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34
Chapter. 12. 레터스 투 윈드메이지(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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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미누스 페르쿠스.
로하람을 모시는 광명의 성기사인 그는 빛의 여러 가지 영광 중에서도 항상성을 가장 사랑했다.
전쟁과 악의, 언데드와 몬스터가 세상을 뒤덮어도 아침 해는 뜬다. 페르쿠스는 그 항상성이 언제나 앞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늦추지 말라는 로하람의 계시처럼 느껴졌다. 어떤 일이 있어도 변치 않는 진실, 혹은 운명.
그런 의미에서, 페르쿠스는 성자 교수가 존경할만한 교인이며, 이 시대를 위해 태어난 용사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최근 교단에서 새로 집필 중인 성자록에 따르면, 몰락한 가문 출신으로 신의 뜻을 받들지 못하고, 그 힘이 미약할 때부터 저 뮤트라는 종족과 목숨을 걸고 싸워왔다고 하셨지. 용병일 때는 도시를 습격한 적으로, 실험체일 때는 악신의 주구가 된 마법사의 손에 타락하지 않기 위해 저항하며, 더럽혀진 몸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때조차 성실하게 교단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결국 교지를 받들어 성자가 되었다. 그 삶의 모든 부분이 뮤트와 혈투로 점철되었으니. 진정으로, 그 변치 않는 투지야말로 참된 빛의 인도자를 뜻하는 게 아닌가!’
그런 그에게 교단으로 날아온 한 장의 편지는 계시나 다름없었다.
‘지독할 정도로…. 악을 태우는 냄새가 가득하구나. 성자님께서 향하는 곳에는 언제나 악의 주구가 산재해 있음이야. 역시, 그분은 성녀를 잃은 우리 교단을 위해 로하람께서 내려주신 인재가 틀림없다!’
모여든 기사들과 말을 달리며. 곳곳에 타들어간 뮤트의 시체와 무너져내린 계곡을 보며 페르쿠스의 기대는 점차 확신으로 변했다. 마침내, 마침내 오랜 세월 동안 끊겼던 그분의 음성이 다시 우리에게 당도했노라! 보다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그리고 마침내. 말로 한참 달려야 할 거리에서도 불경한 마력과 악적의 향기가 느껴지고. 그 끔찍한 냄새로도 덮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신성의 잔향이 느껴질 무렵.
“….이 새끼들은 또 뭐여?”
페르쿠스는, 조우하고 말았다.
작은 천 자락을 밟고 내려오는, 떠오르는 태양을 등진 그 피의 성자를.
“오오, 오오오오…. 찬양…. 찬양할지어다! 라투라, 로-하람….! 라투라! 라투라!!!!”
천신처럼 하늘을 걸어 그의 앞에 당도한 성자.
이 사람이 ‘그분’임을 가리키듯, 성광처럼 그의 뒤에 떠오르는 선연한 빛.
그리고….
후우우우웅-!
옷깃에 가렸음에도, 사방을 그 존재감으로 가득 채우는 거대한 신성력.
“어…. 교단에서 오셨습니까? 어디 교구의 누구신지….”
“어흐흐흑! 말씀을 낮춰주시옵소서, 밝으신 분이여! 아아아, 라투라! 라투라아아아!!!”
디미누스 페르쿠스는 마침내 빛의 뜻이 그에게도 닿았음을. 그 순간을 살아서 마주할 수 있음을 감사하며, 먼지투성이 땅에 엎드려 그분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낙마하듯 떨어져 무릎걸음으로 다가오는 다른 성기사들보다 먼저, 그분의 광명을 배알하기 위해.
사사삭!
빠르게 물러나는 그 경건한 스텝은 겸손함의 표상이라.
페르쿠스의 눈에서 기쁨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의 눈에 주변에 가득한 제국의 기사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오직 사위를 가득 채운 아침의 광명과, 그것을 한 몸에 받은 그분만이 보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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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흔적이로군. 역시 폭풍의 언덕에 상주하는 마법사들. 굉장한 전투였겠어.’
로시온 말러.
검가의 기사로서 그는 나름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평민 출신으로 기사의 눈에 띄어 검가의 종자로 생활했으며, 꾸준히 그 역량을 증명하여 스물하나라는 젊은 나이에 기사의 위를 받은 인물.
비록 여전히 출신의 벽은 두터워 서임 이후 15년이 지난 지금에도 직접 검공을 모시는 ‘안뜰’이 아니라 순회 기사단의 단장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그의 실력을 감추지는 못했으니.
