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30
Chapter. 12. 레터스 투 윈드메이지(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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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피가 흐른다. 피. 아까운 내 생피가.
….쿠웅.
힘이란 힘은 모조리 다 써버리고, 내 몸통만 한 바위 조각에 깔려 박살난 인형처럼 구겨진 몸에서 피가 줄줄 샌다.
쿠우웅….
“…..수야….”
“….기!”
“공기가…. 통로….”
“살아있을….”
목소리. 마력이 섞인 바람. 구조대다. 구조대. 밖은 어떻게 됐을까. 에데오르나가 도망쳤다고 했지. 손맛은 확실히 있었는데. 바즈유르는 죽었을까? 스톡 떨구던데.
“꺼어어어…. 여….. 어….. 어기….. ㅅ…ㅏ람…. 으….”
피. 누가 피 좀 줘. 뮤트 많이 잡았잖아. 피 좀 제발.
쿠웅.
“온기가…. 명 이 근처….”
“마력 남는 사람 있…. 어떻게든….”
“….춰! 붕괴하면 진짜….수도, 그땐 돌이킬 수….”
아아아, 죽는다. 진짜 죽겠어. 붕괴고 나발이고, 이미 빈틈없이 깔렸으니까 꺼내 달라고. 아니, 꺼내줄 필요도 없으니까 피 좀 줘 제발. 알아서 나갈게.
“…..피….”
쿠우웅!
“이 근처다! 숨결이 느껴져!”
“치유의 바람이라도 일단 이 사이로….”
“….ㅍ….ㅣ….”
아냐, 그딴 거 말고, 피 좀…. 몇 방울이라도….
화아아악-
“시, 시체!”
“여기 있다! 들것을….”
Blood, 血, 피이이이……
.
.
.
.
****
벌떡!
“피이이이! 나 뒈지기 전에 피 달라고 씹새들아아아아!”
“으아아악! 살려주세요!”
와장창!
정신이 들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는 작은 그림자였다.
그 다음에 들어온 것은 엎어진 물주머니와 바닥을 구르는 구멍 두 개짜리 마법 지팡이.
추가로 작은 모닥불 여러 개와 파리한 안색으로 누워있는 마법사들.
딱 전쟁터에서 전상자를 뒤로 빼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병동으로 옮기기 전에 일단 한데 모아놓고 간호하는, 그런 모습.
빈 침대가 몇 개 있는 걸 보니 한참 옮기고 있는 것 같았다. 멀쩡한 마법사가 남아있질 않으니 날아서 왕복하려면 몇 번은 더 왔다 갔다 해야겠지. 아마 상세가 위급한 사람부터 옮기는 중일 것이고. 내가 여기 남아있다는 것은, 적어도 먼저 옮겨진 환자들보다는 살만해 보였다는 뜻이겠고.
‘어떻게 살긴 했나 보군.’
일단 모닥불에 의지해 상처부터 살폈다.
다리. 발가락까지 잘 붙어있다. 이상 없음.
몸통. 망할 가시나무 모양 그대로 흉터가 생겼다. 흉터가 좀 연해 보이긴 하지만, 이것도 조금 더 기다리면 될 듯.
팔. 왼팔은 멀쩡. 오른팔은…. 이런. 아직 손이 없네.
손이 없는 이유야 뭐. 잘려나간 게 아니라 마지막 일격을 날리며 쇄골 근처까지 폭발해버려서 그러겠지.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니 울컥하고 화가 치밀었다.
『누님은 제가 안전한 곳에 모셨습니다.』
‘어우우우, 팔카투스 그 기생충 같은 새끼가.’
진짜 여기서 에데오르나 하나만 땄어도 엘프 숲까지 산책가듯 여유롭게 갔다 왔을 텐데.
아마 땅속에서 대기하다가, 내 마지막 일격이 떨어지는 순간에 쏙! 하고 에데오르나를 밑으로 빼냈겠지. 헛치는 느낌은 없었고, 분명 바위와 다른 단단한 것이 손끝에서 뭉개지는 감각도 있었으니 아예 타격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래쪽 계곡이 통째로 뭉개졌으니까. 음…. 제법 정양해야 할 정도의 중상은 입지 않았을까?
‘원래는 중상이 아니라 형체도 못 알아볼 정도로 뭉개졌어야 했지만.’
