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63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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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는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인간의 목을 물고 석상처럼 미동도 없는 동료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오늘, 하루종일 히죽거리며 호쾌하게 일을 풀어나갔지만.
사실 그 속은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아마 다들 그랬을 것이다. 다들 축하나 위로의 한마디라도 건넬법하건만, 원수의 목을 물고 선 보르카를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하이드는 그 갑작스러운 침묵 속에 입술을 파르르 떠는 루실라와 숨을 집어삼키듯 감정을 억누르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쉴 새 없이 농담을 뱉어내는 네 성격이 어디서 기인했나 궁금했는데. 이런 걸 자주 봤어?]‘열일곱 살 이후로 매일같이 봐 왔지. 누군가를 잃고, 누군가를 원망하고. 복수하고. 웃고, 울고. 그리고 죽고. 그런 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복되는 곳에서 그 모든 감정을 하나하나 깊이 받아들이는 놈은 거기 휩쓸리기에 십상이니까. 그냥 웃어넘기는 거지. 유쾌한 척, 농담인 척.’
눈물에도 여러 가지 감정이 담기듯. 웃음에도 여러 감정을 담을 수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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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속 내 아이들은 나보다 그 어미를 더 닮았었지. 달리아는 내겐 과분한 여자였소. 당차고, 아름답고, 심지어 나보다 강하기까지 한 여자. 그 상인들이 독을 풀지만 않았으면 그렇게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었지.
영기(靈氣)는 우리 종족 중에서도 소수만 사용이 가능한 특별한 재능이오. 그 재능의 크기에 따라 작은 수명으로 큰 힘을 낼 수 있지. 어떤 이는 남은 생의 절반을 태워 평범한 기사 정도의 힘을 내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낮잠 한번 잘 시간을 태워 성벽을 조각내기도 하오.
미약하지만, 나 또한 그 재능을 조금은 이어받았기에. 내겐 선택권이 주어졌소. 위대한 전사로 2년을 살 수도, 아무 힘 없는 숲의 주민으로 200년을 살 수도 있는 선택권이.
….아내를 닮았다면 반딧불보다 작은 재능에 육체적 축복을 받은 나와 달리 놀라운 재능에 강인한 다리를 가졌을 것이 눈에 선하오. 분명 나보다 강하고, 아름다운 갈기를 가졌겠지.
하지만 그 아이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나는 알기에. 내가 지는 순간 내가 겪었던 과거의 모든 진실과 절망을 그 아이들이 마주할 것을 알기에 나는 꼭 이겨야겠소.
후후후. 어딘가의 학자가 말하길 ‘재능이 없으면 시간을 더 들여라.’ 라고 하더군. 실로 맞는 말이 아닐 수 없소.
그러니…. 지금부터 내게 일어날 일 들에 너무 상심하지 말아 주었으면 하오. 모든 것은 내 선택이니. 그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마주할 수 있었으면 하오. 늘 비명과 웃음소리가 가득한 당신의 무리가 아니었소.
그리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주겠소.
그거 아시오? 대장. 내가 당신을 대장이라 부른 것이 참 오래되었지.
늑대는 무리 생활을 하오.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은, 그 무리의 수장이라 받아들였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소리지.
비록 내 입으로 당신을 섬기겠다 말한 것은 폭풍의 언덕에서 처음이었으나, 나도 모르게 대장이라 부르고 있던 것을 보면 꽤 오래전부터 당신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오. 머리로 알기 전에 꼬리부터 흔들다니. 그것 참, ‘개 같은’ 모습이 아니오.
….나를 당신의 무리로 이끌어주어 고마웠소, 대장. 따듯하고, 든든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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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마시오. 내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건, 그것이 내가 원해서 한 선택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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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무릎 꿇은 보르카의 팔이 하나 부족한 것을 봤을 때도, 피와 기름에 뒤엉킨 그의 털가죽이, 생기 넘치던 늑대인간의 육체가 급격히 노쇠한 것을 봤을 때도 못 본 척 했다. 오히려 더 흥이 오른 사람처럼 굴었다.