전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보는 것’으로 가르치는 검가의 평민 기사단장은 펠릭스 홈에서 계곡으로 이어지는 흔적을 볼수록 그 규모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과거에 방문했을 때 펠릭스 홈 주변의 언덕은 이렇게 좁지 않았지. 흔적을 보아하니 대마법의 여파에 부근 계곡이 거의 다 녹아내린 것 같군. 그런 마법을 쓰고도 목숨처럼 아끼는 홈에 파손을 입고, 흉수를 처리하지 못해 계곡 곳곳에서 전투를 벌였다라….’
자세한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계곡 여기저기에 흩어진 흔적만 해도 충분히 그 전투의 규모를 알 수 있었다. 단단한 화강암을 베어낸 윈드 커터의 흔적. 계곡 하나를 새까맣게 태운 자국. 그리고….
“이럴, 수가….”
아예 지형이 통째로 바뀌어버린, 세 번째 전투 장소.
하나같이 비슷하게 생긴 암석지대의 계곡들과 달리, 언덕 너머 가장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에 도착한 로시온은 단장으로서 체통도 잊고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처음 그를 감탄하게 했던, 윈드 커터에 베어진 화강암?
여긴 아예 계곡의 한쪽 사면이 케이크처럼 조각나 있었다.
계곡을 까맣게 물들일 정도의 낙뢰 마법?
이곳은 마법사 흉내를 내는 광대조차 마법을 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마력이 짙게 떠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감탄하게 한 것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흔적이었다.
파괴.
앞서 말한 모든 흔적을 한데 아우르고 있는, 계곡 전체에 퍼진 균열의 중심지.
지진이라도 생긴 듯 계곡 전체를 쪼개버린 파괴의 중심지는 정말 무참할 만큼의 힘에 유린당해 있었다.
V자 계곡의 안에서 지평선에 떠오르는 태양이 보일 정도로 한쪽 벽면을 무너뜨린 대파괴의 흔적. 마력이나 오러의 흔적이 없는 순수한 힘의 여파.
“아익, 좀….”
“거부하지 마시옵소서! 신도로서 성자를 모시는 것은 당연한….”
로시온은, 소란 속에서 그것을 만들어낸 장본인으로 보이는 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 왜 사람 발을…. 도대체 어떻게 알고 이렇게 빨리들 오신 겁니까? 예? 아니, 로하람님이 장본인인 나한테는 말한 적도 없는데 댁을 왜 불러!”
전장 곳곳에 피어난 가시나무와 동일한 흉터를 전신에 짊어지고, 구름같이 몰려든 성기사들의 숭배를 받으며 역정을 부리는 남자.
전흔이 역력한 상체를 훤히 드러낸 그 전신과도 같은 몸에, 로시온은 무를 갈고 닦는 이로서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칼리온.”
“와아아아….”
“칼리온!”
“예, 옙! 단장님!”
“쉬이이. 목소리를 낮추거라.”
“헙!…. 예, 무슨 일이십니까.”
사각사각-
로시온은 급히 휘갈겨 쓴 편지를 두 번 접어, 종자 칼리온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 길로 대열에서 이탈하여,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편지를 날려라. 검공께 보내는 편지이니 최대한 서두르도록.”
“예, 옙! 성실히 이행하겠습니다!”
눈치가 빠른 녀석답게, 기수식조차 생략하고 천천히 속도를 줄여 뒤로 밀려나는 녀석.
그런 종자를 바라보는 기사의 눈에는, 제국의 것이 아닌 거대한 힘을 바라보는 걱정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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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흐응! 죄송합니다. 광명의 대리자 앞에서 이런 추태를….”
“아니 뭐, 추한 거 아신다니까 한마디 하겠는데…. 좀 떨어지면 안 됩니까?”
도. 대. 체.
이거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퀘스트 끝났잖아. 전투 끝났고, 히스토리 끝났고, 마지막 고비까지 잘 넘기고 보상도 다 받았잖아! 이제 친밀도 100% 찍은 홈의 마법사들이랑 하하호호 웃으면서 밥이나 먹고 쉬다가 엘프숲행 열기구 타고 출발할 일만 남았는 줄 알았는데!
“들었는가. 길리온 형제. 성자께서 불편하시다는 군. 떨어지게.”
“댁 말이야 댁! 디미누스 성….형제님! 나 사지 멀쩡하니까 부축할 필요 없다고! 아니, 부축하는 척 은근히 달라붙지 좀 말란 말이다! 소름 끼쳐!”
“그럴 순 없습니다. 이 디미누스 페르쿠스, 교단의 성기사로 30년을 봉양하며 수많은 악과 싸우고, 형제들을 잃으며 깨달은 게 있으니. 그건 바로….”
