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56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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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으으으…. 머리야. 당장 경기 나가는 사람한테 무슨 술을 그렇게 먹이냐. 하이드, 우린 재생력은 빵빵한데 왜 숙취는 못 이기지?”
[몸이 자라는 거랑 간이 일하는 건 달라서 그런 게 아닐까? 방법이 잘못 됐을 수도 있지. 술을 뒤지게 마신 다음, 알콜에 쩔은 간을 뽑아버리고 새 간을 만들면 문자 그대로 새것처럼 활발하게 알콜을 분해하지 않을까?]“오…. 일리 있어. 한번 뽑아볼까.”
교수는 셔츠를 걷어 근육이 꽉찬 옆구리를 한번 내려봤다가 다시 시선을 거뒀다. 뽑는 건 문제가 아닌데, 방 치우러 왔다가 방금 뽑힌 생간을 봐야할 여급은 무슨 죄란 말인가.
[그것도 그렇고. 술보다는 어제 미친 척 목구멍에 들이부은 독주가 유력한 후보가 아닐까?]“독주? 어제 독한 술 없었는데.”
[그거 말고. 진짜 독탄 술.]“어으으으….. 아, 그렇지. 그런게 있었지?”
망치로 두들기듯 어지러운 머릿속에 차례로 지난 밤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호쾌하게 투기장을 다 박살 내며 3차 예선에 승리했던 것.
돌아와보니 온갖 금은보화에 최고급 가죽, 포션따위를 잔뜩 사온 루실라가 어디 만화에 나오는 졸부 귀족 영애처럼 새끼손가락을 치켜들고 웃으며 원하는 거 다~ 사주겠다고 공표했던 것.
예선 통과 기념으로 저녁 식사와 함께 술 한잔하는데 보르카가 술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말리고, 그러고나서….
“….내가 그걸 왜 마셨더라?”
[1층 구석에 신전 향 냄새 풀풀 나는 덩치 둘이 술 마시고 있는 거 확인하고, 좋은 술에 독탄 놈들 엿먹이겠다고 그대로 원샷 했잖아.]“아….”
맞다. 그러고 나서 피를 왈칵 토하고, 아닌 척 주변에서 술 마시던 손님의 절반이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정화 주문을 퍼부어댔지.
술이랑 독기운에 취해서 자는데 밖에서 뭐가 번쩍번쩍하고 박살나는 소리를 잠결에 듣긴 한 것 같았다.
“참…. 그렇게 대놓고 신전 관계자요~ 하고 티를 냈는데도 그런 허접한 수작을 부리다니. 독이 뭐냐, 독이.”
[허접하진 않았을걸? 뮤트 감염인자에 완전히 적응한 우리 몸은 세포 단위로 화학 저항성이 높으니까. 아침까지 어질어질 한 것을 보면 보통 독은 아니란 말이지.]“으으음…. 잘 됐네. 그런 거 쓸 정도로 잘난 놈들이 성자 암살기도로 줄줄이 잡혀갔을 테니까. 어우, 속아파. 나가서 밥이라도 좀 먹어야지.”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며 내려가니 아침부터 왁자지껄한 여관 식당에 다른 일행도 다 모여있었다.
하루사이에 여관 1층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북적이고, 카운터 위에는 예선을 이기고 올라온 여덟 팀의 소속과 이름이 게시되어 있었으며, 사람들은 경기 내용을 떠들어대며 소소하게 내기를 하고 있었다.
흘끗거리는 시선들 속에 손을 흔드는 노툼이 보였다.
“어이. 좋은 아침.”
“그웍. 교수는 좋아 보이지 않는다.”
“으으음…. 그렇지. 술을 많이 먹긴 했나 봐. 그런 멍청한 짓을 하다니.”
“교수는 머리가 좋다. 너무 좋아서 가끔 사용하지 않고 쉬어줘도 되는 것 같다. 그렇게 오우거도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할 정도로 멍청한 짓을 주기적으로 하는걸 보면.”
“우문현답이로군.”
“그우우. 밥 먹어라.”
