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42
Chapter. 13. 사냥꾼, 청소부, 그리고 검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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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축하고 습도 높은 공기.
비릿하면서도 코를 자극하는, 부패한 단백질의 악취.
스캐빈저들이나 입는 누더기에 뭔가 잔뜩 숨겨놓고 경계 섞인 눈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
이안은 이 모든 것을 가슴 깊이 새기듯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양지보다 음지에 산 시간이 더 긴 그에게 불쾌할 만큼 친숙한 환경이었다.
‘이제야 좀 암시장다워졌군.’
부산물 시장 내부는 생각 이상으로 붐볐다. 빨간 등불 아래에서 출처 모를 고기를 토막 내는 정육점 주인 앞에는 낡은 후드와 담요를 두른 사람들이 그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옆에는 사용감 있는 각종 날붙이나 옷, 가방 등을 파는 상점이 있었다.
이안은 태연한 척 지나가며 상점의 옷가지들을 슬쩍 살폈다. 언뜻 보면 그냥 중고 물물거래소 같았지만, 장소가 장소인 만큼 수상한 부분도 많았다.
‘패치로 때운 부분은 총알 자국. 길게 기워낸 부분은 칼에 맞은 부분을 수선한 것이군.’
‘칼날도 대충 닦아냈고, 이가 나간 부분을 갈아내지도 않았어. 반나절만 시간을 들여도 제값을 받을 수 있는 마체테를 그냥 내놓다니.’
과거 무기 상인으로 활동할 적에 저런 물건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스캐빈저, 그중에서도 인간 사냥꾼으로 불리는 부류가 내놓는 물건들.
저건 시체에서 벗겨온 물건이다. 아니면 시체를 만들어서 벗겨왔거나.
‘아무리 돔의 관리범위 안이라도 시장이 너무 건전하다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만.’
음지의 영역인 부산물 시장이 급격히 성장하며 그들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자연스럽게 다른 불법 영업인들이 그들의 그늘에 기대게 된 것이다. 인육시장에 장물 거래소. 마약과 밀주. 그럼 자연스럽게 황무지의 암거래 하면 빠질 수 없는 그것도 있겠지.
이안은 선글라스에 가린 시선 속에서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폈다. 퀭한 눈의 청년. 싸구려 나무 의족을 딱딱거리는 소리. 두터운 망토를 입은 남자. 포대기에 감싼 길쭉한 물건을 보물처럼 품에 안은, 불안한 눈의….
“어이.”
이안은 마지막 남자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그의 쪽으로 잡아당겼다. 짧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와 함께 바싹 마른 남자의 손이 그의 품으로 향하더니 다짜고짜 단검을 뽑아 찔러 들어왔다.
당연히 죄지은 놈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고 있던 이안은 칼을 피하는 대신, 잡고 있던 어깨를 그대로 찍어눌렀다. 균형을 잃은 남자의 칼이 허공을 가르고, 쭉 뻗은 팔은 슬쩍 옆구리에 끼고 당기는 것만으로도 쉽게 꺾였다. 남자의 얼굴에 고통과 함께 당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악! 놔, 놔아악! 대금은 분명히 지불했잖아!”
“거 수줍음 되게 타는 친구로군. 길 좀 묻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싫었나?”
이안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남자를 잡고, 발끝으로 그가 떨어트린 길쭉한 포대기를 슬쩍 풀어헤쳤다. 내용물을 확인한 이안은 남자에게 눈을 돌렸다.
“가우스 라이플 P타입이라…. 생긴 거랑 다르게 돈이 많구만? 돔에서 과도기 장비를 풀었다고는 해도 이렇게 비허가 거래에, 심지어 화기 소지가 금지된 암시장에서 이 정도 물건을 소유하려면 몇백만 실링은 훌쩍 넘어갈 것 같은데….”
“이, 이건 래디쉬에게 넘어가는 물건이야!”
