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54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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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아아아-!”
“베나드 팽! 베나드 팽!”
“진짜 투사다웠다, 수인! 너는 전사가 맞다!”
“크흥! 내 아버지의 단단한 발바닥에 걸고 너는 쿤 타기즈의 영령을 기껍게 했다!”
“키이익! 반역자, 대혼란! 좋은 기회! 너, 끝내준다, 수인!”
환호성과 함께 관중석 너머로 손을 뻗는 사람들.
치열한 전투 끝에, 한쪽 눈에 깨진 갑옷 조각이 박히고 오금에 반 토막 난 검이 박힌 트롤은 항복을 외쳤다.
물론 제대로 훈련받은 트롤과 전투를 벌인 보르카도 멀쩡하지 않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미리 경기장 밖으로 나온 교수는 보르카를 기다렸고,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담담하게 걸어 나오던 보르카가 문이 닫히자마자 쓰러지는 것을 보고 재빨리 부축했다.
“으으윽. 고맙소.”
“어휴, 등신. 당장 두 시간 뒤에 다음 경기가 있는데 다치면 어쩌냐. 그러게 기사까지만 잡고 트롤은 나랑 태그 하자니까.”
“검투사는 피를 흘릴 때 가장 빛나는 법이 아니오.”
“너 잘났다 임마. 팔 끼울 거니까 이 악물어. 하나, 두울-!”
우그득!
“끄으으으으윽!”
교수가 셋을 셈과 동시에 보르카는 눈에서 벼락이 튀는 고통에 털을 곤두세웠다.
“셋. 천천히 돌려봐. 움직임이 좀 부자연스럽긴 한데…. 일단 응급처치는 된 것 같군. 트롤 손아귀에 붙잡히고도 어깨 하나만 나가다니. 너 운 좋다?”
“크으으으…. 노린 거요. 덩치에 비해 날랜 놈이라 눈을 찌르려면 그 수밖에 없었으니. 트롤은 먹이를 잡으면 곧장 머리부터 씹어먹는 습관이 있어서. 두 손으로 잡은 상대를 곧잘 들어 올리곤 하더군.”
“그런 건 어떻게 알았냐?”
“내 옆방에 있던 놈이 그렇게 갔거든. 셋 다. 좋은 친구들이었지.”
땀에 젖은 너덜너덜한 몸. 기진맥진한 목구멍에서 느껴지는 묘한 피 맛과 황동 투구의 제한된 시야.
보르카는 그가 검투사로 돌아왔음을. 이번에도 자신의 의지로 투구를 썼음을 느꼈다. 비릿한 쇠 냄새와 더운 입김의 습기가 가득 찬 감각. 생각하려 애쓰지 않아도 베나드 팽으로 살아가던 시절이 조용히 스며 나왔다.
교수는 맞춰진 어깨를 불편한 듯 움직여보는 보르카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총원 128명, 64팀. 우승까지 여섯 번만 이기면 되지만, 다시 말하면 3일간 제대로 부상을 회복할 시간도 없이 연전을 치러야 한다는 말이지. 나야 몸통이 반쯤 날아가도 다음 경기 시작할 때쯤이면 만전이지만. 넌 그렇지가 않잖아? 그렇게 부상 누적되면 네가 말하는 ‘제대로 된 경기’도 보여주지 못할걸? 다음 경기부터는 그냥 늑대인간 모습으로 싸우자. 검투 경기 좋아하는 놈들이면 칼보다 발톱에 찢기는 장면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싫소.”
보르카는 교수의 말을 대부분 존중했지만, 검투에 대한 것만큼은 자신에게도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그가 더 강한 늑대의 모습으로 싸우지 않는 것은 ‘숭고한 숲의 힘에 대한 존중’ 같은 거창한 의미가 있지 않았다.
그저 인간의 몸으로 싸우는 게 더 인기 있었으니까.
검투사의 경기는 목숨을 건 전투이지만 관객의 즐거움을 위한 무대이기도 하다.
검투 노예가 된 지 1년이 조금 넘어가던 어느 날, 힘겹게 승리를 쟁취한 그는 사람들의 눈빛에 담긴 기대를 읽고 말았다. 야성미 넘치는 늑대인간에 대한 환호 속에 드러난 음습한 기대. 저 대단한 야수가 더 대단한 검투사의 손에 목이 날아가는 그 날을 기대하는 눈빛을.
