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48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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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꿀꿀~ 킁킁! 꿔이익!”
이슬이 가득한 숲속의 아침. 그 고요함 사이로 멧돼지 가족이 촉촉한 흙을 뒤지고 있었다. 아침의 숲은 밤새 허기진 배와 갈증을 동시에 채울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새끼들은 어미의 주변을 돌며 신나게 먹이를 찾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분주히 덩이뿌리를 파헤치던 어미는, 별안간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머리를 들었다.
“킁? 끅끅끅끅. 꿔익? 꿔이익?”
코를 치켜들고 날카롭게 주변을 살폈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동물로서의 본능이, 어미의 직감이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분명 보이는 것은 없지만 뭔가 다가오고 있다고.
피유우우우-
“꾸엑! 꿔이이익! 꽤액!”
“뀍뀍? 뀌익?”“끄엑? 꾸익꾸익!”
점점 가까워져 가는 기묘한 소리에 어미는 엄니를 휘두르며 사방을 경계했고, 그 모습에 겁에 질린 새끼들은 뿔뿔이 흩어져 수풀 사이로 숨어들었다.
딱 하나만 빼고.
촉촉한 흙 사이에서 지렁이 한 마리를 찾은 새끼 멧돼지가, 그 머리 위에 드리우는 그림자도 모른 채 신나게 흙을 뒤지고 있었다.
커다란 날짐승이다. 빠른 속도로 새끼를 향해 달려드는, 크고 네모난 몸에 이상한 날개가 달린 짐승. 날카로운 발톱이 새끼의 목덜미를 채어가겠지.
“꽤에에엑! 꽤에에에엑!”
순간, 어미의 모성이 짐승의 생존본능을 눌렀다. 소리를 지르며 달려든 어미의 커다란 코가 새끼의 옆구리를 밀치고, 난데없이 떠밀린 새끼가 이해할 수 없는 어미의 슬픈 눈과 마주한 순간.
쿠우우웅!
작은 짐승 가족의 비극 위로 편지투성이 기구가 내려앉았다.
줄무늬가 선명한 새끼들이 이게 무슨 일인지, 어미가 어디로 갔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물에 푹 젖은 편지들을 뚫고 커다란 체구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푸하!”
교수는 최소한 그들이 도시 한가운데나 민가에 떨어진 것이 아님을 안심하며 주변을 살폈다.
일단, 제법 깊은 숲 속이다. 사람의 흔적은커녕 오솔길도 보이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숲. 수종이 침엽수가 대부분인 것으로 보아 제국 남부에서 거의 북부 근처까지는 올라온 모양. 아쉽게도 엘프 숲은 좀 더 가야 할 것으로 보였다.
오트만이 만들어낸 물 위에 떨어지는 바람에 온 사방이 홍수라도 난 것처럼 젖어있었고, 그 가운데 익숙한 털 뭉치를 발견한 교수는 한 팔로 그것을 쑥 뽑아 들었다.
“어후, 울렁거려. 어이, 보르카! 살아있어?”
“꺼어어, 끄으으으…. 달리아, 여보…. 고향의 숲이 보이오…. 아이들을, 아이들이 아직 살아있어….투샨, 마르카….”
“음. 건강하군. 마누라 따라가지 말고 잠깐만 여기 있어 봐. 노툼은…. 아, 여기 있구먼. 좀 괜찮냐?”
“그우우우…. 트롤은 날지 않는다. 비행 트롤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구웨에엑-”
“이쪽도 썩 괜찮아 보이고. 오트만이랑 알드리치야 뭐. 마지막에 2중, 3중으로 실드 펴는 거 봤으니까 살아있겠지. 어이, 이드라실. 내려와!”
일행이 대부분 무사함을 확인한 교수는 그의 허리와 목에 매미처럼 바싹 달라붙어 있던 이드라실을 떼어냈다.
“죄송합니다. 근처에서 가장 신축성 있고 충격에 강한 소재가 당신일 것으로 사료되어.”