“호오. 래디쉬라….”
그 말에 이안이 남자의 팔을 슬쩍 풀어주자, 남자는 그의 협박이 먹혔다고 생각한 듯 기세가 오른 목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래! 암시장에 들락거리는 놈이라면 래디쉬가 얼마나 미친놈인지 모르진 않겠지! 아무리 이쪽이 흰 고래새끼의 영역이라도 래디쉬를 건드리면 다 죽는 거야!”
“저런. 세상에. 그럼, 래디쉬에게 가는 물건을 건드린 난 죽은 목숨이네?”
“헤, 헤헤! 그래! 래디쉬가 이번 물건을 얼마나 기대했는데! 울며 용서를 빌어도 늦었어! 내가 네놈의 얼굴을 다 기억해 놨거든! 네놈의 얼굴을….”
남자는 풀려난 팔을 추스르며, 기세가 등등해진 얼굴로 그를 핍박한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정육점의 빨간 불빛을 등진, 커다란 덩치에 대충 뒤로 넘긴 짧은 머리의 관짝만 한 건케이스를 짊어진….
“메탈….죠? BDSM의?”
“오. 이것저것 아는 게 많아 보이더니. 내 얼굴도 알고 있잖아? 이거 큰일 났는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잖아, 이거?”
덜덜덜, 덜덜덜덜!
이안은 다리가 풀려서 뒷걸음질 치는 남자의 머리를 잡고, 악당처럼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야. 뭐 좀 물어보자.”
“히이이익!”
남자는 코앞까지 바싹 다가온 이안의 얼굴 앞에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썰물처럼 물러난 사람들의 눈에, 덩치 큰 남자의 등에 새겨진 BDSM의 마크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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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이 암시장 안에는 까페도 있었다. 물론 차나 커피 따위를 파는 게 아니라 대마나 마약성 물질 따위를 즐기는 드러그 까페였지만, 꽤나 괜찮은 담배도 팔고 있었기 때문에 이안의 마음에도 드는 편이었다.
그의 손에 끌려온 남자, 아우커는 그 분위기만으로도 한결 안정된 느낌이었다. 물론 그건 이안이 당장 그를 시장 밖으로 끌고 갈 것이라는 그의 생각과 달리 술도 한잔 사주고, 그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꿈도 못 꿀 고급 시가까지 한 대 사준 덕분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돔에서 시켜서 여기 오신 게 아니라 거래를 하러 오신거라굽쇼?”
“그래, 임마. 여기 정리하러 왔으면 이렇게 혼자 왔겠냐? 우리 애들이랑 감찰부까지 줄줄 매달고 왔지. 괜찮은 무기 파는 거 있으면 좀 보려고 왔지. 우리 쪽에서 남는 무기도 좀 팔 겸.”
“하지만…. BDSM은 총장이랑 같이 일하는 놈들인데….”
“이런 무식한 새끼를 보았나! 어이, 너 그러면 그 래디쉬인가 뭔가 하는 놈이랑 일한다고 했는데, 그놈이 죽으라면 죽을 거냐?”
“어, 그건….”
“아니지? 결국 비즈니스 아냐, 비즈니스! 다방면에서 페이가 제일 괜찮아서 돔이랑 엮인 거지, 우리도 결국 바깥일 하는 사람들이란 말이지.”
“헤헤…. 하긴, BDSM정도 무력집단이 뭐가 아쉬워서 서류나 만지작거리는 총장놈에게 굽신거리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지금 살아남은 사람은 전부 BDSM, 박교수 그 인간한테 목숨을 빚진 거나 마찬가진데!”
“그렇지! 뭘 좀 아는 친구구만! 돔은 황무지에서 목숨값이 얼마나 비싼지 잘 모른다니까?”
