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33
Chapter. 12. 레터스 투 윈드메이지(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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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는 노마법사의 말에 저도 모르게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서 시신을 하나하나 들것에 조심스럽게 실어, 하늘에 띄워 보내는 중인 아스트라드. 성녀님 영혼은 확보했으니, 성녀의 영혼 다음으로 이 지역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보상. 개쩌는 동료이자 인간 복리적금.
아니 왜, 우리 유망주는 왜!
당장 저 녀석 데려가면 뭐부터 가르칠지, 몸이 약해 보이니 특작대식 체력단련부터 시작하는 게 어떨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교수로서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설마, 아직도 내가 알아내지 못한 캐릭터 히스토리가….?’
“쟤 없으면…. 우리 다 굶어 죽어….”
“이런 병-”
“으음?”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래…. 전부 말라 죽을 거야…. 홈이 병들어가고 있는데,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아스트라드가 빠져버리면 홈은 서서히 약해지고…. 불안정해지고…. 우리는, 고향을 잃게 되겠지….”
아. 그 얘기였구나.
아스트라드의 골방에서 들었던, 그 쌓여가는 누락편지 얘기였다. 마력만 잡아먹는 악성 재고는 늘어가는데, 대마법사의 마법이 가로막아 그걸 처리할 방법이 없다던 그 얘기.
“절대로 안 됩니까?”
“안 돼.”
“절대로?”
“안 돼에에.”
“바람 마법사를 가둬둘 셈입니까?”
“그럴 순 없지만…. 적어도 저 아이의 바람은 아직 홈을 맴돌고 있으니까. 나는 그게 보여. 그 바람이 아스트라드를 밖으로 이끌 때까지는, 홈에 머물게 될 게야.”
몇 번을 말해도 확고한 눈빛으로 안 된다고 말하는 노마법사.
망할. 이거, 그거다.
‘전체 스토리 흐름상, 현 시점에서 동료 영입이 불가능해진 캐릭터.’
저 수염 성성한 번개 할아버지는 펠릭스 홈을 대표하는, 일종의 팩션 NPC, 한 진영이나 세력을 대표하는 캐릭터로 보였다.
그런 NPC가 플레이어의 영입시도를 보더니 ‘얘는 안 돼’라고 말한다는 것은, 이미 어떤 분기를 놓쳐서 영입 불가한 상태가 됐다는 뜻.
분기가 어딘지는 안 봐도 뻔했다. 아스트라드의 분노에 불을 붙여 전쟁 마법사로 만들면, 폭풍의 언덕 밖으로. 그게 아니면 남아서 홈의 보수를 위해 연구하게 되는 것이겠지.
뭐, 그전에 어떤 방법으로 해결책을 제시한다거나, 아예 내 손으로 홈의 기둥부터 박살 내버리거나 했다면 또 결과가 바뀔 수는 있었겠지만. 어쨌든 지금 내 월드에서는 ‘아스트라드, 이적 불가’ 판정이 콱하고 박혔다는 뜻이다.
‘어떤 식으로든 다 얻을 수는 없다는 말이군. 애를 맛탱이 가게 만들어서 당장 써먹거나, 착한 아스트라드로 내버려 둬서 여기 남기거나.’
아쉬웠지만, 깔끔하게 포기했다. 어차피 지금까지 여기서 얻은 것만 해도 목표치는 한참 초과하기도 했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백 번 중에 백 번 다 저 녀석을 여기 놓고 가는 걸 선택했을 테니까.
“….그게 저 녀석의 바람이라면.”
“고오맙네에에…. 고마워…. 첫 번째 환자를 데려갈 때는 슬픔이 가득하던 얼굴이 저렇게 피어난 것은…. 아마 자네 덕분이겠지….”
“예, 뭐. 애가 좀 우울해 보이길래.”
“오오옴. 아스트라드는…. 좋은 바람을 타고난 아이로고….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바람을 타고 오르는….”
