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58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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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모시는 것이 빛의 신이라면 황상은 현세의 신이라. 이것은 그분의 적통, 2황자께서 보내는 뜻을 대필한 편지이니. 그러니 그대가 모시는 분의 말씀과 같이 겸허히 받아들일 것을 명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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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저 읽을 필요가 있나?”
“뭐라 했는지 정도는 파악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어디 보자…. 제국은 광명 교단이 제국 영토를 소유하는 행위를 두고 볼 생각이 없다. 하지만 불온한 성자의 목을 베어 제국의 태양과도 같은 위명에 작은 명예를 더할 생각도 없다.”
“태생이 무신론자인 마법사도 그 정도로 성직자를 모욕하진 않네만.”
“와. 귀족 화법에서 저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걸 모조리 가져온 것 같아요.”
거만함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내용에 일행이 질색하는 사이 교수는 편지를 계속 읽어나갔다.
“집단에 있어 적을 만드는 것은 뒷걸음질이요, 제국을 적대하는 것은 나락을 향해 전력질주하는 것과 같으니. 광명이 부득이 제국의 행사를 침범하였으나 감히 2황자님의 말씀을 전하니, 이것도 인연이니 서로 발을 맞추어 나갈 기회가 된다 말씀하심이라. 허상에 빠져 행복을 노래하는 이들을 탓할 생각은 없으나 그 망상에 빠진 머릿속에도 제국의 지엄함은 단단히 새겨둬야 할 것이다.”
“와…. 뭐 저런….”
“광명이 세를 넓히길 바란다면 작은 야만의 변방도시가 아니라 제국 수도에 뿌리를 박고 나아가는 것이 그 빛을 더하는 일인 즉. 빛의 자손들이 2황자 님의 온정을 마다치 않는다면 그분께서 제위에 오르셨을 때 외면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셨다. 황자님은 패왕의 자질을 지니신 분이니 향후 교단의 행사에서도 큰 도움이 되실 것이며, 특히 피의 성자의 위명에 감탄하여 혹 광명의 품이 그대를 품기에 부족하다 여겨지면 제국의 품으로 넘어오는 것이 어떤지…. 허허이 참, 속이 더부룩해서 다 못 읽겠네. 이 편지는 없는 걸로 쳐도 될 것 같습니다만.”
“동의하네. 신실한 종교인이라 소문난 자네에게 이런 모욕적인 편지라니. 편지가 아니라 결투장으로 봐도 되겠군. 물론 제국에서 광명 교단의 이름이 조금 약한 면모가 있긴 하지. 교세가 동부에 비해 한참 약하기도 하고, 또 나이 많은 귀족들은 70년 전 ‘신성 노동자’, ‘신성 용병’으로 불릴 정도로 몰락했던 광명 교단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도 많으니까. 하지만 저건…. 숫제 모든 광명의 교인을 망상증 환자로 치부하는 수준이로군.”
“늬들이 병신같은 동네 신을 믿는 건 상관없는데, 그 멍청한 대가리 속에 제-국. 황-제. 네 글자는 단단히 박아둬라. 너네 신 병신같은 거 아니까 버리고 제국에 넘어오면 받아주겠다…. 캬, 신성모독에 제국 올려치기, 자체적 파문 권유라. 병상에 누워있던 신자도 벌떡 일어나 횃불을 휘두르게 할 명필이로군.”
혹여나 밖에 있는 교단 사람들이 보기 전에 재빨리 편지를 태워버린 교수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둘 중에 하날 겁니다. 2황자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귀족들도 죄다 개 병신 순무 대가리라 정치적 화법을 1도 모르는 멍청이라는 것. 그게 아니면, 일부러 교단을 도발하는 동시에 교단 대표인 나를 대회 결승전으로 끌어올려야 할 이유가 있는 것.”
“후자로군.”
“후자겠네요.”
“모자란 2 황자라도, 아니 모자라서 오히려 더 이용하려는 귀족들이 많이 몰려들었겠지. 그들 전부가 이딴 편지나 보낼 정도로 멍청이라 보는 것은 힘들 것 같군.”
“그웍. 내가 봐도 이상한 편지다.”
