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52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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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카는 귀가 밝은 편이다.
물론 대부분의 수인이 귀가 밝은 편이긴 하지만, 그는 특히 시각보다 후각이나 청각을 먼저 확인하는 편이었다.
종으로서의 본능을 떠나 그것은 인간 세상에 내려와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너무나도 많이 본 늑대인간의 습관이었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세상은 생각보다 입체적이었다.
덜컥. 끼이익-!
바스락.
폭풍의 언덕과 비슷한, 진한 종이 냄새가 가득한 공동 우체국.
길을 걷다 보면 들려오는 노름판의 시큼한 열기와 마지막 기회라며 투사들의 이름이 적힌 팻말을 두들겨대는 노름꾼의 목소리, 오래된 나무 테이블 위에 쏟아지는 은화들의 소리.
온갖 사람들의 손을 거쳤을 시장의 물건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지금쯤 도시의 이국적인 식사를 부러운 눈으로 보며 수초를 씹고 있을 마법사의 선물로 적절한, 생선의 냄새.
그리고, 긴 나뭇가지에 꿰인 생선 다섯 마리를 받아들 무렵 그에게 빠르게 다가오는 가벼운 발소리. 동물적인 숲의 향기라 구분하는 엘프의 체취.
오랜만에 사람이 많은 도시에서 아무런 제약도 없이 수인 본연의 모습으로 다니는 것을 즐기던 보르카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의 엘프 동료를 맞이하였다.
약간 숨이 찬듯한 엘프의 말에, 보르카는 잠시 어지러움을 느꼈다고 생각했다.
“…., ……”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일까. 귀는 들었지만 머리가 이해하지 못했다.
“편지를…. 직접 전하라고?”
“그렇게 들었습니다. 투샨, 마르카. 당신의 잃어버린 두 자식이 맞습니까.”
.
.
.
.
철썩.
이것은, 나뭇가지에 꿰인 다섯 마리의 생선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다.
늑대인간의 더운 입김이 눈앞을 스쳤고, 날카로운 발톱이 땅을 박찼다.
부서져 너덜거리는 문. 얼떨떨한 표정의 동료와, 그의 손에 들려있는 누런 종이.
내밀어진 종이 위에 적힌 선명한 이름. 그가 잃어버린 이름이며, 되찾아야 할 이름들.
콰앙!
우지끈!
이어진 것은 울부짖으며 뛰쳐나가는 늑대인간의 몸에 너덜거리던 문이 떨어지는 소리였으며, 뒤쫓아 나온 교수의 몸이 그를 나무 바닥에 내리누르는 소리였다.
“진정해! 아익, 좀! 손톱 좀 집어넣으라니까!”
“놓으시오! 내 아이들이, 내 아이들이 지금 이 도시에 있다지 않소! 당장 같은 하늘을 보며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단 말이오!”
“그러니까 잠깐만 진정을…. 윽! 이 새끼가…. 물어?”
보르카의 날카로운 이빨이 그 목을 조이는 교수의 굵은 팔뚝을 물고, 허리와 목 힘만으로 거구의 동료를 들어 올려 내동댕이쳤다. 단단한 테이블과 바닥이 동시에 으스러질 정도로 강한 힘이었지만 그의 등에 매달린 남자는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굵은 팔뚝은 더욱이 그의 숨통을 조여왔다.
“그르르르, 그으으으!”
“정신 좀 차려 이 새끼야! 당장 몇 시간 뒤면 첫 번째 예선인 거 몰라? 저건 그냥 목록이 아니라 투기 대회 참가자 목록이라고! 너도! 네 자식도 모두 참가자란 말이다! 지금 네가 무작정 뛰어들면 경기 전에 상대 선수를 음해하려는 시도로 보일 수도 있어! 감동의 상봉이 아니라 네 자식들이 네놈 면상에 발톱을 쑤셔 넣을 거란 말이다! 투기장이 어디 발이 달려서 도망가는 것도 아니니까, 차분하게 기다리면 선수 대기실에서 분명히-”
“15…년…. 크르륵, 무려 15년을 기다렸는데…. 여기서 어떻게 더!”
콰드드득!
젖은 털에 팔이 미끄러진 틈을 타 등 뒤의 교수를 내던진 보르카는 울부짖듯 외쳤다.
“15년! 수인으로서, 인간으로서, 한 무리의 우두머리로서! 모든 것을 버려가며 여기까지 왔소! 지금 저 아이들이 투기장에 있다지 않소! 투기장의 노예로!”