눈꺼풀에 파묻힌 작은 눈으로 조용히 나를 올려다보던 노마법사. 그는 뒤에 있던 다른 마법사에게 무언가 얘기하더니, 바들거리는 손으로 로브를 뒤졌다.
“자네에게…. 줘야 할 물건이 있군….”
“오.”
팩션 NPC 맞네. 메인 퀘스트 성공 보수도 주고.
휘익!
노마법사는 품에서 꺼낸 상자 두 개를 내게 던졌다.
딸깍.
작고 화려한 상자에서 나온 것은, 내 엄지손가락만 한 작은 병. 뭔가 마법적인 것으로 봉인된 병 안에는 무언가 사납게 회전하며 유리 벽면에 물방울을 흩뿌리고 있었다.
“하나는…. 폭풍이 담긴 병…. 지금은 죽고 없는 마법사가…. 유랑하다 만난 폭풍을 설득하여 담아두었다고 하지…. 가장 거세게 몰아칠 수 있게 해준다는 약속이었으니,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대한 적을 만났을 때 깨트리면 자네에게 폭풍의 힘을 빌려줄 게야….”
“오.”
좋은 거다. 소모성 광역 마법기. 스크롤 같은 아이템과 달리 이런 고유명사가 붙은 소모품은 상당히 희귀한 편이다. 한번 밖에 못 쓰니까 어느 정도 위력인지는 쓸 때가 돼서야 알 수 있겠지만, 실망할 정도는 아니겠지.
굿굿. 작은 쪽은 매우 만족.
“이건…. 뭡니까?”
“직접 열어보게.”
큰 쪽은, 내 팔뚝 반만 한 길쭉한 상자. 뭔가 마법 봉인이 잔뜩 붙어있고, 사이즈도 딱 적당한 게….
‘마법기! 딱 사이즈가 완드네! 햐, 이건 진짜 귀한 건데! 당장 윈드 워크 정도만 담겨있어도 도약하던 도중에 속도 손실 없이 직각으로 꺾을 수 있다고!’
원체 장비 아이템이랄게 잘 없는 GG였지만, 나는 특히나 아이템이랑 인연이 없었다.
교단에서 얻어온 수갑은 제대로 싸울 때 사이즈가 안 맞고, 같은 이유로 너클로 쓰던 성물도 못 쓰는 나로서는 일반 장비보다 이렇게 들고 있으면 추가적인 성능을 발휘하는 장비가 절실했는데, 이렇게 떡하니 나와주다니. 고생하고 볼 일이다.
‘제발 완드, 주문 세 개, 아니 두 개짜리라도! 기왕이면 벼락 할아버지가 준 거니까 바람 속성 하나, 번개 속성 하나 들어간 깔쌈한….’
딸깍!
“음?”
어…. 열어 보니, 일단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는 크다. 아무리 좋게 쳐줘도 완드라고 볼 수는 없는 사이즈. 뭔가 케이스처럼 봉인이 덕지덕지 붙어있는데, 새로 한 티가 나는 걸 보니 오래된 유물도 아니고.
도대체 이게 뭐지, 하는 의문 속에서 그것을 건드린 순간.
촤아악!
덥썩!
“뭐, 뭐야?”
내 손이 닿자마자, 안에 들어있던 것이 봉인을 찢고 나를 붙잡았다.
형편없이 부서지고, 삐걱거리며, 뭔가 얼룩 같은 게 잔뜩 묻었지만…. 질릴 만큼 뇌리에 각인된 하얀색.
에데오르나의 잘린 팔. 선물이랍시고 노마법사가 준 것은, 에데오르나의 팔이었다.
“이게 무슨….”
“역시 자네였어. 으오옴…. 하마터면 속을 뻔했고만.”
“아, 아닙니다. 이건….”
우드득!
내가 뭔가 변명하려는 순간, 에데오르나와의 전투에서 저장된 피를 다 쓰고 바싹 말라버린 몸이 본능적으로 농도 짙은 뮤트의 피에 반응하며 살짝 변해버렸다. 특히, 팔에 붙잡힌 부분은 부정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변해버린 상황.
타악!