노툼은 막 시켰는지 따끈한 칠면조 뒷다리를 통째로 뜯어서 건넸고, 그걸 넙죽 받아먹는 교수를 보던 여관 주인의 얼굴이 다시 한번 울상이 됐다. 자세히보니 칠면조 그릇 아래에 같은 접시가 네 개나 더 있었다.
“나머지는 다 어디갔냐?”
“발정….그우우. 빨간머리 구혼녀, 마법사 둘 잔다. 늑대인간은 나갔다. 엘프는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며 나갔다. 노툼 여기서 할 일 없다. 쓸모없는 것 같아서 좀 슬프다.”
“허어어…. 무슨 그런 소릴? 일행 중에 나랑 제일 오래 알고 지낸 게 너잖아. 그리고 하는 일이 왜 없어. 이렇게 나랑 같이 밥 먹어주고 있으면서. 혼자 밥 먹는 게 얼마나 서러운지 알아? 혼자 낡은 소파에 퍼질러서 멍하니 칼로리바 같은 걸 씹어대고 있으면 ‘씨바 죽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난다고.”
“그우우. 그럼 좋다. 밥 계속 먹는다.”
그 뒤로는 말없이 먹기만 했다. 배가 고프기도 했고, 주방장의 솜씨가 제법 훌륭하기도 했고. 슬슬 여관주인의 근심이 무섭게 먹어대는 트롤과 흉터투성이 거한에 대한 두려움을 압도할 때쯤, 찬 바람이 휭 하고 들어오며 이드라실이 들어왔다.
“어이. 어디 갔다오냐?”
“필요한 식사는 섭취했기에. 다들 지난 밤의 열기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듯하여 잠시 취미를 즐기다 왔습니다.”
“취미? 아, 너 분재 같은 거 만들고 그랬었지? 하긴. 하우누만은 건조한 초원에 인접해있으니 수령이 10년이 넘은 자연산 분재 같은 것도 있을 수 있겠구나. 그런데 지금은 겨울인데? 따로 그런 걸 가꾸는 집이 있나?”
내가 3 월드 세계관에 식물원 같은 것도 있었나, 하는 생각과 함께 쳐다보자 이드라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여기. 지난 경기에서 살아남은 여덟 팀의 명단과 소속, 대략적인 인상착의와 전투기록 등입니다.”
“….취미?”
“예. 즐겁고 보람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생긋 웃는 엘프와 그녀가 내민 종이를 번갈아 봤다. 언뜻 봐도 도시에 떠도는 소문과는 질적으로 다른 도박장에서 웃돈을 얹어주면 슬쩍 보여줄까 말까 한 고급 자료.
“그…. 고맙긴 한데, 이걸…. 재미로?”
“예. 설명하긴 조금 난해합니다만. 숲을 나와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 기록하고 정리하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필요하지 않은 정보도 기록하게 되더군요. 거기에 내가 알아낸 것을 누군가에게 전달해 이롭게 하는 일이 대단히 보람있게 느껴졌습니다. 워낙 큰일을 많이 겪다 보니 약간의 긴장감, 추격전은 기꺼운 자극으로 느껴지더군요. 후후.”
“어….그…. 내가, 내가 미안하다, 이드라실….”
“그우우…. 표현할 말, 못 찾는다….”
노툼도, 교수도 숲의 가지이자 가장 평화로운 종족이라는 엘프가 적의 정보를 염탐하고, 또 그들 사이로 숨어들고 쫓기는 것을 ‘기꺼운 자극’으로 느낄 만큼 애가 망가졌다는 것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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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kass : 저거 전직 끝났다는 소리임. 농담 아니라 진짜야. 시스템 있었으면 [동료 이드라실이 ‘타락한 스토킹 매니아 엘프’ 로 전직했습니다!] 같은 게 튀어나왔을걸.
– 노루Drug해요 : 애를 아주 망쳐놨네.
– 스피드 웨건 : 특성만 보면 꽤 괜찮은 동료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지만…. 어쩐지 신시아가 학교에서 다소 폭력적인 성향을 보인다고 하더니 왜 그런지 알 것 같네요.
– 간장게이바 : 넌 애 생기면 아이한테 올바르고 선한 가치관이 생기기 전에는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라. 박교수가 옮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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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만큼은, 아무리 말 잘하는 나라도 반박할 수 없었다.
