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3
Chapter.3 그 한 줌의 은화를 위하여(5)
***
잔해에 뚫린 구멍으로 무사히 진입했고, 홀처럼 생긴 곳을 지나 지하로 내려오는 것까지도 성공했다.
“허억, 허억, 여기가 어디쯤이지?”
“흐읍, 오는 길에 각이지고 쇠로 된 구조물을 만졌어. 살짝 두드렸는데 빈 소리가 나는 걸 보니까, 쓰레기통이나 라커같은 거였겠지. 일단 제대로 들어왔어. 그 말로만 듣던 보호복 30벌이 나온 방이야.”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였지만 불을 쓰는 것에는 신중해야 했다. 지금도 지독한 악취와 변종들의 신음소리가 주변에서 희미하게 들렸고, 또 이곳 지하에는 다른 경쟁자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 스캐빈저가 가득했으니까.
두 사람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필사적으로 길을 더듬어 오던 중 우연히 손에 닿은 문손잡이를 열고 안으로 들어간 다음에야 겨우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겨우 귓가에 속삭이는 수준이었지만.
더듬, 더듬
‘공기가 차갑다. 바닥도 차갑고 매끄러워. 살짝 소리도 울리고.’
익숙한 느낌이다. 흔히 집에서 맨발로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느껴지는, 타일의 감각.
“….화장실이다. 잠깐 정비를 할 정도는 되겠어.”
소리가 제법 울리는 내부에서 변종의 신음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보통 화장실은 건물의 끝부분에 짓게 되어있었다. 입구만 주의하여 살피면 되니 사방이 경계대상인 다른 곳보다 훨씬 안전하다.
“어이, 벡스. 광원이 될 만한 것 가져왔어?”
“키히힛, 지하라길래 당연히 챙겨놨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라서 그리 많이는 못 챙겼지.”
벡스는 가방에서 대충 만든 횃불을 하나 꺼냈다. 부러진 의자 다리 같은 것에 기름 먹인 천을 감은 것. 저걸로는 15분도 못 버티고, 필요할 때 불을 끌 수도 없다.
“줘봐.”
교수는 벡스에게서 횃불을 건네받은 다음, 바로 분해해버렸다. 기름 먹인 천과, 그것을 묶었던 철사 약간, 한 팔 길이 목재 하나.
“햅번, 무슨 짓이야! 아무리 나라도 앞을 못 보면 길을 찾기가….”
“쉬이이.”
교수는 천천히 벽을 더듬어 화장실을 살폈다. 이건 벽이고, 갑자기 튀어나온 구조물, 이건 세면대로군. 그럼 앞에 있는 건 거울이겠지.
곧장 세면대 위로 올라간 교수는 최대한 팔을 위로 뻗었다. 다행히 손이 닿는 걸 보니 그렇게 천장이 높지는 않은 모양. 세면대 위를 걸으며 위태롭게 천장을 더듬던 중, 갑자기 쏙 들어가는 부분이 있었다.
“….찾았다.”
교수는 손가락이 들어간 부분의 끝에서 만져지는 작은 전구를 돌려 뽑고, 그 주변을 감싸고 있던 부분도 칼을 툭툭 밀어 넣어 뽑아냈다.
“그게 뭔데?”
“전구.”
“전구는 왜? 배터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당연히 나도 원래 용도대로 쓰려고 가져온 건 아니지. 내가 찾고 있던 건, 이 둥근 유리였다고.”
전구의 뒤쪽 접촉부를 돌려서 빼낸 다음, 좁은 끝부분을 살짝 깨서 속에 있는 동력부와 필라멘트를 모두 손가락으로 끄집어낸다. 그렇게 속이 텅 빈 유리병이 된 전구 속에 가져온 기름을 조금 담고, 길게 찢은 천을 말아서 안으로 넣어준 다음, 접촉부를 조립하고 천의 끝을 살짝 밖으로 빼내면-
탁, 탁,
화륵!
마체테 뒷부분으로 잡철을 몇 번 비껴쳐 주자, 금방 불똥이 튀어 불이 붙었다.
“짠. 간이 램프 완성.”
“와…. 쓸만해 보이는데?”
“쓸만해 ‘보이는’게 아니라 그냥 쓸만해. 내가 집에 있을 때도 밖에 나갈 때 가끔 쓰는거니까. 벡스 네가 말했잖아. 여기는 보물창고나 다름없다고. 이곳에 있는 타일 한 장, 플라스틱 한 조각, 이런 전구 하나까지 밖으로 가지고 나가면 전부 가치 있는 스크랩이야. 이런 곳에 올 때는 굳이 이것저것 많이 들고 올 필요가 없지.”