황급히 하얀 손을 쳐내자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이미 모두가 그 모습을 봐버린 다음이었다.
“자네였고만…. 자네였어…. 홈을 그렇게 부수고 저 괴물들이 그랬다고, 우리 모두를 속였단 말이지….”
파지직, 파지지직-!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펄럭이는 로브 속에 작은 스파크를 피워올리던 노마법사는. 무시무시한 기세를 뿌리며 에데오르나의 손을 집어든 다음….
‘오, 온다!’
….휘익!
그대로, 처음 상자를 던졌을 때처럼 교수에게 넘겨주었다.
“….음?”
“으오음…. 선물이라고 줬는데…. 이렇게 내팽개치면 이 늙은이가…. 상처받아….”
“예?”
어…. 안 죽이나?
창졸간 벌어진 일에 제대로 대응수단도 생각하지 못했다.
튄다?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으면 모르되, 이렇게 며칠이나 소모해놓고 여기서 도망치면 엘프숲 행 티켓은 물 건너가는 거라 도주는 절대로 싫고. 이동속도가 제한될 정도로 얻어맞기 전까지는 보류.
싸운다?
이기….겠지? 일단 전과 달리 펠릭스 홈의 지원도 없고, 무엇보다 손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이 있으니까. 잘하면 이길 수도 있겠지. 그런데 저 영감님들 줘팼다간 그땐 악명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갈 것이다. 그것도 붉은 뮤트 이름이 아니라 성자, 용사로 유명한 교수 이름 앞에. 당연히 싸우는 것도 안 되고.
이도 저도 안 되니 어떻게 무저항으로 맞기만 하면서 상대가 공격을 멈추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다, 싶었는데, 공격을 안 한다. 벼락을 떨어트리기는커녕, 자기 선물 내던졌다고 되게 상처받은 얼굴로 바들거리고 있었다.
“뭐…. 안 하십니까?”
“뭐? 뭐를….?”
“그…. 제가 붉은 뮤트는 맞는데…. 사실 제 입으로 밝혔어야 되는데, 여기에는 아주 깊고 복잡한 사정이….”
“아아, 빨간 놈, 혼내줘야지. 가아암히, 펠릭스님의 위대한 유산의 일부를 몽창…. 부러뜨렸는데! 이빨이 녹아내릴 만큼 무시무시한 번개 속에 100일 동안 쳐넣어도 모자라지!!-이이이이….만.”
잠시 눈을 번뜩이던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걸어오더니 교수의 팔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었다.
툭툭.
“너도 고생 많았고, 열심히 싸웠으니까…. 한 번만 봐줄게.”
“봐….줘요? 왜 그랬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이미 그러고 싶어졌는데. 이유를 굳이….알 필요….없지? 나도 그렇고, 다들 그렇다네? 네가 마음에 들었나 봐. 다들 아스트라드, 그 녀석이 꼬마일 때부터 봤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가봐, 이상한 손님.”
그렇게 말하더니, 노마법사는 자기 할 말 다 끝났다는 듯 홱 돌아서 정말 제 갈 길 가기 시작했다.
심각하게 데려와서, 간이 쪼그라들게 압박을 가득 담아 ‘손님은 붉은 뮤트인가’ 에 대한 청문회까지 열어놓고, 막상 그게 맞다고 결론 나니까 ‘그랬구나. 근데 봐주고 싶어졌음. 가봐.’ 하고 그냥 끝내버린 것이다.
“그냥 봐주고 싶어졌다니….”
어…. 뭔가 이유는 있겠지.
따지고 보면 전투에서 헌신적이 모습이나, 기타 등등의 심리적 요인이 있었겠지만.
“진짜 뇌 대신 말초신경만 한가득 들어있는 사람들 같네.”
결국, 그냥 봐주고 싶어져서 봐줬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을 만큼 충동적으로 사는 사람들.
“아, 이게 아스트라드 놔주는 쪽 보상이구나.”
애를 복수 미치광이로 만들어서 동료로 끌어들이면 포텐 넉넉한 바람 마법사 동료 획득.