스으윽!
“악은, 그 사악한 손아귀를 언제 어디에나 뻗어둔다는 사실입니다. 흑마법사를 쓸어버리고 한 달이 지난 뒤에야 발동한 저주에 목숨을 잃은 바텔리 형제가 그랬으며, 악에 물든 마수에게 입은 상처가 낫지 않아 끝내 두 다리를 절단해야 했던 쇼티스 형제가 그랬지요.”
“디미누스 형제의 말이 참으로 맞습니다. 저렇게나 많은 악을 참살하셨으니, 그네들의 피를 얼마나 뒤집어쓰고 저주를 얼마나 받으셨겠습니까? 속세의 눈길 따위는 개의치 마십시오. 로하람께서 저희들을 지켜보고 계시니.”
대관절, 갑자기 저 계곡에서 우르르 튀어나온 이 덩어리들은 뭐냔 말이다. 저 기사들은 또 뭐고.
아스트라드의 마법으로 바람을 타는 천막에 올라 복귀하려던 순간, 제법 높이 올라온 교수의 시선에 저 계곡 안쪽에서 움직이는 먼지 구름이 보였다.
‘그때 그냥 모르는 척하고 홈으로 빨리 튀어버리는 건데.’
혹-시나, 정말 혹시나 남은 뮤트의 잔당일까 봐, 뮤트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지만, 돌다리도 두들겨 보는 셈 치고 확인하러 접근했다가 이 꼴이 나고 말았다.
뭐? 뮤트의 피가 어쩌고 저주가 어째?
‘애초에 나는 뮤트 생살 씹어먹고 피를 들이키면 훨씬 건강해지는 체질이란 말이다!’
그러니 성기사들의 걱정은 하등 쓸데없는 일이건만, 그걸 제 입으로 말할 수도 없으니.
결국 교수는 무슨 말을 해도 ‘라투라, 라투라!’ 같은 기도어로밖에 받아내지 않는 신성한 형제들의 품에 안겨 펠릭스 홈까지 올 수밖에 없었다.
“거 되게 재밌어 보이더라, 손님. 좋은 형제님들을 두셨네.”
“닥쳐 아스트라드.”
“히히히히.”
다행히 홈에 도착한 다음에는 그들의 신성한 애정공세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홈은 기본적으로 좁은 통로가 많은 기형 건물이라 많은 기사를 다 받기 힘든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들어가겠소.”
“안 돼. 방문할 사람을 대거나, 시칠린 황금나비 100마리 잡아줘.”
“대관절 엘프 숲에서 1년에 10마리가 체 안 잡히는 그것을 어떻게 당장 구해온단 말이오! 저 안에 우리 성자님이 있다지 않소!”
“교수‘손님’을 만나러 손님이 되겠다는 건 말도 안 되잖아. 안 돼. 돌아가. 안 바꿔줘.”
“크으으윽!”
그 유명한 ‘괴팍한 문지기’ 님이 모조리 입구에서 잡아버렸기 때문이다. 들어올 때는 짜증 나던 그 까탈스러움이 지금은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대충 근처에서 모여든 기사가 120기. 성기사 30명. 겨우 몇 시간 만에 오러 유저급 기사가 150이라.’
심지어 황제의 명령이었으니 면피용 쭉정이를 보낸 것도 아니었다. 당장 슬쩍 보기만 해도 정예인 게 한눈에 보일 정도였으니까.
일행과 늦은 아침 식사를 하며, 교수는 저 앞에 막사까지 세워가며 눌러앉은 기사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일단, 이 일을 시작한 장본인한테 좀 들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이드라실, 너 전투 시작하자마자 여기 있었다고 했지? 루실라는 어디 갔냐?”
“기사들이 계곡으로 들어간 다음, 바로 홈 밖으로 나갔습니다. 최소한 기사들이 머물 여관이라던가, 그것마저 없으면 막사를 지을만한 재료라도 사다 놔야 덜 욕먹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거 말고 잠깐 들어왔었잖아? 나 보고 막 어버버버 하다가 어디로 튀어가던데?”
“지금은 그 막사를 하나하나 돌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황제의 명이었으나, 결국 그녀의 요청으로 시작된 기사행이니 감사 인사를 하고 다니는 게 귀족적으로 맞는 일이라면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국 사교계에 ‘교수 용사파티’에 대한 나쁜 인식이 생길지도 모른다면서 말입니다.”