“….원형 경기장은 전장이자 무대요. 무대 위에서는 선역과 악역이 나뉘기 마련이고, 날카로운 발톱과 송곳니를 가진 야수는 아무리 좋은 경기를 보여도 악역이 더 어울리지. 그리고 이름 높은 악역은 가장 좋은 시기에 목이 따이기 마련이오.”
영원히 이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살아서 이곳을 나가야 했고, 패배한 검투사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은 관객이 그가 살기를 바라느냐, 죽기를 바라느냐 뿐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모습으로 싸우는 것이다. 인기를 얻기 위해. 누구보다 검투사다운 방식으로, 예정된 패배가 다가왔을 때 그가 다시 한번 도전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기대하게 만들기 위해.
그렇게 얻은 기회로 몇 번이고 다시 도전하여 저 정상에 오르기 위해.
결국 덧없는 짓이었지만, 그래도 베나드 팽은 그 이름과 명성 덕분에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죽음이 아니라 삶을 기대하는 검투사가 되는 것. 그게 보르카가 저 지옥 같은 투기장에서 8년이나 살아남은 비결이었다.
“….겨우 여섯 경기로 투기장 주인의 망토 끝자락이라도 밟으려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동원해야지. 그렇지 않소?”
“흠…. 결국 검투 대회에서는 인간의 형태로만 싸우시겠다?”
“그렇소.”
“인기 때문에?”
“음.”
“애들이 알아볼까 봐 그런 건 아니고?”
“….”
기습적인 질문에 침묵하는 보르카. 투구에 가려서 표정이 안 보였지만, 그 침묵만으로도 충분했다.
“에휴. 이놈이나 저놈이나 하나같이 복잡해서는. 그럼 앞으로도 인간 모습으로 싸우고, 계속 다치고 부러지겠다는 소린데….”
교수는 절뚝이는 보르카를 마차에 던져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좀 문제로군. 규정상 그날 경기가 모두 끝나기 전에 선수는 마차, 경기장 외에 다른 곳에 갈 수 없다고 하고. 어깨 그거, 늑대인간이니 일상 생활 정도는 괜찮겠지만 격한 전투를 벌이면 바로 빠져버릴걸?”
“어차피 다른 상대도 다 같은 조건이 아니오? 되려 우리가 부상이 더 적을 수도 있지.”
“염병할, 같은 조건 같은 소리 하네. 아까 그놈의 휘황찬란한 검투사 버전 풀 플레이트 메일을 보고도 감이 안 와? 야료가 있다고. 빽 없는 우리야 실격당하기 싫으면 마차에 머물러야 하지만, 빽 있는 놈들은 신전에 온천에 경락마사지에- 아주 오만 서비스를 다 받고 얼굴에 개기름이 번들번들해서 나온다는 데 내 성자 자리라도 걸 수 있다. 진짜 허름하고 다친 상태로 나오면 ‘로하람 개새끼-’ 라고 한마디 해주지.”
두 번째 경기를 보고 확신이 들었다. 그 우직하기 짝이 없는 오크가 명백한 규칙위반을 보고 인상만 찌푸리다니. 차라리 아예 몰랐으면 또 모르겠는데, 알고도 꾹꾹 눌러 참는 그 모습을 보니 오크의 입을 다물게 할 정도의 압박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 부족 전체의 이득이나 안위가 걸린 거래가 있었겠지. 지금의 하우누만 투기 대회는 명목만 전통이지, 사실상 하우누만의 여덟 개 세력과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하는 외부 세력의 대리전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아마 캐다 보면 이 경기에 얽혀있는 온갖 이권과 그걸 두고 벌어지는 모략이 고구마 줄기처럼 나오지 않을까? 대충 떠오르는 대로 막 뽑아보자면….
오크가 지배적인 현재 하우누만의 상황을 바꾸고 싶은 고블린이 인간의 손을 들어줬을 수도 있고.
제국 귀족세력을 쫓아내고 싶은 전통적인 초원 부족이 합심했을 수도 있고.
반항적인 초원 부족을 길들이고 싶은 제국 쪽에서 빌데란트 후작을 이용해 하우누만에 수작을 부리려 투기 대회를 이용할 수도 있고.
그 모든 이권을 위해 다른 세력과 손을 잡거나 은밀하게 방해할 수도 있으며- 이 모든 게 동시에 일어나고 있을 수도 있다.
