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31
Chapter. 12. 레터스 투 윈드메이지(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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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아스트라드!”
찾았다.
우리 조막만 한 유망주님이 어디 가셨나 했더니, 누가 골방 생활하는 놈 아니랄까 봐 모닥불에서 멀찍이 떨어진 구석에 처박혀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환한 얼굴로 다가가며 속으로 준비했던 말을 몇 번씩 더 다듬었다. ‘세상을 바꿀 바람이 불고 있다. 오늘 같은 일이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아냐. 너무 길잖아. 짧고 임팩트 있게 하는 게-
저벅. 저벅.
저 나이대 애들이 좋아하는 게 뭐지? 애가 겉늙어서 영웅시 같은 건 잘 먹히지도 않을 것 같고. 작위면 되려나? 어차피 로드릭 영지 다 밀려서 작위랑 영지 엄청나게 남잖아. 폭풍의 언덕도 체인점 내자고 하면….
저벅.
“….살아있었네. 손님.”
“어….”
그리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녀석이 앉아있는 바위 턱에 도착한 순간.
내가 얼마나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누워있던 것과 비슷한 임시 병상과 환자들.
모닥불이 있는 곳과 다른 점이라면, 차게 식은 그들의 몸은 로브로 머리끝까지 덮여있었다는 것.
이번 전투에서 사망한 마법사들의 시신을 모셔놓은 곳. 그 옆의 어둠 속에 멍하니 앉아있는 아스트라드의 눈에는 내게 익숙한 감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낮게 가라앉은 분노와 복수심. 자괴감. 외로움과 그리움 같은 것들이 묵직-하게 속을 가득 채워버려서, 정작 자기 마음은 갈 곳을 잃고 위로 붕 떠버린 그런 감정 말이다.
털썩!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교수는, 서늘한 늦가을에 로브도 없이 얇은 셔츠에 바지만 입고 있는 아스트라드를 보고 대뜸 그 옆에 앉았다.
“감기 걸린다.”
“….”
“그…. 얼굴도 되게 안 좋아 보이고. 그러다 쓰러져 임마. 저기 불가에 가 있어라 좀.”
“….”
스슥-
“어휴, 알았다, 알았어. 아무 말 안 할게. 그냥 여기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라. 응?”
“….”
대답이 없는 녀석을 뒤로하고, 재빨리 환자 구역에 쌓여있는 장작을 한아름 안고 돌아왔다.
착, 차각, 화르륵!
“음, 훨씬 낫네.”
“….뭐하러 왔어.”
“보면 모르냐. 추워서 불피우러 왔다 임마. 이제 진짜 아무 말 안 할 테니까 옆에 없다고 쳐.”
빈말이 아니라, 정말 아무 말 안 할 생각이었다. 눈치가 있으면 이 녀석이 죽은 마법사들을 애도하는 중임을 알 수 있으니까. 그저, 눈이 새카맣게 죽어있는 녀석을 보니까…. 몇 년 전 죽지 못해 살던 내가 생각났을 뿐이다. 코듀로라도 옆에 없었으면 그때 진작에 죽었지. 아예 한 달에 한번씩 러시안룰렛 하는 날 정해놓고 살 정도로 반쯤 미쳐있었으니까.
타닥. 타다닥…
잘 마른 장작 위로 금세 불이 옮겨붙었고, 우리는 말 없이 타오르는 장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승님은…. 산책을 좋아하셨어.”
일렁이는 불빛 아래. 어린 마법사가 입을 연 것은 30분 정도 그렇게 말없이 시간을 나눈 뒤였다. 말을 하고 싶어서 한다기보다, 한숨처럼 흘러나왔다고 하는 편이 맞으리라.
“….그래.”
‘이 타이밍에 스승님. 그것도 과거형이라. 결국 그 양반도 가셨나. 좋은 사람 같았는데.’
스윽-
아스트라드는 그의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아예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드러눕는 것을 보았다. ‘들어는 줄게’라고 말하듯, 무심한 자세. 생긴 것답지 않은 세심한 배려.
