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end of the world, Cry Clear RAW novel - Chapter 266
Chapter. 14. 제국 하나, 전설 셋(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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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도련님! 찬 바람을 쐬시면 안 된다니까요!”
“으으으…. 한 번만 봐줘, 마사. 요즘 밀랍인형처럼 흐물흐물 녹아버리는 기분이란 말이야. 벽난로에 땔감을 카펫이 그을릴 정도로 쌓아놓고 내 머리맡에 화로까지 두다니. 생선처럼 눈이 하얗게 익어버리겠다구. 텔드마이어 가의 후계자가 장님이면 좋겠어?”
“기침병에 걸려서 풀무처럼 색색거리는 것보단 그게 좋을지도 모르죠.”
달칵!
땀을 뻘뻘 흘리던 알드리치는 단호하게 창문을 닫는 유모의 손짓에 인상을 찌푸렸다.
“쳇. 눈이 이렇게나 오는데 정원에도 나갈 수 없다니.”
“어차피 겨울 정령의 춤은 도련님 성인식이 다 지날 때까지 끝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도련님은 몸을 추스르는 데만 전념하세요!”
“그냥 목에 침이 걸린 것 가지고 다들 유난이야. 쳇!”
알드리치는 창밖에 까르륵 웃는 소리와 눈을 헤치는 소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살 어린 네리아도 저렇게 뛰어노는데 이제 성인식을 앞둔 오라비가 기침 한번 했다고 드러눕다니. 물론 힘도 좀 빠지고, 머리도 약간 어지러운 것 같지만 그는 텔드마이어가의 작위를 이을 후계자가 아닌가? 휘파람 같은 눈발에 가문의 후계자가 드러누웠다고 소문이라도 난다면 가문의 위상에 먹칠하게 될 것이다. 아버지처럼 존경받는 영주가 되는 게 꿈인 소년 알드리치에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사자처럼 떨치고 일어나서, 말처럼 뛰어다녀야지! 그리고 네리아보다 더 큰 눈사람을 만드는 거야! 겨울 정령이 춤을 멈추고 모자를 들어 보일 만큼 커다란 눈사람! 가문의 사용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아! 저 대단한 눈사람을 만든 게 우리 도련님이구나, 하시겠지!’
상상만 해도 발끝이 들썩거렸다.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네리아와 눈밭에 뒹굴고 싶었고, 그러려면….
“자. 아~ 하세요. 아아~”
저 벽난로와 화로로도 모자라 뜨거운 수프를 먹이려는 유모를 지나쳐야 했다. 유모, 메이나는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부터 그와 네리아를 돌봐온 유모였고 그 펑퍼짐한 품만큼이나 애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가끔 그 애정이 과보호로 변하는 것이 문제지만.
뜨거운 수프를 후후 불던 메이나는 알드리치의 시선이 여전히 창밖을 향하는 것을 보고 단호하게 말했다.
“기침병을 무시했다간 큰일이 난답니다? 제 사촌은 나무를 해서 먹고사는데, 겨울에도 나무를 하다 겨울 정령의 치마폭에 휩싸여서 그만 기침병에 걸리고 말았지 뭐에요. 세상에, 그 통나무처럼 건강하던 수염쟁이가 침대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피를 뱉는데…. 결국 딸 결혼식에 쓰려고 모아둔 돈으로 사제를 불러야 했다니까요?”
“그럼 우리도 사제를 부르면 되잖아. 가문 창고에 평민 결혼식 비용만큼의 돈이 없을 리도 없고.”
“그…. 아시잖아요. 저희 가문은 교단이랑 사이가 조금…. 어려운 거. 보나 마나 기부금을 잔뜩 요구할 테고, 가주님도 사제라면 치를 떠시는 분이라 아마….”
“어휴, 됐어. 다 먹으면 보내주는 거지?”
알드리치는 또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메이나의 말을 끊으며 그 품에 있던 수프 그릇을 뺏어 들었다. 생각보다 뜨거운 그릇에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지만, 가문의 후계자 다운 참을성으로 그릇을 놓치지 않고 숟가락을 들었다. 뜨겁고 매운 향신료가 잔뜩 들어간 매운 수프를 욱욱거리며 입에 끌어넣는 알드리치의 모습에, 완고한 메이나도 결국 그의 외출복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콜록!”
어린 주인의 작은 기침에 저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메이나는 내색하지 않으며 사레들린 주인에게 손수건을 내밀 뿐이었다.
사용인들 사이에 도는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 애써 불안한 마음을 삭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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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 어~엄~청 크다!”