세력만 해도 여덟 개. 국가 단위로 보면 제국과 초원 부족. 종족으로는 수인, 오크, 고블린, 인간. 상황으로 보면 갈 곳 없는 초원의 부족들과 자리를 내어주기 싫은 도시의 기득권층. 이렇게 복잡하게 얽혀있으니 재채기 한 번에 아수라장이 될 수도 있을 정도로 화약고 같은 도시란 말이지.
그 화약이 터지기 전에 알아서 정리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약속된 것이- 바로 이 하우누만 투기 대회고.
결국 우승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뒷배가 되는 세력의 압박, 뇌물 덕분에 온갖 지원을 빵빵하게 받은 상대와 전통 룰에 얽혀 맨손이나 허름한 장비만 사용하고 치료도 받지 못하는 꼬질꼬질한 우리 팀의 대결이 될 것이란 말이다.
“어때. 승패를 떠나서 기분이 좀 더럽지 않냐?”
“크흐으음….”
조용히 어깨를 주무르던 보르카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투기장의 생리에 익숙한 만큼 상상도 못 할 만큼 복잡한 뒷공작도 잘 알고 있는 보르카였다.
돈 몇 푼 걸린 경기에서도 밥에 독약을 타는 것은 예사요, 같은 팀 검투사를 매수하거나 경기에 나올 맹수를 말도 안 되는 놈으로 바꾸기도 하는데. 한 도시의 통치권을 걸고 국가, 종족 간 다툼이 벌어지는데 그 얼마나 복잡할 것인가?
그런 둘의 예상을 증명하듯, 두 사람의 마차에는 본 적 없는 짐이 두 개나 실려있었다. 2회전 승리 시 주어지는 것은 괜찮은 식사 한 끼 할 정도의 은화와 더 좋은 마차, 현직 용병들이 쓸법한 괜찮은 장비뿐. 마차에 실려있는 묵직한 가죽 자루와 화려한 상자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보르카는 발로 화려한 상자를 밀어내며 손을 뻗는 교수의 팔을 붙잡았다.
“손대지 않는 것이 좋겠소. 저런 물건은 받는 순간부터 얽히게 되지.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그들의 말이 되어버린단 말이오.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상대 진영의 경계를 사게 되니 말이오.”
“그으래? 그럼 더욱이 열어야지. 이렇게 눈알 빠지게 복잡한 상황을 풀어보려면 직접 거기 얽혀드는 수밖에 없거든.”
오히려 반갑다는 듯 주머니를 품에 안으며 턱짓으로 상자를 가리키는 교수. 그 모습에 보르카는 한숨을 내쉬며 밀어두었던 상자를 다시 끌어왔다. 이건 검투 외적인 문제고, 적어도 그의 대장은 그런 부분에 있어 무서울 정도로 밝은 사람이었다.
절그럭!
“어이구, 이게 다 뭐야. 은화에, 보석에…. 현물만 잔뜩 넣어놓은 것을 보니 고블린 부족에서 보낸 게 틀림없군. 어디 보자…. [당신의 훌륭한 전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대회는 3일이면 끝나지만 당신 같은 전사의 앞날은 끝없이 펼쳐져 있지 않나. 우리 ‘세 손가락’은 당신의 미래에 충분한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되어있다. 의심치 말라. 우리는 전사의 명예를 돈으로 살 수 없다는 말이 거짓임을 증명하며 살아왔다.]…. 지극히 고블린다운 편지로군. 그쪽은 뭐냐?”
“….대장의 말대로요. 빌데란트 후작가에서 보낸 상자로군. 제국 금화와 질 좋은 방패 두 개. 편지가 들어있소. 로드릭에서 범죄자인 내게 제국의 시민권을 주며, 빌데란트 후작가에 고용하고 싶다 하는군.”
“그 대가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경기를 져줄 것. 다른 부족의 투사를 만나면 이겨버리고, 그러다 후작가의 투사를 만나면 져달라고 하오. 추가로, 조건을 받아들이면 인연이 닿지 않았을 때의 불상사는 없던 일로 해주겠다는군.”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은 기사의 목숨값을 받아내겠다는 협박이지. 불합리한 경기 조건에 승부 조작, 협박이라. 불법 스포츠 도박의 정석이군. 이쪽도 마찬가지. 협조하면 고블린의 탐욕을 몸소 즐길 수 있게 해주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에게 손해를 입힌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 하네.”
불공정한 경기, 뇌물과 승부 조작, 협박. 도시의 통치권이 걸린 경기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 싶었다.