‘쓸데없이 위로한답시고 지껄였으면 당신이 스승님과 나에 대해 뭘 아냐고 하면서 쫓아낼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추억을 그냥 입 밖에 낼 뿐이었다. 위로를 받고 싶은 생각도 없고, 위로받는다고 사라질 감정도 아니었으니까.
아스트라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자신이 듣기 위한 것에 가까웠다.
“정확히는, 기억이 희미해지기 시작한 다음부터 좋아하셨지. 원래 스승님은 그렇게 활동적인 사람이 아니었거든. 오히려 처음 하는 탑의 업무에 질린 내가 마을까지라도 좀 갔다 오자고 하면 ‘50년을 떠돌아다녔으니 침대에 누워있기만 해도 부족하거늘….’ 같은 소리를 하며 투덜거리셨지.”
그런 스승이 치매에 걸린 그 날부터, 수시로 산책하러 가겠다고 하던 것은 아마 그와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기억?”
“응, 기억. 홈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나는 좀 많이 우울했거든.”
“….이곳 마법사들이 텃세를 부리고 그럴 것 같지는 않았는데.”
“홈은 언제나 최고였지. 문제는, 내 스스로가 고아라는 사실을 못 견뎌 해서 그랬어.”
어머니는 4살 때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유품이랄 것조차 없는 가난한 집을 뒤로하고 촌장집 하인으로 6개월. 강제로 팔려간 제국 외곽에서 노예로 2년. 도망쳐 나와 좀도둑으로 2년.
고통으로 점철된 나날들. 어린 아스트라드는 누구라도 좋으니 원망할 사람이 필요했고, 그 대상은 언제나 어머니와 자식을 버리고 사라진 얼굴도 모를 아버지였다.
아버지. 몸이 약한 어머니를 두고 떠나간, 이 험한 세상에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게 만든 쓰레기 같은 자.
병마와 싸우며 신음하던 어머니가 잠결에 부른 그 이름.
‘…아아. 딜런. 딜런, 사랑하는 딜런….’
딜런. 내 아버지. 딜런.
편지마법을 알기 전까지는 두 번 다시 엮일 일이 없다 여겼던, 그런 사람.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그걸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늘 혼자였기 때문에 남들 다 아는 편지마법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스승의 손에서 날아 올라가던 종잇조각이 무슨 마법인지 물어봤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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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보낼 수 있어요?’
‘그럼.’
‘받을 수도 있고?’
‘이게 좀 애매하구나. 펠릭스 드릭시엘은 [편지는 집으로 도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최소한 며칠 이상 머무는 자리가 있어야만 편지가 도착하거든.’
‘그, 그럼 우리는 편지 못 받아요?’
‘그럴 리가. 애초에 집이라 부를 수 있는 게 없어서 만들어진 것이 펠릭스 홈과 편지마법인 것을! 자아, 내가 홈이 어떤 곳인지 말했던 것이 기억나느냐?’
‘어, 하얀 곡선이 많고, 둥글고, 편지가 날아다니고….’
‘그래. 그리고 잠시 머물다 갈 무수히 많은 편지들을 위한 거대한 서가가 있지. 그중에는 우리들을 위한 것도 존재한단다. 새로운 바람 마법사가 홈에 도착하면, 빈 서랍 하나에 그 사람의 이름을 마력으로 새기게 되지. 그럼, 그 마법사에게 날아온 편지는 그 보관함에 들어가게 되는 거야. 멋있지? 막 마법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여, 영감님. 나 글 가르쳐줘요.’
‘으으응? 늙은이는 귀가 안 좋아서 잘 안 들리는데. 전에 뭐라고 했더라, 글 같은 거 배울 시간에 마법이나 쓰게 해달라고?’
‘아익! 그건, 으…. 아무튼! 생각이 바뀌었으니까 가르쳐 줘요! 영감…. 아니, 스승님!’
‘흐으음. 오늘 점심으로도 메추라기를 잡아 온다면 생각해보마. 요즘 메추라기들이 살이 아주 통통하게 올라서 맛이 참….’