일단 놈은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쉽게 감지될 병력 다수가 아니라 최정예 소수로 움직였으며, 둥지가 개박살나는 순간까지 우리 근처에도 오지 않다가 다 끝나고 정리할 무렵에 두 네임드를 전장에 뱉어놓았다.
현실로 치면 훈련 끝나고 막사 정리하면서 ‘김병장님, 오늘 저녁은 뭐 나온답니까?’ 하는 그 느슨해진 순간에 기습한 거지. 우리가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경계가 가장 느슨해진 순간을 파고든 것이다.
심지어 거기서 나타난 것이 다른 것도 아니고 망할 최강 집착녀 에데오르나인데 침착할 틈이 있나. 당장 나부터도 ‘다 뒈지겠다!’ 하면서 풀 악셀 개돌했는데.
워낙 혼란스러운 전장이라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살피지도 못했다. 바즈유르 쪽도 그렇고, 아스트라드가 뭘 어떻게 했는지. 우리 일행은 뭐 하고 있었는지 확인해줄 만한 사람이….
‘아, 저기 있다.’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정리하던 교수의 눈에 모닥불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일행이 들어왔다.
뭔가 대단히…. 날이 서 있는 모습. 혹시나 해서 눈을 감아봤지만 근처에 뮤트의 기운은 없었다.
적이 없는 게 분명한데 한눈에 봐도 지면이 축축해질 정도로 오트만이 물을 끌어모아 둔 게 보였고, 보르카가 사방으로 코를 높이 들어 킁킁거렸으며, 노툼은 커다란 등빨로 무언가를 막아서고 있었다.
그 중심에서 뭔가 기묘한, 익숙하면서도 낯선 아우라 같은 게 느껴지는 게….
“뭐….하고들 계십니까?”
“아, 교수 자네! 이제 일어났나? 어서 오게! 이리로, 빨리!”
역시. 뭔진 몰라도 더럽게 수상하다.
안 그래도 기다렸다는 듯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오트만. 가까이 갈수록 강하게 느껴지는 그 이상한 기운과, 뭔가에 홀린 듯 멍해져 있는 노툼.
그중에서도 압권인 것은 눈에 핏발이 서서는 1초에 몇 번씩이나 고개를 획획 돌리는 알드리치였다.
‘꼴이 무슨 금덩어리를 주운 거지 같은데.’
평소에는 보여주지 않는 그 모습에, 슬슬 불안해진 나도 서둘러서 알드리치의 곁으로 다가갔다. 로브를 펼치고 몸을 웅크려서, 뭔가 단단히 끌어안은 듯한 자세의 알드리치는 옆으로 다가온 나를 보기도 전에 기겁하며 반대편으로 물러났다.
“누, 누구야! 떨어져라! 부정 탄다!”
“접니다, 알드리치. 저예요.”
“아…. 자네…. 인가.”
“예. 죽다 살아온 사람한테 부정 탄다니. 사람 섭섭하게 왜 그러십니까?”
“으으음…. 딱히 미안하진 않군. 보르카랑 같이 가서 여름날 잡초보다 더 빨리 자라나는 자네 팔다리를 보고 왔으니까. 아무튼, 잘 왔네. 안 그래도 혼자 지키고 있기 불안했는데, 알맹이는 몰라도 일단 성자는 성자이니 내가 맡고 있는 것보다는 순리에 맞는 일이겠지.”
맹세컨대 알드리치가 나를 이렇게나 반겨주는 것도 처음인 것 같았다. 게다가 뭐, 성자라서, 순리에 맞아?
“아이고, 도대체 뭘 가지고 계시길래 그렇게 횡설수설하십니까? 예? 에데오르나 목이라도 땄어요? 그 정도면 나 눈떴을 때 옆에 없었던 거 용서해줄 수….”
화아아아악!!!
내 불평은 알드리치의 품에서 새어 나온 휘황한 성광에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난롯가에서 한껏 여미고 있던 옷깃을 슬쩍 들어 보인 것만으로도 대낮처럼 주변을 밝히는, 따스한 빛무리.
“그어어어. 예뻐. 예쁘다. 태어나서 처음 본 예쁨. 그어어어….”
“도, 도대체 뭐, 뭡니까 그건?”
넋이 나간 노툼의 품 안에서 재빨리 옷깃을 여민 알드리치는,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교수의 귓가에 속삭였다.