‘엄니발톱 부족이 마지막까지 투사 자리가 비어있던 이유도 아마 이런 비슷한 것이겠지. 내가 봤던 엄니발톱은 순수하게 전통과 명예를 중시하는 오크 부족이었으니까. 이 부족의 대전사로 들어가봤자 아무 지원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니까 다들 기피하게 된 거야.’
세력 간 대리전에 순수하게 투사들의 역량만 기대하는 진영이라니. 나 같아도 기피하겠다.
“아무튼, 15년 만에 아들딸 만나는데 걸레 짝이 된 아버지를 보여줄 수도 없으니, 널 어떻게 치료를 좀 받게 해야겠는데….”
내색은 안 하지만 계속 어깨가 불편한지 움찔거리는 보르카의 모습에 교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목으로 쓸만한 물건은 몇 개 보이지만 당장 몇 시간 뒤에 풀어야 하니 의미 없고. 그냥 여기서 나가버리면 이 선물을 전달한 놈들이 옳다구나, 하고 쪼르르 달려가 실격 선언을 해버릴 것이고.
“세력전. 세력전이라….”
교수가 한참 고민하고 있던 그때, 머리를 빡빡 민 소년 하나가 골목과 골목 사이를 돌아다니며 마차 위의 검투사들에게 뭔가를 나눠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 투사에게 혹시나 수작을 부리는 것을 막기 위해 오늘 일정이 끝날 때까지 외부인과 투사가 만날 수 없으니, 저 소년이 나눠주는 것도 검투사를 위해 준비된 물건이겠지.
“포션 냄새가 나는군. 투기장에서도 연전을 치르게 되면 종종 제공하곤 했지. 한시름 덜었소.”
“색이 맹물 같은데? 저런 건 외상에는 효과가 있어도 뼈나 관절 쪽에는 영….”
어, 잠깐만. 방금 뭔가 번뜩 떠올랐는데.
가만히 보니, 복식이 좀 다르긴 하지만 포션 소년의 옷이 좀 낯이 익은 느낌이 들었다.
옷 소매에 금실도 달려있고. 온갖 수작이 만연한 투기 대회에서 검투사들이 소년의 포션을 아무 의심 없이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 파르라니 깎은 머리. 저 순박한 눈망울에 하얀 옷? 혹시….?
어느덧 반대편 골목에 포션을 전해주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소년을 보며, 교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용히 두 손을 모았다.
“라투라.”
“음…. 아! 라투라, 로-하람! 검투사님 중에서도 로 하람을 모시는 분이 있으셨네요! 반갑습니다! 광명의 어린 자녀, 세드릭이라고 합니다!”
“오호라~”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어주는 소년 사제의 말에 교수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광명의 수련 사제로 보이는군요. 혹시, 교단의 사제가 이런 투기장의 일에 참여하는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외부에서 오신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역사적으로 대회에서 워낙 독을 탄 음료나 음식에 당한 검투사님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단에서 주최 측의 작은 ‘성의’를 받고 이렇게 봉사하고 있는 거예요. 광명의 사제는 저 하늘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가니, 저희가 로 하람의 이름을 걸고 건네는 물건을 다들 의심 없이 사용해 주시거든요.”
“아하…. 다른 교단도 많은데 광명 교단에게 지원을 요청하다니. 하우누만에서 교세가 제법 되는 모양입니다?”
“헤헤헤. 아무래도 이종족이 많은 도시이다 보니 신자 수는 적지만 그만큼 교세는 큰 편입니다. 초원에는 많은 사람이 살지만, 그들 대부분은 선조령 같은 삿된 이단의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들에게 광명의 뜻을 전파하기 위한 것도 있고, 또 거친 도시이다 보니 하우누만 교구는 제법 지원을 많이 받은 편입니다. 최근 들어 이상할 만큼 지원이 늘어난 것도 있구요.”
“흐음…. 그래요. 그렇습니까….”
교수는 투구의 안면 가리개 사이로 소년 사제의 순진무구한 눈을 보며 생각했다.
이종족이 많은 도시에 광명의 교구가 힘을 실어주는 것은 당연하다. 원래는 그들을 이교도라 부르며 탄압하는 게 광명의 일이었으니까. 초원 부족 사람들을 억누르는 방향이 제국의 입맛에도 맞았을 테니 자리를 잡는 데도 도움을 많이 줬을 것이고. 최근 지원이 늘고 이렇게 얼굴도장 찍으러 다니는 것은…. 대주교가 바뀐 정책, 이종족 친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뭐, 그런 자잘한 사정은 다 필요 없고, 제법 덩치가 있는 교구라는 말이렷다.