급하게 뛰어다니며 기록한 듯 여기저기 휘갈겨쓴 이드라실의 글에서 집착에 가까운 집요함이 느껴졌으니까.
“이드라실….?”
“예. 교수.”
“나중에 그….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세나디스라고 있거든? 교단에 그…. 이런 일을 좀 전문적으로 하는 여잔데….”
“이런 일이라면, 제 취미 ‘비 협조적 정보 취득 및 공유’를 말씀하십니까?”
“어. 그…. 다음에 소개해 줄게. 기왕 하는 거 더 들키지 않는 법이라거나, 쉽게 내밀한 얘기를 털어놓게 한다거나….”
“그런 일의 전문가라면, 부탁드리겠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군요.”
숲에서 나와 이렇게까지 눈을 빛내는 이드라실을 처음 본 교수는 그만 그 순진무구한 얼굴에서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어쩌겠어. 이미 저렇게 된 것을. 엘프가 말린다고 들어먹을 리도 없으니 어디서 객사하지 않게 잘 가르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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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것은 충격적인 것이고.
어쨌든 이드라실이 취미 삼아 가져온 정보는 대단히 유익했다.
엄니발톱 –
[베나드 팽 / 인간 교수] 팀. 나머지 7팀 전부 탈락.붉은 도끼 –
[마시에타 타기즈 / 군디라 타기즈] 팀. [타쿨라 타기즈 / 가루다 부] 팀.쿤 타기즈의 적통답게 도끼를 주력으로 하는 강력한 오크. 타쿨라 타기즈의 배필 ‘가루다 부’의 경우 외부에서 유입된 오크임에도 주술사로서 대단한 존경을 받는다고 함.
빌데란트 후작가 – [길리안 라이너스 / 퓨르 네이시스] 8부족의 자리를 차지하게 만들어준 기사. 작년 경기에서 칼과 방패, 갑옷을 동시에 갈라버리는 대단한 오러를 선보인 바 있음. 제국 검가의 검술을 사용한다고 함.
세 손가락(고블린) – 한 팀이 본선에 진출했지만, 지난밤 이단으로 몰려 교단에 끌려감. 투샨, 마르카 팀 부전승.
초원 송곳니(오크) –
[아달카나 / 겔마우라] 팀.창을 던지면 도시의 끝에서 반대쪽 성벽을 넘기는 것으로 유명한 부족답게 투창수 둘로 이루어진 팀이 본선에 진출. 사람들은 여섯 개만 가지고 들어가는 창의 개수가 그들의 약점이라 평가하지만 지난 세 경기 동안 세 개 이상 창을 쓴 적이 없음.
갈색 수염(오크 + 유랑 수인, 인간 부족) –
[세니아 소드 / 데피스 툴] 팀. [타히디 부르한 / 페이드 파카] 팀.초원의 여러 부족과 교류가 잦은 갈색 수염 부족답게 올해 새 터전을 찾아 몰려온 유목민 중 대부분이 갈색 수염 소속으로 등록함.
추리고 추린 강자들만 뽑은 덕분에 예상과 달리 두 팀이나 본선에 진출.
열린 갈비뼈(고블린 + 투기장 노예) –
[투샨 달룬 / 마르카 달룬] 팀.하우누만 투기장의 간판 검투사 중 하나인 늑대 수인 남매. 수인 특유의 야성과 알 수 없는 힘으로 수년간 투기장에서 살아남은 전통의 강자.
“켁.”
본선에 진출한 팀 답게 이름부터 눈에 확 띄는 놈들이 몇 보였다. 쿤 타기즈의 적통인 오크들도 그렇고, 빌데란트 후작쪽은 볼 것도 없이 마스터급 기사들일 테고, 별별 놈들이 다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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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장게이바 : 왜 저분이 여기 계시냐.
– Jokass : 이름은 들어 본 적은 없는데, 소드면…. 그거지?
– takealook : 그거지. 저렇게 특이한 성이 그쪽 말고 또 있겠냐. 아르갈리안 소드. 그집 딸인가 본데?
– professor : 그러니까 여포랑 항우를 합쳐놓은 것 같은 괴물 아저씨 딸이 왜 유목민 부족 대표로 나오냐고.