“가끔 생각하는데, 너 그거 좀 징그러운 것 같다 야.”
“종의 차이에서 불쾌감을 느끼는 경우는 흔하다고 합니다. 이해할 수 있으니 괜찮습니다.”
“에라이. 엘프를 설득하느니 참고 말지. 어이, 전설! 루실라! 일어나. 우리 살았어!”
루실라는 찾을 필요 없었다. 일행 중 제일 약한 애라 떨어질 때 내가 안고 있었거든.
“콜록, 콜록! 으…. 에? 우에….?”
“살았다고. 정신 차리고 여기가 어디쯤인지 좀 알려줘. 제국 지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으니까. 아, 이드라실은 바람 정령들 도망가기 전에 정령이 담긴 풍선 좀 회수해주고.”
“예.”
어쨌든 일행은 다 무사했다. 기구도 중간에 추락하긴 했지만, 일주일이나 타고 왔으니 이 정도면 뽕을 뽑았다고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엘프 숲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나 마찬가지인 정령들이 아직 가죽 풍선에 머무르고 있으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껍데기 너는 어째 뭐만 하면 중간에 꼭 사고가 나더라. 진짜 진지하게 신벌이나 뭐, 그런 쪽을 고려해봐야 하는 거 아냐?]‘신벌이라…. 어쩌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아무리 이론적으로 가능한 일이라고는 쳐도, 제국 전역에서 날아온 편지에 격추당하다니. 이건 아무리 판타지 세계관이라 쳐도 상식 밖의 일이잖아? 개인적으로는, 시스템의 개입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띠링-!
[외부에서 온 당신의 운명에 세계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불운 Lv.15가 부여됩니다! / 불운 Lv.15 종료 후 행운 Lv.7이 24시간 부여됩니다!]뭐, 상태창이 살아있었으면 아마 이런 메시지가 뜨지 않았을까? 불운 Lv.15 정도면 무슨 일을 하고 있든 망하는 수준이다. 랭커 중에서는 이 메시지를 본 사람이 없고, 커뮤니티에 알려진 사람은 딱 하나.
로만 가치아 맨슨, 로망 가챠맨에게 발명 ‘당했던’ 사람. [걸작! – 전자기 가속 마력탄환 발사장치 : 레일-건]을 뽑았던 그 플레이어의 영상에서 저 메시지가 나왔었다.
‘그 양반 손 위에서 레일건이 터져서 즉사했지?’
[효과 확실하구먼.]‘뭐, 그렇지. 우리 기구가 추락한 것도 아마 그런 시스템의 일환일 거야.’
솔직히 조금 지랄 맞은 시스템인 것은 사실이다. 적은 무한대로 강해지며 세계를 자기 마음대로 가꿀 수 있지만, 플레이어는 저들의 수준에 맞춰 나아가야 한다니. 이게 편애가 아니면 뭐야. 억지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지.
하지만.
내가 천류제급으로 막 네임드 뮤트나 원시고대 히어로 유닛을 썰고 다닐 만큼 강한 것도 아니고, 서부 전선이 아예 뮤트를 찍어누르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시스템이 닥터스톱을 외쳤다? 이게 의미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전지전능한 GG의 시스템께서 내가 보지 못하는 세계의 어떤 사건을 보고, 인간과 뮤트 사이의 저울추가 지나치게 인간 쪽으로 기울었다고 판단한 것.
그렇게 생각했을 때, 지금 상황에서 제일 가능성이 높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바즈유르 그놈, 숨넘어가기 직전에 튀더니 결국 죽었군.’