지난 15년간 녀석이 지고 온 기억의 크기는 그 본인이 아닌 이상 알 수 없으므로. 혼자 해결해야만 한다는 그 뜻을 존중하고, 받아들이기 위함이었다.
유서의 내용을 전달한 것은 도시 각지에 흩어져있던 동료들이 콜로세움 앞으로 모여들었을 때, 메시지 마법을 통해서였다. 다들 많이, 특히나 루실라가 많이 동요했지만.
결국 그 ‘유언’에 따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유쾌하고, 시끄럽게 움직여준 우리 일행이었다.
“….고생 많았다. 끝까지 너 혼자 하게 두려고 했는데, 거기까진 내가 못 참겠더라고.”
굳은 얼굴의 일행 사이에서 내가 앞으로 나아가자, 이빨로 원수의 목을 끊어낸 보르카가 그 머리를 들고 몸을 돌렸다.
“이기적인 억지를 들어줘서 고맙소. 이건 비명에 간 부족의 우두머리로서 꼭 행해야 하는 의무이자, 믿어선 안 되는 이들을 믿고 오래도록 이어져 온 규율을 어기고 외지인을 환대한 자, 보르카라는 우둔한 늑대인간이 갚아야 할 죗값이었소. ”
“그래서. 15년간 간직해온 복수를 이루었는데. 기분은 좀 어때?”
“….모르겠군. 정말로…. 모르겠어.”
눈조차 감지 못한 후작의 수급을 들어 올리는 보르카의 허무한 목소리에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람을 너무나도 많이 봐 왔다. 복수할 능력이 부족해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고, 복수를 이루고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음에 또 피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그리고, 복수의 대상이 누군가의 손에 허무하게 죽어, 가슴 깊은 곳에 응어리진 갈 곳 잃은 불꽃에 스스로를 살라 먹는 이들도 참 많았다.
[복수는 개인의 영역이니까.]‘더 좋은 방법도 있었겠지. 시간이 더 있었으면. 얽혀있는 세력이 하나라도 더 적었으면. 우리보다 먼저 놈들이 계약서를 손에 넣으면 보르카의 아이들이 죽는, 그런 급박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저 녀석을 설득하고, 차근차근 한 놈씩 다 밟아버린 다음에 저 녀석이 자기 의무를 즐길 수 있게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두 아이중 하나가 아프다는 말에 보르카는 한치의 타협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저 투기장으로 나아갈 생각이었고, 헛되이 죽게 두지 않으려면 그 성큼성큼 나아가는 보폭에 우리가 발을 맞출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15년의 분노와 후회 속에 쌓인 보르카의 자기 파괴적인 복수심을 덜어낼 수 없게 되었다. 내 부족한 능력으로는 그 결과가 그것으로 끝나지 않게. 저 녀석의 선택이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게 주변을 정리하고 그 불꽃이 다 타들어가기 전에 끼어드는 것 정도였다.
“기이한….기분이군. 15년 동안 이 순간을 바라며 발톱을 갈아왔는데….. 상상하던 것과는 많이 다르군. 어찌…. 이리도 가슴이 텅 빈 것 같은지 모르겠소.”
침묵을 깨고 늑대인간의 입이 열렸을 때. 그의 목소리에 담긴 것은 희열도, 분노도 아닌 허망함 뿐이었다.
“당연하지. 네가 잃어버린 것과 원수. 둘 중에 어느 것이 네게 더 가치 있는지를 생각하면 뻔하잖아. 복수의 순간이 짧아서? 허무하게, 너무 간단하게 끝나서? 알고 보니 저놈이 불사신 같은 거라 무한히 살아나서 백 번이고 이백 번이고 반복해서 죽이면 네 속에 응어리진 감정이 다 사라질 것 같아?”
“….”
