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59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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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밝았다.
교단에서 나온 사제가 [성자님 기거 중. 관계자 외 출입 시 이단] 같은 무시무시한 글귀를 여관 문 앞에 붙여놓은 덕분에 손님은커녕 여관 주인조차 도망가버린 여관.
새벽까지 오늘 일어날 일들에 대한 토의를 한 덕에 알드리치와 오트만의 눈가에는 피로가 가득했고, 루실라는 테이블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지만.
“오늘은 아-주 복잡한 날이 될 겁니다.”
시작을 알리는 교수의 말에 다들 눈을 빛내고 있었다. 어느덧 이 정신 나간 용사의 행사에 익숙해진 일행은 닥쳐올 고난을 평온하게 맞이할 정도는 되어 있었다. 잠시 주방을 빌린 이드라실이 간단한 아침거리를 내어오고 일행은 앞으로 있을 고난에 대비하듯 열심히 음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 물론 전체로 복잡하지만, 개인 단위로 보면 맡은 일만 잘 해내면 되는 단순한 일입니다. 큰 일도, 어려울 것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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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카, 너 빼고.”
“….음.”
“자신 있냐? 말없이 나가길래 걱정했는데.”
“잠시 도시를 나가 숲에 갔다 왔소.”
자기 몫의 그릇을 비우고 눈을 감고 있던 늑대인간은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15년 전. 숲을 나올 때는 목숨을 버리겠다는 생각으로 나왔소. 노예 계약에 서명할 때는 전사로서 나를 버렸으며, 그로부터 8년 동안 인간으로서 나마저 버렸지. 세월이 갈수록 내게 남은 것을 버려내는 것에만 익숙해졌으나, 그간 버리지 않고 쥐고 있던 것도 있었지. 그걸 어제 버리고 온 참이요.”
드르르륵-
자리에서 일어난 보르카는 한쪽 구석에 가지런히 놓인 검투사 장비를 손에 들고 몸을 돌렸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숲을 돌려줄 수만 있다면…. 두 번 다시 아비라 불리지 않아도 좋소.”
늑대인간은 자신의 마지막 안식, 유일한 기원마저 마음에서 내려놓았다. 하루에 걸친 기나긴 명상으로 그 모든 영과 육에 오롯이 하나의 목표만 가득 채운 늑대인간의 발걸음은 확고한 결의에 가득 차 있었다.
“가겠소.”
벌컥!
여관의 문이 열리고, 다시 베나드 팽의 투구를 뒤집어쓴 검투사가 그를 기다리는 마차를 향해 발을 뻗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오래전 하나의 검투장을 제패하고 사라진 전설. 지금 그 두 번째 전설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들의 환호성 속에서 화려한 마차가 콜로세움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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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레와 같은 환호성과 함께 멀어져가는 보르카. 그는 지금부터 혼자 싸우게 될 것이다. 무슨 수작이 가득할지 모르는 저 콜로세움에서, 15년을 기다려온 그 순간을 위해.
일행의 임무는 녀석이 무사히 자기 목표를 완수할 수 있도록 그 이면에 들러붙은 온갖 사정을 쳐내는 일이었다.
“….보르카도 참. 저렇게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가겠소.’ 가 뭐에요, 갔다 오겠소, 다녀오겠소 같이 좋은 말도 많은데. 신경 쓰이게.”
“아서라. 졸라게 복잡한 눈으로 마지막에 슥 돌아보는 거 봤냐? 쟤 방에 들어가면 유서도 있을걸, 분명.”
교수는 한눈에 봐도 ‘나는 각오가 됐소~’ 하는 보르카의 뒷모습을 보며 루실라의 툴툴거림에 맞장구쳤다.
폭풍의 언덕 이후로 항상 편지지와 펜을 가지고 다니는 녀석이니. 안 그래도 결승에만 집중하라고 작전 회의에도 안 끼워줬으니 시간이 남은 녀석이 뭘 했을지는 뻔했다.
그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이드라실이 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여기. 찾아 놨습니다.”
“으엑. 이젠 보르카도 관찰해?”
“….밤중에 발톱 가는 소리가 흥미로워서 그만.”
이드라실이 내민 보르카의 유서를 당장 태워버리려던 교수는 별안간 히죽 웃으며 주머니에 쑤셔 넣었고 그 모습에 질색한 루실라가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거 진짜 받게요? 유서가 세상에 남아있는 만큼 죽음이 그 사람을 쉽게 찾는다고 하던데.”