“….님이야.”
“….예?”
“성녀님. 서, 성녀님의 여, 영혼이란 말일세!”
“….이거?”
끄덕끄덕!
“성녀님이면…. 그 교단에 한 명만 존재한다고 하는…. 그분?”
끄덕끄덕끄덕!
“성녀님도 아니고, 그런 성녀님의 영혼만 따로…. 지금 그 안에?”
끄덕끄덕끄덕끄덕!!!
.
.
.
.
“????????????????????????????”
데에에엥-
이야아. 신기해라. 시스템도 없는데 교회당 종소리가 막 들리고 그런다야.
영혼? 성녀의 영혼이면…. 몇 달째 납치- 사실상 사망으로 알려진, 자비의 성녀님의 영혼이라고?
따스한 빛의 영혼을 품은 알드리치는, 알을 품는 어미새처럼 자부심과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교수를 마주했다.
“내, 내가 해냈네.”
“알드리치….”
“자네가 도망치라고 했지만, 나는 그것을 목도했네. 나는 영혼술사가 아닌가….”
“알드리치….!”
“해야만 했네. 고통과 억압 속에서도 스러지지 않던 그 자비로운 빛을, 그 와중에도 다른 영혼을 그러안은 가녀린 팔을 이 두 손으로-”
“알드리치이이이이!!!!!!”
와락!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내가 알드리치에게 달려들었고, 꽉 여민 로브 자락이 펄럭이며 새어 나온 빛이 밤의 계곡을 가을빛으로 물들였다.
“내가 해냈어. 내가…. 봉인된 성녀님을 구출했네….”
“제기랄, 사랑합니다 알드리치! 영혼술사 만세! 이제 두 번 다시 낮져밤이라고 안 놀릴게!”
“내가 해냈어. 내가…. 자비의 딸을 세상의 품으로 되찾아왔어….”
얼이 빠진 일행들 사이에서, 이제는 똑같이 얼빠진 얼굴이 된 교수는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성녀의 영혼. 신과의 직접적인 창구라는 신앙의 근간이 될 수도 있는 대상을 구해낸 대가가 얼마나 될지, 교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단언컨대, 이 게임 시작하고 받은 보상, 그러니까 몰래 빼앗거나, 훔치거나 한 게 아니라 정식으로 받은 보상 중에서는 가장 값진 보상이 될 것은 틀림없었다.
****
후우우웅-
‘아아아, 치유된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쉘터의 내 낡은 소파로 되돌아간 것 같아….’
따스하고, 포근하다.
성녀의 영혼을 확인하자마자 ‘수상하게 주변을 경계하는 손님 일행’에 동참한 나는, 당장 자비의 성녀 그 자체나 다름없는 영혼을 숨기는 일에 착수했다. 알드리치와 우리 일행이 그렇게 경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성녀의 영혼은 언데드, 악령, 악마(惡魔), 흑마법사에 악에 물든 몬스터까지 악(惡)자 붙은 생물이란 생물은 다 불러모으는 자석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다행히 자비의 신과 로하람님이 얼굴을 좀 터놓으셨는지, 인간 폼일 때 너클 대용으로 쓰던 성물은 성녀님의 영혼을 무사히 받아들였다.
‘상태창이 살아있었으면 아마 [신성력 : 999999999/250] 정도로 표현되지 않았을까.’
“되, 된 건가?”
“어…. 아마도?”
카아악!
“아마도라니! 그따위 불확실한 말로 표현할 상황인가 지금이! 자네 성자 아닌가! 성자가 그것도 모르다니?”
“대주교님한테 따지든가요! 애초에 성녀의 영혼이 해당 신전을 떠난 일이 역사에 몇 번 없고, 해당 신전의 성물 없이 영혼만 쌩으로 나다니는 건 70년 전에 딱 한 번 있었는데 성물 호환성에 대해서 알게 뭡니까!”
성녀의 영혼을 품에서 놓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주저앉는 알드리치.
무리도 아니었다. 성녀의 영혼이라는 것은 해당 종교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니까.
‘성녀가 죽으면, 육신을 떠난 영혼이 갓 태어난 아이의 몸에 깃든다고 했나.’
GG의 세계관에서 흔히들 죽은 자는 별이 되느니, 바람이 되니, 흙으로 돌아가니 등등 어떤 식으로든 그 형태를 바꾸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성녀는 예외였다.