펠릭스 홈 수리공으로 머무르게 내버려두면 소모형 마법기와, 어…. 에데오르나 팔 하나.
흔한 rpg 퀘스트처럼 분기에 따라 보상이 나뉘는 퀘스트였던 것이다.
힘이 쭉 빠진 교수는, 에데오르나의 오른팔을 봉인 상자에 다시 집어넣으며 쭉 뻗어버렸다.
아무튼 이제 진짜 다 끝났다.
보상도 다 얻었고, 적은 물리쳤으며, 가슴을 쿡쿡 찌르던 뒷마무리까지 어찌어찌 끝났다.
“어어이! 손님! 환자 다 실었어! 걸어올 거 아니면 타!”
저 위에서 아스트라드의 목소리와 손을 흔드는 노툼, 그리고 절박한 얼굴로 먼지투성이의 성물을 마구 가리키는 알드리치와 오트만이 천막 비슷한 것에 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는 다치고, 누군가는 죽었지만, 어쨌든 정말 뒤탈 하나 없이 마무리된 폭풍의 언덕에서의 일.
“….칼로리 바 먹고 싶다.”
교수는 갑자기 꾸르륵거리는 뱃소리를 들으며, 하늘하늘 내려오는 천조각에 올라탔다.
홈으로 돌아가는 길이라 그런 생각이 난 것 같았다. 이번에도 돌아가신 부모님이 눈앞에 어른거릴 때까지 싸웠으니, 좀 쉬고 싶은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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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라실. 엘프. 70살, 인간으로 치면 약 14살의 소녀.
대부분의 장생종이 그렇듯, 엘프 또한 신체가 매우 빠르게 자라 전성기에 도달한 다음부터 정신이 영글기 시작하기 때문에, 이드라실이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대모와 마을의 다른 엘프들에게 전해 들은 것, 그리고 험준한 블루라인에서 살아남는 방법 등이 전부였다.
이렇듯 순진한 백지와도 같은 이드라실이었기에, 그녀의 어머니가 전권을 위임한 교수의 말도 철석같이 잘 듣는 편이었다.
이번 작전에서 그녀의 역할에도 그런 편이었다.
———
‘물의 중급정령이라…. 솔직히 어떻게 활용할지는 잘 모르겠다. 오트만이랑 포지션이 겹치기도 하고, 또 그거 꺼내면….’
‘꿀꺽, 꿀걱- 끄으윽! 내가, 내가 좀 힘들 것…. 같군. 익숙해져도 전혀 퇴색되지 않는 아름다움이야….’
‘….오트만이 바보가 되어버리니까. 일단 네 능력은 시간날 때 제대로 확인해보고, 이번에는 원거리 지원과 정탐으로만 써야겠다. 역할은 숙지했지?’
‘네. 지정된 위치에서 대기, 마법사가 발견되면 보고하는 것. 전투가 벌어지면 안전한 위치에서 원거리 공격을 가하는 것.’
‘….세상 믿음직해라. 말투가 꼭 옛날 소대원들이랑 같이 있는 것 같아서 좋다야.’
‘여성스러운 말투라면 루실라 양을 통해 학습하는 중이나. 아무래도 옆에서 듣고 있지 않으면 잘 입에 배지 않아서. 엘프는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알지. 뭐라 하는 게 아니라, 진짜 명령한 것 하나는 잘 들어먹을 것 같은 그 말투가 너무 맘에 들어서 그런 거야.’
———
“….파티 리더 교수…. 여성스럽지 않은 단답형 말투 선호.”
사각사각!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어머님의 명령. 인간 교수를 보고 인간의 삶을 배울 것.
그래서 그녀는 마법사들이 지나간 다음, 정령의 눈을 통해 인간 교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며 기록하고 있었다. 물론 엘프는 기억력도 뛰어난 편이었지만, 그래도 불확실한 기억력보다는 변질되지만 않는다면 반영구적인 기록이 훨씬 신뢰할 수 있었기에. 카네란의 나림은 언제나 일을 허투루 처리하지 않는 법이다.
