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49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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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kealook : 튀어나왔어! 박교수 내면의 악이 마침내 세상에 나오고야 말았다!
– 흥안만두 : 박교수 저 인간은 죽으면 필히 머리를 부숴놔야겠다. 저 정도 자아 분열이면 100% 3형 변종 되겠는데? 아, 벌써 됐지?
– Jokass : 박교수가 둘이라니. 우린 이제 끝이야. 우리의 연약한 세상은 저 미치광이를 둘이나 담을 정도로 단단하지 않다고.
– 스피드 웨건 : 음….태어나서 연애를 딱 한 번 해봤는데. 남자가 둘이 됐네요.
– 노루Drug해요 : 다나 양, 남자 새끼들은 다 늑대란다? 말로는 간을 내어주네, 심장을 주겠네 해도 파보면 죄다 숨기는 게 있더라구. 나중에 홀리도 부르고, 레빗님도 불러서 여자끼리 술이나 한 잔 하자. 나도 이번에 피난 오면서 난민 구역에 살게 됐거든.
– Jokass : 또또. 순진한 사람한테 이상한 소리 한다. 다나씨, 세상 사람 말은 다 믿어도 저 인간 말은 믿지 마십쇼. 선악과를 매일 한 트럭씩 퍼먹어도 저 인간 말 한마디 듣는 것보다는 덜 타락할 겁니다.
– 노루Drug해요 : 어머나~ 남 말하고 있네. 청초하고 순진한 나를 꼬드겨서 집으로 들인 게 어디 사는 누구셨더라?
– 스피드 웨건 : 아.
– 흥안만두 : !!!!!
– 홀리 : 어머!
– 남바쓰리 : !!!!
– Jokass : 야, 그걸 여기서 말하면….!
– 노루Drug해요 : 왜, 우리 자기~ 부끄러워? 난민촌 살기 힘들다고, 위험하다고 대화방에 조금 징징거렸더니~ 개인 메시지로 정 힘들면 와서 신세 좀 져라~ 요즘 청소부 일하면서 변종 부산물 팔아 돈 좀 모았으니 너 하나 정도는 커버 가능하다~ 어—–찌나 가슴을 절절하게 울리던지~
– 홀리 : 그, 그래서요? 찾아갔어요?
– 노루Drug해요 : 응! 술 진탕 먹이고 내가 덮쳐버렸어! 우히히히. 그때부터 같이 살았지. 쟤 밥도 잘하고 청소도 잘해.
– Jokass : 씨발.
– takealook : 네놈의 희생에 경의를 표한다 조카스. 덕분에 세상이 큰 짐 하나를 덜었어.
– Jokass : 몰라 임마. 내가 어쩌자고 저 정신나간 여자를 도와주겠다고 했는지…. 시간 나면 난민촌 B-21 / 58번지로 와라. 술이라도 마셔야겠는데, 저 여자 앞에서 술 마시면 잡아먹힐까 봐 무서워.
– takealook : B? 진짜 제법 살잖아? 사주는 거면 감.
– 흥안만두 : 부럽다…. 나도 모여 살고싶다…. 누가 구조대 좀 보내줘요…. 40구역 산꼭대기에 사람 있어요…. 나도 합류하고 싶어….
– DOOMgay : 너, 무선 신호기 있으면 317채널 맞춰놔라. 40구역 근처 갈 일 있으면 한번 들렀다 갈게.
– 흥안만두 : 지, 진짜요? 진짜 약속한 겁니다! 그래 시바! 나도 인맥이 있었지! 내가 박교수 절친입니다 절친! 살려줘요! 제발! 일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탈출할 거야! 산사태 한 번이면 동네 변종이 죄다 들고 일어나서 벌집 들쑤신 것마냥 움직이겠지!
– DOOMgay : 염병을 한다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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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방이 활성화되고 가장 좋은 점이 이거다. 실시간으로 현실 쪽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 47구역 대화방의 조카스와 노루가 같이 살게 되었고, 미처 피난 오지 못해 고지대에 고립되어 있던 흥안만두는 운 좋게 이안의 눈에 들어 실낱같은 희망을 품게 되었고.