교수를 떼어낸 보르카는 절박하게 외쳤다. 이미 두 사람이 마주한 공간을 제외한 다른 곳은 물의 장벽으로 빈틈없이 막혀있었고, 떼어낸 교수는 살벌하게 눈을 빛내며 몸에 박힌 유리를 털어내고 있었다. 그는 가야 했다.
힘으로는 뚫고 나갈 수 없음을 느낀 늑대인간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어렸다.
“투기장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내 뼈를 파내면 속에서 그날의 고통과 비명이 흘러나올 정도로 잘 알고 있소. 돈을 위해 싸우는 자? 나와 같은 처지의, 살기 위해 끌려온 자의 목에 손톱을 박아넣는 일?”
콰앙!
“천만에! 그 피 튀기는 살육의 현장조차 투기장 노예의 가장 밝은 단면에 불과하지! 그들은 전사이자 노예란 말이오! 낮에는 원치 않는 살육전을 벌이고, 밤에는 주인과 그 친인들의 장난감이 되어야 하지! 피와 살육에 흥분한 귀족이 그 흥분을 어떻게 해소하려 할 것 같소?”
“….”
“말할 수 없다면 내가 말하지! 단련된 전사의 몸은 귀족의 좋은 노리갯감이오! 그 아무리 대단한 전사이며 위대한 숲의 영혼을 가슴에 품었다 한들 노예의 직인이 박힌 그 순간 그자는 아무것도 아닌 노예일 뿐이오! 노예! 생의 모든 것이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인간의 가장 밑바닥! 그 자리에 나는 나의 의지로 걸어 들어갔소! 우리 부족을 몰살시키고 자식들을 데려간 노예 상인의 행방을 그자들이 알고 있다고 했으니까! 가진 것도, 아는 것도 없는 내가 겨우 붙잡은 마지막 단서가 그들의 손에 있었으니까!”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른다. 희미하게 남은 채취와 피 냄새를 쫓아 세상에 나와 미친 사람처럼 3년. 노예 상인의 소문이 들리는 모든 곳에 그의 발톱 자국이 찍힐 무렵 마침내 아이들의 소식을 아는 인간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입에서 이름이 나오기도 전에 아이들의 이름을 말하던 남자. 어린 늑대인간 둘을 봤지만, 비싸고 어려서 사지 않고 돌려보냈다는 투기장의 주인.
‘이것 참 눈물 나는 사연이로군. 사연 좋지. 스토리는 언제나 잘 먹히니까 말이야. 이렇게 하지. 자네는 우리 투기장의 노예가 되어, 나를 위해 열심히 일해 주는 거야. 언제까지? 당신이 우리 투기장의 간판스타가 될 때까지. 얼마 걸리지 않을 거라고? 우리 애들 썰려 나간 꼴을 보아하니 기껏해야 1년, 좀 길면 2년까지도 걸릴 수 있겠지만. 겨우 2년이라고?’
‘그르르륵…. 그렇게나 기다릴 시간은 없다. 지금도, 그 아이들은….’
‘그놈의 아이들, 아이들, 자식새끼들! 대가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 생각을! 나쁘지 않은 거래 아냐! 당신 꼬락서니를 보라고. 옷 하나 걸치지 않고 땀과 기름에 떡진 늑대 털로만 덮어둔 그 악취 나는 몸뚱이라니. 얼마나 힘들었어? 돈 없이 인간 세상을 살아가는 것만큼 힘든 것도 없잖아? 딱 2년만 돈도 벌면서 사람다운 모습으로 돌아가자고. 늑대인간은 막 굴려도 쉽게 죽지 않으니까 2년 안에 자식들이 죽을 일은 없을 거라 장담하지. 그쪽이 우리 간판스타가 되어 딱 한판, 말도 안 되게 큼지막한 판에서 져주면, 그 막대한 수익의 대가로 그쪽이 원하는 정보를 알려주지. 믿으라곤 안 하겠어. 우리 동네에서는 불확실한 신뢰 대신 마법 계약서라는 좋은 물건을 사용하니까. 흐흐흐흐….’
투기장의 정상에 오르는 데 필요한 시간은 8년이었다. 그동안 그는 싸우는 법을 배웠고, 굴복하고 타협하는 법을 배웠으며, 마법 계약서도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무의미한, 고통만 가득했던 8년의 세월.
그날의 고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건만.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하며 기원한 단 한 가지가 내 자식들의 안위였는데, 이제 내가 있던 자리에, 내 자식들이 서 있다고 하오. 내가 세상에 나와 겪은 가장 끔찍한 경험이 모두 그곳에서 있었는데, 내가 거기서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지 이 육과 영에 한 올의 빠짐도 없이 기억하고 있는데! 어찌, 어찌 진정하라, 기다리란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소! 아무리 당신이라고 한들!!”
