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64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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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카는 무거운 마음에도 그의 발걸음이 빨라져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3층에서 2층으로. 원형 경기장으로, 다시 지하로.
어느덧 숨이 헐떡일 만큼 달려온 그의 눈에 담긴 것은 오래전, 지겹도록 봐왔던 풍경.
“….늑대인간인가. 푸우우! 무슨 생각으로밖에 있던 놈들을 재끼고 여기까지 내려왔는지는 알겠는데. 꺼져. 여긴 바깥 놈들이 올 만한 곳이 아니다. 우리라고 무식하게 밀고 나갈 수 없어서 여기 있는줄 아나.”
멧돼지 수인은 콧김을 내뱉으며 그의 옆, 문이 열린 나무 감옥을 가리켰다.
툭 치면 바스라질 것 같은 나무 창살. 노예 검투사들의 처지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이자, 그들을 위해 준비된 가장 모욕적인 거처.
노예 검투사는 경기장 바로 밑, 지면에 가장 가까운 곳에 기거하며 종종 탈출하는 맹수나 노예, 같은 검투사가 발생하면 제 손으로 우리를 부수고 나와 그들을 다시 감옥에 집어넣고,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감옥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채찍을 맞게 되니까. 반항의 대가는 죽음이었다. 발톱을 휘두르긴 커녕 눈을 마주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허무한 죽음. 계약서를 든 손과 말 한마디에 스러질 덧없는 목숨.
노예 검투사에 대한 모욕과도 같은 그 모습에 보르카는 그 앞을 막아서는 멧돼지 수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모습에 콧김을 뿜어내며 몸을 일으키는 수인과 달리, 보르카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그 앞에 들이밀 뿐이었다.
“고생 많았소. 당신들은, 이제 자유의 몸이오.”
“이건….”
수인(囚人)이자 간수인 그들이 관리하는 감옥. 나무 우리안의 노예 검투사밖에 없는 지하 감옥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팔락. 팔락. 팔락…. 팔락.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뒤지던 멧돼지 수인의 손이 멈추고.
“크후우, 크후, 푸흐! 마침내, 마침내!!!!”
그의 이름이 적힌 낡은 종이를 발견한 멧돼지 수인이 콧김을 뿜으며 그 종이를 마구 찢어발기는 것과 동시에.
우지끈!
우직!
“자유다!”
“계약서! 그 빌어먹을 계약서가 마침내!”
“크워어어억!”
계약에서 벗어난 노예 검투사들이 한없이 얇은 그 나무 우리를 뚫고 밖으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앞다투어 계약서 뭉치를 향해 달려가는 그들을 뒤로한 보르카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의 앞길을 비켜주는 검투사들을 지나, 아직 부서지지 않은 감옥앞에 섰다.
그의 발톱 자국이 가슴에 길게 난 늑대인간 하나.
그 옆에, 창백한 얼굴로 받은 숨을 내뱉는 늑대인간이 또 하나.
“투샨…. 마르카….”
우지끈!
얇은 우리를 한 손으로 뜯어내고 무릎 꿇는 그 모습에. 그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담긴 부름에. 그리고,
“베나드 팽. 설마 당신이…. 아니 그럴 리가. 분명 내 눈으로 그 마지막을….”
“아무 말도 하지 말거라.”
그 투기장에서 나눈 공방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향하던 알 수 없는 감정에.
텅빈 팔을 바라보며 입을 여는 투샨의 모습에 보르카는 말을 가로막았다.
아이들을 만나면 무슨 말을 가장 먼저 해줘야 할까. 숲을 나와 홀로 외로운 밤을 보내던 시절. 아직 희망을 품고 있던 시절에 수도 없이 생각하던 주제였다.
사과를 해야겠지. 내 잘못으로 부족 모두가 목숨을 잃고 너희들이 이 고생을 하게 했으니. 아니, 감사하다는 말이 더 먼저 나와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손에 잡혀간 너희가 이렇게 살아남아 준 것에, 모진 고초를 견뎌준 것에 감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귀밑머리를 쓸어넘기며 아이들에게 잃어버린 부모의 품이 돌아왔음을 알려줘야 할까.
몇 년을 생각하고, 고르고 고른 말들이 목구멍을 간질였지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첫 입을 때는 순간 사흘 밤낮을 그간 나누지 못한 이야기로 채울 것 같았지만.
“….가자.”
회색에서 은회색으로 새어버린 그의 털과 잘려나간 팔. 늙어버린 그의 얼굴과 그 손에 쥐어진 계약서가 그 모든 변명을 대신했기에.