동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하는 말에 교수도 동의했다. 상당히 복잡한 하우누만 흡수 정책을 기획하면서 이딴 병신같은 편지나 보내고 있을 리 없으니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어디 보자. 신의 뜻을 온몸을 바쳐 수행하는 성자. 지금 외부에 드러난 내 이미지는 그렇지. 독실하다 못해 광신도에 가까운 로 하람 신도의 정점. 만약 이미지 그대로의 성자였다면 이 편지를 받자마자 당장 후작가로 달려갔을 수도 있을 거야. 죄다 죽여버리겠다고 날뛰면서.’
[그렇겠지. 당연히 내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고 있던 하우누만 교구 성기사들도 우르르 몰려들 것이고. 준결승에서 하지 못했던 전투를 후작가 영역에서 재현하게 됐겠군. 그들 상상 속에서는 말이지.]‘그래. 그들이 생각하기로는. 그럼 그걸 왜 노렸을까? 빌데란트 후작이 교단 손에 죽었으면 해서? 말도 안 되고. 우리가 실격하길 원해서? 그럼 후작가 기사들이 기권한 게 말이 안 되고.’
탁. 탁. 탁. 탁.
고민이 깊어지며 사고가 점점 의식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내기엔 재료가, 정보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적이 아니라 나의 행동. 우리 쪽에서, 저들이 노리는 광명 교단이 뭘 했길래 이런 도발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가.
이곳 주교가 전해준 정보. 포션 병을 나눠주던 소년 사제의 증언. 투기장. 노예. 이종족과 수인…..
탁.
“이드라실. 혹시 우리 준결승 가는 길에도 예의 그 ‘취미생활’ 하고 있었냐?”
“예. 딱히 나태를 즐기는 성격은 아니기에.”
“좋아. 그럼 오며 가며 빌데란트 후작 쪽 영역을 좀 봤겠네. 거기 어떤 종족이 제일 많았냐?”
“인간의 영역치고는 수인과 오크가 훨씬 많았습니다. 상업이나 회계, 공직은 고블린과 인간이 대부분 차지하고 오크, 수인족은 육체 노동 같은 상대적으로 부림을 받는 직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제국에서 수인족에게 노예근성을 심어주기 위해 유도한 것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건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지. 후작가 영역에 수인족, 오크가 많았다…. 다음. 우리는 후작 쪽 기권으로 올라갔고. 상대는 누가 올라왔지?”
“그쪽은 교수님 경기보다 한 시간 전에 시작했습니다. 치열한 경기 끝에 늑대 수인 남매가 결승에 올라왔다고 하더군요.”
“그래…. 그 둘은, 하우누만에서 인기가 많지?”
“대단히 많습니다. 투기장에서 몇 년이 넘게 살아남은 특이한 케이스이기도 하고, 또 그간 보여준 행보도 투기장의 제왕 자리를 노리는 게 분명했으니까요. 인간에게 억압받은 기억이 있는 수인들은 끝없이 위를 노리는 그 모습에 열광한다고 합니다. 올해로 세 번째 결승 진출이군요. 아, 특이사항이 있습니다. 올해 경기는 모두 두 남매 중 나이가 많은 쪽, 투샨 달룬 한 명만 출전했습니다. 이름은 둘로 올려놓고 지금껏 혼자서만 경기를 치렀다고 했습니다.”
“그래…. 혼자서 아득바득 투기 대회의 우승을 노린다라….”
[마르카 달룬 : 큰 부상을 입음.]고블린의 정보지에서 동생 쪽이 크게 다쳤다고 했다. 유난히 편지를 보낼 때마다 비실거리는 동생 쪽 편지에 보르카가 불안해하는 것도 매일 아침 봤었고. 둘의 자유가 걸린 투기 대회에 하나가 아예 참여하지 못하고, 혼자 나가겠다는 나머지 하나를 말리지 못할 정도라면….
‘상태가 제법 심각한 모양이야. 이번 경기에서 투샨은 절대 항복을 외치지 않는다.’
자, 정보가 모였으니 다시 적의 처지에서 생각해보자. A급 도발편지에 빡친 성자는 신의 이름으로 빌데란트 영지를 들이받는다. 괜히 이름에 ‘광’자가 들어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광명의 신도들은 미쳐 날뛸 것이고, 마스터급 기사 둘과 병사들의 보호를 받는 후작가 사람들과 달리 아무런 보호 없이 외부에 노출된 노동자 계층, 오크와 수인족은 억울하게 휩쓸려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또 하나. 이번에는 죽어도 항복을 외칠 생각이 없는 인기 절정의 수인족 검투사와 교단의 성자가 결승전에서 만나고, 신의 뜻이라면 다소의 희생은 감수하는 교단 사람답게 끝까지 항복하지 않는 수인 검투사를 죽이고 성자가 우승을 차지한다.