‘세력전이라. 괜찮네.’
계산을 마친 교수는 다음 골목으로 넘어가려던 사제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린 형제. 혹시…. 내 얼굴을 알지 않니?”
“그럴 리가요. 저는 하우누만에서 나고 자라서 바깥사람 중 아는 사람이….. 흐어어어억!”
슬슬 귀찮아졌는지 퉁명스러워지던 목소리는 투구를 벗은 그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븝, 으, 어…. 서…. 성자….님? 분명 교단에서 내려온 피의 성자님 초상화랑 똑같이 생기셨는데….”
“라투라. 광명의 은혜가 어린 성자님에게 함께하시길.”
투구를 벗은 교수가 인자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자, 소년은 차가운 돌바닥에 그대로 납작 엎드려버렸다. 진짜 성자였다. 최근 가는 곳마다 기적을 일으키며 로하람의 살아있는 대리인이라 불리는 피의 성자. 그런 고귀하신 분이 어째서 이런 야만의 투기장에?
“여, 영광이 함께하시길! 성자님께서 하우누만에는 어떤 일로 오셨는지…. 아니, 미리 교구에 방문해주셨다면 합당한 대우를 해드렸을 텐데!”
“하하하하. 대우라니. 도구에 불과한 내게 당치도 않은 소리지.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잠시, 귀 좀 대주겠니?”
교수는 눈이 질척한 돌바닥에서 차가운 기색 하나 없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소년의 귀에,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분의 뜻이 이곳을 가리키기에.”
“흐읍! 아, 예! 알겠습니다! 그, 그렇죠! 그분과 가장 가까운 분이시죠! 암요!”
GG에서 종교계 고위직이 되면 좋은 점 중 하나. 행동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당장 광명 교단에서 나보다 직위가 높은 사람은 노먼 대주교 하나밖에 없거든? 내가 ‘신이 여기 가라고 하셨더라-’ 하면 죄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누가 캐물으면 ‘어이, 나 성잔데. 너 나보다 로하람이랑 가깝냐?’ 한마디 해주면 사그라질 수밖에 없거든.
교수는 생에 처음으로 광명의 큰 뜻을 목격하여 감격에 찬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소년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긴히 이곳 교구의 주교에게 할 말이 있는데, 보다시피 검투사의 신분으로 투기 대회에 참여하여 교구에 방문하기가 어렵구나. 바쁘지 않다면 내 말을 좀 전해주겠니!”
“뭐, 뭐든지 시켜만 주시면 다 하겠습니다!”
“그래. 착하구나.”
교수가 허리를 숙여 소년의 눈물을 닦아주는 동안 보르카가 이해했다는 듯 앞으로 나와 어깨를 내밀었다. 아마 이 소년 사제에게 치료를 받으려고 이러는 줄 알겠지.
찰팍!
[어허. 아직 아냐. 뒤에 가 있어.] [음? 이거 아니오? 수행 사제라도 치유 마법 한 번 정도는 쓸 수 있을 터인데.] [쯧쯧쯧. 사내자식이 이렇게 통이 작아서야. 이 성자님 하는 거 잘 봐라.]메시지 마법으로 보르카에게 면박을 준 교수는 소년을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교구에 가서 내게 들은 모든 이야기와 함께 전하렴. 춥고 사나운 계절,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교단 차원에서 치유의 성사를 한번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교수는 치유의 성사를 몇 번이고 중얼거리는 어린 사제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
잠시 후.
포션 상자를 내팽개치고 달려간 사제가 골목으로 사라진 지 채 한 시간이 되기 전.
엄숙한 얼굴로 사제들을 이끌고 나타난 주교는 경건한 얼굴로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라투라. 항상 가장 낮은 곳, 가장 어두운 곳에 임하신다 들었습니다. 사제복 대신 험한 검투사의 옷을 입고 계신 것을 보니 그 말이 진실된 것 같아 감격스러운 한편 가슴이 아프군요.”
“라투라, 로 하람. 그분의 뜻이 있는 곳이 가장 편안한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준비는 어떻게 되는지요?”
내 물음에 주교는 직접 보라는 듯, 슬쩍 몸을 돌리며 손을 내밀었다.
척 척 척 척!
“찬양하라! 찬양하라!”
“라투라! 라투라!”