교수는 마지막으로 천장에 전구가 들어있던 부분을 뜯어낸 것을 불꽃 주변에 접시 모양으로 배치한 다음, 철사로 유리부분과 엮어 머리에 쓸 수 있게 만들었다.
“화장실 천장 등은 주변에 집광판 같은 걸 같이 붙여놓거든. 이 정도면 헤드라이트라고 불러도 될걸?”
“이, 이게 14 특작대인가….”
“잘 싸우지도 못하고, 짐 덩이 취급받던 내가 특작대에서 살아남으려면 뭐라도 쓸모를 보여야 했으니까. 특작대는 좀 골칫덩이 취급이어서 보급도 시원찮았거든. 나는 그 사람들 뒤를 따라다니면서 전투 외에 필요한 일을 전부 다 했지. 식량이 떨어지면 현지에서 습득한 재료로 식사를, 엄폐할 곳이 필요하면 땅을 파서 진지를, 작전에 필요한 도구, 숙영지, 무기까지…. 필요한 건 전부 현지에서 만들었어.
그래서 보직도 없이 죽으라고 보낸 자리에서 살아남게 된 거야. 어느 순간부터 부대원들이 나를 보급병이라고 부르더라고. 위에서는 안 주는 보급을 혼자서 전부 해결해준다고.”
뭐, 그렇게 따라다니다 보니까 어느정도 전투가 손에 붙어서 그 다음부터는 전투에도 참여했지만.
교수는 간이 램프를 하나 더 만들며, 실소를 지었다.
14 특작대에 들어가기 전, 부대원을 모두 잃고 아버지 덕에 살아돌아온 나는 갈 곳이 없었다. 병력이 남아있음에도 위험지역에 내가 소속된 부대를 내버려두고 후퇴를 명령한 상층부에 나는 독기를 품고 있었고, 가뜩이나 그 작전에서 아버지를 잃었다는 소식을 들은 윗사람들은 당연히 내가 불편했지. 그들의 치부를 알고, 원한도 갖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를 14로 보냈을 것이다. 전투 경험도, 나이도 부족한 소년병인 내가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끼릭, 끼릭,
“자, 이러면, 내 것도 완성. 임시로 만든 거라 오래는 못쓴다. 철사가 짧아서 머리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고. 재수없으면 눈썹탄다.”
“…..”
“음? 뭐냐, 그 눈빛은.”
교수는 철사로 대충 만든 하네스가 머리에 잘 고정되는지 써보고 있었는데, 벡스가 묘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그냥. 내가 생각했는데, 삶이 참 기구하다고, 햅번도 보통은 아닌 것 같아서.”
“별 시답잖은 소리를.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 중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머리에 램프가 적당히 고정되자, 교수는 램프의 촉에 불을 붙이며 일어났다.
“자, 시야는 확보했으니 슬슬 움직이자고. 마음 같아서는 여기 있는 스크랩 전부 뜯어가고 싶지만, 그랬다간 더 밑에 있는 진짜 돈 되는 놈들을 가져올 수 없을 테니까 말이야.”
“불은?”
“지금은 켜고 가. 다 썩어 문드러진 1형 변종이잖아. 죽은 지 5년이나 지났으니 눈 같은 건 진즉에 썩어 문드러졌겠지. 적당히 시간을 보냈으니 다른 스캐빈저들은 아래로 내려갔을 것이고. 입구에서 박터지게 싸우고 있는 놈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문제없어.”
교수를 따라서 램프에 불을 붙이며 신기해하는 벡스를 뒤로하고, 교수는 천천히 화장실 문을 열었다.
***
지하 1층. 보호복이 있던 경비실(추정).
“와아아아….”
“허어어….”
불을 켜고 내부를 제대로 살피게 된 벡스와 교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벽 이거, 전부 다 합금이지?”
“어. 저기 박살난 부분 보니까 합금 아래에 납이 주먹만 한 두께로 들어 있는 것 같은데?”
“이게 다 얼마냐…..”
“돔 새끼들이 보면 미쳐 날뛰겠군.”
보통 사람의 눈에는 그냥 텅 빈, 좀 현대적인 탈의실처럼 보이겠지만, 황무지 생활을 하는 교수와 벡스의 눈에는 벽, 천장, 바닥에 붙은 모든 것들이 돈으로 보였다. 벽에 뜯겨나간 자국이 있는 부분은 아마 그 보호복을 보관하고 있던 기계가 있던 자리겠지.
꿀꺽-
“해, 햅번. 이, 이런 것도 필요없겠지? 챙겨야할?”