“그럼 집에 유서 1호부터 34호까지 있는 나는 옛 저녁에 죽었게? 이거, 오늘 일 다 끝나면 저 집 애들 앞에서 큰 소리로 읽어 줄 거야. 유서는 자기 인생이 축약된 편지잖아? 15년 만에 만난 아버지가 어색하지 않게 아이들한테 잘 알려줘야지.”
“우와…. 진짜 못 됐어.”
“그래도 보고 싶지 않아? 저 무뚝뚝한 늑대인간이 얼굴이 시뻘게져서 유서 돌려달라고 허우적거리는 모습?”
루실라는 아이들과 교수 사이에서 어찌할 줄 몰라하며 교수를 쫓아다니는 보르카를 상상했다. 음….
“50만 실링 정도로 보고 싶은데요?”
“그렇지? 그러니까 우리도 슬슬 출발하자. 우리 보헤미안 늑대 친구가 죽지 않고 자식들도 다 무사히 나와야 그걸 볼 수 있을 테니까.”
드르륵!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신호로 다들 맡은 바 임무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툼, 알드리치가 한 팀이 되어 도시 외곽으로.
오트만, 이드라실, 루실라는 시장 구역으로.
보르카는 투기장으로.
그리고 나는….
파각!
“초대장을 받았으니 인사는 하러 가야지.”
그들이 그리던 시나리오처럼, 빌데란트 후작의 영역으로.
교주가 건네준 ‘부름 막대’. 문에 걸터앉은 교수가 그것을 부러뜨리자 가느다란 빛이 하늘을 꿰뚫을 듯 솟아오르며 도시의 모든 사제와 신도에게 그 뜻을 전했다.
‘성자의 행사에. 신의 뜻에 너희 손이 필요하다.’
다른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교단 공식으로 신의 뜻을 대행하는 자라 인정받은 이의 부름.
여관 주변을 통제하던 이들부터 헐레벌떡 뛰어오는 소리에, 교수의 입가에 경건한 미소가 맺혔다.
“허억, 허억! 라투…라!”
“라투라, 로 하람. 교구 사람들이 오기까지 시간이 좀 있으니 그렇게 뛰어오지 않으셔도 됐을 텐데요.”
“허억, 후우우…. 알고 있습니다만. 성자님께서 이 도시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 보니 몸이 먼저 반응해버렸습니다.”
헐떡이는 숨을 참으며 손을 모으는 사제. 그의 빛나는 눈빛에 교수는 부드러운 웃음으로 답해주었다.
“그래서, 어떤 일로 부르셨는지….”
“하하하하. 그리 큰 일은 아닙니다. 그저,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것뿐이며, 뜻이 있는 곳에 길이 닿은 것뿐이지요.”
저 골목 너머에 보이는 성광과 성기사의 갑옷 철컥거리는 소리에 교수는 몸을 일으켰다.
사제의 머릿속에 ‘생각보다 더 훤칠하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 무렵, 하얀 법복을 절반만 입고, 윗부분은 허리에 묶어 흉터투성이 상체를 드러낸 교수의 입에서 마침내! 그가 원하던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분이 이곳에 오셨으니 혹시나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하던 성스러운 행사.
“이곳 귀족이 거대한 악을 사육하고 있다 하는군요. 그 진위를 백일하에 드러내고자 여러분을 불렀습니다.”
“거, 거대한 악이라 함은….”
“태생부터 불결한 자. 세상을 피로 물들여 그 발아래 두고자 하는 자. 뮤테이션 블러드, 그 저주받은 창녀의 자손이 숨어있다지 뭡니까.”
이어지는 말에 사제는 당장 횃불로 쓸만한 것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성전을 원한다면 성전을 해주지.’
악의라 할 수밖에 없는 편지와 다음 날 아침부터 모여드는 교단의 성기사, 사제들. 아마 모든 일이 자기들 뜻대로 풀리는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인생은 실전이란다, 친구들.’
[키득키득]장담컨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그들의 예상에 한치도 들어맞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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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익! 여기서 기다려라! 졸리면 잠자고, 배고프면 뭐든 말해라! 결승 진출자는 뭐든 해준다! 어쩌면 생에 마지막 식사가 될 수도 있으니까! 키긱! 키기긱!”
재수 없는 비웃음을 흘리며 돌아가는 고블린. 보르카는 피로하지도, 배고프지도 않았다. 그저 이곳이 치가 떨릴 만큼 익숙하다는 생각뿐이었다.