광명을 상징하는 해와 달, 별이 합쳐진 문양이 그려진 깃발이 골목을 빼곡하게 채우고, 신성한 임무에 참여하는 것에 고양된 사제들이 한 마음으로 입을 모아 연호하고 있었다.
“허어어….”
“인도하는 빛이라 불리는 성자님의 요청이거늘.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성자님께서 그분의 뜻을 수행하는 데만 전념하실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주교는 그 말을 끝으로 깊게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골목을 따라 나온 사제들은 차례로 마차 주변에 자리 잡은 다음, 각자의 신성력을 발하기 시작했다.
대충, 이런 식이었다.
“에헴! 끊임없는 환란 덕분에 다치고 병든 이들이 많습니다. 치료가 좀 필요할 것 같은데….”
라는 식으로 슬쩍 언질을 주면서 보르카의 어깨를 싸맨 붕대를 풀면-
화아아악!
“빛이 있으라!”
“말 하시길, 만년설을 녹이는 봄날처럼 따스하리라!”
사제들은 혀로 맛이 느껴질 만큼 짙은 신성주문을 퍼부어댔고,
“유난히 날이 추운데 눈까지 오다니. 혹여 매서운 바람에 슬픈 눈을 감는 이가 없진 않을지….”
하며 슬쩍 드러난 팔을 쓸어 보이면,
화르르륵!
“이단의 공격을 경계하라!”
“악신의 주구, 뮤테이션 블러드가 인류의 패망을 노리고 있습니다!”
성기사들이 끌고 온 이단 화형용 형틀에 불을 붙여 순식간에 주변을 훈훈하게 만들었으며.
“지친 이들에게 마음의 평화와 용기가 필요할 듯한데….”
우르르르!
뻐근한 목을 풀며 중얼거린 소리에 교단의 성가대가 몰려와 축복이 담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회 주최 측 고블린 몇이 다가와 주교에게 항의했지만 주교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춥고 병든 이를 위해 치유의 은사를 펼치는 것뿐이오. 마침 거기에 저 마차가 있었을 뿐.”
“시민들에게 이단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형틀에 불을 밝힌 것뿐이오. 때마침 저 자리에 마차가 있었을 뿐.”
“종교적 행사일 뿐, 어떤 다른 의미도 없소이다.”
그렇게 철벽같은 보호 속에 치유와 축복, 훈훈한 온기를 온몸으로 받아 어깨는 물론이요, 갓 태어났을 때보다 더 뽀송뽀송한 피부가 되어버린 교수는 딱딱하게 굳은 보르카에게 편히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당연히, 평생 거친 삶을 살아온 늑대인간은 이런 극진한 대접에 더욱 굳어버릴 뿐이었다.
“이게 다 뭐요?”
“뭐긴. 세력전이라며. 가만 생각해보니까 허접한 놈들이 개수작 부리는 꼴이 좀 그렇더라고? 어느 정도 선을 지키면 봐줬을 텐데, 다친 사람 제대로 치료할 수도 없게 하는 것은 선을 넘었지. 몸으로 먹고사는 검투사한테 후유증이 얼마나 무서운데.”
신전 못 가게 하길래 신전을 통째로 불러왔다. 새끼들이, 사람 봐가면서 깝죽거려야지. 지금쯤 돈 처먹이고 검투사들 빼낸 세력은 텅 빈 신전을 보며 뭔 일인가 싶어 하지 않을까.
‘딱히 숨길 생각도 없었고. 교수라는 이름을 썼으니 시간이 지나면 광명의 신자 중에서 분명 알아보는 사람이 나올 테니, 밝히는 데 부담도 없지.’
아쉬운 점은 피의 성자님 명성이 좀 대단한 덕분에 다음 경기부터 우리 쪽 배당이 많이 낮아지는 것이다. 루실라가 많이 아쉬워하겠군. 1, 2경기 때 우리 쪽에 전 재산 때려 박아서 짭짤하게 벌었을 텐데.
“어이, 마부! 출발합시다! 이제 한 시간도 안 남았어!”
“예, 예! 가, 가겠습니다, 성자님!”
졸지에 사제와 성기사의 축복 세례를 받아 10년은 더 젊어 보이는 마부는 그 인생에 다시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마차를 몰았다. 공짜 치료와 축복에 몰려드는 시민들을 밀어내며 교수와 광명교단 무리는 천천히 다음 경기 장소를 향해 이동했다.
온갖 세력이 얽힌 하우누만 투기 대회에 성자 교수와 광명 교단이 공식적으로 발을 들이밀었음을 나타내는 행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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