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53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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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한 방식의…. 투기 대회네요.”
“지금은 많이 변질하여 인간의 투기 대회에 가까워졌지만, 결국 알맹이는 초원 부족의 전통적인 행사니까. 그것마저 인간의 방식으로 바꾸려 들면 난리가 날 테니 어느 정도 형식은 유지해준 것이겠지.”
하우누만 투기 대회는 대전사 쿤 타기즈의 행적을 기념하는 대회답게 독특한 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 예선 장소는 도시의 가장 외곽, 빈민촌.
부족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쿤 타기즈의 어린 시절을 의미하는 예선은 아무런 지원도, 장비도 없이 속옷에 가까운 천 쪼가리만 입은 채 맨손 박투로 승부를 가리게 된다.
여기서 승리한 64인에게는 지붕이 없는 마차와 말, 마부가 주어지며 가장 허름한 장비도 제공된다.
그 다음은 조금 더 도시 안으로 들어온 가죽, 광석 공방 구역. 그 다음은 식료품 시장, 시민 거주구, 귀금속/장신구를 다루는 거리를 넘어 여덟 부족의 구역을 지난 다음, 마침내 도시 중앙의 콜로세움에 도착하는 형식이었다. 맨손으로 시작해 모든 역경을 헤치고 초원 부족의 대전사로 거듭난 쿤 타기즈를 상징한다는 게- 관람석 옆에서 구운 견과류를 팔던 고블린 상인의 설명이었다.
“확실히 볼거리는 있겠네요. 전투 방식도 달라지고. 장비도 허름한 넝마에서 점점 좋은 것으로 바뀌어 가니 응원하는 사람이 승리해 나간다는 게 관중에게도 확 와 닿고.”
“그래서 하우누만의 투기 대회는 제법 유명하지. 지금은 황위 쟁탈전이 한창이라 암살 위협 때문에 못 오지만, 원래 황족 중에서도 매년 관람하러 오는 이들이 있었으니까. 인근 영지의 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일찌감치 허름한 공방 구역의 나무 관람석에 자리 잡은 일행은 노점상의 군것질거리로 배를 채우며 교수와 보르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저기 오는군그래.”
“으응? 어디. 오트만 이 사람아. 원견 마법 같은 게 있으면 혼자 보지 말고 같이 좀 보자고.”
“마법을 써도 인파에 가려서 안 보일 게 뻔한데 뭐하러. 저쪽 골목이랑 그 반대편 골목, 환호성이 파도 타듯 가까워지고 있잖나.”
“와아아아!”
“키익 키익! 끼이익!”
“크워어어어!!!!”
오트만의 이야기를 증명하듯 여러 종족의 환호성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임시로 만들어진 나무 관중석이 가득 차며 그중 높은 단상에 어깨가 떡 벌어진 오크 둘이 올라왔다. 커다란 북을 든 오크가 몽둥이 같은 막대로 북을 울리고, 도끼를 든 오크는 날이 번쩍이는 도끼를 높이 들어 올렸다.
약속이라도 한 듯 관중이 침묵하는 가운데. 눈발이 흩날리는 허름한 경기장 주위에 박힌 횃불이 동시에 타올랐다.
“시작하나 봐요.”
“으음. 그런 듯하군. 얘야, 다소 잔혹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느냐?”
“쉬이잇! 상가의 딸을 뭐로 보시고! 저도 이 험한 세상을 상인으로 몇 년이나 돌아다닌 사람이라고요! 그리고 설마 용사님이 뮤트도 아닌 사람을 막 잡아 찢고 뜯어먹고 그러겠어요?”
“….경우에 따라서는?”
“어, 음….”
『크워어어어어어억-!!!!』
일행들의 속삭이던 소리는 광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오크의 함성에 파묻혔다. 일부러 목청이 좋은 오크를 뽑은 듯, 함성 한번으로 좌중을 휘어잡은 단상 위의 오크는 마법의 도움 하나 없이 광장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 목소리로 외쳤다.
“기뻐하라, 초원의 영광된 자식들이여! 지금 이 자리에 대전사의 넋을 기릴 위대한 전사들이 도착했으니!”