‘저쪽은 내가 신의 뜻으로 하우누만에 교세를 확장하러 왔다고 여기고 있으니 가능한 시나리오겠지. 진짜 독실한 성자가 신의 뜻을 받아서 하우누만 먹으러 왔으면 수인족 하나가 아니라 100명이라도 칼 같이 잘라냈을 테니까. 모든 의도가 수인, 이종족이 교단을 적대하게 하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 그리고 최근 급격하게 바뀐 교단의 행보. 급격하게 이종족 배척에서 이종족 친화로 유턴한 광명 교단. 그렇게 살갑게 다가가던 놈들이 갑자기 미쳐서 수인과 오크를 패 죽이고 그들의 우상을 짓밟는다면….’
“이거, 2황자님이 생각보다 암흑가 사람들이랑 되게 친한가 보네.”
탁.
테이블에 자국이 남을 정도로 두드려대던 교수의 손가락이 멈추며 그가 결론을 내렸다.
“무슨 말인가?”
“그렇잖아요. 하우누만 만큼 범죄자 살기 좋은 곳도 없는 데다 신선한 마약을 당일 배송으로 받아올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니. 당연히 암흑가랑 얽혀있겠지.”
“그건 어제도 마차에서 얘기한 것 같소만….”
“그렇지.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마약 파는 놈들이 다른거 라고 팔지 않을 리가 없잖아? 온갖 불법적인 것들, 예를 들면…. 노예 매매라거나.”
이어지는 말에 보르카의 얼굴이 불신과 경악, 분노로 물들어가고.
“그냥 매매가 아니라, 숲에 부족 단위로 자리 잡은 강력한 늑대인간을 모조리 사살하고 그 아이들을 납치할 정도로 강력한 무력을 가진 노예상. 그 정도면 규모가 작지 않을 텐데, 흔적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은밀하고 치밀한 조직력. 배신을 밥 먹듯 하는 뒷골목 놈들 사이에 쉬운 일이 아니거든? 매우 엄격한 규율을 가진 조직의 일부라면 몰라도.”
다음 이어질 말을 예상한 늑대인간의 송곳니와 털이 자라날 때쯤 교수는 결론을 내렸다.
“2황자가 암흑가를 끌어들인 게 아니라, 2 황자가 암흑가 그 자체야. 최소 수뇌부, 아니면 대가리일 수도 있겠지. 마약, 노예 판매는 공급처만 제대로 잡으면 상상도 못 할 거금이 오가는 거래지. 그냥 돈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 많지만, 은화가 금속 더미로 보일 만큼의 돈은 세상에 불가능한 게 거의 없게 만들어. 2황자는 정치적 능력이 부족한 대신 그 말도 안 되게 많은 돈으로 자신의 세력을 꾸리고 유지하고 있었던 거야.”
제위를 노린다면 무리해서라도 세력을 늘렸으리라. 그 늘어난 세력만큼 유지비도 끝없이 늘어가는데, 갑자기 제일 잘 나가는 노예 매매쪽에 제동이 턱, 걸린 것이다. 이종족을 탄압하며 지금껏 노예 매매를 눈감아오던 광명 교단이 이제 눈을 시퍼렇게 뜨고 노예상을 잡아들이고 있거든.
당장 동부에서 넘어오는 노예상 라인이 모조리 끊기며 돈으로 이어붙인 세력이 와해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래서 이종족의 메카인 하우누만에서 광명의 이미지를 나락으로 보내려고 했던 겁니다. 저 봐라. 말로만 바뀌었다고 하지, 실상은 여전하다. 더욱이 우승자의 권리를 행사하려 하면 이 도시마저 빼앗아 가는 거냐고 더욱 반발하게 되고.”
“그…. 하지만 그럼 하우누만은? 결국 2황자 세력, 빌데란트는 우승을 못 했는데?”