‘더럽게 치사해! 스승이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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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스승님이셨네.”
“그럼. 이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스승님이셨어. 그렇게 나는 스승님에게 마법보다 먼저 글을 배우게 됐어.”
마을에서 마을로.
도시에서 도시로.
노숙을 밥 먹듯 하고, 마법사라면 치를 떠는 사람들을 피해 으슥한 산길에 깎아지른 절벽을 타기도, 비를 맞아 열병에 시달리기도, 무서운 몬스터를 만나기도 했지만, 스승님과 함께하는 여행은 정말 즐거웠다.
그렇게 제국을 절반쯤 가로질렀을 때였다. 아스트라드의 발에 굳은살이 박이고, 메추라기를 눈 감고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새총의 달인이 되었으며, 매일 숯 조각을 잡아 새까맣게 물든 손끝이 씻어도 지워지지 않을 정도가 되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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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보고십슨다.
아스트라드가. 엄마 코데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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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이니, 밉따.
당시으느의 아들 아스트라드가. 딜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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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배운지 3개월 만에, 스승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편지였다.
얼마나 불안에 떨었던가.
미동도 없는 어머니의 편지를 불에 태워 보내며.
그 연기 속에서 힘차게 날아오르는 아버지의 편지를 향해 얼마나 많은 원망과 욕설을 쏟아부었던가.
당황한 스승님 앞에서, 목이 쉬어 터지도록 악을 쓰며 울었다.
차라리 두 장 다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리 원망스럽지 않았으리라. 아버지도 죽었거나, 사정이 있어 제국을 떠났다는 뜻이니.
하지만 편지가 날아갔으니 버젓이 살아서 제국에 있다는 뜻이었다.
살아서, 아직 제국에 있는 나의 아버지. 나와 어머니를 버린 딜런.
그날 이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편지를 날려 보냈다. 어머니와 함께했던 힘든 시간들. 어머니가 얼마나 당신을 그리워했는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내가 겪어야 했던 고난들. 당신이 남아있었더라면 겪지 않아도 됐을 일들에 대한 원망. 스승을 만나 마법사가 된 것. 메추라기를 잡다 무릎을 다친 일, 좋은 남풍을 가져다 줬는데 마법사라고 쫓겨난 일, 온갖 사소한, 왜 보내는지도 모를 사소한 사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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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증?”
“어렸으니까.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아버지였지만. 울며 사죄하는 아버지의 머리를 돌로 찍어버리는 걸 하루 이틀 상상한 게 아니지만…. 매일 욕하다 보니 욕할 거리도 떨어지더라고. 그렇다고 놈이 하루라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것은 또 싫고. 그래서 뭐든 적어 보냈지.”
“죄책감이라…. 그냥 아버지한테 ‘나 여기 있소’ 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알아봐 달라고?”
“….아마도. 그땐 그저 원망을 담아 보낼 뿐이라 생각했지만, 편지를 보내게 된 다음부터는 홈에 도착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으니까. 답장이…. 올 거라고 생각했거든.”
6개월의 여정과, 홈의 입구에서 2개월 가까이 노숙하며 마법을 배운 끝에.
1위계 바람마법사 아스트라드는 홈의 일원이 되었고, 그의 이름이 새겨진 편지함을 갖게 되었다.
그날부터 매일 아침. 편지들의 군무가 끝날 때까지 매일. 아스트라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함 앞을 돌아다녔다.
2위계, 귀족가 차남 데비앙에게는 언제나 가문의 일원임을 잊지 말라는 엄중한 편지가. 한 달에 한번씩.
1위계, 제국 유명 상가의 딸 헤일리에게는 엘프 교역품의 동향과 딸의 안부를 묻는 편지가 매일.
2위계, 가난한 농가 출신 퍼스에게는 집에서보다 잘 지내길 바란다며, 12명의 형제가 보낸 그리움이 담긴 편지가 주에 한번.
3위계, 같은 고아 출신 도리스에게는, 12장에 달하는 눈물 젖은 어머니의 사과편지가. 그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사정과 앞날에 대한 축복을 담아서.