“헤헤. 그렇지? 이 정도면 겨울 정령님이 그냥은 못 지나치지 않을까?”
“응응! 정말로! 어쩌면 봄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춤을 신청할지도 몰라!”
“히히히. 그럼 안 되지. 파트너를 잃은 봄님이 우울해하면 따듯한 봄 햇살 대신 차가운 비만 주룩주룩 내릴 테니까.”
“어…. 그럼 어떡하지? 내가 대신 춤이라도 춰 줄까?”
알드리치는 두툼한 겨울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는 네리아의 모습에 흐뭇해하며 빨갛게 물든 코를 훔쳤다.
초대 가주님 동상만큼이나 크게 만들어진 눈사람. 물론 중간부터는 옆에 있던 호위 기사들이 눈덩이를 굴려줬지만, 처음 작은 눈 뭉치를 만든 게 그이니 결국 그가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도련님, 아가씨. 인제 그만 들어가시지요. 백작 부인께서 많이 걱정하실 겁니다.”
“괜찮아! 세드릭 경! 어머님께는 내가 잘 말하면 되니까, 조금만 더-”
“아, 그리고 도련님이 나오실 때 메이나가 주방에 들어가는 것을 봤습니다. 분명, 어제 달콤한 호박이 많이 들어왔다고 했지요.”
“-더어…. 노는 것도 좋지만, 네리아가 기침병에 걸리면 안 되니까. 네리아는 여자애고, 나보다 두 살이나 더 어리니까 기침병이 걸리면 큰일 난다고. 이제 그만 들어갈까?”
알드리치의 은근한 말투에 네리아의 빨갛게 익은 얼굴이 정신없이 끄덕여졌다. 메이나가 만들어주는 호박파이. 귀족은 식사시간 외에 배를 퉁퉁하게 불리지 않는다고 하며 잘 해주지 않는 턱에, 알드리치는 더욱이 가주 자리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곤 했다.
‘내가 가주가 되면 매일, 아침 점심 저녁은 물론 티타임 간식으로, 야참으로도 파이를 만들어 달라고 해야지!’
따듯한 파이를 상상하며 달려가는 소년과 소녀의 입가에는 행복한 웃음이 가득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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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우우우-
쿵!
무거운 나무문이 닫히고, 따듯한 온기 속에 버터가 잔뜩 들어간 빵과 달큰한 호박 냄새가 섞여들 때쯤.
“뭐야, 다들 어디 갔어?”
평소 같으면 득달같이 달려와 겉옷을 받아줬어야 할 하인들의 부제에 알드리치는 툴툴거렸다.
따듯하고 건조한 공기. 부드러운 파이 냄새. 굵은 촛대 덕분에 눈보라 속에서도 환한 성의 전경.
그가 나고 자란 평소의 성과 같은 모습이 분명하지만 알드리치는 어딘가 모르게 이질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인들 대신 기사들이 눈에 젖은 겉옷을 받아주는 사이, 곰곰이 생각하던 알드리치는 뭐가 없는지를 깨달았다.
“오스왈드! 편지 담당인 오스왈드가 없네! 늙은 오스왈드는 아직 안 돌아온 거야? 기침병이 심해?”
“그, 예.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다 보니 몸이 허약하여.”
“그렇구나. 그렇지. 아프면 푹 쉬어야지. 그럼…. 홀 담당인 유니는? 허전하다 했더니, 이 시간이면 깃털 달린 총채로 현관을 털고 있어야 할 유니가 없었네.”
“….그녀는 고향에 일이 있다 하여 잠시 돌아갔습니다.”
“유니도? 그럼, 애스티아는?”
“병가입니다.”
“고빈?”
“말 뒷굽에 차여….”
“데릭? 수잔? 파드셀?”
“….따듯한 물이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식전까지 씻고 오시지요.”
익숙한 사용인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봤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대부분 같았다. 병에 걸리거나, 눈밭에 구르거나, 집에 일이 있거나, 아무튼 어떤 이유로 성을 떠났다.
그가 지난 이틀간 침대에 누워 활활 타오르는 난로와 씨름하는 사이, 겨우 이틀 사이에 모두들 떠나버린 것이다.
“오빠….”
낯선 적막함에 불안해진 네리아가 그의 옷깃을 잡았다.
‘….떨지 마. 넌 텔드마이어 가의 후계자잖아!’
사실 알드리치도 당장 어머니 품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당장 이 주 뒤, 열네 살 생일 날이면 예비 성인식을 치르고 사교계에 데뷔하며, 열네 달 뒤에는 열다섯 살이 되어 배필을 찾아야 할 다 큰 어른이라는 생각이 발목을 붙잡아 겨우 멈출 수 있었다.