“헤, 헤헤헤! 알다시피 원래 황무지에서 직접 부대끼면서 사는 스캐빈저나 음지 사람들이 그런 쪽에는 더 가깝지 않습니까? 뒷세계에서 BDSM이 가지는 이름값은 제법 무게가 있습니다. 그쪽에 대한 리스펙이 굉장합지요!”
“크흐흐흐! 마음에 드는구만! 한 잔 더 줄까?”
“하이고! 그러믄요! 공짜 술 마다하는 병신은 아닙지요!”
이안은 호탕하게 아우커라는 남자의 등을 두드리며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무기 거래상이 있으면 이쪽을 관리하는 조직은 전부 제대로 무장했다고 봐야겠지. 일단 확인된 조직은 둘. 래디쉬와 모비딕. 이곳은 모비딕의 영역이라고 했으니, 지금 밖에서 이놈과 나를 따라 들어온 놈들은 그쪽 조직원이라 봐도 좋겠군.’
박교수는 어떻게 했더라? 그놈은 여기서 대충 몇 개 주워들으면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끙끙거리다가, 갑자기 이거다! 하면서 움직이곤 했는데.
그런 재주가 없는 그로서는 아무나 한 놈 붙잡고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 것은 이곳이 한 조직의 관리하에 통일된 것이 아니라 최소 두 개 이상의 세력권으로 분할되어 있으며, 눈앞에 있는 놈이 지금 그가 있는 골목의 세력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
슬쩍 물었을 때 그 래디쉬라는 놈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꺼리지만, 반대로 상대편인 모비딕에 대한 얘기는 술술 털어놓고 있었다.
“화기 암거래는 그렇다 치고. 변종 부산물을 이용한 의수? 그건 뭐냐?”
“제가 그 고래잡이 새끼들 하는 일을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만은, 솜씨 하나는 기가 막히다고 합디다. 알다시피 황무지에 팔, 다리 병신이 좀 많은 게 아니잖수? 깔끔하게 관통당하면 몰라도 총알 박히면 수술로 빼내야 하는데 그런 거 할 줄 아는 놈이 그리 많지 않으니. 재수없으면 그대로 썩어들어가서 잘라내는 거지. 그놈들은 그런 사람들 상대로 장사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거야 그렇다 치고. 부산물은 그거랑 뭔 상관이냐?”
“제대로 된 의수라는 게 보통 복잡한 물건이 아니잖수. 그런 섬세한 부품 만들 기술도, 공장도 없으니 의수래봐야 나무나 플라스틱 덩어리에 남은 부분 연결한 게 고작이지. 그런데 이놈들은 거기에 뭐, 변종 이것저것을 붙여서 좀 더 잘 움직이게 했다나 뭐라나. 그것도 나름 사람 몸에서 태어난 것들이라 그런지, 쇳덩어리 박아넣는 것보다는 염증도 좀 덜하다고 하고. 뭣보다 그쪽, BDSM의 그 잘나신 박교수씨가 워낙 강한 인상을 남겨준 바람에 인간의 몸에 달린 변종 신체에 로망을 가진 놈들이 한둘이 아니게 됐지 뭡니까? 그래서 생각보다 장사가 제법 되는 편이랍디다. 어떻게 연줄이 닿았는지 과도기 장비도 제법 가지고 있고. 그래서 무기랑 그런 이상한 것들로 돈을 갈퀴로 긁어모은다던데.”
이안이 꼬치꼬치 캐묻자 아우커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했지만, 이내 그의 번쩍거리는 턱을 보자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뭐, 출처까지는 우리도 모르고. 그냥 그런 장사하는 놈들이라는 겁니다. 위치는 말한 대로 저어-쪽, 밀가루 파는 놈이랑 인간 대출해주는 집 사이 골목이고. 진짜 거래는 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지. 흠흠. 술값은 여기까지요. 더 말하면 우리 뒤에서 술 마시는 놈이 내 머리에 잔을 집어 던지겠구먼.”