거의 90% 가까이 확신하는 중이다. 여왕의 직계, 월드가 끝날 때까지 딱 12명만 등장하는 네임드 뮤트 중 하나가 이 시점에서 죽었다면 말이 되지. 특히나 바즈유르 같은 경우,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마법사들의 집중 폭격을 혼자 막아낼 만큼 양적인 마법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네임드. 놈이 소유한 마법사의 시체, 스톡만 털어냈어도 마법전이 배는 쉽게 풀리는 3월드에서 놈을 격살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놈들이 전쟁의 방향을 지루한 소모전으로 이끌더라도 인간 쪽에서 꿀릴 게 없어졌다는 뜻이야.’
지금이야 아직 제국이 관망하는 중이고, 사막 국가나 엘프, 기타 여러 세력이 참전하지 않아서 그렇지.
진짜 최종국면이 다가와 마탑에 틀어박혀 있던 마법사들이 전부 튀어나오면 그중 절반만 로테이션으로 돌려도 6급 이하 싸구려 양산 뮤트들은 융단폭격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며, 그 말은 마법사만 지키면 놈들의 물량 공세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여왕이 악신의 위를 얻으며 가장 위험했던 것도 그 부분이지. 신성력으로 뮤트를 무한정 양산할 수 있게 된 여왕인 만큼 시체로 산을 쌓아 성벽을 넘어도 될 정도로 저급 뮤트를 마구 뽑아냈을 테니까. 전쟁은 국력을 태워 그 열기를 유지하는 일이거든? 저쪽에서 아예 거북이처럼 틀어박혀서 고기 파도에 가깝게 양산형만 죽어라 밀어붙이면 결국 경작지를 모두 잃어버린 로드릭은 말라 죽고, 차례로 무너지며 패배했을 거야. 하지만 마법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해진 이상 마법사들의 마나만 써서 그런 물량 공세를 막아내는 게 가능해졌지.’
역시 듀얼코어라서 그런가? 눈앞의 현상으로 사실을 유추하는 게 몇 배는 더 편해진 것 같았다. 혼자 생각하는 것과 둘이 논의하는 것은 효율이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특히나 기반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 덕분에 크게 설명할 것도 없이 대충 생각하면 저쪽에서 슥 훑고 알아채기도 하고.
내 설명에 잠시 기억을 뒤져보던 하이드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더니(얼굴은 안 보였지만 대충 그런 것 같았다.) 말을 이었다.
[듣고 보니 그렇긴 하다만….. 내가 넘어온 지 얼마 안 돼서 기억을 다 못 뒤져봤는데 말이지. 지금 이 월드가 얼마나 진행된 상태야?]‘불확실한 요소가 너무 많아서 제대로 된 월드 정화율까지는 모르겠고. 시간 정도는 유추 가능하지. 바즈유르를 넷째라고, 막내라고 불렀거든? 그럼 차례로 나오는 네임드 열두 명 중 넷이 나온 시점이니까. 멸망 카운트 다운이 1/3 정도 진행됐다고 볼 수 있겠지.’
3할 정도 진행된 상태에서 조~금 더 진행되지 않았나 싶다. 원래 후반부 생산속도가 초창기보다 배는 빠르니까. 넉넉하게 따져도 월드 타이머가 절반 정도 진행됐다고 봐야겠지.
[그래? 그럼 시스템 브레이크까지 걸릴 정도는 아닌 거 아냐? 열두 마리 중 하나 죽었다고 저렇게 난리라고? 그 정도로 뮤트가 허접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여왕도 건재하고. 무엇보다 팔카투스 그놈이 있잖아? 네가 떠올릴 수 있는 정도면 그놈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겠지. 당연히 대응할 방법을 마련할 거고. 정치, 경제, 종교적으로 놈이 파고든 부분도 무시할 수 없고. 그렇게까지 파워 밸런스가 무너졌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은데.]‘그 부분은 나도 생각해봤어. 일단 바즈유르가 한 축을 차지한 것은 확실해.’
[그럼 다른 축은?]하이드의 질문에 교수는 작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과거 토브룬의 마탑에서 훔친 아공간 주머니. 그간 전투로 여기저기 상해서 기능이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작은 물건 여러 개 정도는 충분히 들어갔다.