‘투기장. 노예 검투사의 집이자…. 관.’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이곳을 둘러싼 모든 것에 그의 삶이 배어있었다.
돌 틈 사이에 스며든 말라붙은 피의 냄새.
서늘한 공기와 답답한 투구 사이, 눈썹에 송골송골 맺히는 입김.
쇠 냄새. 땀 냄새. 긴장한 맹수의 시큼한 채취.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살육전을 기대하는 관객의 웅성거림. 그 누구보다 그를 사랑하고 응원한다 외치며, 그가 생사의 갈림길에 서기를 누구보다 원하는 끔찍한 인간들.
그 너머에, 그의 아들이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방에, 같은 고독 속에.
끝이 다가온다. 어두컴컴한 대기실의 문을 가르고 들어오는 환한 빛처럼. 고요를 살라 먹는 열띤 환호성처럼.
투기장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고 모든 준비를 마친 늑대인간이 그 빛무리 속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눈이 아릴 정도로 일렁이는 수백 개의 횃불. 등장만으로 목청이 떠나가라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관객들. 그리고 시린 눈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상대.
“….투샨.”
그와 같은 검투사 복장을 한 아들의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마침내. 그 긴 세월을 넘어 마침내 마주했다. 나의 아들,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내 아들을!
말 없이 노려보는 두 늑대인간 사이로 마법 확성기에 의지한 고블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망의 결승전! 초원에서 가장 강하고 명예로운 두 명의 투사가 준비되었다! 좌측은! 하우누만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투기장의 강자! 2인 1조라는 룰을 비웃듯 홀로 여기까지 올라왔으며, 올해로 세 번째 권좌에 도전하는 진정한 투사! 투샨- 달룬!]“와아아아아아아아!!!”
그 인기를 증명하듯 투기장을 울리는 함성. 늑대인간은 물론 곰, 토끼, 쥐, 호랑이 수인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하고, 더러는 자기 털을 뽑아 경기장으로 날려 보내기도 하였다. 그들과 같이 불우한 삶을 영위했으나 단 한 순간도 꺾이지 않고 한 걸음씩 위로 향하는 하우누만 수인족의 우상.
그 이름을 연호하는 함성 속에 투샨이 투기장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키이이익! 대단하고 위대한 투기장의 자랑, 푸른 갈기 투샨! 하지만 그에 맞서는 상대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 우측! 그 상대는 무려! 저 산맥 너머에서 한때 동부 최대규모 투기장이었던 겐티아 아레나를 제패한 투기장의 제왕이자! 그 명성이 빛이 바랠 정도로 유명한 학살극의 주인공! 홀로 하나의 투기장, 그곳에 기거하던 검투사와 사용인, 백이 넘는 인간을 참살한 피투성이- 베나드으으 팽!]그리고, 그 뒤에 불리는 그의 이름.
피부로 느껴지는 환호성 속에 보르카는 그의 상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시도 잊은 적 없다 생각했으나, 15년의 세월은 기억을 테두리를 풍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젖먹이였던 아들은 이제 그보다 키가 더 컸다.
혀짤배기 소리를 하던 작은 입은 길게 세로로 가로지른 흉터와 함께 굳게 닫혀있었으며.
그와 달리 안면을 드러낸 투구 속 눈은 굳게 감겨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투샨…. 달룬인가.”
“베나드 팽. 동족의 피를 보게 되어 유감이군.”
조용히 뇌까리던 아들이 눈을 뜬 순간, 그 깊고 푸른 눈 안에 담긴 아내의 영혼에 보르카는 저도 모르게 앞으로 나갈뻔한 손을 다잡아야 했다.
아들의 체취는 15년 전 그 베갯머리에서 나던 그것과 같았다. 그와 콧대가 비슷했고, 입매가 비슷했으며, 아내와 같은 회색 털에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저, 투산의 왼쪽 눈에 어설프게 봉합한 흉터가 역력하기에. 다시 마주한 아내의 눈이 하나뿐이라는 것이 원망스러울 뿐.
잦아드는 환호성 속에, 때가 되었음을 안 외눈의 늑대인간이 칼을 들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의?”
“그래. 마침내 자유를 쟁취한 수인 검투사의 이야기를. 내 희망이자 절망이었던 이야기의 주인공을 결승에서 마주하다니. 신은 역겨운 장난을 좋아하는 모양이야.”
철컥.
보르카도 방패를 들어 올렸다. 방패를 앞으로, 자세는 낮게. 용수철처럼 응축되어 뒤로 당겨진 손에는 짧은 칼을.