보르카는, 하나 남은 팔로 아들과 딸을 그러안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15년의 갈망. 고통과 치욕을 넘어, 그 모든 것을 버려가며 바라온 단 한가지.
“살아….계셨습니까?”
“으으음…. 아, 아빠?”
그의 품에 안겨 어찌할 줄 몰라 하는 아들과, 눈을 뜨자마자 그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를 알아보는 딸의 모습. 그 순간, 보르카는 15년의 고통이 눈녹듯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녹아내린 고통이 그의 눈을 타고 흘러내렸다.
“돌아가자. 숲으로.”
보르카는, 마침내 그의 긴 여정이 끝났음을 선언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사무치게 그리운 숲으로. 다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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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보르카는 두 자식과 무사히 재회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딸 마르카를 등에 업고 아들의 부축을 받아 투기장 밖으로 향하더군요.”
“나도 먼발치에서나마 봤다. 아들이랑 되게 어색해 보이던데.”
“본의 아니게 목숨을 걸고 달려온 아버지의 팔을 날려버린 아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으로 판단됩니다. 듣기로는 ‘어머니를 닮아 고집이 새고, 행동에 머뭇거림이 없어 그 자리에서 꺾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라고 보르카가 설명하더군요.”
“웃기는 소리. 그냥 그 자리에서 ‘암 유어 파더~ 내가 니 아비다~’ 한마디 했으면 경기 자체를 파투낼 수도 있었을 텐데.”
반쯤 무너진 콜로세움의 옥상. 그 끝에 걸터앉은 교수는 겨울 바람을 맞으며 몰래 뒤따라갔던 이드라실의 보고를 듣고있었다.
“인간의 감정은…. 대단히 비논리적이고 복잡한 것 같습니다. 보르카는 다소 비겁한 수단을 사용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지막에는 그런 고집을 피워, 팔을 잃지 않았습니까.”
“당연한 거야. 15년간 제대로 이야기할 상대가 자괴감 쩌는 스스로 밖에 없었는데. 칡뿌리마냥 복잡하게 엉켜있겠지. 부족의 멸망을 앞당긴 죄의식도 있을거고. 그 없이도 장성한 아들의 모습에 너무 안심한 나머지, ‘이제 자유만 주어진다면 나 없이도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을 테고.”
안타까운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쪽 팔로 등에 업은 딸을 받치고 가는 녀석과 아들의 묘한 거리. 다른 팔이 남아있었으면 딱 어깨라도 슬슬 쓸어주며 갔으면 정말 그림이 좋았을 텐데.
“혹시 가는 길에 거치적거리는 건 없겠지? 탈출한 놈들도 잔뜩 따라붙었던데. 그건 뭐야?”
“쓰러진 동생 쪽이 약간 수인 검투사들의 정신적 지주…. 비슷한 역할을 한 것 같았습니다. 대단한 혈통의 계승자라고, 푸른 갈기, 뿌리가 어쩌고 하는 소리가 여럿 들리더군요.”
“흠….그래서?”
“아직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당분간 자유를 얻은 노예 검투사들이 함께 행동하기로 한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검투사들 간의 유대감이 깊더군요. 아직 분노가 남은 검투사들이 도시에 풀려났다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보르카도 그들과 함께하는 것을 결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좋아. 잘 됐군. 툭하면 빚을 졌다, 갚기 전에는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다 하는 수인들이 자유를 빚졌으니 앞로도 말 잘 듣겠지. 푸른갈기, 늑대인간에 위대한 혈통의 계승자라…. 로또를 하나 놓친 것 같지만, 떠나는 동료 앞에서까지 계산기를 두드릴수는 없는 법이지.”
교수는 보르카와 수인들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이나 바라본 뒤, 고개를 돌려 그 반대편. 빌데란트 후작가에서 우르르 몰려오는 성기사들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읏-차. 가실 분은 가셨으니 뒷마무리를 해볼까. 아, 이드라실. 고생했다. 수인들은 감각이 좋아서 몰래 따라가는 게 힘들었을 텐데.”
“별말씀을.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대모님한테도 꼭 그렇게 말해라. 누굴 보고 배웠느니, 뭐가 인상 깊었다느니 하는 소리는 절대로-”
“후훗. 말을 고르라는 말씀이지요. 저도 이제 그 정도는 압니다.”
결국 은신, 추적, 염탐이 취미이자 특기가 된 엘프의 입꼬리가 올라간 모습에, 이제는 웃을 줄도 알게 됐냐며 낄낄거리는 교수였다.
타닥!
“흐으응, 히이이잉! 콜록! 히끅!”