“아니지? 그럴 수밖에 없는 거야. 가치를 비교할 수 없으니까. 원수의 고통보다 네 가족, 네 삶이 훨씬 더 네게 의미 있는 것이니까. 이런 종류의 감정은 해소될 수 없어. 미안하지만, 네가 지금껏 안고 살아왔던 분노와 죄책감은 평생 너를 괴롭힐 거야. 복수가 짧은 회피가 될 수는 있지만 네가 기억을 마주하는 순간마다 감정은 쓴물처럼 올라오겠지. 그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넣은 순간 너도 모르게 깨달아 버린 거야. 여기가 종점이 아니라는 것을. 네가 그 짐을 영원히 지고 가야 한다는 것을 말이지.”
그래서 복수의 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셀 수없이 많은 원수를 찢어발긴다 한들 잃어버린 것들에 비할 바 없기에. 아무리 복수의 저울추에 수급을 쌓아오려도 잃어버린 것의 무게가 압도적으로 무겁기 때문에.
교수의 이야기를 들은 보르카는 멍하니 손에 든 원수의 수급을 바라보았다. 죽음의 순간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치켜뜬 눈의 후작. 이자의 손에 아내가 죽었고, 부족원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사라졌다. 이 순간을 후회하느냐 묻는다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리라.
하지만. 후작을 죽이고. 후작이 모시는 2황자를 죽이고. 명령을 내렸던 황비를 죽이고. 그 일과 얽힌 모든 귀족, 모든 하수인, 모든 기사와 그 종자까지 다 죽인다 한들 이 감정과 후회가 그대로라면? 지금처럼, 허무한 피의 향기만 입가에 스칠 뿐이라면?
“무슨 생각을 그리 하냐?”
“….두렵소. 이제는, 방향조차 잃어버린 이 감정이. 그것이 밖으로 향하지 않고 영원히 내 가슴속을 맴돌 것을 알기에.”
그는 두려웠다.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을 마주한 채무자처럼.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보는 시시포스처럼 영원히 안고 가야 할 죄책감을 마주한 보르카는 그의 남은 삶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늑대인간을 거칠게 일으키는 손길이 있었다.
“나도 그 기분 잘 알긴 하는데, 그건 그거고. 일어나. 아직 안 끝났잖아.”
“그럼…. 끝을 알고도, 마지막까지 원수를 죽여 나가라는 소리요?”
“그거 말고 멍청아. 지난 15년 동안 시궁창에 처박힌 네 녀석을 일으킨 게 복수심 같은 불량식품은 아니었을 텐데.”
교수는 미리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온 교단제 포션을 들어 보르카의 머리에 통째로 부어버렸다. 그처럼 잘린 팔을 재생해내거나 하지는 못하지만, 출혈을 멈추고 부러진 허벅지와 무릎을 순식간에 고쳐줄 정도는 되었다.
“애들. 지금 네 손으로 자유를 돌려준 네 자식. 보나 마나 아직 자격이 없네~ 뭐네 하면서 인사도 못했지? 이 정도면 자격 정도는 충분히 갖췄으니까 가서 인사도 하고, 밀린 이야기도 하고, 그러라고.”
잊고있었다. 아니, 잊은 게 아니라 지금 이후의 삶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기억에서 밀어내려 애썼다. 원래는 여기서 그의 남은 것을 모두 불태우고 사라질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한 것은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지금. 그의 부탁을 마지막 순간에 저버린 동료들 덕에 늑대인간 보르카의 삶은 조금 더 유예되었고, 이제 그는 꿈에서도 보지 못한 광경을 가슴에 품을 수 있었다.
숲으로 돌아가는 아이들과, 그 옆에 있는 팔이 하나뿐인 늑대인간.
그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풍경에 보르카가 말을 잇지 못하는 동안. 교수는 힘을 잃고 평범한 종잇조각이 되어버린 계약서 중 그에게 필요한 것을 주워 보르카에게 넘겨주었다.
“가라. 원래 작전대로 나머지 일은 우리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넌 네 일만 신경 써.”
“….그건.”
“제대로 이해했지? ‘네 일’에만 신경 쓰라고. 지금부터.”
재차 강조하는 교수의 말에, 받아든 계약서를 향하던 보르카의 눈이 교수를 향했다.