그 단단한 모습에 검을 쥔 투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동족의 피를 보고 싶지 않으니, 항복해라. 베나드 팽.”
“….마찬가지로 네 피를 보고 싶진 않다. 투샨 달룬. 죽음이 다가오면 지체없이 항복해라.”
진행자의 손에 두 사람의 이름이 적힌 목패가 들리는 가운데. 자신과 같은 권유를 하는 상대의 모습에 외눈 늑대인간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쿤 타기즈의 이름 앞에, 한 점 부끄럼 없는 전투를!』
따각-!
“내가…. 실언을 했군!”
카앙!
시작과 동시에 마주한 두 방패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보르카의 회색 눈과 투샨의 하나뿐인 푸른 눈이 마주하였다.
15년간 쌓아온 그리움도, 사죄도, 재회의 기쁨도.
할 말이 너무나도 많았으나 아직 때가 아니었기에. 아직 아이들이 검투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이상 그에게는 용서를 빌 자격조차 없었기에.
-카앙!
“결국, 피를 봐야겠다는 뜻이군!”
“….필요하다면!”
가려진 투구 속 보르카 달룬이 아닌 검투사 베나드 팽으로서 그는 망설임 없이 칼날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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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악, 하악! 여기, 여기 맞아요?”
“두 블록 더 가서 오른쪽입니다. 루실, 오트만.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콜로세움의 환호성이 커져가고 있습니다.”
교수가 후작에게로, 보르카가 콜로세움을 향했을 무렵.
다다다다다닥!
덜컹! 덜컹!
루실라와 오트만, 이드라실은 커다란 천으로 덮어둔 화물을 수레에 싣고 그들의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이드라실의 정령이 깃들어 바람처럼 빨리 달려나가는 수레였기 때문에 끄는 것보다는 매달려 간다는 말이 더 어울렸지만, 방향 조절은 해야 했기 때문에 손잡이를 잡은 두 노소는 수레에 쫓기듯 달려가고 있었다.
“허억, 흐어억! 아무래도, 인원 편성을, 잘못 한 것 같네만! 노인과 소녀, 어린 엘프에게 이 무거운 수레를 끌고 달리게, 하다니!”
“으으으으! 이디! 좀 도와주면 어디가 덧나요!”
“제가 맡은 일은 가장 빠른 길의 안내입니다. 오른쪽으로 돌아서 정면. 왼쪽에서 두 번째 천막입니다.”
지붕과 지붕 사이를 뛰어다니며 방향을 지시하는 엘프의 목소리에 루실라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숨을 몰아쉬었다.
“내 다리에 근육 붙으면…. 아에드란의 이름에 맹세코 소녀의 인생을 망친 죗값을 청구할 거야아아아!!!!”
“얘, 얘야! 속도를 늦춰야-”
“우리 늦었어요!”
어느덧 눈앞으로 다가온 커다란 천막. 활짝 열린 갈비뼈와 심장 대신 은화가 그려진 열린 갈비뼈 부족의 천막에 루실라는 달리던 수레를 그대로 밀어 넣었다.
시장 구역, 열린 갈비뼈 부족의 사업을 총괄하는 천막.
남들 다 가는 결승전에도 참여하지 않고 돈을 세던 고블린들은 바람의 난데없이 밀어닥친 수레에 비명을 질렀고, 아수라장이 된 천막 속으로 헐떡이는 루실라와 오트만이 들어섰다.
파바박!
말 한마디 없이 날아든 고블린의 독침이 물의 장막에 막히고, 겨우 숨을 고른 루실라가 한쪽 구석에 처박힌 수레를 끌고 오며 외쳤다.
“여기서 돈 제일 많은 고블린! 당장 나와! 거래하러 왔으니까!”
“키이익! 웃기지 마라! 마법사, 인간 여자, 엘프! 습격이다! 부족의 은화를 훔치러 왔다!”
“아익, 시간 없으니까 빨리 나오라고!”
화악!
나오라는 놈은 나오지 않고 각종 무기를 꼬나든 고블린이 우르르 몰려오는 것을 본 루실라는 수레의 천막을 걷은 다음 반쯤 부서진 궤짝의 뚜껑을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덜컥!
촤르르르르-!
“습격이다! 습-?!!! 키이이익!”
“깨애액!”
“끼익! 키익! 키이이익!”
“끼이이이이익!!!”
루실라의 발길질에 쓰러지며 은화를 와르르 뱉어내는 궤짝.