아우커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변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남자들을 가리켰다. 너저분한 망토를 뒤집어쓰고 각자 술을 홀짝이고 있는 놈들. 이안도 주시하고 있는 놈들이었다. 얇은 망토 안쪽이 불룩한 게, 딱 봐도 그 모비딕이라는 조직의 놈들이었으니까. 아마 밖에서 소란을 듣고 쫓아온 것이겠지.
이안은 잠시 생각하다, 일어나는 아우커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바쁜 길 붙잡아서 미안했다. 그 래디쉬라는 놈한테도 안부 전하고.”
“BDSM의 메탈죠가 술 한잔 산다는데 바쁘다고 지나가면 그게 진짜 병신 아니겠수. 10분짜리 이야기치고는 값도 잘 받았고. 혹시 다음에 또 보게 되면 이쁘게 좀 봐주슈. 무섭게 왁왁거리지 말고.”
아우커는 그렇게 말하며 포대기로 감싼 최신화기를 들고 서둘러 사라졌다.
이안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악수하는 척 아우커가 그의 손바닥에 넘긴 작은 종잇조각을 훑어본 다음 담뱃불에 태워 날려버렸다.
———
이건 술값 말고 목숨값이외다.
모비딕은 렙터 출신이요. 제 발로 나온 건지, 그쪽에서 심은 건지는 모르지만, 그 휠체어 탄 새끼를 렙터 쪽에서 봤다는 스캐빈저가 한둘이 아니지. 전설적인 HIV의 메탈죠라도 그놈들 소굴에 혼자 들어갔다간 벌집이 돼서 뒈질 거요.
아, 그리고 나 그 순무 새끼들이랑 일 안 해. 더러운 일, 숨기고 싶은 배송, 기타 용역 및 잡일하는 투스닙 딜리버리라고 있소. 피자집에서 두 블록 아래로 내려가면 나오는 폐건물 지하 당구장에 있지. 혹시 일 있으면 찾아오슈. 싸게는 안 해줄 거요. 이제 서로 빚은 없으니까.
———
“뒷세계 운송업체라…. 세 개 구역이 돔 자치구로 통합돼서 그런가, 뒷골목 업무도 세분화된 모양이군. 조직도 다양해지고.”
들고 있는 게 딱 봐도 보통물건이 아니라 한번 털어봤는데, 확실히 보통 녀석은 아니었다. 아마 이 집단, 저 집단 용역 다니고 허드렛일 하면서 둘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놈들이겠지. 저런 놈들은 현장의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어서 정보 신뢰도가 제법 높은 편이다. 덕분에 좋은 정보를 무더기로 얻었다.
렙터의 끄나풀일 가능성이 있는 조직, 모비딕과 대립조직인 래디쉬에 대한 정보. 그리고, BDSM, 정확히는 박교수의 이름이 생각보다 황무지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는 것.
이안은 그에게 쏟아지는 주변의 시선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소. 얼마요?”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이안에게, 담배를 말고 있던 마스터는 가격표 대신 손바닥만 한 철제 케이스를 내밀었다.
“돈은 필요 없고, 그거나 가져가시오. 제법 괜찮은 것으로 채워놨으니. 담배를 즐겨 피운다지.”
“….댁도 그거요? 목숨값?”
“다 늙어서 남은 것도 없는 목숨값치고는 쿠바산 시가가 아깝지. 3개월 전, 당신들이 전차 뒤에 매달고 온 3형 변종.”
“3개월 전이면….. 아, 그 허리 졸라게 긴 얼룩 고양이?”
“그래. 그놈이 내 처와 딸을 씹어먹었지. 덕분에 가족들 무덤 앞에서 면은 서게 됐으니, 그거라도 가져가시오.”
그 말에 이안은 케이스를 열어 봤다.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로 독특하고 그윽한 향이 담긴, 뚱뚱한 시가가 여섯 대나 들어있었다.