“그래서 편지에 미리 써놨잖아요. 제국의 영역을 교단에서 탐내는 것으로 본다. 정치적 영역에 대한 종교의 침입이다. 아마 그들이 상상하던 대로 우승한 성자가 통치권을 요구했으면 2황자 세력 전체가 교단의 권리 침해에 대해 성토했을 겁니다. 여기 하나 때문에 제국 전체의 광명 교단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 권리는 붕 떠버리고, 압제적인 교단에 맞선 빌데란트 후작이 명성과 함께 스리슬쩍 영향력을 불리고. 음, 좋은 계획이네요. 대회 우승 여러 번 해서 땅따먹기하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하우누만이 그쪽에 기댈 수 있게 하는.”
“결국, 아무 의미 없는 계획이었지만 말일세.”
“그러니까요. 신성력 한 톨 없는 일용직 성자인 걸 몰랐으니 그랬겠지만.”
당장 그 도발 편지만 봐도 화가 나기는커녕 ‘븅신 애쓴다.’ 정도의 감상 밖에 안 들거든? 교단 사람 중에 한 명이라도 저 편지를 봤으면 2황자쪽 예상대로 어떻게 흘러가기 시작했을 텐데, 제일 극적인 효과를 노리겠다고 성자님한테 보냈다가 시작부터 말아먹었다는 뜻이다.
“아마 편지를 받았는데도 우리 쪽 움직임이 없으면 애가 탄 2황자 쪽에서 먼저 움직임을 보일 겁니다. 그땐 정말로 다소 과격하고 거친 수단을 사용할 수도 있으니 직접 가서 맞이해야겠죠.”
“음…. 결국 결승전은 포기하는 겐가? 자네야 유랑 부족들에 대한 목표를 달성했다고는 하지만….”
“당연히 그쪽도 나가야죠. 마침 기가 막히게 상대 쪽에서 신청도 들어왔고. 어이 보르카, 나머지 한 장은 네 거더라.”
교수는 고블린에게 받은 편지 중 더러운 쪽을 들어 보르카에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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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라면, 전사라면 최고의 자리에서 모든 전력을 다해 승부를 가리자. 둘 중 내가 더 뛰어나니 우리 쪽은 나 혼자 나서겠다. 진정한 전사라면 명예로운 자리에 부끄러운 일을 더하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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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수작과 함축된 의미로 점철된 빌데란트 후작의 편지와 달리, 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어설픈 도발이 담긴 더러운 종잇조각.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단순한 도발이로군. 보르카, 딸이 아주 아픈 것 같다. 죽어도 이겨야겠는데 2대 1은 힘들 것 같으니까 나름 머리를 썼나 봐. 어때, 속아줄까? 누가 나갈래? 나야 뭐. 투기장 쪽도 괜찮고. 물론 후작, 황자 쪽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으니 머리 좋고 임기응변에 능하며 마스터급 기사 둘을 동시에 상대할 정도로 강한 사람이 가야겠지만…. 딱히 네 능력을 과소평가할 생각도 없거든?”
“….부탁하겠소. 내가 투기장으로 갈 테니, 밖에서 일어날 일들을 맡아주시오.”
보르카는 아들의 어설픈 노력이 담긴 편지를 눈으로 쓸어내린 뒤 품에 넣었다.
‘내일 정오. 내일 정오. 앞으로 21시간 뒤. 정오가 되면.’
오래전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보르카의 마음이 가라앉고, 낮은 소리로 떠들어대는 일행의 목소리가 점차 귀에서 멀어져갔다.
생의 마지막 목표. 아이들과 복수의 대상이 모두 이 도시에 있다. 느리게 가라앉는 늑대인간의 마음이 점차 차갑게, 예리하게 다듬어져 갔다.
검투사 투구의 요철이 파문처럼 그 마음 위에 흔적을 남겼다.
억누를 감정이 터질 것 같을 때마다 서늘한 투구 속에서 그늘진 세상을 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세상에 나와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게 되었다.
타협해선 안 되는 것을 타협하게 되었으며.
인간의, 수인의 정체성조차 버려 살아남았다.
그 모든 것을 버리며 달려온 순간이, 이제 채 하루도 남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
서늘한 금속을 긁는 감촉 속에 보르카는 그 모든 마음을 가슴 속으로 눌러 담았다.
지난 15년간 감내해온 것을 생각하면, 21시간을 뜬 눈으로 헤아려 세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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