그렇게 아무 일 없이 첫 번째 둥지가 지나가고. 두 번째 둥지도 지나가고.
세 번째 둥지에 이르렀을 때, 갑작스럽게 온몸의 작은 조각 하나까지 곤두서는 느낌에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적. 매우 위험한 적.”
해야 할 일. 마법사 관측 및 보고. 실행했다. 그 다음. 적이 나타나면….
‘안전한 위치에서 지원할 것.’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했다. 인근 계곡 전체를 울리는 무시무시한 마력의 파동에, 근처에서 가장 안전한.
펠릭스 홈까지 도주한 다음 홈에서 교수가 있는 곳까지 화살을 날리기 위한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투가 끝나고,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
“아우우! 이드라실! 이렇게 가만히 있기만 해도 되는 거예요? 뭐가 터지고 깨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잖아요!”
“파티 리더, 교수의 요청입니다….요. 요청이에요. 안전한 위치에서 지원. 저는 제법 강력한 정령을 다룰 수 있지만, 신체적 방어력은 그리 강한 편이 아니에요. ‘안전’이란 조건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적이 마력을 이용한 범위공격을 가할 수 있는 거리에서 벗어나거나, 또는 해당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지금 우리가 있는 펠릭스 홈 같은….”
“으아아악! 짜증나! 바보! 벽창호! 이상한 엘프!”
“….한가지는 오류가 있어요. 내 지능은 평균에 비해 떨어지지 않아요. 피부는 하얀 편이고, 아직 인간 세상에 익숙하지 못하지 이상한 엘프는 맞아요.”
“와아아악! 으아악! 으아아악!”
이드라실은 이상한 비명을 내지르는 루실라를 보며 그녀에 대한 기록을 꺼내서 살폈다.
[루실라 아에드란]16세. 귀족가 여성. 진취적. 밝고, 대중적으로 귀엽다는 평가를 듣는 외모.
계산적이다. 손해를 극도로 싫어한다.
스스로 평가하길 ‘유도리’없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했다. 무슨 의미인지는 탐구 중.
금화, 은화에 관련된 지식이 상당하다.
.
.
.
.
‘음….’
사각사각
+ 단편적인 사실을 앞에서 나열할 경우 괴성을 지른다.
+ 인간 교수와 달리 그녀의 말투를 대단히 싫어한다.
“….후훗.”
새로운 지식이 늘었다는 사실에 이드라실이 만족하며 수첩을 집어넣는 사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루실라가, 문지기와 몇 마디를 나누더니 아침부터 준비한 복잡한 옷을 입고, 새벽부터 꺼내서 정돈한 장갑과 엑세서리 등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이드라실, 나 어때 보여요?”
“대단히 복잡한 부착물을 여러 개 장착했어요.”
“아니, 그으으으! 예쁘냐구요! 아니지. 음…. 드레스에 불규칙한 주름이나, 먼지 묻은 곳, 얼굴에 잡티가 가려지지 않은 곳은 없냐구요!”
“왼쪽 종아리 아래. 패턴이 흐트러진 곳이 있습니다.”
“좋아! 용사님이 익숙해지기만 하면 괜찮다더니, 이런 얘기였구나….! 눈은, 생기있어 보여요?”
“해당 연령대 인간 여성다운 생명력이 있습니다. 음, 있어요.”
“고마워요! 지금 제 질문 잘 기억해주세요! ‘예쁘냐’고 물으면, 이 과정을 밟아서 판단하면 되는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루실라. 그런데 어딜 가시길래 ‘예쁘게’ 준비하는 거죠?”
“어디긴요! 새벽에 그 난리가 났는데, 그래도 일행인데 가만히 있을 수야 없잖아요? 전투 시작되자마자 여기까지 도망친 누구누구 엘프랑은 다르게!”
“제 이름은 이드라실입니다. 누구누구가 아니라.”
“그아아악!”
루실라는 다시 한번 괴성을 지르려다, 앞으로 만날 사람들을 생각해 마음을 가다듬었다.