화색이 된 이안이 대번에 하나를 꺼내 들자, 늙은 마스터는 커터로 끝을 잘라내고 불을 붙여주었다.
“문자 그대로 죽이는 물건이군. 잘 쓰겠수다.”
“술과 시간만으로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괴롭거든 종종 들르시게.”
“흐흐. 그럼 매일 와야겠군.”
“….자네도 고생이군.”
마스터는 고개를 저으며 등을 돌리는 것으로 축객령을 대신했고, 볼일 다 봤던 이안도 별말 없이 그대로 드러그 까페를 나왔다.
목이 아플 만큼 독한 시가를 피워서 그런가. 칙칙한 암시장의 공기가 제법 친숙해진 기분이 들었다.
이안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그의 자켓을 보고 화들짝 놀라거나 슬쩍 모자를 들어 보이는 사람들을 지나 아우커가 말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의수라…. 그러고 보니 렙터 놈들은 그 시한부 사이보그 병을 많이 운용하고 있었지. 대체 신체의 연구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는 것 아냐? 놈들이 변종 부산물이라고 거부감을 가질 만큼 새침한 놈들도 아니고.’
좁은 골목은 안에서 꺾이더니, 내리막으로 변했다. 곡괭이로 거칠게 깎아내린 내리막에서, 다시 시멘트와 페인트가 칠해진 지하 건물로. 낡은 주차 차단기와 한쪽 구석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B3라는 페인트 자국이 원래 이곳이 어떤 건물이었는지를 얘기하고 있었다.
‘제우스에 녹아내리기 전에 이곳에 지하 주차장 같은 게 있었던 모양이군. 위쪽이 녹아서 천장이 되고, 암시장 놈들이 그걸 파내서 소굴로 쓰고 있는 모양인데.’
좀 더 앞으로 나아가니 복잡한 기계식 전투망치를 든 떡대와 기관총을 든 여자가 보였다. 무기를 들고 있는 자세만 봐도 한가락 하는 게 분명한 두 남녀의 모습에, 이안의 몸에도 힘이 바짝 들어갔다. 여기서부터는 적진이라고 몸이 말하고 있었다.
여자 쪽은 두 다리. 남자 쪽은 오른팔과 눈.
전에 봤던 렙터의 사이보그와 매우 비슷한 형태의 기계 외장을 달고 있었다.
“BDSM의 메탈죠라. 아득바득 살다 보니 별걸 다 보는군. 불 뿜는 개구리에, 내장을 다 갈아치운 렙터 새끼에, 이제는 황무지 전역에 소문이 자자한 특공대장님까지.”
“왜. 신기하냐? 사인해줄까?”
“오! 좋지. 메탈죠가 마지막 유언으로 남긴 이름 석 자라. 비싸게 팔리겠군.”
“헛소리는 그쯤 해둬 마흐메르. 그래서, 우리 같은 선량한 시민을 위해 밖에서 피 터지게 싸우실 BDSM의 수장님이 암시장에는 무슨 일이실까.”
가벼운 분위기와는 달리 까딱하면 바로 달려들 듯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안은 두 사람과의 거리를 살피며 넉살 좋게 답했다.
“놀러 왔다가 눈에 띄어서 들어왔다고 하면 믿을 거냐?”
“파하하하! 리자, 헛소리는 나보다 이쪽이 한 수 위인데?”
남자 쪽은 웃으면서 전투망치의 레버를 쥐었고, 여자는 기관총의 방아쇠로 손가락을 옮겼다. 이안도 순간적인 움직임을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건케이스로 기관총은 막고, 그대로 샷건 뽑아서 떡대부터 갈긴다. 좁은 통로에서 로켓 해머 같은 걸 휘둘렀다간 다 깔려 죽을 거야.’
아마 그걸 염두에 두고 세워둔 보초겠지. 범죄조직치고는 치밀한 대비에 목숨을 도외시한 충성심까지.