“….가자, 네리아. 씻고 오면 따듯한 호박파이를 먹을 수 있을 거야.”
“으, 으응….”
덜컹, 덜컹!
휘우우웅-
거세어져가는 눈보라에 튼튼한 창문이 덜컥이고 이상한 바람 소리가 성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그 소리에 발끝을 꽉 오므린 알드리치는 욕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당분간 침대에 누워만 있어도 나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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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라…. 그런 식으로 신전과 사이가 안 좋은 귀족이 많습니까?”
“의외로 꽤 된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70년 전쟁으로 교단의 세가 많이 약해져 있던 시절에 교단을 도구처럼 부려먹은 귀족이 꽤 많았잖나. 여러 교단이 힘을 회복한 지금 그들에게 협조적이지 않은 것은 당연하지. 우리 가문도 크고 작은 영지전이 있었고, 으음…. 당시에는 저렴하고 효율 좋은 용병처럼 여겨졌으니. 우리 가문도 강압적인…. 방법으로 신관을 고용했지. 제법 원한이 쌓인 그들은 큰 부상을 입은 당시 가주님의 아들을 치료하길 거부했고, 그 길로 완전히 관계가 틀어져버린 게야.”
“어, 잠시만요 알드리치. 아무리 신전과 가문의 사이가 안 좋다고는 해도, 집안이 그 꼴이 나는데 가주님이 사제를 부르지 않았다구요? 그건….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닌가요?”
“당시 상황이 좀 그랬어. 그해 여름에 작물이 영 시들시들해서 풍요교단에 축복을 요청했는데 그들이 거부했거든. 대노한 아버지는 사제들을 추방하고 신전을 허물어버렸지. 그 일에 또 화가 난 풍요 교단에서 텔드마이어 가문의 횡포를 성토하고. 교단과 사이가 좋은 몇몇 가문에서 우리 가문을 헐뜯고. 그렇게 일이 복잡하게 꼬여가는 가운데 가을 작황까지 시원찮으니 아버지의 종교계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이 극에 달하게 된 거야. 아버지도 오래전부터 그 문제를 해결하고 잘 해보려고 노력은 하셨지만, 그때마다 오히려 일이 꼬이는 바람에 그 겨울의 그 지경까지 가게 된 것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얄궂은 일이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때 신관을 바로 불렀다면, 단 한 명의 성직자라도 왔다면 지금쯤…. 으음.”
교수는 알드리치의 이야기에서 어렵지 않게 스페인 독감, 폐렴 같은 기침을 동반한 전염병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는 사제 덕분에 의료 분야의 성장이 민간전승에 국한된 세계.
튼튼하고 묵직한 성의 나무문이 덜컥일 정도의 눈보라였다면 평소보다 성 내부가 더 추웠을 것이고, 귀족에 비해 추운 방에서 자는 사용인들부터 몸이 안 좋아지는 게 당연했다.
“하루, 이틀…. 시간이 갈수록 사용인들이 자꾸 사라지더군. 어딜 가나 바쁘게 종종걸음치던 하인들이 어느새 모습을 감췄어. 심각한 얼굴의 아버지가 기사 한 명을 시켜 ‘납치를 해서라도 사제를 데려오라’ 고 명령하셨지만, 눈보라 속으로 사라진 기사는 그대로 이틀이 되도록 소식이 없었지.”
휘우우우-
낮고, 조용하며 음산하기까지 한 알드리치의 목소리에 루실라는 괜히 소름이 돋은 팔을 쓸었다.
“그…. 어느 정도 기사였죠? 오러를 사용하거나….”
“아니.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인근에서 나름 검술로 이름을 떨치던 기사였던 것은 기억나는군. 두터운 겨울옷을 입고 눈보라 속으로 사라지는 그 모습이 꼭 곰 같았지. 말을 탄 곰. 그 일렁이던 기름 등의 불빛이 눈보라 속으로 사라지고, 다시 그를 보게 된 것은 그로부터 삼일 뒤였어.”
기사가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날 그는 그를 찾으러 나선 아버지와 기사들과 함께 성으로 되돌아왔다. 다리가 부러진 말과 함께 꽁꽁 얼어붙은 시체가 되어.
알드리치는 이 성에서 열두 번의 겨울을 넘겼지만, 그해 겨울은 평생에 한 번도 겪어본 적 없을 정도로 사납고, 추웠다. 사나운 바람에 작은 창문이 떨어져 나가고, 성안에 나무 판자로 창문을 틀어막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질 무렵. 아버지는 내성 밖으로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눈발이 잦아들길 기다리기로 했다. 다행히 땔감은 넉넉했고, 사람이 줄어든 덕분에 식량도 넉넉했다.