절규하는 보르카의 몸에서 푸른 듯, 하얀 기운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숲의 부족이 사용하는 영기(靈氣). 지금까지는 발버둥이었다면, 이제 진심이라는 소리다.
“….이거 아주 눈이 뒤집어졌군. 큰 경기 앞두고 컨디션 때문에 좀 살살 해주려 했더니.”
“나는 가야겠소. 제발 막지 마시오, 사과라면 갔다 와서, 내 아이들을 데려온 다음에 할 테니!”
“우리 사이에 사과는 무슨. 사과할 필요도 없고, 나갈 필요도 없다 임마. 한잠 푹 자고 일어나서 알드리치제 진정제를 배가 터지도록 먹고도 가겠다고 하면 그때 고려해보지.”
“그르르르…. 크아아아아!!!”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음을 깨달은 보르카의 몸이 용수철처럼 웅크려지더니, 길을 가로막은 교수를 향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 반대편에 있던 교수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나오며 두 팔이 검게 물들었다.
“더럽게 애잔한 멍청이 같으니라고.”
보르카는 대단한 힘과 노련한 경험을 가진 전사였지만, 지금의 움직임은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한 마리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발톱과 강화된 팔뚝이 스치며 불꽃이 튀고,
퍼어억!
냉혹할 만큼 깔끔한 일격에, 아침부터 도시를 울리던 늑대 울음소리가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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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르르륵.
안구가 끓어오르는 열기. 털과 살을 태우는 끔찍한 냄새.
“으하하하! 멍청한 짐승새끼들! 다 큰 놈은 어차피 말 안 들어! 모조리 죽이고 애새끼들만 끌고와!”
부족원들의 비명소리 사이에서 비열한 웃음소리가 들리지만, 그는 움직일 수 없다.
‘꿈. 이건 꿈이다.’
뒤에서부터 가슴을 관통한 창이 말뚝처럼 그의 몸을 땅에 못 박아 뒀기에, 말을 탄 흉수의 할버드와 각반밖에 보이지 않았다.
무력한 그를 내버려 둔 채 세상이 녹아내린다.
짜악! 짜아악!
익숙한 고통. 채찍, 그것도 가죽이 두꺼운 아인종을 위해 끝에 작은 금속 추가 달린 채찍이었다.
“져야 하는 경기라고 몇 번을 말해, 이 짐승새끼야! 전사의 명예가 어쩌고 하는 것은 저번에 버리겠다며!”
“상대는, 나를, 죽이려 하였소. 나는 여기서 죽을 수는….으으윽!”
“그놈의 애새끼, 애새끼, 어느 동네 개새끼가 됐을지도 모르는 애새끼! 죽기 싫으면 말을 들으라고! 큰 어르신이 손가락만 까딱하면 네놈 심장이 펑! 터져나가는데, 왜 말을, 안 들어!”
굵은 쇠사슬에 묶인 그는 이번에도 무력했다.
‘….음?’
보르카는 기억 속 고통을 감내하며 눈을 감았지만, 이번 꿈은 평소보다 조금 더 길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든 편지 두 장이 누군가의 손에 내려앉았다. 살아있다면 투샨은 스물, 마르카는 열여덟 살이겠지. 어떻게 자랐을까. 어릴 때 그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을까?
얼굴도 모르는 자식들이 편지를 펼쳐 보이는 환상에 쇠사슬에 묶인 보르카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뿌옇게 흐리기만 하던 배경이 선명해지는 순간. 편지를 받아든 두 늑대인간의 미소가 쓴웃음이었음을, 그 장소가 익숙한 투기장 노예의 감옥으로, 그가 묶인 쇠사슬로, 채찍과 인두가 가득한 방으로 변하며 기억 속 그의 자리에 두 아이가 자리 잡는 순간.
“아, 안 돼. 안 돼! 안 돼에에에에!!!”
늑대인간의 입에서 단말마와 같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사나운 채찍질에 두 아이의 몸에서 피가 튀기고, 흩어진 피는 선명한 글자가 되어 그의 눈앞에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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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갈비뼈 부족』
– 1. 푸른 갈기 투샨 : 투기장 소속.
– 3. 푸른 갈기 마르카 : 투기장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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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아니다. 현실이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다 한들, 늑대인간 보르카는 검투 노예의 삶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늑대인간의 억눌린 신음 속에, 채찍과 비명소리가 한없이 커져갔다.