신이 인간 세상에 내려준 가장 직접적인 창구로, 그 숭고한 의무를 위해 끝없이 윤회하는 존재.
그래서 성녀가 있는 교단엔 그들의 신을 제외하고는 성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었다. 신의 친필 사인이 들어간 교전을 트럭으로 가져다줘도 성녀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
‘그런 성녀가 납치당했으니, 그 사람 좋게 웃으며 농사나 짓던 자비의 성기사들이 무자비의 망치맨으로 흑화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70년 전, 2월드 메인 시나리오에서 납치당한 게 우리 광명 교단의 성녀님 되시겠다. 내가 알기론, 그때 성물부터 신전 화단의 꽃나무까지, 그것도 모자라 신전을 철거해서 그 건축 자재가 되는 대리석까지 깡그리 팔아 전비를 확보한 다음 성녀를 되찾을 때까지 무제한 성전을 선포했다고 한다.
그런 분투에도 불구하고 너무 늦는 바람에 성녀는 이미 타락해버렸으며, 터만 남은 본단의 성상 앞에서 성기사 단장이 눈물을 머금고 타락한 영혼을 정화, 광명의 성녀는 그대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지금 로하람 교단에 성녀가 없는 거고.
아무튼, 그때 군주의 성체에서 타락한 성녀의 영혼을 성궤에 담아온 게 역사에 기록된 유일한, 성녀의 영혼이 교단의 품에서 벗어난 경우였는데.
후우웅- 후우웅-
지금, 내 목에 역사상 두 번째로 교단의 품에서 벗어난 성녀의 영혼이 있었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자비 교단이 어디 있죠?”
“나흘 거리…. 수도랑 뒤탕스 정도….”
“연락은?”
내 물음에 보르카가 주머니에서 찢어진 로브 조각을 몇 개 꺼내서 보여줬다. 더러운 로브 위에 피로 황급히 써내려간 편지.
“[성녀의 영혼이 우리 손에 있다. 자비의 성녀를 돌려받고 싶다면 당장 성기사들 손에 성궤를 들려 폭풍의 언덕으로….] 납치범입니까? 뒈지고 싶어 환장했어요?”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다니까! 그래서 몇 번 고쳐 쓰지 않았나! 그건 실패작이라고!”
“하다못해 종이에 잉크라도 쓰던가!”
“마음이 급했지!”
“오트만님한테 대필이라도 해달라고 하던가!”
“그 친구는 성녀님을 보자마자 진정제 세 병을 동시에 목구멍에 쏟아 넣더니 바보가 되어버렸고!”
“아오, 이런 병…..! 그래서, 어디로 보냈습니까?”
“변경백 영지의 주교에게 보냈네. 자비의 교단에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휴우우! 잘하셨네요. 그쪽에서 알아서 필터링해서 신성마법으로 전달해 줄 테니까.”
지금이 대충…. 새벽 3, 4시쯤 됐으니까 몇 시간 뒷면 그 협박편지가 주교에게 날아갈 것이다. 광명교단의 신성통신은 말 그대로 빛의 속도이니 곧바로 자비 교단에 전달이 될 것이고. 빠르면 이틀이나 사흘 사이에는 벌떼같이 몰려온 무자비의 기사들이 자비의 성직자로 우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겠군.
성녀의 영혼을 내게 맡기고, 잠시 숨을 돌리며 그 회갈색 물약을 생명수마냥 들이킨 다음에야 진정한 알드리치는 내게 에데오르나와 싸우는 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가 메시지 마법으로 ‘함정이다!’라고 외친 다음이었죠?”
“맞네. 숨소리에 섞여 잘 들리지 않았지만 내가 목표라는 말도 했었지.”
그랬었나. 그땐 에데오르나밖에 생각하지 않아서 잘.
“….그래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대책을 펼쳐놓고 어느 쪽이든 지원을 갈 생각이었는데…. 그만 내 눈에 그놈이 띄고 말았지 뭔가.”
알드리치는 머리털 나고 그렇게 끔찍한 형태의 영혼은 처음 봤다고 했다. 아이들이 씹고 노는 밀알처럼 자근자근 다져져서, 얼기설기 이어붙인 육체 사이에 스며든 영혼들.