나름 경사라면 경사인 지라 트윈헤드 박교수, 이중인격 박교수 같은 문제는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잘됐군. 다나한테는 나중에 따로 얘기해야지.
뿌드득-!
멍때리며 바깥소식이나 보고 있던 사이, 어느새 잡고 있던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 위에서 ‘으아아아아-’ 같은 가느다란 비명이 들려왔다.
“이보게 교수! 천천히! 살살! 나무에 걸리지 않게 당겨! 끊어지면 큰일 난다니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네요!”
뿌드득!
섬세하게 힘을 조절하며 하늘을 향한 밧줄을 잡아당기자, 뭐라뭐라 하는 소녀의 목소리와 가죽 풍선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도로 올려달라는 소리였다.
“아직 제대로 확인 못 했어요! 조금만 더 높았으면 되는데!”
“더 높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얌마! 내가 이거 놓치면 너 그대로 저 너른 하늘에서 미아 되는 거야! 뭔 애가 겁도 없이!”
“제가 지금 그런 걸 겁내게 생겼어요! 황궁에서 진짜로 편지가 왔는데! 그것도 가문 앞으로 온 것도 아니고 저 개인한테! 잔말 말고 좀만 더 올려봐요!”
“어휴, 애가 아주 미쳐가지고….”
저 멀리, 하늘 높은 곳에서 마법 가죽 풍선에 매달려 꽥꽥거리는 루실라.
미치긴 미쳤는데, 맨정신으로 미쳤다.
30분 전. 선명하게 황제의 직인이 찍힌 편지를 받아든 루실라는 그대로 혼절해버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린 그녀는 완벽하게 통제된 히스테리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보여주었다.
‘짐은 일단 꺼내주기만 해요. 제가 정리할 테니까.’
‘용사님, 수레 만든다고 하셨죠? 근처 수종이 괜찮은 것 같으니까 바로 시작해주세요.’
‘드레스, 장신구, 구두, 지금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인근 도시에서 현금화하는 수밖에 없어. 제국 남서부에서 직선거리로 일주일. 일주일이라…. 지도! 지도 좀 찾아줘요! 빨리!’
‘어어어. 야, 야! 그거 풀면 기구 다 날아…. 루, 루실라! 너 밧줄! 밧줄에 엉켰어! 끌려간다!’
‘잡아줘요! 잠깐 높은 곳에서 보고 올 테니까!’
‘야, 야야야야!!!’
그렇게 해서 지금 저 녀석이 가죽 풍선 아래에 대롱대롱 매달려있게 된 것이다.
혹시나 줄이 끊어질까 조심스럽게 당기자, 바람에 머리가 산발이 된 루실라가 가죽 풍선과 함께 내려왔다. 오트만의 원견마법이 걸린 물방울로 대충 머리를 쓸어넘긴 루실라는 곧장 지도를 펼쳐 목탄으로 거칠게 선을 긋기 시작했다.
“일단, 생각보다 괜찮은 곳에 떨어졌어요. 일단, 제국 북서부인 것은 확실하구요. 블루 라인 산맥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니까 제국을 거의 횡단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지평선 끄트머리에 희미하게 보이던 첨탑이 오스만 페테르의 기념탑이라 가정하면…. 이쯤. 수도에서 그리 멀진 않아요.”
탁!
루실라의 손가락이 제국 지도의 북서쪽 도시를 가리켰다.
“우선 가장 가까운 도시는 여기. 하우누만으로 보이네요. 음…. 해가 뜨는 방향으로 나무가 줄어드는 게 보였으니까….”
“얼마 안 가서 길이 나오겠군. 그런데, 거기 가서 뭐 하려고?”
“….뭐긴요. 전투준비지. 귀족가 여식으로서, 상인으로서 인생 최대의 기회를 맞이하기 위한 전투준비요!”