“그, 그렇긴 한데, 발이, 발이 안 떨어지냐…. 이 데스크, 이거 크롬이야…”
뒤에 밀고 들어오던 스캐빈저들이 내려가면서 처리했는지 근처에 변종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툭툭.
살짝 얼이 빠져서 주변을 구경하고 있는데, 벡스가 옆에서 어깨를 두드리더니 수신호를 보냈다. 녀석은 벌써 램프도 꺼둔 상태였다.
[문 / 넓은 공간.]‘다음 구역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는 소리 같은데.’
교수도 재빨리 손가락에 침을 묻혀 심지를 비벼 껐다. 순식간에 주변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벡스의 옷깃에 살짝 손을 얹고 따라가자, 누군가 비틀어 연듯한 문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반짝-
‘빛!’
둘은 동시에 바닥에 엎드렸다. 저 멀리 일렁이는 불빛 세 개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횃불이군. 숫자는 최소 셋. 불이 없는 녀석도 있을 수 있으니 넷에서 다섯 정도로 가정하는게 좋겠지.’
벡스와 교수는 천천히 바닥을 기었다. 아까와 비슷한 차가운 타일에, 일렁이는 불빛에 언뜻 비치는 규칙적으로 배열된 금속관들.
‘샤워기? …..아, 제독실(除毒室)’
핵전쟁 이후를 상정하고 지은 건물이니, 입구 근처에 밖에서 묻혀온 오염물을 제거할 시설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숨을 죽이고 조금씩 접근해, 어느새 놈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구분할 수 있는 지점까지 도착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까지 여기 있으면 되는 거지?”
“리더가 자리를 지키라고 했잖아. 안쪽을 털고 있는 동안, 밖에서 들어오는 쥐새끼들이 있으면 죽여버리라고.”
“제기랄, 나도 안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뭐가 있을까?”
“나는 살짝 내려갔다 왔는데, 햐, 내가 살다 살다 그걸 보고 감동을 느낄 줄이야.”
“뭐가 있었는데?”
“간판. 노란색 배경에 검은 글자로 ‘F마트’ 라고 커다랗게 쓰여 있는데, 눈물이 핑 돌더라.”
“….씨팔. 좀 늦게 가도 우리 몫은 남아 있겠지?”
스캐빈저가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교수는 속으로 환호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지하 상가랑 연계해서 지었다고 했지!’
대화를 들어보니 저 스캐빈저 무리는 이 마트에서 만족하고 나갈 생각인 것 같았다. 저 앞에 있는 녀석들은 입구를 지킨다…. 는 것 보단, 밖에서 전투 중인 스캐빈저들이 들어올 때의 알람 용으로 세워둔 것이겠지.
사삭-
벡스의 손가락이 교수의 손등을 두들겨 신호를 보냈다.
[너/ 왼쪽 / 나 / 오른쪽]벡스의 어깨를 두드려 알아들었다는 신호를 해준 교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우, 상상만 해도 배가 부른데. 나 잠깐 볼일 좀 보고 온다.”
“그러던가. 크으, 상상만 해도 끝내주는군. 주류코너도 괜찮겠지. 공짜로 7년이나 묵은 술이 잔뜩 있을 테니 말이야! 술은 유통기한도 없잖아?”
“식료품코너도 볼만할 거야. 통조림도 유통기한이 없으니까. 아니 있었나? 제법 길다고 들었는데….”
툭툭.
“최대 7년까지 된다고들 하더라고.”
“아, 그래! 고마-읍!”
뚜둑-!
“고맙긴.”
뒤에서 슬그머니 나타난 교수가 한 명의 목을 꺾어버리고, 살짝 떨어진 곳에서 뭔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볼일 보던 녀석도 벡스가 잘 보내준 모양.
갑자기 어둠속에서 나타난 손에 동료가 둘이나 유명을 달리하자, 혼자 남은 스캐빈저는 겁에 질려 앉은 자세 그대로 뒷걸음질하고 있었다.
“흐이익! 사, 살려줘! 나, 난 아무것도 아닌 놈이야! 그냥 고철이나 줍고, 쓰레기나 퍼먹으면서 사는 놈이라- 으읍!”
교수는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놈의 입을 막았다.
“어이 벡스, 이리 와봐.”
“헵번, 너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설마…. 안죽이게?”
“아니, 황무지에서 이런 경우가 너무 오랜만이라. 보통은 살려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잖아.”
이 녀석이 공격했으면 모르겠는데, 내가 또 나름 기사도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
교수는 벡스에게 싱긋 웃어 보인 다음, 팔뚝으로 틀어쥐고 있던 스캐빈저의 목을 약간 풀어주었다.