“음. 급한 불은 혼자 다 꺼주셨구먼. 역시 유능해. 좀 지나치게 유능해서 이런 탈이 난거지.”
솔직히,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전투가 조금만 더 장기전으로 이어졌다면, 우리 쪽이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고, 그랬으면 저 기사단의 지원이 정말 가뭄의 단비 같았겠지. 알드리치랑 아스트라드의 쩔어주는 콤보가 너무 제대로 들어가서 지루한 마법 공방 없이 단기 결전으로 끝나서 그렇지.
아무튼, 성기사 쪽이야 기도할 자리만 깔아주면 불만 없는 족속들이니 상관없지만. 당장 새벽에 여기까지 말이 거품을 물도록 달려왔는데 아무 전공도 없이 돌아가게 생긴 기사들이 문제였다.
“조금 출혈이 있겠지만, 기사들에게 기부….를 조금 해주면 좀 괜찮지 않겠나?”
“오트만님, 그랬다간 진짜 큰일 납니다. 황제의 명을 돈으로 살 생각이냐면서.”
“그럼 황제의 명령으로 그랬으니 굳이 우리가 뭘 해줄 필요는 없지 않나?”
“으으음….”
그야 그렇지. 내가 제국 사람도 아니고, 애초에 보상을 약속하고 부른 것도 아니니까. 광명교단 최고위층인 교수님한테 뭐라 할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헐레벌떡 달려온 기사들의 눈초리가 좀 사나워지는 수준이겠지만….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니까요.”
“정치? 이게?”
“예. 아시잖아요. 제국 황위 계승권 다툼. 지금 황제 나이가 60에 거의 가까워져 가니, 한창 치열할 때니까. 이것저것 상대 후계자 깔 기회만 노리던 놈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어떻게든 요리해서 처먹이려고 할걸요?”
“예를 들면?”
“음….[이미 끝난 일을 가지고 제국에 위협을 조장해, 귀한 기사 제원을 낭비시켰다. 그들이 그 시간에 제국 치안을 위해 힘썼으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제국민이 수십 명은 될 테니, 이는 외국인이 허위신고로 제국민을 수십 명 죽인 것과 진배없다.] 라던가. [황제의 명령을 헛된 것으로 만들었으니 황제 모욕죄에 해당한다.]…. 뭐, 이런 식으로?”
“그게 말이 되나?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의견을 믿는 이들이 있을 리가….”
“믿는 게 아니라, 이런 프레임을 만드는 게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겁니다.”
그게 루실라가 저렇게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다니며 기사들의 비위를 맞춰주고, ‘귀족적’으로 흠이 없게 하려고 노력하는 이유겠지.
막말로 이 이야기가 조금 더 커져서 논란이 된다면, 제국 측에서 엘프숲 출입을 금한다고 파발을 보낼 수도 있다.
왜?
제국 건국사에 엘프가 얽힌 일이 꽤나 되거든. 엘프 숲이 제국에 붙어있으니까 그만큼 얽힌 일도 많고. 두 종족의 장이 대면하는 자리이니 제국의 황제 면 세우기에도 좋고.
실제로 지금도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면 엘프 숲의 지도자, 장로가 축사를 보내곤 하니까, 어찌 보면 황제의 정통성과도 연이 있는 엘프 숲인 만큼, 그런 곳에 계승권과 관련된 논란이 있는 외국인이 들어가려 하면 일단 틀어막고 볼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제국 고위층까지 파고든 그 팔카투스의 기생 인간이 우리 행로를 방해하려 할 수도 있고 말이야.’
공개적인 자리에서 입에 담을 얘기가 아니라 속으로 삼킨 얘기였지만, 어쨌든.
내 설명을 듣게 된 일행은 생각보다 곤란한 상황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어찌한단 말이오. 물론 나는 대장에게 큰 은혜를 입었으니 어떤 결정이라도 따르겠소. 다만…. 나도 제국에 내 아이들이 있는 걸 안 이상, 여기서까지 범죄자가 되는 것은…. 되도록 지양하고 싶은데.”
“알지. 다른 문제가 아니라도 황위 쟁탈전과 관련된 문제는 진짜 민감한 거라, 막았는데 억지로 들어가면 진짜 더럽게 달라붙어서 복귀하는 길이 전쟁터 수준이 될 수도 있어. 그렇게 시간 줄이자고 이 지랄을 했는데 제국에 아예 매여버릴 수 있다는 얘기니까. 그렇게 되면 안 되지.”
스으윽-
한숨이 가득한 테이블에, 조용히 필기하던 이드라실이 손을 들었다.