루실라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 뒤에 정리된 짐들 중, 예의 그 빨간색 드레스를 꺼내 들었다. 레이스는 떨어지고, 비단은 물에 젖은 상태로 잡아당겨 져 너덜거렸으며 얼룩이 잔뜩 묻어 못 쓸 물건이 되어버린 그 드레스를.
“물론 이것처럼 가문에서 구해준 최고급 드레스를 바로 구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이건 입고 가는 순간 황족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못쓰게 됐으니까. 다행히 하우누만은 제국에 편입된 속국의 영지로 이국적이고 특색있는 옷감이나 장신구가 많아요.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면피할 정도는 준비할 수 있을 거예요.”
어지럽게 경로가 표시된 지도를 접어 넣은 루실라는, 간절한 눈빛으로 하나하나 일행에게 눈을 맞추며 얘기했다.
“알아요, 무슨 얘기가 나올지. 용사님 일행은 정말 중요한, 세상의 운명을 바꿀지도 모를 임무를 맡고 있고, 이렇게 돌아갈 시간도 없다는 것. 제가 블루라인 산맥에서 용사님 일행을 만나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게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라는 것. 잘 알고 있어요.”
“루실라. 얘야. 그건….”
“오트만님. 잠시만.”
루실라는 오트만의 말을 가로막은 뒤,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얘기했다.
“하우누만. 딱 하우누만까지만 같이 가주세요. 그리 멀리 돌아가지도 않고, 용사님 일행도 재정비 할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거예요. 그다음부터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감정에 대한 호소가 아닌, 실리와 계산을 포함한 지원 요청. 물론 그것만으로는 성자이며 용사인 일행의 임무를 늦출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렇게 간절히 부탁하는 것이겠지.
[어떻게 할 거야? 물론 제법 정이 들긴 했지만…. 여기서 여정을 더 늘린다는 것은, 그만큼 로드릭 서부 전선에서 죽어 나가는 병사의 숫자가 늘어난다는 뜻인데.]‘그렇지.’
[개인적으로는 보르카나 노툼, 둘만 붙여서 도시까지만 데려다주고, 다시 합류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마침 정령이 들어있는 가죽 풍선도 두 개니까. 감성도 좋지만, 거시적으로 보자고. 딱 봐도 애가 똘똘한 게 혼자 지 앞가림 정도는 하게 생겼어.]‘거시적이라…. 흠….’
교수는 팔짱을 낀 채 일행을 돌아보았다. 하나같이 나만 쳐다보고 있는 게, 파티의 행로를 결정하는 것은 파티 리더의 역할이니 나한테 맡기겠다는 뜻이겠지. 오트만이나 노툼이 꼼지락거리는 게 내심 도와줬으면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쨌든 그 둘도 말없이 내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대답 없는 내 모습에 루실라가 입술을 깨물 무렵, 마침내 입이 열렸다.
“좋아. 같이 가지.”
“….정말요?”
“그래.”
“고, 고마워요! 사실 부담스러울까 봐 말은 안 했지만, 속국이 된 지 오래됐다고는 해도 하우누만 사람들은 여전히 독립적이고 난폭한 면이 있어서 사실 혼자 가기에는-”
“하우누만 뿐만 아니라, 제국의 수도까지 같이 간다. 우리 모두가.”
“….에? 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루실라는 좋으면서도 미심쩍다는 듯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수도까지 같이….요? 하우누만에서 저 옷도 사고, 품위 유지에 필요한 이것저것을 구매하려면 가지고 있는 물건도 좀 팔아야 하는데, 그러면 용사님 임무에 필요한 시간이….”
“어허. 루실라 아에드란. 동료 좋다는 게 뭐야? 내가 거짓말을 좀 많이 하긴 했어도 설마 네 앞에서, 이렇게 진지한 순간에 널 속이겠니.”
“그럼…. 정말 같이 가주는 거예요? 나 때문에?”
“아, 물론 너 때문만은 아니고. 맨입으로 가는 것도 아니지.”
“….그럼 그렇지. 이번에는 뭐에요? 이미 로만 가치아 맨슨에 대한 지원은 가문 단위에서 시작됐다고 하는데. 더 필요한 거라도 있어요? 골드 가이저 채권? 식량?”