교수가 그 안에서 꺼낸 것은 검붉은 실선이 거미줄처럼 파고든 에데오르나의 잘린 팔이었다.
‘이거.’
[그게 무슨…. 아, 그년 팔 잘렸구나? 마법사들이 줬던 선물이지? 그게 왜?]‘그게, 이건 내 추측인데….’
교수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생각한 사실을 하이드에게 전하려는 찰나.
“으아아악! 보르카! 노툼! 잡아줘요! 내 짐! 내 교역품! 우리 짐 다 날아간다!!”
정신을 차린 일행들이 추락한 기구에서 화물을 빼내기 위해 젖은 편지들을 밖으로 퍼냈고, 반파됐지만 아직 바람주머니가 몇 개 살아있는 덕분에 기구의 바구니 안에 들어가 있던 루실라를 끌고 이리저리 비틀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단, 정리부터 하고 마저 설명해줄게. 일행들도 다 알아야 하는 사실이니까.’
[그럼 넌 주변 치우고 있어. 저쪽은 내가 할게.]‘응? 니가?’
교수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그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갈고리가 달린 검은 팔 두 개가 쑥 튀어나와 기구 뒤에 딸려가던 밧줄을 붙잡았다.
“뭔….?!”
[헤헤헤. 이보쇼 선생, 내가 밖에서 몇 달 동안 댁의 몸을 얼마나 보살핀 줄 아십니까? 껍데기 네 녀석의 피 한 방울, 세포 한 조각까지 하나하나 내 담당 아래 있었단 말이야. 이제 인간의 몸에 대한 이해는 마스터했다는 말이지. 거기에 추가로, 네가 이쪽 몸의 감염인자를 완전히 정복했으니 뮤트의 힘을 사용하는 것에 제한이 없어졌으며, 마지막으로…. 심리적 거리감이 없어졌네. 솔직히 이제 내가 네 몸을 막 움직인다고 해서 불편하거나 그런 거 없지?]“그야, 그렇지.”
[그러니까. 마구잡이로 쑥쑥 늘어나는 재생형 몸에 완벽하게 분리된 동시에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컨트롤 타워가 둘. 아마 완벽하게 분리하는 것만 빼고는 다 될걸?]그 말과 함께 어깨 부근의 검은 피부가 쭈욱 늘어나더니, 전에 의식공간에서 봤던 현실의 내 얼굴, 늑대를 닮은 길쭉하고 송곳니가 가득한 입에 쭉 찢어진 눈을 가진 얼굴이 나타나 내게 윙크했다. 상상도, 의식공간도 아닌 현실에, 하이드가 현실의 얼굴을 가지고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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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내 짧은 감상에 답하듯 일행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반응을 보여주었다.
도와달라고 소리치며 내 쪽을 돌아보던 보르카와 노툼이 충격에 기구의 밧줄을 놔버렸으며,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상자를 품에 안고 기구 모서리에 매달려있던 루실라가 상자를 놓치며 은화가 폭포수처럼 쏟아졌고,
진정제에 취해 실실 웃고 있던 두 마법사는 허허 웃으며 다시 정신을 놓아버렸으며,
쿵!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엘프가 애지중지하는 수첩과 함께 미끄러져 떨어졌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낙법조차 펼치지 못한 엘프는, 화등잔만 하게 커진 눈으로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그, 그건…. 음, 아, 충격적인…. 제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능력입…. 이로군요. 기, 기록을 위해 도움을 조금….. 주시겠습니까? 배워보려고 노력은 하겠으나…. 그런, 음, ‘그런’ 것은 아직 70년밖에 살지 못한 제 식견으로는….”