“잘은 모르지만 지배당한 육신을 매개로…. 초혼술로 불러들인 망자를 기워 붙인 느낌이었지. 나는, 영혼술사로서 그 만행을 절대로 두고만 볼 수 없었네.”
팔카투스를 상대하기 위해 이미 만반의 준비가 끝나있던 알드리치였다. 분기탱천한 영혼의 손아귀가 바즈유르의 내부를 헤집었고, 그 중심에, 본신의 영혼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곳에 닿았을 때….
발견해버리고 만 것이다. 육신이 잘게 조각나고, 영혼을 뜯어먹히는 고통 속에서도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순수의 결정체를.
“그래서. 냅다 뽑았습니까?”
“냅다 뽑았지. 팔….이라고 표현하긴 그렇지만. 그녀의 영혼이 보호하던 몇몇 영혼도 같이 딸려 나왔네. 대지 마법사가 다섯, 수계 하나, 염계 셋. 그들의 영혼은 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고, 나는 영혼술의 반작용으로 피를 토하는 고통 속에서도 끝끝내 성녀님의 영혼을 안전하게 회수한 다음 뒤로 물러 나왔지. 미안하네. 그때 자네를 조금이라도 도와줬어야 하는데, 내가 본 것 이상으로 그 안에 뒤엉킨 영혼의 규모가 대단해서….”
“아뇨. 넘칠 만큼 도와주셨습니다.”
어쩐지. 극 후반부에는 단신으로 도시랑 맞짱도 뜨는 융단폭격 네임드 바즈유르가, 아무리 아가리 봉인이라는 극카운터 주문을 당했다고 해도 저항조차 못했다 싶더라니.
처음에 분명 신성마법 계열 타락주문을 사용한 바즈유르가 영창 1%, 관념 99%인 신성마법을 그 절체절명의 순간까지 안 썼는지 궁금했는데, 안 쓴 게 아니라 못 쓴 거였다. 성녀라는 거대한 영혼을 소화하지 못해서 육신만 갈아먹고, 그 위에 제압당한 성녀의 영혼을 얹어 타락한 신성주문을 사용하고, 그렇게 들고 다니며 야금야금 쏠아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영혼술사가 그걸 쑥- 뽑아간 것이다. 곱게 가져간 것도 아니고, 거의 배를 가르고 안에 들어있던 걸 쏟아내는 수준으로 난폭하게.
‘아스트라드한테 제압당한 상태라 별다른 저항도 못했군. 이거, 잘하면 죽었겠는데?’
좋은 소식 하나 더. 방금 성광이 계곡을 비출 때 봤는데, 계곡 구석에 쌓여있는 회색 사체가 40구는 되어 보였다. 죽은 마법사를 저렇게 마구잡이로 대할 리는 없으니 당연히 바즈유르가 떨군 ‘스톡’, 씹어서 재구성한 마법사의 육체일 것이고.
섭취해 소화시킨 마법사가 곧 힘이요, 생명력인 놈이 저만큼이나 스톡을 떨궜다는 건 치명상도 보통 치명상이 아니라는 뜻. 거기에 붙잡아둔 영혼을 강제로 뜯어내기까지 했으니 시체만 확인하지 못했을 뿐 거의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살아있어도 다른 월드에서처럼 혼자 성을 밀어버리는 전성기 수준에 도달하진 못하겠지.
“오오. 오오오오….”
딩 딩 딩~
[기본 목표. 엘프 숲행 열기구 편도 티켓 – 달성] [소형 둥지 2, 중형 둥지 1 – 제거] [현 시점에서 상대적 전투력 측정 : 피뿌리기 제외하고도 에데오르나 상대로 처맞고 버틸 만큼은 컸다. 마지막에도 분명 손맛이 있었음. 중상을 기대해 볼 만함. 간접적으로나마 로드릭 전선을 풀어줬다.]+[★★★★★ 빼앗긴 자비의 성녀 영혼 회수! 성녀 영혼!! 역사에 딱 두 번 등장한! 타락하기 전에 회수한 경우는 전무한! 보상으로 자비의 기사들을 불러서 인간 테이블에 의자, 발 깔개로 써도 한참 남을 정도의 어마 무시한 빚을 지웠다!!!!!]
+[★★★ 바즈유르, 병신됨. 멀쩡한 스톡을 거의 다 떨궜으니 기본 토대가 된 흑마법사만 잔뜩 남았을 가능성 높음. 만능 융단폭격 법사에서 언럭키 흑마법사 덩어리로 떡락]
딩 딩 딩! 딩 딩 딩 딩 딩 딩!!