“푸학! 흐엑!”
“쉬이이이. 조용. 우리 아무것도 아닌 친구, 살고 싶으면 조용히 해야지?”
“읍, 으읍! 읍!”
“그래, 그래. 숨은 여기서 살아나가면 밖에서 몰아쉬어도 되잖아.”
“으읍! 읍!”
“음~ 좋아. 태도 합격. 자,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아~주 솔직하게 대답해주면, 너는 5분쯤 뒤에 이 지하의 퀘퀘한 공기가 아니라, 황무지의 텁텁한 공기를 마시고 있을 거야. 잘 알아들었지?”
“으읍! 읍!”
“숨 쉬어 숨. 대답은 해야 될 것 아니야.”
“푸하아! 감, 감사합니다.”
교수는 옆에서 끊임없이 옆구리를 찌르며 ‘뭐하냐’ 같은 의미의 신호를 보내는 벡스를 무시한체, 질문을 이어갔다.
“자, 첫 번째 질문. 여기 죽어 나자빠진 네 친구들 말고, 안에 있는 동료들은 몇-”
“일곱! 일곱입니다! 저희 스크래핑 독스는 총 열 명으로 구성된 클랜으로서, 이곳에 큰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우드득-
“으아아아!!!압! 읍! 으읍!!!”
“쉬이이. 그건 안 물어봤잖아. 네가 떠벌리는 소리를 듣고 네 동료들이 찾아오기라도 하면, 내가 곤란해지지 않겠어?”
왼손으로 놈의 손가락을 꺾어버린 교수는, 속으로 ‘7명, 이름없는 무리’ 라는 정보를 기억해 두었다.
“자아, 무장은 어떻게 하고 있지?”
“리, 리더가 AK 한정을 들고 있고, 리더의 마누라가 우지를 하나, 나머지는 칼과 화살로 무장했고…..아! 한 놈이 화염병을 세 개정도 들고 있습니다!”
‘염병. 뭔 놈의 한국에 이렇게 총이 많아?’
아무리 2050년이 세계화가 극에 달해 2개 국어를 못하면 문맹 취급을 받고, 내국인과 외국인의 차이를 구분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지만 그래도 한국은 총기 규제가 제법 센 편이었는데. 전쟁 중에 흘러들어온 물건이 상상 이상으로 많았던 모양이다.
“좋아, 지금까진 제법 잘해줬어. 음…. 이름이?”
“달튼! 달튼입니다!”
“그래, 달튼. 이제 마지막 질문인데….”
“예, 예!”
“지금 네 안주머니에 있는, 네가 슬금슬금 손가락을 뻗고있는 그거. 그게 뭔지 가르쳐줄래?”
“이,이런 빌어먹을-!”
뚜두둑-!
목이 비틀리는 소리와 함께, 달튼의 몸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교수는 쓰러지는 놈의 몸을 받아 눕힌 다음, 재킷 안쪽에 손을 집어넣었다.
“오, 카람빗 나이프. 제법 좋은 걸 들고 있었잖아?”
“깜짝 놀랬잖아, 햅번. 네가 놈을 살려주기라도 할까 봐.”
“미쳤냐? 어이, 벡스. 이거 보여?”
교수는 횃불에 언뜻 비친 달튼의 재킷 앞주머니를 보여주었다. 실을 꿰어 대충 표시해놓은 점이 여러 개 있었다.
“킬 마크야. 동그라미는 여자, 가위표는 남자. 대충 보니까 이 자식, 중간부터 공간이 모자라서 여자만 표시해놨군. 아무것도 아니긴 개뿔. 으, 제기랄. 더러운 거 만졌어.”
너스레를 떠는 교수를 보며 벡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교수는 확실히 선한 사람이긴 했지만, 멍청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벡스, 이 횃불 들고가자. 세 개다.”
“….놈들을 속이려고?”
“응. 무장 상태가 생각보다 괜찮아. 떨거지들이라 별거 없을 줄 알았는데, 사제 총도 아니고 무려 AK에 우지라니. 탄약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지만 붙어서 좋을게 없을 것 같아. 화염병도 문제고. 여기서 불이라도 났다가는 우리 전부 다 질식해서 죽을 테니까.
마트로 내려오는 곳을 제일 경계하고 있을 테니 횃불로 여기 있던 놈들인 척 해서 넘기고, 놈들 눈에 보이는 곳에 횃불을 걸어놓고 조용히 내려가자구.”
내가 알고 있는 마트의 구조와 비슷하다면, 더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쿠우웅-
위쪽인지 아래쪽인지 모르겠지만, 폭음과 총성이 아직도 간간히 들리고 있었다.