– 노루Drug해요 : 세계 최강은 자식 농사도 최강답게 호쾌하게 지었나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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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갈리안 소드. 지금쯤 로드릭 서부 전선에서 몸을 풀고 계실 세계 최강의 검사.
애초에 시스템이 ‘얘가 칼질로는 최강이야.’ 라고 이름에 못을 박아 두신 만큼, 제국의 검성도 두, 세수는 접는 공인 월드 최강 히어로 유닛이다.
최강답게 가는 곳마다 따라붙는 여인도 한 트럭이고, 오는 여자 안 막는 그의 호쾌한 사상 덕분에 전 세계에 두루 자식을 가지고 계신 이 시대의 진정한 상남자. 천류제를 줘팬 유일한 NPC로도 유명하신 그분.
세니아 소드라는 이름의 유목민 대표 전사가 있는 걸 보면 언젠가 초원에도 방문해서 부지런히 인연을 만들어 두셨나 본데, 덕분에 나는 골치가 좀 아파졌다.
“다음 경기냐?”
“다음 경깁니다.”
“에라이. 행운 끝나자마자 재수가 옴 붙었군.”
아르갈리안 소드가 자식들 다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유명하지만…. 자식들 이름은 몰라도 칼은 직접 쥐여 주는 게 그 아저씨 스타일이라. 유전자의 반의 반만 물려받았어도 무시무시한 검사로 성장했을 게 틀림없었다.
“보르카 녀석. 고생 좀 하겠군.”
“….그웍? 강한 상대, 강한 교수가 상대하지 않나?”
“나 로드릭 돌아가면 그 아저씨랑 같은 전선에 서야 하거든? 괜히 딸애 팼다는 소문이라도 나서 가자마자 썰리면 어떡해.”
“그럼…. 늑대는?”
“걔야 뭐. 같은 중년 아버지끼리 잘 말해보라고 해야지. 보르카가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사연을 풀면서 반드시 이겨야만 했던 이유를 구구절절 늘어놓으면 살려는 주지 않을까? 아마?”
“그우어. 우우…. 교수. 교수다. 우우.”
오전 열 시. 앞으로 두 시간 후에 본선 첫 번째 경기가 있는 것을 확인한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관 밖에는 투기장에서 보낸 으리으리한 사두마차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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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애앵!
“오오오오! 맞았다! 제대로 들어갔어!”
“아냐! 늑대인간이 뚫었어! 팔을 내주고 파고들었다고!”
우그득!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검광 사이로 바늘 같은 빈틈을 꿰뚫은 짧은 검이 찔러 들어가고. 당황한 상대의 복무에 방패가 틀어박히며 경기의 승패가 결정되었다.
“승자…. 베나드 팽, 교수 팀!”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어우, 지쳐. 이제야 끝났네.”
먼저 쓰러진 커다란 남자를 깔고 앉아 구경하던 교수는 간신히 승리를 쟁취한 보르카를 보며 몸을 일으켰다.
온갖 주술 문신으로 몸을 뒤덮은 키 큰 여인과 비정상적으로 어깨가 넓은 남자.
가벼운 마음으로 상대하던 교수는 의외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툴이라는 남자는 벽처럼 보일 정도로 커다란 금속 방패 두 개를, 세니아 소드는 얇고 끝이 살짝 휜 곡도 같은 검을 사용했는데, 연계가 보통이 아니었다.
[특이한 주술이었지. 방패를 때릴 때마다 관람석의 유목민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으니까.]‘방패랑 본신의 주술을 어떻게 연결해놓은 모양이야. 부족 전체의 사활을 걸었다는 걸 저렇게 몸소 표현할 줄은 몰랐지.’
좀 많이 당황스러웠다. 남자 쪽 근력도, 방패 다루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라 뮤트 박살 내듯 진심으로 후려갈겨야 방어를 뚫을 수 있었는데, 그렇게 치면 쓰러지라는 남자는 안 쓰러지고 관중석에 부족민들만 우수수 쓰러졌다.