보인다 보여. 보상이, 이번 폭풍의 언덕 사건으로 얻어낸 보상이 잭팟 터진 슬롯머신마냥 와르르 쏟아지고 있어!
훌쩍!
“자네…. 우나?”
“….예. 갑자기 좀, 울컥하네요….”
“으으음. 무늬만 성자인 줄 알았더니 나름 신앙심은 있었나보군.”
아뇨, 그거 말고요.
훌쩍!
“게임이다. 내가. 게임을 하고 있어…. 게드로이츠산 유사 고문프로그램이 아니라 게임을 즐기고 있다고….”
지금까지 온갖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개처럼 구르고 피떡이 되며 진행해온 GG 생활에서 이렇게 노력에 보상받은 적이 처음이라 그렇습니다. 억울하고, 또 기쁘기도 하고. 망할 절체절명 게이머 라이프에 내가 기대하지 않던 보상을 제대로 받아본 게 처음이라고. 목말라 죽어 갈 때마다 한 모금씩 주던 게 전부 독이 든 성배였단 말이다. 이 망할 게임은.
츄르릅!
아이고, 침이 다 나오네.
고생만 하고 개망한 줄 알았는데, 하나씩 정리해보니 무슨 고구마 줄기처럼 큼지막한 보상이 쑥쑥 나오고 있었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박교수! 늘 상상만 하던 일이 눈앞에 다가왔잖아. 노력한 만큼의 대가가 나오고 있잖아! 이런 정상적인 상황, 다시는 안 올 수도 있다고!’
내 겜생이 이렇게 잘 풀린 적이 없었다. 정신 차려라, 박교수. 나올 때 뿌리까지 뽑아내야 다음에 또 쓰레기 같은 이벤트가 쏟아져도 버틸 거 아냐.
내가 에데오르나한테 처맞던 사이에 아스트라드는 초필살기로 바즈유르를 쥐어팼고, 알드리치는 성녀님의 영혼을 확보했다.
‘나머지는. 두 사람 말고는 뭐 했지?’
알드리치는 됐고. 오트만은 옆에서 방어마법 치고 있었다고 들었고. 보르카, 노툼도 옆에 붙어있었을 테니 딱히 별다른 일은 없었겠지…. 만.
“보르카, 노툼. 혹시…. 나 쓰러져있던 구멍 주변에서 허연 시체 같은 거 못 봤어? 아니지, 제 입으로 구출했다고 했으니까 시체는 아니고. 잘린 사지라거나. 끔찍한 상처의 흔적이라거나. 땅굴 벌레가 기어 들어간 구멍에서 울려 퍼지는 고통스러운 비명이라거나?”
“대장의 끔찍한 상처와 대장의 잘린 사지라면 질릴 정도로 봤소만. 하얀 괴물의 것은 못 봤소.”
“노툼 너는?”
“그우우우…. 눈이 커지게 아름다운…. 세상에 다시 없는…. 노툼 운다. 너무 아름답다. 우우우우….”
이쪽은 꽝이군. 보르카는 못 봤고, 성녀의 영혼에 취한 노툼은 대화가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일행 쪽은 다 털었고. 그럼, 남은 건….’
“혹시 아스트라드 어디 있는지 아시는 분 있습니까?”
‘메인-디쉬!’
행정력 만렙. 앞날 창창한 16세.
폭풍의 언덕이 아니면 보기도 힘든, 희귀한 바람마법사.
그 중에서 더 희귀한, 덜 미친 바람마법사.
3위계, 7위계 대마법 써본 적 있음.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이놈은 확실해. 떡잎이 아니라 잭과 콩나무의 마법의 콩 수준이야!’
당장 잘 키운 영혼술사 한 명이 알아서 가져온 결과를 봐라. 동료 모으는 겜에서 유능한 동료는 곧 쾌적한 플레이를 향하는 로열로드가 아닌가.
“흐흐흐흐…. 어디 틀어박혔을까…. 우리 유망주님….”
“….그웍.”
노툼은, 눈을 희번뜩거리며 소년마법사를 찾는 근육질 남성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성호를 그었다. 알드리치가 처음 말한 것처럼, 정말 성녀님의 영혼에 부정이 타버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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