둥-! 둥-!
“붉을 밝혀라! 함성을 질러라! 그들은 이곳, 영예로운 자리에서 서로의 피로 자신을 증명할 것이다! 둘 중 하나가 비참하게 패배를 외치거나, 두 번 다시 말을 할 수 없게 될 때까지!”
“와아아아아아!”
우렁우렁한 오크의 목소리에 고양된 사람들이 미친 듯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하고, 그 열기에 떨어지는 눈발이 녹아내릴 정도로 사람들이 달아올랐을 때쯤.
규칙적으로 울리던 북소리가 멈추고 단상 위의 오크가 도끼를 치켜들었다. 그의 앞에 준비된 목패를 왼쪽부터 뒤집은 오크는 그 위의 이름을 큰소리로 외쳤다.
“그럼, 영광을 위해 나선 전사를 소개한다! 빌데란트 후작가 소속의 기사, 인간 베너드! 그리고 그의 전우인 트롤 용병 파카쿠!”
“와아아아아아!!”
호명과 함께 날카로운 도끼로 밧줄을 끊어내자 위로 올라가는 나무 문.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번쩍이는 황동 갑옷을 꼼꼼하게 차려입은 기사와 원형 방패를 권갑처럼 양손에 끼고 나온 트롤이었다. 두 주먹의 금속 방패를 쾅쾅 부딪치며 자신을 어필하는 트롤의 모습에 관중들은 광장이 떠나갈 듯 함성을 질렀다.
루실라는 그 환호 속에서 번쩍이는 기사의 갑옷을 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거, 저거 규정에 맞는 거예요? 2차전은 [전장에서 주워입은 갑옷으로 제국군과 싸워 승리한 대전사를 기리기 위해 가장 낡고 허름한 검투사 장비만 제공한다.] 라면서! 당장 중고로 시장에 내다 팔아도 10만 실링은 족히 받을 것 같은 저 갑옷이 어떻게 낡고 허름한 거예요!”
“문제가…. 있는 것 같기는 하구나. 보통 검투사는 저렇게 전신에 금속제 보호구가 다 붙은 갑옷보다는 맨살이 많이 드러난 복장을 하곤 하지.”
“정확한 규정에는 ‘주최 측에서 제공한 장비만 사용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번 가죽 공방지구 2차 예선에 참가한 것은 빌데란트 후작가와 엄니발톱 부족. 경기장은 투기장을 관리하는 열린 갈비뼈에서 지었군요.”
이드라실의 설명에 알드리치가 뭔가 눈치챈 듯 인상을 찌푸렸다.
“열린 갈비뼈, 고블린이라…. 돈만 주면 뭐든 하는 족속들이니 냄새가 나긴 하는군. 도시 단위 이권이 걸린 경기이니 물밑 공작이 없을 리가 없지. 1회전도 가관이었겠어. 맨손 박투에 트롤 용병이라….”
“이, 이런 상도덕도 없는 놈들이! 누군 돈이 없어서 그딴 개수작 못 부리는 줄 알아!! 가요, 알드리치님, 오트만님! 우리 이렇게 있지 말고 어디 가서 얘기라도 해보자구요!”
“글쎄….우선 지금 당장은.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오트만은 길길이 날뛰는 루실라의 옆에서 단상을 가리켰다. 한눈에 봐도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오크가 기사와 단상 옆의 고블린을 번갈아 노려보고 있었다.
“….크흥! 빌데란트 후작가에 맞서는 투사! 엄니발톱 부족 소속의 인간 교수와-?! 크흑, 킁! 콜록!”
단상에 걸린 목패 중 마지막 하나. 급하게 갈아낸 흔적이 있는 이름을 눈에 담은 오크는 그답지 않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눈이 밝고 목청이 유난히 큰 덕분에 벌써 10년이 넘도록 투기 대회의 진행을 맡은 그는, 당연히 투기계에서 한때 엄청난 위명을 떨치던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경기 직전에 바뀐 이름표. 그 위에 올라온 이름은 이대로 경기를 진행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지만, 반대편 기사의 번쩍이는 갑옷을 본 오크는 송곳니가 드러나도록 웃으며 밧줄을 끊었다.
