 나머지. 몇 살?’
스슥- [23]
‘숫자도 모르냐!’
‘스물세 살! 이십 삼! 좀 겉늙어서 그렇지 이십 대 초반이다!’
‘지랄! 그럼 니가 핵 떨어질 때 나이가-’
‘중2’
‘네 이노옴! 내 앞에서 다시 거짓말을 했으니 죽이겠다!’
‘아니 형! 왜 이렇게 사람 말을 안 믿어!’
‘형 같은 소리하네! 니가 한 말을 믿으려면 신앙의 영역까지는 넘어가야 돼 임마!’
.
.
.
.
그렇게 파멸적인 호구조사가 끝나고, 나는 벡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형’이라고 부르지 말 것을 단단히 못 박았다. 정말 미안한데, 징그럽다고. 그 얼굴로 쪼르르 달려와서 형이라고 부르면.
“혀-”
빠직!
“….햅번.”
스으으읍- 하아아아. 이너피스, 이너피스.
“그래, 하던 거나 마저 하자. 그래서, 기다리면 뭐가 어떻게 되는데?”
“음…. 말로 하는 것보다 보는 게 더 빠르겠지.”
벡스는 창가에 다가가 밖을 살피더니, 내게 손짓했다.
“저 밖에 스캐빈저가 몇 무리나 있을 것 같아?”
“음…. 글쎄. 얼추 보이는 깃발 만 세어봐도…. 17? 18?”
“그건 깃발을 들고 올 정도로 세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는 놈들이고. 그럴 수준이 안되거나, 그럴 필요가 없는 놈들까지 하면 25 무리 정도 모였어.”
교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펄럭이는 깃발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그럴 필요가 없는 놈들이라…. 일의 사이즈가 크다 보니 제대로된 스캐빈저들도 빨리 도착했나보군.’
휘우~
“굉장한데. 전쟁 이후에 저만한 수의 스캐빈저가 모인 적이 있나?”
“없지. 가뜩이나 여긴 스캐빈저 밀집 지역이라 더 빨리 모이기도 했고.
중요한 건 저 치들이 골목 사이에서 피 터지게 싸우던 놈들 이라는거야.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면서 장전부터 하던 녀석들이 지금 한 자리에 모여서, 서로 견제하느라 저 보물 방에 못 들어가는 중이지.”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시간을 두고 순차적으로 몰려왔다면 먼저 들어간 녀석들을 죽이네, 나오는 놈들을 죽이네 싸움이 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안에는 변종이 우글거리니 잽싸게 들어가서 털어오지도 못하고, 나름 준비를 해서 뚫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하나둘 모여든 스캐빈저들이 서로를 견제하게 된 것이다.
“하긴. 저 상태에서는 먼저 들어가서 길 뚫는 놈들만 손해 보는 거니까.”
“단순 손해가 아니지. 피 터지게 길 뚫어놓으면 막바지에 등짝에 총 맞고 다 죽을걸?”
교수는 대치중인 스캐빈저들을 보았다. 한쪽에 입구를 두고 둥글게 둘러 서서, 총구가 서로를 향하게 놓고 웅성거리는 녀석들. 한눈에 봐도 사이좋게 손잡고 들어갈 일은 없어보였다.
“그럼 결국 싸움이 나긴 난다는 건데….. 저 손해 보기 싫어하는 스캐빈저 녀석들이 먼저 움직이겠어?”
“움직일 수밖에 없지.”
“왜?”
“보물 방이 열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 렙터 소사이어티에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엔진에 불이 나도록 달려오고 있거든.”
“아오, 썅. 그놈들도 온다고?”
교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렙터 소사이어티. 거의 돔에 필적할 만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집단으로, 매우 잘 통제된 대규모 약탈 집단이라는 면에서 돔과 대치하는 입장에 있다. 집단 상층부 대부분이 전 군인으로 이루어진 덕분에 규율이 매우 엄격하고, 손속은 더 엄격하며, 수익에 대해서는 더더욱 엄격하다.
“….얼마나 걸리겠냐?”
“출혈을 각오하고 본대를 끌고 온다고 들었으니, 늦어도 하루면 도착하겠지.”
“24시간이라…. 스캐빈저 친구들이 똥줄이 좀 타겠군.”
“키히힛, 그렇지. 지금도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있을 걸.”