“그만 울어 이 녀석아. 애들 만났는데 우리가 더 붙잡아 둘 수도 없는 거 잖아. 남은 시간은 행복하게 해줘야지”
“그치만, 그치만….으흑!”
아래로 내려온 교수는 여전히 울고있는 루실라를 번쩍 들어 노툼의 품에 안긴 다음,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몸을 풀었다.
“자, 마무리합시다, 마무리! 그래도 제국 고위 귀족이 죽은 거니까! 재수 없으면 탈출한 수인 검투사들쪽에 제국이 추격대를 보낼 수도 있거든요? 마법 흔적 지워주시고. 남은 계약서 다 불태우고, 루실라랑 기타등등은 이제 여관으로 복귀해 주시고~ 이드라실, 그거 챙겼지?”
“예. 여기.”
교수는 이드라실이 내미는, 반쯤 깨진 ‘베나드 팽’의 투구를 피가 흥건한 후작의 방에 내려놓은 다음, 그의 몸에 깔려 죽은 용병들 중 하나의 옆에 놓고 힘껏 내리쳤다.
콰득!
교수가 찌그러진 투구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는 동안, 옆에서 중얼거리던 알드리치가 영혼 항아리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됐네. 죽은 자의 원혼은 다 갈 곳으로 되돌려 보냈으니 현장만 못 알아볼 정도로 망가뜨리면 사령술로도 누가 누구인지, 여기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을게야.”
“오케이, 굿! 자, 자~ 나갑시다 이제. 저는 교단쪽이랑 마무리하고, 이제 좀 쉬러 가자구요.”
“자, 잠시만요! 저….훌쩍! 할 거 있어요!”
팔을 부풀린 교수가 마지막으로 현장을 박살 내기 전, 노툼의 등에 업혀 훌쩍이던 루실라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치마를 걷었다.
“에잇! 나쁜 놈!”
퍼억!
그리고, 그 작은 발로 먼지투성이 후작의 머리통을 힘껏 차서 밖으로 날려버렸다.
“후우! 됐어요! 이제 가요!”
“어…. 음…. 그, 그래.”
저 아래에서 수박 깨지는 소리에 움찔한 교수는 작은 구두에 뭍은 피를 슥슥 문질러 닦는 루실라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콰앙! 쿠르르르르-!
그 마지막 일격에 아래쪽 기둥들이 휩쓸리며. 수많은 검투사의 피로 쌓아올린 콜로세움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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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 사각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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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행 경과 보고서]작전지역 : 발틴 제국 북서부. 속국, 이종족 도시 하우누만.
보고자 : 용사, 성자, 로하람 대표 이종족 화친 사절단장 교수.
목표 : 악의 정화.
주요 경과 :
1. 폭풍의 언덕 성녀 구출 및 인계 직후. 풍계 마법사들의 협조로 엘프 숲 행 바람 기구에 탑승. 운행 3일차, 불의의 사고로 불시착.
2. 추락 직후 재정비 중 ‘알 수 없는 빛의 인도’를 느껴 하우누만에 침투. 악이 그 뿌리를 감추기 전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접근하기 위해 검투사 ‘베나트 팽’과 공조, 투기 대회 참가.
3. 악의 정체를 확인 직후, 하우누만 교구와 협력하여 빌데란트 후작가 습격. 교적 ‘붉은 뮤트’와 조우 및 전투. 신속한 대응으로 교적에 적극 협력한 이하 478명을 제외한 민간인 피해 없음.
4. 치열한 전투 끝에 붉은 뮤트 패퇴. 이후 조사에서 후작가와 뮤테이션 블러드가 공조한 물증은 나오지 않았으나, 제국 암흑가와 매우 깊은 관계였던 것이 드러남(붙임 1, 2, 3 : 각각 노예, 마약, 제국 금지 물품 암거래 장부). 신성 통신을 통해 3황녀 측에서 즉시 움직일 것을 약속.
결 :
* 일련의 사건으로 교단은 하우누만 내 이종족들에게 협조적이고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였으며, 세대 교체가 빠른 오크, 수인의 특성상 과거 교단의 악행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에서 새로이 로 하람의 신자가 발생할 것을 기대할 수 있음. 이들에게 광명의 신성이 깃드는 것으로 로 하람의 이종족 친화 정책이 진실함을 증거하는 게 가능해졌음.