“크흥! 엄니발톱 부족 소속의 인간 교수와…. 저 산맥 너머 투기장의 제왕! 홀로 모든 투사를 사살하고, 그 주인마저 죽였다는 전설적인 수인 검투사이며 범죄자! 동부 검투계의 패자! 베나드- 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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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컥! 드르르륵-
환호성 대신 의심과 의문의 웅성거림이 가득한 가운데. 밧줄이 끊긴 투기장의 문이 거친 소리와 함께 올라갔다.
사박. 사박. 사박.
거창한 설명에 비해 그들의 차림새는 보잘것없었다. 검투사용 황동 투구로 얼굴을 가린 두 명의 투사는 어떠한 인사나 몸짓도 하지 않았지만.
“저런….”
“세상에, 도대체 얼마나….”
백전연마라는 단어를 인간으로 빚어낸 듯, 터져나갈 듯한 근육과 빼곡한 흉터를 간직한 거구의 검투사.
그리고, 가슴과 척추 라인에 털이 가득한 수인족 특유의 상체를 드러낸, 그 털로도 가릴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채찍과 인두 자국, 그것을 가로지르는 흉터를 간직한 수인족 검투사.
흐드러지는 눈발과 횃불의 일렁이는 불빛 속에 드러난 그들의 몸이 천 마디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에, 좌중은 그 모습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수인 검투사는 진짜 검투사의 삶이 어떤 것인지 몸으로 외치는 듯하였다.
오크 진행자의 소개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심해져 가는 가운데, 수인 검투사의 견갑골 사이, 오랜 세월이 지나도 선명하게 남은 낙인을 발견한 인간 관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지, 진짜야…. 저거, 저거 겐티아 아레나 소유라는 낙인이야! 저걸 몸에 박고 살아남은 검투사는 딱 하나밖에 없다고! 그놈이 나머지를 다 죽였으니까!”
“나, 나도 들은 적 있어. 검투 노예가 투기장을 모조리 엎어버린 뒤 주인인 귀족을 살해하고 도망쳤다는 소문.”
“그럼…. 진짜란 말인가? 진짜 저기 있는 게 피투성이 베나드 팽이라고? 가주를 잃은 겐티아 가문에서 현상금을 500만 실링이나 걸었다는 그 현상범?!”
하우누만 투기 대회는 도시에 들어올 때 봤던 것처럼 제국 전역의 관광객이 몰려드는 유명한 대회다. 당연히 투기장 문화에 익숙한 귀족이라면 귀족을 살해하고 자유를 되찾은 전설적인 검투사에 대한 이야기를 모를 리가 없을 터.
웅성거림이 소란으로 변해가는 사이 교수가 보르카의 옆구리를 찌르며 속삭였다.
“500만이라…. 어마무시한 분이셨네?”
“잊고 싶은 과거요. 괜히 드러냈다간 대장이 돈 바꿔먹겠다고 팔아먹을지도 모르고.”
“그러게. 진작 알았으면 그쪽 가문에 넘겨서 돈만 받고 구출해왔을 텐데.”
“일없소. 겐티아 가문의 영지는 지금쯤 뮤트 소굴이 됐을 테니.”
“저런. 아쉬워라.”
적당한 잡담으로 긴장을 털어낸 보르카가 손을 들자, 사전에 약속한 대로 교수는 뒤로 살짝 물러났다.
‘초라한 낡은 갑옷에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방패, 그물과 짧은 검을 든 검투사. 그에 반해 마개조 풀 플레이트 검투사 메일의 기사에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트롤 용병이라니. 확실히 대비가 극명하긴 하군.’
교수는 느긋한 마음으로 혼자 앞으로 걸어 나가는 보르카를 지켜보며 관중들만큼이나 떠들썩해진 대화방으로 눈을 돌렸다.