알드리치는 그날의 기억과 함께 떠오른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최고급 마차 내부는 충분히 따듯했지만, 그 나무 벽 바깥에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만으로도 알드리치의 몸은 떨렸다.
“그렇게 닷새가 지나갔어. 성안에는 묘한 불안감과 함께 침묵이 성의 복도를 떠돌아다녔지. 다들 애써 진정할라치면 뭔가 사건이 일어났어. 이상하게 자꾸 유리나 접시가 깨지고, 식칼을 제 손처럼 다루던 주방장이 고기 대신 제 손가락을 찍어 성안을 끔찍한 비명으로 가득 채우는가 하면, 복잡한 창고를 눈 감고도 제집처럼 나다니던 늙은 하인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 걸려 넘어지며 기름통을 엎기도 했지. 덕분에 우리는 활활 타는 기름 등 대신 비상용으로 성탑에 쌓아둔, 오래되고 냄새나는 굵은 양초로 성을 밝혀야 했어. 성안은 끔찍할 정도로 조용했지만, 동시에 끔찍한 불협화음으로 가득했지. 뭔가 깨지고, 누군가 비명을 지르고, 갑자기 문이 쾅 닫히고.”
침묵을 찢어발기는 소리들은 불안한 사람들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혀 들었다. 다들 뭐가 뭔지 몰랐지만,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춥고, 어둡고, 음산한. 일렁이는 촛불의 그림자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농도 짙은 불안함이 쌓여가는 가운데. 여전히 눈발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기약 없는 고립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쌓여가던 불안을 다른 무언가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여전히 그와 네리아에게는 ‘아무 일 없다. 불안할 필요 없다.’는 말만이 그들의 몫인 양 던져졌지만 두 남매는 확신하고 있었다. 뭔가 잘못됐다. 갓난아이가 우는 사람 옆에 있으면 따라 울 듯, 그냥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사라진 공간이 그저 빈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뭔가, 한기와 침묵을 그러안은 무언가가 그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음을.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그 날.
9일. 숯으로 벽난로 위에 그어놓은 성인식까지의 빗금이, 단 다섯 개만 남았던 날.
쿵, 쿵쿵!
하인들이 밤새 얼어붙은 문을 두들겨 여는 소리에 알드리치는 잠에서 깼다.
밤새 악몽에 시달린 덕분에 땀에 젖은 옷이 축축했다. 손으로 문질러 지운 그림같이 흐릿한 꿈. 알드리치가 목구멍까지 차오른 울음을 꿀꺽 삼키고 설렁줄을 당기려던 그 순간.
벌컥!
“으, 으아아악!”
얼어붙은 문이 하인의 튼튼한 어깨에 벌컥 열리며 창문 아래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창가로 달려간 알드리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침 햇살에 눈부신 설원과, 그 하얀 도화지 위에 물감처럼 빨갛게 물든 눈이었다.
“에, 에머슨! 에머슨이…. 죽었어!”
돌처럼 꽁꽁 얼어붙어 문 앞에 쓰러져있는 시체.
피와 손톱자국이 가득한 두꺼운 나무문. 매끈한 눈밭 위에 거칠게 그어진 붉은 길은 죽은 자가 살기 위해 그곳까지 기어왔음을, 차게 식어가는 몸으로 굳게 닫힌 문을 얼마나 애타게 두드리고, 긁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어줘… 열…줘! ….발…. 고싶지 않….’
알드리치는 간밤에 악몽이라 생각했던 소리가 악몽이 아니었음을. 바람에 흔들리던 문이 바람에만 흔들린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명소리에 달려 나온 기사가, 그의 얼어붙은 등에서 짧은 단도 하나를 뽑아냈으니까.
누군가, 저 하인의 등 뒤로 다가와 칼을 찔러넣고, 차가운 밤의 눈 폭풍 속으로 그를 내몰았다.
이 성에 있는 누군가가, 사람을 죽였다. 그것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간밤의 그 소리가 악몽이 아니었다면.
‘….히히. 흐히…..히. 다…죽어…. 모조리…. 한….도 빠짐없…. 히히히히히힉힉힉…’
죽어가던 하인은, 도대체 무엇을 봤기에 그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웃었을까.
알드리치는 이불에 머리를 묻었다. 귀를 틀어막아도, 그 꿈결 같은 불길한 웃음소리는 귓가에 계속 메아리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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