“이, 일단 숨이나 좀 쉬어볼래, 이드라실? 다 설명해 줄 테니까. 전부 다-”
『하이드. 난 하이드야. 만나.서 반가워. 엘프.』
이어지는 거친 목소리에, 결국 이드라실의 다리가 풀려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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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 타다닥-
지글지글지글-
교수는 열심히 움직였다. 넋이 나간 루실라를 태우고 비실비실 날아가던 기구를 나무에 묶었고, 현실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진정제를 한 병씩 더 꺼내 들던 마법사들의 뺨을 후려쳤으며, 모닥불을 피워 넋이 나간 트롤과 늑대인간, 엘프를 포함해 모든 일행이 옷을 말리고 따듯하게 있을 수 있도록 했다.
교수가 솜씨를 발휘한 멧돼지 통구이가 모닥불 위에 걸릴 때까지, 일행은 교수가 시키는 대로 멍하니 움직이며 교수의 어깨 위에서 끊임없이 종알거리는 무시무시한 머리통을 응시하고 있었다.
『멧.돼지는 어디서.났지?』
“그냥 땅에 떨어져 있던데? 막 죽었는지 신선하더라고. 아침도 먹다 만 데다 그 난리를 피웠으니 다들 배가 고플 것 같아서. 밥 얘기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식사할 동안은 들어가 있으면 안 되겠냐? 나 빼고 전부 체할 것 같은데?”
『왜? 이미 다들. 봤는데. 봐봐. 다들 얌전해.졌잖아. 적응한.거라고.』
“저건 적응이 아니라 의식이 그로기 상태가 된 거 아냐. 충격도 순차적으로 받아야 적응하지, 그렇게 쌩으로 들이받으면 교통사고밖에 더 되냐.”
『히.히.히. 괜찮아. 다들 강한. 사람들. 이니까.』
교수는 옆에서 이를 악물고 목탄을 부여잡은 이드라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이드에게 익숙한 그가 듣기에도, 하드메탈 가수처럼 성대를 긁어내는 낮고 거친 목소리는 사람들의 공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어쩔.수. 없어. 네 저쪽 몸에 너무 익숙해.졌는데. 그건 인.간의 언어를. 발음하기.에 적합한. 구강구조가 아니. 었거든.』
[흠흠. 너도 나가면 이해하게 될 거야. 그 몸은 지금 이 몸처럼 막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이쪽이 말랑하고 유연한 느낌이라면, 현실 쪽은 단단하고 반들반들한 느낌이지.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둘 다 쓸만한 것 같아. 이것도 괜찮지 않아? 이런 얼굴로 가느다란 미성이었어봐. 그거야말로 불쾌한 골짜기 아냐.]‘그래. 다 알아들었으니까, 루실라 까무러치기 전에 나랑만 얘기하자.’
[누군가의 입을 다물게 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지. 설득하거나, 입에 뭔가를 쑤셔 넣거나. 음~ 가열한 단백질이라. 냄새가 참 좋은걸.]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려 송곳니를 드러내는 하이드의 모습에, 결국 교수는 반쯤 익은 멧돼지 뒷다리를 물려주었다. 게걸스럽게 뼈와 고기를 씹는 소리와 함께 내 배가 묵직해지는 기분은…. 으으음. 온갖 기행에 익숙한 나라도 참기 힘든 묘한 기분이로군.
교수는 익숙한 일행의 어색한 시선을 느끼며, 하이드가 언제부터 함께했고 어떻게 이렇게 활동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설명했다. 물론 현실 쪽 이야기는 NPC들이 인식할 수 없으므로 어느 정도 각색이 들어가긴 했지만.
우적우적! 와작! 우두둑!
“그래서…. 이런 꼴이 된 거지. 뮤트의 몸을 하고도 인간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것도, 그런 괴력에 재생력을 가지게 된 것도 어찌 보면 다 이 녀석 덕분이기도 하고. 생긴 게 이래서 그렇지, 괜찮은 녀석이야. 재미있기도 하고. 성격도 괜찮고.”