렙터 세력권에 대한 이안의 의심이 확신으로 변해가고, 일촉즉발의 공기가 세 남녀 사이에 흐르는 그때.
“그만들 해라. 뭔 망할 밥만 처맥이면 싸움질이나 처하고 앉아있으니. 시간만 되면 질질 끌려오게 천장에 전자석이라도 달아 놔야지, 망할.”
골목 안쪽에서 끼릭 끼릭- 하는 소리와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안과 대치 중이던 두 남녀가 화들짝 놀라며 골목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안에서 성나고 당황한 목소리로 ‘어르신’이라는 노인과 두 남녀가 다투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안은 등을 보인 남녀를 공격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들이 사라진 골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수와 벡스, 이안.
셋 다 한 번도 얘기는 안 했지만, 속으로는 다 한 번쯤 생각했던 것.
렙터에게 점령당한 43구역과, 그곳에 두고 온 지인.
익숙한 목소리에 이안은 저도 모르게 무방비한 상태로 적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 그 골목으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BDSM이 렙터라면 이를 가는 거 아시잖아요! 메탈죠라는 사람이 얼마나 흉폭한지 아세요!”
“고막 터지겠다, 이년아. 내가 이래서 옛날에 사람 안 쓰고 터렛만 주구장창 썼었는데.”
“그럼 저희 말고 말 잘 듣는 터렛이나 쓰시던가요!”
“싫어. 그러다 개털렸거든.”
이안의 머릿속에서, 말도 안 되는 가정이 하나씩 착착 맞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꼬장꼬장하고 고집이 그득한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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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그 고래잡이 새끼들-’
‘팔다리 병신들 상대로 장사를-’
‘솜씨가 대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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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커의 말에 따르면, 의수나 의족을 다루는 솜씨가 대단한 의사가 있는 집단.
이안도 그런 사람을 하나 알고 있었다. 하관이 통째로 날아간 그의 얼굴을 지금의 형태로 만들어준,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던 늙은이.
떨리는 마음으로 골목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눈부신 네온 녹십자가 그의 얼굴을 비췄다.
“홀리 퍼킹 지져스….”
[moby-DICK] [우진비뇨기과] [2호점]“맙소사…. 세상에 이런 빌어 처먹을 기적이! 고래잡이! 비뇨기과!”
이안이 골목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기다렸다는 듯 곳곳에서 나타난 총구가 그를 겨눴지만, 이안은 그딴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앞으로 걸어나갔다.
“영감…. 씨발, 진짜 영감이오?”
이안은 그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선글라스를 벗어 던졌다.
휠체어에 탄 노인. 얼굴에는 고집이 가득하고, 주름진 피부에도 단단한 인상과 탄력 있는 팔이 젊었을 적 깨나 한가락 했을 것처럼 보이는 노인.
실종이 곧 사망인 황무지에서, 6개월 가까이 소식이 없는 노인의 죽음은 곧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렙터가 43구역을 점령할 때 그의 병원과 운명을 함께했으리라 여겼던,
우진 영감.
“간만이다, 턱주가리.”
“살아 있었수?”
“아무리 생각해도 네놈이 내 제삿밥을 차려줄 것 같지는 않아서, 구차하게 조금 더 살아남았지.”
“이런….씨부럴!”
이안의 가슴속에 반가움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지만, 그럼에도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욕설이었다.
10년은 더 늙어 보이는 우진 영감의 두 다리가 있어야 할 곳이, 텅 비어있었다.
“영감…. 그 새끼들이 도대체…. 무슨 짓을….”
“늘 하던 짓이지 뭐. 들어 와라. 오랜만에 정비도 좀 해주고. 겸사겸사 해줄 이야기도 있으니.”
끼릭- 끼릭-
이안은 그렇게 휑하니 안으로 들어가버린 우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남자의 턱에 반사적으로 주먹을 날릴 때까지, 한참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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