* 하우누만을 통치하는 8부족 중 하나인 빌데란트 가(家)의 몰락과 열린 갈비뼈 부족의 수장 ‘톨카누 바이틀’의 실종으로 하우누만의 혼란이 가속화될 것으로 추정. 교단은 일련의 사건을 큰 사상자 없이 정리한 공로와 ‘성자 교수’의 투기 대회 우승 권리까지 합쳐 혼란한 하우누만의 중재자 역할을 인정받음. 향후 교단의 세력을 넓히는데 다른 여섯 부족의 협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
* 초원 부족 중 상당수가 로드릭 왕국으로 터전을 옮김. 방어 전선에 매우 협조적일 것으로 기대중.
* 교적, 빌데란트 후작 사망. 붉은 뮤트 도주.
* 공조자, ‘피투성이 베나드 팽’ 사망. 라투라.
* 향후 용사대는 제국으로 이동, 악신 뮤테이션 블러드 퀸에 대항할 지원을 요청할 계획.
인류의 앞날에 광명이 가득하길.
라투라, 로 하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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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되게 오랜만에 쓰네.”
[무슨 보고서를 필요할 때만 올리냐.]‘솔직히, 이제 이거 써 올릴 짬은 지났거든. 그저 서류상에 공식적으로 올릴 필요가 있었던 것뿐이지.’
은은한 빛이 감도는 신전.
온갖 성물과 성상, 신성한 기타등등으로 장식된 자리에서, 교수는 최고급 깃펜을 내려놓고 보고서를 깔끔하게 접었다.
“여기. 이걸 본단으로.”
“예, 옛! 성자님!”
하우누만 교구. 어느새 주교의 집무실 만큼이나 신성하게 꾸며진 손님용 별채에서 눈처럼 새하얀 법복을 입은 교수는 교단으로 보낼 보고서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콜로세움의 붕괴와 함께 그 앞에 이정표처럼 떨어진 후작의 깨진 머리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했고, 소문은 삽시간에 하우누만을 넘어 제국에 닿았다.
‘제국 애들이 일처리 하나는 빨라서 좋아.’
[그러게. 로드릭 같았으면 감찰관 도착하는데 일주일은 더 걸렸을걸.]마침 가까이 있었는지, 아니면 미리 동태를 살피고 있었는지 그날 저녁에 벌써 도착한 제국의 감찰관들.
마법사와 함께 도착한 그들은 누군가 뱉은 침과 흙으로 마구 더럽혀진 후작의 머리를 챙긴다음, 콜로세움의 무너진 잔해와 개박살난 후작영지를 뒤지며 사건의 전말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내고자 애썼다.
그 철저한 조사 덕분에 후작의 비리와 악행, 그 모든 것들이 호박 넝쿨마냥 줄줄이 얽혀 올라왔으며.
한참 조사를 진행하던 감찰관들은 별안간 제국에서 온 편지를 받더니 ‘이 이상 조사할 필요는 없겠소.’ 같은 소리와 함께 황급히 영지를 떠나버렸다.
[외압이겠지?]‘그렇지. 진짜 뿌리까지 캐면 황자에, 황비까지 얽혀 들어갈 치부를 그냥 두고 볼 리가 있나. 아마 후작가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으로 꼬리를 자를거다. 수도에서 호의호식하고 있던 빌데란트 후작가 사람들만 잔뜩 죽어나가겠지. 이단 행위에 대한 물증이 없어서 화형은 안 당하겠지만.’
참고로 교단의 성기사들은 무너진 콜로세움에서 후작의 시체로 추정되는 것을 악착같이 모으고, 떠나는 감찰관들을 윽박질러 거의 너덜너덜해진 머리를 받아낸 다음 그것을 정성스럽게 기워서 끝내 화형대에 올려버렸다.
‘보고 갔으면 참 좋아라 했을텐데.’
[늑돌이. 기억에 오래 남길만한 친구였지.]사박, 사박, 사박.
교수는 맨발로 별채에서 신전을 향하는 그의 발앞에 뿌려지는 꽃잎과, 귀족 부인 드레스 저리가라 할 정도로 뒤에 길게 끌리는 법복과 그것을 받드는 초롱초롱한 눈의 사제 무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 요란한 행렬의 끝에 주교앞에 당도하자, 사람들을 물린 주교가 환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익숙하지 않으셨을텐데.”
“익숙하지 않은 것을 넘어 수치스러웠다. 성자를 수치사(羞恥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면 거의 근접했다고 하겠어.”
“하하하하. 그래도 저들에겐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 저 신도들은 거대한 교적을 맨몸으로 물리친 성자님을 모셨음을 매일같이 자랑할 겁니다. 당신의 이름이 울려 퍼질 때마다 그 뿌듯함을 떠올리겠지요. 그 꽃을 밟고, 치렁치렁한 옷을 입는 것으로 그들에게 유구한 행복을 선사하셨으니. 작은 불편함 정도는 감수할만하지 않습니까?”