아쉬운 눈빛으로 마트쪽을 바라보는 벡스를 보며, 교수가 횃불을 흔들었다.
“작은 거에 연연하지 말자고. 우리 목표는, 쉘터다.”
핵전쟁을 대비해서 지어진 방공호 단지. 지금 세상과 같은 환경을 대비하여 지었다면, 없을 수 없는 물건이 있다.
“발전기, 무조건 비상 발전기 챙겨 나온다!”
“그게 그 가방에 들어가?”
“사이즈에 따라 다르지! 안 들어 가면 등에 지고라도 나올 거야!”
교수는 240만 실링이라는 빚을 생각하며, 각오를 다졌다. 없어서 못 파는 발전기. 그것도 부자들을 위해서 지어진 쉘터에 있을, 2050년형 최신형 발전기.
‘그거 하나만 있으면 인생 역전이다!’
교수의 눈이 의지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한편, 지상에서는 거의 소강상태에 달한 스캐빈저들의 전투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퉤! 빌어먹을, 이래가지고는 저 안에서 뭘 챙겨나와도 원금이나 회수할 수 있을까 말까 하겠네.”
“혀, 형님!”
“왜!”
“저기, 저 시꺼먼거, 저거 그놈들 아닙니까?”
“음? 내가 그놈들이라고 하면 어떻게 알아듣겠….!”
새까만 차량. 검은색 장비 일색의 무리가 두 블록 건너의 골목에 자리잡고 있었다.
“저, 저거 언제부터 저기있었냐.”
“아까 언뜻 본 것 같았는데, 잘못 봤나 해서….”
“그걸 왜 지금 말해 이 새끼야!!!!”
스캐빈저 클랜 ‘원더러’의 리더 다인의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 저 무리가 그가 생각하고 있는 놈들이 맞다면, 놈들이 항상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준비하는게 날아올 것이다.
피유우우-
“….좆됐네.”
“이, 이 소리는?”
“박격포다! 포격이다! 흩어져! 건물로 들어가!”
콰과과광!!!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포격에 안그래도 거의 다 죽어가던 스캐빈저들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그 사이로 낡은 제복을 입은 무리가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커억!”
“으윽! 시발…. 이런 좆같은 일이!!”
타앙-
도망치지 못한 부상자를 포함해 근처의 스캐빈저들이 순식간에 전멸당하고, 시체들이 바닥을 가득 매운 자리에 코트를 입은 남자가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치직-
“렙터 2다. 상자의 입구에 도착했다.”
“치직- 네스트 응답. 적 잔존 병력은?”
“렙터 2. 눈에 보이는 것 중 움직이는 것은 없다.”
치직-
“훌륭하군. 렙터 2,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전방에 돔의 회수부대가 지나간 흔적을 확인했다. 이 시간부로 렙터 2가 진행하던 작전은 취소하고, 즉시 오래된 상자의 확보에 투입하도록 한다. 해당 부대를 이끌고 상자를 털어라. 가장 귀중한 것을 챙긴 뒤, 복귀하여 본대와 합류하라.”
“렙터 2 확인. 돔이 먼저 도착할 경우 어떻게 하지?”
“치직- 늘 하던 대로.”
“렙터 2. 확인.”
칙-
뒤에 있던 무전병에게 수화기를 건네준 남자는, 손목에 있던 시계를 풀어 코트 안쪽 깊숙이 챙겨넣었다.
“본대에서 저렇게 약한 소리를 할 정도면, 그 쥐새끼들의 정보가 우리쪽 보다 빨랐다는 소리겠지.”
무능한 자식들. 운 좋게 근처에서 작전 중이던 그가 없었으면, 또 돔의 쥐새끼들보다 한발 늦었을 것 아닌가.
새하얀 장갑으로 자신의 총을 신경질적으로 쓰다듬은 그는, 뒤에서 대기하고있는 병력들에게 말했다.
“적은.”
“저항하던 이는 모두 사살. 부상자와 항복한 자를 포로로 잡았습니다.”
“전부 죽여. 짐을 좀 많이 실어야 할 것 같으니.”
척!
명령과 동시에 병사는 뒤로 물러났다. 잠시 후, 연발로 총을 갈기는 소리와 비명이 울려퍼졌다.
“화염방사기를 챙겨라. 들 수 있는 것만 챙기고, 나머지는 모두 태운다.”
척!
대답은 없었다. 그저 절도 있는 경례와, 명령에 따르는 움직임뿐.
“오늘도 보람찬 하루가 되길 기도하지, 제군들.”
병력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