“아니. 그저 작-은 협조 정도?”
“협조?”
루실라가 젖은 머리를 묶으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교수는 주머니에서 루실라가 들고 있는 편지와 똑같은 장식이 된, 황제의 인장이 찍힌 편지 두 장을 더 꺼내 보였다.
“편지 정리하다 보니 더 나오더라고. 전부 네 거야. 처음에 받은 편지도 아직 안 읽어봤지?”
“화, 황궁에서 온 편지가 세 개나….”
“열어봐. 난 대충 뭔지 감이 잡히니까.”
확신에 찬 내 말투에 루실라는 조심스럽게 편지의 봉인을 뜯고 펼쳐 보였다.
비슷한 내용. 외국인으로서 제국에 헌신해준 것에 대한 감사와 뛰어난 미색, 보통 레이디라면 혼절해버렸을 급박한 상황에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지혜와 용기에 대한 찬사가 가득하고, 그 말미에는 자신의 조촐한 파티, 혹은 티타임에 초대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대 발틴 제국 1황자, 케슬릭 롬 아그단의 이름으로, 먼 서쪽에서 찾아온 레이디 루실라 아에드란에게.] [대 발틴 제국 1황녀, 티타니아 롬 아그단의 이름으로, 인연을 찾아 대륙을 가로지른 놀라운 레이디, 루실라 아에드란에게.] [대 발틴 제국 3황자, 체라시온 롬 아그단의 이름으로, 겨울과 함께 찾아온 레이디 루실라 아에드란에게.]“황제가 아니라…. 황자, 황녀님들한테서요?”
“아무리 흥미가 동한다 한들 황제의 친서를 다이렉트로 받기에는 격이 좀 떨어지는 편이지. 적어도, 그쪽 생각은 그럴 거야.”
루실라가 펼쳐 든 편지를 슥 훑어봤는데, 역시나 내 짐작이 맞는 것 같았다.
황제의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대치 중인 세 황족의 편지.
“황제는 늙었고, 자식들은 장성하여 저마다 세력을 만들어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지. 이 상황에서 늙은 황제가 ‘오늘따라 유난히 사과가 먹고 싶군.’ 같은 말을 슬쩍 흘리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그야…. 황제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만큼 누구보다 빨리 구해오려고 하겠죠? 가장 좋은 물건으로?”
“자아, 그럼 거울 보시고. 황제에게 직접 소식이 전해질 만큼 편지를 난사한 전설의 레이디가 여기 있네? 황제님은 친히 명령을 내려 네 부탁을 들어주었고? 어라? 심지어 전설의 뭐시기라는 소문이? 항상 무료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서 ‘게으른 사자’라는 별명까지 붙은 황제가 보면, 참 기뻐하겠는걸?”
“그럼, 저를 보고자 하는 게 아니라…. 황위 쟁탈전을 부추기려고?”
루실라의 아연한 목소리에 교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위 귀족, 왕족 정도 되면 손짓 하나, 말투 하나에도 다 정치적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면 돼. 황제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 저 산맥너머에서는 나라 하나가 무너질 정도로 몬스터와 격전이 펼쳐지고 있고, 심지어 그놈들이 제국 외곽을 쿡쿡 찔러보고 있는 정황까지 드러난 상황이야. 물론 거대한 제국의 힘이 집결하면 그깟 코딱지만 한 동부 국가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지금 제국은 오랜 평화에 찌들어 녹슬었으며 귀족들도 여러 황자, 황녀들의 세력으로 나뉘어 한데 뭉칠 수 없는 상황이지. 아마 너에 대한 얘기도 슬쩍 흘렸을 거야. ‘그 정도로 기지를 발휘하고, 제국을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제국의 품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좋겠구나….’ 뭐, 이런 식으로 중얼거리지 않았을까?”
황제는 바보가 아니다. 그저 이 상황을 어떻게 이용해야 제국에 이득이 될지 관망하고 있을 뿐.