일반적인 스캐빈저, 사이코 갱을 쓰레기통을 뒤지는 개나 고양이라고 보면, 렙터 소사이어티는 그것들을 잡아먹고 사는 늑대라고 볼 수 있다.
집단의 규모, 전투의 숙련도, 장비, 모든 면에서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이 렙스 친구들은 전투력 하나는 끝내준다. 놈들이 도착하면, 숫자가 얼마나 되든 스캐빈저는 도망쳐야 한다.
탁.
벡스의 손가락이 지도의 한 부분을 짚었다.
“렙터 소사이어티에 대한 정보는 스캐빈저들도 알고 있을 거야.
황무지에서 살다 보니 반쯤 미쳐있는 놈들이, 평소에 죽일 듯이 미워하던 녀석들 바로 옆에서, 그놈들 때문에 눈앞의 보물에 다가가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는데, 이제 시간의 압박도 받고있지. 오늘 밤,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싸움이 날걸?”
“그럼 우리는 그 틈을 타서….”
“침투해야지. 아마 우리랑 비슷한 작전을 짠 녀석들이 몇 명 있을 테니까, 그 녀석들은 좀 조심해야겠지?”
교수는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려보았다. 싸움이 난다, 이건 기정 사실이고. 전투가 벌어지면 너도 나도 난리를 피우기 시작하겠지. 혼란이 생긴다. 그때, 그 난리통 속에 몸을 감추고 들어간다.
“뭐, 작전 자체는 심플하네. 쏘면, 뛴다. 맞지?”
“그렇지. 침투하는동안 한번도 안 걸릴수는 없지만, 어느정도 소수의 선두는 녀석들 입장에서도 바라는 일이니 크게 공격적으로 나오진 않을거야. 누군가는 변종을 처리해야 되니까.”
“그럼 작전 리미트는 언제 까지냐? 렙터들 도착할 때까지?”
톡, 톡, 톡
벡스는 작은 돌멩이를 쌓았다, 무너트리기를 반복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것보다 시간이 더 부족할거야. 렙터 소사이어티보다 먼저 해피 블라인드가 움직였거든.”
“뭐? 그 광신도들이 왜…. 아, 이거 구시대 물건이구나.”
“음. 해피 블라인드가 움직이니까 당연히 예술가 연합도 움직일 거고.”
“…..진짜 빅 이벤트는 빅 이벤트구만. 거물이 벌써 몇이나 오는겨.”
해피 블라인드, 예술가 연합. 둘다 이런 구시대 유물같은게 발견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오는 놈들이다. 극단적 순수 주의자인 해피 블라인드는 눈에 띄는대로 다 태워버리려고, 예술가 연합은 하나라도 더 보존하려고. 둘 다 황무지에서 쟁쟁하게 이름을 떨치는 집단이다.
세상이 쉘터 단위의 수많은 소집단으로 나뉘어 살며 천천히 미쳐가다 보니, 이런 기이한 이념을 지닌 집단이 수십, 수백 개씩 생겨버린 것이다.
“적어도 돌입하고 16시간 안에는 필요한 것 챙겨서 빠져나와야겠지.”
벡스는 완벽하게 정리된 자신의 잡동사니를 우르르 무너트리더니, 그 안에서 먼지투성이 칼로리 바를 꺼내서 내게 내밀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딱딱한 칼로리 바를 꺼내 흔들어보였다.
“내꺼 있다.”
“그럼 됐고. 푹 쉬어둬, 햅번. 일단 시작되면, 그때부터는 쉴 시간이 없을 테니까.”
“그래, 잘 수 있을 때 자둬야지. 안 그래도 이동하느라 피곤했는데. 아, 벡스. 물 없냐?”
“지금은 없고, 새벽에 저기 갈라진 기둥을 핥으면 거기 맺힌 이슬을 마실 수-”
“됐다. 어휴, 집 나오면 고생이지.”
교수는 가방에 적당히 기댄다음 눈을 감았다. 벡스의 말대로, 쉴 수 있을 때 잘 쉬는 것도 살아남는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으니까.
***
타앙-!
철컥!
총성이 들리자 벌떡 일어난 교수는 반사적으로 가방에 매어둔 총부터 뽑아 들었다.
‘시작이다.’