스으윽- 덜컥!
스슥- 덜컥! 덜컥!
마법에 걸린 편지함이 스스로 그 문을 열고 하나씩, 편지를 뱉어낼 때마다 아스트라드는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의 차례가 오길 기다렸지만.
그의 이름이 새겨진 편지함은 언제나 그의 기대를 배신했다. 매일같이.
어린 아스트라드의 아침은 그렇게 버려짐을 실감하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입이 거칠고 활발하던 소년은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가고 있을 무렵.
‘산책! 아아, 갑자기 산책이 너무 가고 싶어졌구나, 아스트라드야.’
‘가세요, 그럼.’
‘청승맞게 혼자 가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 거기 구석에서 묵은 바람이나 먹고 있지 말고 같이 나가자꾸나!’
‘….피곤해요. 다음에 같이 가느아아악!’
‘바람을 잘 타거라! 떨어지면 머리가 수박처럼 깨질 게야!’
‘내, 내려줘요! 내려어어어어어억!’
스승은 언제나 홈의 구석에 틀어박혀 울고 있는 제자를 찾아냈으며, 그때마다 그 우울한 눈에 드넓은 대지와 운해(雲海), 끝없이 펼쳐지는 석양과 철새 무리 등을 담아주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스트라드는 아침에 편지함을 확인하러 가지 않았다. 대신, 그 시간에 스승과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한 번도 열리지 않는 편지함 위에 먼지가 내려앉듯. 가슴속에 얼룩진 아버지 위로 스승과 함께한 시간이 쌓여갔다.
가우만 델허스트. 나의 은인. 나의 스승. 나의 아버지.
아스트라드의 입에서 8년간의 추억이 끝없이 흘러나왔다. 그저 누군가 들어줬으면 했다. 가우만 델허스트라는 마법사가 얼마나 바보 같고, 정신없으며, 따듯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추억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올수록 소년의 목소리는 점차 낮고, 조용해졌다. 마침내 오늘. 그의 마지막 순간에 닿은 이야기 속에서, 어린 마법사는 손 마디가 새하얗게 될 정도로 그의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라스트 스펠. 죽음조차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세계를 그려내는 데 성공한 마법사를 위한 단 한번의 기적.
가우만 델허스트라는 존재가 인간으로, 마법사로 살아온 평생을 실현한 그 주문이 의미하는 것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간절한 기원. 평생을 바람과 함께한 마법사가 바람에게 하는 부탁. ‘이 아이를 지켜봐달라.’
그의 외침이 닿은 모든 바람이 아스트라드의 손을 잡아주었으며, 아스트라드는 그저 스승의 바람이 이끄는 대로 주문을 엮었을 뿐이었다.
“스승님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내게 주기만 하셨지. 누군가 내게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있냐고 물으면…. 아마 그렇다고 대답할 거야. 날 버린 아버지 대신, 세상의 그 누구보다 아버지라는 명칭에 어울리는 스승님을 모셨으니까.”
“….”
타닥. 타다닥.
모닥불에서 튀어 오른 불씨가 바람을 타고 날아들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스승의 옆자리였고, 해야 할 일은 홈에서 부여받은 일과, 몸이 불편한 스승님을 모시는 일이었으니까. 그 둘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지금, 아스트라드는 정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
교수는 멍한 얼굴로 지팡이를 까딱거리는 아스트라드를 보았다.
초점 없는 눈에, 감정 없는 목소리. 지팡이에 이는 바람이 희미하게 연주하는 단조롭고, 서글픈 소리.
본인은 괜찮은 줄 알지만, 현실과 감정의 간극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다. 울지도 못하고 그저 망연자실한 상태. 이렇게 마음이 흔들려버린 사람을 충동질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복수. 딱 한 단어면 저 녀석을 끌어들일 수 있겠지.’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흉수. 바즈유르에 대한 이야기에 더해 지금 이 세상이 처한 상황을 적당히 잘 버무리면 아스트라드를 우리와 함께하게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동기도 확실하고. 이 정도 유능한 동료를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니 플레이어라면, 여기서 이 녀석을 데려가는 게 맞겠지.