“앞으로도 우리 일행은 험하고 위험한 곳만 골라서 다닐 거야. 다들 제 앞가림하기 바쁜 만큼- 늙고, 노쇠하고, 혼자 고집부리다 팔 하나마저 잃어먹은 힘없는 늑대인간은 짐만 될 수도 있다는 소리지.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을걸?”
“그래. 그 편지에 자네가 말했듯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국을 향해 출발하게 되겠지.”
“솔직히, 저 친구 몸집이 너무 커서 같이 다닐 때 좀 비좁기도 했고 말이야.”
“저, 저도…. 불편, 히끅! 했….으윽! 달만 뜨면 밤새도록 우우- 거려서….끅, 윽! 잠을 못 잤으니까…. 보르카 같은 거 없어…으윽! 없…. 없어져도! 오히려…. 오히려….”
저마다 그로 인해 불편했던 점을 토로하는 일행의 모습에 보르카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교단에 붙잡혀 억지로 끌려오다시피 합류하게 된 무리. 7개월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단 한순간도 고생이 아닌 적이 없었고, 사흘 간격으로 난리를 피워대는 통에 늑대인간의 튼튼한 간이 멀미를 일으킬 정도로 떨어졌다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좀 무뚝뚝하지만 멍청한 녀석은 아니니까. 알아듣겠지? 이 정도면?”
그 동료들이. 모든 것을 잃고 삶을 포기하려던 그를 여기까지 이끌어준 그의 무리가, 이제 그를 내보내려 하고 있었다. 그가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며. 떠나는 발걸음 마저 가볍게 해주기 위해.
“대장. 하지만….”
“15년이잖아 보르카, 15년. 너한테만 15년이 아니라, 네 두 아이들에게도 15년이었어. 더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단 말이야. 네가 옳은 판단을 하리라 믿는다.”
그것은 따듯한 권유이자 가장 부드러운 추방이었다. 교수도, 루실라도, 오트만과 알드리치, 노툼과 이드라실까지. 보르카라는 사람이 얼마나 선하고, 자신이 받은 것을 되돌려주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남은 생을 모두 바쳐도 잃어버린 시간만큼이나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를 동료를 배려하는 것이었다. 그가 부담 없이 갈 수 있게. 15년의 고통 끝에, 마침내 평온을 찾을 수 있게.
평온한 두 노마법사의 얼굴. 눈을 부릅뜨고 울먹이는 입을 악 다문 귀족 소녀. 언제나 그렇듯 평온하고 조용한 미소를 간직한 엘프와 순박한 눈망울을 끔벅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트롤.
그 온정이 섞인 퉁명스러움에.
보르카는 손에 들고 있던 머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하나만 남은 손을 내밀었다.
“….잊지 않겠소. 죽는 순간까지, 영원히.”
“내가 좀처럼 잊기 힘든 사람이긴 하지.”
한명 한명. 지친 몸으로도 그 감촉을, 체취를 잊지 않겠다는 듯 시간을 들여 악수를 나누는 늑대인간의 행동에 누군가는 웃는 낯으로. 이해한다는 인자한 미소로. 결국 터져나온 울음과 함께 피에 젖은 그의 품에 뛰어드는 것으로. 눈물과 함께 앞날에 대한 축복을 담아, 그 품을 눈물로 적시는 것으로.
“잘가요, 보르카. 잘….가요….”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동료를 전송했다. 아마 다시 만나지 못할. 언젠가 만나게 된다면, 그 비석 앞에 술을 뿌리며 옛날이야기를 나누게 될 동료의 마지막 뒷모습.
카득. 바스락.
그 모든 감정을 소중히 그러안은 늑대인간이 계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 멀어지는 그들 사이를 무너진 돌조각 밟는 소리만이 조심스럽게 채우고. 그 피에 젖은 뒷모습이 계단아래로 사라지는 순간. 어린 소녀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그 사이에 스며들었다.
교수는 보르카가 놓고간 것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우리가 이겼어. 쓰레기 자식아.”
먼지가 가득한 바닥에 뒹구는 후작의 머리. 보르카의 손에는 원수의 수급 대신 힘을 잃은 계약서만 들려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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