‘노예, 투기장. 투샨, 마르캬. 노예, 투기장, 계약서, 마법사….’
그 고문과도 같은 장면 속에서 보르카는 끊임없이 되뇌었다. 만나야 한다. 만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두 아이를 풀어주리라. 비록 그 옆에 그의 자리가 없을지라도 두 아이 만큼은 숲으로 되돌려보내리라고.
끝없는 악몽 속에서 늑대인간은 눈을 감았다. 너무나도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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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어억!”
너무나도 강렬한 꿈에 눈을 떴음에도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딱딱하고 각진 곳에 배긴 등이 저렸고, 하늘 높이 떠오른 태양은 잠에서 깬 늑대인간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젖은 나무 냄새에 말똥 냄새. 덜그럭거리는 소리. 마차와 하늘이라니.
정신이 없는 그의 시야에 그늘이 지더니 커다란 머리가 그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히죽 웃는 얼굴에 장난스러운 눈.
“헤이 유, 유 파이널리 어웨이크.”
“….그게 무슨 말이오?”
“그런 게 있다. 마차에서 정신을 차린 사람에게 꼭 해줘야 하는 말이지. 좀 진정 되셨나 몰라? 더 필요하면 얘기하고. 이건 공짜니까.”
히죽 웃어 보이며 주먹을 흔들어 보이는 남자.
그를 이렇게 때려눕힌 장본인. 동료이자 리더, 교수다.
그의 얼굴을 보니 차차 기억이 떠올랐다. 이성을 잃고 동료에게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세운 일, 불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던 다른 동료들, 그리고…. 두 자식의 이름이 적힌 종이.
휘청!
“워워워, 움직이지 마. 턱을 아주 제대로 맞아서 골이 좀 울릴 거야.”
“으으으음…. 여기가 어디오.”
보르카는 온몸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마차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차는 눈 덮인 도시를 조심스럽게 가로지르고 있었고, 길가의 시민들은 그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거나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이상할 만큼 허름한 마차는 눈이 내리는 와중에도 뚜껑이 없었는데, 시민들에게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가 싶었다.
“이거? 투기장에서 제공한 마차…. 라는 이름의 달구지. 투기장에서 사용할 개인 무구나 짐 같은 것은 이쪽에 다 실어 준다나 봐. 1승 하기 전에는 말도 없었는데, 한판 이기니까 마부랑 말을 보내주더라고.”
“투기장에서 제공한 마차라면…. 벌써 경기가 시작한 것이오?”
“그래 이 자식아. 너 임마, 그거 좀 쳤다고 네 시간이나 엎어져 있고 말이야. 예선 경기를 나 혼자 치러야 했다고. 그것도 2인 1개 조라는 룰 때문에 기절한 네놈을 업고 말이다. 예선 한 경기 더 치르고, 그다음부터는 저 투기장 안에서 본선을 치르게 된대. 우린 그 예선 장소로 가는 중이고.”
교수는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손가락으로 사람들 뒤쪽을 가리켰다. 골목 사이로 들리는, 한 블록 너머의 환호성 소리.
그들이 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뚜껑이 없는 마차에 탄 것은 커다란 트롤과 기사. 마차의 방향이 같은 것을 보니 다음 상대는 저들로 보였다.
“어이. 어떻게 좀, 싸울 수 있겠어? 작정하고 덤비길래 좀 진심으로 갈겨버리긴 했는데.”
“….문제없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개인의 감정에 파티 전체의 행사를 그르칠 뻔한 것에 대한 사과,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었을 그를 말려준 것에 대한 감사 등등….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온통 투기장과 자식들에 대한 생각뿐이었기에, 사과는 잠시 미뤄두고 적에게 집중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이겨야 한다. 이기고 또 이겨서 만나리라. 모두 이겨서 정상에 오를 것이다. 그리하여, 저주받을 마법 계약에 묶인 그의 자식들에게 자유를 찾아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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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 왜 저래?]‘몰라. 너무 세게 때렸나?’
교수는 뭔가 결심한 듯 사방이 뚫린 마차 위에서 옷을 벗어 던지는 보르카를 보며 그를 너무 사납게 다뤘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수인 특유의 털로 중요 부위만 가린 보르카의 모습에 여인네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익숙한 솜씨로 마차 구석에 있던 검투사 복장을 착용한 보르카는 내게도 한 벌을 던지며 입으라는 시늉을 했다.