[자화자찬이 심각하시군.]이드라실은 눈을 부릅뜨고 그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었다. 혹시 대모님은 여기까지 알고 그를 배우라고 한 것일까? 단 한 번도 어머님의 통찰력을 의심한 적 없던 이드라실이지만, 그녀는 대모가 여기까지는 알지 못했으리라고 확신했다.
“하이드라고…. 하셨지요.”
이드라실이 내가 아닌 하이드의 머리를 바라보며 물어보자, 하이드는 왼손으로 기름 묻은 주둥이를 슥 닦더니 뒷다리 하나를 더 뜯어 입에 넣으며 내 쪽을 가리켰다.
“어…. 나한테 물어봐도 될 거야. 어느 쪽에 물어보나 같은 대답을 해줄 수 있으니까.”
파바바박!
딱 한 문장 밖에 말 안 했지만 ‘인간 박교수 학습’이라는 사명감에 불타는 엘프는 순식간에 손바닥만 한 종이 한 장을 다 채우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제가 이해하기에는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영혼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만. 알드리치님? 전에도 한번 하이드….님을 봤다고 말씀하셨죠.”
“응? 아아, 그래. 사실 오래전부터 교수 저놈 안에 뭔가가 있다는 것은 느끼고 있어서 변경백 영지에서 도박하는 심정으로 도움을 받았지. 그때는 연기처럼 희미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차돌처럼 선명하게 느껴지는군. 확실히 있어. 하이드. 그래, 하이드라는 이름인가.”
알드리치는 충격이 가셨는지, 한층 호기심이 동한 얼굴을 하곤 이쪽으로 다가왔다.
“영혼이 나뉜 것은 아니군. 영혼은 자연적인 방법으로는 나누어지지 않는 기본 단위지. 보통 흑마법에서 영혼을 나누는 마법을 사용하곤 하는데, 이런 식으로 명확하게 구분이 될 만큼 찢어놓았으면 성격적 결함이나 정신장애 같은 내적 상처가 반드시 남게 되지. 하지만 너희 둘은…. 상처는커녕 둘이 하나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군. 확실히 갈라져 있으며, 또 확실히 얽혀있어. 놀라워. 영혼술사로서 이런 영혼을 마주하게 된 것도 영광이로군.”
『마법.사. 커밍아웃 한. 김에 하나 묻지. 영혼.이. 나뉜 게 아니라면. 나는 교수를 기반으.로. 태어났나?』
“으으음…. 글쎄.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나? 사실 이렇게 얽혀있으니 태어났다는 표현이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기억을 공유하는 면이나 두 영혼의 유사성을 보면, 교수 저놈의 영혼에 어떤 신비가 작용하여 하이드 자네가 만들어졌다고 보는 게 옳겠지. 적어도 내 식견으로는 그렇다네.”
[헤이, 유 파더. 들었지? 이제 전문가 오피셜이다.]‘니미.’
[그건 넌데요.]교수는 능글거리는 하이드의 목소리에 투덜거리며, 남은 멧돼지를 하이드가 다 먹어치우기 전에 익은 부분을 잘라 대충 나뭇가지에 꿰어 주었다. 그릇은 충격으로 다 깨져버리고 없었다.
“일단, 내 이야기는 이렇게 됐다는 겁니다. 또 질문 있는 사람? 이제는 진짜 숨기는 거 없이 빤쓰까지 다 털어놨으니까, 궁금한 거 있으면 뭐든 물어보라고.”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루실라가 손을 들었다.
“저요. 그…. 거기 튀어나온 그 친구? 그분 때문에 우리 여정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은?”
“글세…. 하이드. 어떻게 생각해? 있냐?”
『없을 것 같.은데. 아. 식비는 좀 늘어나겠.지. 껍데기는. 필요한 양에 비해. 너무 적게.먹어. 뮤트의 피가 가.장 효율이 좋긴 하지만. 밥으로 채울 수 있.는 부분은. 채워야지.』
“들었지? 그렇데.”
“식비라…. 매일 그렇게 먹어요?”