폭풍의 언덕에서 일어난 전투와 루실라의 유명세는 그런 황제에게 있어서 좋은 도구가 되어준 것이다.
“황제가 슬슬 뮤트의 위협을 인지하게 된 모양이야. 황족들이 서로 마찰할만한 거리를 던져주면서 황위 쟁탈전을 일찍 끝낼 생각이겠지. 다음 대 황태자가 정해지면 정권이 안정되고, 새 황제가 되실 황태자에게 잘 보여야 하는 귀족들도 잠시나마 잡음 없이 명령에 따르게 될 테니까.”
“그럼, 제가….”
“그래. 황제를 위한 무수히 많은 사과 중 하나로 선정된 거지 뭐. 미리 축하해야겠군. 변경백의 그 멍청이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배경을 가진 멋쟁이들이 꽃다발을 마차 가득 싣고 너를 찾아올 거야. 네가 누구의 소개로 황제를 찾아왔느냐에 따라 그쪽 진형에 황제가 점수를 줄 테니까.”
루실라는 영리한 소녀였다. 정치적 생리에 익숙한 그녀는 내 말을 곧바로 이해했고, 단순히 황족이나 황제를 대면하는 게 아니라 그 살얼음판 같은 황위 쟁탈전의 한 가운데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들어서게 됐음을 알았다.
“모, 못해요. 가문도 아니고 제 개인 자격으로, 저 셋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니…. 자칫 잘못 선택했다가 다른 황족이 다음 대 황제로 선정된다면, 저뿐만 아니라 우리 아에드란 가문 전체가 제국의 미움을 사게 될 거라구요! 제국 어디에서도 골드 가이저 상단의 깃발을 올릴 수 없게 될 거예요! 난, 나는….히끅! 우리 가문 모두의 목숨을…. 히끅!”
“자자, 심호흡하고, 쓰으읍- 후우! 옳지 잘하네. 그러니까, 우리가 같이 가준다는 것 아냐.”
“요, 용사님이요?”
“그래. 내가. 얼마나 든든해?”
어느새 루실라 옆에 주저앉은 교수가 등을 두드려주자, 조금은 진정한 루실라가 미심쩍은 눈으로 교수를 보았다.
“아까 내가 맨입으로는 안된다고 했지?”
“어….네. 협조가 필요하다고….”
“그래. 루실라 아에드란 양? 교수 용사파티 쪽 제안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갈 길이 너~무나도 바쁘지만,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제국에, 그것도 제국 남성 인생 최고의 트로피라는 전설의 텔드랏 아가씨를 혼자 두고 가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제국 수도까지 동행한다. 단! 그 대가로 루실라 아에드란은….”
교수는 얼떨떨한 루실라의 손에서 황족들의 편지를 받아낸 다음, 부채질 하듯 살랑살랑 흔들었다.
“제국의 모든 귀족 앞에서 명실상부하게 ‘교수 용사파티’의 일원임을 공표함으로써, 루실라 개인에 대한 초대가 우리 ‘교수 용사파티’에 대한 초대가 될 수 있도록- 협조한다. 파티 리더는 파티원의 행동, 거처, 행사에 대해 참견할 권리가 있으니까.”
“그건…. 관습적인 권리 아니에요? 물론 오래된 관습이긴 하지만 파티 리더의 권한으로 황족의 초대를 그렇게 막-”
“-우길 만큼의 권력은 나도 있지. 명분만 있으면 그 정도는 충분하다고.”
무려 신도들의 편지만으로 마법의 기구를 추락시킬 만큼 인기 있는 성자님이니까 말이야.
요점은, 결국 황족들 만나러 가는데 꼽사리 끼겠다는 의미였다.
‘제국의 황자, 황녀를 정식 절차를 거쳐서 만나려면 눈이 뒤집어질 만큼 아득한 양의 퀘스트를 완수해야 하지. 하지만 저쪽에서 불렀다면 바-로 다이렉트로 접견할 수 있거든? 날 부른 것은 아니라도 내 파티원을 초대했으니 루실라가 조금만 말을 맞춰주면 파티 자리에 어거지로 한두 명 정도 더 끼는 것은 가능할 거야. 알드리치는 흑마법사라 안 되고. 노툼, 보르카는 같은 인간도 평민, 귀족으로 나누는 놈들 앞이니 못 데려가고. 초대받은 루실라에 양대 교단의 성자인 나, 엘프인 이드라실까지는 끼어들 수 있겠지.’