‘귀족가 여식의 마음가짐, 귀족가 여식의 마음가짐. 마음은 물이요, 몸은 마음을 담은 거울이니. 찡그린 표정과 성난 목소리는 마음을 헤치고, 헤친 마음은 다시 돌아와 몸가짐을 못나게 한다. 후우! 진정해, 루실라. 예쁘게. 우아하게! 어쩌다 얻은 명성이지만, 전설의 아가씨답게!’
교수가 그녀에게 부탁한 일. 원래는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 그녀이니, 그냥 남아서 엘프 교역품에 일행의 자리를 만든 만큼 그 손해를 계산하고 협상해달라는 게 전부였지만, 루실라는 교수가 말한 ‘여기서 네가 잘하는 일을 해줬으면 한다’를 조금 확대해석했다.
‘내가 잘하는 일. 인간관계. 손익계산. 제국 안에 있는 누구라도, 이름만 알고 있으면 연락을 할 수 있는 폭풍의 언덕이라는 장소에, 현 상황에 내가 가지고 있는 아-주 특수한 명성까지 더하면….!’
상인인 만큼 루실라는 제국 내부에 유력가 귀족이라던가, 권력층, 기타 유명하고 돈 될 것 같은 사람들 이름은 모조리 알고 있었고.
이미 소문이 날 대로 난 [텔드랏에서 온 구혼자]라는 명성은 까다로운 귀족가 집사부를 넘어 해당 귀족에게 닿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심상치 않은 전투음에 더해 ‘이 지역 전체가 위험할 정도의 전투라 도망왔다.’ 는 이드라실의 증언을 더해 일행이 심각한 위협에 처한 상황이라 판단, 루실라는 그 순간부터 마구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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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드보아 후작가 가주님께, 루실라 아에드란이.
초면은커녕 이름을 전하는 것조차 처음임에도 필요한 예의를 모두 차리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워낙 긴박한 상황이기에 결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무례한 편지를 보내게 됐습니다.
제국이 위험에 처했습니다.
오래전 황제로부터 감히 친우이자 왕실 기사의 칭호를 받은 대마법사, 펠릭스 드릭시엘의 유해, 폭풍의 언덕이 적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이미 한차례 습격으로 펠릭스 홈은 반파되었으며, 모든 마법사와 용사 일행이 나가 적과 치열한 전투를….
하여 가능한 한 빨리,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제국의 시설과 수많은 마법사, 용사님이 숭고한 희생 끝에 저 바람처럼 사라져버리지 않게 가능한 한 지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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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쥬얼리 샬 상단주님께.
초면은커녕 이름을 전하는 것조차 처음임에도 필요한 예의를 모두 차리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워낙 긴박한…..
지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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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변경백령의 주교, XXX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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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친애하는, 친애하는….
일필휘지로 최소한의 예만 갖춘 편지를 작성한 루실라는 새벽의 전투음 속에 유일하게 홈에 남아있던 문지기 노인을 깨워 제일 빠르게 편지를 부칠 방법을 알려달라 하였고, 들어온 편지가 나가는 통로에 한아름이나 되는 편지를 모조리 부쳐버렸다.
‘….근처에 지부가 있는 상단이나 지급으로 달려오면 하루 거리에 있는 귀족에게만 연락을 넣었으니 몇 명 정도는 와주겠지. 전투 인력을 요청했으니, 이 근처에 왔다면 저 계곡 너머에서 얼마나 큰 전투가 벌어지는지 한눈에 알아볼 거야. 제발, 제발 내가 부른 지원군이 늦지 않기를….!’
솔직히 콧대 높은 귀족들이 움직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교수에게 부탁받은 대로 최선을 다했을 뿐. 아마 이것을 빌미로 그녀에게 빚을 지울 생각이 가득한 상단의 용병과, 성자의 위기에 한달음에 달려올 성기사들이 전부일 것이리라.
그리 생각하며 문지기의 안내를 받아 홈의 입구로 나선 루실라는….