경기가 끝나고 이쪽과 할 얘기가 있는데, 부족원 전부를 중환자로 만들어버려서야 얘기가 진행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보르카와 함께 소리 없이 날아드는 곡도를 몸으로 받아가며 어거지로 두 남녀를 때어 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은 뭐. 벽과 함께 뭉개버리겠다는 듯 다가오는 남자를 방패째로 껴안아서 수플랙스를 꽂아버리고, 보르카는 보르카 나름대로 분투해서 이기고.
정말 연계가 그림처럼 완벽한 두 남녀였기 때문에 완력으로 무식하게 이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기술적으로는 교수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상대였다.
[교단 무투술 연습 열심히 해라. 매x릭스 마냥 프로그램이 뇌 속에 경험을 직접 꽂아줬는데, 못쓴다는 게 말이 돼?]‘손목에 회전을 넣어 주먹을 꽂아넣은 다음 그 반탄력으로 허리를 돌리며 반대 손을 뻗는다. 글로는 그럴듯한데, 진짜 몸을 움직이는 건 다르잖아? 머리는 아는데 몸은 모르는 상황이라고.’
[그게 네 착각이라니까? 일반 플레이어였으면 그랬겠지. 그런데 너는 스킬을 이미 익힌 상태에서 게임 속 주민과 다름없는 몸이 됐다고. 대가리뿐만 아니라 네 몸에도 무투술이 스며들었단 말이다. 봐봐! 난 되잖아? 내가 되는데 넌 왜 안되냐? 마인드의 문제라니까, 마인드! 남들 수십 년은 수련해야 할 무술이 공짜로 들어왔는데 쓰질 못한다니!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야!]교수는 의식 공간에서 빛살처럼 빠른 속도로 허공을 연타하는 하이드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신성력만 없지 기억에 각인된 스킬북, [광명권격]과 정확히 같은 동작을 물 흐르듯 부드럽게 구사하는 하이드. 확실히 특작대 시절 겉핥기로 배웠던 근접 박투술과 신체 스팩만으로 적을 상대할 시기는 지났다는 것이 피부에 체감되는 중 이었다. 당장 에데오르나와 싸웠을 때도 전투 기술에서는 내쪽이 한참 밀렸으며, 심지어 변두리 무투대회 8강전에서 만난 유목민 전사보다도 기술에서 밀리고 있었으니.
[몸만 모르는 상황이라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거 아냐? 잠깐 시간 내서 나랑 교대해! 내가 직접 몸에 새겨줄 테니까!]‘음…. 다음에. 지금은 이것부터 해결하고.’
교수는 그들이 들어온 입구가 아닌 반대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쓰러진 상대편 남녀의 들것이 향한 곳. 아마 지금쯤 이제 우린 어떡하나…. 하고 초상집 같은 분위기일 테지.
지금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말리는 고블린들을 부드러운 협박으로 치우고 들어가자 정신 잃은 세니아 소드의 머리를 쓸어넘기는 늙은 여인과 여기저기 널브러진 사람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불안과 경계가 가득 담긴 눈빛. 그들은 약육강식의 초원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기에 패자에 대한 모욕도 승자의 권리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소란스러운 고블린들을 밀치고 강제로 문을 여는 무시무시한 전사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각오를 마친 뒤였다. 이미 갈 곳을 잃고, 부족의 전사와 주술사들도 대부분 무력해진 상황이며 부족원들을 먹여 살리느라 재산도 대부분 잃은 그들이었다. 듣기로 대단한 뒷배를 가지고 있다는 저 흉터투성이 전사가 고된 전투의 화풀이를 하겠다면 그냥 당할 수밖에 없는 게 그들의 처지였던 것이다.
아직 핏자국과 땀이 흥건한 얼굴로 품평하듯 부족 사람들을 둘러보는 전사. 그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세니아를 막아선 여인에게 손을 뻗는 순간 비극을 직감하고 눈을 질끈 감는 이도 있었다.
터억!