하지만.
“모르겠으면. 해 뜨고 나서 그 ‘산책’이라도 나가보던가.”
교수는 소년의 등을 떠미는 대신, 그냥 지켜보는 것을 선택했다.
‘복수귀치고 결말이 좋았던 사람이 없었거든.’
방송을 보는 사람들이 뭐라고 할지야 뻔하지. 배가 처불렀네, 이해득실 계산하는 게 사칙연산 수준도 안 되네, 하고 난리가 나겠지. 나만 해도 지금 속으로 ‘실수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득하니까.
하지만 그렇게 사람을 망가뜨려 가면서까지 제 잇속을 챙기고 싶지는 않았다. 감정적인 이유가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서 데리고 다니면 내가 버틸 자신이 없으니까.
“바람 좀 쐬라고. 너네 바람마법사들이 사고치고 맨날 하는 말 있잖아. ‘그냥 그런 바람이 불었을 뿐이오.’. 마을 우물을 용오름으로 만들어 하늘 위로 날려버리고, 뜬금없는 폭풍으로 수확철 밀을 모조리 날려버렸다가 영주한테 잡혀와 몇 배로 배상하고, 귀족 아가씨 납치해서 구름 위에서 마구 휘두르다가 돌려 보내주고. 이게 절대로 생각 같은 걸 하고 하는 일일 리가 없잖아? 너희 바람마법사들은 생각을 하고 움직이는 존재가 아냐. 그냥, 자기 바람에 맞춰서 움직이는 거지.”
미치광이라 불리지만, 그만큼 그 누구보다 자유롭게. 오직 제 마음이 시키는 대로만 살아가는 이들이 바람의 마법사들이었으니.
흔들리는 어린 바람 마법사의 마음이 누군가의 충동이 아니라, 스스로 그 마음을 딛고 일어날 수 있도록.
긁적긁적.
“….이런 거 잘 못하긴 하지만.”
교수는 복수를 입에 담는 대신 성물을 꺼내 들었다.
대충 돌조각에 괴어 바닥에 세워놨음에도, 은은하게 새어 나오는 성광은 계곡에 신전의 경건함을 내려 앉히기에 충분했다.
“뭐, 뭐야 그건. 한눈에 봐도 보통 물건이 아닌데….”
“그럼, 아니지. 광명교단의 성물에, 무려 성녀님의 영혼이 담긴 물건이니까. 웬만한 도시의 신전을 통째로 들고 와도 이것보단 덜 신성할걸.”
“그런 물건을 이런 흙바닥에….”
“무늬만 성자라도, 성자잖아. 가족 잃은 소년 앞에 성직자가 할 일이 뭐가 있겠냐.”
애초에 밖에서도 종교 같은 건 없었고. 이름만 성직자라 기도문 한 줄 아는 것도 없었지만.
적어도, 두 손을 마주 잡는 것 정도는 누구나 할 줄 아니까. 누군가 내민 손을 붙잡듯, 스스로에게 손 내밀어 구원하듯.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여명 앞에, 희미한 기억 속 주교를 따라 어설프게 무릎 꿇은 교수가 두 손을 마주 잡았다.
“기도해. 아스트라드. 뭐든, 대충 속에 있는 이야기라도 털어놔.”
“하지만, 스승님의 바람은 이미….”
“그건 마법사라는 이름의 무신론자 이교도새끼들 상식이고. 로하람 교단에서는 죽은 자는 무조건 별로 돌아간다. 로하람이 그랬다면 그런 줄 알아. 네 스승님의 바람은 흩어졌지만, 영혼은 저 하늘 어딘가에 계실 거라고.”
“….”
풀썩.
성직자 앞에, 가족을 잃은 소년이 조용히 무릎 꿇었다.
신전의 종소리도. 가슴을 적시는 기도문도. 흔한 제향(祭香)하나 없는 조촐한 의식이었지만.
세찬 바람이, 스승의 이름이 담긴 통곡을 감싸듯 계곡을 휘감고 있었기에.
소년은 마음껏 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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