“저는 복잡한 인간사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결국 저 밖의 기사들을 만족하게 하면 될 일이 아닌지. 숫자가 적지도 않고, 기사들은 무용담을 떠드는 일을 하는 족속이라 들었으니, 여기서 좋은 기억을 가져간다면 다른 소문을 무마시켜 줄 것으로 보입니다.”
우적우적, 꿀-꺽!
“정답이야 이드라실. 이제 진짜 많이 배웠네.”
꾸벅-
살짝 고개를 숙이는 이드라실과, 아예 테이블에 머리를 박아버리는 교수.
‘….이렇게 진짜 성자님으로 소문나면 나중에 개고생하겠지만, 도리가 없군.’
교수는, 답이 없음을 알고 여태까지 기다려준 아스트라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줘봐, 그거.”
“오. 손님, 편지 줄 거 있어서 온 건 어떻게 알았어?”
“신성력. 오늘 아침에 도착한 거, 맞지?”
교수는 등 뒤에서 아스트라드가 건네주는 수십 통의 편지 중, 연서에 가까운 성기사들의 편지를 난로 속에 던져버린 뒤 가장 짙은 신성력이 느껴지는 편지를 집어 들었다.
최고급 편지지와 봉투를 썼고, 그런 외관에 어울리지 않게 잉크 번진 자국도 제법 있으며, 인장은 찍고 말리지도 않았는지 옆으로 흘러 눌어붙은 편지.
편지만 봐도 정신 나간 듯 허둥거리는 손놀림이 보이는 그 편지 위에는, 자비 교단의 날개 무늬 인장이 찍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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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제발, 간청하건대, 아무 일 없이 그곳에 머물러주시오. 자비의 교황, 이 로트말리어 3세와 모든 자비의 신도가 간청하니. 털끝 하나만큼의 위협도 없이. 잠자는 어린 아이의 요람과도 같이. 안전히만, 제발 안전히만 그곳에 있어 주시오.
우리가 그분을 모시러 갈 테니.
로트말리어 다누스 필 3세가, 광명교단의 교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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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는 그 인자한 자비교단의 교황이 편지의 밀랍 인장이 마르기도 전에 던지듯 날려 보내는 모습을 상상했다. 대충 지금이 점심쯤이니, 알드리치가 보낸 ‘성녀 납치성명문’이 변경백령의 광명교단을 거쳐, 자비 교단에 전해져 그 답이 올 시간이 되었지.
“자비의 성기사들은 전부 로드릭 최전선에 나가 있으니 올 사람이야 신전에 남아있던, 전장에 도움이 안 되는 늙은 사제나 수행 사제밖에 없을 것이고. 말도 탈 줄 모르니 느지막이 올 거라 생각했는데….”
스윽-
“….비키시오! 우리…..님이 저곳에!”
“이 노구가 순교하는 한이…. 당장 그 분을….!”
조금 진정됐나 싶던 언덕의 아치문 앞에 노인 십수 명이 난리를 피우고 있는 게, 어떻게 노새라도 미친 듯이 몰아서 도착한 듯싶었다.
“읏차! 노툼, 내 옷 보관해달라고 한 거, 잘 가지고 있지?”
“그웍. 교수는 이상한 생물이다. 깨끗한 옷 벗고 더러운 옷 입는다.”
“연기는 현장감이 생명이니까. 덩치 좀 빌리자. 잠깐만 옷 좀 갈아입게.”
“그….우억.”
교수는 슬쩍 창밖을 본 다음, 때가 무르익은 것을 느끼고 예의 그 피와 찢어진 흔적이 가득한 넝마로 갈아입었다.
이제는 본능적으로 교수가 또 뭔가를 할 생각임을 안 알드리치가 슬슬 거리를 벌리고, 오트만은 그 회갈색 물약을 하나 집어 들었다.
“아, 걱정 마세요. 이번에는 저 혼자 하면 되는 일이니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군. 적어도 내년 첫 봄비 정도는 보고 죽고 싶으니까 말일세.”
“얘기나 해주고 가지. 이번에는 또 뭘 할 생각인가?”
“숍니다 쇼. 연극을 좀 할까 해서.”
후두둑!
교수는 전투의 흔적이 역력한 넝마를 입고, 소중한 성물을 목에 걸었다.
어차피 다 끝난 전투를 다시 일으킬 수는 없는 노릇이고, 기사들이 허탕 친 것을 보상할 방법은 없으니.
‘뽕이라도 좀 채워줘야지 뭐.’
그 대신, 교수는 기사라는 놈들이 죽고 못 사는 로망을 좀 건드려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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