적을 마주했을 때보다 더 흥분하는 고블린 속에서 외알 안경을 쓴 키 작은 고블린이 앞으로 나오고, 본능적으로 그가 여기서 제일 높은 인물임을 안 루실라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키익. 거래, 믿는다. 엄청나게 많은 돈! 큰 거래! 뭘 사러 왔지, 인간!”
“그야, 여기서 제일 비싼 거!”
루실라가 눈짓하자 주변의 경계하던 오트만이 손가락을 튕기고, 작은 물방울 하나가 터지며 수레를 완전히 엎어버렸다.
“키…. 키에에에….”
수레에 실려있던 커다란 궤짝 아홉 개가 모두 엎어지며 쌓인 은화의 산. 그 모습에 주변의 모든 고블린이 넋을 잃은 가운데 그들을 대표하듯 앞으로 나온 고블린에게 루실라가 다가갔다.
“거짓말이 그들의 언어라 말하는 고블린의 진실! 이 정도면 충분히 값을 치르고도 남겠지! 거기 너! 안경! 평생 이만큼의 은화를 본 적이 있어?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잠깐의 반짝임이 아니라, 앞으로 평생! 네 침대 밑에 깔아두고 매일같이 헤엄을 쳐도 될 정도의 은화를 말이야!”
넋을 잃은 고블린은 루실라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는 듯하더니, 멍한 눈으로 은화의 산을 향해 다가갔다.
탐욕으로 빚어낸 생물이라 말해도 좋을 정도로 본능적으로 재물을 탐하는 종족, 고블린. 물론 지성이 있는 존재인 만큼 미래를 생각하고 해야 할 일과 해선 안 될 일 정도는 충분히 구분하지만….
“나, 나한테 산다…. 그럼, 이걸…. 내게 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전부 다! 현찰로!”
“케, 케히이이이이-!!!”
그 이성을 압도할 정도의 재물을 눈앞에 두면 평생 쌓아온 이성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상상으로만 떠올리던 재물을 눈앞에 두고 넋이 나가 버린 고블린의 대답.
그 상태에서 사악한 심성의 빗장이 풀려버린 그때 고블린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이 세간에 ‘고블린의 진실’이라 불리는, 고블린 입에서 나오는 말 중 유일하게 믿을 수 있다 여겨지는 것이다.
“케에에에….케이이이….!”
루실라는 멍한 눈으로 산더미 같은 은화를 쓰다듬는 고블린을 향해 윽박지르듯 말했다.
“너희 열린 갈비뼈 부족이 관리하는 투기장! 그 투기장 노예들의 계약서는 너희들이 가지고 있어?”
“아니다…. 족장의 귀한 종이…. 인간 귀족에게 넘겼다…. 반짝이는…. 케이이이….”
“인간 귀족? 누구?”
“여덟 부족 중 하나…. 빌데란트…. 우리는 돈 받고 관리만 하지, 사실 주인은 그 수염쟁이….”
“오트만! 들었죠!”
원하던 대답을 얻어낸 오트만은 즉시 루실라와 함께 천막 밖으로 나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온갖 이권이 걸린 투기 대회의 결승. 그 관리 책임자인 만큼 열린 갈비뼈 고블린의 족장과 수뇌부는 대부분 투기장에 가 있을 것이다.
지금 시장 구역에 남아있는 것은 이곳 업무에 잔뼈가 굵었으나 지위는 조금 부족한 고블린. 그러면서도 부족의 돈이 모두 모이는 곳을 관리할 만큼 족장의 신임을 얻은 녀석.
‘족장급이면 몰라도, 중간 관리자 정도는 저 정도 돈으로 충분할 줄 알았어!’
푸화아악!
미리 준비하고 있던 오트만의 손에서 분수처럼 솟아오른 물이 하늘을 향하고, 이드라실의 물의 정령이 몸을 담으며 대낮에 난데없는 쌍무지개가 하늘을 수놓았다.
하나는 예. 두 개는 아니오 라는 약속.
“….역시 고블린 쪽은 아니었나.”
“성자님. 무슨 말씀을?”
“아닙니다, 주교님. 사전에 약속한 대로 진행해 주시길.”
도시 반대편에서 그것을 확인한 교수가 성기사단을 이끌고 후작의 영역으로 향하고.
“두 개로구나. 우리도 움직일까.”
“그웍.”
도시 외곽의 허름한 빈민촌. 각각 흑마법과 주술로 빈민가의 가장 으슥한 곳을 뒤지고 다니던 노툼과 알드리치도 신호를 받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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