“아이고오~ 반갑습니다 어머님! 따님 칼솜씨가 참 야무진 게, 정말 칼에 맞는 제가 다 흐뭇했지 뭡니까? 아, 저는 그쪽 부군, 아르갈리안 소드님과…. 어…. 직장 동료 비슷한 사람입니다. 아르갈리안 님이 대부분 국가의 명예 귀족이자 용사 직위를 가지고 계신 것 아시죠? 저도 용삽니다, 같은 용사. 하하하하. 용사 회의 때 먼발치에서 잠~시 뵀지요. 헌앙하신 아르갈리안 님을 닮아서 그런가, 따님도 참 훌륭하게 자라셨습니다. 핫핫핫핫!”
그래서, 듬직한 데피스를 집채만 한 금속 방패와 함께 메다꽂은 저 무시무시한 전사가 고블린처럼 수다를 떨며 늙은 여인의 손을 마구 흔들었을 때는 그들이 모르는 새로운 방식의 모욕법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 음…. 좋게 봐줘서 감사하네만…. 세니아는 이미 오래전부터 같이 손발을 맞춰온 데피스와 약혼한 사이라 자네에게 줄 수는….”
“하하하하하하하! 누가 초원 사람 아니랄까 봐 생각이 야생마처럼 빨리 달리십니다! 그런게 아니라, 마침 제가 내륙에 주인 없는 기름진 땅이 잔-뜩 생긴 곳을 알고 있는데. 이렇게 인연이 있는 아르갈리안 님의 식솔들이 갈 곳이 없어 고충을 겪고 있다고 하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지 뭡니까? 와하하하하하하하!”
교수의 입에서 로드릭의 빈 땅에 대한 이야기가 청산 유수처럼 흘러나왔고, 신음을 흘리며 경계 어린 눈으로 그를 보던 부족원들의 눈에 어느새 희망이 어리기 시작했다.
“어떻습니까? 내륙 사람들은 땅을 사고, 팔고, 하사하기도 하니 좋은 기회가 아닙니까? 물론 대가 없는 선물은 없으니 그 모든 땅을 비워버린 존재들의 피로 대가를 치러야겠지만, 그 아르갈리안 소드님을 비롯한 각지의 영웅들이 모두 그곳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힘들겠지만 이겨낼 수는 없는 시련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건…. 참으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구려….”
교수의 화려한 언변에 정신이 쏙 빠진 여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거듭한 끝에 고개를 반쯤 끄덕였다.
“딸애와…. 이야기해 보겠소이다. 평생의 대사이기에 신중히 결정해야 하지만, 부족 모두를 위한 땅이 지참금이라면…. 으으음….”
“예? 예, 뭐. 그럼 로드릭으로 소식을 보내 놓겠습니다. 저도 제국쪽 일이 끝나면 로드릭으로 돌아갈 테니 자리 잡는데 필요한 도움은 그때 가서 추가로 드리지요.”
“그래. 몸 조심히 돌아오게.”
“….?”
교수는 뭔가 대화가 잘 맞물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초원의 유랑 부족을 끌어들였다는 사실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유랑 부족은 회색 발바닥 오크 영토에 다 모여있다고 했으니 이들의 소문은 오늘 해가 지기도 전에 그들 사이에 퍼지게 되겠지. 로드릭 최전선은 우르르 몰려온 배고프고 의지에 찬 기마병들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나머지 중년 여인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간과해버렸다. 적으로 혈전을 벌인 전사가 그 상대의 어미를 찾아와 상대를 칭찬하고, 부족의 고민을 해결해주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선물을 가져오는 것이 초원 부족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아르갈리안 님과 알고 있으니 부외자라 볼 수도 없고, 바위를 으스러뜨릴 만큼 강한 힘에 내륙 사람에게도 존경받는 전사라…. 듬직하고, 나쁘지 않구나. 음. 훌륭해.”
본의 아니게 누군가의 약혼녀를 강탈하고 사윗감으로 내정된 교수였지만, 모든 게 잘 풀렸다는 생각에 그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하고 나가버린 교수였다.
물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교수를 훑어보던 여인을 본 대화방 사람들이 난리를 쳤지만, 뒤늦게 채팅을 본 교수가 달려갔을 때는 하루라도 빨리가서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유랑 부족 사람들이 모두 떠난 뒤였다.
– 스피드 웨건 : 재미있어 보이네.
다음 경기 지역으로 가는 마차에서 부르르 떠는 교수의 모습에 화형대의 불만 활활 타오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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