당연히, 검투사 복장답게 갑옷이라 부를 수도 없는 장비였다. 제법 튼튼해 보이는 미늘 갑옷은 손목부터 어깨까지만. 그 위에 가죽 어깨 보호구가 있고, 심장을 가리는 작은 철판이 가죽 벨트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 외에는 전부 맨 살이었다. 팔이랑 어깨, 심장 빼고는 모두 드러낸 복장.
“음…. 차라리 홀딱 벗고 싸우는 게 더 편할 것 같은데. 어차피 난 전신에 외피를 뽑아낼 수 있어서. 그게 이것보다 100배는 튼튼할걸.”
“부탁이니 입어주시오. 투기장에는 투기장 나름의 규칙이 있으니.”
“….애들 때문이냐?”
보르카는 각오를 마친 듯, 굳은 입매로 고개를 끄덕였다.
“염치 불구하고 부탁하겠소. 노예 인장은 쉽게 지울 수 없소. 계약 당사자가 직접 계약을 해지하거나, 노예 측에서 계약 당시의 조건을 완수해야 하지. 불법적으로 사들인 노예의 경우 굉장히 까다롭고 악독한 조건을 걸어 사실상 완수가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는 게 일반적이오.”
“넌 어떻게 탈출했는데.”
“….투기장의 정점에 서도 계약이 끝나지 않는 것을 알게 된 날, 축하 연회 자리에 있던 모든 인간을 죽이고 나를 계약으로 묶어둔 그놈의 눈앞에서, 놈을 조금씩 잘라 씹어먹었소. 그놈이 지장을 찍을 엄지손가락과 계약 종료를 알릴 입만 멀쩡히 남겨두고, 스테이크 나이프로 조금씩 잘라가며 내 말을 들을 때까지. 이번에도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원이 없겠으나…. 이런 투기장의 주인은 쉽게 외부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칫 위협을 느낀 놈이 계약서를 인질로 삼으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들의 방식으로 다가가야지.”
철컥!
마지막으로 노랗고 구멍이 숭숭 뚫린 황동 투구를 뒤집어쓴 보르카는 투구 덕분에 이상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투사의 검은 손에 쥔 것이 다가 아니오. 관객의 환호야말로 가장 빛나는 방패요, 항거할 수 없는 적을 쓰러뜨리는 창이지.”
“인기를 얻으시겠다…. 투기장의 검투사로서 말이지?”
“그들의 방식으로, 온 도시가 내 이름을 연호하여 투기장의 머리가 고개를 내밀 수밖에 없게 할 것이오.”
나쁘지 않은 계획이다. 인기는 곧 돈이고, 투기장의 생리를 잘 꿰고 있는 검투사를 끌어들이면 더 큰 경기를 잡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리 쉽게 풀리진 않을 텐데? 당장 대충 봐도 하우누만 여기저기에 제국의 손길이 닿아 있는 게 보이잖아. 초원의 수많은 부족을 굴복시킨 상징과도 같은 도시라고. 당장 투기대회도 그린 스킨의 전통인 것치고는 사람 손을 엄청나게 탄 것 같은데? 토너먼트라는 대회 방식이나, 축제랑 같이 열어서 돈을 끌어모으는 식이나. 원래 부족 전투대회는 원형 모래판에 횃불 몇 개 밝혀놓고 남은 인원이 다 죽을 때까지 한 번에 죽자고 덤비는 식이잖아?”
제국이 얽혀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당장 도시의 1/8이 마약 농장이니 큰 암흑가도 얽혀있을 것이고. 후작급 귀족도 붙어있고. 보통 돈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투기장을 움직이는 놈이 머리를 내밀 리가 없는데 이제 막 인기를 얻기 시작한 2인조 투사 정도로는 좀….
“아니, 충분히 가능하오. 아직 예선이니 참가자 이름을 바꾸는 정도는 가능하겠지. 대부분 투기장에서도 경기 전에 투사가 이름을 바꾸는 것을 허용하니.”
“이름?”
“그렇소. 이름. 차마 조상님들이 부끄러워 쓰지 못한 내 이름 대신, 로드릭의 투기장에서 사용하던 내 투사로서의 이름.”
보르카는 그물과 원형 방패, 브로드 소드를 차례로 챙기며 말했다.
“베나드 팽. 로드릭 동부, 겐티아 아레나의 투사였으며. 그곳의 모든 투사를 홀로 죽이고 탈출한 동부 검투계의 패자가 돌아왔다고 전해주시오. 그 정도면, 인근 도시의 귀족 정도는 구경하러 오겠지.”
보르카는 생각했다. 머리를 파내고 싶을 정도로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이름이지만. 그 8년간의 고통이 두 아이를 구하는 자리에 사용될 수 있다면, 완전히 헛된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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