———
– 흥안만두 : 괜히 객기부리다 뒈지는거 아님? 늑돌이가 투기장 전설이라는데, 난 저런 NPC가 있다는 소문도 못 들어 봤거든?
– 스피드 웨건 : 찾아봤는데 소문을 들었다는 글이 몇 개 있긴 했어요. 투기장 죽돌이…. 라고 해야 하나. 검투 대회 컨텐츠만 몇 년 한 플레이어가 아예 없어진 투기장에 관한 얘기와 함께 들은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 외의 정보는 없어요.
– professor : 가문의 치부나 마찬가지니까. 명망 높은 귀족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노예를 사 투기장을 운영한 것도 모자라 가문의 기사까지 모조리 노예한테 썰리고 가주까지 목이 따이셨다니. 절대로 숨기고 싶은 이야기겠지. 현상금 운운한 놈도 어디 정보길드 쁘락치일걸? 도시 곳곳에 내기도박 운영하는 고블린이랑 그쪽 인간들이 있는 것 같았으니까.
– Jokass : 그래서, 진짜 아까 얘기했던 대로 하게? 승산은 있고? 제국 후작가 기사 정도면 오러는 당연히 쓰는 놈이다? 그놈만 해도 버거울 텐데, 저런 이쑤시개 같은 칼로는 트롤 지방층도 다 못 뚫어.
– professor : 진짜 죽겠다 싶으면 당연히 뛰어들겠지만. 글쎄….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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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보르카의 전투 스타일이 대단히 눈에 띄는 종류는 아니었다.
야성의 대표주자나 다름없는 늑대인간 주제에 야성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극도로 정적이고 방어적인 스타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튼튼한 몸과 기다란 발톱을 방패와 칼처럼 사용하던 전형적인 검투사, 혹은 경장 보병과도 비슷한 전투 운영.
개인 전투뿐 아니라 단체전에도 고루 익숙한 덕분에 매번 앞으로 뛰어나간 나 대신 마법사들 옆에 남아있던 게 보르카였다.
흑마법사와 전투 때는 오트만을 따라온 어리숙한 2, 3위계 마법사들을 파도처럼 몰려오는 언데드들한테서 지켜냈으며, 블루 라인에서도, 변경백 영지에서도, 폭풍의 언덕과 암석지대에서도.
매번 부득이하게 일행과 떨어져 전투하는 나 대신 항상 근접전에 무방비한 마법사들을 지키고 있던 게 저 녀석이다.
———
– professor : 아주 국밥 같은 놈이지. 내 기준에서도 뒤를 맡길 정도는 된다고. 매번 있던 자리가 카메라 밖,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지 않는 자리라서 그렇지.
– 노루Drug해요 : 평가가 되게 괜찮네.
– professor : 실제로 괜찮으니까. 히어로 유닛만큼 혼자 전장을 뒤집어버리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쟤 없으면 당장 전투에서 내 운신 폭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질걸? 가구로 치면 못 같은 놈이라고. 밖에선 안 보이는데, 없으면 와장창 무너지는 그런 녀석.
– 노루Drug해요 : 그래서, 기어이 혼자 보내시겠다?
– professor : 자기가 그러고 싶다는 걸 어쩌냐. 1차전 나 혼자 했으니 2차전은 자기 혼자 치르겠데. 구경이나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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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걸어 나가는 보르카와 달리 뒤로 돌아선 교수는 관중석 바로 앞, 원형 경기장의 끄트머리까지 가서 바닥에 퍼질러 앉아버렸다. 관중이나 투사나 도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혼자 원형 투기장의 중앙까지 걸어 나간 보르카가 입을 열었다.
“베나드 팽. 내 이름과 닳아 없어진 명예를 걸고. 이곳 하우누만에 가져가야할 목이 있어 참여하였다. 검투사로서, 전사로서, 인간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전투를.”
모든 의심을 종결시키듯 담담하게 울리는 그 목소리에, 좌중들은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눈앞의 투기장에 집중하고 있었다.