“작은 불편함이 아니니 그렇지. 어쨌든 그쪽 요구를 모두 이행했으니, 이제 내 부탁이 어떻게 됐는지 들어볼 수 있겠지.”
투덜거리며 주교가 내민 수수한 법복으로 갈아입는 교수의 모습에, 주교는 다시 한 번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신도들에게 맞춰달라는 것은 그냥 해본 소리였습니다. 성자님 말씀인데, 당연히 들어 드려야지요. 두 시간 전에 교단의 그림자들로부터 일을 완수했다는 통신을 받았습니다.”
“그럼…. 탈출한 수인 노예들의 기록은 이제 없어진 건가?”
“예. 글쎄, 계약마법사들의 거처에 공마석 수레가 엎어졌다지 뭡니까? 마법 계약을 기록하는 창고에 공마석이 우르르 쏟아졌다고 하니 아마…. 남아있는 기록이 없을겁니다.”
계약 마법사의 기록. 그것은 보르카의 두 아이를 포함한 탈출 노예들의 행방을 추측할 마지막 증거였다. 투기장의 주인과 그 거래자가 죽고, 그들의 소유물이었던 노예의 계약이 갑자기 대거 해지되었다면?
그 둘의 살인에 노예 검투사들이 얽혔으리라 추측하기 그리 어렵지는 않을테니까.
노예 기록이 한두 개가 아니니 찾는데 시간은 좀 걸렸겠지만, 그냥 뒀으면 언젠간 수면에 떠올랐을 것들이라 교단에 부탁해서 마지막까지 확실하게 처리하기로 했다.
“그럼…. 이제 가봐야겠군. 일어나지 마시오. 그냥 조용히 갈테니.”
“예. 바쁘신 분이니 붙잡고 있을수야 없지요.”
언제 치수까지 제 놨는지 몸에 잘 맞는 법복을 입은 교수가 등을 돌리자, 조용한 인사로 그를 배웅하던 주교는 문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에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성자님. 그거 아십니까?”
“무엇을?”
“70년 전. 성녀님을 잃고 저희 교단은 등대를 잃었지요. 앞길을 일러주시는 그분의 목소리가 없기에. 한걸음, 한 걸음을 살얼음 위를 걷듯. 혹여나 그 길이 타락으로 향하는 길이 아닐까 두려움에 떨며 나아갔습니다.”
수수하지만 경건한 주교의 집무실. 일련의 사건에 치여 며칠째 잠도 못 자고 업무를 수행하던 주교는 자리에서 일어나 깊게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이제는 망설임 없이 나아갈 수 있게 됐습니다.”
“….성녀님이 없는 것은 변함이 없는데?”
“길을 일러주시는 성녀님은 없지만, 잘못된 길을 가는 그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일러주실 성자님은 가지고 있으니까요. 부디, 가시는 길에 광명이 가득하시길 빌겠습니다. 라투라.”
“….라투라. 로 하람.”
끼이이익-
교수는 깊게 허리숙인 주교에게 마주 고개를 숙인 다음, 일행이 기다리는 마차를 향해 성큼성큼 발을 내딪었다.
주교는 그 화창한 햇살 사이로 사라지는 성자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아주 오래토록 전송했다.
경건한 모습이라곤 하나 없이 직접 수레를 끄는 그 모습에 너털 웃음을 터트린 주교는 자리에 앉아, 이제 막 첫 말머리를 뗀 종이위로 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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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을 잃고 오랜 암흑속을 헤맨 우리 앞에 빛이 당도했으니. 태양처럼 찬란하고 모닥불처럼 따스한 그 성자의 이름앞에 다시금 광명의 역사가 움직이기 시작함이라. 하여, 신의 인도가 없어도 여전히 그분을 섬기는 광명의 역사를 이 책자에 기록하니. 그 칠흙같은 앞날을 밝힌 이의 거룩한 이름은 교수. 두 손으로 어둠의 가시덤불을 헤치는 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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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는, 성녀를 잃은 교단의 역사를. 신의 음성이 아니지만 스스로 길을 헤메며 나아가는 교단의 역사를 모두 기록하기로 했다. 과거에는 그것이 교단의 치부를 기록한 서글픈 책자가 될 것 같아 망설이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끝이 저 광명에 조금이나마 닿을 것을 알기에.
사각사각.
펜을 놀리는 그 손끝에는 거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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