곧바로 배낭을 메고 창가에 도착하자, 벌써 일어나있던 벡스가 바깥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아, 햅번.”
“….안 잤냐?”
“소란스러워서 먼저 깼다. 시작한 모양이야.”
콰아앙-!
“….과연. 신호탄 한번 화려한데.”
저 멀리, 스캐빈저들이 모여있던 곳에서 폭음과 총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햅번. 따로 필요한 것 있어? 내가 가진 건 별로 없지만 챙겨가고 싶은게 있으면…..”
“개소리.”
후두둑-
교수는 가방을 들어, 물과 식량, 전선과 무기를 제외한 잡다한 물건을 모두 쏟아버렸다.
“필요한걸 들고 가는 게 아니라, 들어가서 필요한 걸 챙겨 나와야지. 안 그래?”
그런 교수의 악동같은 모습에, 벡스의 입에도 미소가 걸렸다.
***
“끄, 끄으으으!”
“총성 덕분에 소음을 감출 필요가 없는건!”
뚜둑-
“참! 좋네.”
푸욱-!
“커억!”
“우리랑 비슷한!”
촤악!
“-생각을 한 녀석들이 생각보다 더 많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말이야.”
“조용히 있었으면 그냥 지나갔을 것을, 왜 총을 들고 지랄을 해서 죽는 건지.”
교수가 벌써 세 번째 만나는, 입구 근처 건물에 몸을 숨기고 있던 스캐빈저의 목을 돌려버리는 동안 옆에서 다른 녀석의 목을 그어버리던 벡스가 대답했다.
“그나저나 대단한데? 역시 14 특작대 출신이야. 나만큼 이곳 지리를 아는것도 아닌데 나랑 비슷한 속도로 따라와서는, 나보다 더 적을 빨리 발견하고 제압하다니. 14특에 있을 때 주로 뭘 담당했나? 잠행? 돌격? 원거리 지원? 아니면 팀 리더?”
“이런 개털…. 아무것도 없잖아? 음? 나?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고.”
숨이 끊긴 스캐빈저의 품을 뒤져보던 교수는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보급이었어 보급. 14특작부대 전용 보급병.”
“뭐? 특수부대에 보급병이 있어 무슨? 작….. 뭐였더라, 아무튼 그 지역에서 적들을 마크해주는 아군 한명 한명이 얼마나 소중한데 그 귀한 인원을 보급병으로 썼다고? 말이 안되는데?”
“그치? 말이 안되지? 그런데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는게 군대더라고. 나중에 듣기로는 높으신 분이 원래 14 특작대에 들어갈 인원의 서류를 조작해서 자기 수행원으로 박아넣고, 그 빈자리에 채우려고 하다보니 어어 하는 사이에 내가 들어가게 됐다고 하더라고. 그 당시에 나도 워낙 일이 많이 꼬여있었거든.”
교수는 잠시 과거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특작대에서 제일 쓸모없는 부대원이었지. 처음엔 부대원들도 죄다 혀가 마르고 닳도록 욕을 해댔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짐이 안될 정도까지는 됐지.”
콰앙!
후두두둑-
교수와 벡스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쏟아지는 흙먼지 너머로 사제 폭탄 특유의 정제되지 않은 화약 냄새가 확 끼쳐 들어왔다. 벽 뒤로 슬쩍 내다보니 폭발 덕분에 먼지가 뿌옇게 끼어 있었다.
타닥-!
곧바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동시에 뛰어 들어갔다. 뿌연 폭연속을 달리는 둘 옆으로,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었거나, 전투하는 와중에도 기회를 노리고 있던 몇몇이 같은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은…. 견제할 필요까진 없다. 우리 둘만으로 저 안에 가득한 변종을 처리하는 건 힘드니까.’
교수는 반사적으로 돌아가던 총구를 다시위로 올렸다.
“크으으으-”
“그아아-”
“변종이다!”
“다리! 다리부터 노려!”
앞에 먼저 간 스캐빈저가 있었는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벡스! 들어가서 네가 어제 말한 그 대박 경비실 나오기 전에, 노출되지 않은 곳에서 정비한다! 오케이!”
“좋아.”
“그럼 지금부터는, 음성이 아닌 수신호로 대화한다! 명심해! 저거 다 잡기 싫으면 죽어도 걸리면 안돼!”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말 한마디 없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달려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