루실라에 대한 초대 -> 교수 용사파티에 대한 초대로 슬쩍 묻어가는 거다. 당장 귀족들의 파티만 해도 어디 가문의 가주를 초대하면 자식이나 밀어주는 기사 정도는 여기저기 소개할 목적으로 대동하고 있으니까. 다 떠나서 나 정도면 이제 종교계의 거두라고 볼 수 있다. 알아둬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명분만 있으면 만날 수 있을걸? 아마?
[오. 그걸 방금 생각한 거야? 네 기억에 그런 계획은 없었는데.]속에서 하이드가 박수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긴, 이건 진짜 방금 생각해낸 거니까 기억을 공유해도 몰랐겠지.
이건 내가 막 천재거나 그래서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실패의 리스크와 성공의 보상까지 딱딱 맞춰본 다음 결정한 게 아니다. 그냥 ‘이벤트다!’ 하는 생각에 당장 덥썩 물고 본거지. 평소에는 그렇게 안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해도 되거든.
왜냐?
운 좋게 도시도, 마을도 없는 숲에 떨어졌고.
운 좋게 마침 배고프던 참에 떨어진 자리에 멧돼지가 있어서 구워 먹었고.
운 좋게 노툼이 태워버리려던 편지 무더기에서 황실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찾아냈으며,
운 좋게도 우리가 떨어진 위치가 수도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곳이란다.
이게 다 우연이라고? 아니, 절대 그럴 리 없다. 이건 시스템 브레이크로 불운 Lv.15를 처맞은 대가로 주어진 효과의 일환이다.
24시간 동안 행운 Lv.7 부여.
Lv.15, 만렙 불행은 플레이어가 죽었다 깨어나도 하던 일이 망한다. 내 경우에는 그대로 쭉 엘프 숲으로 가서 협상 진행하고, 겸사겸사 세계수도 만나면 끝날 여정이 편지 습격이라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빙 돌아가게 됐지. 보통 사람이었으면 추락해서 그대로 죽을 수도 있었다.
그 절반, Lv.7급 행운이면 뭘 해도 잘 풀리는 수준은 아니라도 플레이어에게 끊임없이 좋은 기회가 다가올 정도는 된다. 잘 판단하고 올바른 선택을 한다면 편지 드래곤의 습격마냥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일이 풀릴 수도 있다는 얘기지.
그래서 뭔 일이 일어나나, 하고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고 있는데, 파티원 중 한 명이 ‘이건 누가 봐도 이벤트에요~’ 같은 소리를 하네?
그래서 냉큼 붙잡았다. 제국 귀족계에 아무런 인연도, 활동도 없는데 황위 쟁탈전 중인 황족과 대면, 그것도 이쪽에 카드 한 장이 주어진 상태로 대면할 수 있다니. 이게 행운이 아니면 뭐겠어.
“그래서. 대답은? 협조해 줄 거지?”
“어….음…. 황족을 만나러 갈 때 용사님이랑 같이…. 용사님이 황족을…. 음….”
루실라는 심각하게 갈등하는 듯 했지만, 결국 혼자서 수도까지 가는 것은 무리라 판단했는지 내 악수를 받아들였다.
“좋아! 꼭 협조해야 한다, 꼭! 무슨 일이 있어도! 자비와 광명의 성자와 한 약속을 어긴다면, 양대 교단에 이단으로 올려 버릴 거야!”
“도,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고 그렇게까지 못 박아두는 거예요!”
“보험이지, 보험. 흐흐흐흐.”
교수의 음흉한 미소를 보며, 루실라는 그녀가 악마와 계약을 한 게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목적은 들어주지만, 결국 결과적으로 불행해지는 그런 계약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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