와작!
『매 끼.』
슬쩍 돋아난 팔로 내 손에 들고 있던 멧돼지 통구이-꼬치를 훔쳐간 하이드는 그것을 딱 하나만 빼고 입에 털어 넣으며 답했다.
기름 묻은 손으로 남은 하나를 내미는 하이드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쉰 루실라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럼 작은 문제는 아니지만, 큰 문제도 아니네요. 자기 먹을 건 알아서 끌고 다닐 만큼 힘이 좋으니까. 여정에는 문제없고, 파티원 간 관계에 아무 문제 없고, 성격도 썩 괜찮고. 그럼 아무 문제 없네요. 그렇죠?”
“어, 으음. 그렇구나. 하긴, 따지고 보면 알드리치도 비슷한 상태가 아닌가.”
“넬 말인가? 그 아이랑은 전혀 다르지만, 으음…. 관념적으로는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겠군.”
“난 저걸 보고 문제가 없다고 하는 우리 일행이 더 놀랍소만.”
“교수 저놈이랑 다니다 보니 좀 적응이 된 모양이야.”
“그 말이 맞겠네요. 폭풍의 언덕에서 바람마법사의 고향을 부수고, 잘린 팔에서 다시 태어나고, 성녀님의 영혼에…. 으으으으, 그거랑 비교하면 몸속에 다른 영혼 하나 키우는 정도야 뭐.”
“이해했소. 슬플 정도로 확실하게 이해가 되는군.”
‘어…. 음….’
확실히 너무 잘 받아들이는 일행의 모습에…. 좀 미안하긴 했다. 몇 달 생사고락을 함께하던 동료의 몸에서 전혀 다른 인격이 팔과 머리를 쑥쑥 뽑아내는데 ‘저놈이면 그럴 수 있지’ 라니. 나는 그들을 어떤 삶에 던져넣었단 말인가.
“어휴. 용사님이 그렇죠 뭐. 식사나 하시죠, 여러분.”
“으음. 그럴까. 아. 오트만 당신 밥은 내가 챙겼소. 아까 기구에서 불어터진 수초가 흘러나오길래.”
“오, 고맙네. 그나저나 말려뒀던 게 다 불었으면 전부 가져가긴 힘들 텐데… 이거 아쉽구먼.”
“거기, 발치에 숯 하나만 꺼내주십시오. 예, 그거. 쓰던 게 다 떨어져서.”
어느덧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돌아간 일행들.
비록 구름 위에서 추락하고 익숙한 일행의 몸에 새 머리가 돋아난 모습을 보긴 했지만-
어쨌든 서늘하고 상쾌한 공기가 가득한 숲은 평화로웠고, 한 차례 충격이 지나가서 그런지,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와 모닥불 타는 소리가 유난히 더 고즈넉하게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편지는 어떻게 하나? 이보게 교수. 혹시 필요한가?”
“마음은 넘쳐 터지게 받았으니 됐습니다. 화물 옮길 수레 만들 때까지 여기 머물 테니 땔감으로나 쓰시죠.”
“그렇다는군. 노툼, 모조리 던져넣게.”
“그웍. 알았다. 우우우…. 이건 아니. 빨간 전설의 발정녀. 이거 비싸 보인다. 너 좋아하는 거다.”
적어도, 노툼이 편지 사이에서 선물이라며 휘황찬란한 편지를 찾아내기 전까지는 그랬다.
“노툼!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이나….?”
작고 고급스러운 편지지. 다른 편지들과 달리 물에 젖지도 않았고, 비단 끈으로 감겨있었으며, 은은한 향기까지 나는게 확실히 비싸 보이긴 했지만.
루실라는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으아아…. 으아….”
풀썩.
머리 둘, 팔 넷 달린 용사의 앞에서도 굳건하던 루실라가 기절하는 소리였다.
노툼이 내민 편지에는 선명한 황제의 인장이 찍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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