푸르륵, 푸르륵!
철컥 철컥 철컥 철컥!
“….헥, 헤끅?!”
그녀의 눈앞에 가득 들어찬 철의 파도에 그만 딸꾹질을 해버리고 말았다. 뒤따라온 이드라실도, 한눈에 봐도 정예인 것이 분명한 기사들의 향연에 감탄했다.
“당신의 말이 맞았어요, 루실라. 나는 조금 더 노력했어야 했군요.”
“아, 아니…. 난 이정도 인원을 부른 적이 없는데….”
루실라가 한가지 간과한 것.
바로 여러 귀족에게 ‘동시에’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냥 편지도 아니고 제국이 공격당하는 중이라는 무시무시한 내용의 편지를.
당연히 편지를 받은 귀족들은 뒤집어졌고, 근처에 있는 귀족들이 모두 같은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곧바로 영지 내 신전에 달려가 황급히 신성 통신을 때린 것이다.
어디로?
제국이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곳으로.
황궁으로 말이다.
철컥. 철컥. 철컥. 척!
말도 안 되는 스케일에 잔뜩 얼어버린 루실라가 덜덜 떨고 있는 사이, 훤칠한 기사 한 명이 말에서 내려 그녀 앞에 다가온 다음 무릎을 꿇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소. 레이디 루실라.”
“아, 아….가, 감사를…. 어디에서 오신 귀인이신지….”
“감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과연, 제국에 대한 습격이라 칭할 만큼 어마어마한 기파가 느껴지는군요. 검가 아슬란의 순회 기사단. 즉시 참전하겠습니다.”
“거, 검가라면…. 그 공작님의?”
“검가에 따로 지원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으나, 황실의 지원 명령이 왔기에. 제국 암석지대 인근, 각 지역의 방위를 맡은 병력을 제외, 폭풍의 언덕 인근 영지의 치안 유지 임무에 투입되어있던 여유 병력은 대부분 이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흐, 흐끅! 딸꾹!”
루실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에서 떠난 방명록이 색색의 가문 깃발로 수 놓인 계곡의 기사단 사이를 넘나드는 것을 보았다. 저 깃발은 명문가 자제만 받아서 근위 기사단의 종자로 키우는 종자 기사단의 것이고, 저건 검공 아슬란 가문의 깃발이고. 뒤탕트 후작가, 산탈리아 공작가, 그리고….
“제, 제국 국기…. 황가의 깃발! 히끅!”
“모자란 인사는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선두를 비우고 싶지는 않으니.”
“아…. 예….”
“그리고, 조만간 황가에서 타국의 귀족임에도 제국의 안위를 위해 헌신해주신 점을 감사하기 위해 초대장을 보낼 것입니다. 알아두시길.”
“황가…. 에서요?”
“아마 편지가 올 것입니다. 그럼, 이랴!”
그림에 나오는 기사처럼, 멋지게 말의 앞발을 들어 올리더니 계곡 아래로 다른 기사를 이끌고 사라지는 검가의 기사.
편지와 신성마법으로 탄탄하게 연결된 제국의 정보망을 얕본 덕분에, 설마 몇 시간 만에 이렇게 일이 커질 거라 생각하지 못한 루실라는 얼이 빠진 얼굴로 마지막 기사가 넘기고 간 방명록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부셔.’
그런 착각이 일어날 정도로 휘황한 방문자 명단이었다. 인근 영지에서 각 지역을 대표하는 기사단을 제외하고, 전공에 목말라 있는 기사가 모조리 와버린 것이다.
말 한마디에 변방의 영주들까지 바로 움직이게 할 만큼의 압도적인 권력. 대표 기사단을 제외하고, 당장 올 수 있는 여유 기사단만 몰려왔는데도 저 정도 숫자에, 저런 정예라니.
“이게…. 제국.”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루실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이때가 새벽이 막 지나고 해가 떠오를 때쯤.
교수가 마법사들과 일을 모두 마치고, ‘이제 진짜 다 끝났으니까 집에 가서 쉬어야지~’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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