겐티아 투기장의 사건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이는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소유한 투기장의 연회장에서, 엄지손가락과 입만 남기고 백골로 발견된 겐티아 가문 가주의 이야기는 귀족에게 노예를 가까이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검투대회 팬들에게는 결국 승자의 권리를 쟁취한 검투사의 이야기로 유명했으니까.
그 뼛속까지 증오가 어린 시체는 살아남은 검투사가 그를 얼마나 증오했는지 잘 보여주었다.
그런 검투사가 이 넓은 하우누만에서 누군가 죽이기 위해 검투 대회에 참여했다면, 바보라도 그게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수 있었다.
“서, 선전포고다….”
“피투성이 베나드 팽이, 하우누만 투기장에 결투를 신청했다!”
순간 발 빠른 고블린 몇이 하우누만 투기장을 향해 달려가는 가운데.
전설적인 검투사가 과거의 전설을 다시 한번 선포하는 장면에 광장이 떠나가라 함성이 울려 퍼졌다.
목숨을 건 전투를 숭상하는 오크도, 피와 살육에 열광하는 인간과 수인도, 기득권이 무너지면 흘러내릴 콩고물을 상상하는 고블린도 모두 열광하게 하는 검투사의 선포.
모든 시선이 보르카에게 집중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기사는 손을 들어 트롤을 뒤로 물린 뒤, 칼을 뽑아 상대의 투구를 겨눴다.
“어이가 없군. 허명에 기대어 인기를 얻으려 하다니. 동부의 투기계의 패자, 피투성이 베나드 팽이라…. 차라리 거짓말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싶어. 겐티아 가문은 사라졌지만, 귀족을 살해한 노예의 목을 잘라가면 명예 정도는 챙길 수 있을 테니.”
우웅-
단숨에 끝내버리겠다는 듯, 기사의 검이 가늘게 떨며 희미한 빛을 뿜어냈다.
“네 뒤에 숨은 덩치는 특별히 살려주마. 주제를 알고 시작도 하기 전에 저렇게 틀어박혔으니. 물론 네놈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대회를 떠나, 그 투구 안에 들어있는 머리가 진짜 귀족살해의 대죄를 짊어진 노예인지, 멍청한 허풍선이 검투사인지 궁금해졌으니 말이야. 잘라서 꺼내 보면 알 수 있겠지.”
“그대는 검을 혀로 휘두르는 모양이오”
“건방진….!”
보르카가 방패를 들어 올리고, 분노한 기사가 기수식을 취하자 정신을 차린 오크가 큰소리로 외쳤다.
“쿤 타기즈가 너희를 지켜보시니! 후회가 남지 않을 전투를 벌여라!”
휘익!
전통에 따라, 오크는 네 사람의 이름이 적힌 목패를 경기장에 안으로 던져넣었다.
….딸그락
단상에서 던져진 네 개의 목패가 광장이었던 투기장의 단단한 바닥에 떨어지고.
그 순간, 순식간에 달려든 기사의 검과 검투사의 방패가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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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억!
촤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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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아아아아아!!!!”
이변이고, 반전이다.
예상했던 대로 이어지는 전투에 수인 검투사의 목이 날아가는 장면을 기대하던 관중들은, 바닥에 미끄러지는 몸과 머리로 나뉜 기사의 모습에 가죽 공방 구역이 떠나갈 듯 함성을 질렀다.
까득!
“….염병. 지는 줄 알고 개 쫄았네.”
순간 저도 모르게 손에 쥐고 있던 짱돌을 부숴먹었음을 인지한 교수는 허탈하게 웃으며 부서진 돌조각을 털어내었다. 보르카가 뭔가 노리는 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에게도 제법 손에 땀을 쥐게 한 경기였다.
흥분한 관중이 내던진 과일 하나를 잡아낸 교수는 크게 한입 베어 물며 히죽 웃었다.
오러의 출력 자체는 좀 부족했지만 검술 하나는 확실한 기사였다. 중심이 단단하고, 검을 휘두르고 회수하는데 틈을 보이지 않는 기초가 단단한 기사.
방심을 하지 않으면서도 휘몰아치는 맹공에 보르카는 한없이 밀려나기만 했다. 방어는 빈틈없었지만 오러가 문제였다. 금속 방패가 검을 튕겨내지 못하고 장작처럼 깎여 나갔으니. 모서리가 다 깎여 나간 방패는 손등이나 가까스로 가릴 지경이었고, 방패가 사라진 자리는 너덜너덜해진 갑옷과 피투성이 팔이 대신했다.
결투가 아니라 가지고 노는 것에 가까운 모습에 교수가 슬그머니 돌을 쥔 손에 힘을 주던 찰나.
화악!
한없이 뒤로 물러나기만 하던 보르카가 어깨에 걸친 그물을 내던지고, 그런 그의 발악을 비웃듯 기사의 검에 튼튼한 그물이 잘려나가며….
툭-
데구르르.
어느 순간, 기사의 목이 떨어졌다.
형편없이 밀리기만 하던 검투사의 모습이라고는 볼 수 없는, 섬전과도 같은 출수였다.
극도로 카운터에 치중된 검술. 그 찰나의 틈을 만들어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 하는, 비열하다 싶을 정도의 전투 방식.
‘어쩐지 가는 길에 자꾸 뭘 주섬주섬 줍는다 싶더라니.’
보르카가 던진 그물은 매듭 사이에 작은 갈고리가 달린 포박용 그물이었다. 오러 유저 정도라면 단숨에 수십 조각을 내고 돌파할 수 있는, 그것을 노리고 고운 잿가루가 든 주머니를 잔뜩 매달아 놓은 그물.
보르카가 벗어 던진 옷을 북북 찢어버리길래 뭐하나 싶었던 교수는, 그 천 조각과 잿가루 주머니의 색이 같은 것을 보고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바람을 가르며 달려든 기사는 그물 따위의 저급한 수작에 코웃음 치며 검을 휘둘렀고, 안개처럼 그의 코와 눈으로 파고드는 잿가루에 잠시 틈을 보였다.
보르카는 이번 경기에서 그에게 허용된 유일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큰소리 칠만 한데? 저 녀석, 그냥 정면 대결로 싸워도 1대 1이면 할만하지 않아? 영기 인가 뭔가 하는 오러 비스무리한 거 썼잖아.]‘자기 입으로 그랬잖아. 검투사는 광대라고. 우승이 아니라, 저쪽을 자극해 고개를 들이밀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게 목표라고. 엔터테이너라 이거지.’
8년 동안 뭘 했는지는 모르지만, 관객을 어떻게 다루는지,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기가 막히게 연구한 것 같았다.
검광을 번뜩이는 기사와 허름한 검투사.
특별한 검술도, 거창한 동작도 없이 호흡이 흐트러지고 눈을 감은 상대의 목을 쳐내는 단순한 동작.
검광이 바위를 가르고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검격이 오가진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생생하고 누구나 저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할 수 있는 현실 그 자체의 검술. 그리하여 사람들은 저 자리에 서 있는 검투사에 자신의 모습을 쉽게 투영할 수 있었으며.
넝마가 된 팔로 상대의 수급을 들어 올리는 모습은, 누구나 열광할 수밖에 없는 언더독 그 자체였다.
기사를 죽인 것은 내가 요청한 것이었다. 마약쟁이나 섬기는 기사 따위 죽어 마땅하다…. 같은 의미는 아니고. 따로 생각해둔 게 있어서.
보르카와는 다른 방식으로 하우누만을 조금 움직여 볼 생각이었다.
“뭐, 지금은 구경이나 마저 하고.”
아삭!
무슨 과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입에 맞았다. 당황한 트롤이 일어나 주춤거리며 다가오는 가운데, 재빨리 기사의 갑옷 연결부를 끊어낸 보르카는 가장 넓은 가슴 플레이트를 방패 대신 들고는 트롤을 향해 달려들었다.
쿵-
“와아아아아아아아!!!!”
“베나드 팽! 베나드 팽! 베나드 팽!”
잠시 후, 거대한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환호성이 투기장을 가득 채웠다. 단순한 환호가 아닌, 최고의 경기를 보여준 검투사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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